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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11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자유게시판[신학]

201511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11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8-베르그송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베르그송에 관한 이야긴데 베르그송이 신학과 무슨 관련성이 있느냐고 할 때 이렇게 관련성이 있어요. 보통 예배드릴 때 성경책 펴잖아요. 그리고 서양역사에 의하면 성경책이 신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중동아시아, 이슬람에서는 코란이 신의 계시를 알고 있다. 그런데 종교에서 이런 이야기할 때 철학자들은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의 계시, 성경책이나 코란이 있더라도 해석은 어차피 누가 해요? 인간이 하잖아요. 인간이 해석하는 것, 왜 종이로 만든 경전에 권위에 굴복하느냐?

서양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네가 신이냐, 네가 절대자냐, 욕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평소에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성경에 관심 없잖아요. 성경을 안 보고도 참 잘 살았다, 멋지게 살았다, 라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누가 제시해준다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성경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코란, 불경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무엇이 기분 나쁘냐 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본성은 나는 나거든요. 절대 존재잖아요. 절대 존재가 이런 외부의 잔소리에 대해서 약간에 친다 할까, 의식해야 된다는 게 완벽한 영광, 완벽한 자기 자존심에 흠집이 되는 겁니다. 철저하게 내 위주라면 끝까지 내 위주로 가야지 속이 시원하잖아요.

흔히 간 본다는 이야기 있지요. 집적댄다. 교회에 간 보고 집적대는 사람이 아마 정기적으로 예배 참석하는 사람보다 열 배나 더 많을 걸요? 세상 살기 힘드니까 신이나 믿어보자고 문 열고, 문 열 때 그냥 여는 게 아니고 빼꼼 열죠. 그리곤 잠시 있다 나가지요. 굉장히 많을 거예요, 그 숫자가.

그런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오는 것은 말씀의 성취에 복종하겠다는 뜻이 아니고 평소에 하는 자기 행동, 자기 영광성을 보다 보완하기 위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사는데 막상 세상은 어렵잖아요. 내가 나로 사는데 하자가 있지 않은가? 이 구멍 난 대목은 교회에 가서 성경의 도사들한테 한 수, 팁을 얻으면 참고적인 교훈 같은 걸 얻으면 철저함에 더 철저함을 기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빼꼼 교회 문 열고 왔다가죠.

빼꼼 왔다가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매주 마다 빼꼼으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숫자가 상당할 걸요? 전 한 80~90%로 봅니다. 빼꼼 열고 나가는 사람이나 앉아있는 사람이나 자기 절대화의 작업을 중지한 게 아니거든요. 자기 절대화 작업에 오히려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참고로 듣고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사실 대부분이죠.

그럴 바에야 아예 성경의 권위나 코란, 불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내가 알아서 나의 완벽한 인생은 이렇다고 철학을 갖춘다면 빼꼼 할 것도 없어요. 성경에서 벗어났다는 자유감까지 보상으로 얻을 수 있어요. 나는 성경에 기대지 않더라도 바르게 살 수 있다는 그런 철학만 있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인간 해방이 어디 있습니까. 멋지겠지요. 그것을 베르그송이 제공해줍니다.

베르그송에 대해서 공부한 사람치고 기독교에 대해서 비아냥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다 웃긴다고 놀리고 있어요. 지는 완전히 정립을 했다, 모든 걸 정립하고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베르그송의 철학의 어떤 내용이 성경이나 경전 없이도 인간 스스로 완성단계에 이르게 한 포인트가 뭐냐?

베르그송의 철학이 신학자에서 거론해야 될 이유가 방금 이야기한 베르그송의 범주를 이렇게 해요. 자연 신학자라고 범주에 넣지 않고 전 단계가 자연 철학자에요. 자연 철학자가 베르그송이라면 뒤에 자연 신학자는 유명한 화이트헤드란 사람이 있어요. 김욕옥 교수가 맨날 백두선생이라고 칭찬하고 본인이 직접 번역도 했어요. 화이트헤드가 베르그송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점령했다. 베르그송은 신학, 그까짓 것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신학마저 베르그송 철학으로 덮었다고 하지요. 레슬링 할 때 심판이 하나, 둘, 셋, 게임 끝났지요.

