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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3 - 뺄셈(수정)강의잠언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3 - 뺄셈(수정)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3 - 뺄셈

15,11,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133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여기서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거기에는 고용주와 사용자 사이의 관계가 나옵니다. 이게 바로 구조의 관계라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나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라는 티를 내라는 말이죠.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엡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엡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엡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육체의 상전과 그리스도 !!

여기 5절에 보면,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라고 되어있는데, 사실은 이게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이 '육체의 상전' 이라는 것은 영적인 세계의 서열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깡그리 이 세상을 다 무시하고 기도원에서 자기 혼자서 도를 닦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상전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그 직장에 니가 취직을 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를 거기에 몰아넣었다" 라는 것이다. 왜 몰아넣었는고 하니, 거기서 육체의 상전을 만나기 위해서인데, 그러면 육체의 상전을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가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인데, 그래서 육체의 상전이 있는 직장생활을 하게 했다는 말이다.

여기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9절의 말씀은 종뿐만이 아니라 상전에게도 역시 그러한데, 그래서 9절에 보면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라고 하는데, 요즘 말로 하면,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지 말고,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따로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종은 상전을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하고, 상전은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종들을 대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 원칙이 무엇인고 하니, 매일같이 회식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9절에 보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라고, 즉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 문제는, '나' 중심 !!

이렇게 되면 구조가 겹치게 되어있는데, 먼저 하나는 외형적으로 나타난 구조가 있고, 그게 바로 종과 상전의 구조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구조는 무엇인고 하니,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구조인데, 즉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구조라는 말이다.

그렇게 구조가 겹쳐있는데, 그러면 외형적인 구조에는 누가 신경을 쓰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전이 직원들에게 잘 대해주게 되면 직원들은 월급날만 기다라고 그저 빈둥빈둥 놀 생각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전의 경우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나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스트레스를 직원들에게 풀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그런 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둘 다 구조가 있는데, 그게 외모를 취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외모를 취하는 형식에서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고 하니, 이것은 제가 강의를 하면서 목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다. 여기서 원칙이 하나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이 '나' 중심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성질이 난다고 해서 직원들을 쫓아내거나 벌칙으로 야근을 시키는 것이나, 그리고 상전이 잘해준다고 해서 열심히 하지 않고 상품에 하자를 발생시키고 월급 값을 하지 못하는 것, 그런 것이 다 '나' 중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상전과의 관계,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니 중심으로 살면 안 된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종들아 !!

그렇다면 왜 에베소서 6장 5절에서 9절의 말씀을 여기 교재에 실었는고 하니까, 5절에 '종들아' 라고 하는데, 즉 종의 문제가 관련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하면, 종은 자기 중심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몸이 아프고 합니까?" 라고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는 것은 종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데, 그것은 주인을 섭섭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종은 개인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권한이나 자격이 전혀 없는데, 즉 주인을 위해서 종이 있는 것이지, 나름대로의 종을 위해서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종, 즉 노예의 경우에는 "나는 누구입니다" 라고 할 자격도 없고, 오히려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다" 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있는데, 그게 종과 주인의 관계라는 말이다.

'출애굽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 !!

제가 이렇기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나는 종이 되기 싫습니다" 라고 나오는데, 물론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우리가 다 종이 되기 싫다는 말이다. 하지만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을 알리기 위해서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다시 정리하면 !!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성경은 자기들끼리 깊은 산 속 기도원에서 모여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현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직장생활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도 그리스도께서 관여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관여하시면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을 저에게 묻는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출애굽 사건을 이 지상에 적용시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실 일입니다" 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그렇게 적용시킬 때 나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당신의 위치는 이미 지정되어있는데, 그것은 바로 종입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종으로 살아야 하는데, 즉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무슨 사건이라는 말인가? 출애굽 사건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출애굽 사건이 B.C. 1440년경의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 언약은 계속해서 반복이 !!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 물론 출애굽 사건이 그때 일어났지만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는 말이다. 왜 반복이 되는고 하니, 언약은 반복이 되면서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의 그 모세언약은 그 당시 언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예가 또 있는데, 그게 바로 노아언약이라는 것이다. 이 노아언약이 방주가 만들어지고 홍수가 나서 그치고 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 무지개가 뜨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이 땅이 계절에 따라서 봄여름가을겨울로 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노아언약을 반복시키기 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즉 지구와 달과 태양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에 그렇다고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반복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까, "이 땅은 너희를 위한 땅이 아니다" 라는, 즉 "너희들에게 살라고 준 땅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어제 오후예배를 드리기 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질문을 하기를, "의존교회에서 땅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러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라고 말이다. 제가 수요예배 때 이미 이야기를 했는데, 그분이 듣지 못했다고 해서 다시 해드렸는데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가 가져야하는 생각은 "이 땅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한 게 아니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이 땅인데, 물론 피조물은 그 시다바리이고 말이다. 천사들이 날개 짓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듯이, 우리도 그런 보조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천사도 피조물이고 우리도 피조물인데, 피조물은 자기 목적이 이미 확정되어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찬양을 하면서 동조하는 것인데, 그리고 이 땅은 처음부터 우리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시는 땅으로 확정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반드시 거룩한 땅이어야만 하고, 거룩하지 않은 사람은 그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어떻게 하면 주의 성산에 올라갈까?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했는가?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시편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주의 성산에 올라갈까?" 라는 것인데, 그 시편의 핵심은 '시편 속의 그리스도' 라는 책에 나와있는데 말이다. 그것은 바로 "제사를 통해서 거룩이 확보된 자만이 성산에 올라간다" 라는 것이다.

