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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4 - 환각적 믿음강의잠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4 - 환각적 믿음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4 - 환각적 믿음

15,11,1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잠언 1장 1절을 봅시다. 제가 읽어볼 테니 어디서 틀렸는지 알아보세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하면, 무엇이 틀렸습니까? 뭐가 빠졌지요? '다윗의 아들'이 빠졌어요. 그러니 솔로몬은 개인의 자격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다는 말이죠.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신학자들이 솔로몬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고 해서 솔로몬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신상털기를 하고 개인적으로 언급할 때는 그 개인에 국한해서 하는데, 그런데 여기 잠언서 1장 1절에서는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솔로몬이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인데, 그러니까 제 아무리 솔로몬이 노력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구체화한 흔적과 결과물이고, 그게 바로 솔로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면 안 된다 !!

어떤 분이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 글을 올리기를,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면 안 된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게 얼마나 믿음이 없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제가 그것을 지금부터 이야기할 텐데, 과연 그게 어떤 논리인지를 한 번 들어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계셔서 천지를 말씀으로 만들었다" 라고 하면, 그게 과연 이상한 논리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동의한다고 치고, 그 다음에 "그래서 말씀은 스스로 활동하신다" 라고 한다면, 그게 과연 이상한가? 괴이한 이단적 발상인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주장은 무엇인고 하니, "말씀을 우리가 버리면 안 되고 지켜야 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과연 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버리고 말고 할 문제이냐는 것이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그래서 그 말씀이 스스로 활동하고 계시는데, 그 말씀을 감히 누가 버리고 말고 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결국 이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인데, 믿음이 없으니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우리 인간이 지킬 때 효력이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비단 그것이 어디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겠느냐는 것이다.

◈ 여러분, 말씀을 지키세요 !!

교회에서 목사들이 "말씀을 지키세요" 라고 하면, 교인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마치 그것을 "공자 말을 들으세요" 라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말을 하는 목사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공자나 맹자는 천지를 창조하지 않았는데, 부처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른데,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된 피조물로서 그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모였다는 말이다. 그게 곧 교회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말씀을 지킨다"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소리를 하는데, 즉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평소 우리의 생활습관이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간다" 라는 것인데, 즉 "바깥에 있는 좋은 말씀을 내가 지키면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되면 그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복이 된다" 라고 여기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 관심사가 "나 이전에 천지를 누가 창조하고, 거기서 나는 무엇인가?" 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은 내가 챙긴다" 라는 것이 철저하게 기본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만 믿는다는 것인데, 그렇게 자기만을 믿기 때문에, 즉 자기 인생만 잘되면 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장사를 한 번 해보겠다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 교인들이 왔고, 그래서 그런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목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병원을 개업한 의사가 교회에 나왔다고 하면, 과연 "제 병원은 망해도 좋습니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교회에 왔느냐는 것이다. "이번에 이 근처에 병원을 개업했기 때문에, 우리 병원에 오세요" 라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가? 의식을 하는데, 그래서 근처에서 제일 큰 교회에 나간다는 것이다. 총각이 아가씨가 많다는 교회에 왜 가는가? "나는 결혼을 못해도 좋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는 마음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ㅋㅋ).

◈ 내 인생은 나의 것 !!

그러니 이 모든 것들을 하나로 종합해보면, "지금까지 내 평생을 내가 꾸려서 왔는데, 그것을 그대로 교회에서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켜서 복이 오게 되면, 그 지키는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서 나의 것이 더욱 굳건해지고 잘될 것으로 믿습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그런 희망을 품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는 그게 믿음인데, 자기가 잘 되는 식이니 말이다.

오늘 강의제목이 바로 그것인데, 그러니 믿음에는 두 가지라는 말이다. 자기를 포기하는 믿음이 있고, 자기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를 포기해도 괜찮은데, 왜 자기조차도 주님의 말씀의 결과물이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를 포기하는 믿음인데, 반면에 자기를 강화한다 것은 무엇인가? 전혀 자기를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그게 하나님이든 앞이든 누구 앞이든 간에 자기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인생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 그러니 이제 손을 놔라 !!

구약성경에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 라는 것이 곧 이방 민족들이고,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자기를 포기할 만한 이유를 이미 주셨는데, 그것을 두 글자로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에게 언약을 주심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손을 떼도 된다. 그러니 손을 놔라" 라고 하시는데,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언약을 받고서도 이방민족의 속성을 그대로 발휘하는데, 그래서 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가 어떠합니까? 한 마디로 말해주세요" 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잡을 수 없고, 주님은 잡고 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관계라는 말이다. 우리는 잡을 수가 없는데, 주님이 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잡고 있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는, 즉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이라고 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주님이 우리의 뒷덜미를 잡는다는 말이다. 왜 우리가 도축장에 가면 고기가 쇠고리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데 그 걸려있는 고기가 굳이 자기 손을 내밀어서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제대로 걸려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기가 붙잡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는데, 그것은 달리 말하면 "나는 전혀 믿음이 없습니다" 라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법을 앞장세우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교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 안식교에서는 법을 두 가지로 나누는데, 예수님의 계명과 하나님의 계명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 안식교의 경우에 !!

