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헌금 151204강의미가

헌금 151204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한윤범(IP:14.♡.134.60)

15-12-08 09:49

201512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헌금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을 출애굽기 35장 4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과 염소털과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과 조각목과 등유와 및 관유에 드는 향품과 분향할 향을 만드는 향품과 호마노며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이니라”

하나님께서 이걸 내라고 명령했는데 이걸 모아서 뭘 할 거냐는 문제죠. 성경에 이런 말씀 나오거든 하나님의 지시의 목표점 또는 목적점을 주시해보면 의미가 풀립니다. 하나님이 지시할 때 최종 도착하는 지점이 있을 거거든요. 이런 귀한 패물 같이 혼수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모아서 하나님께서 뭘 만들고 싶어서 이렇게 하시느냐? 그것도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지 않고 인간 손으로 하시는 뜻이 뭐냐를 생각해야 되거든요.

이런 걸 생각하려면 이 대목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성경 전체를 대충 알고 다시 보셔야 돼요. 그러면 이건 뭘 뜻하는가? 이것이 제목이 될 수 있겠는데요. 중심 만들기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심을 만든다, 성전입니다. 중심 만들기를 한다는 것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중심이 없이 산다. 중심이 없이 산다면 듣는 인간들은 기분이 나쁘겠지요. 중심이 있다고 반발하고 싶을 거예요. 인간이 내세우는 중심은 뭐냐? 본인이 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라는 것,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는 힘들지요. 하나님 앞에서. 상식적으로도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으니까. 피조물이 중심 되면 되겠어요? 창조주가 중심 돼야지요. 그것은 우리가 들은풍월로는 알고 있는데 실제 삶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돼. 비록 지금 나는 내 중심으로 살더라도 하나님이 중심 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을 거라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대가를 마땅히 받을 용의가 돼 있느냐 물으면, 우리는 아니라고 하겠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중심을 제시하면서도 인간들로 하여금 그 중심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형편을 좌시하시는가? 그이유가 요한일서 5장 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들 이야기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니라” 그 뒤에 말씀이 중요해요. 요한일서 21절, 마지막 구절인데,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그렇다면 우상이 아닌 분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등장하신 분만 우상이 아니고 그 외에 모든 것에 관심 두고 초점을 두고 산다면 그것은 바로 우상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상 아닌 분이 등장했다는데 그분이 누구냐?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이 참 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곧 영생이라고 돼있지요. 그럼 자기를 지켜서 우상을 멀리하라는 말은 중심은 네 중심으로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확고하게 중심을 잡았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죠.

저수지가 산 위에 있고 밑에서 농사짓는다면 농사짓는 사람이 물을 댈 때 물은 자기 논이 우물이 아니고 샘터가 아니잖아요. 자체, 자생적으로 물이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그럼 이 물은 어디서 흘러왔는가? 저수지에서 분명히 내려왔을 것이고, 그러면 중심은 어디냐? 나는 받아 누리는 입장이지 중심은 아닌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중심 섬기는 것은 간단한 거예요. 흘러내려오는 은혜가 지금의 나 되게 했습니다. 간단하지요.

흘러내려오는 그 내용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변두리입니다. 또는 성경대로 하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이게 우상에 휘말리지 않는 삶이에요. 우상이란 절에 안 가는 게 아니고 중심 문제입니다. 인간의 내부로 이야기한다면, 주체 문제고. 행위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패물을 내라는 것은 중심 만들겠다는 겁니다. 물론 신약에서는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지요. 지금은 구약이거든요. 구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동행하시지요. 동행하시는 중심은 어떤 기능을 유발하면서 중심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중심 되는 곳을 성막, 또는 성전. 성막이 나중에 성전 되니까 같다고 보고요. 성막, 성전에서 중심이 중심답게 반복하는 기능이 나와요. 그게 제사입니다. 제사라는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제사는 내 죄를 품고 있는 제물이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일, 그게 제사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내 대신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게 제사거든요.

여러분이 이해했는지는 응용문제 하나 던지면 대번 알 수 있지요. 인간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게 응용문제에요. 안 된다는 게 정답입니다. 자기 부인이 될 것 같으면 제사라는 것이 불필요해요. 대신 죽을 필요 없어요. 본인이 자기 잘못을 알아서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면 다시 정상적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구태여 쓸데없는 제사를 왜 드리느냐 말이죠.

지금 출애굽기 35장 4절부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패물 같은 것을 내놓으라고 했거든요. 왜 패물을 내놓으라고 했습니까? 중심 만들기. 왜 중심이 있어야 되지요? 방금 요한일서에서 봤잖아요. 인간은 중심이 없으면 우상숭배자가 돼요. 그러면 인간이 중심이 아니면 인간은 왜 있습니까?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중심 되는 속성이 현재 우리를 우리 되게 했단 말이죠. 그럴 경우에 우리는 이 땅에 살아도 우상 아닌 삶이 되는 겁니다. 흘러내리는 저수지 이야기를 제가 해드렸습니다.

문제는 중심 만드는데 중심이 그냥 성전 만들고, 성막 만들면, 한 번 중심은 영원한 중심이 됩니까? 안 돼요. 그러면 진짜 중심은 장소문제가 아니고 그 장소에서 매일같이 반복하는 기능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기능이 제사지요. 복습됐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우상이 아닌 것은 어떤 기능으로 나온다? 제사 기능으로 나온다. 정리 됐지요. 밑줄 쫙. 제사 기능은 죽음입니다. 그걸 우리말로 두자로 이야기하면, 죽음입니다. 그걸 풀이하면,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반복해서 죽을 때만 우리는 우상의 여지가 없다고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별로 안 죽고 싶은데 어떻게 하지요?

지금 출애굽기 이야기는 이방나라한테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한테 이야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유일한 민족이라고 제가 강조한 이유는, 이스라엘 외에 다른 민족들이 보는 현실관과 이스라엘이 보는 현실관이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동행하지요. 그걸 현실1이라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이방민족의 현실을 현실2라고 한다면 현실관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다르지요.

중요한 질문 들어갑니다. 현실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지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똑같은 현실을 하나님이 만들었지만 현실관이 차이 때문에 하나는 우상 배하는 민족이 되고, 물론 저주받지요. 한쪽은 그들과 다른 현실관이 작용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 숭배하지 않는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중심이 있고, 다른 민족은 참 하나님이 관여하는 중심이 없다는 거지요. 그럼 다른 민족은 누가 그들의 중심 노릇합니까? 본인이 중심이 되는 거예요. 이걸 풀이하면 본인이 투영한 우상 또는 신,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을 정당화해주는 호응해주는 그 신을 그들은 중심으로 삼았던 겁니다.

