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사무엘7강) 누구나 메시야 (사무엘상 2:10-11 )
대전-(사무엘7강) 누구나 메시야 (사무엘상 2: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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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메시야 (사무엘상 2:10-11 ) 대전-(사무엘7강)
이근호
2015년 10월27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0-11
(삼상2: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 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삼상2:11)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이렇게 한나가 찬양을 통해서 예언을 하지요. 이 본문을 읽어보면 읽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 맞지요. 모든 사람은 하늘의 심판을 받고 모든 게 깨어지는데 깨어지는 그 작업이 뭔가 여기 계신 분을 부상시키고 부각시키지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방금 말씀을 들었잖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촛점이 갑자기 어디로 모이냐 하면은 모든 건 깨어지고 깨어지는데 그 깨어짐이 어떤 분을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깨진다하는, 그 심판이 그냥 심판이 아니고 누군가를 올려 세우기 위한 심판을 하신다에 촛점이 되겠지요!
그 분을 뭐라고 되어 있냐하면 여기 말씀 그대로 보면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하고 여기서 기름 부은 자를 메시야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이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직분에 관한 것이고 이 직분을 완성 하신 분, 더는 그리스도가 없다를 확정짓기 위해서 앞에 이름이 붙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예수 그리스도 라는 말은 ‘더는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는 나사렛 예수, 목수의 아들, 나사렛 예수, 그 분 외에는 더는 없습니다. 어떤 그 누구도 메시야는 없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이방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말이 안돼요. 왜냐하면 이방인들에게는 사무엘(상)이 없기 때문에, 그들에겐 사무엘(상)이 없잖아요?
그들에겐 강감찬, 을지문덕, 연개소문, 화랑 관창같은 자기들의 역사가 있지 사무엘(상)은 그들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들의 역사는 알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역사가 아니면 뭐도 날라가요? 우리가 보고 있는 사무엘상 2장 10절, 11절도 그들에게는 없지요? 그들에겐 없는 거에요. 그렇다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입니다. 말이 안되는 거에요.
이방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는 말은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받냐? 문제가 생기겠지요? 우리에겐 역사가 따로 있어서 이런 예언을 들어 본적도 없다. 그러나 우리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이러한 예언이 있어서 그 예언이 우리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는다라고 오해를 한 것이 예수님이 있었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한 오해입니다.
이렇게 오해를 한거에요. 역사가 있으매 우리 조상들에게 한 약속이 있어 그 약속이 어디 가겠느냐? 반드시 필연적으로 약속은 성취가 될 것이고 그 성취된 결과가 우리라고 해서 지옥 간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면 제 말은 뭐냐하면 양쪽 다 쳐버린 거에요. 역사가 있어도 소용없고 역사가 없으면 망해도 말한 이유 없이 그냥 망하고, 인간 전체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생각에 천국은 텅텅 비었느냐? 아무도 없느냐? 그렇게 되겠지요? 그게 바로 뭐냐하면 없는데 새롭게 솟구쳐 올라오는 식으로 ‘없음’을 먼저 택지 조성하는 거에요. 아무도 없다, 없는 게 당연해! 그래! 암! 없어야 돼! 이것은 역사관을 가져도 실패, 없으면 없는 대로 실패, 너도 실패, 나도 실패, 다 실패되는데 어? 생겼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친히 만드시는, 창조하시는 자들이 있을 거고 그것은 인간의 개인 구원에, 구원 받는 본인이 손톱만큼도 관여 한 적이 없어야 돼요. 인물들이 끼여들면 안돼요. 내 구원에 내가 힘을 썼다든지 노력했다든지 참았다든지, 성실했다든지, 경건했다든지, 거룩했다든지, 기도했다든지, 헌금했다든지 어떤 요소도 우리 구원에 끼여들면 안됩니다. 때찌~합니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구원받고 싶어 하는 것이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우리도, 이방인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이스라엘은 얼마나 구원에 갈급하고 목말라 했습니까? 나라꼴이 말이 아니거든요! 네 마리의 짐승이 와서 완전히 박살내버렸어요. 바벨론,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등 예수님 당시에 마지막 짐승인 로마가 짓밟아 놨습니다.