그러니 십자가 마을에 그 글을 올린 분이 안식교 교인일 가능성도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은 안식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계명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니, 그래서 안식일과 십자가를 둘 다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안식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조사심판에서 합격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게 바로 안식교 교리라는 말이다.

오늘아침에 그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당신은 너무 많이 안다" 라고 말이다. 물론 듣기에 그리 싫지는 않는데, 하지만 무식한 것이 문제이지 아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느냐는 것이다. 저를 보고 너무 많이 알아서 하나님을 가린다고 하는데, 자기가 모르면 모르는 것이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말이다.

도대체 아는 것을 어디까지 멈추어야 하는지, 자기가 아는 것까지만 알고 멈추어야 한다는 말인가? 교만도 그런 교만이 없는데, 한국교회 전체가 자기가 보기에 무식해 보이니 그런 건방진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무식한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교회를 키우는데 관심이 있지 정작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사야서 56장을 보겠는데, 1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 5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사 56: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 56: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사 56: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사 56: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사 56: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사 56: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안식일을 지키며 !!

여기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며' 라는 말씀이 여러 군데에 나오는데, 이것을 안식교 목사가 아닌 기존 교회 목사들이 그대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기에는 자기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주일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안식일이 나오는데, 그래서 안식교에서는 기존 교회를 보고 왜 성경말씀대로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치고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무식한데 말이다.

안식교에서는 "다른 계명은 폐하여도 안식일 계명만은 영원하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논리의 뒤편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말씀이 스스로 활동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데, 자기가 믿어줄 때 비로소 자기 복이 되고, 믿지 않으면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공리주의인데, 즉 자기가 무엇을 하게 되면 이익이 되고, 그렇게 이익이 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이게 바로 존 듀이가 주장한 '도구주의' 라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경제위주로 돌아갈 때는, 진리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진리이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면 무조건 비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를 핍박하면 비진리이기 때문에 당연히 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공권력이라도, 비록 그것이 경찰버스라고 해도 자기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면 치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을 욕할 문제가 아니라 평생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말 짐이라는 것이다. 요즘 프랑스에서 일어난 테러로 전 세계가 난리인데,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나라에서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그래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그런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면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손톱만 깨어도 아파서 난리를 치는데 판국에 말이다.

우리가 말로는 온유와 화평과 자비라고 하는데, 하지만 자기 몸이 아파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소리가 나오는지 말이다. 우리 몸은 우리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라면 20대에서 스톱하고 싶은데, 나훈아가 청춘을 돌려달라고 그렇게 몇 십년을 노래하지만, 정작 자기 몸은 할배가 다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청춘은 점점 더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 내가 가기는 어디로 간단 말이냐?

오순절에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또 착각하기를, "주님, 가시면 안 됩니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가기는 어디로 가신다는 말인가? 자기가 눈에 보이는 세상에 같이 있으면 같이 있는 것이고, 다른 방에 건너가서 보이지 않으면 없느냐는 말이다.

아파트에 사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자녀들이 다 떠나고 나면 방을 없애고 거실을 넓히는 공사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사람이 사는 곳은 이승이고, 주님이 가신 곳은 저승이 되는데,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무엇을 철거하시는고 하니, 칸막이 없애는데, 그러면 이승이고 저승이고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님이 계신 곳이 몽땅 다 주님이 활동하시는 하늘나라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하는데, 성령을 보내게 되면 그런 소리가 쏙 들어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이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가지 않았다는 티를 내기 위해서, 즉 "이 세상은 내 방이고 내 거실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주님은 구름을 타고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처음부터 간 적이 없다는 것인데, 즉 그들이 주님의 손에서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사도바울의 말처럼, 자기가 어떤 형편에 거하든지, 자기의 일거수일투족 그 모든 것이, 로마로 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간에, 모두가 성령의 인도함으로 받아서 간다는 말이다.

◈ 과부 한 명, 문둥병자 한 명 !!

그러니 주님께서 헤어지는 것이 아닌데, 그들이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 주님과 헤어졌는가? 그게 아닌데,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과부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되어도 한 명에게만 가는데, 사렙다 과부에게 엘리야가 찾아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많아도 다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눅 4: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 니는 니가 누구인지 아나?