(시 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리고 그 성산에 올라간 사람은 특권이 있는데, 그 사람의 기도는 응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도를 한다고 해서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답이 되는 자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제사를 드리는 자리F하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기도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 이름이 아닌 제사장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 당시의 제사장은 모세언약에 소속된 사람으로 기도의 전문가라는 말이다. 그게 오늘날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기도의 전문가이니 말이다. 그 역할을 그 당시는 제사장이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한다고 해서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심사해야 하는데, 그 심사의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는지, 바로 그것이 기준이라는 말이다.

◈ 솔로몬의 기도 !!

솔로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솔로몬아, 어떻게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통치하는 것을 위해서만 기도하는가? 그러면 니가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도 내가 다 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한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 이것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여,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라고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데, 왜냐하면 우리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주께서 합당한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굶어죽게 하신다는 말이다.

온 세상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야말로 유비쿼트스인데 말이다. 모든 곳이 예수님의 힘이 지배하는 곳인데, 그래서 에베소서 6장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해도 주님이 개입하신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으로 산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떤 사건을 펼치기 위해서인데, 출애굽 사건을 말이다. 그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의 위치는 종인데, 그러면 종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 자신의 자존심이나 명예는 거덜났다는 것인데, 즉 "우리 주인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 현실감이 떨어지는 성경말씀, 왜?

여기까지 했는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 출애굽 사건을 적용할 때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그만 현실감이 뚝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나가보면 대구의 금오강이 나오는데, 그 금오강의 어디 갈라지는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홍해가 갈라지고 하는 말씀의 현실감이 그만 떨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금오강의 갈라져서 길이 나서 사람들이 건너가고 하면, "아하, 성경말씀이 진짜구나" 라고 하겠는데, 그런데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저기 전라도 진도에서는 바다가 갈라진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말이다.

오늘 강의의 초점이 여기에 있는데, 우리가 무심코 살아가면 말씀의 현실감이 떨어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산책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말이다(ㅋㅋ). 왜 성경말씀은 마치 방향제를 뿌리는 것처럼, 그 순간에는 냄새가 나지만 돌아서면 다 날아가 버리느냐는 것이다. 자기가 과거에 익혔던 것만 가득 남아있고, 말씀의 현실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 하나님이 개입하기는 곳에는 출애굽 사건이 !!

지금부터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출애굽 사건은 말 그대로 애굽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힘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을 하셨는데, 그게 분명한 성경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 대목을 우리가 안다고 하면, "하나님이 개입하기는 곳에 출애굽 사건이 벌어진다" 라고 생각해도 된다는 말이다.

"어렵습니다. 하나님,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는 것도 말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했다는 것은 자기가 미처 어렵지 않은 지도 모르는 입장에서 하나님이 개입을 했으니, 그것은 "이놈아, 정신을 차려라" 라는 것과 똑같다는 말이다. 즉 "너는 지금 엉뚱한 길을 가고 있어. 너는 천국으로 가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지옥으로 가고 있어. 그러니 내가 개입했어. 정신 차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출애굽 당시에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왕이 압제를 하니까 "하나님이여, 도와주세요" 라고 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는 이 출애굽 사건이 반복된다고 하니, 우리가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지금 전혀 살기가 어렵지 않은데, 하는 것마다 잘 되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왜 오셨습니까?"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몸이 아프면 119를 부르지만, 그런데 그렇지도 않은데 119가 왔다고 하면, 우리는 왜 왔는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정신을 엉뚱한 곳에 팔고 있다고 여기면 된다는 말이다. 즉 우리 자신이 그만 애굽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강제조치에 나서는데,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우리를 천국에 보내기 위해서,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세상 자체를 전부 애굽화를 시켜버리는 작업, 그것이 바로 주님의 개입하심, 즉 쉴 사이도 없는 주님의 작업이라는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다고 아우성을 쳐도, 정작 그들은 애굽에서 떠날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기대한 이상의 과도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모세의 사건 속에 집어넣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을 찾아온 모세의 생각은, 힘들어하는 그 당시 히브리인들의 생각보다 더 깊고 더 많다는 것이다.

◈ 뺄셈을 하시는 하나님 !!

