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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11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자유게시판[신학]

201511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11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페이지 세 번째 단락에 [현재들의 익숙한 연속에 탈구를 일으키고 현재와 현재 사이의 균열지점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분출시키는 것이 바로 순수 차원으로부터 현재 속으로 현실화하는 근원적 시간의 운동이다.] 문장은 이렇게 돼있지만 그림으로 그리면 간단하지요. 아까 밀가루 풀 이야기로 다 끝나는 겁니다.

밀가루 풀 끓이면 딱딱한 부분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그게 갈라지잖아요. 그 갈라진 틈에서 새로운 분출하는 끓는 밀가루가 위로 또 올라오겠지요. 그게 쌓이게 되면 현재가 되고, 올라오는 것은 과거가 되고.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남는 것은 순수 과거의 운동만 남지요. 그걸 과거의 바다라고 해요. 이게 운동한다. 왜? 자연 자체가 운동하니까.

[“과거를 현재로 연장시켜주는 기억의연속적인 삶”이 창조적 생성의 시간인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시간이란 흔적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에게 시간이 있는데 시간은 무의식세계로 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죠. 시간을 통해서 의식세계에서 무의식세계로 내려갈 수 있다.

[현재는 삶에 몰두하는 행위가 멈추었을 때 비로소 불출하는 창조적 사유의순간이고 또한 비결정적이고 비목적적인 방향으로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행위가 전개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물 컵을 본다. 물을 마신다. 물마시고 놀러가야지, 하는 순간 갑자기 옛날 어릴 때 이 물 컵으로 먹던 친구가 생각나서 놀러가는 대신 전화를 건다든지. 그러면 미래가 바뀌어요. 현재 순간 솟아오르는 다른 과거 때문에 현재가 바뀐다고요.

2페이지 네 번째 단락에 [우리가 시간 안에 있다는 것은 “시간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자체가 그러니까 너와 내가 동일하지 않는 이유가 이제 드러났지요. 왜 달라야 됩니까? 순수 과거가 운동하기 때문에 오늘날 너와 나를 다양하게 만드는 겁니다. 다양하게 만들어도 동일한 게 있어요. 똑같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적 시간을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식세계는 다양하더라도 우리는 동일한 자연에서 동일한 무의식세계에서 함께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베르그송 당신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무의식세계가 어떻게 있는지 증명해봐라. 이렇게 반발할 수 있잖아요.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하는 게 눈에 보이는 것밖에 없는데 무의식세계라고 하니까 그 무의식세계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또 이야기하니까 그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거기에 대한 증명 방법을 뭐라고 했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동일한 시간의식을 갖고 있다.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는 그것을 통해서 무의식세계가 분명히 있다고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 다음에 3페이지 봅시다. [따라서 주관성이란 단지 바깥과 대립되는 안으로서의 내면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왜 이야기했느냐 하면, 베르그송 당시 유럽은 기독교 국가 아닙니까. 교회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여러분의 내면을 닦아야 됩니다. 외형적인 돈 보다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라고 이야기할 것 아니냔 말이죠.

그러면 베르그송이 그 교회에서 설교 들었다고 칩시다. 백날 닦고, 백날 성결하고, 백날 성화시키고, 백날 주관해도, 그 주관은 누구 주관이에요? 나의 주관되잖아요. 나의 주관되는 이상은 어디까지 정결해야 돼, 순수해야 됩니까? 지금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세계에서는 순수라는 게 없어요. 순수 시간, 순수 체험은 전부 무의식세계에서 과거의 파편으로 해체돼있단 말이죠. 과거의 바다로.

