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강-창 2장 16-17(선악과나무)151122-이 근호 목사
14강-창 2장 16-17(선악과나무)151122-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14강-창 2장 16-17(선악과나무)15112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16-17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산에 사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먹을 수 있는 많은 나무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아담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그 과실은 따먹도록 되어 있는 과실이라, 그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따먹어라.” 그 명령은 굳이 하지 않더라도 딱 보면 압니다. 먹도록 되어 있는 것은 딱 보면 알지 “따먹을까요?”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먹을 수 있는 것은 그냥 먹도록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명령의 핵심은 “따먹어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따먹지 말라.”가 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인간은 헷갈리지요.
과실을 줬다는 것은 먹으라고 준 것인데 먹지 말라는 과실을 줄 이유가 없거든요. 에덴동산에 인간이 살고 있고 그 인간 주변에 과실수가 있다면 거기 있는 모든 것은 맘대로 따먹을 수 있다는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따먹어라. 그러나 이것은 따먹지 말라.”라고 할 때 아담은 생각해야 돼요. 이 에덴동산에서 나라는 인간, 아담이라는 인간이 있다고 해서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의 주인공이 나라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내가 먹고 싶을 때는 얼마든지 먹고 싶은 대상이 돼요.
그런데 그 틈새에 뭐가 들어오면서 따먹지 말라고 한다면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은 한 나무이지만 그 따먹지 말라는 하나의 명령으로 인하여 에덴동산 전체에 대해서 아담은 어떤 권리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아담의 입장에서 볼 때 에덴동산은 나의 것이, 본인의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에덴동산이 전체가 된다면 아담, 인간마저 그 전체를 받들어주는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일부가 돼요. 따먹지 말라는 그것 때문에. 그래서 ‘내가 이 에덴동산에 살면서도 내 맘대로 설칠 수 있는 동네는 아니다.’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담으로 하여금 ‘따먹지 말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야 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렇다면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보게 되면 “네가 죽을 수 있는 동네에 살고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죽을 수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인간은 우연한 존재라는 겁니다. 필연적 존재가 아니고 우연한 존재, 있다가도 없어지는 존재로 에덴동산에 놓여 있게 된 겁니다. 주인공이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필연의 존재가 아니고 우연한 존재라면 이 우연한 존재라는 말이 뭐냐? 필연적인 존재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필연의 존재는 따로 계시고 그분의 의미와 그분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의 부분으로, 일시적으로 이 에덴동산에 인간으로서 살고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 설계를 인간 본인이 한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드시고 인간을 거기에 두셨지 인간과 에덴동산에 대해서 의논해서 설계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만들면 네가 행복하겠느냐?” 인간에게 사전에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그러면 에덴동산은 누구하고 의논했는가? 그것은 인간은 모르지요. 하나님이 누구하고 의논해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두기로 계획을 했는지 그 분끼리의 뜻에 의해서 인간을 보조적으로 둔 겁니다. 그것을 창세기 2장에서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해서 그 ‘우리’라는 것, 한 분이 아니고 ‘우리’라는 분의 의사가 반영되어서, 그 뜻이 반영되어서 에덴동산에 있는 겁니다. 인간이 에덴동산 지킴이로 있으면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할 때 하나님 쪽의 의미와 목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조적인 역할로 인간은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 네 것 아니니 다 따먹되 이것은 따먹지 말라.”라고 하신 취지가 있는 겁니다. 특히 제가 강조한 것, 우연적인 존재라고 한 것, 이것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어버리고 훼손한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을 우연한 존재로서 인정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힘들어요. 세상은 망해도 본인만은 살고 싶잖아요. 세상이 나 빼놓고 우연의 존재로서 꿈처럼 날아간다 할지라도 나는 그냥 영원히 나이고 싶다는 것, 자신이 필연적 존재이고 싶지요.
