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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무엘상 8강(중독), 마태복음 70강( 반전) 151124강의마태복음

사무엘상 8강(중독), 마태복음 70강( 반전) 151124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주향(IP:211.♡.45.164)

15-12-15 18:30

중독 (사무엘상 2:12- )

대전-(사무엘8강)

이근호

2015년 11월24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2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사무엘상 2장 12절을 보게 되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가 신약의 입장에선 잘 이해가 안 될 거에요. 왜냐하면 신약의 이스라엘이라 할 것 같으면 신약의 사람들은 그것이 교회다라고 간주하는 버릇이 있어서 교회라고 하면 주님이 함께 계신데,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그들이 알지 못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안 되지요?

알 든 모르든 주님의 혜택을 입고 있는데 꼭 주님을 알아야 하나? 몰라도 혜택만 입으면 되잖아요? 그렇죠? 왜냐하면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 여기서 문제는 여호와를 어느 정도 아느냐? 수능 몇 점 이상 되야, 수능 몇 점 이상 맞아야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 있냐의 기준이 나오게 된니다는 말이죠. 여호와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몇 점 밑이 되야 모른다에 속하느냐 이런 문제가 또 생겨요.

목사가 설교 할 때 여러분, 주님을, 예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에 집사들이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론 “목사 너는 얼마나 아는데?” 그러면 네가 안다고 하는 그 수준은 나만큼 알아야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목사만큼 더 알아야 된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보다 몰라도 봐준다는 뜻인지? 그러면 우리 교회에선 몇 퍼센트가 모르는 쪽이고 몇 퍼센트가 중간 정도이고 몇 퍼센트가 내신 등급 1위하는 정도이냐?

이러한 계급들이 성립되게 되어 있어요. “그럼 너는 잘 아냐?” 이렇게 되겠지요. 자! 그렇게 여호와를 안다고 할 때에 여호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을 안다고 하는 것과는 좀 다른데요. 여호와를 안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나는 여호와를 알아라고 했을 때에 안다, 모른다의 측정 정도를 어떻게 판단하냐는 겁니다. 흔히 우리가 많이 들었던 이야기를 먼저 할께요.

여호와를 알게 되면 기적들보다 많이 챙겼다에 해당이 됩니다. 기도 많이 했더니 복을 많이 주셨다. 이처럼 간단한 공식이에요. 기도를 많이 했더니 기도의 응답이 자주 일어나더라. 그만큼 나는 뭘 안다? 여호와가 나를 알아준다. 나와 여호와가 아는 사이가 된다. 여호와를 알면 행운이 찾아오더라는 것이 하나의 표준처럼 느껴지지요? 손가락이 아플 때 기도하면 쫙 펴진다? “아! 집사님 여호와를 많이 아시네요! 이런 기적이 오다니~”

그러면 기도해도 응답 없고 기적도 별로 없으면 여호와를 안다고 해봐야 “에이~ 큰 소리 치지마! 실적을 내놔야지~” 이러면 할 말이 없잖아요. 실적을 내놔라! 애가 공부를 잘한다던지 그런, 보통의 사람들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은 기적적인 실적이 있을 때 안다라고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 하니까 사람들은 “목사님! 그건 아니지요!” 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게 아니라면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겁니까?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내면에 들어 있고 그것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어떤 모양새로 나올 때, 어떻게 안다는 거냐? 창세기 5장부터 보면 에녹 같은 경우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잖아요? 그 다음에 동행한 사람이 6장에 보면 노아가 동행 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와 동행했을 때 나오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으로 인정받는 겁니다. 기적 받는 게 아니에요.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매 당대에 의인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 멸망시키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할 때 아브라함도 알았어요. 의인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그래서 사무엘상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형성 됐잖아요? 율법을 왜 줬겠습니까? 법을 왜 줬겠습니까? 법이 삽입돼 들어 왔다는 것은 하나님이 법 들고 들어 왔다는 뜻이거든요. 보이진 않지만 하나님이 법 들고 들어왔어요. 법을 들고 들어 왔다는 말은 법 지키기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요를 했지요?

법을 지켜야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다른 나라에게 밀리지 않는다. 이게 축복이다라고 된 겁니다. 그러면 법을 지키면 다른 나라에게 밀리지 않고 복을 받는다.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 이것을 단출하게 하면 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나오고 그것을 밑천으로 해서 저주를 받지 않고 의가 있는 곳에는 복이 안 올래야 안 올수가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하는 말이 성립되지요. 불량자란 말은 의에 관심이 없다라는 말이고 왜 의에 관심이 없는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설명을 더 하자면 이렇게 되겠지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는 무슨 뜻인가 하면 바로 단독자로 산다는 말입니다. 홀로 산다는 겁니다.

지금부터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객관식 문제를 내겠습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다음 중 흠뻑 마귀 들린 사람은? 다음 중 악마에 들린 사람은? ①번 간음한 자 ②번 살인한 자 ③번 도둑질한 자 ④번 열심히 바르게 사는 자. 몇 번 입니까? 누가 악마 든 사람입니까? ④번 열심히 바르게 사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홀로의 가치를 계속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단독자의 가치를, 계속 이어 나가야 돼요. 그냥 내 가치를 누구에게 빼앗기거나 상실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나는 내 가치, 내가 챙긴 의로 버티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 들린 사람의 최종적 모습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8장 44절에 나오지요.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 느니라 그는 처음부터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홀로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난 수요일에 언급했듯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홀로 살 수 있는 입장이 안됩니다. 제가 수요일 날 이야기 했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할 일은 입을 다무는 것, 가만히 입 다물면 돼요. 괜히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잖아요! 입 다물면 되는 거에요. “여자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요. 헤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거에요.

욥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게 두 가지의 자아가 있거든요. 하나님이 인정한 욥이 있고 욥(자신이) 생각하는 욥이 있는데 그것은 허구입니다. 욥(자신이)이 생각하는 욥은 주위 사람들과 대조해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라는 그런 자아가 있는데 이것이 밑에 원래의 원판이 있고 욥 본인이 생각하는 허구적인 것이 있는 거에요. 이것을 주께서 껍데기를 벗겨내는 작업을 하신 거에요.