왕조가 바뀌면 신하가 바뀌고 역사도 바뀌어요. 시조의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 자체를 바꿉니다. 일본이 아베 총리로 바뀌고 난 뒤에 역사관 교체작업하고 있잖아요. 역사란 현재 살고 있는 그들의 정당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그런 신들은 주위에 깔아놓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 뭐 어렵게 할 것 없이 불교가 대표적이죠. 갓바위 대표적이죠.

갓바위에 간 사람들이 빌면서 자기 가족 저주해달라고 기도 않잖아요. 자기 가족 잘 되게 해달라고 세 가지 소원 들고 가잖아요. 모든 교회도 그런데 갓바위까지 갈 필요 없지요. 살아있는 내가 더 원대로 살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신에게(부처도 신이니까) 간구하고 흥정하고 협상하러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상의 기능과 법칙은 누가 정하는 거예요? 복 받을 내가(복의 수혜자) 법칙과 원칙을 정하는 겁니다. 그럴 때 내가 믿는 신과 흥정하기 위해서 내가 행할 수 없는 법칙을 정하겠어요? 행할 수 있는 법칙을 정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교회 다니기, 십일조하기, 전도하기, 이런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새벽기도 나올 수 있어요. 금요철야 가능합니다. 어쨌든 간에 마음만 먹으면 되는 그 행위를 유발하게 하는 법칙을 우리는 원하지요.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이고 우상 숭배자기 때문에.

그런데 정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신은 뭡니까? 살아있음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뭘 반복해요? 너는 내 앞에서 매일같이 죽어줘야 된다. 죽어야 된다. 그것만이 우상이 아닌 거예요. 죽어주는 것이 발동기처럼 죽게 되면 한 번 죽을 때마다 내 대신 죽으신 분의 의로움의 효과가 복이란 이름으로 중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혜택을 받을 때 우리는 제가 한 게 아니라는 고백을 내놓을 때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게 이스라엘에게 법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법은 산 밑에서 만든 게 아니고 비록 모세가 돌 판을 만들어도 그 돌 판에 새기는 글씨는 산 밑이 아니고 산 위에요. 산 위에는 인간이 없지요. 너희끼리 의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끼리 의논하면 바벨탑 됩니다.

이쯤 해서 다시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패물을 내라고 했습니다. 그것으로 중심 만들기. 중심이 가만히 만들어지는 중심입니까? 그것은 반복적인 기능이 지속돼야 되는데 그 기능은, 내 대신 하나님을 만나 뵙고 복을 따내는 분이 조치하시는 기능. 그 기능은 내 대신 훌륭하다? 아니에요. 내 대신 열심히 기도한다? 아닙니다. 마지막 기능은 내 대신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살기 위한 기도가 아니고 대신 죽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해요. 너도 나처럼 기도하라는 거예요.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하는 게 아니고 네가 사는 게 곧 반복해서 죽는 행위임을 네가 뒤늦게 알아채라는 겁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게 하나님이 죽이는 방식이고, 삼성그룹의 이재용 부회장은 열심히 경영하는 게 본인 지옥 보내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영화감독은 큐, 사인 보내고 배역 받은 사람은 시나리오대로 열심히 연기하는 그것이 본인을 바꿔치기하는 그렇게 열심인 열심히 무용지물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진짜 준비된 우리 자신의 몸은 하나님 앞에도 살아남을 영생을 가진 분으로 바꿔치기한 작업 중에 하나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겁니다.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면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아예 공식인데 이 공식, 천국 수능에 나옵니다. “너, 어떻게 살았어?” “막 살았어요.” 이게 정답입니다. 어떻게 아이 키우기 어떻게 힘들게 살아도 그게 전부 다 죄를 양산하고 생산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과정이었습니다. 왜 죄를 생산해야 됩니까? 어느 인간이 죄를 우상화하겠어요. 쓰레기인데. 두 번 다시 네게 기대 걸지 말라고 법으로 규정한 겁니다. 너는 뭘 해도 죄라고. 식어버린 연탄재를 붙들고 고맙다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을 사람 없습니다. 그건 처지 곤란이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처지 하는 과정이 그냥 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경유하는 방법으로 처지 하면 돼요.

그게 오늘 본문 35장 4절입니다. 다시 읽어볼까요?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취하되 무릇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금과 은과 놋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이렇게 돼있지요. 이것을 설명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것을 드릴지니 금이라는 죄, 은이라는 죄, 다이아, 패물 죄, 몽땅 다 하나님을 경유해야 주님의 영생과 바꿔치기기 되는 겁니다. 내가 낸 것이 중심이 된단 말이죠.

그럼 오늘날 우리 돈을 어디에 내야 됩니까? 옛날 20년 전인가 극동방송에서 한 이야기에요. 우리 모든 소유는 어디에 내야 돼요? 나한테 내야 돼요. 물만 셀프가 아닙니다. 여러분한테 바쳐야 돼요. 여러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를 죄 되게 하는 현장에 주님이 가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바칠 게 아무것도 없지요.

나한테 바친다는 것은 한두 개 적금 안 든 사람 어디 있어요? 다들 잘하고 있잖아요. 애들 교육보험 몇 개 들었을 거고, 건강보험, 치과보험 몇 개 다 들고 있지요. 잘하고 있어요. 왜? 그게 죄이니까. 거기서 주님이 마중 나오시니까. 네 죄가 있는 곳에 내가 있다. 이 현실감이 하나님이 저기 계셔서 바치는 것은 이방종교라면, 내가 나한테 바쳐놓고 그것이 죄인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차후적으로 규정받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우리 아들 사법고시 합격했습니다. 성도 같으면 이것만 붙이지 마세요. 이것이 죕니다. 조성진 쇼팽 콩쿠르 우승했습니다. 뒤에 이것이 죄입니다. 자칫하면 내 아들 우승이 우상화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게 돼요. 그러니까 애들 보고 낮아지라고 일부러 힘들게 살라고 하지 마세요. 그냥 사는 대로 사세요. 하고 싶은 대로. 왜냐하면 어차피 우리의 더러운 것은 바깥으로 끄집어내야 될 건데. 이사 갈 때 다 끄집어내잖아요. 이삿짐 차는 골목에 있고 집에 꽁꽁 숨겨진 안에 있던 귀한 것도 이삿짐으로 옮기잖아요. 그 이삿짐센터가 우리 주님이잖아요.

대신 살으심이 아니에요. 대신 죽으심. 네가 죽어야 될 이유는 내가 갖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는 네가 갖고 있는 것을 내가 갖고 있는 것에 포함시키면 우리는 변두리고 예수님이 중심이니까 중심에 변두리를 합류시키면 이게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가가 드러나면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 죄가 의가 되잖아요. 그 의를 우리가 도로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누리듯이 받는 겁니다. 마치 저수지 밑에 논이 물을 받는 것처럼.