그런데 교회에서 순수한 네가 되라면 의식세계에서 순수함을 고수한 게 되지요. 그러면 만약에 모기한테 물렸다. 깨끗한 피부가 모기에 물리면 순수한 피부입니까? 순수한 피부 아니잖아요. 현미경으로 피부 들여다보세요. 털이 기둥으로 보이잖아요. 순수합니까? 털에 바이러스 붙어있는데, 먼지, 병균 붙어있는데 순수합니까? 불교에서 생물 아낀다고 빗자루로 쓸지요. 빗자루에 미생물 묻어있는데 그건 죽이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 모든 문제가 어디서 생겼느냐? 베르그송은 이렇게 보는 거예요. 교회에서 그런 설교하는 자체가 아무 문제가 안 되는 이유가, 순수 주관이 따로 있는데 의식적 레벨에서 주관을 자꾸 고집하게 되면, 어느 통계에 보면, 종교 갖고 있는 사람이 더 이기주의라는 통계가 나왔답니다. 자기밖에 모른데요. 자기 주관이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적 주관을 더욱 더 강화하기 위해서 열심히 교회 다녀서 자기 잘난 맛에 교회 다니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그게 무슨 윤리냐? 그게 무슨 보편적 윤리가 될 수 있느냐, 개인적 윤리에 불과하지. 따지는 겁니다.

[주관성이란 잠재적인 것, 그것도 현실화하는 잠재적인 것이고, 무엇보다도 현실화하면서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잠재적인 것을 의미한다.] 중요한 것! 자기와 달라지는 새로운 자기가 나오게 만드는 주관. 그게 의식세계에 있는 게 아니고 무의식세계에 잠재돼있는 거예요. 현실화된 게 아니고. 잠재돼있는 게 날마다 새로운 주관을 날마다 만들어낼 때 그게 의식적 주관이라는 겁니다. 베르그송이.

이걸 자기 변용이라 해요. 모양새가 달라지는 것. 자기 변용이 되는데 베르그송은 더 나갑니다. 변용된 자기가 색다른 자기죠. 인간은 자신을 타인으로 보는 거예요. 나를 타인으로 볼 수밖에 없어요. 내가 순간마다 둘 되는 거예요. 셋 되는 건 아니에요. 둘되고 없어지니까.

이걸 숫자로 하게 되면 +, - 해서 0이 되는 게 아니고 ++0=0이 되어서 +가 되는 거예요. +1+0에서 결국 남는 게 +1로 남는 거예요. +1이 뭐겠어요? 잠재돼있는 주관이겠지요. 잠재돼있는 주관이 0이 되는 게 아니고 잠재돼있는 바깥에 표면에 있는 것을 0으로 보잔 말이죠. 1이니까 있음이잖아요. 있음의 표면은 그 자체로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피부가 있잖아요. 피부가 납니까? 아니잖아요. 나의 피부잖아요. 피부만 할 때는 숫자로는 1로 해야 돼요, 0으로 해야 돼요? 1로 밀어붙인 0이잖아요. 왜 이렇게 어렵게 설명하느냐 하면, 우리는 자꾸 처음부터 의식적인 나로부터 출발하니까 설명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나 여기 있으니까 1로 치잖아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1이고 여기 나타난 것을 0로 보잔 말이죠. 그럼 나는 뭡니까? 없는데 있는 주관에 의해서 매일같이 새롭게 생겨나잖아요. 이걸 베르그송은 생성이라고 해요. 존재와 생성. 존재는 밑에 있고 생성 또는 생성된 존재라 해도 괜찮고. 그런데 그것이 늘 변용됩니다. 마치 제가 아까 과거의 바다라고 표현했듯이 바다 표면은 맨 바다지만 바람 부는데 따라서 늘 물결의 모양이 다르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인간과 바다의 차이점이 뭐냐?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나, 이걸 타자라 하는데 나한테 내가 타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그리던 타인이 되고 싶어서 우리는 분투노력하게 되고 공부하게 되는 거예요. 수능 이틀 남았지요. 수능 준비하면서 공부하는 자기만 생각하지 않아요. 수능 치고 난 뒤에 좋은 점수 받아서 좋아하는 나를 항상 상상하고 있겠지요. 그것은 현재로서는 타인이에요. 하지만 타인은 이상적인 존재로서 타인이라니까요.

왜 자기를 타인이라고 하는지 이 점에 굉장히 중요한데 왜 자기를 보고 타인이라 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남을 볼 때 그냥 보지 않아요. 박 목사님 남이다. 이렇게 보지 않아요. 내가 알던 박 목사님이에요. 남을 볼 때.