그래서 화이트헤드에 와서는 신학이고 철학이고 완성됐다고 보는 겁니다. 감리교 쪽에서. 감리교는 은근히 뭘 노렸습니까?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행함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게 감리교 신학이잖아요. 성경에 믿음도 있고 행함도 있는데 둘은 충돌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완성한다고 본단 말이요.

이렇게 주장할 때 어떤 뉘앙스가 강할까요? 하나님만 쳐다보지 말라는 이런 뉘앙스가 강하고 더 나가면 하나님 믿을 것 없다. 인간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잘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 말은 설교시간에 하나님 존재를 빼자는 이야기입니다. 네 이웃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걸 그대로 철저하게 실천에 옮기자는 거예요. 하나님 빼고 예수님 다 빼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빼고 예수님 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싫어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요. 과연 속으로도 싫어할까요? 아니면 속으로 물개 박수치겠습니까? 반기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은 천재야, 천재야. 은근히 원했던 바를 목사가 해주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경전을 한다는 자체가 인간은 신경 쓰이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경전에 대해서 일반사람들은 아마추어잖아요. 성경은 주의 뜻이라 하고 자기는 아마추어고 그러면 누구한테 빌붙어야 되고 기분 되게 나쁘지만 누구한데 기대야 됩니까? 나이가 적든 많든 목사한데 붙어야 돼요. 목사한테 붙으면 붙는 그 대목만큼은 본인의 자유가 약간은 간섭받는 느낌이 들겠지요.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간섭받는 거죠.

그런 점에서 여자들이 반칙을 해요. 여자들이 자꾸 가정이 자기 일이니까 남편이 돌아오면 간섭하고 잔소리하잖아요. 그러면 역할을 바꿔보자. 여자가 직장생활하고 남자가 전업주부를 할 때 여자가 직장에서 돌아와서 가정에 신경 쓰고 싶겠어요? 전혀 안 쓰고 싶은 거죠. 그러면 직장에 있는 아내는 가정에 대해선 아마추어가 되겠지요. 남편이 프로가 되겠지요. 프로 눈에 아마추어 하는 게 어설프겠지요. 어설프니까 자기가 하는 직장의 질서를 위해서 참아가면서 인내하면 안 들키도록 하면서 잔소리하겠지요. 그러면 아내가 싫어하지요.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누구로부터도 간섭받기 싫어하는 겁니다. 그 본성이 악마의 본성이에요. 악마가 왜 하나님께 대들고 예수님께 대들었습니까? 피조물에도 불구하고, 요즘 세상에 유행하는 말로, 그만해라 많이 묵었따, 그거거든요. 피조물 노릇을 한두 해 한 게 아니잖아요. 많이 하니까 성질 난 거예요. 알건 다 알면서 피조물 했잖아요.

인간처럼 선악에 대해서 모르는 가운데 피조물 노릇하게 되면 모르는 한계 때문에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선악은 하나님만 알아야 될 것을 건방지게 자기 분야도 아닌데 마귀가 선악에 대해서 알아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마귀가 선악으로 욥과 다른 인간들을 정죄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신 것은 마귀를 의식해서 주신 겁니다. 인간 속에 마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율법 쏜 거예요. 선악과 쏘듯이 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마귀를 알죠. 마귀를 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마귀가 점령했기 때문에. 마귀가 결국 하나님에 대적하고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듯이 대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궁극적인 결정에 대해서 누구로부터 내가 지적받기 싫다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들었다는데 그 지옥의 특성이 뭡니까? 지옥을 만든 취지, 의미가 뭐겠어요? 바로 그걸 겨냥하는 거예요. 너의 선택보다 더 넓은 범위가 지옥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결정권이라는 겁니다. 네가 하는 최종적인 결정권은 피조물의 한계고 창조주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죄악 된 것으로 덮어버리는 것이 창조주의 전권, 주권이죠.

그래서 내가 주일에 우리교회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의미는 한계 내에서만 생산한다고 했지요. 그게 나의 의미, 나의 마지막 진리, 내가 결정했다는 게 내 의미라는 거예요. 의미는 자기 범위 안에서만 최종적인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정신병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맨날 내뱉는 모든 것이 행동하든지 말을 할 때 항상 밑바닥에 마지막 깔려있는 것이, 이 일은 내가 한다. 이 말은 내가 했다. 그 점을 알아 달라는 거예요.