그래서 하나님은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는고 하니, 뺄셈을 하시는데, 즉 빼기는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 이것 때문에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면서 주신 그 정보에서 그만 빼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래 하나님에게 원했던 그 희망사항을 말이다.

그렇게 뺄셈을 하게 되면, 그들이 생각한 애굽에서의 생활과, 정작 하나님이 생각한, 즉 애굽에서 탈출시키겠다는 것과의 격차를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격차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신 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생각한 하나님의 수준은 기껏해야 우상 만들기로 골인하는 것이고, 그래서 너희들은 우상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아픔과 고통에서 회복시켜주는 신을 원했기에, 그 자체가 우상을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목사들에게 감히 말할 수 있는데,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우상입니다" 라고 말이다. 개혁주의든 칼빈주의든 뭐든 간에 말이다. 그 이유를 대라고 하면, "당신은 목사, 혹은 교회로부터 출애굽을 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목사로, 주의 종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그것은 자기 부인이라는 하나님의 정보량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데, 여전히 자기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출애굽 사건에서의 성도의 위상이 종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그 종이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의 흉내를 내면서 실제로는 주인 행세를 하는 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가짜 출애굽 사건, 가짜 구원 사건이 되고, 그러면 그것은 필히 진짜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 다시, 뺄셈을 하시는 하나님 !!

다시 이어서 이야기를 하겠는데,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감,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는데, 그렇게 오셔서 자기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감에 뺄셈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빼기를 하면 모두들 굉장히 아파하는데, 즉 "왜 내가 암에 걸려야 합니까? 사업이 부도가 나야 합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전부 다 뺄셈을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종의 입에서는 불평과 불만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목표로 하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누가 종이 되기를 좋아하겠는가? 불평과 불만이 입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의 모습이고, 또한 오늘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이 기도를 하면서 자기를 위해서 하는데, 그러면서도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데, 아니 누가 그런 기도를 하라고 했느냐는 말이다. 엉터리 기도를 해놓고 그게 응답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불평을 터트리고 말이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뺄셈을 하시는고 하니까, 그렇게 감소할수록 나머지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희망이 적을수록 일이 꼬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되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자기 욕망이 커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기에 가려져서 주님의 은혜가 점점 더 감소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개입은 무엇을 유도하는가?

그러면 출애굽 사건이 실패로 끝나는가? 그것이 오히려 성공이란 말이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왔는데, 즉 "주님의 개입은 무엇을 유도하는가?" 라는 것이다. 다음 말을 빨리 하고 마음에 지금 칠판에 쓴 글자가 그만 상형문자가 되고 말았는데(ㅋㅋ), 아무튼 그것은 바로 평소에 그들이 애굽과의 결집력이 얼마나 단단했던가를 하나님께서 더 전달시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우리가 반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오히려 기존의 것을 더욱 더 단단히 붙들려고 하는데, 또 기존의 상황이 그렇게 몰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너의 인생은 실패야" 라고, 그렇게 더욱 더 조바심을 촉발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결집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의 솜씨가 빛나는고 하니, 그렇게 결집력이 강하니 "내가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 라고 하는, 그러한 모든 시도를 그만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구원은 우리의 그 어떤 방식도 개입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면 기도를 함으로서, 그 기도 덕분에 구원이 수월하게 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을 우리가 희망하는데, 하지만 그런 희망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무산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12제자의 모습인데, 베드로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시간과 재산과 가족과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의 청춘을 모두 다 말이다. 그러면서 주님을 따라다니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막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라다닌다고 해서 세상과 결별을 했는가? 12제자들이 스스로 생각해보면, 결별도 그런 결별이 없다는 것이다. 처자식도 버렸으니, 그것은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주님이 십자가를 졌을 때 어떻게 되었는가? 베드로는 어린 여종이 지적하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는데, 그러니 이 세상과 전혀 결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나는 살고 싶다 !!

세상 권세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데, 베드로는 왜 거짓말을 했는가? 왜 속에 없는 말을 했느냐는 말이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나도 살고 싶다" 라는 것이다.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간에 일단 자기는 살아야 하겠다는 것인데, 그런 '살고 싶다' 라는 것이 우리의 밑바닥에 있는 이상, 우리는 천국에 합당한 종이 아니라는 말이다.

'살고 싶다' 라는 것이 주인인데, 그러니 주님의 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옵니다" 라는 것은 말뿐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모든 목사의 밑바닥에는 이 '살고 싶다' 라는 것이 깔려있는데, 설교를 하든 강의를 하든 말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것을 그냥 구경만 하고 지나가는데, 그러면서 "나는 저 구절을 안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여호와 증인들이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제 아무리 성경구절을 이것저것 알아도, 전혀 자기 자신의 변화는 없고, 성경말씀만 가득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회나 총회 같은 곳에 가면 정치 이야기뿐인데, 그런 곳에 출애굽은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의 애굽을 아예 만들어놓았는데, 그러니 무슨 출애굽이냐는 말이다.