사람이 밟히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고집이 만만치 안습니다. 밟혔다고 해서 그래! 졌다라고 나올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졌다고 하면서도 다음 기회를 엿보게 되어 있어요. 을이 갑에게 “그래! 당신은 갑이고 나는 을이요 나는 졌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자성어로 ‘두고 보자!’ 이고 이것을 풀이해 보면 “네가 날 버리고 얼마나 잘되나 보자!”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채운 게 아니고 괴물이 채웠기 때문에 자기 속을 보고 자기가 깜짝 놀라요. 내가 이 정도로 성질 더러운 인간이었는가! 깜짝 깜짝 놀랍니다. 애들 때릴 때 두 대만 때리고 말려고 했는데 두 대 맞아도 반성 안할 때, 그럴 땐 정신없이 패 버리죠? 나중에 보면 신음 소리도 안 나면 내가 이 정도로 성질이 이랬나?
남들은 천심이라고 하는 데 남들에겐 사람 좋다고 소문났는데, 어떻게 성질나니까 이러내! 그러면 우리 속에 불 있다. 우리 속에 지옥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 가지고 또 자책들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잘못은 아니고 원래 동일한 마그마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101호, 102호 집이 있다면 인간이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따로 독립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 속에 있는 마그마는 동일한 아담의 성질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수도관이나 가스관을 통해서 이 쪽을 틀게 되면 이 쪽으로 올라오고 동일한 속성이 같이 오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 세계라 하는 것은 어지간하면 친구가 됩니다. 왜요? 성질이 다 똑같기 때문에,멀리 있으면 원수가 되는데 커피숍에 앉아서 한 두시간 이야기 해보면 다 친구 됩니다. 전화 번호 주고받고, 그러니까 다리 하나 건너면 원수지만 막상 그 사람 재끼고 같이 만나게 되면 서로 원수라고 하던 사람들이 합세해서 “네가 원수다!” 라고 하게 되지요!
항상 인간은 공통 요소가 잠재되어 있어요. 친해 질 수 있습니다. 한 패로 될 수 있어요. 예수님 빼고 다 한 패이다라고 보면 되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빼고 다 한 패입니다. 열 두 제자가 그렇게 했지만 전부다 하나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 빼놓고 똑같아요. 가롯 유다까지 합쳐서 예수님 빼놓고 다 똑같아요.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을 아시고 “너희들이 나에 대해서 연구하고 탐색하고 분석해서 이용 가치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나에게 올 수 있는 게 아니다!”란 말이죠. 지금 예수님 옆에 있고 식사 같이하고 잠자리 같이하고 삼년 동안 늘 같이 붙어 있잖아요?
인간 세계 같으면 이미 친구 중에 친굽니다. 벌써 다 터놓고 아는 사이인데 가까이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몰라요. 제자들도 그랬는데 50년 교회 나갔다고 해서 예수님을 알아요? 몰라요. 50년 아니라 100년 나가 보세요. 예수님을 아는지! 예수님은 본인 능력으로 알아서 구원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진짜 신앙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식으로는 이런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었다.” 이렇게 추 체험적으로, 추 체험적이라는 것은 앞에 (추)가 붙는 것은 반추한다, 되새겨 본다, 지난 체험을 다시 되새겨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그 예수는 아니였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예수는 뭐냐하면 교회에서 유행했던 예수거든요.
똑같은 인간들끼리 똑같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그 예수가 예수인줄 알았는데, 그래서 고개 끄덕이며 동의했었는데 그게 아니였다는 겁니다. 전혀 예상 못한 그 예수가 예수라면 우리는 충분히 내 능력으로 내가 먼저 선점해서 믿을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예수란 무슨 말이냐하면 이게 믿지 못할 예수에요.
믿지 못할 예수인데 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할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이고 내가 믿고자하는 예수는 믿지 못할 예수를 혹시 믿을까 싶어서 사탄이 선수친거에요. 마귀가 “이것 믿고 그걸로 끝내라! 천당갈테니 안심해라!” 는 식으로 선수치고 들어 온 겁니다.
선보는 자리에 중매쟁이가 중간에서 끼어서 선 볼 남자가 아닌데 다른 남자를 집어넣고 실컷 이야기하고 나니까 진짜 선 볼 남자가 나중에 오는 그런 막장 드라마의 이야기처럼, 그런 것이 있을 거에요. 하도 비비 꼬아놔서..