우리 애가 사법고시 합격하고 싶다. 이게 우상이거든요. 죄거든요. 그것을 죄라고 했는데 그걸 주님에게 경유하니까 아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 말이 이상하지만 그래요. 네 아들이 사법고시에 그것도 수석으로 합격해서 네가 절망하는데 슬퍼하는데 우상 숭배가 우리 집에 태어났다고 절망하지 마. 이게 주님 주신 은혜야. 우린 꼭 그 과정을 생략하고 싶지요. 성질대로 하나님 은혜라고 퉁 치고 싶지요. 중간 과정 생략하고 싶잖아요.

아니에요. 과정이 더 중요해요. 왜? 현실은 하나님지만 현실관은 두 개이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는 현실관은 지옥 갑니다. 예수님을 경유한 현실관은 영생 얻고 천국 갑니다. 따라서 동일한 현실인데 현실관은 두 개가 됩니다. 그 현실관은 중심에서 흘러나옵니다. 중심 만들기죠.

그럼 중심에서 어떤 식으로 흘러나옵니까? 궁금하지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기존에 한국교회가 아주 잘 알려주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출애굽기 해석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제일 귀한 것으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게 성도의 할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에요, 주시는 분이에요? 주시는 분이죠. 그런데 여기는 한국교회는 드리라고 명령으로 돼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드리라고 해서 드렸으니까 복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바로 행위의 가시화에요. 가시화는 눈으로 보도록 변화됐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가시적인 실적을 염두에 두고 행위 하게 돼있어요. 사실은 정확한 말은 아니에요. 정확한 말은, 인간은 충동에서 나와서 행위가 나온다는 건데, 충동은 정신분석학에서 어려우니 빼놓고, 인간이 행동하는 것은 목적 때문에 행동합니다. 맞는 말인데 그걸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가시적인 실적과 업적을 내다보면서 행동한다 이 말입니다.

목사들이 오랜만에 친척들 모일 때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요새 너희 교회 몇 명 모이노? 헌금 얼마 나오는데?” 더 예의 없는 사람은, “요새 월급 얼마 받노?” 이게 뭐예요? 네가 열심히 설교하고 목회하고 기도하고 전도했으면, 행위죠. 나는 뭘 보고 싶다? 가시적인 실적을 보고 싶다. 그러면 “형님, 저는 복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소리 듣고 싶은 게 아니고, “네가 복음 전해서 몇 명 모이는데?”
왜 그 사람들이 그게 궁금하고 그런 걸 물어요? 이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자기 행위가 반드시 목적 없는 행위는 없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 목적에 대해서는 허무하게 느끼고 그 목적이 가시적인 실적을 이루길 바랍니다. 이걸 역사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행위는 없다. 그럼 그 전제가 뭡니까? 나는 내 입맛에 맞는 현실을 내가 바꿔보겠다는 노림수를 가지고 오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우상 숭배란 것을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중심에서 동일한 현실이지만 두 개의 다른 현실관이 나온다 했지요. 현실1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현실. 현실2는 우상과 동행하는 지옥 가는 현실관. 그 우상이 본인이라 했지요. 아이큐 테스트하는 것도 아니고 자꾸 물어서 미안합니다만. 이것도 가시적인 실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원하는 나를 보고 싶은 거예요. 사람들한테 박수 받는 나를 보고 싶은 거예요. 그걸 위해서 잠을 쫓아내면서 공부하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공부하면 언젠가는 어떤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박수치고 훌륭하다, 대단하다, 똑똑하구나, 출세했네, 부럽다는 실제적으로 업적과 실적이 나오길 우리는 바라는 거예요. 이게 내가 중심이고 우상이라고 했지요. 요한일서 5장 21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중심, 예수 그리스도가 왔잖아요. 그 다음에 말하는 게 뭡니까? 네가 우상 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예수님만 덜렁 오면 안 돼요. 예수님 나타났구나, 예수님 믿습니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예수다. 알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내가 예수기 때문에 너의 우상 짓을 그만두라, 이 말입니다. 중심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중심은 존재가 중심이 아니고 기능이라 했지요. 그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에요. 성전의 기능은? 양이나 소를 잡는 기능, 연기가 매일같이 피어오는 기능. 그 법칙은 산 밑에서 만든 게 아닙니다. 인간들과 만든 게 아니고 인간들을 도외시하고 만든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말씀들을 인간들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이 와야 이해돼요.

사람이 성경을 보는 것도 가시적인 실적의 노림수가 있어요. 나라는 중심이 우수한 중심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의 모든 지혜를 내가 확보하고 있다면 우수한 나란 신이 더욱 확고한 우수한 신이 될 것이라는 우상적인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그게 신학자잖아요. 그게 목사고. 평신도라고 목사 욕하지 마세요. 본인이 신학교 가보세요. 똑같이 마찬가지 돼요. 이것은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순절 성령 오기 전까지는 본인들의 가시적인 실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에요. 은근히 기대했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줬잖아요. 그 사람들 반응이 어떻습니까? 가시적 실적이 저기에 있구나. 떡 문제, 경제 문제는 고민 안 해도 되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와 똑같은 거예요. 예수만 믿으면 될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임금 삼자. 내 중심 삼자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중심이겠습니까, 아니면 누가 중심이겠어요? 자기가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는 의도 자체가 내가 원하는 예수이어야 하니까 결국은 진짜 중심은 자기 손에 놀아나는 예수, 내 원대로 뜻대로 되는 예수.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는 너를 삭제해버려라. 너를 삭제. 스마트폰 켰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 시커매. 너를 삭제한 이후에 다시 등장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이 몸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모양은 이래도. 안경 끼고 이래도. 주님은 안경 쓴 적 없지만. 주님은 남자지만 나는 여자다. 그래도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경로, 과정을 경과해야 되는데 그 과정은 뭐냐 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쭈그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주께서는 쭈그러진 나를 의인으로서 우리한테 다시 배급해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의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주님의 몸으로써. 기도를 해도 내 기도가 아니고 주의 기도가 되는 거지요. 그래서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지요.

