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34강, 135강) 눈물의 차이, 우상과 미신 151119
유튜브(134강, 135강) 눈물의 차이, 우상과 미신 151119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134강
135강
이미아(IP:122.♡.169.34)
15-11-22 09:20
134강-YouTube강의(눈물의 차이)151119-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134강, 제목은 ‘눈물의 차이’입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서 눈물을 흘리죠. 눈물을 흘릴 때를 슬프다고 그렇게 언급들을 합니다. 그런데 슬플 때, 무엇이 그렇게 슬퍼서, 무엇이 그렇게 한이 맺혀서 눈물을 흘리는지, 그것을 따져보게 되면 그게 상당히 이기주의죠.
뭐, 진리를 위해서 운다든지, 주님을 위해서 운다든지, 그런 것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그 여인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좋게 생각했던 그 여인들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울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니 딸들을 위해 울어라”는 이 말씀은 “너희들이 나를 제대로 알고 우느냐?”를 따지시는 겁니다.
일종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애도하고 있는 거예요. ‘참 측은하다.’ ‘안 됐다.’ ‘참 아까운 분이다.’ 이런 조로 예수님에 대해서 동정어린 눈물을 보내고 애석해하는데, 그러한 마음 바탕에는 예수님을 실패자로 간주하게 만든, 본인의 든든한 세상에 대한 현실관이 따로 자리 잡고 있겠죠.
주님은 그것이 바로 불쾌한 겁니다. 주님께서 그 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거에요. “너희들에게 자식이 있다. 너희들의 자식이 죽거나 안됐을 때에 나를 위해서 보내는 동정의 시선보다는 너희들 자식이 죽을 때는 실신할 정도로 울 것이다. 정신이 혼절할 정도로 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너희들이 나에게 오는 그 중간에 자식에 대한 애석함보다 더 넘어서지 아니하면 진정 내가 십자가 지고 가는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한 값싼 동정가지고 나름대로 주님에 대해서 사랑을 표시했다는 큰소리를 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남을 위해서 울 수 있지만, 인간의 울음 가운데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울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울음입니다.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울음, 그 울음의 문제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을 이해할 수 없죠.
여기에 인간이 우는 울음에 대해서, 오히려 주님을 위해 울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우는 니 울음은 가짜고 엉터리라는 것을 지적받을 수 있는 그러한 기회가 있어야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두 종류의 차이 나는 눈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사로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찾아왔던 그 대목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에 보면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주님한테 섭섭한 감정을 드러내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 오빠를 지켜줘야 할 임무가 있는데 그걸 소홀히 하고 그것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마음이 굉장히 상해서 예수님한테 감정이 있다는 겁니다.
33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34절,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죠. 그전에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친척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두 종류의 눈물이 나옵니다. 그 눈물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물은 뭐냐 하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실패에 대한 울분 같은 것이 섞여 있습니다. 운다는 것은 일종의 다짐이죠. 누구를 향하여? 현실을 이끄신다는 그 미지의 전지전능한 신에 대한 반발이고 반항입니다. 화가 나서 따지는 겁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줍니까?” 라고 따지다보니까 그 따짐을 말로 표현하니까 눈물 섞어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눈물을 고스란히 다, 눈물 속에 섞여 있는 그러한 격분과 인간의 도발적인 주먹질을 홀로 다 받으시고 주님은 울고 계십니다. 인간은 때리고 주님은 얻어맞으면서 운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행패부리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눈물로써, 인간이 자기를 향하여 치는 아픔을 눈물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물에는 인간의 죄가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걸 반대로 인간의 눈물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나님은 나한테 조치를 잘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실수와 하나님의 잘못됨을 인간들이 심판자의 입장에 서서 지적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상당히 건방지죠.
그럼 평소에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인간들은 뭔가 협상과 타협을 통해서 울지 않는 여생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남은 평생 안 울었으면 좋겠다. 나에게서 눈물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 요한계시록 21장 보면 천국을 묘사할 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눈물 없는 곳” 눈물 없는 곳,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 없는 곳이 천국이라는 그런 소리를 듣고 선뜻 손을 들죠. “제가 그 나라에 들어가겠나이다.”