사람이 전혀 모르는 걸 보게 되면 전혀 모르는 걸 본 게 아니고 안 본 게 돼요. 이건 마술도 아니고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올라오면서 분명히 내 눈으로 가로수 낙엽 떨어진 것을 봤을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중에 누가 저한테 목사님, 낙엽 색깔이 어떻습니까? 나는 거기에 신경 안 썼기 때문에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나무 없었는데? 봐도 내 한계 바깥에 있기 때문에 나한테 없는 게 돼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예수님께서 진흙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씻으라하니까 눈 떴지요. 두 단계입니다. 누가 고쳐줬느냐 하니까 모른다는 거예요. 눈 뜬 건 아는데 누가 고쳐줬는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합니다. 눈 뜨게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나라고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다고 나오지요. 그때 비로소 예수님을 알게 된 거예요.

그렇다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언제 알았습니까? 오순절 성령 받을 때 알아요. 그러면 그때 안 것은 뭐냐? 본인의 타인으로서의 예수에요. 아니 자신의 이상형으로서의 예수이에요. 예수여, 하늘나라 갔을 때 누가 더 높겠습니까? 예수를 이용한 거예요. 예수를 이용하면서 내가 되고 싶은 미래의 나를, 그것은 과거에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의식적 욕망이 미래의 나를 만든 겁니다.

무의식의 주관이 표면에 올라오면 의식적 주관이 돼요. 여기서 욕구가 생겨요. 욕구의 문제는 다음 시간에 메를로퐁티의 몸의 문제 할 때. 몸에 욕구가 생깁니다. 욕구에서 미래가 나와요. 현재에서 미래가 나온다고 했지요. 현재에서 미래가 나오는데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예수님이 나름대로 갖고 있던 뜻이 밀어붙이니까 졸지에 자신들은 그동안 예수님을 몰랐던 거예요.

몰랐다는 것을 예수님을 몰랐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베드로는 본인 입으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소녀가, 당신도 한 패지 하니까, 나는 저 사람을 알지 못한다. 또 이야기하니까 강한 부정이 나오지요.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그러면 그 순간 베드로가 생각하고 있는 미래상에는 누가 주인공입니까? 본인이 되고 싶은 본인이 생각한 자기가 자기의 타자가 되어서 그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밀쳐야 되겠지요.

사도행전 2장 37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라고 돼있지요. 컵을 볼 때 하와이 이민 간 친구 생각나지요. 베드로가 설교할 때 자기가 죽였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순간 생각났지요. 이걸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받았다. 그럼 성령은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겁니다. 어찌할꼬, 제가 죄인입니다. 한 번 하고 말까요?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광야에서 한 번 거역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거역할 수 있는 존재란 말입니다. 거역할 때마다 볼펜으로 점을 찍게 되면 우리 인생은 새카만 점으로 된 구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살았던 모든 흔적들은 십자가 앞에 죄가 되는 거예요. 이 지평이 새카만 죄가 된다면 그 맞은편에 누가 있겠어요? 영원토록 의로우신 십자가 주님만 의인 되겠지요. 주님이 의인되는 방법은 뭐냐? 우리로 하여금 새카맣게 한평생 죄가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원망하도록 유발된 겁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표면적인 것, 일부만 의식적 주관만 알아서 천국에 올려 보내려고 얼마나 쓸데없는 노력을 했습니까. 지금도 교회마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의식세계에 있는 주관적 자아를 다듬어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가면만 자꾸 늘어나는 거예요. 위선 덩어리, 억지가 돌아다니고.

교회에서 목사한테 나가라 하니까 내가 이 교회 와서 그동안 몇 명이나 불렸는데 왜 나가라 하느냐. 나가라는 건 현재지요. 그 순간 목사는 현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기가 그 교회에서 했던 나쁜 짓은 다 날아가고 교회에 교인 모았다는 좋은 것만 따오는 게 아니에요. 현재에서 조작한다니까, 과거를. 그게 이 글에 보면 나와요.