영화에 그런 것 있잖아요. <목포의 항구다> 하는 영화에서 조연배우(박철민, 가오리 역)가 까불면서 권투 흉내 내면서 주먹을 날아가는 소리를 내놓고, 이것은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요. 어디서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에 있는 성령이 이야기한다. 패러디한 느낌이 들어요. 마태복음 10장 20절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이렇게 되고 싶습니까? 되고 싶어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렇게 되는 것은 내 몸이 주의 몸으로 전환될 때만 이 기능이 나와요. 그런 사람 되고 싶다는 기대는 할 수 있잖아요? 기대하는 인간은 삭제당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모든 일은 기대하지 않은 경우에만 이 상황이 일어나요. 이러고 싶지 않은 경우에만 이런 상황이 된다니까요. 이걸 말로 하니까 어려워요.

“주여, 죄인입니다.” 하니까 죄인을 천국 보내는 거예요. “잘났습니다.” 하니까 지옥 가 있는 거예요. 중심 만들기는 우리가 따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구약이니까 성전이 따로 있지만 신약에 오면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는 곳, 죄짓는 곳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내가 정신 차려서 잘못했다고 회개해서 성전 되는 게 아니고 죄는 죄대로 짓되 그 현장에 주님이 동참했기에 성전 되는 거예요. 내가 있으매 거룩이 아니고 주님 계시매 거룩이 되는 겁니다. 네 속에 거하시는 이는 성령이니라. 이래서 거룩이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저 현실2에서 현실1으로 바꿔졌을 뿐이에요. 성령이 와서. 성령이 온다는 것은 홀로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이뤘던 현실관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거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았던 현실관을 그대로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현실관은 사실은, 내가 기대했던 현실관이 아니고 내가 생각한 현실관이 아니고 내가 짐작했던 현실관이 아니고 주님의 현실관인 동시에 어떤 현실관이냐 하면,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해야겠다. 낯선 현실관.

낯선 현실관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라는 인간의 내용물은 주님이 채우지 내가 채우지 않는다는 사실. 나는 내일 되면 이런 인간 되고 싶다고 해서 내일 쯤 내 몸에 들어있을 내용을 오늘 잔뜩 기대하고 싶어요. 그런데 막상 내일 되면 주님이 집어넣은 내용이 내 속에 들어오면 오늘 기대한 그 나는 내일은 아니에요. 그러면 나는 내가 누군지 몰라요. 매일같이 몰라요. 모른다는 말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저 마트에 갈 때 들고 가는 장바구니고 주께서 어떤 물건을 담아서 본인의 나라로 가져갈지는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고 다만 우리는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렇게 되지요.

그래서 주께서 저주하는 죄는 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 되는 죄는 다 저주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육신에 있기 때문에 매일같이 내가 기대한 내가 되고 싶어 해요.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죄라고 규정하면서 전부 다 틀어지게 만듭니다. 내가 기대한 내용이 내 속에 오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백화점에서 세일한다는 거지요. 세일하기 일주일 전부터 백화점 왔다갔다하면서 보니까 172만 원이에요. 비싸요. 세일할 때는 50% 세일하니까 86만 원에 살 수 있다고 기대하고. 그러면 전 날 꿈에 막 나타나요. 꿈이 이상해. 반의 반 세일이 돼서 20만 원에 사고 그래요. 기쁜 거예요. 자랑질하고. 꿈 깨고 일주일 뒤에 세일 때 그 옷을 샀습니다. 그런데 사서 입어보니 별로라. 내가 기대했던 가시적 실적이 아니에요. 그래도 새 옷 사서 기분 좋은 얼굴로 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오다가 과속해서 7만 원짜리 끊었을 때 세일 기쁨 다 날아갔어. 이건 예상에 없던 사태가 벌어진 거예요. 화가 나지요.

로마,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의 첫 번째 걸음을 화를 내는 겁니다. 화가 나서 전쟁해요. 전쟁해서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을 경험해야 죽음을 극복한 영웅이 될 수 있어요. 따라서 영웅 된 현장은 전쟁입니다. 그래서 전쟁하기 위해서 일부러 화를 기다려요. 화가 나서 성질대로 전쟁하고 전쟁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살아 돌아옴으로써 영웅이 되고. 그게 초인이에요. 내가 기대한 그 이상의 나, 영웅주의입니다.

지금도 이 사회는 그런 영웅이 나타나기를 그런 큰 바위 얼굴이 나타나기를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걸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을 하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개천에서 용 나도 용이 다시 돌아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용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을용이 갑용한테 눌려서 다시 개천이 그리워. 용이 너무 많아서 문제에요. 개나 소나 다 용이라.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결국은 동일한 현실에 대한 상반된 현실관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현실이 뭡니까?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은 뭐냐? 현실을 우리가 계속 몰라요. 다만 주께서 채워주실 겁니다. 새록새록 몰랐던 내용을 계속 추가해서 줄 겁니다. 그걸 정신분석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잉여, 남아도는 여분의 것. 이걸 미술에서는 여백이라고 해요. 동양화에서. 물감이 아까운지, 먹이 아까운지 조금 채워놓고 작품이다, 좋다, 그러는 거예요. 나머지는 안개 끼어있는데. 그 안개가 의미 있다는 거예요. 그냥 여백으로 남겨두는 거예요. 여백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이 품위가 인격체가 그만큼 겸손하다는 의미가 동양화에 있어요.

동양화의 특징은 사람이 개미만 해. 절벽이 있고 큰 골짜기가 있는 조그마한 인간이 삿갓 쓰고 얼굴도 안 보여. 그냥 흘러가는 낚싯대 드리우고 달랑 한 사람이라. 저쪽 골짜기에는 두 사람이 바둑 두고 있고. 자연에 대한 숭고한 자신의 종교성을 바치는 겁니다. 자연이여, 위대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자연의 일부라서 좋습니다. 더 나가서 나는 자연으로 돌아갈 걸 생각하며 미리 돌아가겠습니다.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갈 걸 미리 당겨서 유유자적하고 자연과 살겠다는 겁니다.

이 더러븐 세상에서 홀로 도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 동양에서는 포기하면서 가능한데 서양에서는 뭡니까? 전쟁을 통해서 이뤄져요. 극복. 극복함으로써 승리하는 거예요. 그래서 동양은 서양한테 기관총에 밀린 거예요. 1840년 아편전쟁 때 망해버린 겁니다. 중국이 은을 원해서 영국이 아편을 제공했습니다. 은이란 은은 몽땅 다 가져가버렸어요.

