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나는 가짜다
2015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나는 가짜다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11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5장 : 나는 가짜다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35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2, 3절에 보면,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 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성경 가운데서 제일 난해한 것이 무엇이냐고 저한테 물으면 안식일이에요. 왜 난해하냐 하면, 사람은 평소에 사람을 의식하며 살잖아요. 오늘은 누굴 만나지? 내 옆에 누가 있고, 애들은 학교가고, 사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데 안식일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그만큼 안식 법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가짜에요. 처음부터 문제성이 있는 겁니다.
안식 법이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 내부에 안식 법이 만들어졌으면 우리가 그걸 제대로 못 지킨다든지 제대로 성실하게 못한다든지 양심의 가책이라는 게 성립하는데 안식 법이란 처음부터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인간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그래서 어떻게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방금 언급한 걸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정리될 수 있어요. 인간은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잃어버렸다.
보통 누가 비타500 줬으면 내가 준 것 어쨌어요? 내가 잃어버렸네. 책임추궁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이 먼저 우리한테 뭔가 주고, “왜 제대로 관리 못했고 왜 제대로 못 지켰어? 넌 맞아야 돼.” 이게 맞는 거잖아요. 그런데 안식 법은 우리한테 없는 거예요. 없는 건데 우리에게 잃어버렸다는 조로 찾아온 게 안식법입니다. 처음부터 안식 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 자신을 문제 삼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걸 공연한 트집이라 하지요.
그럼 왜 하나님께서 트집을 잡아야 되느냐 하면, 누구 나를 트집을 잡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무리 자신을 봐도 우리가 하자가 없어요. 우리는 성실하기 짝이 없고, 참 사고방식도 건전하고 착실하기도 어떻게 그렇게 착실한지. 하나님 앞에 끔뻑 죽으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거든요.
그런데 안식법이 와 버리면 안식 법을 우리가 어떻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왜냐? 안식일은 물체나 사물이 아니고 시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물건 같으면 집에 보관하면 되는 겁니다. 시간을 어떻게 보관하지요? 그래서 제가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법이 안식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 있잖아요. 있다고요. 그럼 사랑하면 되지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에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인 아시죠. 누가복음 10장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앞에 제사장, 레위인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돈을 지불하면서 장래까지 보장하면서 그 사람을 지켜달라고 여관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돌봤지요.
그러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정상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이 정상이에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정상이에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한 이유가, 어떤 인간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지적하거나 나무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가 아니잖아요. 강도 만난 사람의 책임은 강도지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사장과 레위인 입장에서 책임자가 분명히 강도인데 자기가 거기에 끼어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이게 굉장히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어려운 대목입니다. 끼어들어갈 핑계가 없어요.
예를 들어서 강도의 동생이라면, “형님이 또 나쁜 짓했구나. 우리 형님이 술 먹고 강도질해서 사람이 거반 죽게 됐으니 동생인 나라도 혈연관계 때문에 책임져야지.”라고 도와줄 이유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도와줄 이유가 없어요. 그 인생에 개입할 어떤 핑계거리가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안식일과 관련 있으니까 정리해봅시다. 제가 인식일은 시간 지키기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다른 법은 나타난 어떤 대상이 있다고 했잖아요. 있는 대상은 쉬워요. 시간 지키는 것은 어려워요. 시간 앞에 보초 세울 일 있습니까. 시간이 멈추어라, 하겠습니까? 바람도 멈출 수 없는데 시간을 어떻게 멈춰요. 그러니까 안식일 지키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에요. 그러면 안식일 말고 다른 것은 쉬운가? 다른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만만치 않은 걸 예를 드는 겁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한패 먹었지요. 강도 만난 사람은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가 강도 아니니까 책임이 없어요. 문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 사람을 돌보아야 될 윤리적 행위의 근거가 성립이 안 돼요. 이 사람이 아는 친구 동생도 아니고 동창생도 아니고 아무 연고도 없어요. 연고 없는 사람을 내 쪽에서 도와주려면, 이것이 제사장이라면, 이게 바닥이라면 이 바닥에 이 사람을 집어넣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사람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일을 개시하기 전에 그 일이 내가 만든 현실 속의 일부라고 여길 경우에만 행위에 나서게 돼있습니다. 강의가 어려워서 내가 미안한데요.