성도의 성령 특징은 뭐냐 두 가지 예수가 있음을 안다는 거에요. 이 세상에 두 가지 예수가 있는데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산타클로스 같은 예수, 우리가 원하는 기대와 우리가 원하는 장점을 다 같고 있는 예수와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예수, 그런 예수를 오늘 본문엔 뭐라고 되어 있어요?
20절에 보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것을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산산이 깨어지는 것, 산산이 부셔지는 것.메시야가 뭐냐? 메시야를 뭐로 설명하면 됩니까?를 물으신다면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될수 있는 분, 이게 메시야에요.
메시야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나서 죽고 마지막에 천국가고 태어나기 이전, 창세 이전부터 하신 모든 것이 홀로 하셨지요? 라고 할 수 있는 분이 메시야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 누가 다치고 물에 빠지고 하는 그 모든 것도 “에이~ 주께서 알아서 하신 것 맞지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거에요. 하나로 설명이 안되게 되면 이것은 죽어도 억울합니다. 왜? 해답을 안 갖고 있기 때문에, 해답이 없어서 질질 70, 80 끌어봐야 치매 걸려서 끌어봐야 해답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이가 문제가 아니고 십대 이십대가 문제가 아니고 교회를 몇 년 다니고 몇 번 다닌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해답이 있어야 되요.
요한복은 14장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잖아요.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이것도 중요하지만 이 ‘나’가 몇 분인가가 중요해요. ‘나’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이 말은 나만 뭐다? 나만 길이고 나만 진리이고 나만 생명이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면 예수님 빼놓고 우리는 뭐에요? 길 아니고 진리 아니고 생명 아니죠? 생명도 아닌 것이 생명 얻고자 하는 이것이 죄고 진리도 아닌 것이 진리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죄고 길도 아닌 것이 길의 행세 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선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간단합니다. 성경은 간단해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종교란 뭐냐하면 문화에요. 문화라 하는 것은 취향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가 절에 갈까? 아니면 교회에 갈까?” 이건 본인 취향의 문제에요. 그러면 본인 취향의 문제라고 한다면 결국 취향을 선택하는 것은 누가 선택한다? 본인이 선택하겠지요?
그럼 본인이 뭐에요? 내가 예수를 믿을까? 말까? 하는 그 순간 본인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겁니다. 가짜 입니다. 이건 가짜에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비가 온다? “그래! 요새 가물어서 비가 와야 되!” 왜 비가 와야 되지요? 이 나라에 내가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모는 것이 하나로 설명이 되는 거에요.
되어진 모든 일이 나 중심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겁니다. 그렇게라도 생각을 해야 이 험한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그래도 약간의 안정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에요. 이런 사상과 정신을 가지고 교회에 간다? 교회에 가 봤자 어떤 성경 귀절을 들치고 찬양 부르고 설교 들어 봤자 이미 모든 것은 나 하나로 설명이 된 상태에선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전부다 내가 만약에 거울이라면 거울에다가 교회 다니면 오늘은 교회에 갔다고 일기장에 정보 하나를 추가하는 것뿐이에요.
전에 이런 예를 들었는데 팔레트가 있으면 (그 안에 색깔대로 물감을 짜 놓아서) 빨강, 파, 랑, 노랑, 흰색 이렇게 있는데 특히 노랑과 흰색은 면적이 넓어요. 많이 쓰기 때문에, 만약에 스무 살 때 교회 다녔으면 팔레트 안에 스무 살 때 교회 다녔던 체험을 물감 짜 넣듯 하는 거에요. 그러면 (팔레트) 바닥은 뭡니까? 이건 바로 ‘나’가 되는 겁니다.
이미 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이미 설명이 된 상태에요. 자기가 메시야란 말이에요. 메시야란 뭐라고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 옛날 구닥다리 한 50년대나 60년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그런 집안의 어른들, 시아버지나 친정아버지나 어른들이 자식들을 명절에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하게 되면 그 연설의 내용이 뭡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려고 하는 거에요. (국제 시장 영화같이)
“내가 너희들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일사후퇴 때 나 홀로 내려와서 흥남 부두 건너와서 너희들 키운다고 그때 흥남 부두에서 아버지가 나한테 부탁하기를 엄마하고 동생들 부탁한다는 소리를 듣고 와서 부산의 국제 시장에 가서 얼마나 고생, 고생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은 “아버지여! 내 참 힘들었거든요~” 영화 전부가 그걸 보고 감동 안 할 수가 없지요. 왜요? 동의 하니까! 같은 마그마가 101호나 102호나 같은 수도관이나 가스관을 틀면 나오는 거에요.