예수님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아버지의 뜻대로만 행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제한된 이 세상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주님이여, 나를 위해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는 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라고 나오신다는 것이다.

* 인간 : 주님이여, 나를 위해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 주님 : 너는 너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는 하고 그런 소리를 하노?
* 인간 : 주님은 저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주님 : 그건 그렇지. 그런데 니가 누구냐고?
* 인간 : 제가 누구인고 하니, 그래도 인간은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주님 : 니가 만든 개념을 가지고 나와 흥정에 나서지 말라.
* 인간 : 아니, 흥정이라니요?
* 주님 : 내가 사랑한다는 것은 택한 사람을 말하지,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은 아니야.

이게 전혀 기괴한 논리가 아닌데, 그렇지요?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언약으로, 즉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지금도 전혀 쉬지 않고 극렬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십계명이 왜 돌판으로 나타나는고 하니, 그 돌판은 물체인데, 즉 깨지기 위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 돌판이 깨짐으로서, "너희들의 마음가짐은 깨어져야 당연하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인간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즉 눈에 보이는 물체를 만들어서 그 물체를 깨트렸다는 말이다. 즉 "너희들은 애초에 언약이 깨어진 상태이니 이쪽으로는 오지를 못한다" 라는 것인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언약이 깨어져서 오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축복은 무엇인가? 그 깨어진 언약의 다리가 다시 회복이 되어서 통하게 되면 복이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깨진 언약을 대신해서 연결시킨 분이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게 무슨 기괴한 논리냐는 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렵다. 모르겠다. 이상하다" 라고 하면서 공격을 하느냐는 것이다.

◈ 혈연관계와 이익관계 !!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기존 목사들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려고 하면, "나는 나밖에 모른다" 라는 원리원칙이 교인들에게 납득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분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습니다" 라고 하면서 교회를 키워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고 말씀이고 간에 그런 것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잘먹고 잘살면 된다고, 그렇게 복만 따내면 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즉 일종의 이익단체라는 말이다.

'테니스(?)' 라는 사회학자는 사회를 둘로 나누었는데, 혈연관계와 이익관계로 말이다. 옛날에는 양반과 쌍놈의 혈연관계였는데, 그런데 지금은 이익에 의해서 혈연도 파괴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학을 공부하면 기초로 나온다는 말이다.

◈ 이스라엘의 회복 !!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를 더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옛날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언약적인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회복이라고 하니 생각이 나는데, 아마 여러분도 보았지 싶은데, '회복' 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말이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영화를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도대체 무엇을 노리느냐는 것이다. 물론 은혜를 받아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혀 성경말씀과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즉 언약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언약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즉 "우리 이스라엘은 회복된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왜 뽑았는가? 이방인의 사도를 뽑아서 왜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원형이 오히려 이방인 쪽에서 나타난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을 시기가 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말이다. 그리고 뒤늦게 "아하, 뿌리가 이미 유대인들에게서 나왔구나" 라고 알게 되는데, 그렇게 차후적으로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는데, 즉 "유대인들아,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야 나라에 간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주기를 바란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님의 뜻으로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왜 아무 것도 없는 그들에게, 그들은 언약도 없고, 이사야서 56장에 나오는 안식일은 그 근처에도 가지를 못했는데, 물론 십계명도 없고 십일조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는데, 성령이 임해서 추적해보니,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방인들은 결론을 쥐고 있고 유대인들은 문제를 쥐고 있는데, 이제 문제와 해답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 믿음이 없는 글이 십자가 마을에 올라왔는지 생각해보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물론 죄인이 어떻고 하면서 복음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면 도를 닦는 내용인데, 그러니 평소에 자기의 행동을, 즉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에 가는 것도 자기가 꼼지락 꼼지락해서 가고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가 바로 지금 지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하시는데, 그런 꼼지락하는 것을 다시 부각시켜서 우리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마치 이방인들의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자극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사람이 지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오는데, 주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늘 믿음이 없는 글들을 대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속에서도 그런 게 피어날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조용하면 목사를 비롯해서 모두가 나태해지니 말이다.

◈ 조깅을 하면서 !!