물 컵이 있는데 이야기하다가 제가 책상 밑으로 던졌습니다. 이걸 기억하겠어요? 기억 못하지요. 왜? 떨어진 이 자리가 사전에 내 존재에는 없던 거예요. 그런데 이게 거치적거리는구나. 그러면 이건 여기에 놓고, 이렇게 생각해서 치워놓을 때는 기억이 되지요. 이것뿐만 아니고 이것까지 내 영역에 포함돼있어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공짜로 행동하는 법은 없어요. 생각하면 생각한 만큼 경계가 넓어져요. 옛날에 로마 가봤어요. 로마 가본 것이 연관이 된다니까요. 로마 가봤기 때문에 내 영역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로마를 쓱 지나갔든 어쨌든 간에. 그때 오드리 헵번이 손 빼는 곳도 가봤고, 연관이 돼있어요.
그런데 울산에 있는 사람이 사채업자한테 납치되어 로마에 갔다고 합시다. 눈가리개를 벗게 될 때 사채업자한테 납치된 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여기 로마네. 고마워요. 이렇게 이야기합니까? 왜 나를 여기에 잡아왔느냐고 화를 내겠지요. 돈 주고 일부러 가야 될 로만데. 007 영화에 보면, 007이 체포 되어 스위스 알프스 산 지하벙커에 잡힙니다. 그러면 007이 이럽니까? 내가 가고 싶었던 몽블랑, 고마워요. 닥터 노(악당 이름). 눈치를 봐서 내가 빨리 탈출해야지(007 살인번호). 왜 탈출해야 되지요? 내 존재에 그게 포함이 안 됐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께서 예를 든 거니까 제사장과 레위인 안에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 혹시나 강도 만난 사람이 있으면 도와줘야지. 그런 걸 예상이 안 된 거예요. 오늘 제사장과 레위인의 스케줄에 강도 만났을 때 도와준다는 것이 본인 스케줄에 포함이 안 돼 있어요. 그래서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는 뭐냐?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거예요. 그럴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거든요. 그 이웃 이전에 이미 내가 저 사람은 이웃 삼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내 안에 이웃이 있잖아요. 바로 그것이 가짜고 그것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그걸 죄라고 하는데 선악과가 따먹을 때 선악과만 온 게 아니죠. 선악과 따먹으라고 유혹했던 악마가 동반해서 우리 속을 채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선악으로 하는 것은 우리의 결심과 선택이 아니라 마귀가 선악을 선택해요.
가장 선은 뭐냐? 우리 상식으로는 선한 쪽, 악한 쪽 따로 선택한다고 자부하겠지만 따져보세요. 가장 진리, 가장 선, 가장 의는 뭐냐 하면, 이유가 없어요. 내가 선택한 게 선이에요.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에 누가 동의하면 기분 나빠요. 왜냐하면 둘이 뜻이 맞았다고 동지라 하잖아요. 그 다음에 둘이 다른 데서 또 게임해야 돼요. 누가 갑인지, 을인지 시합해야 돼요.
흔히 졸부들 돈 쓰는 걸 욕하면 뭐라고 합니까? 내 돈 내가 쓰는데 니가 와? 그게 바로 진리에요. 졸부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다 그렇게 해요. 주부가 요리를 하잖아요. 맛있나? 짜진 않나? 물어보잖아요. 물어보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나는 이미 맛을 보고 맛있다고 결론을 내린 거니까 동의해달라는 겁니다. 내 진리에 따라 달라는 거예요.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내 영역을 넓히는 행위에 불과해요. 절대로 내게 없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화를 냅니다. 그걸 병균이 들어왔다, 이물질이 들어온 거예요. 주부가 낮에 어떤 아저씨가 검침 왔다든지 하면 우리는 강력하게 방어하지요. 이물질이에요. 초대 받지 않은 사람, 내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면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바로 그분이 누구냐? 메시아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100% 거짓말입니다. 이것 하나 내가 확실히 장담합니다.
