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강-고전 11장 23-26절(그날 밤의 반복)151122-이 근호목사
66강-고전 11장 23-26절(그날 밤의 반복)151122-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5.136.25.28)
66강-고전 11장 23-26절(그날 밤의 반복)1511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입니다. 신약성경 276페이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방금 읽은 본문에서 제일 핵심 되는 단어 하나 끄집어낸다면 ‘새 언약’을 끄집어내겠습니다. 이 ‘새 언약’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새 언약에서 천국도 나오고 영생도 나옵니다. 새 언약에 대해서 관심 없는 사람은 지옥가고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이것이 언약이거든요. 그러면 이 언약이라는 뜻이 뭐냐? 네가 세운, 네가 행할 수 있고, 이해가 되고, 행동을 반복해서 할 수 있는 그것은 언약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언약에 포함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행한다는 것,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는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살아 있는 사람에게서 행동이 나오고 살아 있는 사람의 행동이 뭉쳐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다. 천국 지옥을 판결하는 기준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살아 있어서 행할 수 있는 것이 뭐냐? 대표적인 것들이 십일조하기, 교회 나와 주기, 예배드리기, 찬양하기, 전도하기, 선교하기, 목사 섬기기, 교회 키우기,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기, 이런 것들이지요.
이런 것은 통합해서 언약이 아닙니다. 효과가 없어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아무 효과도 없으면 안하면 되겠네.” 하거든요. 수천 번 들었던 이야기죠. “아무것도 안하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사람이 살아 있으면 꼼지락 거리게 되어 있고 그 꼼지락거리는 그것이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목표가 있고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대하려고 해요. 상대하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도저히 불안해서 못삽니다. 신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를 해서 장래에 대한 공포심을 사전에 종교적인 방법으로 제거하고 싶어서 가만있지를 못해요.
애가 고3인데 가만있을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남편이 아픈데 가만있을 아내가 어디 있어요? 뭐라도, 기도라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개척교회 하는데 100명교인중에서 50명 빠지고, 20명 빠지고 나중에 달랑 두 명 남았을 때 가만 있는 목사 같으면 참 좋은 믿음이지요.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하겠지요.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가만있을 인간 같으면 그것은 대단한 인간입니다. 어떤 인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뭔가 자기를 건질 수 있는 온갖 방안과 수단을 자기한테 퍼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고상한 말로 해서 ‘물질의 정신 화’라고 합니다. 인간은 신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신체가 가만있는 신체가 아니고 그것을 정신세계로 엮어내고 형성시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옛날에 스핑크스를 만들었다, 또는 피라미드를 만들었다면 왜 만들었을까요? 피라미드는 돌로 쌓았거든요. 왜 쌓았을까요? 등산하는 사람들이 산에 오를 때마다 돌무더기를 쌓아놓았지요. 동화사나 하여튼 유명한 사찰 입구에는 전부 다 돌무더기가 있지요. 길 가다 돌을 하나 더 얹어놓아요. 물론 그걸 발길로 차서 다 무너뜨리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있는데 그걸 왜 쌓았습니까?
소망이라는 것, 어떤 희망이라는 겁니다.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나는 가만있지를 못하고 꼼지락 거리면서 행동에 나선다. 그 행동이 집결되는 것은 나의 내부에 있는 정신세계를 외부에 표출해 가는 겁니다. 옛날에는 피라미드죠. 지금은 초고층건물, 거대한 돔구장, 대형예배당, 많은 숫자가 모이는 것, 기념물, 이걸 왜 만듭니까? 인간은 60조개의 세포덩어리가 아니에요. 뭔가 안에 정신 비슷한 것이 살아 있어서, 그걸 욕망이라 하는데, 그 욕구와 욕망이 바깥으로 표출되게 되면 이것이 물질을 덮어쓴 어떤 정신처럼 형성되고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근처 신숭겸 유적지를 한 바퀴 돌고 옵니다. 약 30분정도 걸리는데 그 유적지에 보면 안내도가 나와 있고 설명이 나와 있어요. 그걸 왜 만들까요? 거기에 사람 사는 것도 아니고 실용적인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왜 만드는 것인가? 기념하기 위함입니다. 기념을 왜 해야 되는데? 기념한다고 돈 생기는 것도 아닌데 기념을 왜 할까요? 그것은 정신을 살아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정신은 왜 살아 있어야 되는데요? 정답은 이래요. 나의 신체는 일시적, 한시적이다. 하지만 내 신체는 죽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나는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정신세계에서 살아남겠다는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 가는 이유 같은 것, 보람 같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볼 때 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 “네가 외부의 신체에 할례를 행하지 말고 네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라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신체적으로나 관행적으로 행하는 것 말고 무엇을 노리는가 하면, 우리의 중심정신을 노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정답은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을 주실 때 노리는 것이 “어떤 행동을 할까요?”가 아니라 네가 지금 어떤 수상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 수상한 마음을 겨냥해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정신과 정신의 만남이에요. 주님의 정신과 우리 정신의 만남입니다. 그런 만남에 있어서 우리가 반복적으로 교회 나오고, 십일조하고, 예배당 짓고, 성만찬하고, 세례식하고, 찬양하고, 예배하고, 마치면 얼른 집에 가고, 이 모든 것이 전혀 거기에 끼어들 수가 없어요. 우리 행동의 반복이 우리의 정신마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용서해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노리는 게 따로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새 언약이 중심 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은 우리의 행동을 집대성해서 만들어 내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돼요. 어떤 분이 저에게 “이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 신학적이고 철학적이어서 어렵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두 가지의 전제가 잘못되어서 그래요. 그 전제가 하나는, 나는 인간이다. 또 하나는, 나는 살아야 되겠다. 이 두 가지 전제만 포기하면 돼요. 나는 인간이 아닐 수가 있다.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 내가 사는 이유를 찾지 말고 왜 죽는지 그 죽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이 처음에 만든 그 인간이 아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원했던 그 인간이 아니다. 그 인간은 오직 예수님이고 나는 그 인간이 아니고 가짜다. 그 두 가지 전제만 하면 돼요.