지금 뉴질랜드 목사와 어제도 통화했습니다만 이런 거예요. 당회장 목사는 부교역자 설교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그만 두라고 했는데 교인들이 너무 좋다고 압력을 가해서 다시 설교를 시켰어요. 당회장 목사가 참 괴롭게 되고 부교역자도 괴롭게 됐는데 하여튼 문제가 복음 때문에 생긴 말썽이에요. 복음만 안 전했으면 아무 문제없는데 괜히 복음 전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거든요.

그럴 때 만약에, 오늘 나오는 첫 번째 어려운 건데 잘 들으셔야 돼요. 당회장 목사가 부목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강단에 안 세웠잖아요. 그러다 다시 세운다는 이야기 들었지요. 다시 세운 부목사가 당회장 목사가 가르친 대로 평소에 하던 대로 원했던 대로 설교를 곱게 해서 교회 말썽 없게 한다고 해서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당회장 목사님이 역시 옳습니다.” 그대로 설교했을 때 당회장 목사가 기분 좋겠어요? 그게 첫 번째 질문입니다. 기분 안 좋지요. 이게 헤겔의 정반합입니다.

외부 사람이 볼 때 중간에 약간의 반발이 있다가 다시 원상회복 됐으니까 아무 일 없는 게 되지요. 그렇지만 당회장 목사는 뭡니까? 안 세웠다가 강제로 세웠는데 부교역자가 자기를 의식해서 자기 구미에 맞도록 설교한 걸 본인이 이미 알지요. 그럼 일부의 주도권이 튀어나왔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내가 시켜서 그대로 할 때 기분 좋아요. 왜? 내 주도권이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시켰는데 반발했단 말이죠. 또 한 번 시켰는데 그쪽에서 반발 안 하고 엎드려서 자기가 시킨 대로 했을 때 내가 시킨 대로 했다는 주도권은 당회장의 자유에요, 부교역자의 자유에요? 부교역자 본인의 자유지요. 그러면 자기 자유에서 일부 영역이 이미 떨어져나갔지요.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고문하는 자보다 고문 받는 자가 자유를 느낄 때 고문하는 자는 화가 나는 겁니다. 갑이 을에게 지시했을 때 을이 갑대로 고분고분 하는 것 갑이 기분 안 좋아요. 내 입맛에 맞추려고 고분고분 하지, 라는 의심이 드는 고분고분 있어요. 온전한 장악이 아니에요. 그래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게 아니고 세상이 내 뜻대로 되도 기분 나빠요. 이 점을 아셔야 돼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러면 하나님이 마귀한테 물어요. 마귀야, 어떡하면 좋겠노? 마귀는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게 없어요. 그건 몰라요. 하나님이 벌인 주도권에 대해서 그냥 흠집만 내겠다는 게 마귀의 할 일이에요. 전쟁이란 누군가 한쪽에 달려들 때거든요. 마귀 전쟁의 목표가 누굽니까? 시편 110편에 주의 원수잖아요. 주님이 먼저 있다는 게 기분 나쁘다는 거예요. 마귀 입장에서 나만 있어야지 왜 주님이 계시냐 말이죠. 욥기를 보세요. 마귀가 누구한테 시비 걸어요? 욥을 보았느냐? 욥 같이 믿음 좋은 사람 없다고 할 때 마귀가 시비 걸지요.

그 마귀의 심성을 오늘날 우리가 고스란히 누리고 있어요. 우리가 이런 마귀의 심성을 분석하지 않고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은 가면만 쓰고 그때마다 땜질하는 식으로 인생 자기 소비하듯이 하다 결국 자기 파탄 나요. 결국은 마지막 심판을 따질 수밖에 없어요. 지옥 가서. 왜 내 애는 구원 안 시킵니까? 분명히 이런 이야기 나올 수 있어요. 내가 그 자식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데 왜 내 자식은 지옥 보냅니까? 이럴 수 있단 말이죠. 물론 그런 사람들만 모아서 지옥 가지만.