성경에서 예수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할 때 그 믿는 나는, 내가 깨어진 상태에서 믿어지도록 피동적으로 되어있을 때만 믿음이 성립돼요. 왜? 믿음이란 믿음에서 와야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다가가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예수 믿고자 다가가면 안 됩니다. 다가가게 되면 주님은 두 발짝 물러가요. 한 발짝 다가가면~ 두 발짝 물러가고~
내가 다가가는 게 왜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영역에 근거해서 내 속에 있는 악마, 괴물이 시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건 자기 의거든요. 예수 믿는 게 자기 의가 되면 안 되거든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해요. 저쪽 믿음의 원천에서 이쪽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요. 우리를. 그렇게 해도 되고 믿음이 찾아와서 믿음을 원천 쪽으로 잡아당겨서 이르게 하는 것도 돼요. 믿음에서 믿음으로 하니까 우리 딸내미 결혼식 생각난다.
로마서에서 1장 17절 그 이야기하는 것은 행함과 믿음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로마서 4장에서 간단히 이야기했어요. 믿음은 행함에 속하지 않는다. 무슨 말입니까? 네 존재의 근거에서 믿음은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에서 하는 것은 다 행위가 되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믿음은 믿음으로 쳐주지 않아요. 믿음은 은혜에 속했다(로마서 4장). 은혜에 속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니까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나는 포기해야 돼요.
포기한 순간 주변에 나타난 강도 만난 사람은 전부 우리가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누가 준비하셨다가 우리에게 주시는 사태입니까? 예수님이 준비해놓은 강도 만난 사람을 우리한테 덮칠 때 우리는 내 것을 고수하면서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할 수 있어요? 안 됩니다. 못합니다. 그런데 나의 본질을 내 쪽에 두지 않고 내 쪽은 마귀 쪽이니까 진짜 나는, 가짜거든요. 처음 강의할 때 우리는 날 때부터 가짜인 거예요. 진짜는 어떤 분이 갖고 있어요.
어떤 분이 우리한테 찾아올 때 첫 번째 현상이 그동안 내가 나라로 여긴 것은 전부 가짜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찾아오면서 가짜 구원받으라는 게 아니고 가짜를 진짜로 바꾸어놓는 과정을 겪어야 천국에 갈 수 있어요. 가짜를 진짜로 바꾸기 위해서는 가짜는 여지없이 부정당하고 깨져야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 지고 날 따라오라고 하지요.
건강 검진하라고 전화 오는데 건강 검진할 때 표 쪼가리에 건강검진 받을 내용이 있지요. 간호사들이 하나 과정이 끝날 때마다 아저씨, 날 따로 오라고 하지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가야 되겠지요. 이게 피동적이라니까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주님이 날 따라 오라는 거예요. 주님 따라 가라는 거예요.
따라 가면서 내가 오늘 아침에 거울 보면서 멋있는 사나이(나보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예를 들어서)라고 여겼던 그것이 당뇨네요, 이렇게 나올 수도 있고, 체지방이 많습니다. 혈압 약 잡숴야 되겠는데요. 110에 170, 이건 위험수치입니다. 이건 거울 본다고 나올 리가 없지요. 건강 검진하는 현장에서 나오지요. 110에 180, 남이에요, 나에요? 나잖아요. 맨날 거울 앞에서 멋있다고 폼만 잡으니까 알 리가 있어요? 저는 그걸 어느 설교에서 끼 부리는 인생이라고 했는데 맨날 끼 부리다가 인생 다 소모하고 맙니다.
남자들 은퇴하고 난 뒤에 취미 생활한다고 난 치고 하는 것 보면, 저것 며칠 가겠나? 자기 꾸미기에 바빴지 주님 앞에 말씀 앞에서 어디가 문제고, 어째서 가짜인지, 가짜 알아도 몰라도 결과는 다 똑같아요. 죄 값으로 다 죽는단 말이죠. 죽기 전에 죄를 알아야지. 죽기 전에 죄 알아야 돼요. 물론 김추자는 늦기 전에, 라고 했지만.
