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배필 151202
돕는 배필 151202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돕는 배필(창세기 2:18-19)
이근호
15-12-02 21:48
돕는 배필
2015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8-19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2:20)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사람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에 대한 명칭은 결코 아담이 짓지 않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창조 세계에서 인간이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이는 모든 개념과 의미의 시작을 인간으로부터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정답이나 진리를 알아야 될 권리조차 발휘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어떤 행위를 한다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게 의미를 두고 시작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아담에게 선악과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왜 아담에게 이름짓기를 시키신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즉 이름과 선악과 나무가 무슨 관련성이 있는 것인지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왜 돕는 배필이 필요한지도 알아봐야 합니다. 도대체 그 배필이 도와야 할 그 일이 무엇인지가 규명되어야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창조의 원리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존재보다도 창조 원리가 우선이라는 점이 감안되어야 합니다.
선악과 과실을 따먹지 않는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지금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짓게 하신 이유도 순결한 아담으로부터 출발할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한 죄인으로부터해서 추적되어야 합니다. 즉 과연 이름을 붙인 모든 동물들이 아담의 책임 하에 정상적으로 창조 원리를 보여주고 있는가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름을 지은 아담’에게 처음부터 주도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름’ 그 자체에 창조 원리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아담이 지어준 이름은 이제와서는 아담과 관련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아담의 등장을 연관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사물이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그 사물에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아담 때문에 가리워졌지만 실은 사물보다 먼저 이름에 전 피조세계가 예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썩어짐’, 혹은 ‘죽음’과 관련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아담보다 선악과 나무의 선행 취지’가 유지되고, 이것이 유지되므로서 창조원리는 하자없이 지속되어 있는 바가 됩니다. 즉 아담은 죽어도 선과 악은 여전히 이 피조세계에 살아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여자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온 피조세계가 다 죽습니다. 곧 ‘이름들’이 죽는 겁니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창조원리의 유지책의 일환으로 ‘다른 아담’으로 인하여 ‘생명’의 이름으로 창조원리를 빛내어야만 합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아담 본인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 ‘이름’이 죽음과 만나게 되면, 그 이름은 새로운 사물로서 등장해서 창조원리의 여전함을 보이게 됩니다. 그 이름은 곧 ‘주의 이름’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물이 있고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차원에서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합당한 대상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즉 나타나지 않는 분을 위해 만들어진 사물과 동물과 아담은, 중간에 등장한 아담의 죄로 인해 망쳐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본래의 의미로 완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담이 동물들 이름을 잘못 지어서 죽게 된 게 아닙니다. 순전히 선악과 과실을 따먹어서 죄인되어 죽게 됩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는 죄라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은, 창조원리에 위반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아무리 아담이 지혜롭게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합법적으로 처신해도 선악과 과실을 따먹은 이상 아무리해도 모든 것이 죄가 될 뿐입니다.
이는 아담이나 여자가 나름대로 자기 주장을 펴칠 자격이 애초에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을 돕는 배필이 왜 등장되어야 하는 겁니까? 잠언 19:14에 보면, “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남자가 속한 영역과 여자가 속한 영역이 상호 다릅니다. 배필자가 해야 될 일은 아담의 이름에 합당한 자리, 곧 창조물의 자리를 지키도록 간섭하는 일입니다.
죄짓고 난 이후, 남자는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여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즉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저 아내는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로부터 온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있는 그 아담이 자리를 위하여 나에게 남자와 관계 지어주셨다”고 보는 겁니다.
