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창 2장 4-7(생령)151111-이 근호 목사
12강-창 2장 4-7(생령)15111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93)
12강-창 2장 4-7(생령)15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4-7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2:4-7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물어야 될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흙의 입장에서는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아무 코멘트 할 입장이 못 됩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 때 흙이 하나님 앞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하지 말아야 돼요. 말을 한다는 그 순간부터 자기 욕심과 자기 욕망이 동반해서 튀어나오기 마련이거든요.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 자기 보기에 자기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라든지 자기의 모습이라든지.
그렇게 되어버리면 흙이 스스로 움직여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흙에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다는, 하나님이 개입해서 생령이 되었다는 이 취지가 우리가 나불대면 다 날라 가버려요. 흙덩어리에 불과한데, 흙인데,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한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인간이 이의를 단다든지 토를 달면 안 됩니다. 선악과를 왜 심어놓았냐, 왜 괜히 선악과는 심어서 죽도록 했느냐, 뱀은 왜 설치게 만들었는가, 에덴동산에서 뱀이 설치게 해서 이렇게 고생하게 만드는가, 그런 소리를 하면 안돼요.
인간은 그냥 흙이고, 흙일 때는 입도 없고 코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을 할 여지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을 때는 그만한 의미가 있고 그만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을 겁니다. 그 목적 앞에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되지요.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산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거든요. 산 사람이 되었다고 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는 살아야 할 인간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꾸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 만들 때는 산 사람 되게 했지 죽을 사람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인간이 내가 누구냐, “하나님, 나는 누구입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에요. 만약에 우리가 죽는다면 ‘죽을만한 일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살다보면 죽겠지.’ 이것은 불교고요, 이것은 동양철학인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살다가 죽이시는 것, 늙어죽게 하시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뭐냐?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냥 하나님이에요. 엘로힘 하나님, 그냥 하나님인데 2장에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는 그 목적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이 왜 살아야 되며 인간은 왜 죽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본문 내용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흙이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생령으로 만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을 만든 거예요.
엘로힘 하나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기에 나타날 필요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나중에 만나면 돼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이 인간세계에 관여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관여하고 개입할 때 출애굽기나 성경 여러 곳에 보면 ‘언약의 하나님’ 언약을 앞장세워서 개입하십니다. 개입할 때 그냥 “나 하나님이다.” 이렇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 이상하지요? 하나님이 “나 하나님이다.” 이렇게 나타나시면 되는데 그런 하나님은 다 가짜고요, 진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준 게 있지? 그 하나님이 모세 너에게 나타난 하나님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야! 네가 나와 함께 일할래?” 이게 아니고 “모세 너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 사람들 뒤에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그 이후에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 그게 언약의 백성이고 언약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그것이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옛날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 했지만 신약에 나타난 성도들은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될 사람입니다. 새 언약이란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완성했다는 증거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언약은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미 완료를 했다는 사실, 그 업적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실적, 새 언약의 업적으로, “새 언약이 분명히 완성되었잖아. 봐! 저 사람 봐!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영생 얻었잖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신약의 어린아이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소중한 거예요. 구약의 예언자나 성도들은 언약을 기다리면서 자기의 미흡한 가운데 죽고, 죽고, 죽었지만 신약의 성도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아요. 그것도 영생으로. 왜냐하면, 태어난 그 자체가 작품이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 십자가의 혜택과 효과와 십자가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밟아도 안 죽어요. 지옥가라고 해도 갈 수가 없어요. “너 어디갈래?”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영생의 나라가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오늘날 신약의 성도가 된 겁니다. 성도하고 영생의 나라 천국하고는 고무줄로 연결되어 있어요. 고무줄, 더 단단한 용수철로 연결되어 있어요. 인형 뒤에 어떤 끈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과 영생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인형극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안 죽어요.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오늘 읽은 내용 자체가 뭔가 의식하고 있고 뭔가 전제하고 있어요. 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경작할 사람이 없다고 나와 있지요. 사람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나오고 먼저 “경작할 사람이 없었으므로”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장차 사람이 태어나게 되면 그들이 경작해서 살려고 그렇게 애를 쓸 것이다. 토지를 갈아서 밥 먹고 살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밭 갈아서 살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경작한다고 해서 삽니까?” 그 말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생기를 부어주면 이미 산 사람인데 꼭 경작해야만 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밭에는 과수,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어요. 과일도 없고 곡물도 없고. “파, 양파, 삼겹살구이 싸는 깻잎, 마늘, 그거 꼭 있어야 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 사람에 있어서 꼭 경작할 토지나 채소 따위가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 그것은 아니야. 하나님께서 입김만 불어넣으면 채소 같은 것 안 먹어도 산 사람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지난주일 오후설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을 한 이유가 “애굽에 있을 때는 참외도 먹고 수박도 먹고 마늘도 먹었는데 그런 것 못 먹어서 정력이 확 쇠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재미 하나도 없다.” 하는 거예요. 정력 있어서 뭐하려고? 재미없으면 TV라도 사줄까요? 광야에 극장이라도 차려줘야 돼요? 바둑판이나 화투라도 넣어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줘야 재미있는가요? 주님께서는 “재미없어도 살았잖아.” 산 사람 되었으면 되었지 않느냐 하는 거예요. 애굽에서처럼 파나 마늘이 없어서 재미없다, 애굽에서는 재미있었는데 광야에서는 재미없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나는 산 사람이 아니오.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오.”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는 겁니다.