오늘 아침에 운동을 하면서 어린이집을 지나는데, 아이가 한 명 들어가는데 보니까 머리카락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듬성듬성 나있기는 한데, 잘은 몰라도 깊은 병이 들었지 싶다는 말이다. 그러면 같은 어린이집에 있는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보고 얼마나 놀리겠느냐는 것이다. 아이들을 숨기고 말고 하는 것이 없는데, 냄새가 나면 바로 냄새가 난다고 하고, 식당에 가서도 맛이 없으면 식당 주인이 있는 앞에서 바로 맛이 없다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바로 반응을 보이는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집에서 가정교육을 철저히 시키면 그런 반응이 좀 덜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은 원래 그렇게 즉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곳을 60대 초반인 제가 지나가면서 "니나 나나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머리카락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릴 때의 모습이 본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이 본래 모습이라고 하면, 놀릴 이유가 전혀 없는데, 모두가 다 똑같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길고 윤기가 나던 머리카락도 다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이 보시기에 어떠하겠는가? 우리가 이 땅에서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잘난 인간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모두가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깅을 하면서 다시 한 번 은혜를 받았는데, 즉 남을 놀린다고 하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다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남이 놀리는 것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데, 자기가 자기의 과거 모습을 돌아보면서 자기를 학대하고 미워하는 경우에는 정말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자살도 하고 말이다. "내 인생은 왜 이런가?" 라고 하게 되는데, 하지만 그것은 결코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에게 대한 일종의 행패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 인생이 어때서?"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제가 또 실패했습니다" 라고 하면, "뭐야? 실패했다고? 원래 실패하도록 만든 인생인데, 그것이 뭐가 어때서?" 라고 나오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새삼스럽게 왜 그렇게 나오지? 몇 년 전에는 천하에서 죄인이라고 하더니만, 이제 와서는 죄인이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아주 점잖은 사람처럼 그것이 무슨 짓이야? 지금 무슨 연기를 하고 있어? 아직 니는 니가 누구인지 몰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비록 가을에 쓸쓸해져도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는데, 봄여름가을겨울도 말씀으로 만드셨다는 말이다. 특히 가을이 되면 쓸쓸한데, 그게 우리 인생을 닮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로서 은퇴를 하면 되는데, 그래도 우리가 믿는 것은 무엇인가? 비록 은퇴를 해도 말씀으로 되어진다는 것, 모든 것이 다 말씀으로 소급된다는 것, 말씀으로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님이 호출할 그날이 있는데, 하지만 성도에게는 심판이 없는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니 말이다. 성도는 호출을 받아서 심판이 아닌 부활의 호출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칸막이가 사라지고 하나의 거실이 되었다고 하면, 즉 하나의 세상이라고 하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숙제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렇게 우리가 가을처럼 쓸쓸함도 맛보는 인생을 살아간다고 여기고 감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제 교재 137페이지를 다시 보자.

** 언약을 내리시는 분은 우리의 왕이고, 그 언약을 믿는 백성은 그 왕에 의해서 구원될 백성입니다. 이 왕과 백성 사이에는 지혜의 언약으로만 연결될 뿐입니다. 이 언약이 구조적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잠언서입니다.

여기에 보면 "언약이 구조적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잠언서입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즉 '구조적' 이라는 말이다. 오늘 강의의 제목이 '환각적 믿음' 인데, 즉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잘되기 위해서 믿는, 그것이 바로 환각적인 믿음이라는 말이다.

이 환각적인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언서 1장 1절을 다시 살펴보자.

(잠 1: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 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인가?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다윗의 아들' 이라는 것이 들어가야 하느냐는 말이다. 처음에 이것을 퀴즈로 내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주가 오신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다윗의 아들을 통해서 주가 오신다고 하니, 솔로몬은 당연히 "내가 주로구나" 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을 같이 사용하면서도, 그 개념을 통해서 차이가, 즉 틈이 벌어지게 하신다는 말이다. 즉 "내가 다윗의 아들이 주라고 하니, 그러면 솔로몬이 다윗이 아들이니, 너희들은 당연히 솔로몬을 주라고 생각하지? 그게 바로 너희들의 한계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의 한계라는 말이다.

◈ ALL IS ALL !!

우리 인간에게는 전부가 전부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이 알고 있는 전부가 바로 그 전체의 전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ALL IS ALL" 이라고 되니, 여기에는 무엇이 없는고 하니, '한계(LIMIT)' 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부인데 무슨 한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한계가 있다" 라고 하는 그 전부에 동그라미를 쳐보자는 말이다. 그러면 동그라미를 친 전부와, 그 동그라미에 들어가지 않는 바깥에는 남아있는 그 무엇이 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그 동그라미를 두고 '한계' 라고 한다는 말이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닌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그게 한계라고 하는 순간, 바깥에 뭔가 알파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계를 지어주는 것이 바로 언약이라는 말이다.

◈ 다윗언약 !!