즉 ‘존재’를 인간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돌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기능적 관계성 뿐입니다. 남자가 남자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기 위해 ‘여자의 기능자’로 본인이 영원히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입었다는 의식으로 아내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의 감시망 안에 놓여 있습니다. 그 감시의 기준은 ‘돕는 배필자 기능’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내가 하는 일 돕기 위해 너라는 존재가 있으니 마땅히 내 말에 순종해서 이 남편이 하는 일에 협조하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로부터 온 지혜로는 아내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존재보다 먼저 계신 분을 위하여 나는 당신이 하는 일을 간섭하고 질책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습니다.”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는 남성 존재 중심이었기에 그것이 관행이 되고 관습법이 되어 여성들도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이런 기준에 맞추어 양육되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남자들은 자신이 여자에게 베푸는 것이 정의요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반면에 여성은 서로의 존재가 중요하지 않고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 그 관계가 더 중요한 겁니다. 아무리 남편이 사회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도 집에 있는 아내는 “나만 아내 관계로 인정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런 부부는 이 세상에서 모델을 찾을 수 없습니다. 부부는 신비입니다. 이 신비 속에서 참된 부부인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가 나옵니다. 교회는 자신이 존재 우선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선인 것을 인정하는 자를 말합니다. 주의 뜻대로 도와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롬 8:27)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편리를 위해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님을 알아서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우리 삶도 함께 끼어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2-03 05:42
15강-창 2장 18-19(돕는 배필)15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18-19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2:18-19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계속해서 어떤 일을 맡기시는데 맡기신 그 일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포함이 됩니다. 인간만 달랑 창조하고 끝, 그것으로 창조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조되었기에 창조된 피조물을 통해서, 아담을 통해서 계속해서 창조의 원리, 창조가 품고 있는 그 원리, 창조의 법칙 같은 것이 만들어진 창조물인 인간을 통해서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거지요. 인간을 통해서 창조의 원칙과 법칙이 뿜어져 나온다면 그것이 도달되는 목표가 있을 것인데 그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16절, 1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죽음을 언급해서 창조가 무효가 되는, 창조했다는 그것이 본래창조의 중심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창조했던 그 전의 혼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이 죽음으로써, 그동안 몰랐던 창조의 중심원리가 죽음을 통해서 크게 부각이 되고 살아나게 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그 기준이, 인간이 무슨 일을 저질렀다든지 무슨 일을 잘못했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고 선악과나무의 과실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들게 되면, 아담에게 종달새나 금붕어나 기린인데 이름을 ‘난쟁이’라고 했다면 “네가 그것들의 이름을 난쟁이로 지었어? 틀려먹었구나. 죽어라.” 이런 법은 없다는 말이지요. 쉽게 해서 인간이 하는 그 어떤 행위도 죄가 되지를 않습니다. 단, 선악과만 따먹지 않는다면.
이 말은 이름을 어떤 식으로 짓더라도, 예를 들어 거북이를 보고 ‘날쌘 돌이’라 지었다고 해서 죽지를 않아요. 치타를 보고 ‘느림보’라 지어도 죽지를 않습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 외에는 어떤 죄도 없어요. 그 말은 선악과만 따먹었다면 이름을 제대로 지어도 그것이 죄가 되고 3*7=21이라고 이야기해도 죄가 돼요. “라면 끓일 때는 물이 끓을 때 라면을 넣어야지 차가운 물에 라면을 집어넣으면 라면 맛이 없다.”라고 했더라도 그게 죄가 돼요. 맛있게 끓여도 죄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찾아야 될 것은 선악과와 이름 짓기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그 관련성을 찾아내야 됩니다. 선악과 앞에 서 있는 아담, 선악과 앞에 서 있는 아담은 어떤 행위를 창조행위로 부여받느냐 하면, 이름 짓기에 나섭니다. 그렇다면 이름 짓기가 아담으로부터 시작한 게 아니고 선악과의 취지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아담에게 이름 짓기가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땅에 아담이 지을 수 있는 이름이 따로 있다는 것, 아담이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아담이 이름을 짓지 아니하는 사물에 의해서 아담은 종속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이름을 어떻게 짓든, 잘 짓든 못 짓든 간에 죽고 사는 것은 나의 이름 짓기 기능과 상관없이 내가 지을 수 없는 확정된 이름, 선악과라는 이름과 생명나무라는 이름, 그리고 아담이라는 나의 이름, 그 이름의 자리, 그 이름의 자리에서 우리의 운명이 확정되어 있고 그 이름의 자리가 점점 더 퍼지게 되면 그 퍼지는 과정 중에 하나가 아담의 이름 짓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말을 해 봐야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지금 이름 짓는 아담, 그리고 아담을 돕기 위해서 있는 여자, 지금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걸 먼저 알아야 돼요. 아담은 없어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그 때 그 사람, 그 때 그 남자, 그 때 그 여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죄 짓기 전이기 때문에. 죄를 안 지었던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아담이 죄를 지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지 않았던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아담은 죽음이 돼요. 죽음이 되고 여자도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죽어버려요.