양이 백 마리 있는데 99마리 놔두고 한 마리 양을 찾잖아요. 주님의 숫자놀이 보세요. 양이 백 마리 있는데 세 마리는 찾아왔는데 97마리를 찾으러갔다. 예수님께서 숫자를 그렇게 하지 않지요. 99마리가 자기와 있는데 지금 잃어버린 양이 몇 마리에요? 한 마리죠. 그러나 한 마리 양을 찾아오면서 궁둥이 때리면서 하여튼 이 말썽꾸러기. 이렇게 때리면서 오면 99마리 양이 기분 좋아요. “그러기에 말 좀 듣지, 철딱서니 없는 양아.” 분명히 목자가 한 마리 양을 데려올 때 어깨에 메고 온다고요. 99마리 양은 목자 어깨에 메일 기회를 얻었어요? 어께 메면서 내가 잃었다 얻어서 기분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99마리 양은 뭐예요? 기분 좋음에 전혀 보탬이 못한 존재가 돼버려요.

예수님께서 숫자로 하는 것은 기존의 모든 세상이 태어나서 말도 안 하고 가만있어도 이미 마귀적이에요. 그 자체가 고요해도 마귀적이에요. 칼로 강도질하고 교도소 들락거려야 마귀 짓이 아니고 태어나서 가만있어도 먼 섬에서 해녀로 죽을 때까지 멍게만 찾다 죽어도 마귀에요. 이웃과 안 만나도 태어난 자체로 마귀에요. 사도 바울 말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세상 참 잘 돌아가죠. 굉장히 바쁘게 잘 돌아가요. 바쁘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볼 기회를 점점 잃어버리고 있는 겁니다. 굉장히 분주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나에 대해서 누군지 알지 못하고 교회도 못 나오고 성경 볼 시간이 없더라도 이런 내가 어떤 하자가 없고 아무 문제없고 약간 게으름은 있지만 궁극적으로 인생이 파탄난다든지 그건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할 때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감리교 신학 등이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 찾지 말고 이웃에게 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에요. 들에 핀 꽃과 사슴, 오소리, 로드 킬 당하는 짐승들은 어떻게 해야 되나? 그런 것들에 잘해줘야지. 나도 바빠서 그렇지 사실은 온 자연을 사랑합니다. 그게 바로 자연철학이라 합니다. 그걸 신학적으로 주장하면 자연신학이 되고. 자연신학의 근거를 베르그송이 체계적으로 잘 마련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연은 믿는다가 아닙니다. 자연은 그냥 산다가 되죠. 자연은 대상이 아니니까. 내가 여기 있고 자연 있는 게 아니고 넓은 자연 속에 내가 포함돼있죠. 그렇다면 강의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자연이 잘 풀어지는 밀가루 풀 같다면 그걸 무형체라 하는데 형체가 없이 물컹물컹하면 나도 형체가 없이 물컹물컹하게 되겠지요. 이게 베르그송 철학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형체가 따로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거예요. 물컹물컹하면 그야말로 시조에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그렇게 살아가면 고민할 것도 없는데 우리가 자연의 일부고 내가 자연이고 내 자체가 또 자연이고 난 자연 속에 포함돼있고. 자연이 그러하라 하면 나도 그러하면 되고. 양희은 노래에 산이 나더러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면 되고. <한계령> 자연적인 사상이죠. 그럴 때 우린 뭘 느끼느냐 하면 자기로부터 초월을 맛보게 되죠.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죠. 초월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고형체, 유형체가 자꾸 방해되잖아요. 내가 저절로 자연으로 살려는 게 본성의 외침인데 물질이 방해하잖아요. 물질을 풀처럼 녹여버리면 되겠지요. 그게 베르그송의 철학의 아이디어입니다.

여기 교재 밑에서 일곱 째 줄에 봅시다. [의식은 현실적인 물질과 혼합되어 육화된 정신, 신체와 결합된 영혼]이라고 돼있지요. 우리가 과학이라든지 빵, 책, 덩어리 진 것 또는 코스모스, 들국화,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나의 냄새 맡는 코와 보는 눈과 들리는 귀는 전부 물질로 돼있어요. 그러면 물질은 우리 속의 의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강의 내용은 어렵기 때문에 자꾸 복습을 하겠어요.