기관총, 대포, 그 무기가 서양에서 발달했는데 어디 쓰는 물건입니까? 1860 그 때는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어요. 동양에서는 유유자적인데 왜 발명해요. 물론 화학은 1000년에 송나라에서 발명했어요. 화약과 나침반. 하지만 전쟁에 써먹었지요. 서양은 영웅 위주에요.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해요. 나폴레옹 하면, 워털루 전쟁.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영웅이 도인을 이겼지요. 그게 근대국가경영체제에요. 이 세상 200여 나라의 국가경영체제가 동양식이에요, 서양식이에요? 서양식이죠. 그 자식들, 현대 중고등학생들이 뭘 추구합니까? 유유자적한 도인되길 소망합니까? 영웅 되길 원합니까? 영웅 되려면 전쟁에 나가야 돼요. 입시전쟁, 싸워야 돼요. 올림픽 경기. 모든 것은 모든 승리는 전쟁 뒤에 나온 겁니다. 시합, 배틀 뒤에 나와요. 시험을 안 쳐, 시험을 없애라고? 그래서는 도인밖에 안 돼요. 자발적으로 시험 있는 곳에 뛰어들고 더 고단위, 난이도가 높은 곳에 뛰어들어야 되고, 선행 학습해야 되고. 입시정보, 한 번 봐주는데 200만 원. 도대체 그런 점쟁이가 어디 있어요. 정보 빼내기. 한 때 미국 유학 보낸다고 난리 치고.

전쟁이 싫으냐? 그러면 영웅이길 포기해라. 그러면 너는 을이 아니고 갑을병정 저 밑에 눌릴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그게 좋을 사람 아무도 없지요. 세뇌 받기를 영웅으로 살아가는 현실관 외에는 아무 것도 학교에서 배운 게 없기 때문에, 집에서 배운 게 없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에서도 배운 게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자가 된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5-12-08 09:50

201512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헌금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물을 바치라 할 때 거기에 관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시적인 실적을 주시기 위해서 한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현실관이라 이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 자체에서 반드시 잘못된 현실관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바치면서 뭔가 내가 기대하는 실질적인 실적을 원한다는 마음을 몰랐을 건데 주께서 바치라는 순간 주님이여, 헌금 모아왔습니다. 예배당 지어 하나님께 헌당하겠습니다, 하는 잘못된 현실관이 노출된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그래서 구약 때 하나님께서 뭘 하라, 바치라, 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그게 굉장히 어떤 의미에서 나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충성, 봉사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자랑질 할 수 있는 찬스로 보는 거예요. 십일조 하라니까 십분의 일 내면 되니까.

그래서 그들은 내가 행위로 말미암아 기대할 수 있는 그 동그라미, 권력 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 현실이다. 나의 현실관과 일치되는 현실이라고 단정 짓고 말았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너는 처음부터 네 자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어, 라고 티를 내는 방식입니다. 내가 명령을 함으로써 그 명령에 행위, 실천으로 따라올 때 포착되는 것이 인간의 숨겨진 우상성을 발취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기에 네가 우상이다.

하나에 대표적인 예로 고린도후서에도 나오는데 고린도후서 9장하기 전에 먼저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을 안 해서 죽었습니까, 속여서 죽었어요? 속여서 죽었지요.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는 처음부터 헌금할 마음이 없었으면 죽었을까요, 안 죽었을까요? 안 죽었지요. 괜히 나대다가 죽었어요. 어쭙잖게 충성하다 죽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처음부터 백만 원 내겠다고 해서 백만 원 내면 안 죽었어요. 처음에 이백만 원 내겠다고 생각하다가 둘이 의논해서 깎아서 백만 원 낸 게 액수와 상관없이 죽게 된 겁니다. 그러면 헌금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너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헌금하는 겁니다. 따라서 너는 죽음이란 벌을 받아야 될 인간인데 내가 죽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너는 내가 준 너 말고 다른 너를 상정하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후서 9장에 나와요.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6,7절) 인색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라는 말은 진짜 하기 싫거든 헌금하지 마라. 진짜 네가 헌금 안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나 같은 게 무슨 헌금을 해요. 돈만 사랑하는데, 라고 해서 헌금을 안 했다면 최고의 믿음 있는 사람이에요. 주제파악이 되니까. 그러나 인간이 뭔가 하나님, 이건 기뻐서 드리는 겁니다. 또는 더 건방지게 성령께서 시켜서 드리는 겁니다, 라고 말을 붙이면서 드리게 되면 첫 번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뭘 유발한다? 가시적인 실적을 유발해요.

이 교회 내가 십 년 다녔다. 그동안 통계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세 번째로 많을 걸? 따라서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장로 세 명 뽑는데 나는 반드시 들어가야 돼. 이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노골적으로는 안 해요. 그런데 네 번째로 걸려서 떨어지고 난 뒤에는 씩씩거리면서 이야기해요.

여자가 남편 두고 질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남편을 두고 자기와 경쟁하진 않아요. 남편이 자기 것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여자가 내 것이라고 덤벼들 때는 질투가 생기잖아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처음부터 질투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있었지요. 그게 아직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숙성되지 않았을 뿐이지 있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어느 수명을 끊어서 죽어도 모가지 끊으면 죄가 나옵니다. 나이가 팔십이 되든 오십이 되든. 공자는 오십에 뭐 나오고 육십에 뭘 보았고. 보기는 뭘 봐요. 모가지 끊어보세요. 죄 나오지. 어디 껍데기만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도인된 것처럼 착각하지만.

공자가 이랬으면 좋겠어요. 공자가 이십 대에 하늘을 보고 이러지 말고 나는 십대에 폭탄 만들었고, 이십 대에 기관총 만들었고, 이랬으면 동양이 서양을 이겼을 거예요. 얼마나 실용적이에요. 다시 말해서 동양은 서양보다 솔직하지 못해. 늘 감추기 급급하고. 특히 여인의 인생이란 참아야 하고 감추어야 되고. 그냥 남편을 사랑하더라도 옷고름 물고 흥하고, 이 모습만 하고 그게 사랑의 다고. 남자는 부엌에 들어오면 안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편은 갑질해야 되고 여자는 을이라는 지위에 있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되고. 그래야 가정이 평화롭다는 거예요. 그 평화는 누굴 위한 평화란 말입니까? 남자를 위한 평화지. 남자 현실 중심이에요.

