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36강, 137강) 삶과 현실 , 세상 151203강의[신학]

유튜브(136강, 137강) 삶과 현실 , 세상 15120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136강

137강

이미아(IP:122.♡.169.34)

15-12-19 22:39

136강-YouTube강의(삶과 현실)151203-이 근호 목사

제 136강, 제목은 ‘삶과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이라는 것이 자기가 태어나면서 현실이 마련되어 있고 자기는 그냥 현실에 맞추어서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 속에 자기 삶을 한 모퉁이 잡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평생토록 살아가면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 삶이 끝나고 난 뒤에 주어진 현실에 대해서, 이 세상 현실이 미리 그걸 이야기해줘야 될 텐데, 그냥 무작정 죽는 날만 기다리죠. ‘죽고 난 뒤에 뭐 되겠지. 가보면 알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고 현실 속에 미래의 삶이 미리 여기서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걸 캐치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은 태어나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있고 그 현실은 굉장히 크고 넓거든요. 그렇다면 자기의 삶은 거기서 한 모퉁이를 담당하는 거예요. ‘그래. 니는 니대로 그렇게 살고 나는 나대로 소박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죽으면 그만 이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구성되어 현실이 모두가 되고 전부가 되겠죠. 그리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느냐 하면 현실이 끝났을 때, 자기가 눈을 감았을 때에 본인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과학적에서는 이야기하기를 화장해서 재로 뿌리면 다시 자연 현실로 섞여버린다, 끝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해볼 때 그럼 인생은 어차피 살다가, 살다가 못 견뎌 죽으면 그만인 거죠. 그러면 사람들은 왜 태어났는지 이유도 없고 단지 살아 있기에, 살기 위해서 꾸역꾸역 사는 것뿐이죠.

그렇게 과학적 인식이 되어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살면 되는 세상이죠. 나만 살면. 나만 살면 남는 거예요. 남이야 죽든 말든, 울든 말든 나만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나만 버티고 살면, 쉽게 말해서 나만 행복하면 되는 세상. 버티다, 버티다 못 버티면 힘을 합작해서, 모아서라도 기어이 한 구석 차고 들어가서 살게 되면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라고 보는 겁니다.

옛날 어렵게 살 때에, 식구들 많고, 방 하나에 이불이 하나밖에 없을 때, 하룻밤 추운 날 어떻게 지냈는가, 그냥 자기만 이불 돌돌 감으면 되죠. 옆에 있는 동생이고 형이고 어떻게 되든지, 춥든 말든 자기만 포근하면 되죠. 상당히 이기주의적이지만, 그 이기주의를 능가하는 윤리도덕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도 조건이 있어야 돼요. 베풀어 준 만큼 뭔가 많은 수익을 가지고 되돌아 올 때만 베풀어 줄 용의가 되어 있고 그렇게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만인에 대해서 만인이 투쟁하는 사회” 토마스 홉스 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 세상은 동물들의 왕국인데, 인간이 동물이죠. 동물들의 왕국인데 강자는 살아남고, 못한 사람은 강자의 종이 되어서 그 정도로 살아남으면 그만이다.

문제는 강자든 약자든 간에 늙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뒷방 차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만약에 인생사는 게 전부라면 일단은 사는 것은 간단한 논리가 됩니다. 힘을 다 모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아 산다. 그러면 양심이라는 것은 뭐냐, 잊어버려라. 양심보다도 내 생존이 우선이다. 내 가족과 내가 잘 되는 것이 우선이고 양심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에 대해서, 인간은 그렇게 살았으면 잘 사는 거거든요.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잘 사는 건데, 이상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그것이 왠지 자랑스럽지가 않아요. 자랑스럽지 않고 그냥 나만 위했고 나만 챙겼다는 생각이 드는 그것이 자랑스럽지 않은 것을 가지고 수치스럽다고 하거든요.