죽으면 뭐가 오느냐 하면, 죽는 자가 되기 때문에 이름 자체가 날라 가버립니다. 그 이름이 날라 가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됩니다. 흙이라든지, 하와라든지. 남자는 흙, 여자는 하와로 새로운 이름이 부과가 되지요. 아담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사물이 있기 전에 먼저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아담아, 네가 명심하라는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먼저 물건이 있고 그 물건의 이름을 지으면 그 물건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이름이 있다고 하지만, 원래의 창조세계는 물건이나 대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거기에 합당한 존재가 등장하는 겁니다.
“아담이 있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어놓고 그 다음에 아담의 이름을 지었으니까 아담이 먼저고 이름이 나중이잖아요.”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뭘 모르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 아담부터가 아니고 하나님부터라는 것을 잠시 깜빡 잊어버린 거예요. “아담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이름이 있습니다.”라고 하면 안돼요. 아담이라는 기능인이 있고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 말미암아 아담이라는 이름이 우선이고 아담은 거기에 합당한 존재가 돼야 돼요. 선악과 따먹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만약에 따먹으면 아담은 끝나요. 아담은 날라 가버리고 흙이 되어버립니다.
“목사님,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하십니까?” 하는데 왜 어렵게 하느냐 하면, 이 모든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을 위해서, 피조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창조세계를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출발점을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지 창조세계로부터 출발하면 안돼요. 그래서 이게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 먼저 계시고 그 이름에 합당한 분이 성육신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주의 이름이 먼저 있고 주의 이름이 육신을 만나서 예수그리스도가 되었거든요. 인간세계에서.
하나님이 육신을 입었다 하는 것은 나중 이야기에요. 주의 이름이 먼저고 그 다음에 육신을 입어요. 인간세계하고 다릅니다. 인간세계는 인간이 먼저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는 그것은 뭐냐 하면, 이미 인간들이 죄 짓고 난 뒤에 자기가 인간이고 싶어 해요. 인간이고 싶어 한다는 말이 뭐냐 하면, 모든 사고와 진리의 출발점을 ‘나 여기 있음’ 이것에서부터 출발하려는 죄악 된 버릇이 계속 있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한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기 있음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음에 우리는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확정된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의미 없어요. 생명나무가 어디에 있다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외칠 것은 생명나무가 어디에 있음을 외쳐야지 “목사님, 저 구원 받겠습니까?” 이러한 욕구를 들어주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저 구원받을 수 있겠어요?” “네가 뭔데?” “목사님, 저 선택되었습니까?” “네가 뭔데?” 왜 그걸 최초의 질문으로 던지느냐는 말이지요.
솔직한 것은 인정합시다. 죄 지은 인간의 그 솔직한 면은 인정합시다. 솔직하지도 않고 아는 척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솔직한 면은 박수 받을만합니다. “교회 오는 것은 사실 제가 구원받기 위해서 옵니다. 점괘한번 봐주세요. 제가 구원받겠습니~까?” 완전히 부채도사에요. “선택되었습니~까?” “아니~다!” “삐졌~다!” “너는 선택되었~다!” “감사합니~다! 교회 잘 다니겠습니다.” 이러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나는데 제자들도 별 사람들이 아니지요. “우리 중에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 자기들도 그것이 주님 앞에 할 질문이 아닌 것은 생각하지만 속이 울렁거리면서 늘 자기들끼리는 궁금해 미치겠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토론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겠는가?’ 이런 추세로 가게 되면 우리 반에서 누가 1등하고 졸업시험에서 누가 1등하겠는가, 그 말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아시고 “어린아이를 봐라. 어린아이가 ‘내가 잘났습니까?’를 묻지 않지? 어린아이는 자기가 의존하는 어른, 또는 부모를 섬기지. 그것처럼 너희들도 하늘나라를 우선으로 해라. 섬겨라. 