결국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스라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이스라엘교, 유대교라는 문화가 만들어졌습니다. 문화에요. 문화는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문화의 주체자, 종교 행위자로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죽은 자리에서 구원이 일어나지 산 자는 구원되지 않아요. 하나님의 의, 거룩은 죄에서 만들어지지 죄 바깥에서 의가 생기는 게 아닙니다. 죄로 죄에서 하나님이 하신 언약의 성취되는 대목과 언약이 없는 대목을 구분해서 언약이 섞여진 것을 거룩이라 하고 언약이 없는 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 이런 걸 드렸는데 드린 것으로 성막 만드는 거죠. 그러면 텐트만 치면 끝나는 겁니까? 그럼 드린 것으로 뭘 만드는가? 11절 보세요. “증거궤와 그 채와 속죄소와 그 가리는 장과 상과 그 채와 그 모든 기구” 이걸 왜 만들어야 됩니까? 중심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다고 했지요. 이런 게 있어야 중심이 됩니까, 이것 없으면 중심이 왜 안 됩니까? 중심은 어떤 기능을 반복돼야 되지요. 그 기능이 뭐냐? 결국 제사 기능을 반복하기에 소요되는 모든 기구가 이것이다. 이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문제는 이거에요. 그 기구와 죄인을 주께서 바꿔치기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말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인간이 만든 물체와 인간과 바꿔치기한다는 게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지난 우리교회 낮 설교에서 제가 언급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떡과 잔이 상징이다. 이 떡은 내 몸이요,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흘린 피라고 할 때 사람들은 떡과 잔을 상징으로 봤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해석이 잘못돼있고 플러스해야 돼요. 떡과 잔을 먹는 내가 상징과 동등이다. 동류다. 같은 종류라고 해야 돼요. 내가 그렇게 돼야 돼요. 그게 요한복음 6장에 나오거든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내가 그 살과 그 피를 먹으면 주님의 살과 피를 일단 먹게 되면, 섭취, 이건 내 소유가 돼버려요. 그게 인간이 자기가 상징인 걸 모르고, 상징의 반대가 리얼리티, 실재라 하는 거예요. 내가 진짜 내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진짜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손에 만져지는 세포 60조 개 이게 나라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주의 말씀을 하나도 이해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살과 떡이 상품화 돼있어서 마트에서 구입해서 영양제 먹듯이 식후 30분에 먹어줘야 영생이 되는 셈이 돼버려요. 왜? 자기 빼놓고는 다 상징이기 때문에. 자기만이 실재고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상징이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상징이라는 것은 상징이 상징을 위한 법은 없거든요. 태극기는 대한민구의 상징이지요. 그러나 태극기가 태극기의 상징은 아니지요. 맞지요? 태극기가 태극지의 본체가 되고 상징이 된다면, 옛날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어요. 태극기를 막 밟으면 마라도에 있는 아줌마가 아파야 돼요.

장희빈과 다투었던 중전이 누굽니까? 인현왕후가 있어요. 장희빈이 바보도 아니고 라이벌 여자가 죽으라고 짚으로 조잡하게 만들었어요. 좀 예쁘게 만들면 안 되는지 모양도 없이 만들어놓고 화살로 쏴요. x년아 죽어라, 하면서 쏩니다. 코미디도 아니고 말도 안 되지요. 실재 몸체는 따로 있고 짚으로 만든 그것은 상징이잖아요. 그게 죽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영화에 보면 더 웃기는 이야기가 있어요. 장희빈이 새벽 2시에 쐈거든요. 그 순간에 왕후가 양궁도 아니고10점 만점 부위에 맞고 아파서 누워요. 그걸 흑마술이라 해요.

요한복음 6장에서 주님이 흑마술을 사용하는 겁니까? 인간들은 장희빈 못지않게 어리석어요. 천주교에서 그 상징물로 안 되니까 흑마술 쓰는 거예요. 성당에서 납작한 떡과 포도주, 포도주 남은 것은 신부가 다 먹고. 다른 사람은 먹으면 안 돼. 자기는 주님의 동업자기 때문에 한 방울도 평신도한테 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뭐 장희빈도 아니고. 주의 살과 피를 먹게 되면, 그 순간에 떡이 주님의 살로 변하고 잔이 예수님의 피로 변한다는 겁니다. 천주교는 아예 그것보다 더 나가지요. 변하기 전부터 주님의 살과 피라 하고, 루터와 개신교는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순간 변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너, 죄인이야.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성령은 십자가 앞장세워서 죄인 만드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게 성령의 일이지 무슨 흑마술 쓰는 게 성령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우리의 신기한 호기심을 들어주기 위해서 성령의 이름으로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이 이야기하기를 너희는 기도할 바를 몰라. 아버지 뜻을 아는 내가 성령이 대신 기도함으로써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구원이 성취된다 이 말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성령께서 일하시기 전에 반드시 우리를 책망해요. 네가 하기는 뭘 해. 너는 네가 예상한 가시적인 실적과 업적을 미리 당겨서 그걸 기대하고 소망으로 삼을 뿐이지 실제 네가 여백에서 잉여에서 채워질 진짜 내가 모르는 현실이 어떤 현실인지 네가 알아? 그럼 성령님은 아십니까? 알지. 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있기 때문에. 앞으로 채워질 모든 것은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돼있어요.

목사님, 연관 되어서 뭘 할 건데요? 연관돼있으면 교회 나오는 것만 감사가 아니라 집에서 빨래하는 것도 감사지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 녹취를 누가 했는지 몰라. 주께서 겟세마네 기도한 것 커닝해봅시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기도했는지.

17장 1절에,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다시 말해서 “아버지여, 이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버지의 뜻 맞지요?”라고 확인하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확인이고 고배이에요. 뭘 추가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바치고 순교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확인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붙어준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왜 붙여줬는가? 9절에 보니까,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어떻게? 내가 나 된 것은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교회 가는 것뿐만 아니고 설거지하는 것, 빨래하는 것, 내 몸이 멀쩡하거나 아프거나 어떤 경우라도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계획과 연관되어 일어나야만 할 사건이었고 사태였습니다. 나는 주님의 사건의 그물망에 놓여있는 객체입니다. 주님은 주체고 나는 사지, 또는 팔다리고 지체입니다.

이건 누구 영광입니까? 오직 나의 있음으로 인하여 주의 있음을 영화롭게 하는 그 관계성이 바로 하나님이 만들고자 했던 헌금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내가 기대하는 가시적 실적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내 자신부터 날아가는데 모가지부터 다 날아가는데 무슨 엉뚱한 다른 현실을 꿈꾸겠어요. 그 꿈마저 구겨버리는데. 꿈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 묵살내고. 꿈을 없애버리거든요.

꿈이란 항상 과거의 연장이 아니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과거의 연장은 주님만 아시는 현실이고 우리는 현실은 모르고 과거가 내 육신에 의해서 재평가 받은 기억이 돼요. 기억은 과거의 일부지요. 그것도 왜곡된 일부가 되는 겁니다. 전에도 예를 들었습니다만 당신이 올 때 가로수 나뭇잎이 몇 개입니까? 그걸 헤아리며 올 이유 없잖아요. 심지어 가로수가 있기는 있었어요? 가로수가 있었고 나뭇잎이 있었지요. 그런데 나는 모르지요. 내 기억 속에는 없는 거예요. 분명히 가로수 밑을 지나왔어요. 내 어깨에 낙엽이 떨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전두환처럼.