결국 인생 산다는 것은 뭐냐 하면 꾸역꾸역 자기가 치밀어 오르는 수치를 매일같이 짓밟고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면서 내가 나한테 설득하는 겁니다. ‘바르게 살아야 되지만 사는 것이 우선이라서 좀 참아다오! 나중에 돈 벌고 한가할 때 남 도와줄게.’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에게 변명하면서 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그런 것은 우리가 이해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세상에 살면서 끝까지 교회까지 온다는 겁니다. 교회 와서 그것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교회 와서 뭐 새로운 것이 없고 교회도 똑같이 그런 역량을 키우는, 하나의 학원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안 펼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펼치게 되거든요.

펼치게 될 때에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도대체 성경이 우리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예레미야 31장 3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성경에서 현실이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남긴 흔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캐치하지 못하면 교회만 들락날락했지, 결국은 그 미래는 보장받지 못하죠. 그리고 난 뒤에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죄를 사하고 기억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 쪽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어떤 일을 벌이느냐 하면, 우리가 사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될 만한 모든 것을 끄집어내는 그 평지, 그 바탕으로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게 하신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이 있는데, 약속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너희 죄를 용서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는 기쁜 소식을 주께서 마련하셨습니다.

주께서 마련한 것이 죄의 용서와 기억치 아니함을 준비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버티면서 나만 살면 된다는 식으로 그저 밀어붙이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이게 의미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성경 말씀과 우리와 욕구와 이게 서로 교류를 해보면 의미는 뭐냐, 주께 발각될 수밖에 없는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죄 중심으로 내 인생을 다시 정립해야 죄 용서하시는 분과 다시 매치가 되고 연결이 되죠. “그저 나는 열심히 살다보니 살았습니다.” 라고 한다면 주께서 준비해놓으신 것과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니가 잘했다는 말인가?” 하시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우길 거예요.

그 최선을 다했다고 우기는 것이 교회의 대표기도 시간에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주께서는 이미 죄를 주목하고 그 죄를 용서하는 흔적을 너희들 속에, 너희들 신앙고백 속에 남겨줬다는 겁니다. 우리는 말하죠. “살다보니까 그 흔적을 놓쳤어요.” 그게 뭡니까? “니는 어떻게 해도 니는 실패한 인생이다.”

우리는 망해야 마땅하고 실패해야 마땅하고 더 나아가서 지옥가야 마땅함을 주께서 구원의 흔적으로 이미 우리 인생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주여! 살아봤자 죄만 증거할 뿐인 인생을 그동안 살아왔습니다.” 라는 고백. 그럴 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니가 그런 고백을 하는 그런 구조, 틀, 그 틀은 이미 죄를 용서하려고 준비된 틀에서 나왔던, 같은 공간에서 통하는 구조다.” 라고 보신 거예요.

따라서 회개는 우리의 결심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받기로 작정된 자에게만 그런 회개가 나오는데, 그 회개마저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용서의 흔적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주님의 번져진 약속을 보여주는 삶이 성도의 특이한 삶입니다.

이미아(IP:122.♡.169.34)

15-12-19 22:42

137강-YouTube강의(세상)151203-이 근호 목사

이번에는 제 137강, 제목은 간단합니다. ‘세상’입니다. 세상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은 인간들의 조합, 모임, 인간들이 이해하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들만의 세상이 아니고 천사들이 굉장히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그 말은 인간들에게 관심 두고 인간들을 위하여 이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다른 분의 의도 때문에 세상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연 내추럴natural이라고 이야기해요. 자연이라는 뜻은 스스로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근데 주인공이 없다는 거예요. 주인이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누구 말 들을 필요도 없이 서로서로 의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들이 말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란 뭐냐, 공동체 내에서 수치를 느끼는 것을 죄라고 간주합니다. 다들 동의하는데 동의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냥 고개 숙이고 전통에 따라라. 안 그러면 우리 공동체에서 니 추방당해.” 이게 옛날 고대사회에서부터 오늘날 교회까지 계속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개념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가 시집갔다. 그러면 여자는 시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죽어서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 친정보지 마라. 그래서 옛날에 들었던 이야기하면 여자가 시집가서 쫓겨나면 친정에서는 안 받아줘요. 그걸 가지고 출가외인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요새는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잘못 활용하고 있어요. 친정에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니까, 딸보고 돈 내라고 하니까, 딸이 출가외인인데요. 나는 몰라요. 자기 필요할 때만 출가외인이지만.

