2015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헌금
2015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헌금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5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헌금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을 바치라 할 때 거기에 관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적인 실적을 주시기 위해서 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현실관이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 자체에서 반드시 잘못된 현실관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바치면서 뭔가 내가 기대하는 실질적인 실적을 원한다는 마음을 몰랐을 건데 주께서 바치라는 순간 주님이여, 헌금 모아왔습니다. 예배당 지어 하나님께 헌당하겠습니다, 하는 잘못된 현실관이 노출된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그래서 구약 때 하나님께서 뭘 하라, 바치라, 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그게 굉장히 어떤 의미에서 나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충성, 봉사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자랑질 할 수 있는 찬스로 보는 거예요. 십일조 하라니까 십분의 일 내면 되니까.
그래서 그들은 내가 행위로 말미암아 기대할 수 있는 그 동그라미, 권력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현실이다. 나의 현실관과 일치되는 현실이라고 단정 짓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너는 처음부터 네 자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어, 라고 티를 내는 방식입니다. 내가 명령을 함으로써 그 명령에 행위, 실천으로 따라올 때 포착되는 것이 인간의 숨겨진 우상성을 발취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기에 네가 우상이다.
하나에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후서에도 나오는데 고린도후서 9장하기 전에 먼저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안 해서 죽었습니까, 속여서 죽었어요? 속여서 죽었지요.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헌금할 마음이 없었으면 죽었을까요, 안 죽었을까요? 안 죽었지요. 괜히 나대다가 죽었어요. 어쭙잖게 충성하다 죽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처음부터 백만 원 내겠다고 해서 백만 원 내면 안 죽었어요. 처음에 이백만 원 내겠다고 생각하다가 둘이 의논해서 깎아서 백만 원 낸 게 액수와 상관없이 죽게 된 겁니다. 그러면 헌금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너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헌금하는 겁니다. 따라서 너는 죽음이란 벌을 받아야 될 인간인데 내가 죽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준 너 말고 다른 너를 상정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9장에 나와요.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6,7절)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은 진짜 하기 싫거든 헌금하지 마라. 진짜 네가 헌금 안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 같은 게 무슨 헌금을 해요. 돈만 사랑하는데, 라고 해서 헌금을 안 했다면 최고의 믿음 있는 사람이에요. 주제파악이 되니까. 그러나 인간이 뭔가 하나님, 이건 기뻐서 드리는 겁니다. 또는 더 건방지게 성령께서 시켜서 드리는 겁니다, 라고 말을 붙이면서 드리게 되면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뭘 유발한다? 가시적인 실적을 유발해요.
이 교회 내가 십 년 다녔다. 그동안 통계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세 번째로 많을 걸? 따라서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장로 세 명 뽑는데 나는 반드시 들어가야 돼. 이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노골적으로는 안 해요. 그런데 네 번째로 걸려서 떨어지고 난 뒤에는 씩씩거리면서 이야기해요.
여자가 남편 두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남편을 두고 자기와 경쟁하진 않아요. 남편이 자기 것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여자가 내 것이라고 덤벼들 때는 질투가 생기잖아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처음부터 질투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있었지요. 그게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숙성되지 않았을 뿐이지 있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어느 수명을 끊어서 죽어도 모가지 끊으면 죄가 나옵니다. 나이가 팔십이 되든 오십이 되든. 공자는 오십에 뭐 나오고 육십에 뭘 보았고. 보기는 뭘 봐요. 모가지 끊어보세요. 죄 나오지. 어디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도인된 것처럼 착각하지만.