3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 줄. [우리 존재의 현재는 자기-차이화한 과거 그 자신이다.] 현재는 과거의 얼굴이란 말이에요. 과거의 가면이다. [우리 자신이 그 안에 잠겨 있는 시간의 내면성, 시간의 주관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주관성이다.] 잠재적 주관성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시간 안에 존재하며, 그리고 시간이 주관성이라는 주장은 결국 그 시간과 분리불가능한 우리 자신이 시간의 형식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흔적을 남긴다. 아니 우리 자신이 시간의 기록 장부이다.] 우리 자신이 시간이라는 자연의 흔적이죠. 기록 장부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없지요. 이쯤 되면 우리 자신은 일시적인 자아가 되죠. 흩어졌다 모이고, 모였다 흩어지는 일시적인 자아가 되면서 진짜 자아는 자연이 우리 자신을 대변해주잖아요.

[자기 분열하는 시간의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적 자아 역시 자기 분열적 자아가 된다.] 그 다음에 어려운데 어렵더라도 통과해야 됩니다. [우리의 현실적 존재는 매 순간 현실적인 차원과 잠재적인 차원으로 분열되며 지속한다.] 이제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까 그림으로 위, 아래 하는 것.

[현실적 차원의 의식은 이질적인 두 요소를 능동적으로 종합하고 수축하고] 종합하고 수축해야 그게 현재인 내가 되니까. 현재란 자체가 수축이 되고.

[삶에 주의하는 반면] 집중하는 것. 아까 올라오면서 오늘 강의를 이렇게 할까, 하고 집중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나무에 집중하지 못했잖아요. 매사가 그래요. 정신 딴 팔려있으면 불러도 언제 불렀냐고 합니다. 교회에서 주님 생각해야 되는데 우린 복 받을 생각하고 구원받을 생각하면 주님의 뜻을 놓쳐버려요. 매사가 그래요.

[잠재적 차원의 무의식에서는 끊임없이 이질적인 두 차원으로, 즉 보존되는 과거와 지나가는 현재로 양분되며] 똥 싸듯이 우리는 과거를 배설하고 있는 거예요. 응축하다보니까 필요 없다고 여기는 과거는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없어져도 자연은 없어지지 않거든요. 모아있어요. 우리의 배설물들이. 우리를 경유해서 우리한테 쓸데없어 버릴 것들이 한껏 있어요. 우리 자신은 현재화되지 않는 거죠.

[따라서 우리 자신은 언제나 완전한 자기 자신으로 현실화될 수 없으며] 나는 이걸로 끝이야. 나는 해답, 진리 알았어. 더 이상 알 필요 없어, 라고 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무슨 과거가 또 튀어나올지. 다음 차례의 현재되기 위해서 새로운 과거가 융합되고 집중되는데요. 쉽게 하면 이런 거예요. 지금 공부를 하면서 공부 정말 재밌네,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형님, 도미니카와 한국과 야구하는데 같이 봅시다. 공부하는 게 더 재밌는데. 저녁 사줄 테니까 같이 봅시다. 보니까 왜 그렇게 재밌는지.

야구 보기 전에는 야구 보는 재미를 몰랐잖아요. 자기는 공부하는 재미를 보고 있었는데 이런 재미를 미처 몰랐지요. 나는 야구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건 없을 것이라고 또 장담을 해요. 왜? 현재로서는 정답이기 때문에. 그게 다일까요? 연애할 때 저 여자만 같이 한 방에서 늘 자면서 같이 살 수 있다면 더는 하나님께 기도할 게 없습니다.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해놓고 결혼하고 난 뒤에 육 개월도 안 돼서 각 방 쓰지요.