하늘나라에 다 맡기고 너는 빠져버려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역전이 돼요. 섬기는 자가 높은 자가 되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 한 마디를 해야 되겠는데요. ‘나는 나를 버리고 하늘나라만 섬긴다.’ 이렇게 돼 버리면 이것은 불교가 되어버립니다. ‘나는 없다. 하늘나라만 있다.’ 이렇게 되거든요. 불교, 소위 성경연구 꽤나 하고, 이것은 도사인지 성경 연구하는 사람인지 분간도 안 되는 그런 사람들, 기독교내에 그런 도사들도 많아요. 신비주의자들이지요. 예수 높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 비우고 또 비우고, 뭐가 많이 차 있는 모양이지요.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섬기는 것은 낮추고 낮추는 것이 아니고 역전되는 겁니다. 내가 갈수록 죄짓는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냥 도 닦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비웠다, 나는 비웠다, 그것은 불교적인 의식이고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뭘 해도 죄가 돼. 또 하루 죄 지으려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구나.’ 보람찬 하루를 끝냈다고 하면서 저녁에 돌아올 때는 또 죄 짓고 오는 거예요. 모든 출발점을 “나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 죄에서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게 주님께 영광이 돼요. 다른 사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몰라요.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은 알겠지만 그게 죄가 된다는 사실은 인정을 안 하려고 하지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죄는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 가까이하려고 애를 쓰는 자체가 선악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었지만 봐주소.”라는 이야기에요.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그냥 눈 한번 찔끔 감아서 한 번 실수한 것이니 봐주세요.”라는 식으로 자기 존재불멸성만 우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존재위주라니까요. 자기존재가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생명나무와 선악과 그것이 우선이고 인간은 그걸 받쳐주는 기능인에 불과하거든요. 그게 지키는 것이고 그걸 지키는데 필요한 사람을 가지고 배필자라고 합니다. 남편 사업하는데 부인이 친정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집 담보 잡혀서 자금대도록 하는 그것은 배필 자 아니에요. 남편 일 도와주라고 여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 심심하다고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 여자는 감시자? 암행어사? 내부 사찰기관? 그럴 수 있어요. 남자들이 여자를 자기 일 도와주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죄 짓고 난 뒤에, 이젠 남자도 아니고 그냥 흙이지요, 그 흙이 비슷하게 생긴 흙 보고 그냥 전통적인 풍습으로 압력을 넣는 겁니다. “여자는 가만있어.” 하는 식으로 눈만 내놓고 온 몸을 가리게 하고요. 이런 전통은 이슬람이나 유교, 전 세계의 문화가 다 마찬가지인데 여자는 그런 식의 배필 자가 아닙니다.
잠언 19장 14절에 보면,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라고 하지요. 특히 집이지요.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집과 재물로 형성되는 그 영토, 그 영역과 여자가 거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겁니다. “네가 나한테 시집왔으면 내 재산 불리는데 기여해야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남자가 구성하는 집과 재물, 조상한테 받은 집과 재물에 여자가 하수인, 또는 공모자가 되고 말아서 여자 본연의 임무가 탈락되고 여성의 존재의미가 전혀 없는 그것에 속해서 여자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 돼요.
여자는 여자 할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가지고 지적 질 하는 거예요. “여보, 그것은 하나님 뜻이 아닌데?” 이렇게 지적하는 것이 여자의 할일입니다. 그거 하라고 여호와께서 보내신 거예요. “그런 여자가 있습니까? 여자가 시집오게 되면 남편보다 더 설치라는 말입니까? 남편 돈 벌어오면 그것으로 나돌면서 사기나 쳐대고 그렇게 되면 어쩌라는 말입니까?”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존의 남성위주의 관행과 전통과 풍습이 생존이라는 하나의 무기로써 압력이 가해져서 그런 거예요. “네가 시집가면 시댁의 귀신이 되어라. 만약에 시집이 잘 되면 너도 잘되고 시집이 못되면 너도 못된다.”라는 것을 어릴 때부터 양육 받고 교육받은 거예요. “우리 집안은 못살지만 네가 남자 하나 잘 만나서 나중에 너도 부잣집 마나님 되어야지.” 이게 여성의 목표처럼, 그렇게 해야만 되는 여자의 마땅한 임무인 것처럼, 남편의 집과 재물을 증식시키는데 기여하는 그것으로 여자의 임무는 끝, 이렇게 생각하는데 따져봅시다.