입 다물라! 돼지고기 껍데기 벗겨 내듯이 욥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이것을 잃으면 자기는 다 잃은 줄 알고 있어요. 사실 이것을 잃어야 그동안 몰랐던 진짜 자기 자신을 주께서 창조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동안 공들였던 내가 달아나니까 그게 되게 아까운 거에요. 멋있는 나의 가치가 하루아침에 날라 갈 때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다닐 때 제자들 중에 별로 아픈 사람이 없었어요. 베드로의 장모가 아팠었지 베드로가 아프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도 안 아프고 12제자들도 안 아파요. 처음 알았지요? 아픈 사람 없다는 것을 그런데 이상하게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모여요. 그럴 때 제자들이 이래야 되요. “아~우리는 안 아프다!” 이러면 안돼요. “우리도 진작에 아팠어도 당연해” 배워야 되요.

건강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아픈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저주하지 아니하고 아팠기에 주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들이 막 나오니까 이것을 제자들이 멍청했던 자아를 버려야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마 9:1-8)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지붕 뚫고 들어오잖아요. 제자들이나 그 주위의 사람들은 주님께서 병 고치실줄 알았지요. 심지어 병자 본인도 병 고칠 줄 만 알았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를 언급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지요. 그러면 이 죄는 뭐냐 아프든 건강하던 다 죄가 있는 겁니다. 아차서 자기가 조인인 것을 알기는 쉽지만 모든 만사가 형통하고 몸이 건강한 가운데 “아휴! 나는 죄인이야!” 이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이거는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사람이 일이 꼬일 때 내가 세상을 잘못 사는 가하고 의심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이 평온하고 잘 될 때 정말 이건 위험한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는 겁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일이 잘 될 때는 아무리 애를 써도 수긍 못합니다. 수긍 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라는 마음가짐하고 이렇게 착한데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하는 마음가짐하고 어느 쪽이 악마 편에 서있어요? 나의 가치를 나는 그것이 신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갖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량자의 대표자가 요즘의 재벌 3세 에요. 드라마에 나오는 천하에 뭣도 모르고 지 세상인 듯 깝죽대고 스포츠카나 몰고 다니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잘 산다고 자기도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거에요. 이런 인간들은 대 기업의 빌딩 현관에서 말단 사원인 여직원하고 부딪혀서 커피 쏟아야 되요.

커피 쏟아서 양복이 젖어서 “니가 뭔데 감히 내 양복이 얼마 짜리인줄 아니? 물어내!” 라고 하면 그 아가씨가 “ 물어내라면 물어내면 되지 니가 뭔데?” 하면“ 나 이 회사 사장 손자야!” 하면 “ 손자면 손자지 그게 뭐? 물어내변 되잖아!” 하며 아주 되받아 치고 나올 때 “ 나한테 대드는 아가씨는 니가 처음이다!” 이렇게 드라마 시작 되는 거에요. “ 어! 매력있네! 나한테 기 안 죽고 달려드는 건 니가 처음이야!” 이게 아침 드라마 1~3회 정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불량자를 재벌 3세로 본다면 여호와를 알 수가 없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재벌 3세가 여호와를 안다 하잖아요. 안다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량자가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저! 여호와 알아요!”라고 손들고 성급하게 나오지 말고 이 불량자라고 할 때 너도 거기에 한패 먹으라는 겁니다. 네가 불량자 입장에 서서 그 코스를 밟아서 여호와가 누군지를 다시금 점검하라는 뜻이에요.

이게 뭐냐하면 이스라엘에 일어나는 전체 일들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계시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자체가 “나는 저 사람은 편이 아니고 이 사람 편이야!”라고 할 수가 없어요. 누가 저에게 질문 한 것처럼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하고 기름 안 준비한 다섯 처녀중 “나는 기름 준비한 아가씨 편에 설래!” 그러한 의도 자체가 주님께서 어리석은 처녀가 기름을 준비 안한 이유가 자기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거에요. 기름 준비한 쪽으로 가면 안돼요. 기름 준비하지 않은 쪽에 가야 되요.

하나님이 마지막에 악한 고기와 좋은 고기로 나누신다 할 때 좋은 고기 쪽에 서면 안되요. 악한 고기 쪽에 먼저 가야되요. 가라지 뽑아내고 알곡 거둬 드릴 때 “나 알곡 될래요!”손 들지 마세요. 가라지 쪽에 서야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은 그리스도의, 여호와의 동행 안에서만 선택이 완료적이기 때문에, 완료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선택 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구원 받고 난 뒤에 이미 주님의 선택이 완료적으로 나에게 적용 되었다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 성도의 할 일은 뭐냐? 고백이에요. 고백 이전에 뭐냐 주님의 통보가 있어야 된다. 성도는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통보 받은 것을 재확인 하는 고백, 이것이 성도의 남은 삶입니다. 어디서 살던지 강원도에 살던지 대전에 살던지 관계없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고백이고 그 고백의 근거는 착함이 아니라 주님께서 저에게 먼저 알려주셨잖아요! 이런 통보를 바탕으로 해서 고백이 나와야 됩니다.

제가 주일 낮에 분수 이야기 헸지요? 항상 설교를 50분안에 끝내야 되니까 강의시간 같으면 더 해도 괜찮은데 설교시간에는 12시를 안 채우고 중간에 자꾸 단출하게 이야기 하는데 분수위에 톰과 제리 이야기에요. 만화에 나오는, 분수위에서 쥐가 막 달리잖아요? 물 위에서 달려 집니까? 안 달려지지요?