자기 죄를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 죄를 아는 유일한 건강진단 센터가 어딥니까? 교회입니다. 물론 조건이 있어요. 복음이 나오는 교회. 그래서 현관문 열 때 비빌 번호 누르고 들어와서 “가짜 왔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그리고 내가 교회 나온 것도 가짜 짓하고 있는 겁니다. 예배드리는 것도 가짜입니다. 왜 그런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오늘 바쁜 중에도 나왔으니까 복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가짜 여기 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탕자 여기 왔다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디서 혈압이 높은지, 간이 이상이 있는지, 뭐가 문젠지 저를 봐주지 마시고 낱낱이 전부 절개해주시옵소서.
그렇게 나오는 자세가 이거에요. 말씀은 애초부터 못 지켜요! 가짜한테 율법을 준 것부터가 가짜임을 깨달으면 대성공이에요. 그런데 가짜가 꼭 가짜 티를 내네. 말씀을 지키려고 해요. 자기 몸에 낙서할 일이 왜 필요합니까. 자기 몸에 낙서하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처음부터 진짜로 만들지 않고 가짜로 만들었느냐고 물으면, 답변은 간단해요. 진짜를 말하기 위해서 가짜부터 먼저 만든 거예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오실 자는 예수님이고 아담은 그 앞에 있는 표상, 상징물이에요. 가짜를 둠으로서 진짜가 가짜의 능력으로 파악 못하게 돼있어요. 말도 어렵다. 말은 맞아요. 가짜가 진짜를 알아버리면 그건 가짜가 아니죠. 오류가 생겨야 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 사람들이 생각한 멋있는 모델로 온 게 아니고, 누가 믿었으리오, 누가 알았으리오? 심지어 열두 제자는 코앞에 두고도 몰랐어요. 바로 앞에 삼 년 동안 식사를 하면서도 이분이 누군지 몰랐어요. 풍랑을 잔잔하게 한 뒤에 제자들이 한 말이 있어요. 이분이 누구지? 그동안 누구와 같이 있었어요?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냐? 그러면 그 말은 그전에 그들이 예수를 뭐로 봅니까? 아무리 예수님이 날고기어도 바람과 파도까지 잔잔하게 하는 그런 능력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가 믿는다고 여긴 예수님의 한계는 곧 나의 한계가 전부지요. 나의 한계는 가짜가 갖고 있는 한계, 주께서 말씀으로 가짜를 가짜로 들통 나게 하면 주님은 가짜가 만든 한계 바깥에 계시겠지요. 그래서 안식일 법은 못 지키고 어려워요. 안식일 법은 인간이 지키는 그 범위 바깥에 있기 때문에.
그걸 성경에서는 안식일 법은 완성법이다. 그게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보면 나옵니다. 다른 법은 다 끊어져도 안식일 법은 영원하리라고 돼있어요. 이사야 52장인가에 나와요. 그러니까 인식교가 그렇게 기고만장한 겁니다. 그것 봐. 성경 봐. 딴 법은 안 지켜도 안식일 법은 지키라고 했잖아. 요한계시록 봐. 예수의 계명과 환란에 참여한 자라고 할 때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인 줄 알아? 안식일이야. 이렇게 안식교가 지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같은 선지서는 내용이 경쟁적으로 중첩이 돼요. 이쪽 말씀이 이어지면 따라 붙고 뒤에 오는 다른 말씀이 따라 붙고 그렇게 그것이 다발을 이루어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계시를 그렇게 줬어요. 그들이 편집한 게 아니고. 계시를 그렇게 준 것은 장차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중요한 계시의 내용에 다발로 묶어지게 하는 그 본체, 실체를 위해서 먼저 예언서에서 한 겁니다. 그 자세한 것은 제가 대전에서 요한계시록 강의할 때 할게요.