“그래! 고생 많이 했구나! 그래 이 영감아! 당신만 고생 했나? 나도 고생 어지간히 했다. 아이고! 당신 팔자나 내 팔자나 둘 다 참! 팔자가 그렇다~” 그런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이 고생 했다는 소리 듣고 “내 팔자나 니 팔자나 예수님 팔자나 마찬가지다” 는 겁니다. 이건 팔래트에다가 예수님 하나 짜놓은 것밖에 안되요.
내가 믿는 예수는 100% 가짜 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여 됩니까? 아까 팔레트(나) 있었잖아요. 오늘 본문 사무엘상 2장 10절에 보니까 이것이 깨어져야 되요. 아주 작살나고 와장창 깨어져야 됩니다. 깨어지려면 어떻게 되야 되는가? 지금부터 쉽게 이야기 해드리겠습니다. 뭐가 깨어져야 되냐하면 추억(기억)이 깨어지는 거에요.
인간이 깨어졌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회 칼로 살을 잘랐다 이렇게 깨어지는 게 아니고 보통 깨어졌다, 내 인생 깨어졌다라는 말은 아까 하나로 설명 한 것이 깨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면 깨어지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지요? ‘나’가 깨어지게 되면 여기서 나라는 것은 기억과 추억이 누적되어 진 것이거든요.
그것이 와장창 깨어지게 되면 전부 유리 파편처럼 흩어지겠지요? 그러면 그 다음에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때는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사는 거에요. 테이프를 사서 깨어진 파편들을 모아서 전부 테이프로 붙여요. 이렇게 붙여진 것을 인생이라고 합니다. 내 인생은 뭐냐? 깨어진 과거의 추억들을 주서 모아서, 하나로 설명해야 되니까 현재에 있는 나가 나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테이프로 하나하나 다 붙여요.
붙일 때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대합니다. “그래! 어릴 때라 뭘 알았겠어?” 그리고 자기가 잘한 것은 붙이더라도 번쩍번쩍 빛나게 해놓고 “그래! 내가 이렇게 잘났구나!”하며 붙입니다. 그러니까 나 중심으로 하나되기는 백번을 깨져도 돌아서면 똑같아요. 또 다시 갖다 붙입니다. “예전에 비바람 불고 찬서리 내릴 때 .십리를 걸어서 부흥회에 참석했었어! 그때 은혜 받았어.” 그런 깨진 파편을 갖다 붙여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버리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 역사를 자랑하는 거나 개개인이 자기 과거의 역사를 아쉬워하고 추억하고 기억하고 회상하는 거나 다 똑같은 거에요. 다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밑에 수도관이라든지 가스관을 통해 올라오는 것이 다 똑같아요.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믿는다 안 믿는다를 다 치워버립시다. 다 똑같으니까!
가을이 되면 자주 나오는 옛날 노래 중에 최양숙이 부른 (가을 편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왜 그러냐 하면 부르냐 하면 추억은 항상 지금보다 시간이 어릴 때에요.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단단히 하나로 설명이 되고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 되고 싶어요.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게 되고 싶어요.
심지어 어릴 때는 ‘별 하나 나하나 별 둘 나둘’하잖아요. 별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 저 별은 니 별일까? 오빠 별, 내 별” 자기 마음대로 소유권 주장하고 있어요. 저 별은 내 별이고 저 별은 오빠 별이라는 거에요. 그 뿐만 아니고 떨어지는 낙엽 떨러져 굴러 가는 것도 모든 것이 자기의 입장을 위로해 주고 설명해 주고 다독거려 주고 힘내라고 격려해 주는 자연 세계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 근거를 대라! 근거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 버릇이 어디 가겠어요? 그 버릇이 50된다고 해서, 60된다고 해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또 그 때를 추억 하는 거에요. 또 예를 들면 동네에 극장이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에 남진이 온다는 포스터가 있으면 정작 남진이 온다하면 어른들은 가는데 어린 아이들은 못 가잖아요?