그러면 여기서 살다가 미국에 가서 산다하면 미국에서 새 언약의 분수가 막 올라 오잖아요? 그러면 한국에 있는 분수와 미국에 있는 분수가 똑같은 새 언약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도는 유럽에 살던 아프리카에 살던 관계없이 새 언약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속의 분수가 꺼져 버려요. 꺼지는 이유가 뭐냐하면 마음속의 가치를 재구성했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가치를 재구성 하게 되면 재구성하기 전에 먼저 순서가 뭐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무가치하다라고 하면서 몇 분 안가서 나의 가치를 따로 적립해요. 이렇게 적립을 하게 되면 여기서 나오는 고백은 뭐냐하면 나는 잘났다! 라는 고백이 되요. “하나님! 이 정도는 해주셔야 됩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면 안되고 이 정도는 해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 나와요. “나 한국 말고 미국에 가서 살까?” 갑자기 공간적으로 자기가 선택을 해버리고 “나는 지금은 아니지만 한 2개월 후부터 성경 읽어야지” 라는 시간적인 선택을 해버려요. 그러며 어떻습니까? 완료된 선택이 아니고 새롭게 시작하는 자기 선택이 되겠지요?

지금 제가 불량자 이야기를 했거든요. 다시 강의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성경에서 불량자라 했는데 제가 먼저도 이야기 했지요? 불량자라 할 때 자기와 관련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호와를 알려면 반드시 불량자가 어떤 자인지를, 불량자를 거쳐야 되요. 불량자가 아주 나쁜 사람이지요. 아주 나쁜 사람을 거쳐야, 여기서 불량자를 거칠 때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냐하면 엘리의 아들들이 불량자라고 규정을 하잖아요!

이 규정에 누가 개입되어 있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규정 하는 것, 내가 나를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항상 자기를 옹호하게 되잖아요. 내가 나를 판단 할 때 자기를 무시하는 판단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항상 옹호해요. “그래! 이번엔 실패 했지만 여덟 번 째는 성공할꺼다!” 라고 격려를 해 준다니까요. 자기 자신을, 나는 항상 내편이에요.

저의 ‘피’라는 책에도 나옵니다만은 우리가 만약에 지옥에 떨어 질 때 모든 사람이 저주한다고 손가락질 할 때도 누가 나를 격려해 줍니까? 나만이 지옥가는 나를 격려해줘요. “에이! 어쩔 수 없잖아! 지옥에서라도 잘 살자! 힘내!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어! 그래, 지옥도 사람 사는데 일거야, 아마! 영원토록 살아야지!” 이렇게 격려해 주는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거짓 말 중에 제일 구라. 제일 거짓말 중에 거짓말은 내가 죄인이라는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것이 왜 거짓말이냐 하면 앞에 뭐가 붙느냐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내가 이야기한 것은 이것 맞지요? 이것 진리 맞지요라고 하는 거에요. 내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규정한 이것만 진리 맞지요?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멍청은 아니지요?

내가 죄인이라는 진리를 간파할 정도로 그거 하나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주님! 제가 전적으로 죄인이 아니라는 논리가 되지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왜 거짓말이 되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고 말을 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이 거짓말이 된다 이말이지요. 이번에 일이 안되고 당한 것은 하나님께 벌 받은 것이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 받은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 이건 벌 더 받아야 되요. 아직 멀었어요.

인간은 자꾸만 자기를 규정하는 이것은 사무엘상 2장에 12절 본문에 나온 것처럼 불량자, 다시 말해서 여호와와 함께 있지 않는 것, 단독자로 살아가는 것, 홀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화를 하다가 거룩을 하다가 돌발 상황이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지었다 합시다. 자기가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좌절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 하느냐 하면 평소에 자신이 죄를 짓기 전부터 이미 자기는 마귀의 앞잡이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가치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면서 귀하다고 쥐고 있었겠습니까? 이것은 뭐냐 내 가치를 내가 잘난 사람으로 하겠다는 말은 그냥 내 가치 붙들고 혼자 살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어서 사는 보람으로 제일 큰 보람으로 삼고 있는 겁니다. 진짜 성도는 혼자, 단독자로 가치 있게 사는 게 아니에요.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야 돼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태로 살아야지 주님이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회개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이건 뭐야?” 하시지요.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하면 뭐라고 하시겠어요?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갑자기 죄 지어서 죄인된 것처럼 왜 그러지? “왜 오바해? 아기도 네 주제를 모르겠어?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마치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무슨 가치 있는 존재인것처럼 그렇게 살아온거에요.

그런 대표적인 집단이 지방교회입니다. ‘워치만 리’의 대표적인 논리가 육과 혼과 영의 삼분설이에요. 사무엘상 2장에 의하면 불량자들이에요. 여호와를 알지 못해요. 다만 여호와를 이용할 뿐이죠. 여호와 하시는 것을 모델로 목표를 잡아서 끊임없이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과 자기가 해 낼 수 있는 것의 간격을 줄이면서 간격을 줄인 만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그 말씀을 보고 그 간격을 줄이려고 하는 거에요. 촘촘하게 줄이려고 하는 거에요. 좀더 가까이, 미분 방정식처럼, 옛날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원의 면적을 구할 때 어떻게 하냐하면 원의 면적을 낼 수 없으니까 (반지름)×(반지름)×3.14 원을 등분내어 한없이 잘게 잘라 이어 붙이면 결국 직사각형 모양에 가까워져 구하는 방식, 즉, 근소한 차이를 좁혀 나가는 방법으로 하거든요.

수학에서 이것이 나왔다는 말은 근사치입니다. 무한적, 무한대라는 것은 사실은 0인데 0은 아니고 0에 가까이 가잖아요. 이게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아담의 마음에서 우리의 마음에서 나와요. 수학이고 과학이고, 진리는 몰라도 가까이는 갈 수 있다. 이게 학문의 희망이잖아요. 학문하는 사람들이 희망으로 삼습니다. 과학은 물리적인 것을 다루지만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는 무엇을 다루냐? 인간의 마음을 다루거든요.

그것에는 목표가 있어요. 교회 나올 때의 목표가 있고 철학 할 때 목표가 있고 학문을 하는 목표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아까 근사치, (원주율)파이 3.14로 근사치에 가듯이 인간은 절대 행복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느냐를 본인이 테스트 하는 거에요. 자기의 평생을 걸고 도박하는 겁니다. 그것을 두 자로 ‘중독’ 이라고 합니다. 중독이에요. 절대 ‘선’에 대한 집념을 보이는 겁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쥐를 잡아 가두고 시시한 지푸라기주고 지켜봤습니다. 별로 맛없는 음식을 주니까 먹다가 말다가 이러는데 거기에 갑자기 쥐가 가장 좋아하는 치즈라든지 그런 것을 줬어요. 주니까 환장하는 거에요. 쥐가 시시한 것을 먹다가 진짜 맛있는 것을 주니까 그리고 학자가 맛있는 것을 맛보여 주고 난 후 그곳으로 가는 길을 못 가도록 차단시켜 버렸어요.