[나는 온전한 나가 아니며 항상 내가 아닌 나와 공존한다.] 많은 나가 있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아닌 나만 있어요. 세 명, 네 명 되는 나는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미 나 하나가 확정됐기 때문에 반대 나거든요. 내가 아닌 나와 공존하지 네 명, 다섯 명 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따라서 자아는 결코 자기 동일적일 수 없다. 내 속에 항상 내가 너무나 많다. 나는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자기-차이화하는 잠재적 다양체가 된다.] 따라서 나는 자연이 내 내용물의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 속에 과거의 바다가 되었어요. 나는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어항이에요. 일시적 어항이에요. 어항 유리 깨지면 바다로 돌아갑니다. 어항 유리가 내 몸이에요. 몸 깨지면 다시 옛날로 원상복귀 되죠. 이게 바로 불교입니다. 기의 집합과 해체. 동양철학이에요. 이게 김용옥의 기철학입니다.

[칸트의 경우, 주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겪는 수동적 자아와 능동적인 종합을 갖고 있다.] 이때 칸트가 말한 시간이란 내가 만들어내는 세상 보기 형식을 시간이라 하거든요. 칸트는 근원적으로 시간과 공간은 정해져있어요. 절대적 시간과 절대적 공간으로서 내가 세상을 보는 방편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인데 베르그송은 나보다 시간이 먼저 있어요.

그러니까 칸트의 윤리는 옳은 윤리가 아니라는 거죠. 칸트의 윤리는 의식적 주관에 갇혀있는 내가 잘남을 증명하는 거고, 베르그송의 윤리는 잘날 필요조차 없다는 윤리고요. 어느 것이 더 성화스러워요, 어느 것이 더 해탈스럽습니까? 베르그송이죠. 내가 나한테 메여있는 있는 이상은 온전한 윤리가 될 수 없지요. 나한테 손해되면 남한테 해코지해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관대하다. 이러다 성질나면 관대 안 하다. 내가 내 관대함을 내가 자꾸 유지하려면 그것은 한계에 부딪쳐서 성령의 일곱 열매가 다 깨져버려요. 차라리 자연스럽게 내 바깥에 잠재적인 것에 맡기고, 사해에서 팔만 펴면 뜬다는 거예요. 사해에 내 몸을 맡기자. 과거의 바다에 내 몸을 맡기면 나는 뜨잖아요. 뜨는 가운데 미사일 왔다 갔다 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여기 보면, [반면 베르그송의 경우, 협소한 경험을 사는 현실적 차원의 내가 오히려 잠재적 차원의 자아에 의해 확정된 경험을 획득하게 된다. 자기 동일적이고자 능동적 종합을 수행하는 현실적 나는 잠재적인 자아에 의해 항상 타자화하고 끊임없이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주체가 된다.] 주체는 임시적이라는 말이에요. 밑에서 올라오는 잠재적 때문에 나는 그때만 주체가 된다.

[의식의 능동적 종합은 무의식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자기-차이화 한다.] 뭔 뜻인지 이제 아시겠지요.

[지각-행동-감정의 통합체]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그동안 베르그송 본인이 나타나기 이전에 모든 철학은 항상 의식된 우리 자신에 대한 괜찮음과 우수함과 훌륭함과 그리고 신에게 복종하는 자신의 피조물다움, 복 받음, 여기서 기독교적인 자아가 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걸 따지고 보면 그저 충동이요, 감정이요, 행동이고, 감각적인 통합체에 불과한 거예요. 이 말은 아무리 내가 훌륭하고 싶어도 지각 달라지고 행동이 시간 따라 달라지고 시간 따라 새로운 충동이 온다면 이 통합체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나의 잘남도 다 날아가 버린다는 말입니다. 뭔 뜻인지 이해하시겠지요.

이 통합체의 문제가, [생물학적 필요와 욕구에 의해 제한된 의식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바르게 착하게 살아도 내 몸이 생물학적으로 아무리 점잖은 체해도 배고픈데 돈 만 원 있다. 저것 주우면 빵 살 수 있다. 배부르면 안 주울 수도 있지만, 만 원짜리면 다 주울 수 있겠다. 천 원도 많다.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 오백 원짜리 있다. 마트 가면 오백 원짜리 빵 팔거든요. 끼니는 때워요. 오백 원이 빵으로 보이는데 그냥 두고 가요? 자기 것 아닌데?