그냥 아무 무형의 죽처럼 형체 없으면 좋겠지요. 코도 눈도 입도 녹아버리는 거예요. 고문을 해도 신경 세포가 녹아버리면 고문하는 맛이 없겠지요. 뭔가 아파야 지지든지 하는데 타는 냄새만 나지 아프지 않으면 고문하는 사람이 재미없겠지요.

그래서 의식이 뭐냐? 불교에 나옵니다. 불교에 육식(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이 있는데 그게 신체에 관한 구조, 감각기관에서 나온 의식을 말하는데 그 의식을 말하는 거예요. 의식이 있다는 것은 일단 나를 물질로 간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걱정, 근심은 뭐냐 하면, 의식 밑으로 내려가면 되는데 모든 염려와 걱정, 불안,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의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베르그송을 들어보면 불교를 이야기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하게 이야기해요.

그럼 해결점이 뭡니까? 지금 문제가 내가 어떤 고형 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추었기 때문에 의식이 있고 의식이 보니까 갖고 싶어요, 아파요, 그러면 망해요, 온갖 것을 걱정하는데 이걸 밑에 내려가면 의식 밑에 무의식이 있어요. 그럼 무의식에서 철학을 시작하면 되지 않겠느냐.

무의식에는 뭐가 있느냐? 무의식에는 지속이 있어요. 지속하면 여러분이 느끼는 뉘앙스가 어때요? 의식 있는 제가 의식 있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속이란 언어를 들으면 지루하다고 느끼죠. 그렇게 느끼면 아직도 의식 레벨에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무의식 레벨에 있는 사람은 지속이 되면 그게 자연이라면 그래야지. 초탈 또는 해탈, 당연한 것 아니야, 이러한 자유로움이죠.

해방과 자유는 달라요. 자유는 거치는 것이 없을 때고 해방은 그 전에 어디 갇혀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이제는 그때만큼 안 갇힌 것입니다. 출애굽은 해방일까요, 자유일까요? 해방이죠. 탈출이죠. 반드시 갇혀있음을.

계속 보겠습니다. 1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의식은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관과 객관의 접촉지점이자 교차혼합지점이다.] 교차지점이란 산 위에 올라가면 산 저편의 동네가 비로소 보이잖아요. 산 밑에 있을 때는 산 넘어 동네가 안 보이죠. 그런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 이쪽도 보이고 저쪽도 보이고. 그러니까 그 중간은 접촉지점이죠. 의식은 주관과 객관의 접촉지점이 의식이다.

그러니까 의식은 그런데 무의식까지 들어오면 진짜 주관성은 의식에서 보이는 저건 책이고 나는 나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의식 세계가 아니에요. 무의식 세계라면, [진정한 주관성은 잠재적인 무의식에 있으면 이 무의식의 주관성과 대립하는 것이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물질적 세계다.] 세상눈에 보이는 의식세계 전체가 무의식의 대립 세계가 되는 거예요. 무의식을 감추고 있고 가리고 있는 거예요.

진짜 나는 따로 있는데 거짓 나로 인하여 심리적인 아픔을 겪는 거예요. 그래서 베르그송은 호소합니다. 의식에 머물지 마시고 무의식으로 내려갑시다. 그런데 내려가는 방법은 반드시 의식을 알고 내려가야 돼요. 그래야 되는 이유가 뭐냐? 무의식이 의식세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한 마디가 어려운 베르그송의 철학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과거의 바다. 모든 것은 과거에요. 과거의 바다를 두 자로 줄이면, ‘기억’이에요. 무의식은 지속이에요. 지속이 계속해서 출렁거리고 있다가 어떤 계기, 현재가 돼버리면 그것이 응축이 되면서 잠재돼있는 바다는 계속 출렁이고 있고, 그러다 물방울이 튀죠. 그게 현재고.

현재는 지속이 응축된 것, 또는 무의식이 의식으로 응축됐다, 단단해졌다, 순간적으로 모아졌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현재가 되죠. 현재란 뜯어보면 안에 과거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그 과거는 밀려오는 과거에요. 과거가 하나가 아니고 과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많은 과거 중에 하나만 기억하게 되면 현재화된 과거인데 과거의 전부는 아니고 과거의 부분, 일부를 잡은 게 현재가 되는 겁니다.