차단시킨 후 쥐의 뇌를 수술을 했어요. 수술을 해서 맛있는 것을 더 강열하게 느끼도록 만든 뒤 시시한 음식과 전에 맛보았던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에 두니까 이쪽으론 맛있는 것이 있는데 못가요. 쥐가 갈 수가 없는 거에요. 장치를 해 놓아서, 그런데 시시한 음식이 있는 곳은 자유롭게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에요. 쥐가 (좋아 음식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포기 하겠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심리학자가,

쥐를 수술해서 다시 집어넣으니까 이게 집착을 보이는데 시시한 건 굶어 죽어도 안 봐요. 이미 맛 봐서, 맛보고 난 뒤에는 거기에 집착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아주 무서운 말인데요. 성도에겐 별로 무서운게 없잖아요. 뭐가 무서운가를 제가 한 번 써 볼께요. 그런 집착을 뭐라 하냐하면 ‘쥐의 인간화’입니다.

다시 말해서 보수적인 것, 대구 사람, 경북 사람은 누가 나와도 여당을 다 찍어 주듯이 보수적 경향을 보이는 것. 인간이 보수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뭐냐하면 이미 주변의 환경이 치즈가 되었든 뭐가 됐든 쥐의 인간화가 되었다는 것은 주기 뭘 발견했다는 겁니까? 자아와 주체를 벌써 맛 봤다는 거에요. 치즈가 없는 나를 상상도 못 하겠다는 거에요.

쥐의 인간화라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을 쓸께요. ‘인간의 동물화’에요. 이게 더 무서워요. 쥐가 인간화 될 수 있다 즉, 자아와 주체가 확보될 수 있다는 말은 물론 수술에 의해서 그렇게 되겠지만 다른 기능은 제거하고 그것만 집중하도록 하는 거지만 이 말은 얼마든지 인간은 동물화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에요.

율법을 줬잖아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지켰다. 못 지키면서도 지켰다라는 것을 먼저 선점해서 상상적인 자아의 이상향은 이미 굳어졌어요. 굳어지고 난 뒤에 이제 남은 것은 뭐냐? 그 간격만 채우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교회 중독, 종교 중독, 성경 중독이에요. 교회가 교인들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노리는 가가 여기 나왔지요? 시키는데로 무조건 따라하는 중독시키는 거에요. 사람을 종교에 중독시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세요. 주님은 현실을 이야기하던가요? 종교를 이야기하던가요? 둘 중에 어떤 것을 이야기던가요?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그러면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이 따로 “야!야! 현실은 이렇다”라고 이야기 하던가요? 아니면 예수님이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어느 한 가운데서 현실을 언급하던가요? 바로 종교 나라, 국가 종교, 유대교 한 복판에서 예수님은 “이게 아니고 이건 악마이고 악마의 술책이고 이게 아니고” 아니라고 이야기 하지요?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내 말은 무시하는 것은 먼지 털어 버리듯 해라! “이 땅이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건 현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전? 장차 무화과나무가 시들 때 그 때가 차라리 안식일이 아닌 것을 감사해라! 그 때는 임신한 여인들은 괴로울 것이다. 성전이고 모든 것은 불타버릴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지고 지구상에 모든 사람에게 내가 구름타고 임할 것이다“

지금 현실을 이야기 하지요?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말하기 위해서 뭐를 포기해야 되요? 아까 중독 있잖아요? 중독을 포기해야 되요. 중독이 되려면 주체가 있어야 되는데 현실은 뭐냐? 현실 속에 내가 파묻혀서 내가 사라져 버려야 되요. 내가 있으면 불량자가 되요. 내가 있는 순간부터 나는 단독자로 살 수 밖에 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 살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불량자에요.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그들이 뭘 모른다? 여호와를 모른다. 이것은 오늘 날 대입시키면 성도는 뭘 안다? 여호와가 예수님 중심으로 현실 속에 일부로써 나는 들어가있다라는 겁니다. 내가 밥을 먹고 내가 춤을 추든 뭐를 하든간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힘 가지고 하는 거에요. 그리스도가 나의 주체를 대신해버렸습니다. 왜? 대신 죽었으니까! 대신 죽었다가 대신 살아 나셨어요.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에요. 일부지요. 하나의 퍼즐의 그림에서 한 조각을 담당 하지요!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큰 그림에서 중에서 하나의 조각을 담당하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에녹이나 노아나 예수 그리스도의 한 파트를 담당하는 겁니다. 모세 같은 경우에는 고난 파트를 바로왕의 아들 됨을 포기하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겼다. 즐긴 것도 아닌데 즐겼다는 거에요.

현실을 언급할 때 “아! 내가 착하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시는 작업 안에 내가 놓여 있다. 이 현실은 날마다 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드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예를 들어서 식상 하겠지만 세상의 끝(the end of the world)인가하는 옛날 팝송 있지요? 왜 태양은 계속 빛나는가? 내 사랑이 깨졌는데 왜 밤은 지고 새는 짹짹거리고 왜 재미있게 밝고 웃냐는 말이죠?

니가 아무것도 아니거든! 여자 친구와 헤어진 게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데 마치 상처를 입고 내가 좌절한다는 것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입니까? 마치 이 현실은 내 눈앞에 굴복해야 될 마치 내가 주인인것처럼 내가 판단자이고 최종적인 절대자인 것처럼 살았는데 그게 바로 마귀의 앞잡이로 살아온 거에요. 마귀는 뭐라고 하냐? 여호와랑 붙어 다니지 마라는 것이거든요.