드라마에 그런 것 나와요. 태백 재벌 딸인데 선 봐라. 못 사는 여자와 사귀지 말고 너는 후계자니까 아버지 사업에 도움 되고 미국에서 유학했고 영어 외에 중국어도 할 줄 알고 특히 마음씨가 착해. 여자가 마음씨 착하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인물은 볼 것 없다는 뜻이거든요. 온갖 좋은 것으로 이야기해서 강제로 선을 봤어요. 보니까 진짜 맞아요. 공부 잘하고 다 잘해요. 그런데 애프터 없어요. 왜 없어요? 통합적인 자기 의식적 주관으로 봐서 내 아내로 받아들일 마음이 안 들어요. 왜 안 드는지 이유 있어요, 없어요? 문제는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어떤 여자를 봤는데 다 괜찮아. 인물도 잘 생겼어요. 그런데 왜 아내로 안 삼고 싶어요? 본인이 이유를 알아요, 몰라요? 본인이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왜 모릅니까? 본인이라 할 때 의식에서 나온 본인이잖아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내려가야 돼요. 무의식으로 내려가니까 옛날에 내가 과거에 안 좋았던 기억들이 모여서 지금 나의 감정이란 통합체를 이뤘기 때문에 그 여자를 보는 순간 안 좋았던 기억이 반복되거든요.

“아니, 내가 안 좋아하는 타입인데.” 본인이 안 좋아하는 타입이라는 게 현재 당장 만든 게 아니고 과거의 다발이라니까. 과거에 안 좋았던 모양이라. 본인도 몰라요. 지나간 세월 어떻게 다 분석합니까. 어쨌든 현재 감정으로선 이상하게 영 마음에 안 드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기껏 공부 많이 하셨네요. 사실은 제가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습니다. 이러면 깨지지요. 그래서 집에 오면 엄마가, 이놈아, 그게 어떤 자린데. 아버지는, 너는 내 자식 아니다. 회사 그만 둬. 못 사는 여자와 살아. 드라마가 그렇게 진행되겠지요.

[나를 부추기는 것에 몰두하는 이 의식은 직전에 지각한 감각(과거)과 막 실행할 행동(미래)으로 수축된 현재를 산다.] 순간에 불과하죠.

[이상으로 살펴본 대로 베르그송에서 시간은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과 본질적인 관계를 지닌다.] 무의식과 대비해야 비로소 의식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말이에요.

[시간은 의식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의식은 결코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의 시간이 추상적인 현재를 중심으로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연대기적 시간이라면, 무의식적 시간은 잠재적인 과거를 현실화하는 창조적 생성의 시간이다. 무의식적 시간 안에서 현재는 더 이상 단순하고 불가분한 순간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에 의해 물들어 있는 혼합물이고 이중분열체이며 생성이고 지나감이다. 무의식적 시간 안에서 과거는 더 이상 무가 아니며, 또한 현재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존재하며, 현실화하면서 자기-차이화 하는 시간의 잠재성 그 자체이다.] 빨리 읽어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늘 만들어낸다, 그렇게 간단하게 늘 현재를 만들어낸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라캉의 무의식과 베르그송의 무의식과의 차이점. 같은 점부터 먼저 봅시다. 둘 다 무의식을 상정한다는 거예요. 둘 다 기억이라는 흔적은 의식세계에서 하나의 상징적 기호로 표현된다는 것, 이것도 공통점. 상징적이라는 것은 미흡하다는 뜻이에요. 불만적인 요소가 있다. 한계가 있다, 그리고 라캉적으로 말하면, 안에 실패가 담겨있다. 이미 실패하도록 돼있다는 의미죠. 상징이란 일치하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실패로 끝남 또는 진리에 대한 놓침, 이게 상징입니다. 자세한 것은 대전에서 요한계시록 할 때 할 거예요.