결국 인간의 꿈이란 일방적인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억지로 현실에 납득되도록 편집한 소설이 꿈이에요. 꿈에는 원래 스토리는 없어요. 꿈을 해석하는 그 순간 본인이 조작해서 만든 그게 스토리입니다. 꿈꾼 지 여섯 시간 만에 그걸 해석하면서 꿈은 재탄생하는 겁니다. 꿈은 밤에 꾸는 게 아니고 다른 꿈이 튀어나오지요. 이걸 꿈이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그걸 간증집회라고 합니다. 조작된 거죠. 간증 집회하는 그 순간 빼고 넣고 혼자 바빠.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그런데 간증 집회하는 사람만 바쁜 게 아니고 우리는 매일같이 꿈에 도취되어서 나만의 현실이라는 캡슐 안에 갇혀서 마치 꿈속에 있는 인형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박하게. 바깥에 우레가 치고 번개가 쳐도 우리는 모르고 나만 편하고 아무 탈 없으면 정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바깥에 어떤 실재가 있는지 보여주고 그 세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 잘못되게 상징화시키는지 중간에 언어란 매개체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언어가 있다는 것은 더욱 더 왜곡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말없이 믿어야 되는데 언어를 동원하는 순간 우리는 왜곡되고 맙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말씀으로 오지 언어로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걸 성경으로 확인하다보니까 엉터리 해석을 버릇처럼 내놓고 있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엉뚱한 소리하는 게 아니고 그들이 폐품 받아서 만든 그 성막이 그들을 망하게 하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지시한 모든 것은 가시적 실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 실적이 그들로 하여금 우상 숭배자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46년 동안 만들었는데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꼭 이 몸은 내 몸이라고 주장하는 내 앞에서 그 말 하는 것 같아요. 네 몸이 누구 몸이냐? 내 몸입니다. 네 몸, 내가 없애줄게. 제 몸이 있어야 주의 말씀을 지킬 건데? 주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은 네 기억에서 네가 행동할 수 있는 것만 해답으로 여기고 일방적으로 나대는 거예요. 나대다가 망한다니까. 해도 소용없다고 주신 말씀을 우리는 자꾸 지키고 싶어.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분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분을 품되 해지기 전까지 품고 품지 마라. 그래서 우리는 화 날 때 시계를 보던지 다락방에 올라가서 해지는 것을 봐야 돼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야 돼요. 5, 4, 3, 2, 1. 더 이상 화 못 낸다. 우리가 말씀대로 지키려면 그 수밖에 없어요.

에베소서 5장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 옆에 음주측정기를 둬야 돼요. 술을 먹되 혈중알코올 0.2%. 이것도 한의원에 가야 돼. 소양인이냐, 뭐냐에 따라서 취함의 강도가 다르거든요. 소주 한 병 먹고 취하는 사람 있고 나같이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 있고. 서울에서 내려오다 보면 술꾼들이 타거든요. 그럼 나는 지하철 타지 말아야 돼요. 버스 타도 특실 타야 돼. 11시 넘으면 술꾼들 타고 있거든요. 무슨 고난이 그런 고난이 다 있습니까? 취하지 말라는 말씀 지키기 위해서.

말씀은 네로 하여금 지켜야 한다는 충동을 유발시킵니다. 그리고 유발된 충동을 통해서 우리가 주께서 원하지 않는 내 기억 속에 마귀가 와서 편집한 나만의 우상화시키는, 신으로 절대화시킨 나쁜 현실을 유발하는 그 계기가 말씀이에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안 해도 구원 시켜주잖아요. 주께서는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분이니까. 이미 자기만 잘났다는 그 인간은 네가 내 손을 줬다는 걸 확인한다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렇게 엉망이고 개판인 내가 놀랍게도 주님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구원된 사람입니다. 그게 야곱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데 미리 기대한 적이 있어요, 없어요? 천사와 씨름하면서 해 뜨는데 우리 그만 싸웁시다. 그랬습니까? 야곱이 아는 현실은 작아요. 외부의 현실이 야곱의 현실에 침범하니까 야곱은 삭제됐어요. 야곱은 없다는 내용을 품은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제는 야곱이란 인간이 다뤄질 인생이 아니고 소급해서 사랑받기로 작정했던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야곱이란 인간으로 이 땅에 한 때 살다가 야곱이란 이름으로 죽어야 될 인생이다. 이걸 야곱은 나그네 인생이라고 했어요. 본향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는 어느 곳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요. 주여, 어느 곳으로 가야 됩니까? 지시를 듣고 만나는 장소가 하나님이 지시한 곳이에요. 그럼 어디까지 지시합니까? 요한복음 8장에 보니까 아브라함은 예수님 만나기를 그리워하다가 만났다고 돼있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마지막 도착지점은 뭡니까? 예수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갑니까? 어떻게 가기는 예수님 나라가 덮쳐오지요. 구약은 찾아가지만 신약은 찾아오게 돼있어요. 구약은 찾아가다가 업어졌고 신약은 이미 찾아와서 내 인생은 계속 매일같이 자빠져야 돼요. 이미 찾아왔기 때문에.

그게 성령 안에서 의인 되거든요. 성령이 오셨기에 우리는 폐품 처리해야 될 것을 버리는 과정인데 그냥 버리면 안 돼요. 내 속의 괴물들을 바깥으로 드러내면서 주께서 알아서 버리십니다. 그게 막 사는 거예요. 평생 동안 막 살면서 구원되었음을 그때그때마다 확인하고 고백하고 자백하고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밖에 안 되는 강도를 구원하시다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예수여, 날 빼나봐라.” 자기 현실 연장 속에 예수를 같이 세운 거예요.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 속에 들어오라는 거거든요.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주님의 현실 속에 이미 포함돼있습니다. 그런 취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생각해주옵소서. 예수님과 자신이 한 패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강도되게 하셨군요. 강도가 무슨 잘한 짓이라고? 자랑이 아닙니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일한 현실이에요. 현실관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강도란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요. 빨리 강도에서 벗어나서 판사 돼야지. 이게 아니고 주어진 강도마저 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내미신 것이라는 겁니다.

귀신 들린 수로보니게 여인도 마찬가지고.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병 낫고 난 뒤에 병 낫는 것이 내 존재의 의미가 아닌 걸 알았어요. 누가 나를 병들게 했는지 아는 게 나를 병들게 하신 분만이 낫게 하실 분이라고 믿어줘야 병들게 하신 이유가 주님에게 있음이 확인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시험에 떨어졌다. 떨어졌으니까 다음에 합격시켜달라고 하면 안 돼요. 시험에 떨어지고 합격하는 것은 내 뜻이고 떨어지는 것도 나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고 주님과 관련된 문제라면 다음에 붙든 떨어지든 그건 제 소관 아니고 주님의 소관이라는 고백이 나와야지요. 그럼 주님이 뭐라 합니까? 그러니까 오늘도 공부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이번엔 영어. 알겠습니다. 수학. 알겠습니다. 하다 보면 어느 대학 붙겠지요. 그러면 주께서 하신 것이지요.