그래서 어쨌든 간에 경쟁적으로 하나님이 예언을 줬고 말씀을 줬고 계시를 줬다는 말은 우리가 지킨다, 못 지킨다? 지키기 있기, 없기? 없기. 왜냐하면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왠지 가짜 아니고 싶어 하는 거예요. 아까 사마리아인 같은 경우에 제사장, 레위인 등장하고 난 뒤에 마지막에 누가 등장합니까? 사마리아인이죠. 사마리아인이 마지막이니까 완성법, 최종적인 안식 법과 비슷한 기능이죠. 처음부터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게 아니고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이 등장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갖고 있던 한계는 결국 어디에 갇히게 돼요? 제사장, 레위인이 가짜잖아요. 가짜의 범위에 우리가 동승하고 있는 겁니다. 가짜에서 건방지게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건너갈 생각하지 마세요. 횡단이 안 됩니다. 될 수가 없어요. 하여튼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나오면 앞에 제사장, 레위인은 보지도 않아. 에이, 나쁜 사람들, 그것 좀 도와주지.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한 표 던집니다. 표 던지면 같은 편으로 봐주는 줄 알아요?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에게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기가 성립이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인간이 제사장과 레위인 범위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러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람 아니냐고 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자체가 예수님 편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저쪽은 사람이고 이쪽은 계시 기능을 해야 될 새로운 피조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의인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십자가 전에도 뭔가 칭찬받는 사람이 툭툭 나오지요. 백부장, 그리고 십 년 동안 귀신들린 여인, 네 믿음이 옳도다, 이런 것. 나는 개한테 떡을 주러 오지 않았다고 하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맞습니다. 개도 안 먹겠다고 버린 것은 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할 때 그 사람 십자가 피 없어도 구원받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 스스로 의인 돼버리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장 10절 말씀에 어긋나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십자가 없어도 구원된 사람이 중간에 주께서 흘렸어요? 주님이 너무 바쁘게 일하다 보니까 먼저 구원받을 사람을 흘린 거예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도 믿는 자 됐지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 본다고 할 때 소경된 자는 눈만 뜬 게 아니에요. 마음까지 떴어요. 마음의 눈 떠서 이미 예수 믿는 사람 됐어요. 그럼 그 사람은 십자가 필요 없네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할 때에 주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너로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고 내 아버지니라. 그러면 베드로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네요?
이걸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에서 지금까지 이천 년 동안 해결 못했어요. 해결 못하니까 아무도 입을 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해답을 가져야 입을 떼는데 쉬쉬하는 거예요. 너나 나나 모르니까 넘어가자는 식이에요. 해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까 이사야, 예레미야 할 때 예언이 다발을 이룬다고 했지요. 제가 아까 안식일 법은 사물이 아니고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안식일이란 게 완성체로 미리 와버리게 되면 안식 법외에 나머지 모든 피조세계는 안식 법에 예속되게 돼있어요.
창세기 2장 1절에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면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했는데 피조세계, 아담이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 말씀이 실수하네요. 그걸 멍 때린다 하는데 보기에 심히 좋았는데 갑자기 작품이 왜 꼬이지? 취소, 취소. 완성 다시 할게. 그렇게 되는 겁니까? 안식법이 시간에 관한 건데 그 시간은 묵시세계에서 미래가 안에 들어오면 묵시를 위해서 시간이 새롭게 진행되는 거예요.
천을 쳐놓고 천 뒤에 어떤 배우가 지나가게 되면 그림자가 관객들에겐 보이죠. 뭔가 움직이죠. 창세전부터 보이지 않지만 안식 법이 움직이는 거예요. 안식 법이 나중에 사람이 돼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 오시기 전의 인격이 시간이란 요소로 먼저 오는 겁니다. 모든 세계는 시간에 의해서 변화가 일어나요. 뭔가 방향성을 띠게 돼요. 어딜 향하여 질주하게 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늙어 가면 내가 요새가 나이가 들었는가,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시간이 와서 마중을 나가요. 나가게 되면 우리는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됩니까? 시간 때문에. 늙어 죽는 게 소원인 사람 없잖아요. 어떤 사람은 보톡스하고 찝고 올리고 내리고 하는데 백날 올려봐야 90 되면 다 내려가요. 우리만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살아있어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시간을 제공하시는 묵시되시는 주님이 살아있어요. 주님이 살아있으면서 이 세상을 시간으로 관리해요.