원래 출가외인은 서글픈 용어죠. 다시는 친정보지 마라. 다시 말해서 그 공동체에 순종하고 그 공동체에서 지적을 받게 되면 니는 우리 가문에도 수치스러운 죄인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그걸 누가 만들었는가, 전통이 만들죠. 왜 이 전통이 그렇게 압력을 행사하는가, 인간의 정신구조는 대대로 양육 받은 전통에 의해서 인간의 정신활동이 상승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딱 깨보면 나름대로 살아왔던 자기 가문의 전통들을 입으로 끄집어내놓고 토론하고 그것과 대화에 나서고 그렇습니다. 자기 집안의 내력, 자기 집안의 인식을 개성 있게 전부다 내놓는 거죠. 그러면 하나가 되기가 곤란하니까 그때는 양보하고 타협해서 대충 맞추는 식으로 그렇게 되는데,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10장 34절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되어 있죠. 아까 강의 제목이 뭐냐 하면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누가 관리하느냐, 인간이 관리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님이 관리하는데, 창조주가 관리하는데,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면 있는 화평도 깨러 옵니다. 있는 화평도 깨러 오시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사람들은 아무리 세상이 번잡해도 우리 식구끼리 똘똘 뭉치면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그런 의도를 아시고 그 식구끼리의 틈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35절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가장 최소한도로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우리끼리만 이라도 마음 맞춰서 살자‘가 행복의 그 온실, 최후로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온실인데, 그 온실마저도 주께서 사정 봐주지 않고 침입해버립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세상의 기본은 가정이고, 가정이 확대되면 세상이고, 사람은 거기서 행복을 찾고자 합니다. 그뿐이에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유를 알아야 되겠죠. 아브라함의 경우에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니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어디로요?” 그거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부르다 보면 만나는 곳이 바로 약속의 땅입니다. 그 땅을 아브라함이 미리 알 필요는 없다. 가르쳐주지 않아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보고 갈 바를 알지 못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 가는 거예요. 믿음입니다.

보통 인간의 세상은 미리 알고 그걸 붙잡으려고 하는데, 주님의 믿음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믿을만해서 믿겠다는 것은 인간적인 신임에 불과하지만 모르면서도 부르심만 있으면 그게 어디든지 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건 완전한 자기포기입니다. 나의 생각, 나의 판단력을 포기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는가, 가는 방법은 있습니다. 부르심이 그냥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전환시키는 그런 사태들이 일어납니다. 그 사태에 대해 한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6절에서 48절에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외침을 같은 공동체 세상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소경 바디매오가 세상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단 한 사람,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 기다리느냐, 누군지 모르지만 그 메시아로 인하여 자기가 소경되었다고 어딘가 원인과 결과를 이렇게 연결시킨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할 때는 내 인생이 내 마음에 흠뻑 들 경우에 그런 용어를 쓰거든요. 뭔가 일이 잘 되었을 경우에, 예상 밖의 성공했을 때, “주여 내가 내 자랑하고 싶지만 꾹 참습니다. 제가 아는 멘트를 사용하겠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저 착하죠?” 하는 그게 거기에 가미되어 있죠.