어떤 의사가 병을 고치는데 다른 의사는 지식으로 고치지만 그분은 이렇게 고친다는 거예요. 주님, 저 환자를 보내셨는데 제가 아는 범위에서 어떤 치료가 정확한 겁니다. 하고 치료한다는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미쳤나, 뭐야. 무당이야, 의사야?” 하겠지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나는 환자를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통해서 주께서 하시지만 나는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럼 고치지 말지. 아니 내가 고칠 수 없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사용하잖아요. 내 힘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드려내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주께서 살려줬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은 누구한테 한다? 헌금을 나한테 한다는 말이 맞는 말이고 더 정확하게는 내 안에 계신 주님한테 헌금한다는 말이 맞아요. 다시 말해서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드리는데 그냥 서비스하는 거예요. ‘감사헌금’이라는 글자 쓰는 정도. 봉투에 돈 넣고 주께 드립니다, 하고 얼른 받아서 봉투 빼고 잘 쓰겠습니다. 그걸 빨리하는 거예요. 그게 헌금이에요.

왜냐하면 이미 가시적 실적은 헌금하는 행위자체가 주님의 가시적 실적으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을 안 하게하는 것도 주의 뜻이라고 믿어지는 기쁘게 믿는 안 기쁠 수가 없지. 헌금 한 해도 된다는데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기쁜 나도 주의 작품이라고 보는 거예요. 사나죽으나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으로 하라. 이게 바로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한국교회뿐만 아니고 이천 년 교회는 이걸 명령이 있으니까 지키라. 지키는 사람마다 뭘 생각하겠어요? 어떤 가시적 실적, 너희 교회 헌금 얼마나 나오노, 교인 몇 명이야? 이것을 궁금해 하고 은근히 노리고 있다는 우리 자신들이 옛날 멸망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 길을 밟아가도록 조치해주셨습니다.

얼마나 친절합니까? 우리가 갈 수 없는 십자가 길을 지금 가고 있잖아요. 낚시하는 십자가의 길, 골프 치는 십자가의 길, 뷔페 먹는 십자가의 길, 쟁반짜장 먹는 십자가의 길. 얼마나 감사하며 갈 수 있어요, 십자가 길을. 그런데 찡그리고 사흘 동안 굶고. 진짜 막 욕이 나오려고 해. 왜 그런 짓을 해요. 아프리카 가고, 날 죽여라. 어디 그런 연기를 핍니까? 가만있어도 되는 십자가 길을 얼마나 십자가 길을 모르면 지가 기대한 지가 의도한 십자가를 흉내 내고 연출하고 있느냐 말이죠. 가짜지요.

여러분 가는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시면 여러분이 탕자인 것을 알게 되고 탕자인 것을 알게 하는 그 길이 아버지께 가는 지름길이고 그 길이 바로 영원한 아버지 품에 안기는 길이에요.

제가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쉬운 문제에요. 긴장하지 마세요. 탕자가 아버지한테 가락지 받고, 옷 한 벌 입고, 소고기 부위별로 먹고 잔치 벌였지요. 그리고 난 뒤에 탕자가 마을 사람들한테 자기가 잘났다고 이야기했어요, 못났다고 이야기했어요? 나 이제 탕자 아니에요. 이젠 훌륭한 아들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전 탕자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탕자라 이야기해줘야 아버지 은혜가 넉넉히 살아있기 때문에 바로 그 공식이에요. 가만 듣고 보니 쉽지요.

그러니까 성막을 만들고 기구를 만들게 되면 저건 내 가락지로 만든 것, 내 패물로 만든 것, 저 제사장 복장은 우리 부녀회에서 전문으로 만든 것, 이런 식으로 하게 마련이에요. 인간은. 자기가 바치는 행위에 의미를 두기 때문에 내가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가만있으면 우상이 안 될 것을 주께서 명령하고 실천에 옮기는 순간 내가 곧 중심이고, 이것 안 알아주면 난 불쾌할 거야, 싫어할 거야, 주님께 원망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무심코 하나님이여, 일을 이렇게 하시면 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하필이면 나에게. 피곤하고 힘들 때 그런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그렇게 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우상적인 요소가 튀어나오는 순간이에요. 나는 나 아닌 나가 아니라 내가 소망하는 나를 붙들고 있었구나. 주님께서는 내가 모르는 나로 바꿔주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2,202 강의 리꾀르의 해석학 - 최고관리자 15-12-16
2,201 강의 메를로 -뽕띠 151214 미가 최고관리자 15-12-15
2,200 강의 말씀의 주권 151211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5-12-12
2,199 강의 창 151211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5-12-12
열람 ➜ 강의 헌금 151204 미가 최고관리자 15-12-04
2,197 강의 혜화동 특강 - 언약의 흐름- 151203 [신학] 최고관리자 15-12-04
2,196 강의 아버지 151203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2-04
2,195 강의 유튜브(136강, 137강) 삶과 현실 , 세상 151203 [신학] 최고관리자 15-12-04
2,194 강의 주님 경유 151127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28
2,193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4 - 환각적 믿음 잠언 최고관리자 15-11-25
2,192 강의 사무엘상 8강(중독), 마태복음 70강( 반전) 151124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1-24
2,191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3 - 뺄셈(수정) 잠언 최고관리자 15-11-22
2,190 강의 일방적 구원 151119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1-20
2,189 강의 유튜브(134강, 135강) 눈물의 차이, 우상과 미신 151119 [신학] 최고관리자 15-11-20
2,188 강의 뽀족한 수 151113 디모데후서 최고관리자 15-11-14
2,187 강의 대타 151113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5-11-14
2,186 강의 베르그송 151110 [신학] 최고관리자 15-11-10
2,185 강의 나는 가짜다 151106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2,184 강의 예외자 151105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2,183 강의 유튜브(132강, 133강) 부러움, 문화가 된 기독교 151105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2,182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2 - 힘과 기계 잠언 최고관리자 15-11-01
2,181 강의 사무엘상 7강(누구나 메시야), 마태복음 69강( 12보좌성) 151027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0-27
2,180 강의 혈연관계 151023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5-10-24
2,179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1 - 가시적 초월 잠언 최고관리자 15-10-22
2,178 강의 거주지 151015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0-1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