못 가면 소원이 생겨요. 나도 빨리 어른되서 가야겠다는 남진 쇼에 돈 내고 들어가 보고 싶다는, 특히 술집이나 나이트클럽 홍보하는 것 보면 홍진영 온다고 붙은 것 보면 어른들은 뭐 돈벌러 오나보다 하지만 못 들어가는 애들은 빨리 들어가 볼까 해서 엄마꺼 바르고 입고 호기심에 가고 싶은 거에요. 또 그걸 보면 옛날 자기 생각나고 그러니까 이 (팔레트가) 세상 내 중심으로 간다는 것이 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하면 내가 바로 메시야이다. 그래야 10절이 설명되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이 한나의 본문이 현실화 된 것이 이방 나라에요. 첫째가 이방 나라이고 두 번째가 예언을 받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린 죄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도 못 들었을 거에요. 이스라엘의 죄는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메시야를 기다린 죄, 그게 죄에요. 왜 그게 죄가 될까요? 여기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라는 개념 속에 본인을 빼버렸어요. 왜녀? 자기의 팔레트에 여호와께서 주신 약속을 자기가 깨지는 용도로 사용되어진 것이 나이고 저가가 담을 수 있는 용도로 새로운 정보로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 받지?” 라는 내게 필요한 종교적인 항목에 그 말씀을, 정보를 집어넣은 거에요. 마치 선교 단체 아이들처럼 성경 말씀을 다 외운거에요.
그런데 성경 말씀을 다 외우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마치 수능시험 치듯이 성경을 다 외워요. 외워서 전도 할 때 말발 서라고 상대방이 이런 소리 하면 성경 남발하면서 여호와 증인처럼 막힘없이 나오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자기의 팔레트에 물감 짜넣듯 다 쌓이는 거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 가? 그것 중심으로 내가 사니까! 세상 모든 것이 나 하나로 설명이 가능할 때 자기가 심리적인 안정을 얻으니까요.
오늘 강의에 핵심은 이겁니다. 성도는 심리적인 안정을 얻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불안정 해도 괜찮아요. 이게 믿음이거든요. 예수를 믿으면 안정감을 갖고, 이렇게 되버리면 예수도 수단이 되버리고 안정감 갖는 내가 목적이 되버리잖아요? ‘나’라는 목적을 끝까지 포기 못하고 있잖아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깨뜨리는데, 다시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첫째는 이방인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본인들이다.
처음에 강의 할 때 그랬잖아요. 이방인이나 이스라엘 모두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아무도 없는 거에요. 로마서 3장 4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그러면 거짓된 자가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거짓입니까? 아닙니까? 그것도 거짓되지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사도되기 전에는 몰랐어요. 사도 되기전에 사울은 이것을 누구에게 이야기 한줄 아는가 하면 자기 나라 빼놓고 이방인들에게 한 이야기로 본 거에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왜 참되는가 하면 역사이기 때문에 어떤 역사? 구약에 언약에 따른 역사이기 때문에 자기는 참되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지금 이스라엘이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이스라엘을 우리가 부러워 해야되요? 부러워하지 말아야 되요? “아이고! 저 거짓 된 것 주제 파악도 못하고~” 그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성경 해석의 목표가 현재의 이스라엘 나라를 목표로 하면 되요? 안되요? 안되지요?
그건 성경 해석 잘못 한 거지요! 모든 해석을,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종말의 관한 것이 그렇게 해석되면 안된다는 말이죠! 무화과나무가 언제 피고 여름되고 뭐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되요. 뭐 마곡이 어떻고, 지금의 흑해 근처 나라가 참~ 그런 설명을 들으면 지형도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경의 지형도, 지판도, 이걸 잘못 잡은 거에요. 성경에 나오는 땅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거에요.
언약 안에서 설명이 되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언약 안에 누가 들어 있냐하면 언약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약 안에는 예수님만 들어 있어요. 예수님 옆에 우리가 같이 들어 있는 게 아니고 우리는 쫓겨 나가야 되요. 쫒겨 나오고 성령이 올 때 쫓겨난 자리에서 부름을 받아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안 쫓겨나고 옆에 붙어 있다가 어드벤테이지 얻어 가지고 마일리지 쌓여서 구원 받으면 안되요.