그러면 다윗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것을 다윗언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다윗언약이 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다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데,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게 아니야. 너희들은 몰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특별히 언약을 주셨어" 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니 "우리가 아는 것은 전부가 아니었다" 라는 것이 다윗을 통해서 드러나고, 또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도 그런 약속에 오기 전에는 이런 자들과 한 패라는 말이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할 때, 그때 다윗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래서 율법대로 하면 이 나라는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라는 것인데, 그것이 곧 다윗의 올이고 전부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으니, 그 말씀을 지키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된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말이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기 이전의 전부였는데, 그러니 지금의 한국교회와 너무나도 똑같다는 것이다.

◈ 바로 당신이야 !!

이러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가 와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양과 소가 많은데,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자 그 사람은 자기의 많은 양을 잡아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양이 한 마리밖에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아서는 잡아버렸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 다윗이 뭐라고 하는가? "나의 전부인 이 이스라엘에 그런 못된 백성이 있었는가? 그런 놈은 당연히 죽이고, 또한 율법대로 네 배나 갚아주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율법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을 도전하는 것이고, 곧 악이 된다는 말이다. 더 나가서 자기 정당함, 즉 자기 의를 챙겨서 구원을 받고자 이것을 지키고 저것을 지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악마의 최후의 술책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을 했는데 말이다.

(삼하 12:1)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삼하 12: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가난한 자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삼하 12: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 누가 다윗 자손인가?

그렇다면 다윗은 올을 버리고 언약의 한계 안에 있어야 하는데, 다윗은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이고 그 동그라미 바깥에 언약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동그라미는 언약의 결과물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과연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인가? 다윗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이라는 개인의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손을 낳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 언약인데, 그러니 이삭은 아브라함의 혈육에 의한 자식이 아니라, 세 명의 천사가 미리 와서 약속했던, 바로 그 약속의 자식이 곧 이삭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이삭을 잡으라고 하시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개입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인고 하니,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삶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죽어야만 하는 분으로 오셨으면 메시야이고, "잘 지켜서 살자" 라고 하면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공자나 맹자 부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하면 그 끝은 죽음인데, 삶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래도 부활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부활의 생명은 부활 이전에 우리가 생각하던 개념의 생명과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강의를 다시 하겠는데, 진도를 나가다보니 자꾸만 잊어버려서 말이다.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개념은, 우리는 보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다고 하면 "내가 사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하는 그 개념을 사용함으로서 그만 틈을 만들어버리는데, 그래서 거기에 언약을 집어넣으면 틈이 그만 갈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했던 언약,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천국 등등, 그 모든 개념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언어의 의미에는 기본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살아야해. 나는 손해를 보면 안 돼" 라고 하는 자기 의지력이 포함된 채로의 의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청춘남녀가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하는데, 그것을 정신 분석학자들이 연구해보니, 그것은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구라는 것이다. 가족간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을 소유하고 싶어"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해요" 라고 해도, 그 주체가 누구인가? "내가 당신을 그렇게 원하니까, 당신은 나의 의지에 따라와야만 해" 라고 하는 강제력이 발산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함과 동시에 말이다.

◈ 주님은 스토커 !!

일종의 스토커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가서라는 것이다. 여자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데 솔로몬은 무조건 따라와서 "당신은 나의 누이요, 나의 신부다" 라고 하는데, 결혼도 하기 이전에 말이다. "이전부터 우리는 가족이다" 라고 하면서 밀어 부친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얼마나 스토커인지 모르는데, 즉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질투는 긍정적인 용어가 아니라, "누가 나는 것을 넘보는가?" 라는 식인데, 즉 "일방적인 나의 소유욕을 누가 건드리는가?" 라는 것이 질투라는 것이다. 그 정도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랑은 둘이 서로 사이좋게 만드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억지 춘향인데,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사랑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즉 강제로 보쌈을 해서 업고 가신다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게 해서라도 눈물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우리의 인생을 망가지게 하면서 영광스러운 보석과 같은 인생으로, 그렇게 해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이 주님의 강압적인 사랑의 행태라는 말이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질투가 그냥 질투가 아니라 불처럼 질투를 하시는데, 그러니 얼마나 성격이 강렬하고 화끈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곡식을 추수해서 타작하고 나면 어떻게 하는가? 알곡은 창고에 넣고 가라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불살라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훨훨 타오르는 지옥 불을 보면서, 우리 입에서 "하나님은 참 침착하시다" 라는 소리가 나올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불과 같은 마음으로 지금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다.

◈ 주님의 감시 카메라 !!

처음에 고속도로를 만들면 없는 게 있는데, 이번 12월말이 되면 드디어 88고속도로가 4차선이 된다고 하는데 말이다. 처음에는 감시 카메라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 광들은 그것을 노리고 내기를 하는데, 대구에서 광주까지 얼마 만에 주파하는지를 말이다. 그러다가 차츰 차츰 카메라가 달리기 시작하는데, 그 카메라는 고정되어 있어서, 달리는 사람의 직업이나 성별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한 자리에서 계속해서 지켜본다는 것이다.