혼자서 살 수 있는데 왜 여호와랑 자꾸 붙어 다니냐? 오늘 본문에 불량자라서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 여기에 불량자라고 엘리의 아들들을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평소에 엄마로부터 태어 날 때 이것을 부여 받고 태어났어요. 응애~ 하면서 우리는 불량자의 심성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동안 아닌 척하고 위장들을 하지만 한순간에 위장은 벗겨져 버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나한테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라고 따지게 될꺼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게 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대드는 게 죄에요. 우리는 버림받아야 되는 정도가 아니고 수시도 대드는 입장에 있습니다. 대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치 있는 나를 왜 자꾸 무가치로 몰아넣는 것에 대해서 나는 못 참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래요. “네 속에 마귀가 들어 있으니까 너는 처음부터 거짓이다”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몰아 붙여서 무가치하다고 하는데 껍데기에 불가한 우리가 마귀가 시키는 대로 극렬하게 반발하는 겁니다. 극렬하니까 유해진이 생각나는데 어느 섬에 가서 문어가 잡힌다는 거에요. 유해진이가 극렬하게 통발 설치해도 문어가 한 마리도 안 잡혀요. 아내인 차승원이 요리를 해주고 있는데 문어가 잡혀야 요리를 해 주잖아요. (오락 프로) 삼시세끼. 왜 안 잡히느냐? 주님께선 “왜 잡아야 되는데? 니가 왜 잡아야 되는데?”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내가 내 의미를 규정하지 마세요. 내가 내 의미를 규정한다는 것은 그건 불량자입니다. 단독자이기 때문에 자기 홀로 서고 싶어서, 그게 바로 불량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불량자가 나온 것은 “나는 불량자가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해!” 이러지 마시고 주께서 불량자의 자리를 일부러 마련하셨습니다. 불량자의 자리로 갈 때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여호와가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불량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요. 억지가 아니고 그냥 우리가 자연스럽게 살게 되면 행복 위주로 태평하게 살게 되면 더 이상 여호와가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나는 나 홀로도 얼마든지 여유로울 수 있는 그 지경, 여호와고 삼위일체고 다 귀찮아! 그냥 혼자서 살고 싶은, 이것이 우리의 바램속에 있는 우리의 진짜 소망이 아닌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내가 신이 되는 거에요.

혼자. 그냥 다 귀찮아! 혼자 있으매 그 자체로 절대적인 존재, 그게 자아실현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고맙게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 가운데 나온 겁니다. 그러면 아들이 나왔다는건 아버지가 문제 없는데 아들이 문제 있다는 거에요? 아버지가 문제 있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문제 있는 거에요. 그러면 어디에 아버지가 문제가 있는지 2장 30절 보겠습니다.

(삼상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 의 집이 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 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되어 있지요? 그 이유가 2장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삼상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 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식을 하나님 보다 더 중히 여겼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식이 최고이지. 인간의 혈연관계가 있는데 제가 이번에 요한계시록 교재 올려놨지요. 혈연관계에서 못 빠져 나온다고, 교회에 왜 갑니까? 하나님 믿으러 가는 게 아니고 자식 잘되라고 하나님을 이용 하려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내가 제일 중요시 하는 자식, 그것도 못난 자식이 아닌 정말 귀한 자식을 하나님과 맞바꾼 사람이 누구 밖에 없냐 하면 아브라함 밖에 없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계열에 속한 사람은 줄줄이 강제로 자식을 (하나님과) 바꿔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이삭도 누구를 더 좋아 했습니까? 장남 에서를 더 좋아 했지요? 자기가 더 좋아하는 아들이 영원히 저주를 받습니다. 지옥 가요. 자기가 좋아했는데,

그런데 자기가 안 좋아하던 아들은 천국가요. 하나님 믿을 마음이 생깁니까? 나가 죽어라하는 자식은 천국가고 있고 귀하다하는 자식은 지옥가고 그럼 자기의 판단은 뭐가 되요? 거짓이 돼 버렸지요. 야곱은 어떻습니까? 아들을 자진해서 내놓은 게 아니고 강제 조치로 제일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죽었어요. 짐승에게 물려 자기가 입힌 옷에 짐승의 피가 묻혀서 야곱은 죽은 존재입니다.

이 세 가지의 언약을 앞장 세워서 여호와 등장 하면서 그게 집단화 하게 되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요. 모든 아들은 다 죽어야 되는데 이스라엘의 아들도 죽어야 되요. 아들도 죽어야 되는데 니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어린 양과 바꿔치기 해서 하나님이 주신 자식으로 다시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요? 그것을 발랐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애굽 사람도 우리 가정도 다 죽은 거고 장자가 죽었다는 것은 대가 끊어졌다. 이건 저주 받은 거에요. 다 마땅히 저주 받습니다라고 되야 돼요. 그러고 난 뒤에, 다 죽고 난 뒤에 자신이 이제는 무가치 한 것 중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여호와 보시기에 가치 있는 것을 거기에 담아 버리지요.

보쌈 싸듯이 돼지고기에다가 우리는 뭐냐 배추 잎사귀, 상추 잎사귀에 불가하고 다 의미 없어요. 없는데 상추 잎사귀는 그 자체로는 의미 없어요. 뭔가 담겨야 되요. 귀한 보물이 담기듯이 담겨야 된다고요.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 했겠습니까? 신랑을 담겠습니까? 결국은 신랑을 담잖아요? 기름 가지고 주유소 할 것도 아니고 기름은 단지 신랑을 담기 위한 임시적 조치이지요?

기름을 준비하겠다는 것은 신랑을 더 그리워 한다는 뜻입니다. 기름 값 오른 다고 더 준비한 게 아니고 신랑이 그리운 거에요. 우리는 쌈 같은 존재로써 새로운 것이 담겨야 합니다. 그게 뭐냐 우리가 어린 양 때문에 새로운 가정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동행 없이는 우리는 죽습니다를 담아요.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는, 그 동행이란 게 뭐냐하면 하나님의 존재가 동행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 존재를 부정하는 분의 동행.