사람의 자기존재의미가 자기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내 의미가 뭐냐를 물으면 괜찮은데 본래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은 상태에서 “내가 사는 의미가 뭐냐?” 이렇게 해 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준 산 사람이 아니에요.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사람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은 흙에서 생령이 된 이상은 다시 흙으로 못 돌 아 간다는 거예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이 되지 흙으로 안 돌아가요. 인간은 스스로 흙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습니다. 자살하게 되면 죽은 사람이 될 뿐이지 흙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흙의 의미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닌 이상은 여기 나오는 흙의 의미, 생령의 의미, 그런 것에 접근할 수가 없어요. 파악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 산 사람 되었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자기가 노력해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여호와께서 하신 작업이 포함이 될 때 흙으로 돌아가요. 그게 뭐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개입해야, 계명이 주어져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하게 되어 있어요.
제 취지를 여러분이 이해하시겠습니까? 생중계 듣고 있는 분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런 겁니다. “살기 힘들다. 칵 죽어버릴까?” 글쎄 캑 죽든, 기침을 하다 죽든지 관계없이 그냥 죽어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흙을 생령으로 만든 이상 하나님의 관할 하에 있어요. 그러면 그 생령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관할 속에 있는 어떤 계획이 개입해줘야 인간은 흙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늙어 죽어서 박테리아가 분해한다고 해서 흙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돌아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야, 내가 인간 만들어놓았더니 인간이 자기 인생을 버려놓는구나. 난 손도 못 대겠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죽는 것 까지, 끝까지 하나님은 손대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살기 힘든데 빨리 죽자. 링거고 호스고 다 빼고 그만 죽자.” 링거 뽑는 것으로 죽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의사를 통해서 링거를 꽂아서 산 생령이 되었다.’고 전제가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여호와께서 개입할 때는 반드시 언약이 개입되는 겁니다. 언약이 개입되기 때문에 다시 인간이 산 사람에서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개입된 언약을 뽑아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입니다. 하나님은 손해 보는 장사 안하십니다. 인간에게 여러 가지 답답한 점이 많이 있겠습니다만 그중에서도 가장 답답한 일이 뭐냐 하면, 죽을 수도 없다는 거예요.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태어난 것부터 내 관할이 아니기에, 내소관이 아니고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태어난 나를 내가 어떻게 주무른다든지, 내가 어떻게 다룬다든지, 그러한 것을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어요.
산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때는 그냥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죽은 사람을 만들어요. 죽은 사람을 거쳐서 흙이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을 통해서 뭘 뽑아내는가? 아까 언약을 뽑아낸다고 했는데 더 구체적인 모습은 죽음을 뽑아내요. 하나님께서는 이 죽음이라는 것을 뽑아내서 이 죽음이라는 구체성을 가지고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고 여호와 자신의 모습을 죽음의 모습으로 일치시킵니다.
그게 뭐냐? 십자가중심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천지 창조가 십자가중심인 것이 밝혀졌어요. 죄 짓고 난 뒤에 “내가 대신 죽을게.” 그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십자가 중심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것이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이 만들어졌어요. 그리스도가 하신 일, 십자가를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예수님 죽음의 희생에서 나왔어요. 그 희생의 공로를 모르면 지옥가고 그 희생의 공로를 알면 천국 갑니다. 예수님 자신의 그 죽으심은 언약대로 죽으심이에요. 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목사님, 성경을 볼 때 어떻게 보면 됩니까?” “그것은 신약의 안목에서 보면 됩니다.” “신약의 안목이 뭡니까?” “대신 죽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신’은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 못했을 때 대신이 나오잖아요.