주님이 바로 그러한데,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속도를 줄인다는 말이다. 주님이 그렇게 지켜볼 때 피곤해서 졸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불과 같은 사랑의 눈질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눈길보다 눈질이 더 적합하지 싶은데, 마귀가 자기 사랑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라는 노래가 생각하는데,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에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 마저 떠나면 비틀거린 내가 앉길 곳은 어디에 ♬"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주님은 자기가 찜한 영원한 사랑을 빼앗기기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도 주님의 감시 카메라는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십계명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말이 나올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그런 주님의 사랑이 없으니, 그래서 자기가 알아서 말씀을 지켜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천국문이 열리겠느냐는 것이다. 언약이 없는데 말이다.

◈ 다시, 왜 '다윗의 아들' 인가?

지금 우리가 이 잠언서 1장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굳이 왜 '다윗의 아들' 이라는 말을 집어넣었냐는 것이다. 왜 솔로몬만으로는 미흡하냐는 말이다. 그게 바로 '텅 빔'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다윗은 언약을 받고 난 뒤에, 다윗 말고 다윗이 있던 자리가 있는데, 인간은 항상 자리 위에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윗의 자리는 이스라엘 왕의 자리인데, 그런데 이제 그 자리를 내놓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할 일이 무엇인고 하니, 그 자리는 그 어느 누구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옆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텅 빈' 자리라는 말이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러면 흔히들 주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교인들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전기공사를 하러와서 전기기사가 교회의 주인을 찾으면 누구라고 하는가? 교회건물의 대표자인 목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물론 실제로도 목사가 교회에서 주인노릇을 하려고 하고, 또한 하고 있다는 말이다.

◈ 십자가 마을에서 오신 여러분 !!

지난번에 대전수련회에서 있었던 일인데, 구내방송으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십자가 마을에서 오신 여러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마을에서 왔다고 하면, 먼저 십자가 마을이라는 장소와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마을에서 온 것이 아닌데, 우리는 십자가 마을로서 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마을은 없는데, 그것을 두고 텅 비어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다윗이 바로 그런 텅 비어있는 곳에서 자기에게 직책과 업무를 주었다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왕으로 말이다. 그러니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자기에게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권리나 자격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그 누구도 대신해서 뛰어들 수 없는 텅 빈 장소의 능력에서 나온, 그 능력이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 성전은, 텅 빔의 장소 !!

그래서 다윗은 텅 빈 장소만을 바라보는데, 다윗만이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텅 빈 장소를 다윗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도 그 텅 빈 장소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텅 빈 장소에 나오는 예언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뿜어준다는 말이다.

에스겔서 3장의 경우에 "주의 신이 내게 임하사"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에스겔에게 신이 임했으니 그가 메시야인가?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사야나 예레미야도 전혀 메시야가 아닌데,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다른 한 분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겔 3:24) 주의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텅 빈 장소의 주변에 다윗도 있고 이사야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에스겔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텅 빈 구멍을, 그런 성전을 쳐다보고 있는데, "여기서 누가 오실 것이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성경을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데, 자기가 그 텅 빈 장소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녹취자 - 20년 전에 목사님의 '하나님의 선택'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거기에 보면 이 텅 빔을 성전의 총화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때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네요. 제가 목사님에게 직접 물어도 보았지 싶은데, 그때는 설명을 해줘도 여전히 어리둥절이었지요. ㅋㅋ)

건물주인이 새로 계약을 하려고 와서 "교회의 주인이 누구십니까? 도장을 좀 주세요" 라고 하면, 목사는 자기 도장을 줄 수밖에 없는데, 그 교회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인데, 그러니 무너지고 부서지는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는 뭐라고 해야합니까? "우리교회는 사라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는 취지를 담고 설교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윗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라고 했을 때, 그것 성경말씀이 되어서 우리가 상한 심령이 되듯이 말이다. 말씀은 자체적으로 살아있고, 우리는 그 말씀의 활동결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해도 상한 심령이 되도록, 그렇게 주님이 조치를 하신다는 것이다.

목사가 되었으면 이런 것을 설교해야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 단합해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봅시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교회라는 말이다. 감히 적그리스도가 만든 가짜 교회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민주주의' 라는 것이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텅 비어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민주주의 원리가 무엇인가? 우리나라 헌법에 보면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게 사실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국민이라고 하면 먼저 국가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칫하면 전체주의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맞는 표현인데, 그래서 공산주의든 사회주의든 간에 인민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북한도 그러하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이지 인민에게 있는가? 북한의 경우에는 박씨 일가, 아니 김씨 일가에게 있다는 것이다. 김씨 일가가 그야말로 살아있는 왕가라는 말이다.