나의 가치를 무가치로 만드시는 매일 같이 그 작업을 반복해서 유발시키시는 분의 동행이 되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는 지금 생각해도 준비 할 때부터 너무 어렵다, 참 어렵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물질의 정신화로 짧게 이야기 했는데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냈잖아요. 유월절에 양을 왜 잡습니까? 유월절을 지키면, 자기네 나라가 무슨 나라? 복된 나라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유월절을 지킨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못 알아 봤습니까? 못 알아 봤지요. 지키기 때문에 못 알아 본겁니다. 매 주일 교회가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나는 것하고 똑같은 거에요. 예배드리고 Q.T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못 만나는 거에요. 왜? 본인이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에 그 가치 있는 일을 종사하고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느낄 새가 없는 거에요.

목회자들의 가장 문제가 그게 아닙니까? 목회 하면서 무가치함을 “나는 목회 안 해도 돼!”라고 하면 되는데 목회해서 사람들이 몰려오니까 문제가 된거에요. 인기가 높아지니까. 갑자기 자기가 주의 종이 되어 버렸어. 완전 주님의 하청업자가 되어 버렸어. “나는 건드리는 건 주님을 건드리는 거다.” 이렇게,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하나님의 동행은 사무엘과 함께 있는 겁니다. 아니요! NO! NO! NO!. 엘리 가문이 이스라엘과 박혀 있을 때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그게 여호와의 동행이에요. 사무엘이 훌륭한 것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엘리 가문이 멸망할 때 이스라엘 내부에 마땅히 멸망할 요소를 우리가 품고 있어야 그게 성도에요. 그게 신약의 십자가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함을 하루라도 잊지 마세요.

10분 쉽시다.

주향(IP:211.♡.45.164)

15-12-15 18:36

반전 (마 19:28) 대전- 70강

이근호

2015년11월 24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9장 28

(마19: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태복음19장 28절부터 보겠습니다. 28절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그 다음 29절이 이해가 되요.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는 이 말씀이 상당히 부담으로 안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28절을 모르고 29절을 보게 되면 발길을 돌릴 수가 있어요. 교회에 왔다가 신세 제대로 조지고 “아이고! 잘못 걸렸구나!”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거에요.

28절의 의미가 뭐냐하면 구원이 자율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구원은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는 12보좌에 앉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고백 이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통보지요? 그냥 통보해주는 거에요.

마치 장정들에게 논산 훈련소에 집결하라고 통지서 날라 오지요?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훌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이등병의 편지 나오잖아요. 그냥 통보하는 거에요. 통보한다는 말은 자율적이지 않아요. 내 일이 아니다라는 말이죠. 통보한 분의 일에 우리가 강제로 끌려가는 겁니다. 일종의 추행 당하는, 고상한 내 인격에 추행 당하고 강간당하고 추행 당한 거지요.

누가 12보좌에 앉고 싶어서 환장한 것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자율성을 박탈당한 상태입니다. 자율성을 박탈당하면서 거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율성을 박탈한다고 통보를 하면 자율성을 박탈당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슬슬 계산 하겠지요. 좋은데 주시는 구나!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또 좋은 것만 생각해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겠지요?

그런데 12보좌에 앉는다면 완전히 왕 앞에 앉는 것처럼 좌의정, 우의정이 앉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할 때 29절이 주어집니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다 갔다 버려라! 모든 걸 버려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안할래!” 아무리 미래에 좋은 게 있다 하더라도 이정도까지 강압적으로 나의 모든 걸 빼앗아 가면 이 흥정은 깨지는 겁니다. 이 거래를 저는 안하겠습니다. 이 물건 안 사겠습니다하고 돌아 서겠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너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통보를 해도 자율권을 네가 포기한 적이 없음을 들통내는 구절이 29절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보게 되면 28절을 다시보게 되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에서 나와 너희의 의미는 주님께서 새롭게 제공합니다.

내가 아는 나는 여기서 탈락이 일어나고 내가 생각하는 우리는 탈락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 탈락이 일어나면서 탈락 과정과 동반해서 주께서 미리 준비해 주신 주님과 준비해 놓은 내가 생각하지 않는 우리가 새롭게 여기서 떠올라요. 부각이 되는 겁니다. 모터쇼 같은 데를 안 가봤지만 입장료 비싸서 못 가봤지만 모터쇼에는 무대에 신차가 먼저 안 나와 있어요. 차 옆에 멋있는 아가씨가 먼저 나오잖아요.

자! 신상 나옵니다하면 무대가 빙글 돌면서 밑에서 차가 무대에 올라오면서 새롭게 부각되지요. 바로 주님이 이야기했던 너희라는 것, 천국의 백성이 우리가 깨어지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솟구쳐 올라옵니다. 새롭게 등장 하지요. 이 작업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주님이 하신 작업이에요.

그러면 주께서 이야기 하신 새롭게 한 너희와 현재 우리가 말하는 내가 속해있는 12제자 집단 체와 우리하고 어떤 차이가 있냐하면 너희 속에는 뭐가 들어 있냐하면 대신 죄 용서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죄를 씻어 줬다는 겁니다. 그런데 죄를 씻어 줬는데 왜 너희가, 우리가 뭘 모르냐 하면 죄를 모르는 상태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라고 하는 것은 누가 씻어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착한 일만 꾸준히 하게 되면 나의 착한 일로써 삭제시킬 수 있는 죄를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쁜 짓을 중지하게 되면 이제는 안 지워지는 죄들만 전부 끌어다 논 거에요. 내가 행동만 똑바로 하게 되면 두 번 다시 안 짓는 죄 있잖아요? 그런 죄들만 죄라고 전부 다 모아 논 거에요. 따라서 그 죄는 어떤 한계가 있냐 하면 착하기만 하면 두 번 다시 안 지을 수 있는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착하기만 하면,

성경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릴테니까 여러분 나름대로 요점을 마음속으로든지 아니면 말해보세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데 2장14절을 읽어 드릴테니까 누가 한번 해석해 보세요.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 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약 2: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게 무슨 뜻이지요? 이것은 무척이나 쉬운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도와주라고 하는 거지요. 1단계 쉽지요? 그런데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되요. 주는 쪽의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받는 쪽에서 만족해야 그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주는 쪽은 말로 때웠는데 받는 쪽은 춥고 헐벗고 있다라는 말이죠. 이게 행함과 믿음 사이라는 겁니다. 야고보에서.