그러나 소경 바디매오 같은 경우에는 누가 욕해도 거기에 이의 걸지 않는 망해버린 인생입니다. 누가 욕해도, “그래서는 되겠느냐?” 지적질 할 정도로 망해버린 인생이 바로 소경 바디매오입니다. 그런데 소경 바디매오는 자기가 소경 된 것은 이게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 하면 메시아와 연결되기 위한 그 소경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바디매오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소경되어야만 그런 팔자를 주로부터 부여받은 거예요. 그러한 연결과정속에서 뭐가 나오는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용어 나오죠. “불쌍히 여기소서” 용어 나오죠. 다윗의 자손, 불쌍히 여기소서, 그 노선이 뭐냐 하면 주께서 유발시킨 노선입니다.

누구든지 바디매오처럼 자기가 그런 노선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없어요.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을 내놓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메시아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서만 구원해주죠. 그럼 우리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요소로써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불쌍한 존재고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고. 그 가운데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주님의 공로로만 우리가 거기서 긍휼을 입게 되고.

따라서 누구나 눈 뜬 바디매오가 되든지, 눈 감은 바디매오가 되든지, 어쨌든 간에 내가 나 된 것은 그 원인을 주님 쪽에서 찾아야 될 그러한 운명에 속한 사람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 바디매오가 우리의 대변자요, 인생의 표준입니다. 아이구, 쯧쯧, 안 됐다, 소경됐네, 이렇게 동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도리어 바디매오가 우리를 동정해야 할 입장에 있어요. 얼마나 니가 잘난체 했으면 니가 이런 것도 이해 못하나?, 내 심정도 이해 못하냐? 이렇게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를 지적질하고 고발하는 바디매오.

우리는 바디매오 안에 계시는 주님으로부터 날마다 지적당하는 죄인이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은 소경된 자, 절름발이를 낫게 해줄 때, 이거는 나는 건강하니까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하지 마세요. 얼른 우리는 병신 된 자, 소경된 자로서 합류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이 내리쬐는 그 조명에 바다에 우리가 합류돼야 합니다.

◁ 이전글

다음글 ▷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092 설교 만찬의 효과(고린도전서 11:30-34)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2-06
15,091 우리교회 죄사함 151206 - 최고관리자 15-12-06
15,090 강의 헌금 151204 미가 최고관리자 15-12-04
15,089 강의 혜화동 특강 - 언약의 흐름- 151203 [신학] 최고관리자 15-12-04
15,088 강의 아버지 151203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2-04
열람 ➜ 강의 유튜브(136강, 137강) 삶과 현실 , 세상 151203 [신학] 최고관리자 15-12-04
15,086 묻고답하기 고전5:5절 말씀 풀이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2-03
15,085 자유게시판 15강-창 2장 18-19(돕는 배필)15120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02
15,084 우리교회 돕는 배필 151202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2-02
15,083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12절(가락-일방적 구원)151119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2-01
15,082 묻고답하기 성육신에 대하여... 역대하 최고관리자 15-11-30
15,081 자유게시판 59강-신 10장 6-8절(레위인의 역할)151129-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1-29
15,080 자유게시판 67강-고전 11장 27-29절(죄를 먹고 사는 자)151129-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29
15,079 묻고답하기 주의 만찬의 효과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29
15,078 우리교회 레위인의 역할 151129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1-29
15,077 우리교회 에스라 151129 에스라 최고관리자 15-11-29
15,076 우리교회 상징적 몸 151129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29
15,075 설교 상징적 몸(고린도전서 11:27-29)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29
15,074 강의 주님 경유 151127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28
15,073 묻고답하기 디모데전서에서 - 최고관리자 15-11-27
15,072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8장 12절(가락-일방적 구원)151119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1-26
15,071 자유게시판 14강-창 2장 16-17(선악과나무)151122-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1-26
15,070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4 - 환각적 믿음 잠언 최고관리자 15-11-25
15,069 우리교회 선악과 나무 151125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1-25
15,068 강의 사무엘상 8강(중독), 마태복음 70강( 반전) 151124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1-2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