먼저 실패한 사람이 있고 “실패했어? 대신 내가 성공할게.” 실패한 사람을 먼저 앞세워놓고 대신 하는 사람을 뒤에 세우는데 성경은 반대입니다. 대신 한 분이 원초적으로, 원래부터 계시고 그 대신 죽으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실패한 자를 이 땅에 나중에 등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지요.
“왜 그렇게 어렵습니까?” 한다면 지금 우리가 고장 났으니까 어려워요. 우리가 지금 창세기 2장 7절의 그 인간이 아니에요. 우리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죄 짓과 난 뒤에 자기가 신인 척 하면서 돌아다니는 가짜인간, 사자성어로 정신병자라고 했잖아요, 그 정신병자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나는 실패 없다, 나는 실패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준 것은 딱 하나입니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실패했다.” 그 이야기를 하라는 말이지요. “내가 왜 실패했어요?” “창세기 2장 7절을 봐라. 그들은 산 사람이 되었잖아. 채소가 없었어도, 경작할 땅도 없고 논농사 안 지어도 산 사람이 되었잖아.” 그러면 또 삐져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그것은 여호와가 아니고 하나님(엘로힘)이고 구체적으로 인간이 사는 이 지상에 개입하는 분은 바로 여호와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엘로힘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다가와서 엘로힘과 연결시킨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단수가 아니고 복수지요. “우리의 형상대로” 그 ‘우리’와 관계 맺기 위해서 브리지로 여호와께서 오실 때 언약가지고 오신 거예요. 이걸 아는 사람을 제가 만나본 적이 없어요. 이걸 아는 사람이 없어요. 책들 보면 기껏 한다는 소리가 E문서가 있고 J문서가 있고 D문서가 있다는 식입니다. 네가 편집장 다 해라, 네가! 어디서 성경을 네 맘대로 그렇게 이리 째고 저리 째고 합니까? 궁켈이라는 사람이 양식비평이라는 것을 한답시고 성경을 그런 식으로 봤다고 신학교에서 다 배우는 거예요. “1장은 E(엘로힘) 문서인데 2장에 J(여호와) 문서가 끼어들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유대인이 바보입니까? 모세가 바보에요? 모세가 계시 받을 때 그렇게 받았습니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될 것을 꼭 모르는 게 아는 척 한답시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지금 신학자들이 다 배우고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그렇게 배운다고요. 언약이라는 것만 알면 아무 문제없는 것을 가지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생령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어요.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이제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선악을 아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도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면 여호와께서 여호와 본인의 완성을 위해서 인간과 이 창조세계를 이용하신 거예요. 여호와가 누구냐? 신약의 주가 되시고 주가 누구냐? 나사렛 예수님이 주님이에요.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예수님이 주 여호와에요. 여호와가 지금 자기가 던진 약속대로 죽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던진 약속이라고 했지만 신약 적으로 보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때문에, 창세전의 아버지와 아들의 약속 때문에 아드님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와서 뭘 하느냐?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언급해 버립니다.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님만이 이 땅에 죽음으로 갈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 가게 되면 무엇이 밝혀지는가? 오늘 본문에서 생기, 하나님의 숨, 다 좋아요, 번역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숨으로 쉬는 거예요. 숨을 쉬었는데 그게 생명이 되었거든요. 이걸 신약 적으로 설명을 해줘야 돼요. 신약 적으로 설명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가 되셨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영원히 사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 본인이고 그 예수님 본인이 이 땅에 육신으로 왔을 때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았거든요. 그러니까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뭐냐?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속마음, 흙에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속마음이 들어오니까 산 사람 되는 거예요. 이제 해야 될 것은 뭐냐? 그 속마음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그 속마음은 창세전에 누구와 누구의 약속으로 되어서 먼저 인간에게 산 사람이 되게끔 한 이유가 뭐냐? 인간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하나님의 본질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 본질이 고린도전서 2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여기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모든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어요.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깥에 등장하게 되면 바로 창조가 되고 흙이었던 인간이 생령이 되는 그것도 ‘모든 것’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내가 누구냐’를 몰랐는데 십자가의 능력이 오게 되면 ‘아하, 내가 예수님 주되심을 위해서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 때 그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안 사람이 돼요. 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하거든요.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아무도 알지 못해요. 아무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부딪혀서 의도적으로 죽어야 되는 겁니다. “봐라! 너희들은 얼마나 몰랐으면 나를 죽이겠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너희들이 얼마나 몰랐으면, 얼마나 무식하고, 얼마나 가짜고, 정신병자 같으면 나를 죽이겠는가?” 그 말이에요.