그러면 믿음과 행함에서 하나님께서 믿음이라는 고백을 받는 쪽이 누굽니까? 하나님 쪽이죠?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납득이 되고 만족스러운 믿음을 내놓기 위해서는 “네~ 주님 믿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존재를 믿습니다.”라고 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런 것은 귀신들도 안 하는 거에요. 그러면 뭘 원한다는 말입니까? 믿습니다라고 하기 이전에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 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납득 하고 하나님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 행함을 보여 주라는 거에요. 그런 행함이 뭐냐하면 아버지가 자식을 잡는 것이고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는 거에요. 이건 살인죄와 거짓말 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왜 야고보가 이 두 가지의 예를 들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고아원의 예를 들으면 얼마나 수월합니까? 고아원이나 어려운 사람들, 노숙자를 말하면 충분한대 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예를 드냐는 거지요.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본인의 행위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합당한 행위를 내놓을 수 있는 주체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건 뭐냐 아브라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밀어 낸 거에요. 그게 로마서8장에 나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지요. 인간은 몰라요.

그러나 성령이 오게 되면 “인간아! 그런 기도는 아니야!” 내가 알고 있어. 성령께서 아버지가 아시는 것을 인간을 대( )해서 실행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일 낮에 말한 것처럼 밀어 낸다는 거에요. 뭔가 하나가 들어 왔을 때는 주님의 행함을 바깥에 내 놓는데, 이런 것 있잖아요. 윗집에서 부부싸움을 한다고 할 때 아랫집에선 한두 번 한 게 아니고 오랫동안 하게 되면 벌써 알아요.

부부싸움 하고 난 뒤에 바깥에 뭐가 나가 있는가를 알아요. TV나 냉장고는 비싸서 안되고 그릇이나 항아리, 베개나 이불등 뭔가 바깥에 우당탕탕 했기 때문에 제자리에 있지 못하고 창 밖에로 다 튀어 나온 것들, 나중에 울면서 자기 마누가 나오겠지요? 마지막으로 나오는 장면이 “그래! 못 살겠다!” 보따리 싸고 나오면서 그게 마지막 하이라이트잖아요? 튀어 나온다는 말이죠,

뭔가 일이 났기 때문에 바깥에 튀어 나온 게 있다면 그 바깥에 튀어 나온 게 죄가 되는 거에요. 의가 삽입되는 동시에 바깥으로 의와 있을 자리가 없어서 나와 있는데 그 죄가 뭐냐? 이 말입니다. 그 죄가 바로 종교적 행위 아닙니까! 그동안 내가 안다고 여기면서 행했던 선교와 전도와 기도와 성경공부와 예배 참석과 목사 섬기기, 이 모든 것이 죄라는 이름으로 빨간 딱지 붙여서 전부 바깥으로 이거는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물건들이라는 것이라고 끄집어내는 겁니다.

다 바깥으로 튀어 나오는 겁니다. 목회 잘하는 것등 다 나오지요. 그런데 마지막 나오는 물건으로 누가 나오냐 하면 병든 내 몸이에요. 내가 바로 배설물 그 자체에요. 이게 주일 날 설교에 마지막으로 한 거에요. 내 자신이 배설물이라는 사실을 해피벌스데이 투유 할 때는 몰랐지요? 몰랐어요. 내가 쓰레기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내가 나를 바깥으로 쓰레기를 밀어낸다는 말은 주께서 친히 준비해 주신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 낸 진짜 나.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해서 섬겨야 할 나라가 이미 내 안에 만들어졌기에 껍데기 같은 구닥다리 내가 바깥으로 나와야 되는 겁니다. 의가 들어가서 죄인된 내가. 육신의 내가 바깥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 과정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지면서 다 보여준 거에요.

“네 몸속에 내가 들어갈께!” 죄인의 몸속에 들어 왔고 죄인의 몸이 너희가 만나지 못한 아버지 앞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십자가위에서 보여줬습니다.“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려야 될 몸을 우리는 최고로 여기고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이걸 유지하려고, 또 내일 모레 김장한다고 준비해서 본격적으로 김장합니다. 김장은 왜 합니까? 먹고 살라고,

예수님 드릴려고? 예수님은 김치 안 드시는데 예수님이 김치를 잡수시면 문제가 되요. 어떤 교회에선 새우젓을 넣고 할 것이냐 아니면 다른 액젓을 넣고 할 것이냐 이게 문제가 되요. 어떤 장로교는 새우젓을 넣고 할 것이고 어떤 침례교는 다른 액젓을 사용할 수 있는 문제이고 서로 자기네가 맞다고 할 거에요. 이게 물질의 정신화거든요.

집사가 성만찬을 할 것이냐 목사가 할 것이냐 부목사는 왜 안되냐 이게 문제가 되는 것처럼 이 모든 게 형식, 형식, 형식에요. 그 형식을 밀어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12제자들을 가지고 이미 목표를 정해 놓았어요. 12보좌에 앉는다는 목표를 주고, 그다음에 허접하지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들을 데리고 십자가의 길로 동행을 하십니다.

십자가로 같이 동행하시는데 주님이 레이스인가 속도를 너무 내셨네! 처음엔 제자들은 시속 20Km로 갈 땐 편안 했는데 30Km으로 갈 때도 룰루~ 랄라~ 김밥 사먹으며 재미있었어요. 갈수록 속도가 나는데 갑자기 속도가 높아진 것이 뭐냐 성전에 채찍 들고 설칠 때, 상 엎을 때, 아~심하다! 꼭 이럴 필요까지 있나? 드디어 슬슬 12제자가 눈치 보기 시작합니다.

눈치 보다가 가롯 유다는 최초로 배신 때리기로 작심을 했어요. “청춘을 돌려다요! 잃어버린 3년 세월, 그걸 보상받고자 내가 사람 잘못 봤네. 진작 발 뺄껄! 무슨 낙을 보겠다고! 속았네! 그저 훌륭하다는 소리 들으면 되지, 메시야인줄 알았는데, 아~가짜였다! 늦기 전에 발 빼자! 그냥 발 빼면 안돼! 화가 난다. 팔아먹어야지!” 하고 스승을 팔아먹었지요? 쉽게 말해서 “예수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겁니다. 인간은 복수 없이 못 살거든요.