어떤 사람이 고향을 생각합니다. 고향의 언덕너머의 푸른 잔디, 고향 역에 기차를 타고 내리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반겨줍니다. 오솔길, 금발의 메리와 뛰놀던 그곳, 메리의 입술은 금발이고 입술은 체리 같은데 그 시절이 떠올라요. 그러다 깨보니 꿈이에요. 깨보니 교도소의 간수가 지키고 있고, 늙은 신부가 서 있고 자신은 곧 사형대로 갈 입장입니다. 이 밤이 지나고 나면 나는 사형입니다.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 꿈으로 고향의 꿈을 꾼 겁니다. ‘아, 꿈이었구나.’ 진짜 현실은 ‘아까 꿈에 보인 그 고향에 내가 묻히면 그 때 내가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찾아와서 조문하겠지.’ 이게 탐 존스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의 내용이에요. “Green Green Grass of Home.”이라는 노래.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당하기 직전에 꿈을 꾸는 겁니다. 굉장히 고향의 푸른 잔디가 아름답지요. 자기가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 가사에 보면 인간은 우연한 존재입니다. 그 사형수가 죽고 난 뒤에 묻혔다 해도 다른 사람은 잊어버려요. 우리가 우연한 존재라는 말은 언젠가는 남들이 나를 다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라는 거예요. 내가 기억한 만큼 남들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 존재, 그게 바로 나입니다.
에덴동산은 나를, 아담을 기억하라는 동산이 아니에요. 아담은 우연적인 존재입니다. 아담의 후손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연한 존재에요.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따먹지 말라는 그것과 관련된 분이 에덴동산의 진정한 주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에덴동산에 따먹고 말고 할 신체를 가진 것은 아담뿐이지 않습니까? 아담밖에 없는데 아담이 에덴동산의 주인공 돼야 마땅하지 다른 주인공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이 들겠지요? 이제부터 제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인간을 우연적 존재로 보는 이유가 있어요. 일시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이유가 있습니다. 과실을 따먹는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한다는 거예요. 그게 희한하지 않습니까? 우리네 상식은 이래요. 선악은 따먹는 게 아니에요. 행동을 나쁘게 하면 악이고 행동을 좋게 하면 선이 되고. 어떤 과실이 있는데 그 안에 선악이 들어 있는 그런 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낯섭니다. 커피숍에 가서 “어떤 종류의 커피가 있습니까?” 하면 “선악을 하게 하는 커피가 있습니다.” 이러면 굉장히 신기할 거예요. “이걸 먹으면 아이큐 160 됩니다.” “성분이 뭡니까?” “쉿! 그것은 비밀입니다.”
옛 독일 동화에 보면, 뭘 먹으면 오래 살고, 뭘 먹으면 똑똑하게 되고, 또는 바보가 된다는 것이 있지만 실제 선과 악은 행동여하에 따라서 선하거나 악한 결과가 나오지 어떤 과일을 따먹는 것으로 선과 악을 몽땅 다 안다는 그것은 정말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본문 보면서 그런 생각 안 듭니까? 선과 악이 과일 안에 다 들어 있다?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린 결론은 간단합니다. 이 에덴동산에서 움직이고 있는 인간이, 아담이 전부이겠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은 우연적 존재에요. 아담은 우연적으로 있지만 정말 에덴동산의 주인공, 먹음으로서 선악을 아는 그 주인공은 필연적 존재로서 성육신 되시는 예수그리스도가 준비돼 있습니다.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라”(롬 5:14) “선악과는 어떤 나무입니까?”라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렇게 물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악과는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누구십니까?” 또는 달리 말해서 “누구의 속성을 보여주십니까?” 그걸 달리 이야기해서 “에덴동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계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분을 위하여 만들어 진 겁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선악과도 생명나무 과일도, 그리고 인간도, 뱀까지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속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땅에 창조된 겁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거창한 문제가 남아 있어요. 아담이 알고 있던 선악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모든 성경은 인간이 알고 있는 성경, 인간이 아는 지식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까지 끊어짐이 없이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했으니까 예수님만 증거 되지 아니하면 성경해석은 꽝입니다. 실패한 겁니다. 사람들이, 교인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든, 얼마나 감격을 했든지 눈물을 흘렸든지 상관없어요. 우연적 존재가 어떤 느낌을 갖는 그것은 바른 성경해석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이 내 뱉은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이 해석을 한 대목들이 신약성경에 굉장히 많거든요. 예수님이 쉽게 설명한다 하시면서 말씀하고 해석을 붙인 그 대목들이 신약성경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와 있어요. 그 때 그 분위기는 썰렁했습니다. 제자들이 아무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뭐야? 뭐지? 무슨 말을 하고 계시는 거지?’ 그러다가 나중에 오순절 날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성령을 받은 상태에서 그 말씀을 다시 들어보니까 ‘아하, 그 말씀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보았느냐?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여자여! 이 결혼식에 포도주 떨어진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모르고, 그렇게 해 놓고 또 물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신 그 이유도 모르고,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그 때는 또 무슨 때를 이야기하는지……. 사도요한은 그걸 남김없이 적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아, 그걸 다시 봐라. 이 세상 모든 것은 우연적인 존재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분이 누구신가를, 이 온 우주,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이 모든 것들은 누구를 위하여 생겨나야 했는가를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감추어진 비밀로서, 예정된 비밀로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 챙기는 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아하, 내가 우연적 존재구나.’ 따라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시작해버리면 내가 시작한 모든 것은 죄가 되고 내가 시작한 일로 인하여 우리는 내가 가슴 아파요. 실망스럽고 본인이 힘들게 살게 됩니다. 뭔가 하나 잔뜩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그것도 힘들고 나중에 결과를 봐도 허무하고 허탈해져요. 처음부터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상한 아담의 죄악 된 버릇이 들어서 무슨 좋은 일이 있으면 잔뜩 희망을 품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말이 뭐냐 하면, ‘언젠가는’ 또는 ‘언제 적’ 이라는 이야기랍니다. ‘옛날에 그 때 참 좋았는데’ 그거나 ‘앞으로 내가 언젠가는 잘 될 거야.’ 하는 것은 그렇게 슬픈 이야기라는 겁니다. 후회 막심한 이야기가 될 수 있고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을 기대해야 된다는 나의 나약함을 표현할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그 현실은 슬프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슬픈 입장이라는 겁니다. 가을인가요?