그러면 남한은 북한과 다르다고 하면, 어떤 점에서 다르냐는 것이다. 북한은 "모든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라고 하고, 남한은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라고, 그렇게 서로가 같은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면, 그게 어떤 점에서 다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주권 자리에 누군가가 뛰어들면 안 되는데, 그 비어있는 자리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우물을 만들어 놓았으면, 그 우물에 자기가 뛰어들어서 목욕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물은 같이 물을 퍼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왕이라면 목욕을 하든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자리를 둥그렇게 늘 비워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대통령 5년 단임제 !!

그런데 참 재미있는 현상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텅 비워놓게 되면 그 특징이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비워놓아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누군가가 차지해도 문제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에 위배되는데, 국가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기 가게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중간쯤을 해야하는데, 그것이 바로 대통령 5년 단임제라는 것이다. 일단 차지했다가 빨리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물론 나오기 싫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인민들의 주권은 누가 통제하는고 하니, 텅 빈 장소를 자기가 쥐고 있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대통령이 5년 단임제를 하는데, 그러면서 대통령은 뭐라고 하는가? "주권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는데, 그 국민의 주권을 대신해서 잠시 통치하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다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좋든 싫든 간에 대통령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텅 비어있으니까, 그러면 그만 개인들의 집합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 주먹을 자기가 흔드는 꼴이 되고 마는데, 그렇게 되면 그야말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산에서 도토리를 따다가 모아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요즘은 따지 말라고 하는데, 산짐승들의 먹잇감으로 그냥 두라는 것이다. 아무튼 도토리는 모아놓아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왜냐하면 도토리 자체는 욕망이라는 것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개미를 모아놓으면 어떠한가? 여왕개미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데 말이다.

그러니 강자가 약자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마음대로 짓밟는 불의가 발생된다는 것이다. 치안이 없어지고, 좀 배웠다고 하는 똑똑한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잘 먹고 잘 살게 되는데, 반면에 법도 잘 모르는 배우지 못한 무식한 인간들은 계속 이용만 당하고 말이다. 그렇게 그만 서열이 생기고 만다는 것이다.

◈ 기가 센 놈이 !!

이것을 동양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기가 센 놈이 왕 짓을 한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어떤 집안에 엄마와 아빠, 그리고 자식이 둘이 있다고 하면, 거기서 누가 왕 노릇을 하는고 하니, 아빠가 아니고 기가 센 놈이 그 짓을 한다는 것이다. 그게 동양철학에서 나왔는데, 기게 센 인간이 큰 소리를 치고 강압적이 되는데, 기가 약하면 그냥 굽실거리면서 평생을 산다는 말이다.

그러면 인민의 주권은 기가 센 사람에게 있게 되는데, 그래서 민주주의는 완벽한 제도가 아닌데, 어설프기가 짝이 없다는 것이다. 없어도 안 되고, 너무 오래해도 안 된다는 말이다. 적당한 선에서 그냥 임시 땜방으로 그냥 넘어가고 넘어가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전혀 하늘나라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민주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아파트를 방을 터서 다 거실로 만들어놓았으니, 그것을 하늘나라와 연계해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국가제도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전혀 아닌데, 그런데 왜 교회를 민주주의를 택해서 하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엉터리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은 민주주의가 아닌, 언약중심 !!

이스라엘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언약중심인데, 이것을 잠시 도표로 그려보겠는데, 약간 복잡해도 참으시고 한 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이미 친숙하고 아주 간단한 도표인데 말이다. 먼저 하나님은 계시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데, 말씀, 혹은 율법을 말이다. 율법 중에서도 모세율법인데 말이다. 즉 모세언약을 율법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왕이 없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하는고 하니, 아무 것도 없으면 개인들의 집합체가 되기 때문에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실에 담임 선생님이 없으면 아이들이 개판이 되듯이 말이다. 아예 책상 밑으로 내려갈 생각은 하지 않고, 위로 붕붕 날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안전사고도 종종 나는데 말이다. 그렇게 개인들의 집합체가 되면 힘이 센 놈이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무엇인고 하니까, 제사장 나라가 되는데, 여기에는 왕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한데 말이다. 그런데 그 제사장이 깨지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그게 사사기라는 말이다. 즉 "자기 소견에 옳은 데로 행했더라" 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위 힘이 센 놈들이 계속해서 왕 짓을 하고 있더라"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일단 자기가 권력을 쥐면 그것을 혈연관계에 있는 자기 아들에게 준다는 것이다.