공자가 이랬으면 좋겠어요. 공자가 이십 대에 하늘을 보고 이러지 말고 나는 십대에 폭탄 만들었고, 이십 대에 기관총 만들었고, 이랬으면 동양이 서양을 이겼을 거예요. 얼마나 실용적이에요. 다시 말해서 동양은 서양보다 솔직하지 못해. 늘 감추기 급급하고. 특히 여인의 인생이란 참아야 하고 감추어야 되고. 그냥 남편을 사랑하더라도 옷고름 물고 흥하고, 이 모습만 하고 그게 사랑의 다고.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편은 갑질해야 되고 여자는 을이라는 지위에 있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되고. 그래야 가정이 평화롭다는 거예요. 그 평화는 누굴 위한 평화란 말입니까? 남자를 위한 평화지. 남자 현실 중심이에요.
결국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교, 유대교라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에요. 문화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문화의 주체자, 종교 행위자로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죽은 자리에서 구원이 일어나지 산 자는 구원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 거룩은 죄에서 만들어지지 죄 바깥에서 의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죄로 죄에서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성취되는 대목과 언약이 없는 대목을 구분해서 언약이 섞여진 것을 거룩이라 하고 언약이 없는 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이런 걸 드렸는데 드린 것으로 성막 만드는 거죠. 그러면 텐트만 치면 끝나는 겁니까? 그럼 드린 것으로 뭘 만드는가? 11절 보세요.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 이걸 왜 만들어야 됩니까? 중심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다고 했지요. 이런 게 있어야 중심이 됩니까, 이것 없으면 중심이 왜 안 됩니까? 중심은 어떤 기능을 반복돼야 되지요. 그 기능이 뭐냐? 결국 제사 기능을 반복하기에 소요되는 모든 기구가 이것이다. 이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문제는 이거에요. 그 기구와 죄인을 주께서 바꿔치기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인간이 만든 물체와 인간과 바꿔치기한다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지난 우리교회 낮 설교에서 제가 언급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떡과 잔이 상징이다. 이 떡은 내 몸이요,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린 피라고 할 때 사람들은 떡과 잔을 상징으로 봤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해석이 잘못돼있고 플러스해야 돼요. 떡과 잔을 먹는 내가 상징과 동등이다. 동류다. 같은 종류라고 해야 돼요. 내가 그렇게 돼야 돼요.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내가 그 살과 그 피를 먹으면 주님의 살과 피를 일단 먹게 되면, 섭취, 이건 내 소유가 돼버려요. 그게 인간이 자기가 상징인 걸 모르고, 상징의 반대가 리얼리티, 실재라 하는 거예요. 내가 진짜 내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손에 만져지는 세포 60조 개 이게 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주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과 떡이 상품화 돼있어서 마트에서 구입해서 영양제 먹듯이 식후 30분에 먹어줘야 영생이 되는 셈이 돼버려요. 왜? 자기 빼놓고는 다 상징이기 때문에. 자기만이 실재고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상징이라는 것은 상징이 상징을 위한 법은 없거든요. 태극기는 대한민구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태극기가 태극기의 상징은 아니지요. 맞지요? 태극기가 태극지의 본체가 되고 상징이 된다면, 옛날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태극기를 막 밟으면 마라도에 있는 아줌마가 아파야 돼요.