출애굽은 주님이 개입하는 가운데, 즉 "나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 애굽이라는 세상을 탈출할 수 없다" 라고 하는, 그런 박혀있는 존재, 마치 보석 속에 벌레가 박혀있으면 그 벌레는 빠져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리듯이 말이다. 그 정도로 우리는 박혀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곧 애굽이고 애굽의 일부가 되는데, 그러니 애굽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몸부림을 아무리 쳐도 안 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는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라고 이미 선언을 하셨다는 것이다.

◈ 너무나 단단한 애굽과의 결집력 !!

여기서 첫 번째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개입은 무엇을 유도하는고 하니, 평소에 우리가 애굽에 의존하고 있는 그 결집력이 얼마나 단단한지,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개입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아서 구원을 받고 하는 것은 없는데, 주님이 개입하시면 우리는 애굽으로 도망치기에 바쁜데, 하던 것으로 말이다.

이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애굽의 실체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혈연관계라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가족이 최고다" 라는 것인데,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자기 남편이고 자기 자식이라는 말이다. 왜 혈연관계가 그렇게 중요한고 하니까, 그것은 자기가 그동안 투자한 모든 것의 결실물이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가족이 그러한데, 자기의 못난 자식을 못났다고 이야기는 하지만, 하지만 그 자식을 누가 만들고 누가 키웠는가? 자기가 했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모든 가치를 다 부었는데, 그것을 일거에 그만둔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차라리 보석 안의 벌레는 기어 나올지 몰라도 말이다. 자식은 자기 자신의 일부인데, 그러니 남들이 아무리 욕을 해도, 자기는 자기 자식을 진심으로 욕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매개, 중매, 중보, 촉매 !!

그러면 두 번째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매개' 라는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인데, 이게 어려우면 비슷한 단어로 '중매' 라는 것이 있는데, 혹은 '중보', 그리고 화학 용어로 '촉매' 라는 것이 있는데, 말을 하고 보니 이게 더 어려운데 말이다. 혹은 '중간자' 라고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일단 되지 않는데 개입해서 양쪽을 다 관할하는 중간의 것을 통해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기 위해 시도하는 임시적으로 만든 어떤 설정된 구조, 그것을 '매개', 혹은 '매개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다리를 좀 놔도" 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소개시켜달라고 할 때 보통 그런 말을 하는데, 자기 회사에서 만든 상품을 팔던지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다리를 놔준 사람을 '매개자' 라고 한다는 말이다. 다리는 건너갈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데, 그래서 다리를 놓아서 건너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 다리가 바로 '매개' 라는 의미라는 말이다.

이 매개의 다리가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왜 어렵다고 하는고 하니까, 그 매개의 다리를 우리가 만들기에 어렵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포착하기 위해서 인간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기 쪽에서 자기가 납득이 되고 가능한 매개를, 그것을 인간 쪽에서 설치를 한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엇인고 하니, 화성과 지구는 떨어져 있는데, 그런데 미국에서는 보이저 5호를 통해서 화성이 무엇인가를 보내었다는 것이다. 그때 매개가 무엇인고 하니, 그게 바로 우주선이라는 말이다. 이제 이해가 되지 싶은데, 그러면 그 매개는 누가 만들었는가? 화성에 가기 위해서 인간 쪽에서 만들었는데,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만들면 되는가?

◈ 매개는 우리가 만들면 안 돼 !!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그런 것을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드는데, 그래서 교회를 만든다는 것이다. 예배, 기도, 헌금, 전도, 봉사 등등, 그런 것을 만든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중보기도까지 만들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 쪽에서 만드는 이런 매개가 그만 하나님 쪽에서 보내주시는 매개와 충돌을 일으키고 만다는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바로 그런 인간이 만든 매개를 철거하는 작업까지도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사람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셨는데, 그때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중보자라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여긴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직접 그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즉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는 것이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 주여, 저에게서 저의 야망을 빼주세요 !!

그것을 주일 낮에 설교를 하면서 인간의 욕구라고 했는데, 즉 배가 고프니 먹고 싶고, 먹고 싶으니 요구를 한다는 것이다. 즉 욕구, 그 다음에 요구,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것이 뺄셈이니, 그들은 욕망의 실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즉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모른다" 라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해보면, 우리가 피조물이기에 주인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주인이 피조물을 만들 때 요구하는 것과, 그리고 피조물이 살기 힘들다보니 주인에게 요구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긍해주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신자라는 것이다. 즉 "주여, 저에게서 저의 야망을 빼주세요" 라고 하면서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우리 자신의 요구를 주님의 뺄셈으로 제쳐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욕구에서 나오는데,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이 생물체이니 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당연한 것을 빼게 해달라고 하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여기 맛있는 귤이 있는데, 먹지 않게 하소서" 라고 하는, 도대체 그런 기도가 가능하냐는 말이다. "내 자식은 망하고, 남의 자식은 잘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를 한다면, 그런 것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매개작업에서 왜 우리의 기대가 빠져야 되는지를, 그것을 우리가 수긍하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는, 그야말로 성령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 대한 주님은 멘트는 우리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간단한데, 즉 "자기를 부인하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니가 뭔데?" 라는 것이 입에서 막 튀어나오려고 하는데, 그렇지요? 우리는 평상시에는 무심코 살다가 어렵다고 여겨질 때, "주여, 집을 사주세요" 라고 주님께 매달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무당적인 본성인데, 그런데 그것을 모두 죄악이라고 인정을 하라고 하시니, 그게 우리로서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이다.