정말 따져보고 싶은 것이 이거예요. 사람이 왜 삽니까? 제발 이걸 따지고 싶어요. 사람들이 되게 바빠요. 무지 바쁜데 그들이 지금 뭐 하느라 바쁘지요? 뭐하면서 바쁘냐고요. 자신의 생존과 존재 때문에 바쁘지요. 그것은 동물입니다. 그것은 서울대공원의 동물이에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야 될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지정된 자리가 있어요. 아담 같으면 아담의 이름에 합당한 자리가 있어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으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했고 열두제자가 그길로 갔습니다. 사도나 열 두 제자가 굉장히 바빠요. 바쁜데 그 바쁜 것이 누굴 위함이었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 이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장악했음, 바로 영적싸움입니다. 이미 이 세상은 그리스도가 장악했다는 겁니다.
그동안 너희에게는 사적인 자리가 있고 그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서 돈 벌고 명예 어쩌고 하지만 그 돈과 명예는 우두머리가 다 가져갔어요. 다 압수해서 가져갔는데 그 우두머리가 악마입니다. 인간들 삼성그룹, 현대그룹, 백날 돈 벌고 국무총리가 된다, 대통령이 된다, 백날 해 봐야 그 모든 영광은 마귀가 다 가져가요. 마귀가 다 가져가니까 안 빼앗기려고 마귀 말 듣고 딸려가는 겁니다. 남자들이야 그거 하라고 해요. 하지만 여자는 배필자기 때문에, 감시자고 지적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여자가 있습니까? 또 주를 위해 사는 남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설교 처음에 그런 남자도 없고 그런 여자도 없다고 했잖아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그런 남자나 그런 여자를 찾지 마세요. 그런 남자도 그런 여자도 없어요. “그래도 창조의 원리가 있다면 남자를 돕는 여자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있지요.” “그러면 남자는 누굽니까?” “예수님.” “여자는 누굽니까?” “마리아지요.” 여자의 후손이지요. 예수그리스도를 잉태했잖아요. 뭐 그것도 협조한 차원이 아니고 본인이 아무 의사도 없이 그냥 기능인이지요. 애 낳는 기능인, 예수님 잉태하고 임신하는 기능인으로 나올 뿐이에요.
여자는 마리아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그렇게 여자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하나님의 세계, 하나님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당히 문제가 복잡해졌는데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가 남자고 당신은 여자다.’ 이렇게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문제가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남자, 여자라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남자, 여자라고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니까 그것을 그냥 흡수해버린 거예요. 음, 그렇구나, 하고 여긴 겁니다.
성경을 볼 때는 그 때의 그 남자, 그 때의 그 여자는 없어요. 왜 없어야 되는가? 죄를 지어서 죽었잖아요. 없는 거예요. 창조의 원리만 살아 있어야 돼요. 창조의 원리만 존재해야 되고 창조의 생명나무만 존재해야 되고 나머지는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기능인이어야 돼요. 예수님만 존재하면 되지 나까지 존재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런 생각을 들어본 적도 없을 뿐더러, 누가 이야기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더러 본인이 ‘내가 사람이 아니고 흙이다.’라는 인식을 평소에 안하게 돼요.
왜 안하느냐 하면, 뭐든지 나부터 출발하기에, 모든 의미가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나에게 뭐가 이익인가? 나한테 어떤 것이 유리한가?’ 이것부터 모든 것을 출발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을 자기 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배필 자, 여자,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 ‘아, 내가 외롭다. 그러면 주께서 여자를 붙여준다는 말이구나. 감사하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뭐예요? 죄 지은 사람이네. 결혼도 안했으니. 결혼도 안했잖아요. 사도는 혼자 사는 것이 더 괜찮다는데요? 결혼 안하면 죄가 되고 결혼하면 하나님 보기에 착한 일인가요?