장희빈과 다투었던 중전이 누굽니까? 인현왕후가 있어요. 장희빈이 바보도 아니고 라이벌 여자가 죽으라고 짚으로 조잡하게 만들었어요. 좀 예쁘게 만들면 안 되는지 모양도 없이 만들어놓고 화살로 쏴요. x년아 죽어라, 하면서 쏩니다. 코미디도 아니고 말도 안 되지요. 실재 몸체는 따로 있고 짚으로 만든 그것은 상징이잖아요. 그게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영화에 보면 더 웃기는 이야기가 있어요. 장희빈이 새벽 2시에 쐈거든요. 그 순간에 왕후가 양궁도 아니고10점 만점 부위에 맞고 아파서 누워요. 그걸 흑마술이라 해요.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이 흑마술을 사용하는 겁니까? 인간들은 장희빈 못지않게 어리석어요. 천주교에서 그 상징물로 안 되니까 흑마술 쓰는 거예요. 성당에서 납작한 떡과 포도주, 포도주 남은 것은 신부가 다 먹고. 다른 사람은 먹으면 안 돼. 자기는 주님의 동업자기 때문에 한 방울도 평신도한테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뭐 장희빈도 아니고. 주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그 순간에 떡이 주님의 살로 변하고 잔이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는 겁니다. 천주교는 아예 그것보다 더 나가지요. 변하기 전부터 주님의 살과 피라 하고, 루터와 개신교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순간 변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너, 죄인이야.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성령은 십자가 앞장세워서 죄인 만드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게 성령의 일이지 무슨 흑마술 쓰는 게 성령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신기한 호기심을 들어주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으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이 이야기하기를 너희는 기도할 바를 몰라. 아버지 뜻을 아는 내가 성령이 대신 기도함으로써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구원이 성취된다 이 말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성령께서 일하시기 전에 반드시 우리를 책망해요. 네가 하기는 뭘 해. 너는 네가 예상한 가시적인 실적과 업적을 미리 당겨서 그걸 기대하고 소망으로 삼을 뿐이지 실제 네가 여백에서 잉여에서 채워질 진짜 내가 모르는 현실이 어떤 현실인지 네가 알아? 그럼 성령님은 아십니까? 알지. 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있기 때문에. 앞으로 채워질 모든 것은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있어요.
목사님, 연관 되어서 뭘 할 건데요? 연관돼있으면 교회 나오는 것만 감사가 아니라 집에서 빨래하는 것도 감사지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 녹취를 누가 했는지 몰라. 주께서 겟세마네 기도한 것 커닝해봅시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기도했는지.
17장 1절에,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아버지여, 이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 맞지요?”라고 확인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확인이고 고배이에요. 뭘 추가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바치고 순교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붙어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왜 붙여줬는가? 9절에 보니까,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어떻게? 내가 나 된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교회 가는 것뿐만 아니고 설거지하는 것, 빨래하는 것, 내 몸이 멀쩡하거나 아프거나 어떤 경우라도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계획과 연관되어 일어나야만 할 사건이었고 사태였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건의 그물망에 놓여있는 객체입니다. 주님은 주체고 나는 사지, 또는 팔다리고 지체입니다.
이건 누구 영광입니까? 오직 나의 있음으로 인하여 주의 있음을 영화롭게 하는 그 관계성이 바로 하나님이 만들고자 했던 헌금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대하는 가시적 실적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내 자신부터 날아가는데 모가지부터 다 날아가는데 무슨 엉뚱한 다른 현실을 꿈꾸겠어요. 그 꿈마저 구겨버리는데. 꿈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묵살내고. 꿈을 없애버리거든요.
꿈이란 항상 과거의 연장이 아니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과거의 연장은 주님만 아시는 현실이고 우리는 현실은 모르고 과거가 내 육신에 의해서 재평가 받은 기억이 돼요. 기억은 과거의 일부지요. 그것도 왜곡된 일부가 되는 겁니다. 전에도 예를 들었습니다만 당신이 올 때 가로수 나뭇잎이 몇 개입니까? 그걸 헤아리며 올 이유 없잖아요. 심지어 가로수가 있기는 있었어요? 가로수가 있었고 나뭇잎이 있었지요. 그런데 나는 모르지요. 내 기억 속에는 없는 거예요. 분명히 가로수 밑을 지나왔어요. 내 어깨에 낙엽이 떨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전두환처럼.