그 시간 속에서 누가 탈출이 가능합니까? 뭐 동방삭이? 한 번 넘어지면 삼 년 사니까, 한 번 더 넘어지면 육 년. 3*3=9, 3*4=12, 구구단을 외워라. 구구단을 외자. 3*5=15, 3*6=18. 나중에 18년 동안 살려면 무릎 관절 다 나갑니다. 동방삭이 삼천 년 살았으니까 얼마나 굴렀는지 계산 나오지요. 천 번 굴렀어요. 그건 빈대떡이지 사람 아닙니다. 요즘 애들 말로 떡신 됐어요. 시간을 누가 이깁니까?
시간은, 뜨개질하는 엄마가 시장에서 실을 이만큼 사와요. 애들은 걱정이 늘어져요. 엄마 취미 시작됐다. 저 실 언제 없어질까. 실 뭉치가 없어질 때 나오는 것은 재킷 하나, 조끼 하나, 장갑 하나, 모자 하나 나오지요.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주께서 시간을 솔솔 푸는 거예요. 시간을 풀면 우리는 죽지요. 그래요, 죽어야 돼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겁니다.
죽어가면서 그냥 죽으면 안 되겠지요. 주여, 만들어놓고 왜 죽이십니까? 욥이 하는 말이에요. 죽이려면 아예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되는데 태어나게 해놓고 왜 죽이십니까? 욥의 질문의 딜레마지요. 욥은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 질문을 하는 거예요. 결국 욥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 질문 자체가 중요한 거예요. 왜 죽일 나를, 고생시킬 나를, 고난이죠. 고행, 고생, 같은 말인데 고난 줄 나를 태어나게 해놓고 왜 죽이십니까? 이 질문 자체가 계시라니까.
주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온다고 백부장이 이야기했지요. 백부장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렇게 고백한 고백이 중요해요. 고백이 어디로 모아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안에 다 포함되는 고백들이에요. 그래서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이제는 백부장만 할 질문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될 질문이에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기도하게 전까지는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러다가 기도 가운데 말씀이 생각나서 은혜 받고 난 뒤에는 그래요, 이것도 축복인 것을 몰랐습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그걸 지킨 게 아닙니다. 에스더는 이걸 소급해서 알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미모를 갖고 태어난 것, 그리고 미스 바사나라가 된 것, 그래서 왕비 된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죽기 위한 전초적인 작업이었던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몰아세운 거예요. 그것도 오늘날 우리가 다시 반추해서 내놓아야 될 주님에 대한 고백이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처음에 강의할 때 우리가 못 지킨다고 했지요. 누가 못 지켜요? 내가 못 지키잖아요. 그래서 말씀이란 내가 지키는 게 아니고 나를 부셔지게 하고 그분이 본인이 지킬 말씀을 가짜인 우리한테 준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인 줄 알고 성급하게 나서서 잡아버렸지요. 주여, 이것 지켜서 구원받겠습니다. 십자가 믿으라고? 주여, 믿겠나이다. 예수 믿으라고? 믿어서 구원받겠습니다. 다 가짜입니다. 우리에게 내장돼있던 잠재된 죄의 욕망이었어요.
욥의 고백은 하나님 믿습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욥의 고백은, 저를 왜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그러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욥이 하는 말은 간단합니다. “너희는 몰라도 돼.”
자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안식일 어렵기 때문에 전제 작업을 먼저 해야 돼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숲 속에 숨었어요. 저 잘난 척하는 인간들 어떻게 하는지 보자. 그냥 지나가는 것 보고 나오려다가 레위인 지나가니까 또 숨어 있다가 그냥 지나가니까 그래서 세 번째로 등장했습니까? 전혀 그런 것 아니지요. 그러면 강도 만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인을 미리 예상한 거예요? 그것 아니지요. 그럼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게 아닙니다.