가까이 한다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쿠폰 더 모은다고 중국집에선 탕수육 작은 것 하나 더 줄지는 모르겠지만 천국엔 쿠폰 없습니다. 백날 중국집 다녀봐야 백날 교회 다녀봐야 쿠폰 없어요. 요한복음 13장에서 베드로가 제자 입장에서 예수님 가실 때 나서서 이야기 했잖아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할 때 너는 못 온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주님 죽으신다는 데 제 목숨 걸고 가겠습니다. “니 목숨 걸고?” 목숨 걸어도 못 가는 거에요. 왜? 나만 생명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지금껏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 인지 알았어요. 주님의 팔레트에 있는 물감인데 주님이 그림 그릴 때 필요한 팔레트위의 물감에 불가한데, 베드로를 찍어서 그리려 하는데 베드로는 자기의 팔레트를 갖고 거기에 예수님에게 들은 말씀을 짜 넣으면 그것으로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것은 우리가 봤던 사무엘상 2장10절을 오해 한 겁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에서 여호와의 대적하는 자를 우리가 깨뜨리면 안되고 주님께서 말씀대로 여호와의 대적하는 자를 깨뜨린 그런 사례나 그런 경우를 자기들을 포함 시켜서 추체험 되야 해요. 자기를 포함시켜야 되요. 그래야 내가 말씀을 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있는 그 곳에 언약에 들어간 사람인 것이 티가 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결국은 무슨 다툼이냐 하면 주인공 싸움이에요. 내 인생에서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주가 되느냐?의 주인공 싸움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버리면, 내가 메시야가 되지요. 메시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하는 분, 이것을 메시야라고 합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누구 위주로 설명 합니까? 자기 위주로 설명하지요? 하여튼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잖아요.
자기가 메시야가 되는 거에요. 메시야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은 그것은 노골적으로 말하면 나의 메시야인 것을 밝혀서 저를 심판해 주시옵소서 그런 말이 아니면 엉터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 하시고 언약의 내용을 까보면 그 안에 사무엘상 2장10절,11절이 들어 있습니다. 언약 안에는 누가 들어 있는가? 세상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 하시는 분이 담겨 있어요.
그 분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아니고 누굽니까? 예수님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 아닌 분이에요. 왜 예수님이 아니냐고 설명하게 되냐 하면 내가 믿는 예수가 되면 안되거든요! 내가 믿는 예수는 내가 동의한 예수이기 때문에, 내가 결재한 것이 담긴 예수이기 때문에 역시 나를 설명하는 일환 중 하나의 과정에 포함된 예수이기 때문에 잘못된 예수일 수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믿는 예수.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내가 믿는 예수와 내가 믿기 싫은 예수 둘 다 체험되어 질 때 성도란 말이죠. 그러면 내가 믿는 예수는 뭡니까? 내가 내 중심으로 생각해 주는 것을 긍정해 주는 예수가 내가 좋아하는 예수지요? 그러면 내가 싫어하는 예수는 뭡니까? 아무리 내가 스카치테이프를 들고 깨어진 추억의 유리파편을 오늘도 우리는 연결시켜서 역시 세상은 내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반복해서 깨뜨려 버리는 것, 사정 보지 않고 깨뜨리는 예수.
이미 예수님이 중심인데 “왜? 니 중심이 따로 있어야 될 이유가 없지 않느냐”라고 질책 하시면서 지적 하시면서 그것을 깨버리죠. “제발! 시키는데로만 해라! 딴 짓 하지 말고, 왜 자꾸 결과에 대해서 니가 궁금증을 갖느냐!” 하시죠. “주님 저 천당 가겠습니까? 지옥 가겠습니까?”라고 하면 “그것은 네가 걱정 할 사항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천국을 못가요.” 왜? 내가 생각하는 너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생각하는 너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데, 천국 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적질을 해 주시잖아요. 주님이 천국 가면 우리는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거에요. 그러면 남은 것은 뭐냐하면 나를 어떻게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그 작업을 내가 어떻게 체험 하느냐 그것만 남아 있는 거에요. 매일 같이 내 중심을 누구 중심으로?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뭘 해야 됩니까?
매일 아침 일어나며 내 인생 다짐 해야지요. 오후 되면 깨지고 저녁되면 또 깨지고 아침되면 또 시작하는 거에요. “오늘은 뭘 해야되나? 우리 딸 집에 가서 뭘 해 줄까?” 온갖 생각하는 것이 깨질 생각은 안하고 깨진 것 주서 모아서 예쁘게 포장 할 생각만 하고 살아갑니다. 저녁이면 보람찬~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고 집에 가서 무슨 큰 일이라도 한 것처럼 어깨 주무르라고 하지요!