결국 인간의 꿈이란 일방적인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억지로 현실에 납득되도록 편집한 소설이 꿈이에요. 꿈에는 원래 스토리는 없어요. 꿈을 해석하는 그 순간 본인이 조작해서 만든 그게 스토리입니다. 꿈꾼 지 여섯 시간 만에 그걸 해석하면서 꿈은 재탄생하는 겁니다. 꿈은 밤에 꾸는 게 아니고 다른 꿈이 튀어나오지요. 이걸 꿈이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그걸 간증집회라고 합니다. 조작된 거죠. 간증 집회하는 그 순간 빼고 넣고 혼자 바빠.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그런데 간증 집회하는 사람만 바쁜 게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꿈에 도취되어서 나만의 현실이라는 캡슐 안에 갇혀서 마치 꿈속에 있는 인형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바깥에 우레가 치고 번개가 쳐도 우리는 모르고 나만 편하고 아무 탈 없으면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바깥에 어떤 실재가 있는지 보여주고 그 세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잘못되게 상징화시키는지 중간에 언어란 매개체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더욱 더 왜곡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말없이 믿어야 되는데 언어를 동원하는 순간 우리는 왜곡되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말씀으로 오지 언어로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걸 성경으로 확인하다보니까 엉터리 해석을 버릇처럼 내놓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엉뚱한 소리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폐품 받아서 만든 그 성막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지시한 모든 것은 가시적 실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 실적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자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46년 동안 만들었는데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꼭 이 몸은 내 몸이라고 주장하는 내 앞에서 그 말 하는 것 같아요. 네 몸이 누구 몸이냐? 내 몸입니다. 네 몸, 내가 없애줄게. 제 몸이 있어야 주의 말씀을 지킬 건데? 주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은 네 기억에서 네가 행동할 수 있는 것만 해답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나대는 거예요. 나대다가 망한다니까. 해도 소용없다고 주신 말씀을 우리는 자꾸 지키고 싶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분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분을 품되 해지기 전까지 품고 품지 마라. 그래서 우리는 화 날 때 시계를 보던지 다락방에 올라가서 해지는 것을 봐야 돼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야 돼요. 5, 4, 3, 2, 1. 더 이상 화 못 낸다. 우리가 말씀대로 지키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에베소서 5장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 옆에 음주측정기를 둬야 돼요. 술을 먹되 혈중알코올 0.2%. 이것도 한의원에 가야 돼. 소양인이냐, 뭐냐에 따라서 취함의 강도가 다르거든요. 소주 한 병 먹고 취하는 사람 있고 나같이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 있고. 서울에서 내려오다 보면 술꾼들이 타거든요. 그럼 나는 지하철 타지 말아야 돼요. 버스 타도 특실 타야 돼. 11시 넘으면 술꾼들 타고 있거든요. 무슨 고난이 그런 고난이 다 있습니까? 취하지 말라는 말씀 지키기 위해서.
말씀은 네로 하여금 지켜야 한다는 충동을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유발된 충동을 통해서 우리가 주께서 원하지 않는 내 기억 속에 마귀가 와서 편집한 나만의 우상화시키는, 신으로 절대화시킨 나쁜 현실을 유발하는 그 계기가 말씀이에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안 해도 구원 시켜주잖아요. 주께서는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분이니까. 이미 자기만 잘났다는 그 인간은 네가 내 손을 줬다는 걸 확인한다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엉망이고 개판인 내가 놀랍게도 주님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게 야곱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데 미리 기대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천사와 씨름하면서 해 뜨는데 우리 그만 싸웁시다. 그랬습니까? 야곱이 아는 현실은 작아요. 외부의 현실이 야곱의 현실에 침범하니까 야곱은 삭제됐어요. 야곱은 없다는 내용을 품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야곱이란 인간이 다뤄질 인생이 아니고 소급해서 사랑받기로 작정했던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야곱이란 인간으로 이 땅에 한 때 살다가 야곱이란 이름으로 죽어야 될 인생이다. 이걸 야곱은 나그네 인생이라고 했어요. 본향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어느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요. 주여, 어느 곳으로 가야 됩니까? 지시를 듣고 만나는 장소가 하나님이 지시한 곳이에요. 그럼 어디까지 지시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은 예수님 만나기를 그리워하다가 만났다고 돼있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마지막 도착지점은 뭡니까? 예수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갑니까? 어떻게 가기는 예수님 나라가 덮쳐오지요. 구약은 찾아가지만 신약은 찾아오게 돼있어요. 구약은 찾아가다가 업어졌고 신약은 이미 찾아와서 내 인생은 계속 매일같이 자빠져야 돼요. 이미 찾아왔기 때문에.