복수하는 재미로 살거든요. 그 가롯 유다가 12제자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이에요. 다른 제자 하나가 빠져도 나머지 11제자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가 빠져 버리면 바로 와르르 다 무너져요. 가롯 유다가 예수님 팔아먹을 때 그 옆에 몇 명 남았습니까? 12제자들 중에 단 한 명도 안 남기고 다 도망갔지요. 진작에 그렇고 그런 집단이었어요. 뭐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를 하고 뭐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칠 때 대단 했지요? 주께서 12제자에게 한 그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난 뒤에 다시 봐야 될 이야기에요.

(마10: 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 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마10: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 이시니라

이 말이 성립되려면 제자들 속에 성령이 임해야 되요.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이야기 한다는 것이 뒤늦게 예수님의 말씀이 납득이 되고 “야! 이게 현실이구나! 나에 대해서 이미 익히 알고 있구나!” 이게 되는 거에요. 이것을 미래에서 보면 뭐가 없어져요? 제자들에겐 애초부터 뭐가 없습니까? 자율권이 없어요. 자율권이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자율권을 마음껏 활용케 하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는 자유가 있어요. 자유가 있는데 자유가 없이 되어 버려요.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제자들은 마음껏 자유를 발휘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신 그 개념 아래 인간의 개념을 따로 갖고 있다고 보면 되지요. 나는 자유가 있다. 나는 선택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모든 게 주님의 자율이었고 주님의 자율된 뜻이었는데 인간의 자유가 그 안에 발휘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하면 주님의 자율로 만든 세계가 따로 있고 내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내가 자유로운 세계는 이게 죄 짓는 거지요? 이 죄가 예수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것을 포함시킬 때 이런 문장이 되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죄 짓게 하신다. 억지로라도 죄 짓게 하신다. 이걸 더 간단히 이야기하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죄 짓고 살면 됩니다. 이걸 네 자로 줄이면 “막 살아라”가 됩니다. “저는 죄 짓지 않고 조심스럽게 살았습니다.” 그게 바로 막 산거에요. 그러면 막 살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이 될까요? 안 될 까요? 이미 구원이 되었기에 막 사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자율의 개념에 대해 했는데 좀 더 해 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은 이유가 구원받기 위해서지요? 천국가기 위해서,

그런데 여기서의 구원은 자기 죄에서 나온 구원 개념이지요? 죽어서 좋은 데 갈려고 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면 이 구원도 죄가 되겠지요? 그러면 결국 구원에서부터 구원이 돼야 됩니다. 나의 구원에서 예수님의 구원으로 이전 돼야 되요. 이사 가야 되요. 그걸 짧게 이야기 하면 구원 받는데서 구원 돼야 되요. 이것을 더 줄이면 구원 안 받으면 돼요. 왜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구원 안 받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행동은 구원이 안 되는 행동을 보여주면 되요. 점점 더 말이 재미나고 쉽습니다. 나의 기도와 나의 헌금과 어떤 것도 전혀 나의 구원에 요건이 된다? 안 된다? 안돼요. 나의 찬양도 (그 어떤 것도) 구원이 안되는 거에요. 왜? 이미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전도해서 구원 됐다. 아니지요! 전도 해봐야 나중에 예수님 배반하는데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 구원 됩니까? 물 위를 걸어봐야 배반 하는데요.

베드로가 병을 고쳤다. 베드로가 귀신을 쫓았다. 구원 받았다? 아니지요! 그렇게 해봐야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으로 모아 집니다. 왜냐하면 배신으로 모아질 때 가장 극단적으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죄를 집대성한 가운데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만 홀로 탈출이 되요.

나사에서 우주선을 쏘아 올리면 올라갈 때는 덩치 큰 우주선이 올라가잖아요. 나중에는 TV생중계 보게 되면 (우주 발사체는 크게 윗부분의 탑재부와 아랫부분 추진부로 나뉘는데 발사 후 추진부가 분리돼 떨러져 나가고) 정작 우주 궤도에는 작은 (탑재부) 것만 남게 되요. 최초로 1957년 (구)소련에서 (인공위성인 스푸트닉 1호)쏘아 올릴 때 농구 공 만한 것을 소련에서 올렸어요. 미국에선 짜증났겠지만 미국에선 그것도 못했어요.

처음엔 거대한 것을 실어서 결국 작은 거만 남잖아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뭐만 올라가는가? ‘다 이루었다’만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시고 올라간 그것이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게 되면 우리가 속해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었다’를 새삼스럽게 증명하는 것. 제가 증명보다 더 좋아하는 단어는 확인, 확인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고백과 같아요. “너 성도 맞지?” 하면 “맞네요!” 확인 하지요.

성도임을 확인 할 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할 때, 한번 물어 봅시다. 12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잖아요. 오순절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걱정이 늘어졌습니까? 방금 들으셨잖아요?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동의했다 치고 성령이 임하면 그러면 12제자가 걱정이 늘어졌습니까? “나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이렇게 걱정 했습니까? 기뻐했지요? 성령이 임한 특징이 뭡니까?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 기쁨을 성령 안 받은 다른 사람은 이것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이해가 안돼요. 이해가 안돼는 그들은 뭐라고 하냐? 미쳤다고 그래요.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그 소릴 들었는지 “그래! 미쳤다. 나는 주님의 사랑에 미쳤다” 이것을 합치면 미처 죽겠다라는 말이거든요. 주님이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미처 죽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말한 단독자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떻게 먹여 살릴 것인가가 아니고 무엇과 연결되냐? 그리스도의 의와 그리스도의 이루신 그 공로와 연결되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의 환자라고 볼 수 있어요.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이고 옆에 있는 산소통에서 산소가 코로 계속해서 공급이 되잖아요? 성령이 계속 공급 되니까 나는 죽었는데 공급되어지는 힘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냥 내가 산다고 하지 말고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펄떡펄떡 뛴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장어라든지 추어탕하는 미꾸라지를 시장에서 사게 되면 죽은 낙지 말고 산 낙지를 사게 되면 산 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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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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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