이쯤 이야기하게 되면 별로 필요 없어 보이죠.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기본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잖아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마귀가 있기 때문에 마귀의 근본적인 특징은 누구한데 간섭받기 싫고 지시받기 싫어요. 여호와 뜻이 뭡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요. 마귀가 모방한 거예요. 너만 신이냐, 나도 신이다. 스스로 있다는 말은 모든 진리 결정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주관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같은 게 있으면 짜증나는 거예요. 성경 모르면 의존해야 되고 그러니까. 아예 내 구미에 맞는 철학을 누가 장만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는데 베르그송이 준비돼있습니다. 화이트헤드가 준비돼있는 거예요.

그러면 묻지요. 우리는 성경 보고 진리를 아는데 성경을 치워버리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진리를 아는지 묻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베르그송은 기억입니다. 시간관입니다. 인간이 시간을 느낀다는 자체는 그것이 인간이 진짜 본질과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려하는 맨홀 구멍이 되는 겁니다. 깊은 무의식에 갈 수 있는 시간 의식이. 과거-현재-미래가 바로 의식인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2페이지 두 번째 단락에. 다 읽으면 여러분이 지루해서 중간, 중간 붕붕 뜁니다. [순수 과거는 비연대기적인 방식으로 현재와 관계 맺으며] 연대기라 하는 것은 그냥 선이라 보면 돼요. 여기서부터 칙칙폭폭 가는 열차로 보면 돼요. 비연대기는 이 지점에서 이 지점으로 가야 되는데 A에서 B로 가야 연대기인데 엉뚱한 바깥에 있는 C란 지점으로 붙이면 비연대기가 되겠지요. 그런 뜻입니다. [행위와 운동의 연속성을 탈구시킨다.] 탈구 알지요. 여기 있는 갈빗대가 툭 튀어나온 걸 탈구라 합니다.

[예컨대 ‘물 컵을 본다’와 ‘물을 마신다’ 사이에] 연대기로 봅시다. 물 컵을 본다. 물마시고 싶었지. 이러면 원인과 결과가 성립이 되지요. 물 컵을 본 것이 원인이고 물 마신 것은 결과가 되지요. 그런데 물 컵을 보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유년시절의 친구가 생각난다. 옛날 초등학교 때 그 애가 이런 식의 물 컵을 좋아했는데. 그 친구 지금 하와이 갔는데 잘 살고 있는지 연락 안 되네. 갑자기 연대기에서 탈구됐지요.

물 마신다는 과거는 연대기적으로는 물 컵을 봤다는 하나로 한정이 돼야 되는데 여기서 위치를 이탈해서 엉뚱한 옛날 컵과 얽힌 일화들, 그걸 기억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현재가 일방적으로 기억이라고 한 그 순간 난데없이 잃어버렸던 과거들이, 나도 과거 속에 넣어줘, 하면서 분명히 있었던 과거들이 그동안 잠잠해 있다가 현재 응축된 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거예요.

베르그송은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이다. 이것이 인간의 무의식적 주관이라는 거예요. 남들 앞에서 내가 어떤 모습을 하느냐, 그건 주관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그리고 싶었던 목적이 강요해서 목적에 필요한 것에 기여한다. 그것도 주관 아니에요. 그냥 사건을 통해서 예상 밖에 튀어나올 때 컵과 얽힌 설화들, 지금은 이민 간 친구가 갑자기 생각날 때 그것이 현재가 합세했다고 할까요, 추가가 된다면 그게 사실이죠, 경험이죠.

베르그송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당신이 아십니까? 이 말은 뭡니까? 우리가 생각지도 않는 친구가 물 컵 보고 생각날 때 우리는 많은 부분을 놓쳤다는 거죠. 평소에 많은 부분을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기억 안 하고 살죠. 그렇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내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전부가 아니죠. 지금 현재 필요해서 일방적으로 써먹기 위해서 있는 자아를 니들이 좋아하는 성경책으로 은혜 받는 것이 그게 과연 은혜냐고 베르그송이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교회에 은혜 받겠다고 왔을 때에 이미 자아가 자아를 구성했잖아요. 그게 자아의 전부냐고 베르그송이 시비 거는 거예요. 그게 자아의 전부입니까? 그걸 자아로 삼아서 목사 설교에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게 과연 살아 계신 신의 은혜냐 하는 겁니다. 아니면 자연이 일으킨 우연한 사건의 다발이냐? 어느 쪽이에요? 베르그송에 의하면 자연이 저절로 그러함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이 스스로 그러함으로 그냥 흘러가는 거죠.