상주주민들이 가을철에 대목 보려고 땡볕에 감 농사지어서 곶감 만들어서 매달아놨더니 11월에 내린 비의 양이 8월에 내린 비보다 더 많이 와서 다 썩었어요. 그분들이 곶감 썩은 것 생각하면 안돼요. 상주 그 분들이 본인들이 처음부터 썩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본인은 우연적 존재에요. 본인만을 위해서 본인이 살아간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소용없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썩어가는 곶감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어서 나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내가 모르는 죽음을 알게 하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이제 남은 과제가 뭐냐? 대체 죽는다는데 그 죽음이 뭐냐를 알아가는 겁니다. 그것은 나의 죽음이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었던 겁니다. 우연적 존재가 해야 될 일은 필연적 존재가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본인이 감안하고 인정해야 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죽이고 싶어서 선악과 따먹게 한 게 아니에요. 네가 살아 있으나 죽어 있으나, 죽을 경우도 살아 있을 경우도 이 세상 주인공은 예수님이라는 것,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 자리, 위험한 자리에, 선악과 앞에 배치를 해 둔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제 죽음은 인간에게는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로 다가온다면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애타하고 가슴 아파 하지 마시고요, 죽음을 껴안고 예수님의 죽음을 표현해 내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스데반집사에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의 죽으심을 더욱 더 깊이 있게 느끼는 기쁨을 가지는 겁니다. 자기가 죽어가기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의 죽으심에서 오는 그 의미를 만끽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의미가 뭐냐?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이 기쁜 소식, 어떤 대가도. 먹으면 죽는다고 했을 뿐이지 잘하면 먹게 해준다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주어진 그 자체가 우리하고 흥정하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나무들을 심어놓은 것이 아니거든요. “잘 해봐. 잘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줄게.”라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점원하고 흥정하지 않아요. 주인이 종하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될 뿐이지요. 종의 행복을 위해서 주인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그 말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것이 나의 행복을 위해서 주여, 주여,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라는 의미에서 주여, 주여,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하는 그 고백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에요. 아담을 죽이는데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새끼를 치게 하고 죽여요. 아담이 창세기 5장에서 죽거든요. 4절, 5절에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죽일 때 그냥 죽이지 않고 자식을 낳게 하고 죽입니다. 이것은 뭐냐? 죽는 것도 ‘내가 선악과 따먹고 죽으련다.’ 해서 네 의지대로 죽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죽음을 탁, 깨 보면 인간의 죽음 안에 담겨 있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세상 역사라는 바탕에 죽 깔아놓는 식으로 죽는 겁니다.
아담의 배를 해부하게 되면 여기서 새끼들이 죽 나온다는 그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도 버리지 않아요. 원래 돼지가 버릴 것이 없답니다. 몸에 다 좋다는 겁니다. 돼지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손톱 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죽는 것도 활용하십니다. 아, 정말 잔인하지요. 죽는 것도 자신이 영광을 위해서 활용해요. 심지어 마귀까지. 천사는 물론이고요. 따라서 성도의 자세는 어떤 자세냐 하면, 사나 죽으나 주께서 활용하는 대상으로만 남으면 돼요. 자기 죽음에 대해서 공포를 느낀다든지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죽음에 대해서 공포를 느끼고 무서워한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본색이 들어있다는 그 티밖에는 나지 않습니다.