그런데 나는 인간이다. 내가 인간인 이상 나는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하고 말씀에 덤벼드니 “행하지 말라.” 하니까 “내가 나를 살리는 방법을 사전에 다 차단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사는데?” ‘어떻게 사는데?’ 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니까요? “나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갑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하는 그 인식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네가 뭔데 구원을 받아야 해?” 그 문제부터 스스로 점검을 해 봤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뭔데 내 나라에 들어가는데? 너는 네 땅에서 살면 되지 하나님 나라에 왜 끼려고 하는데?” 그런 질문도 주님 앞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보셔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냥 들으면 돼요. 행할 생각 하지 말고 사태만 그냥 파악하면 돼요. 사태파악을 돕기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 언약은 사람들에게 맡겨지지 않았습니다. 이 새 언약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만 하실 일이지 우리는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새 언약 앞에서 인간의 행하는 모든 행함은 소용없습니다. 개척교회 백군데 해도 소용없고, 강의한다고 돌아다녀도 소용없고,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소용없고, 아무 소 없는 거예요.
소용없는 것은 이미 등장했기 때문에. 이미 등장한 소용 있음에 대해서 내가 소용 있다고 나대는 그것은 지적만 받을 뿐이에요. 내침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왜 문제 된다고 하느냐 하면, 이 겁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 대목입니다.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이 원판인데 그 원판을 인간이 반복해서 손을 대게 되면 그 원판이 인간의 행함 속에 계속 살아 있느냐는 그 문제에요.
만약에 예수님이 천국과 지옥을 완전히 판단하는 최후의 심판 같은 새 언약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효력이 나타난다면 그 집례 하는 사람은 어떤 라이선스를 가지고서 해야 되는가의 그 문제가 있어요. 교회 사찰이 성만찬을 하면 효과가 없느냐 하는 그 문제에요. 교회 사찰이나 집사가 하면 안 되고 목사가 하면 된다면 목사의 그 자격은 어느 교단에서 제공하는 자격이어야 하는 거예요? 은퇴목사는 안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70세가 뭐 길래? 70넘은 은퇴목사가 집례 하면 주께서 구원하지 않고, 71세는 안되고 69세는 된다는 겁니다. 은퇴목사니까, 퇴물목사니까, 이제는 목사가 아니니까. 목사만이 집례 해야 한다면 그런 문제가 생겨요.
그러면 같은 목사인데 목사가 집례 할 때 목사가 만약 외국에 강의하러 갔을 때 부목사가 집례하면 되는가? 그것은 또 안 된다는 겁니다. 부목사는 부제이기에. 사제를 도와주는 부제, 천주교로 치면 부제에 불과하기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장로는 어떤가? 장로는 기름부음을 못 받았다는 거예요. 해바라기 기름인지 뭔지 하여간 기름을 못 받아서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역사가 있어요. 1077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4세와 교황인 그레고리 7세가 성직임명권을 두고 기 싸움을 벌이다가 황제가 교황에게 눈 오는 날 카노사 성 앞에서 무릎 꿇고 굴욕적으로 용서해 달라고 한 사건이에요. 당신은 지상의 권력에서는 황제인 줄 모르지만 죽어서는 지옥 간다. 왜? 천당과 지옥 가는 그 결정은 세상 권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있고 그 언약은 집례 하는 성직자의 손에서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처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것을 근거로 고해성사라는 것을 하고 있어요. 밀실에 작은 구멍 하나 열어놓고 삐딱하게 신부가 앉아서 “6개월이나 미사참석 안했지요?” “예, 그렇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별일 없습니다.” “주기도문 100번 외우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동네 의원에서 처방전을 주는 식으로 고해성사를 하는 거예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러한 권한과 권위에 대해서 누구 하나 토 달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