천국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닌데, 요즘 공무원시험도 경쟁률이 50대1이 넘는다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시험과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 천국인데, 물론 시험문제는 간단한데, "자기를 부인하라" 라고, 이미 다 공개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랑 그 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십자가를 그냥 부르면 안 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불러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멀쩡한 우리를 보고는 "너는 종이야" 라고 하는데, 즉 "너는 너의 주인이 아니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 주인이 아니면 평생 무슨 보람으로 산다는 말인가? 그런 보람으로 지금까지 살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몸의 주인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희망마저 잘라버리니, 그래서 우리는 "그러면 나는 천국에 가지 않을 거야"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진작에 그렇게 나오지"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자꾸 그러시면 천국에 가지 않겠어요 !!

천국에 가지 않겠다는 것이 정답인데, 사실은 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천국은 원래 가지 못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천국에는 가지를 못하고 지옥에만 가야하는데, 우리는 태생이 자기 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이 지옥에 너무나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런 성질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계속해서 줄기차게 부리고 있다는 말이다.

물이 없으니 손가락에 물이라도 찍어서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부자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평소에 우리가 하는 짓이 그렇다는 말이다. 물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목이 마르는데(ㅋㅋ), 목이 마를 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을 아까 욕구라고 했는데, 그것이 구약시대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했다는 것이다.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데, 그렇지요? 굳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인간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다 동의를 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애굽이 우리에게는 편하다는 말이다.

◈ 나는 집보다 교회가 좋아요 !!

우리교회에는 그런 분이 없는데, 제가 옛날에 전도사 시절에 있었던 교회에서는, 그게 아니고 그냥 서울에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하고, 말을 하기가 상당히 조심스러운데 말이다. 그 교회에서는 힘드는데 집에 오면 편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집보다도 교회가 더 좋다는 말이다. (녹취자 - 목사님, 이게 무슨 말이죠? 괜히 상상력을 동원하게 하네요. ㅋㅋ)

그러니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그런 우리의 본성은 흔들림이 없는데, 그러니 자기 몸을 편하게 해주는 것은 교회가 아니고 자기가 구성한 자기 세계, 그것이 바로 가장 행복한 둥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둥지를 털어 버리면 안 되는데, 그런 둥지와도 같은 자기 가정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그게 곧 혈연관계이고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도 없으면서 겉멋만 들어있는 우리를 말끔하게 청소를 해준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먼지를 털면 거울이 나온다고 하는데, 우리는 거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정말이지 마귀의 모습을 한 자기 자신이 나오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먼저 먼지를 터신다는 것이다. 쓸데없는 종교적인 장식과 같은 것은 깨끗하게 청소해놓는데, 그렇게 된 것은 이미 출애굽 사건이 개시가 되었음을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것이란 말이다.

◈ 시키는 대로 살자 !!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출애굽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그럴 때 주인이 왜 주인인지를 우리에게 각인을 시켜주신다는 것이다. 주인은 다 해주는데, 단 조건이 있는데, 그것을 바로 "시키는 대로 살아라" 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교회가 가정이라고 하면 어떤 액자를 붙이겠는가? "시키는 대로 살자" 라고 싶은데, 그게 2016년도 가훈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일단 시키는 분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하면, 그렇게 시키는 분이 없다고 하면, 교회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항상 우리에게 과제를 주시는 어떤 분이 따로 계시고, 그리고 그분이 진짜로 과제를 주신다고 하는 의식이 있을 때 그게 가능하다는 말이다.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때그때마다 삶이 해결되지 않을 때 굉장히 힘들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 적합한 구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키는 대로 살아라" 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종의 자세인데, 내일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12시에 고치려고 온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미리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님의 조치하심을 믿고 시키는 대로 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이라는 신분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주인이 없다고 하면 알아서 어떻게 해야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주인이 살아있는데도 걱정을 한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주인의 존재감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이 만든 매개, 하나님이 만든 매개 !!