“나는 살려고 교회 갔는데 주님이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굴면 나는 이제 하나님 안 믿어.” 절레절레 고개 저으면서 “이럴 수 있습니까?” 한다면 자기의 죄 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게 돼요. 스데반 집사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어요. 남은 문제는 이겁니다. 뭐냐 하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의 주인공은 누구며 죽음의 주인공은 누구냐를 찾아가는 그 여정의 디딤돌, 하나의 징검다리로 아담이 첫 번째 걸음을 내딛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뭐냐, 선악과는 누구며 생명은 누구냐 하는 그것을 아담이 어떻게 알겠어요?
추가적으로 주님께서 개입을 해요. 복음을 가지고, 언약을 가지고 개입을 하게 되면 복음을 전하는 그 현장에 마귀가 등장해요. 선악과의 원칙에 선악과 심은 곳에 선악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가 뱀을 통해서 선악과 중심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실제는 아니지만 마치 선악과 나무가 있으면 여기에 뱀이 뱅뱅 똬리를 틀고 선악과 따먹으라고 유혹하는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뱀이 선악과에 몰려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 계신 곳에 악마가 있다 그 말입니다. 아담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았지요. 그냥 “따먹지 말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지요.
창조의 영적인 것, 마귀는 어떻게 해서 마귀가 되었으며 그 마귀를 척결하시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지 그런 것은 아담은 모르고, 또 몰라야 되고, 알 필요 없어요. 그것은 선악과 따먹은 뒤에 아는 것이지 따먹은 뒤에는 알 필요 없어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그 비밀의 상자가 탁 깨지면서 거기에 뱀의 후손이 등장하고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비밀을 증거 하는 용도로 휘둘리게 돼요.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 밖으로 물살이 도는 거예요. 마구 돌면 인간은 그 도는 주변에 주변적 존재로 있는 겁니다. 중앙에 있는 것은 악마와 사투를 벌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악마는 인간을 우습게봅니다.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말이 뭐냐 하면, 마귀가 인간보다 더 지혜롭거든요. 18세 때 박사학위 땄다고 좋아하는 그 애가 아이큐가 높아요. 하지만 마귀는 그 애보다 더 똑똑해요. 그러니까 박사학위 논문을 베꼈잖아요. 똑똑하면 뭐합니까? 본인의 욕망을 못 이기는데. 인간은 기대하는 그 탐욕을 본인이 다스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숨넘어갈 때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으면서 죽음의 요소가 매일 같이 터져 나옵니다.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죽을 때만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의 징후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 죽음의 징후가 하나님이 계속해서 투입시키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계시와 개입으로 말미암아 죽음이라는 것이 살아생전에 갖가지 활동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구약에서 한 마디로 말하면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지 말라. 신약으로 말하면 이단으로 되어 있어요. 적그리스도. “우상을 섬기지 말라.” 신약에서는 “탐내지 말라.” 그런 거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이 계속해서 역사가 진행되면서 아담의 자식들이 나오면서 아울러 추가적으로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그 죽음은 점점 더 확대가 됩니다. 확대가 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최종적으로 우상을 우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그것은 뭐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내가 시작합니다.” 하는 그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입니다.
내가 한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선한 존재가 되어서, 의로운 존재가 되어서 구원 얻겠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나는 선하고 싶어요. 선하고 싶은 이 욕망은 어느 누구도 잠재울 수 없어요.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양심은 살아 있다는 것이 사형을 앞둔 사형수들의 공통된 고백이에요. 나빠도 전적으로 나쁘지는 않다는 거예요. 자기 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섬기지 못한다고 로마서 10장에 유대인들 이야기를 하지요. 그 유대인들의 아비가 악마입니다. 그 악마의 자손들이 오늘날 교회를 세웠어요.