[‘물 컵을 본다’는 습관화된 ‘물을 마신다’로 이행하는 대신] 베르그송은 습관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데 습관까지 이야기할 시간은 없고요. [전화를 건다거나 사진첩을 뒤진다와 같은 예측불허의 행위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베르그송이 말에 뒷받침하는 것처럼 현대 정신과학이나 뇌신경하는 사람들도 인간의 행동 가운데 90%는 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의도적으로 따진 것은 10%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충동입니다. 나머지는 기분 상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 10%는 억지로 이유를 갖다 대는 거예요.

2페이지 세 번째 단락. [현재들의 익숙한 연속]라고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것은 현재를 옹호하는 거예요, 현재를 부셔버리는 거예요? 현재를 부셔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르그송의 철학은 과거의 바다, 하나뿐이에요. 현재는 껍데기에 불과해요. 표면효과에요. 밀가루가 하얀색이죠. 밀가루 풀이 굳어지면 노랗게 변하지요. 그럼 밀가루가 노란색입니까? 아니지요. 일시적인 표면효과로 껍데기가 노랗게 된 거잖아요. 그게 현재에요.

현재는 현재를 쥐고 있으면 안 돼요. 다시 과거로 가야 돼요. 과거로 잠수했다가 현재를 통해서 다시 튀어나오게 되면 그게 미래가 돼요. 현재가 미래를 밀어붙이는 게 아니고 현재 밑에 있던 과거가 흘러가다보면 우리의 미래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현재에서 시작한 미래는 착각이죠. 나는 그 식당에서 얼마나 맛있다고. 지금 식당에 가기 전에 현재에서 전에 봤던 기억으로 그 식당은 맛있다고 하잖아요. 그건 착각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두 시간 뒤에 그 식당에서 맛을 볼 때 그 맛은 현재에서 나온 맛이 아니고 예상 밖에 있는 과거의 요소가 미래에 삽입해서 미래의 식당의 맛을 결정짓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은 맛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식당에서 밥을 먹는 순간 나를 욕하고 나에게 비난하고 나를 미워하면서 욕질했던 아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 그건 예상 안 했지요. 지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지요. 밥맛없지요. 그래서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밥맛없다고 하지요. 돌발적인 너의 출현으로 인하여 내가 현재에 예상한 그 미래가 아니라서 나는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이것은 무의식세계에요, 의식세계에요? 의식세계지요. 표면이니까. 의식세계니까 나는 기분 나쁘다가 성립된 거예요.

그러면 잠재적 주관이어야 할 우리가 의식세계에서는 잠재적 주관은 날아가고 의식적인 주관이 되니까 마음에 안 드는 의식적인 객관이 있겠지요. 꼴 보기 싫은 밥맛없는 어떤 아는 사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의식세계에서 짜증내고 불안하고, 화내고, 신경질 부리고 또는 좀 좋으면 좋다고 웃고 즐기고. 지난번에 하이데거처럼 새로운 자극, 쾌락을 위해서 헤매고. 자꾸 그런 거예요.

다 알 수 없는 못 다 아는 나, 하지만 다 알지 못하는 나를 무의식세계에 있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식세계에 머물러서 모든 흐름 변화를 내 구미에 맞추려고 애쓰다보니까 사는 게 본인만 힘들지요. 본인의 의식의 주관 욕구, 주관에서 욕구, 욕망이 나와요. 그 욕구 욕망에 맞추어 세상이 돌아간다고 억지를 부리니까 나만 힘들지요. 그러니까 이 주관을 제대로 알아서 이제는 무의식, 잠재적 주관으로 돌아서라, 사람들아. 괜히 성경 본다고 은혜 받는 게 아니고 네 자신만 알면 은혜 된다. 이게 베르그송의 철학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51110a 부산강의.hwp (31.5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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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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