이제 진도를 나가겠는데, 이 '매개' 라는 이해가 좀 되었지 싶은데, 일종의 다리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게 두 개가 있는데, 먼저 자기가 만든 다리가 있고, 즉 종교적 매개라는 것이다. 이게 일종의 징크스와도 같은 것인데, 즉 "성경을 보지 않고 일을 하면 꼬이더라" 라고 하는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만든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습관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기독교 가정이라면 가풍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즉 "우리 집에서 태어나면 모두가 다 유아세례를 받아야 하고, 며느리나 사위가 될 사람도 반드시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라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이 만든 매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둘 다 특징이 있는데, 그게 바로 둘 다 구조적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적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고 하니, 주인과 종의 관계를 뚜렷이 한다는 말이다. 즉 누가 주인이고 누가 종인지를 분명히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상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만든 사람이 주인이고 우상은 종이 된다는 말이다.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는고 하니, 직장생활을 하는데 상전이 있고 부하직원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그 상전은 구조적으로 자기가 상전인가? 주님이 상전인가? 당연히 주님이 상전인데, 이것을 두고 겹쳐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물론 외모로 보면, 자기가 사장이니 상전 노릇을 하지만, 하지만 오히려 이 주인의 자리로 인해서 자기가 종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사장은 생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종의 입장에서는 사장님도 상전이고 주님도 상전인데, 그런데 주님은 보이지 않고 사장님은 보이기 때문에, 외모로 해서 사장님의 눈만 의식해서 사장님에게 잘 보여서 자기가 괜찮은 종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장님이 멀리 외국에 출장을 가더라도, 진짜 사장님은 주님이고, 그래서 주님이 취직을 시켜주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달란트 비유인데 말이다.

◈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설교 !!

제가 오지랍이 넓어서 그런지 몰라도 부목사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꼭 하는데, 즉 "당회장의 눈치를 보지 마라. 주님이 취직을 시켰다. 당회장이 아니라 주님이 상전이다. 당회장이 수요일에 설교를 해보라고 하면, 누가 시키든지 간에 설교의 내용은 보이지 않는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설교를 하면 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종인 주제에 신경을 쓰면 안 된다. 같은 종인지는 모르겠지만, 당회장이 인상을 쓰고 교인들이 수군수군해도, 내일 죽을 지도 모르니 그 현장이 마지막 설교라고 여기고, 오직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면 부목사는 보통 "이것을 전해서 당회장이 열을 받아서 종용히 불러서 짐을 싸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가 3명이나 되는데 말이죠"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런 것은 종의 신분을 넘어선 것인데, 왜 종인 주제에 그런 걱정을 하느냐는 말이다. 종은 오로지 상전이 시키는 것을 그대로 증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서 제가 악명이 높은지 모르겠는데(ㅋㅋ),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그들에게 현실감이 뚝 떨어진다는 말이다. 이것이 일종의 이론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즉 현실성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는가?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말씀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전체가 출애굽 사건 안에 갇혀있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 그 얼마나 애굽과 결집력이 단단했는지를,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함으로서 "목사님, 맞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목사님, 그래도?" 라고 함으로서, 그 애굽과의 결집력이 더욱 더 굳건하게 된다는 것이 밝혀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더 이상 진행하기가 곤란한데, 여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ㅋㅋ).

◈ 인간이 만든 매개에 군불을 지피는 하나님 !!

다시 정리하면, 매개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인간들이 만든 매개와 주님이 만든 매개가 말이다. 그러면 언약사건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들이 만든 매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을 뜨듯하게 해놓는데, 즉 인간들이 얼마나 애굽적이고 세상적인지, 그것이 제대로 드러나도록 말이다.

그러한 능력으로 인해서, 즉 두 번째인 주님이 만든 언약적 매개가 등장하려고 하면, 주변의 상황이 먼저 그런 식으로 조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사는 현실이 무심코 살아가는 무심한 현실이 아니라, 언약적 사건들로 출렁거리면서 활동하고 있는 말씀의 세계라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저에게 전혀 안면도 없는 평신도가 와서 "목사님, 설교가 그게 복음적입니까? 똑바로 하세요. 인기가 좀 있다고 사람을 의식하면 안 됩니다. 말씀대로 전하세요" 라고 한다면, 그러면 무엇을 느끼게 되겠는가? 그것이 자기가 만든 현실이 아니라, 주님이 언약으로 만든 푹신푹신하고 출렁이는 물침대와 같은, 그렇게 언약이 지금도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전체적인 구조로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을 전하는 것인데, 그것 말고 다른 사랑은 없다는 말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고 말이다. 전체적으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 7강, 자기 알기 !!