요즘 교회가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고생해서 키운 교회이니 당연히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늙어죽으면 손자가 받으면 되고 말이다. 아들이 없으면 땅을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를 만들어서 물려주면 되는데, 그것도 안 되면 사위에게 주면 되고 말이다. 지금 우리나라 재벌도 역시 그러한데, 이런 것이 다 망하는 징조인데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그만 그런 풍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 성경은, 왕과 제사장을 구분하는데 !!

아무튼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라면 제사장이 왕인데, 그러면 여기서 성경 이야기를 해보자는 말이다. 성경은 제사장은 왕이 아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왕과 제사장을 구분해서,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한다고 하면, 왕이란 것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즉 "왕이 없다" 라는 것이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집단에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생소하다는 것이다. '제사장들' 이라고 하면 복수지만, 그런데 앞에 '대(大)' 라는 글자를 붙여서 '대제사장' 이라고 하면, 그것은 실제로 왕이 아니냐는 것이다. 절에 스님도 큰스님이 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오면 우리는 뭐라고 답변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어떤 집단이 있고, 그 집단에 지도가 있으면, 그것이 사사이든 왕이든 간에, 아무튼 왕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극구 반대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왕이 없다고 말이다.

왕이 있다고 그냥 편하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 자리가 도대체 무엇이라고 그것을 다른 것을 둘러대면서, 즉 "왕이 아니고 대제사장이다" 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지금 우리와 같은 이방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대제사장이나 왕이나 지도자이기는 마찬가지로 보이는데 말이다. 하지만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 제사장은 일종의 소모품 !!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대제사장의 특징은 일종의 소모품인데, 즉 사용하다가 그 유효기간이 끝나면 버린다는 말이다. 영원토록 가는 항존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스라엘에 왕이 없다" 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려고 하면, "영원한 왕이 벌써부터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만드셨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점을 제사장이 가리거나 차단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늙어서 죽어 가는 인간을 절대로 의지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볼 수 있는 전부가 곧 눈에 보이는 것인데, 그게 인간의 한계이고 전부인데, 그런데 영원한 분을, 즉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 영원한 분이다" 라고 할 때, 그 함께 계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틀을 가지고 본다고 했는데, 칸트가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절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공간을 딱 집어서 이야기하라는 것인데, 즉 "여기이다. 저기이다" 라고, 그렇게 딱 집어서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나오면 답변이 궁해지고 마는데, 즉 인간의 한계는 특정한 지점이 있어야만 '있다' 라는 것이 되고, 또한 특정한 시간이 있어야만 '있다' 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돌아가신 부모님이 내 마음속에 있다" 라고 해봐야, 그런 것은 위로의 차원이고, 환각적인 믿음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내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

그런 것은 일종의 희망사항인데, 그래서 만약에 자기 남편에 살아서 돌아오면, "나는 지금의 당신보다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 남편이 좋아" 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게 곧 인간의 한계인데, 이스라엘은 결국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언약을 주어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언약을 받았다고 자랑하면 안 되는데, 감당이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어디에 계십니다" 라고 하면, 그게 말은 쉬울지 몰라도, 그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물론 믿음이 없어도 지식으로 믿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 즉 "예수님은 내 마음속에 살아있습니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그게 전혀 실감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감히 누구를 속이겠느냐는 것이다.

목사가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라고 멘트를 할 수 있는데, 그것으로 목회는 할 수가 있겠지만, 하지만 정작 목사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가? 퇴직금만 믿는데, 돈만 믿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 억울한 고난 !!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고 하니까, 추가적인 그 다음에 주어지는 언약으로 인해서, 그 텅 빈자리에 보이지 않는 분이 드디어 보이는 인격체로 등장하기를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고난이고, 그것도 그냥 고난이 아니라 억울한 고난이라는 것이다.

이상하게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데, 구약에서는 주로 선지자들이 그런 억울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하게 고난을 받게 하는 원칙과 사상이란 것이 어떤 것인고 하니, 이미 모든 인간들이 다 동의한 것이란 말이다. 즉 인간들이 정당하다고 동의한 사상이 억울한 순교자를 그만 양상을 시킨다는 것이다.

◈ 우리 가족은 조용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어 !!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어서, 아파트 위층에서 아이가 너무 뛴다고 하면 아래층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5명의 가족이 모여서 회의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너무 뛰지 않도록 위층에 가서 주의를 주기로 의견일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원칙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나는 조용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고,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고, 내 재산은 손해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고, 죽지 않을 권리가 있다" 라는 것이, 그것이 가족 5명에게 모두 동의가 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 5명의 지도자는 누구인가? 가장이 될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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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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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