아담에게 이름을 붙이게 한다는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자기가 이름붙인 그 동물들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름을 지으면서 내가 이름을 짓는다는 말은, 나의 뒤통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아담이라는 이름을 지었으면 내가 그 이름에 합당한,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돼요, 내가 그 이름에 합당한 존재로 있는 이상은 내가 이름 짓는 동물들은 내 소속이 되면서 유지가 되겠지만 만약에 내 뒤통수에 이름을 지어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면 이들이 반란을 일으킬 겁니다. 뱀이 인간을 이겨버려요. 인간이 뱀의 말을 들어버려요.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어버리지요. 이제는 동물들이나 인간들이나 인간들이 관장할 수 있는 능력 밖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동물이 썩어가고 피조물이 썩어가는 것을 관리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감당할 수 없어요. 처음에 이름을 지었던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돕는 배필이라는데 도대체 뭘 돕는다는 말입니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집과 재물은 조상으로부터, 혈연관계로부터 났지만 슬기로운 여인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면, 그러면 여자가 남자를 도울 일은 뭐냐는 거예요. 남자는 죄 짓고 난 뒤에 자기를 존재로 생각하거든요. 자기존재부터 출발합니다. “나 여기 있다.” 그 말이지요. 나 여기 있으니까 나 여기 있다는 그 말이 옳아 보이지만 그 말은 틀린 말이에요. 나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하나님밖에 없어요. 주님 외에는 나 여기 있다, 하면 안돼요. 나는 있다고 없고 없다가도 있다, 그렇게 돼야 돼요. 나 여기 있다, 고 이렇게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나 여기 있다, 남자가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여자가 등장하니까 ‘여자가 저기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자가 저기 있다.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네가 거기 내 앞에 있네. 그러니까 너는 나의 존재됨을 도와주기 위해서 너는 존재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남자들의 아주 공통된 특성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내가 여기 있다.’ 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자는 뭐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남자가 저기 있게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여자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지만 여자는 뭐냐, 남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와 자기 사이의 그 관계에 집중해요. 남자는 존재로 보지만 여자는 관계에 더 집중합니다.
예를 들면, 돈 많은 아랍갑부가 여자가 한 열 명 된다 칩시다. 돈이 많으니까 자기 여자들에게 집 사주고 차 사주고 골고루 다 해줬다는 말이지요. 남자 입장에서는 골고루 사랑을 주고 골고루 재산도 줬기 때문에 괜찮다고 보지만 여자 입장은 뭐냐? 나보다 먼저 남편과 결혼한 저 여자와의 관계와 내 관계 중에서 누가 진짜 부부관계인지를 생각해요. 그래서 남자가 자기 빼놓고 다른 여자한테 좋은 말을 한다든지 더 친절하게 되면 화가 나는 겁니다.
그렇게 화내는 그것이 남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너는 왜 그렇게 독점적이냐?” 여자는 남자를 독점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부부라는 그 관계가 중요해요. 네가 돈이 많든 똑똑하든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부부라는 그것을 인식만 해주면 가난해도 용납이 돼요. 그런데 돈 좀 있다고 바람피우는 식으로 해버리면 차고 집이고 간에 여자로서는 도저히 그게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를 보기 때문에.
범죄한 아담은 자기 자신이 존재로 출발하는데 여자는 ‘저 남자와 내가 왜 만났는가? 왜 나는 이렇게 저 남자를 사모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남자에게는 없어요. 남자는 ‘네가 있는 것은 나로부터 나왔다.’고 보지만 여자는 ‘주님께서 내가 너라는 남자를 만나게 해서……’ 주님이라도 좋고 누구라고 해도 좋지만 하여간 그것은 표현이 안 되는데 하여간 ‘누군가에 의해서 저 남자를 만나게 했다.’고 보는 겁니다. 뭔가 기능을 하려고 해요. 여자가 주는 밥이나 먹고 놀러나 다니는 것이 아니고 남자한테 뭔가 기능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자는 “내가 주는 밥이나 먹고 찍소리 하지 말고 가만있어. 밥이나 먹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되 내 일에는 간섭하지 마.” 남자는 여자를 그냥 키우는 애완견정도로 보고 여자는 남자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다 잔소리하면서 지배하려고 해요. 그래서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역사는 여자를 학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남자가 역사를 만드는데 여자들이 역사를 꼬이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여자를 학대를 함으로써, “너는 집안에서 애나 키우고 일체 남편 일에 간섭하지 마라.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지 일체 간섭하지 마.” 이렇게 강제함으로써 인류의 역사는 이루어져 온 겁니다. 이게 찬란한지 어쩐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 역사를 이룬 거예요. 거기에 순응 잘 할 때 그것을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남았어요. 이미 범죄하고 난 뒤에 남자와 여자는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어놓으니까 남자와 여자의 역할 속에서 드디어 선악적인 요소가 펄펄 나기 시작합니다. 이미 창세기에 나오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에요. 죄지으려고 환장한 인간들만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자는 여자대로 남편한테 잘해줌으로써 자기의 죄 값을 씻으려고 해요.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가장 노골적인 것은 뭐냐 하면, 내 행위로 말미암아 내 죄 값을 약간이라도 탕감을 해보려는 시도가 일어납니다. 부부사이에서.