자! 이제 좀 더 어려운 것 해 봅시다. 하나로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이것은 지평을 이룹니다. 하나의 지평을 이루게 되면 추억과 기억의 파편들이 다 있는데 우리는 아침이 되면 또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깨어진 것을 연결해서, “깨어 졌든 말든 내가 지고 갈 내 인생이다. 수레에 담겨져 있는 고물이라고 욕하지 마라! 그래도 내 인생이다.” 이래서 아침이면 수레에 자기 추억의 과거를 이끌고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싣고 가지요.
치매 걸린 할머니들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들 자기 집안에 다 집어넣듯이 치매에 걸리면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믿을 것은 과거 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가 알던 물건 다 집어넣는 거에요. 완전히 집을 쓰레기장 만들어 버려요. 그것을 버리면 왜 아깝습니까? 자기의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에, 자기의 파편이 깨지잖아요.
그것이 내 눈 앞에 있어야지 그것이 없으면 내가 하나로 아우르는데 허전한 느낌이 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빠짐없이 담아요. 맨날 자식들에게 욕 얻어먹지요. “ 엄마~ 이것 쫌 갖다 버려라! 이 옷 좀 갖다 버려, 사줄 께!” 그러면 “야! 야! 그걸 어떻게 버리냐? 이건 니 아버지가.”
사연이 많아요. 이야기가 많아요. 사연 없는 것이 없어요. 사연이 그렇게 많아요.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어떻게 오시는가를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메시야잖아요? 하나님은 언약을 보내잖아요. 언약 안에 누가 들어 있다? 메시야는 창세 전 부터 끝까지 하나로 설명한다.
그런데 어떤 목사들이 설교하는데 예수님을 증거 하지 않고 이 교회는, 내력은 하면서 교회 중심으로 하나로 설명하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뒤에 늦게 왔기 때문에 하나의 지형판. 즉, 이 교회는 주의 제단이라고 설명해야 될 돕기 위해 여러분들은 왔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세우시고 여러분들은 교회를 도와서 구원받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라고 하나의 지형판으로 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자칭 메시야적인 기능을 발휘하게 되지요.
이것을 철학적 용어로 추상적 보편성이라고 해요. 상당히 상상적이죠! 추상적 보편성을 개인에게 이야기 할 때는 뭐가 들어가냐하면 공식 즉, 폭력이 개입됩니다. 갑 질, 추상적 보편성, 하나의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되는 하나의 “네가 말 안 들으면~” 여기에 뭐가 주어집니까? 폭력이 주어지지요. 모든 가정의 폭력, 직장 폭력, 교회 내 폭력, 정신적 폭력, 물질적 폭력, 모든 갑 질과 모든 폭력은 추상적 보편성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가난한 여자가 우연히 회사에 취직 했는데 출근 하자마자 어떤 남자와 부딪혀서 넘어져 식판 떨어뜨리고 남자가 한 눈에 그 여자에게 반했을 때 나중에 드라마 어느 정도 진행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입니다. 그 때 재벌 사모님이 하는 말이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을 데려와서~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이게 가당키나 하나?” 조용히 불러서 봉투 주면서 “이거면 돼? 네가 임신 했다고? 이거 가지고 유학을 가던지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그럼 여자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이 돈 바라고 한 것 아니에요. 나는 그 남자 사랑해요.” 이러지요.
그런데 이런 폭력을 우리가 드라마에서 실제 보면서도 도대체 이것을 설명하지 못 했잖아요? 설명 궁금해요? 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뭐냐하면 메시야에요. 세상 모든 것은 하나로 설명하기 위해 준비된 세상, 지금 뭘 설명하려고 하냐하면 아무리 성경에서 뭐라고 하고 복음이 뭐라고 하던 우리는 돌아서면 마찬가지에요. 아까 싸가지 없는 사모님 못지않게 돈이 없어 못하지 돈만 생기면 그럴 거에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것들이라고 분명히 할 사람들입니다. 100% 입니다.