그게 성령 안에서 의인 되거든요. 성령이 오셨기에 우리는 폐품 처리해야 될 것을 버리는 과정인데 그냥 버리면 안 돼요. 내 속의 괴물들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주께서 알아서 버리십니다. 그게 막 사는 거예요. 평생 동안 막 살면서 구원되었음을 그때그때마다 확인하고 고백하고 자백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밖에 안 되는 강도를 구원하시다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예수여, 날 빼나봐라.” 자기 현실 연장 속에 예수를 같이 세운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 속에 들어오라는 거거든요.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주님의 현실 속에 이미 포함돼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주옵소서. 예수님과 자신이 한 패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강도되게 하셨군요. 강도가 무슨 잘한 짓이라고? 자랑이 아닙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일한 현실이에요. 현실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강도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요. 빨리 강도에서 벗어나서 판사 돼야지. 이게 아니고 주어진 강도마저 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미신 것이라는 겁니다.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고.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병 낫고 난 뒤에 병 낫는 것이 내 존재의 의미가 아닌 걸 알았어요. 누가 나를 병들게 했는지 아는 게 나를 병들게 하신 분만이 낫게 하실 분이라고 믿어줘야 병들게 하신 이유가 주님에게 있음이 확인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시험에 떨어졌다. 떨어졌으니까 다음에 합격시켜달라고 하면 안 돼요. 시험에 떨어지고 합격하는 것은 내 뜻이고 떨어지는 것도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주님과 관련된 문제라면 다음에 붙든 떨어지든 그건 제 소관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라는 고백이 나와야지요. 그럼 주님이 뭐라 합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공부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번엔 영어. 알겠습니다. 수학. 알겠습니다. 하다 보면 어느 대학 붙겠지요. 그러면 주께서 하신 것이지요.
어떤 의사가 병을 고치는데 다른 의사는 지식으로 고치지만 그분은 이렇게 고친다는 거예요. 주님, 저 환자를 보내셨는데 제가 아는 범위에서 어떤 치료가 정확한 겁니다. 하고 치료한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미쳤나, 뭐야. 무당이야, 의사야?” 하겠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는 환자를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지만 나는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럼 고치지 말지. 아니 내가 고칠 수 없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사용하잖아요.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드려내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주께서 살려줬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누구한테 한다? 헌금을 나한테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고 더 정확하게는 내 안에 계신 주님한테 헌금한다는 말이 맞아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데 그냥 서비스하는 거예요. ‘감사헌금’이라는 글자 쓰는 정도. 봉투에 돈 넣고 주께 드립니다, 하고 얼른 받아서 봉투 빼고 잘 쓰겠습니다. 그걸 빨리하는 거예요. 그게 헌금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가시적 실적은 헌금하는 행위자체가 주님의 가시적 실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을 안 하게하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믿어지는 기쁘게 믿는 안 기쁠 수가 없지. 헌금 한 해도 된다는데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기쁜 나도 주의 작품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으로 하라.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한국교회뿐만 아니고 이천 년 교회는 이걸 명령이 있으니까 지키라. 지키는 사람마다 뭘 생각하겠어요? 어떤 가시적 실적, 너희 교회 헌금 얼마나 나오노, 교인 몇 명이야? 이것을 궁금해 하고 은근히 노리고 있다는 우리 자신들이 옛날 멸망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 길을 밟아가도록 조치해주셨습니다.