뭐냐? 깨진 거예요. 자기 자신이 깨진 겁니다. 그를 깨트리기 위해서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게 해줬어요. 그 증거가 뭐냐? 자기가 갖고 있는 자기 돈이에요. 강도 만난 사람 돈 아닙니다. 이 사람이 건강한 것이 지금 해야 될 나의 일이 돼버렸지요. 원래는 나의 일이 없는데 주께서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게 함으로써 원래 나가 있었는데 강도 만난 사람으로 이동시킨 거예요.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 생각에 몰두한 게 아닙니다. 지 생각엔 관심 없어요. 강도 만난 사람이 빨리 회복되는지 거기에 관심 있지요. 아메바처럼 자기 속에서 자기가 빠져나와서 예상치 못한 다른 움직임에 자기가 거기에 합류된 겁니다.
그럼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너를 깨고, 지가 깨면 안 돼요.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 불교 돼요. 도 닦는. 그 다음에 누굴 따라 오너라? 나를 따라 오라고 돼있지요. 마태복음에 16장 24절 말씀이나,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이나 하나는 말씀 형식이고 하나는 실제로 예를 드는 형식이지만 다 같은 취지에요. 성경 전체가, 마태, 누가 전체가 같은 취지에요. 가짜와 진짜가 만남으로 가짜는 가짜 됨의 의미가 비로소 소급해서 뒤늦게 발생된 겁니다.
어느 인간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할 사람 없거든요. 다 자기 잘난 척, 모든 행동은 다 잘난 맛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의인이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로 드러나게 되면 우리는 어떤 즐거움이 있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사람은 우습게보지요. 그러면 우리는 욥처럼 너는 몰라도 돼. 왜냐하면 이야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 사람한테는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몰라도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어떤 즐거움이 있느냐 하면, 골프 치는 즐거움? 아니에요. 장작으로 오리 구워먹는 것? 그것도 일시적 즐거움이겠지만 그게 아니고. 애 공부 잘하는 것? 그게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어떤 행동과 그 모든 것이 백날 해봤자 죄가 되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그 고마우신 하나님. 왜 죄가 되게 하십니까? 죄가 될 때 배설물이 될 때 그 똥, 오줌을 누가 주물럭거리겠습니까? 기피하겠지요. 바로 나 자신을 늘 부정하도록 조치해주신 것에 대해서 즐겁고 감사합니다. 그걸 심령이 가난한 자는 참 복이 있구나. 천국이 누구의 것이다? 가난하게 된,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의 것이 되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을 정리하게 되면, 모든 법은 지키기 있기, 없기? 없기.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로 들통 나면 성공이고 아직도 자기 자신에게 희망을 갖게 되면 지옥 갑니다.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가 지옥 가서 한 행세를 보세요. 아직도 누구한데 의미를 두고 누구한테 희망을 겁니까? 물방울만 있으면. 누구 좋으라고 달라는 거예요? 본인 좋으라고 달라는 거예요. 본인 것이 딴 데로 빠지지 않았지요. 그게 지옥이에요. 지옥은 자기 단도리 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옥과 같은 도시가 있어요. ULSAN, 울산입니다. 지금 지옥이 궁금해요? 500원. 지옥 보고 싶어요? 울산에 오셔서 대나무 숲을 거닐어 보세요. 지옥의 까마귀 떼가 거기에 몰려옵니다. 지옥을 왜 그리 부러워하는지. 사람들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있을 때 누굴 부러워했겠어요? 얼마나 부자를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러나 당사자, 부자가 지옥 갔을 때는 누굴 부러워했어요? 얼마나 거지 나사라고 부러웠겠습니까. 그걸 9회말 투아웃에 역전, 반전,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드라마 주인공 되시기 바랍니다.
엄마 품에 있다가 나쁜 여자한테 걸려서 재산 다 뺐기고 나쁜 사장한테 뺐기고 하지만 결국에는 죽은 아버지 재산 다 찾고 자기는 회장님 딸 되고. 역전, [이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 시청자들이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런 반전이 있어야 돼. 황금복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강지처는 어떻게 되는지. 전부 다 역전이거든요.
그러나 그거는 드라마고 본인이 드라마 주인공이라는 걸 왜 몰라요. 본인이 주님께서 하신 드라마의 주인공이에요. 참아라, 부러워하지 말라. 나중에 게임 끝났다고 할 때 누가 웃는 자인지,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10분 쉬겠습니다.
첨부파일 : 20151106a 울산강의.hwp (32.5K), Down: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