추상적 보편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오시면서 이 추상적 보편성과 맞닥뜨리면서 여기서 하나의 지형판이 생겨요. 위에 지형판(예수님)에서 아래 지형판(추상적 보편성)을 뚫어 버려요. 뚫어 버리면 (추상적 보편성)에 구멍이 생기죠? 바늘로 꿰뚫고 실로 똘똘 묶어서 그대로 위로 가져갑니다. 죄의 덩어리를 그대로 가져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늘로 구원 받고 가면서 여전히 뭘 하는가? 아침에 눈 뜨면서 싸가지 없는 사모님 놀이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데 위에서 당기는 힘은 사망이나 권세나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 어떤 것으로도 이 끈을 끊을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나는 하나로 설명 한 상태인데 그 나 외에 하나가 내가 관여 할 수 없는 내가 할 수 없는 다른 능력의 힘이 외부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내가 가위 들고 끊을 수가 없는 거에요. 아무리 내가 반항하고 저항해도 끊을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사자성어로 이것을 데롱데롱 이라 해요.
데롱데롱이면서 기껏 두 싸가지 없는 사모님 끼리 서로 싸우는 거에요. 매일 같이 교회에서 김 집사, 박 집사 둘 다 싸가지 없는 사모님이라 “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뭐 어떠니 저떠니, 나 없을 때 그런 소리 했지?” 그래도 주님은 그런 짓 하는 채로 데롱데롱 매달아 잡아 당기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입니다. 이렇게 매인 사람, 남은 자 에요.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탈락 조치가 있었고 탈락 조치는 뭐냐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는 예언된 말씀이 적재적소에 투입이 되고 나머지가 매달린 결과입니다. 그것이 한나가 낳은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바로 남은 자에요. 남은 자는 반드시 심판이 이었었다는 것을, 심판 체험을 품고 있는 겁니다. 깨진 체험. 한나의 가정 사실은 깨진 거에요. 아들 낳고도 내 아들이라고 하지 못하고 갖다 바쳐야 되는 아들.
이것은 이 지평이 깨어져야 깨어진 그 구멍 속에서 이 일에 내가 했던 내 일로 설명하는 지평에 없던 낯선 것이 구멍을 통해서 올라오잖아요? 전에 위에서 설명 했잖아요? 그런데 역사에선 위가 없으니까 지워버리면 낯선 것이 어떤 균열이 생기면서 뭔가 불쑥 부각된다 이렇게 보면 되요. 그것이 아까 몇 절이었습니까?
10절 마지막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높인다. 부각시킨다. 부상시킨다.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 속 지평 속에서 묵시를 끄집어내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당한 복음인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질대로 싸가지 없는 사모님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냥 살아요. 사는데 늘 수시로 낯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말고 예수님 하나로 모든 것이 설명이 되는 요소가 나를 통째로 데롱데롱 끄집어 올리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사건이 일어나요. 사건이라는 이유가 하나의 구멍이 점이기 때문에, 왜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냐하면 사건에는 면적이 없습니다. 점은 면적이 없지요?
점은 면적이 없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두 번 다시 일으킬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모든 일은 사건이에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다 다음에 또 만드셨습니까? 아니지요? 그 다음에 물들고 와서 주님! 포도주 되게 해 주세요 그래도 안 되지요?
사건은 찢어지기 위한 용도이기 때문에 찢어진 내가 찢어진 구멍을 소유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지평에 구멍이 나면, 이런 예까지 안들어야 되는데 복음을 위해서 주께서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임신해서 배부르잖아요? 아기를 낳으면 아래 뱃살은 어떻게 됩니까? 터지잖아요. 전에 있던 면적에 있던 피부가 늘어난 피부가 다시 줄어들어야 되는데 이게 줄어들어도 이미 터진 근육은 원래대로 안되고 줄무늬가 생기잖아요.
그것처럼 이미 터져버린 상처에 대해서 그것을 메꿀만한 내 추억이 없어요. 찢어진 체험은 찢어졌을 뿐이지 그것을 메꿀 체험은 따로 어디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린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그때 은혜 줄라고 했는가 또 핑계대면서 이었을 뿐이죠. 또 (무늬)하나 만들어 졌을 뿐이지, 그 다음에 또 무슨 다른 사건 가지고 그 균열이 생기면서 아예 통째로 대롱대롱 내가 주의 것이지, 내가 주를 위해서 이것 하면 구원받고 저것 나쁜 짓 하면 지옥가고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언약은 그런 내용이 아니에요. 그냥 구멍을 통해서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황공스럽게도 나라는 죄 많은 지평을 뚫고 강도와 세리와 창기 같은 것을 뚫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그 점이 중요하지! 괞찮은데 뚫렸다? 이런 예수님을 증거 하니까 나머지 나는 괞찮은 모양이야라고 자기 스스로 위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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