‘육과 영혼이 결합해서 인간이 되었다.’ 이게 바로, 이게, 참……! 이게 가장 가짜 됨을 드러내는 아이디어입니다. 왜냐하면, ‘육+영혼’이 되면 이것은 육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가 돼요. 왜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느냐 하면, 그 아이디어는 무엇을 훼방하기 위해서냐 하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훼방하기 위해서 가짜들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면서 끄집어낸 아이디어입니다. 철학적용어지요. 인간은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방하고 그것을 가려놓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구약 성경을 누가 봐도 인간은 뭐다? “인간은 육, 흙에다가, 또는 몸에다가, 다 같은 말인데, 거기에 영혼이 결합된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정립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바리새인들이고. 그들이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잖아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하거든요. 가까이 있다고 해서 잘 보이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요? 가까울수록 안 보이는 게 더 많아요. 나 자신에 대해서 보이는 것은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은 영혼으로 처리해버리는 겁니다.
‘보이는 몸, 그런데 왜 죽지? 아, 영혼이 문제 있을 거야. 몸+영혼.’ 그러면 해답이 되는 겁니까? ‘사람=육+영혼’이 되어버리면 육을 포기하고, 영혼을 개발하고, 영혼을 다듬고, 영혼을 고상하게 만들고, 영혼을 거룩하게 만들고, 영혼을 경건하게 만들어서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었어요. 오늘 본문은 흙이라는 물질과 하나님의 ‘기’라는 영혼이 결합된 게 아니에요.
문제는 ‘육+영혼’이라는 것이 우리가 눈에 보이는 육과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를 결합시켜서 나오는 결론인데 이것 자체가 가짜이기에 내놓을 수 있는 최후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론과 예수 그리스도가 합해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를 몽땅 거부하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조직신학적인, 교리적이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몸과 영혼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어쩌라고?” 주님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요. 그리고 실제로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도 다른 방식으로 언급합니다.
그 다른 방식이 어디에 나오는가? 욥기 27장 1절에 나옵니다. 욥기 27장 2절과 3절에 보면, “나의 의를 빼앗으신 하나님, 나의 영혼을 괴롭게 하신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기운이 코에 있고, 영혼이 있고,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이 있고 몸도 있고 생명이 있는데 욥의 문제가 뭐냐? 왜 나의 의로움을 빼앗고 그 살아 있다는 영혼을, 흔히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을 왜 괴롭게 하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알기 쉽게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진수, 인간의 진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몸+영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죄 문제, 의의 문제, 그리고 난데없는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신다는 말이지요. “인간은 ‘몸+영혼’으로 되어 있어.” 그것은 고통도 아니고, 나쁜 짓도 아니고 죄도 아니잖아요. ‘아,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하나님께 가서 만난다. 난 왜 모든 것을 이렇게 다 알지?’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그것은 욥도 알고 있다니까요?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왜 나의 의를 빼앗아 가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것은 그게 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몸+영혼’ 그게 의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나 아직 살아 있다.’ 그게 죄라는 거예요. 살아있다, 할 때는 인간의 단독 성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은 혼자 숨 쉬고 있으면 살아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려준 것은 아버지께서 일시키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알려준 바는 그겁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에요. 아버지와의 관계성, 예수님은 단독 성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죄 짓고 난 뒤에는 단독 적으로 자기를 보고 자기가 숨 쉬고 있으면 살았다고 본인이 본인보고 결론 내립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산 게 아니에요. 그것은 죽음이라니까요? 단독 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일해요. 이제 단독 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려고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관계, 하나님의 의라고 해요, 아버지와의 관계를 우리 신약시대 성도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인간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산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그거예요. ‘너는 그냥 흙’이라는 뜻이거든요. “너는 그냥 흙이야. 흙인데 내가 산 사람 만들었던 거야.” 먼저 전제가 뭐냐? “인간이 뭔지 모르지? 내가 알려줄까? 흙에서 사람 만들었어.” 그런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백날 까불어도 흙이야.” 그런 뜻이에요.