얼마나 친절합니까? 우리가 갈 수 없는 십자가 길을 지금 가고 있잖아요. 낚시하는 십자가의 길, 골프 치는 십자가의 길, 뷔페 먹는 십자가의 길, 쟁반짜장 먹는 십자가의 길. 얼마나 감사하며 갈 수 있어요, 십자가 길을. 그런데 찡그리고 사흘 동안 굶고. 진짜 막 욕이 나오려고 해. 왜 그런 짓을 해요. 아프리카 가고, 날 죽여라. 어디 그런 연기를 핍니까? 가만있어도 되는 십자가 길을 얼마나 십자가 길을 모르면 지가 기대한 지가 의도한 십자가를 흉내 내고 연출하고 있느냐 말이죠. 가짜지요.
여러분 가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시면 여러분이 탕자인 것을 알게 되고 탕자인 것을 알게 하는 그 길이 아버지께 가는 지름길이고 그 길이 바로 영원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길이에요.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쉬운 문제에요. 긴장하지 마세요. 탕자가 아버지한테 가락지 받고, 옷 한 벌 입고, 소고기 부위별로 먹고 잔치 벌였지요. 그리고 난 뒤에 탕자가 마을 사람들한테 자기가 잘났다고 이야기했어요, 못났다고 이야기했어요? 나 이제 탕자 아니에요. 이젠 훌륭한 아들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전 탕자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탕자라 이야기해줘야 아버지 은혜가 넉넉히 살아있기 때문에 바로 그 공식이에요. 가만 듣고 보니 쉽지요.
그러니까 성막을 만들고 기구를 만들게 되면 저건 내 가락지로 만든 것, 내 패물로 만든 것, 저 제사장 복장은 우리 부녀회에서 전문으로 만든 것, 이런 식으로 하게 마련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바치는 행위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내가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가만있으면 우상이 안 될 것을 주께서 명령하고 실천에 옮기는 순간 내가 곧 중심이고, 이것 안 알아주면 난 불쾌할 거야, 싫어할 거야, 주님께 원망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무심코 하나님이여, 일을 이렇게 하시면 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하필이면 나에게. 피곤하고 힘들 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그렇게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우상적인 요소가 튀어나오는 순간이에요. 나는 나 아닌 나가 아니라 내가 소망하는 나를 붙들고 있었구나. 주님께서는 내가 모르는 나로 바꿔주는데 나는 익히 아는 나를 소망의 노선에 깔아놓은 거예요. 그리고 그걸 안 해주면 삐지는 거예요. “하나님, 내 자식을 위해서 기도했는데 왜 엉뚱한 길로 갑니까? 더는 못합니다.” 하거든요.
우리 아들 취직하고 장가가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취직하면 뛰쳐나오고, 취직하면 뛰쳐나오고 하니까 엄마가 기도한 보람을 못 느끼는 거예요. 거기다 이근호 목사는 기도해도 소용없다 하니까 진짜 기도할 의욕조차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이근호 목사가 기도 못하게 만들었어. 그게 불만이 돼서 기도 못하겠습니다. 언제는 하고 싶어서 했습니까, 답답해서 했지.
사실은 기도하는 순간 전혀 인간은 기도를 못해요. 왜냐하면 기도하는 자기 자신이 느껴지기 때문에 바깥으로 기도발이 나가지 않습니다. 내 폼 괜찮아. 오늘 기도발 잘 되는지 몰라. 그것 평가하는데 바빠서 자기가 아는 현실 바깥으로 나가서 주님한테 도달하지 않아요. 자체적으로 다 떨어져요. 목욕탕 천장의 물방울처럼. 옛날 목욕탕.
그러면 성령의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나만의 기도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 성령의 기도가 나오는 겁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나와요. 죄를 지으세요. 그리고 죄 속에서 의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세요. 그 의가 나오면서 내가 의를 노리면서 기도하는 것마저도 죄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고 그 영토 자체가 내가 착하다고 했던 일까지도 다 우상 숭배의 죄에 해당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환경을 조성해주시는 분이 중심에 박혀있는 그분이 그런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을 그런 식으로 지금도 실제로 실현시킵니다. 그 말씀의 영토를 두 자로 현실, 예수님 중심의 세계입니다. 그게 현실이에요. 현실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내 식대로 살아요. 그냥 막 살아요. 막 살게 되면 주께서 성도 같으면 현실을 알려줄 거고, 성도 아니면 막 살다 지옥 갈 거예요.