예를 들면, 어떤 할머니가 폐지 모아서 5억짜리 집을 갖고 있는데 남편은 일찍 죽고 아들이 셋 있어요. 뻔한 것 아닙니까? 폐지 모아서 마련한 5억짜리 집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쟁탈전이 벌어졌겠지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그 5억짜리를 공평하게 나눠주면 되는데 맏이에게 다 주는 거예요. 할머니로서는 자기 재산이니까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할머니가 그렇게 한 이유가 있는데 맏이가 어릴 때 연탄가스로 죽을 뻔 한 것을 생각한 거예요. 큰 애한테 그 일이 너무 미안한 거예요. ‘얘가 어릴 때 탄 가스를 마셔서 몸도 약하고 공부도 못했다.’ 하는 죄책감이 있어서 그걸 탕감하기 위해서 5억짜리 집을 큰 아들에게 줘버린 거예요. 그래야 자기 죄 짐이 좀 수월하게 될까 싶어서 준 거예요.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형님만 아들이고 난 아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되지요. 당연한 거지요. 모든 여자들이 착한 편에 서서 해소하는 그 방식이 선악적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내가 남편한테 얻어맞아도 지은 죄가 많아서 그렇다.’ 이렇게 생각해 버려요. 그게 죄인데. 그게 천사 표 죄거든요. 하여튼 그게 천사 표 죄에요. “여자의 운명이란 게 그런 것이다. 참아야 되고 눈물 짜는 그것이 여자의 갈 길이다. 왜? 선악과를 먼저 따먹었으니까.” 이게 천사 표 교회의 여성상이에요. 참 교회가 위험한 곳입니다. 성경해석을 전부 다 그런 식으로 바꿨어요. “여자가 먼저 따먹었기에 참아야 하느니라.”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여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약속,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여자의 역할이고 남편한테 잔소리하는 그것이 여자의 역할이에요. “여보, 그게 복음이 아니야.” 이렇게 역할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본인 자체가 새로운 자리, 하와라는 생명에 걸 맞는, 예수그리스도에 걸 맞는 새로운 기능으로 나와야 돼요. 그 기능을 어떻게 하느냐? 자기존재를 포기해야 됩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 한다.’ 아닙니다. 살고 죽는 것은 이미 끝났어요.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이미 죽은 겁니다. 이제 살고 죽는 것을 신경 쓰면 안돼요.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거예요. 그 일을 신약에 누가 하느냐? 여자가 하느냐? 아닙니다. 남자가 하는가? 아닙니다. 성령이 하십니다. 성령이 바로 배필 자, 보혜사입니다. 누구의 보혜사인가? 누구의 배필 자인가? 예수그리스도의 배필 자가 성령이에요. 우리의 보혜사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보혜사, 주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받기만 하세요. 주께서 하시는 일을 받기만 하시면 됩니다.
받기만 하게 되면 여러분의 존재는 박탈당하고 박탈당한 그 현장에 비로소 몰랐던 나의 진짜 자리, 성도라는 자리, 예수그리스도인 이라는 그 자리가 비로소 느껴질 것입니다. ‘아, 내 존재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구나.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모습이 이 모습이구나. 죄 짓는 이 모습이 비로소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나와야 될 그 모습이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서 성경을 보면서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이미 성도되게 하셨고, 성도되게 하신 그 티를 살아가면서 팍팍, “이게 성도다.”라고 성령께서 배필 자로 보여주는 겁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이걸 한 마디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신비’라고. 에베소서 5장에,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 신비, 비밀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 비밀의 당사자가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선입감 없이 봤을 때, 죄인 입장에서 봤을 때, 십자가 안에서 봤을 때, 모든 일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쓰였고 이 현실자체가 주님을 위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