이사야 51장 1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같이 될 인자를 두려워하느냐.” 인간을 가지고 풀 같다고 해요. 이사야 40장에도 유명한 말씀이 나오지요. 외우는 분들도 많을 거예요. 6절과 7절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시든다는 거예요.
‘아, 늙으면 죽는다는 뜻이구나.’ 그게 아니고 여호와께서 개입하니까 풀이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여호와의 개입, 말씀의 개입, 언약의 개입을 놔두고 단독적으로 자기를 관찰하고 분석하려고 해요. 그래서 나온 것이 ‘몸+영혼=사람’이라는 거예요. 몸은 죽으면 썩지만 영혼은 하늘에 간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도 그렇게 생각했고 모든 인간이 동의하는 거예요.
여호와의 언약 적 개입을 누가 반대했습니까? 여호와의 적이 반대했어요. 마귀가 반대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귀가 역사하니까 언약을 위반하잖아요. 언약을 위반할 때 그들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전에 이야기했지만 이사야 44장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사 44:9) “네가 허망한 거야.” 그 말은, 너희가 너희끼리 모아봐야, 연구해봐야 전부 다 환상이에요. 망상이고 환상에 불과한 겁니다. 그냥 꿈이에요, 인생 자체가. 꿈이 아닌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왜? 단독 자가 아니고 아버지와 언약으로 연결되어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평생,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만 생각하는 거예요. 작은 꼬마도, 두서너 살 꼬마도 아버지가 삼계탕 한다고 마트에 닭 사오라고 보냈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 샀어요. 아버지가 분명히 대한, 민국, 만세한테 마트에 가서 닭 사오라고 시켰거든요. TV에 자주 나오는 그런 애들이 있습니다. 삼둥이에게 아버지가 한 약속은 뭐냐 하면, 닭을 사오라고 한 것인데 마트에 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빵을 사왔어요. 이것은 단독적결행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이 뜻이었어요. 그런데 단독적으로 결행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따먹으면 죽잖아요. 아니요, 그냥은 안 죽어요. 언약의 뒷면, 언약의 부정적인 면, 다시 말해서 언약을 위반하면 지옥 간다는 그 면면을 인간으로 위반케 함으로서 그 뒷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냥 안 죽어요. 예수 그리스도께 대들고 죽고, 마귀 짓을 하면서 죽고.
그냥 죽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인간은 흙에 불과하고 흙에 있는 모든 정보는 아버지와 예수님사이에 있는 감추어진 정보가 인간을 죽여가면서도 계속 거기에 담으면서 하나 버릴 것이 없게 해요. 하나 버릴 것이 없이 주께서 원하는 것을 다 뽑아낼 것 다 뽑아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옥 사람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스스로 있는 자,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설쳐서, 자기들끼리 결합해서, 가짜들끼리 결합해서 내놓은 것이 뭐냐? 자기만의 의입니다. 자기만의 의고, 우리는 행복을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욥에게 찾아와서 그 의를 빼앗아 버리고 그 영혼을 괴롭게 할 때 욥이 하는 말이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숨 쉬고 살아 있는 의미가 뭡니까? 살아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롭다는 나에게 왜 이렇게 의를 뺏고 고통을 주십니까?”
정답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그 관계 속에 네가 놓여 있기 때문에.” 이게 정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기 때문에. 장차 언약완성과 관계있는 사람으로 이미 차출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오시기전에 먼저 네가 와야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통, 그리고 그리스도가 무슨 목적 때문에 이 땅에 왔는가를 네 의를 빼앗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결국 욥을 의롭게 해주시는 것, 뺏고 주시는 그것, 그것을 통해서 창세기 2장 7절을 주께서는 완성시켜 버리는 겁니다. 우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완성시키고 그 완성된 취지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이러한 말씀을 성령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십자가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기를 안다고 여겼던 것이 망상에 사로잡힌 환상 같은 인간이 자기가 자기보고 하는 헛된 소리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 지어서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다시 한 번 발견하고 말씀의 깊은 뜻을 아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2강-창 2장 4-7(생령)151111-이 근호 목사.hwp (30.5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