요한계시록이 상징이란 말이죠. 뭔 뜻입니까? 해석하는데 실패하라고 준 책이다. 네가 아무리 알아도 진리란 해석한다고 나오지 않는다. 그럼 진리는 어디 있는가? 상징 안에 있는가? 상징 안에는 없어요. 상징 바깥에 있어요. 진리가 상징되게 했기 때문에. 뭔 뜻이냐 하면,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 나오죠. 일곱 교회는 실패하기 때문에 등장한 교회에요. 왜냐하면 실패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성공한 교회를 따로 생각한다면, 그 자체가 진리 바깥에 있는 존재에요. 진리 바깥에 있다는 걸 증명한 겁니다. 진리 바깥에 있기 때문에 진리 같은 교회를 또 찾고 있는 거예요. 실패하면 될 일을 실패 안 하려하기 때문에 그것이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게 십자가 의미에서 나타난 요한계시록에요. 십자가로 나타내는 요한계시록의 특징입니다.

차이점은, [베르그송의 비판에 의하면, 이러한 회고적 가상은 현실적인 연대순을 전도할 것을 명령하는 것밖에 안 된다. 존재해야 하고 존재한다고 추정되는 원인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대체하는 셈이다.] 감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라캉에 의하면 회고적으로 진리를 안다고 하는데 회고적이 되면 이건 연대기적이 되잖아요. 라캉은 무의식이 밑에 있는 게 아니고 같이 있는 거예요. 근데 베르그송은 밑에 있는 거예요. 베르그송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원인을 라캉은 위에 있는 무의식이 대체한 게 됐다. 무의식은 대체하면 안 되는데 그걸 대체한 게 문제란 말입니다. 설명하는 내가 더 어려워.

어쨌든 의식하고 내가 있잖아. 베르그송 입장에선. 그런데 왜 라캉은 나라는 것은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서 지금 나를 생각한다고 해버리면 내가 어디서 왔는지 원인은 여전히 안 밝혀지지 않느냐는 게 베르그송의 생각이란 말이죠. 물론 라캉이 베르그송의 후대 사람이지만. 베르그송 입장에선 더 폭넓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에요. 라캉은 주체에 대해서 문제 삼는데 베르그송은 그런 주체가 어디서 나오는지 더 깊이 있는 철학이라고 베르그송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있는 것은 가짜야. 이건 라캉이지만 어쨌든 간에 이게 어디서 나왔는지는 베르그송이 이야기한다 말이죠. 자연에서 나왔잖아요. 베르그송은 자연철학자지만 라캉은 자연철학자 아니에요. 인간의 정신을 왜 병들었느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하죠. 있는 것을 정신병인 이유를 밝히는 범위보다도 아예 자연 전체를 이야기하는 범위가 더 넓으니까 더 깊은 철학이라고 베르그송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4페이지에 [이렇게 되면 과거와 현재 사이에 고유한 실재적 지속을 보지 못한다.] 이걸 자연이라 했잖아요. [아무튼 정신분석학의 목표는 묻혀 있던 과거를 더 많이 복원하는(베르그송)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불충분했던 구성을 해체하고 환자가 만족스러워 하는 새로운 구성] 환자가 지금 현실을 싱싱하게 살아가는 게 정신분석학의 목표기 때문에 베르그송처럼 자연까지 들먹이지 않는 것이 라캉의 철학의 한계라고 베르그송 쪽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과거의 사건이 원인이 되어 현재의 질병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현재의 의식이 원인이 되어 과거를 그런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과거를 현재의 결과로서 산출하는 것이다.] 라캉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허구로 허구를 치료하는 것이 정신분석입니다.

저는 너무 허무해요, 라고 불평하잖아요. 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고민하다 찾아오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기를 그래, 그 허상이 당신이라는 말로 치료가 된다. 뭘 더 원해요. 이게 라캉의 치료법이고, 베르그송은 그 허구가 자연에서 만들었다는 원인까지 제공하는 것이 베르그송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둘 다 허구라는 건 맞는데 차이점은 원인까지 제공해주기에 더 깊다는 것이 베르그송 쪽 주장이란 말이죠.