우리교회 어떤 분이 참 좋은 질문했어요. 아버지 아내와 간음한 자를 내쫓으라했는데 그 의도를 모르겠다는 질문을 했어요. 그 질문의 의도를 알겠습니까? 그 바닥에 뭐가 깔려있겠어요? 아버지 첩과 간음했다고 그 아들을 쫓아내면 나머지는 이상적인 교회에요. 정말 가시적 실적이 나타나는 교회잖아요, 라는 식으로 질문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교회와 다른 교회의 차이점이 뭔지 궁금한 거예요. 차이점 없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복음 전하니까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시적 현실을 보고 싶은 거예요.
답변을 조심스럽게 해야 돼요. 그분은 어느 것이 진짜 교회인지 궁금한데 이 세상에 진정한 교회는 없는 걸로 본인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 내쫓으라고 했으니까 내쫓긴 사람 빼놓고는 참된 교회잖아요. 그럼 진짜 교회 있긴 있네. 그렇다면 참된 교회가 없다는 말은 틀렸네. 그게 궁금해서 저한테 질문한 거예요. 따지는 의도는 감춘 채.
답변은 이렇습니다. 교회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복음으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복음으로부터 출발하려면 복음이 중심이어야 돼요, 교회가 중심이어야 돼요? 복음이 중심이어야 돼지요. 그럼 복음은 뭡니까? 죄인을 용서하는 거지요. 죄인을 용서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가시적 실적으로 이어지거든요. 죄 용서를 이용하면서도 죄 용서한 것으로 위장한 사람들이 있겠지요. 가시적으로 눈에 띠게.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뭐냐? 네 마음속에 간음한 자를 내쫓을 용의가 돼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걸 구분할 수 있는 복음적 눈을 가졌느냐는 질문이 내쫓으라는 거예요.
사실은 오늘날 교회에 그 이야기를 적용시키면 쫓으라는 그 인간이 쫓겨났을 거예요. 왜? 주님 쫓겨났을 거니까.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용서를 구하는 것과 양해를 구하는 것의 구분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차이가 뭐지요?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날마다 죄인이라는 뜻이고, 양해를 구하는 것은 전에 용서를 구했으면 됐잖아요. 봐주세요.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그렇다면 정답은 뭡니까? 매일같이 우리는 당연히 쫓겨나갈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 진즉에 주님께서 나를 진짜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에서 쫓겨나는데 주께서 용서했기에 왔다면 참된 교회는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참된 교회는 용서가 모이는 순간순간이 참된 교회였다가 다시 흩어지듯 날아가 버리죠. 용서를 구하는 거예요. 양해를 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매일같이 나는 용서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집단인데 그게 오래 가면 안 돼요. 오래 가면 또 양해를 구해요. 옛날에 우리 이런 사람이잖아.
그래서 주기도문이 중요한 거예요. 주기도문 내용이 뭡니까?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일용할 양식만 매일 주는 게 아니에요. 날마다 우리 죄를 사해주옵소서. 한 번 하고 끝나는 겁니까? 십자가 알고 그 다음에 부활로 나갈까요? 아니에요. 부활의 능력을 후원받아서 매일같이 십자가만 바라보는 게 부활의 역할입니다. 부활의 힘입니다. 부활의 영의 힘이 십자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부활을 보는 게 아니고 살았기에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보게 하는 게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신 돌아가신 분이 계심을 날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지금 주께서 만들어내시는 성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가시적 실적이 문제였습니다. 옛사람이 자기 스스로 우상 숭배하고 싶어서 으스대고 싶어서 영웅 되고 싶어서 주의 말씀까지 이용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음을 자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백조차도 주의 성령이 임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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