이제 교재 135페이지를 살펴보자. 여기 제목이 '7강, 자기 알기' 라고 되어있는데, 이런 자기 알기를 평생 목적으로 살아가는 종교가 있는데, 그게 바로 불교라는 것이다. 자기에서 욕심을 빼면 해탈이 된다는 것인데, 그러면 해탈은 무엇인가? 물은 물같이 되고 산은 산같이 되는 것인데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온갖 어려운 용어들을 다 만들어 내어서, 자기 중들의 세계를 일반 불자의 세계와는 완전히 단절시켜놓고 자기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 불자들이 복을 얻기 위해서 빌면서 재물을 바치면 중들은 그것을 받아서 살아가고, 그렇게 그들은 고상한 놀이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그런 자기 알기는 반드시 실패로 끝날 수밖에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 알고자 하는 '나' 라는 것이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말이다. 즉 '나'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그 '나' 라는 것부터가 처음부터 엉터리 자기 자신이었는데, 그 엉터리 '나' 라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

여기에 대해서 설명이 좀 필요한데, 지금 난로를 피워놓으니 따뜻하게 졸음이 쏟아지지 싶은데, 그래도 창세기 3장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선악과나무가 훼손이 되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순서가 있는데, 뱀이 먼저 유혹했고 그 다음에는 여자 쪽에서 먹고 남자가 먹은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순서를 정해놓고서 둘로 나누어버리는데, 즉 여자와 뱀을 직접 만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역사세계이고 뱀은 묵시세계인데, 그런데 뒤에 후손이라는 이름을 집어넣게 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둘 다 모든 것이 묵시세계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기껏 일만 하다가 죽어버리고, 뱀의 세력을 쳐부술 수 있는 현장, 그 경계선에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몫이란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침으로 말미암아서 드디어 역사, 즉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매개, 즉 다리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인데, 하나님은 약속을 앞장세워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내가 안다" 라고 할 때, 물론 이런 묵시의 세계를 모르고 역사 세계 안에서만 아는 자기 자신이 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즉 외모로 취하는 것인데, 그것을 자기들끼리 따져서 정리해서 "나는 나다" 라는 것이 나오는 반면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묵시세계에서 '나' 라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 야곱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의 자기 백성으로 !!

그러면 역사세계의 '나'가 있고 묵시세계에서의 '나'가 있으면, '나' 라는 것이 두 명이냐고 하면, 묵시세계에서 '나' 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냥 '나'가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내가 된다"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내가 된다" 라고 하면 말에 어폐가 있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 라는 것이 따로 뽑아져 나온다는 말이다.

야곱은 태어나기 이전에 야곱은 어디에 있었는가? 예수님 안에 이미 야곱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싶어" 라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었는데, 그러니 예수님 안에는 이미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의 자기 백성으로 들어있었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이 역사세계에서는 말이 안 되겠지만, 묵시세계에서는 전후(前後)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 같은 세계, 즉 그냥 있는 세계가 곧 묵시세계이기 때문에 말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역사세계에서만 흐르는 것이지 묵시세계에서는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이나 나중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묵시도 알고 역사도 알고 !!

이런 것이 참 어려운 내용인데, 오늘강의의 제목도 정해놓고서 방금 잊어버렸는데, 요즘은 돌아가면 그만인데 말이다(ㅋㅋ).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친다고 하심으로 말미암아서, 남자는 그만 뒷전이 되고 말았는데, 즉 "남자는 나가 놀아라" 라는 것이다. 그런 경계선을 만드는데, 즉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매개를 만드는데, 그 매개를 역사에 등장시키게 함으로서, 그 매개는 묵시도 알고 역사도 안다는 것이다.

팔공산의 정상에 올라가서 보면, 한 쪽은 대구이고 다른 저쪽은 영천인데, 그렇게 경계선에 있게 되면 양쪽이 다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라갈 때는 영천이 보이지 않는데, 올라가야만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매개는 양쪽을 모두 보는데, 어제도 그런 설교를 했었지만, 시지프스 신화에 의하면 "인간은 영원한 절반이다"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절반밖에 모른다는 것인데, 경계선에 올라가 봐야 비로소 양쪽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자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하와, 즉 '생명' 이라고 하셨는데, 왜 그런가? 이상하지 않은가? 남자든 여자든 모두 흙이 되어서 다 죽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거기에 대해서 토를 달아놓았는데,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라고 말이다.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못하는 것을 내가 해낸다" 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진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것인데,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어서 죽는다는 것은, 그것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목숨을 진짜 생명을 보여주는 표징인데, 그게 영원히 유지될 목숨은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말이다.

◈ 인간은 영원한 반쪽 !!

자살이라는 것이 왜 실패인고 하니까, 생명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난리를 치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진짜 생명은 따로 있는데,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는 것이다. 지금 제가 종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아닌데 말이다. 실제로 출애굽 사건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이다.

시지프스가 바위을 매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데, 그런데 어디로 다시 떨어지는가? 자기가 알던 곳으로 떨어진다는 말이다. 정말 바보라는 것이다. 올라갈 때는 대구 쪽에서 팔공산에 갔다고 하면, 내려갈 때는 그 반대인 구미 쪽으로 가든지 해야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하는가? 다시 대구 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배가 출출하면 맛집 식당에 들러서 밥을 한 그릇 사먹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은 영원한 반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서, "나는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 한 번 다녀봤다" 라고 하면서, 그만 다시 자기 생활로 되돌아오게 되니, 그러면 저쪽 세계는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나' 라는 것을 안다고 할 수가 있느냐는 말이다. 도대체 똑같은 인간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안다는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아브람과 아브라함 !!