정의를 부르짖고 하나님의 거룩과 경건을 이야기합니다. 네가 시작하지 않으면 경건도 없고, 거룩도 없고, 의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들의 2천년 교회 역사에 계속 주장하는 것이 “네가 먼저 나대지 않으면, 네가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경건도 없고, 거룩도 없고, 하나님의 성화도 없고, 착함도 없고, 그러면 영광도 없으니 구원되고 안 되고는 네 행동에 결정된다. 말씀대로 실천에 옮겨서 영광 돌려라.” 지금도 마귀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를 배제해 버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부각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그것만이 의고 그것을 알아먹게 되면……, 그 십자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요. 주님이 하신 일만 의롭다는 그것은 아무도 몰랐는데 주님의 영인 십자가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가 알게 되었으며, 아는 동시에 우리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동반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서 바로 내가 이단이었고, 내가 적그리스도 앞잡이가 되었으며, 그런 버릇이 지금도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을 본인이 수긍하게 된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인간은 자기긍정이 기본인데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존재에서 어떻게 그런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제가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을 고백으로 보지만 그 고백이전에 먼저 통보가 있다는 말입니다. 통보했기에 그 통보한 내용이 고백으로 나오는 것이지 본인이 연구해서 고백으로 나오면 안돼요. 통보한 것이 있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놀까요? 노는데 얼마나 노력을 많이 해야 되는지 압니까? 노는 것도 연구 많이 해야 돼요.
퇴직해서 놀아본 분들 경험에 의하면 노는 것이 만만치 않아요. 노는 스케줄 본인이 다 짜여 하니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노는 것도 행함이었어요. 그러니 막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애쓴 만큼 그것이 악이 됩니다. 노력하는 만큼 애지중지하기에 그것이 악으로 변해요. 노는데 애썼습니까? 노는 그것이 자기의가 돼버려요.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고백하면 돼요. “주께서 놀게 해주시니 놀았고 일하게 해주시니 일했습니다. 이렇게 일하나 저렇게 일하나 주님 소관입니다. 주를 위해서 제가 뭘 할까가 없습니다. 이미 주께서 일한 결과물이 저이니 주께서 계속해서 저를 부려주시고 이끌어주시고 인도해주옵소서.”
죽는 것과 사는 것, 죽는 것을 통해서 주의 죽음과 사는 것을 통해서 주의 살아계심, 살아 있을 때는 주의 살아계심을 느끼게 만들고 죽을 때는 주의 십자가를 느끼게 만드니까 사나 죽으나 다 주의 인생인 것을 우리가 고백하면 돼요. 주님께서 또 어떤 상황을 주시면 그것은 주님을 알게 하기 위한, 새로운 고백이 나오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자기과제고 자기 일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에서 선은 누구냐? 선한 것, 선과 악의 주관자는 바로 주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선과 악은 뭐냐? 선과 악은 주님만 알아야 된다는 그 말은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은 선악을 아시는 주님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생명주거나 죽게 하는 것은 주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연적 존재인 우리는 뭐냐? 주님께서 지옥가라면 지옥 가야 되고, 생명나무 따먹고 생명의 나라로 가라고 하면 가야 되고. 처음부터 그런 입장에 놓인 것이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은 그걸 몰랐어요. 이제는 성도는 그걸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 지옥이 내가 원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 맘대로 하시옵소서.” 선악과와 죽음에 관해서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가 나오지요. 이 대목을 보는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무서워서 교회 가겠나?’ 헌금을 속였다고 해서 부부가 사이좋게 나란히 죽어버렸어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내도 거짓말하니까 아내도 죽여 버렸어요. “네가 사람을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인 것이다.” 이게 현실이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교회 갔다가 헌금 속여서 죽이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할 때 “네가 죽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누가 죽이시는가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내가 죽는 것이 현실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죽이신다는 그것이 현실이지요. 우리는 현실을 믿어야지 내가 죽는 것을 겁내면 안돼요. 죽이면 죽으면 돼요. 왜? 주님이 죽이시는데 내가 살면 안 되잖아요. 현실은 주님이 쥐고 있으니까. “지금은 안 죽고 살아 있는데?” “당신이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살려주시면 살아야 지.” 자살하면 안돼요. 살리면 살아야지요. 죽이면 죽고 살리면 살고. 이러나저러나 주님만 증거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이 세상의 주인님을 만난 성도의 성경보기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따먹으면 죽으리라.”에서 죽음만 겁내지 말고 선악과의 죽음이 어떠냐와 관계없이 세상 모든 것은 주님이 하는 일로 꽉 차 있음을 우리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서 나올 고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우연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가지고 나만을 최종적으로 챙기는 필연적 존재로 사는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요 악마적 발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마귀 적인지 나밖에 모르는 존재, 하지만 성령이 임하사 십자가 앞에 우리를 세우사, 그런 것까지도 주께서 아무 대가없이 용서했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4강-창 2장 16-17(선악과나무)151122-이 근호 목사.hwp (29.5K), Down: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