누구 마음대로 들어가죠? 주님한테 행패부리고, 주님한테 반항하면서 어디 욕심을 부립니까? 내가 평소에 흘리는 눈물이 이기주의고 자기 욕망을 은근히 노리면서, 욕망이 꽉 차 한계가 넘쳐서 상대방에게 떼를 쓰듯이 흘리는 눈물을 가지고, 그 인간성 가지고 도대체 우리가 어디를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자신이 눈물 흘리는 것을 통해서 내가 천국 갈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자각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눈물만 흘리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나의 나라라고 우기는 그 탐욕이 오늘도 주님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은 내가 울지 않으면 남이 울어야 될 그러한 힘과 힘이 겨루는 그 세상 속에, 그 권력 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내가 울지 않기 위해서 남을 울릴 수밖에 없는, 그런 밀고 땡기는, 중립이 없어요. 밀고 땡겨야 돼요. 남에게서 눈물을 흘리게 해야 내가 웃게 되는 그런 세상에서 기어이 나만 살아야겠다는 욕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바로 근원적으로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아무리 회개하고 통회해도 인간은 바꿔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변함이 없다는 것. 인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으로서 남이 못되는 것, 남을 짓밟음으로써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다는 그러한 속성을, 인간은 잠시도 숨 쉬듯이 멈추지 않고 허덕이면서, 헐떡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웃을 때는 그만큼 일시적으로나마 나는 나만 사는데 성공했다는 자랑을 늘어놓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찾아오신 이유가 그러한 우리 미래가, 내가 잘되는 미래가 없음을 선언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주님의 눈물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의 막다른 지점을 보여주는 겁니다. “너희들이 우느냐, 나도 아버지 앞에서 울고 있다. 따라서 너희들이 가고자 하는 천국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막혀있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실패한 거죠. 새삼스럽게 실패했다고 울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웃을 때도 실패했고 울 때도 실패했고. 운다고 성공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주님의 눈물 속에서 자신의 죄가 미리 가해짐을 발견한 사람은 주님의 부활의 성공 안에서 그 사람도 천국에 도착될 것입니다. 죄인의 입장에서, 죄인으로 발각된 처지에서 구원에 성공할 것입니다.
이미아(IP:122.♡.169.34)
15-11-22 09:21
135강-YouTube강의(우상과 미신)151119-이 근호 목사
제 135강, 제목은 ‘우상과 미신’입니다. 우상이 뭐냐, 딱 한마디로 말해서 미신입니다. 그럼 미신이 뭐냐, 현실을 잘못보고 있는 것이 미신입니다. 사람은 믿지 말래도 눈에 보이는 것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외부를 의지하면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어떤 분에게 남편이 죽었다고 한다면 남편 죽어도 자기가 평소에 키우는 개가 있으면 그렇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개 믿고 살면 되니까요. 그런데 개마저 트럭에 치어 죽는다면 그 여자는 자기 세계가 와해됩니다.
사람은 남을 믿는다고 합니다. 사람이 남을 믿는다는 그것이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은 외로우면 못살기 때문에 그렇죠.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남에게 의지한다고 그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그 남이라는 것이 아무나 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말에 잘 따라줄 때만 그것이 자기가 의지하고 싶은 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이유가 개나 고양이는 자기한테 명령을 하지 않아요. 명령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개나 고양이가 자기의 잘못을 후벼 파지를 않습니다. 자기를 지적질 하지 않아요. 오직 자기 말에만 그저 순응하고 순종합니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것은 자신의 분신이고 자기 확대입니다.
여자들이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남편하고 재미나게 살기 위해서 결혼하죠.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남편하고 사는 것도 이제는 권태로워요. 그래서 뭘 원하느냐 자기 말 잘 듣는 자식을 낳고 싶어요. 그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에게 조건이 있어요. 엄마 말을 고분고분히 잘 듣는 자식일 때 엄마는 자식 낳은 보람을 느낍니다.