모든 인간은 자기를 모르는데,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은 누구를 찾아오는가? 아브라함을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먼저 아브람이 있었는데, 그 아브람은 자기가 알던 절반이라는 것이다. 마치 시지프스처럼 이 세상에서 알던 그 절반이라는 말이다. 즉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 때 도와주던 바로 그 아브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아브람에게는 전혀 생소한데, 자기 이름으로 여기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만민의 아버지라는 의미이고, 반면에 '아브람'은 지극히 높은 자의 아버지라는 의미인데,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아씨 집안으로 서로 비슷해 보이는데 말이다(ㅋㅋ). 하지만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녹취자 - '아브'가 아버지라는 뜻인데, 즉 아브라함은 '라함(백성)'의 아버지이고, 아브람은 '람(높음)'의 아버지가 되겠죠. 박영선 목사님은 두 개의 의미를 정반대로 보았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어주신 약속의 이름이고, 반면에 '아브람'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붙여준, 즉 세상에 출세를 하라고 지어준 교만한 이름이란 겁니다. 즉 야곱과 이스라엘처럼 전혀 다르다는 것이겠죠. 아마 그게 '하나님의 열심' 이란 책에 있었지 싶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기능이 작용하는 이름인데, 이 이름이라는 것은 그 이름에 걸맞게 반드시 기능이 뒤따라오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자기가 되지 못하는 그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데, 그렇게 안 되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하나님께서 오셔서 데리고 가는 식으로,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게 아브라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아브라함은 참 좋겠다. 주님이 친히 데리고 가시고, 그런데 우리는 이게 뭐야? 주님이 데리고 가지고 않고 말이야" 라고 하는데, 우리도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는데, 즉 자기 때가 진짜 때가 아니라, 예수님 때가 진짜 때라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멀리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님이 오셨음을 알고 본다는 말이다. 이미 매개가, 즉 다리가 놓였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신약시대의 소자가 구약시대에서의 그 어떤 자보다도 더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 이름으로 구원이 된다" 라는 것 외에 더 추가될 내용은 없는데, 그래서 그 이름을 자기 것으로 수용하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 일상(日常)에 감사를 !!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멘트를 자기가 만든 종교적 매개에 얹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반칙이란 말이다. 자기 쪽에서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예수의 이름이 되게, 즉 예수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게 하시는가? 추우면 난로를 피우고, 더우면 선풍기를 틀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이, 그것이 바로 주인이 종에게 주는, 즉 주인이 어떤 분인지 알리기 위해서 주신 하사품들이란 말이다.

그래서 식사를 하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하는데, 그러니 지금 여기에 있는 이것을 떡이나 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그 만나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떡과 귤을 주신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살과 피를 주셨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셨구나" 라고 이해하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귤은 눈에 보이는 선물이지만, 하지만 살과 피는 보이지 않는 선물로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사건화를 해서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135페이지를 보자.

** 뱀이 몇 마리나 꽈리를 틀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면 들통이 나요. 복음을 전하면 "에이, 영 마음이 안 들어!" 라고 하면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여기에 "에이, 영 마음이 안 들어!" 라고 되어있는데,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듯이, 복음은 영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복음을 피해서 도망을 치려고 하는데, 참 오늘 강의제목이 뺄셈이었는데, 이제서야 생각나는데 말이다(ㅋㅋ). 그렇게 뺄셈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께서 그 도망가는 자를 따라가시는데, 끈질긴 사랑의 스토킹이 시작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니가 백날 도망쳐봐라. 나의 십자가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죄라는 죄는 다 지어봐라. 그래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아"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력한 영적인 혈연관계인데, 즉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너의 아들이다" 라는 것이다. 물론 이 땅에서는 종으로 살지만, 실제로는 혈연관계로서 아들로 대우를 받는다는 말이다.

◈ 종인가? 아들인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게 되면, 그들이 하는 짓은 영락없는 종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 아들' 이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44장에 보면 "나의 종 야곱아,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라고 하시는데, 그리고 '아리엘' 이라는 사랑의 용어를 붙이시기도 하고 말이다.

(사 44: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사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이번에 대전에서 할 겨울 수련회에서 요한계시록 강의를 하면서, 이 이사야서를 많이 결부시켜서 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신구약성경에서 제일 마지막에 있다는 것은, 그 마지막 결론부분은 해답만을 모아놓았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해답이라고 하면 앞에 있는 것들은 다 문제인데, 그러면 해답을 알면서 문제도 더불어서 모두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풀리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흘러 들어온 저수지가 요한계시록이니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신앙을 인정해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우인데,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할 때, 혹은 "나는 개입니다" 라고 할 때, 혹은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가리우고" 라는 것이 나올 경우입니다.

◈ 성도의 자유 !!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현상인데, 주님이 개입했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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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727건 중 2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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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