라캉과 베르그송의 공통점은 뭐냐? 5페이지 두 번째 단락 중간에 나와요. [항상 그 그물 밖으로 새어나가는 무언가가 초과적으로 남아있다는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라캉은 왜곡될지언정 그렇게밖에는 달리 실재를 언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말하는 인간의 근본 조건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반면에 베르그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 실재 그 자체를 직관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왜? 의식 자체가 무의식의 증거기 때문에. 근데 라캉은 의식된 인간으로 실재는 무의식세계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복음적 평가에 들어갑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생명계 전체를 설명하기에 개체를 포기하는 ‘탈개체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생명체의 죽음이란 사실 생명의 흐름 전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며 단지 일시적 피곤을 나타낼 뿐이라고 했다. 우발적인 계기며 인간들만이 호들갑을 떠는 지성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약동은 죽음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제 이야기입니다. 이러다보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찾을 수 없지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신념, 철학, 인류의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일반 교회에서 설교의 제일 큰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설교를 해석하는 나를 죄인이라고 지적하는 요소가 빠졌다는 겁니다. 성경 보고 순종하려고 애쓰는 착한 나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죄인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아프다, 안 아프다, 기억난다는 이것이지 죄라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요. 죄가 나오려면 의가 나와야 되는데 자연을 아무리 뒤져보세요. 아무리 바다를 찾아보세요. 거기서 죄가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이 이야기가 욥기에 나옵니다. 광물을 찾아봐도 진리가 안 나오지요.

욥이 궁금한 것은, 염소 새끼가 어떻게 낳는지, 별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아니에요. 죄와 의의 문제에요. 나는 의로운데 죄인이 받는 왜 벌을 받는지 죄와 의의 문제가 궁금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황무지에 비가 왜 오는지 아느냐고 했어요. 주님은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도 네가 궁금해 하는 의에 속한 문제로 보는 겁니다.

제자들과 예수님 갈릴리 바다에 있을 때 풍랑 쳤지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꾸짖지요. 꾸짖는 것은 나쁜 짓했을 때잖아요. 우리가 흔히 보는 해운대 앞 바다, 어디에 봉사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의에 봉사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나타난 의가 되고 그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거예요. 로마서 1장에서. 오직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나니 곧 복음이라. 그 의 앞에서 우리는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옷 입으니 벗으나 십자가 앞에서 부끄러우면 세상 앞에서 수치스럽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의롭다 했다면 우리는 누구 앞에도 당당해지는 거예요.

지금 베르그송이나 라캉도 마찬가지고 욥이 하는 관심사, 욥은 제가 의인이에요, 죄인이에요? 그게 관심사죠. 그 관심사는 오직 언약에서만 나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이 땅에 십자가 진 이유가, 세상을 만든 이유가, 풍랑을 잔잔케 한 이유가, 욥에게 고난 준 이유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알고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 의 앞에서 인간의 철학부터 과학, 모든 것은 전부 깨트림을 당해야 될 걸림돌로 이 세상에 등장해야 되는 겁니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고, 신학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마찬가지고. 교회가, 철학이 구원하는 게 아니거든요. 베르그송 철학이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인데 그 능력을 우리가 소유할 순 없고 그 앞에서 날마다 깨어지면 돼요. 깨어진 파편은 죄가 돼서 흩어지고 깨트리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6페이지 봅시다. 마지막에. [언약에서 언약으로 나아가는 현실상] 아까 베르그송은 무의식이 현실이라고 했지요. 베르그송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언약에서 언약으로 나아가는 현실상,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그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다투었다고 해서 맛사 있지요. 또는 주께서 어린양 준비했다고 여호와이레. 보세요. 새기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새긴다고요. 야곱이 이름이 바뀌니까 뭐가 됐어요? 이스라엘. 언약을 새긴다고.

그 언약을 십자가 이전에 새겼고 오늘날 우리는 주께서 십자가로 새겨진 언약이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오게 되지요. 이게 우리가 움직이는 언약체,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베르그송은 그 점을 모르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오늘도 언약에 이끌림을 받아서 베르그송 철학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주의 뜻이 함께 하사 십자가의 능력이 왜 위대하고 십자가의 의만이 왜 의인지를 더욱 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51110b 부산강의.hwp (34.5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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