결국 미신이라는 것은 제 2의 자아상을 자기 앞에 두고서 자체적으로 외로움과 쓸쓸함을 해소하는 그런 방식이 미신입니다. 그래서 미신은 환상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철두철미하게 믿습니다. 그래서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굉장히 기분 나빠해요. 그들은 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믿는 예수라고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내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자기는 우상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그렇게 우깁니다. 교회 다녀서 삼위일체 배워서 하나님 믿으니까 자기는 우상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자기들은 덜 외롭고, 덜 쓸쓸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가 아까 우상을 정의하면서, 미신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했죠. 미신은 나에게 명령하지 않는다. 나의 잘못을 후벼 파지를 않는다고 제가 분명히 결론 내렸습니다. 이사야 44장에 보면 거기 이사야 선지자가 우상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어떤 말을 할 때는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가지고 그걸 미래까지 끌고 가는 방식으로 예언을 합니다. 계시를 하죠.
무슨 말이냐 하면 지금 그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들은 신이라고 믿고 있는데, 이사야가 나서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을 대변하는 거죠.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하기를 “니가 믿는 신은 우상이다. 참 신이 아니다.” 그렇게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그래 옛날에 우상을 섬겼구나. 하지만 이사야가 있던 시절, 그때 그 당시에 있던 이야기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산입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선지자가 예언을 할 때에는 마치 스키장에 슬로프를 타고 올라가 산 위에 보드나 스키를 하나 걸쳤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산 위에 하나의 보드나 스키를 걸쳐놓으면 그 스키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아래쪽으로, 산 밑으로 브레이크 없이 그냥 신속하게 돌진하듯이, 저 산 밑으로 꼴아 박듯이 쭉 계속 미끄러지겠죠.
그 미끄러진 마지막 도착지점이 어디냐 하면 그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한 것이 구약으로, 한시적으로 그때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신약으로 미끄러져 와요. 미끄러져 오게 되면 이사야 44장의 우상의 개념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는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절에 보면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멸망하는 자라고 이야기했지만 그 누구도 본인을 멸망하는 자의 범주에다가 자진해서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바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사야 44장을 다시 보게 되면 내가 믿은 예수, 내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 내가 믿는 여호와가 이게 우상이라고 아무도 그걸 인정하려고 나선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오늘날도 유효합니다. 누구나 내가 믿는 여호와는 진짜 여호와고, 내가 믿는 예수는 진짜 예수고, 내가 다니는 교회는 진짜 교회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진짜 나를 구원할 하나님이라고 모두다 스스로 그렇게 자부하고 싶어요.
왜? 그렇게 믿는 자기 자신은 문제가 없기 때문에. 문제없는 하나님은 역시 문제없는 내가 선택한 이유 때문에 문제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단정합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의 기준은 이미 자기로부터 시작한 거죠. 그러면 미신이다, 우상이다, 할 때 그 결정적인 기준이 뭐냐, 어떻게 하면 나의 문제 있음을 들추어내는 기준을 내가 믿는 하나님에다 삽입을 시키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믿은 하나님에 의해서 도리어 내가 죄인으로 폭로당하는 그런 관계를 우리가 설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이라고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오히려 너는 죄인이라고 지적하시더라도 계속해서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이 맞군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면서 그 하나님에게 소속될 용의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하면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준수하고 믿기 이전에 그 말씀을 우리를 지적질 하기 위해서 주어진 말씀이라고 믿읍시다. 그렇게 받아드립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너는 나를 믿는다고 할지라도 너는 우상을 섬기는 자라고 지적이 오더라도 우리가 흔쾌히 아멘하고, “제 잘못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우상숭배밖에 없습니다.” 라고 자백할 수 있는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지금의 나를 이 불멸의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한 욕심의 산물입니다. 자꾸 주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 자기 허점을 스스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맞습니까? 지적당하면서, 우리의 우상이 드러나면서 주께서는 그 우상의 죄를 십자가로 용서해주십니다.
우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우긴다면, 다시 말해서 우리를 지적할 것이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이것은 미신입니다. 내가 잘되고 싶은 나에 의해서 역시 호응해주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내가 외로워서 선택한 고양이나 강아지같이 내가 조작한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신이요, 우상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믿는 교회, 그것이 사탄의 전당입니다.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