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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유튜브(132강, 133강) 부러움, 문화가 된 기독교 151105강의누가복음

유튜브(132강, 133강) 부러움, 문화가 된 기독교 151105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132강

133강

이미아(IP:180.♡.90.76)

15-11-07 20:30

132강-YouTube강의(부러움)151105-이 근호 목사

제 132강, 제목은 ‘부러움’입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 대표적인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 되는 것이 부럽죠. 어떤 의미에서 교회 나오는 것도 보다 더 부자 되기 위해서 나오는 그런 노림수 때문에 나올 경향이 농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복음 16장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고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섬김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데, 같이 비교시켰던 반대가 뭐냐 하면 재물입니다.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이상은,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기고 있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신다면 재물은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고 하시니까 그 내용에 대해서 사람들이 궁금하겠죠. 그리고 난 뒤에 거기에 예를 든 게 있습니다. 예를 든 것이 바로 유명한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지 나사로는 지지리 궁상이죠.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나사로하고 누구를 비교시키느냐 하면 앞집의 부자와 비교를 시켰습니다. 우리에게 누가 부러움의 대상이냐고 묻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거지 나사로 될래? 부자 될래? 어느 팔자가 마음에 드느냐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그리고 둘 다 죽었습니다. 죽고 난 뒤에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갔고 부자는 지옥 갔습니다. 자, 옛날에 한 때 부자였고 한 때 거지였다는 것은 시간만 지나가면 그거는 옛날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느 팔자가 부러우냐? 거지 나사로가 부러우냐? 아니면 부자 됐다가 지옥 불에 간 게 부러우냐?” 고 묻는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취지는 더 깊은데 있습니다. 바로 그 낙원이라는 것, 천국이라는 것,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으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죠. 그 천국이라는 것이 이 지상의 모습에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오히려 나중에 죽고 가서 가게 된 그 지옥이라는 게, 특정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누가 지옥에 가느냐가 중요하거든요.

누가 지옥에 가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았던 자들이 지옥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덧붙여서 해석을 해야 앞에 나오는 13절 구절인 하나님과 겸하여 재물을 섬길 수 없다는 그 내용이 확연해지고 분명해지는 겁니다.

사람은 어떤 추정적인 결과에 대해서 선택을 하라면 지옥보다 천국을 선택하겠죠. 그런데 그 천국에 거지 나사로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상당히 다행스럽게 생각을 할 겁니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가 처음부터 천국 간 것이 아니고 이 지상에서는 그야말로 거지로, 심지어 거지 정도가 아니죠. 죽을 때도 고통가운데 죽었으니까.

남들 보기에 얼마나 참 인생 망가졌고, 세상에 인생을 실패해도 어떻게 저런 나락으로 실패 하냐고 모든 사람의 동정과 천시를 받을 정도로 그러한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거지 나사로에게 가미를 해놓고, 그 다음에 앞집에 부자를 설정해놓고, 자 둘 중에 어느 쪽이냐는 거죠. 사다리타기에요.

눈에 보일 때 마치 우리는 거지 쪽에 가게 되면 마지막 끈이 지옥하고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느껴지고, 그리고 부자는 얼마나 하늘의 복을 받았으면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만큼 부자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부자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다면 그 끄트머리는 아마 천국 갔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우리가 죽고 난 뒤에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기준해서 선택돼야 될 문제죠. 그 말씀이 뭐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이야기를 쉽게 예를 들면 하나님과 반대말은 뭐예요? 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말은 재물이고. 하나님을 못 믿게 만드는 라이벌이 재물이고. 반대로 이야기해서 재물에 신경 쓰지 말고 관심두지 말라고 말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래도 하나님 섬길 마음이 있습니까? 달리 이야기해서 그래도 거지 나사로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십니까? 이 부러움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하나의 유혹거리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이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근데 따먹지 말라고 해놓고 3장에서는 그 나무가 어떤 나무냐 하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지라. 이거 유혹입니다. 이거 부러움입니다.

누구나 끌릴 수밖에 없고 땡길 수밖에 없는 대상이 바로 선악과 나무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했다면 딱 보는 순간 ‘에이, 꼴 보기 싫어!’ 이런 모양새로 아주 흉측한 과일로 만들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면 말씀만 그렇게 하실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라도 진짜 진저리 날 정도로 외면하게 만드는 그런 과실을 달아놓았으면 사람들이 아예 안 따먹을 가능성이 점점 더 높아질 건데, 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까지 해놓고 왜 따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 주의 일에 영광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하나님하고 인간하고 어떤 거래를 하거나 흥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나무를 심어놓고 그 다음에 다른 요소를 불러내요. 이게 유혹될 만한 것을 놓고 다른 것으로 불러내는데, 그 다른 것이 누구냐 하면 악마, 뱀을 그 덫에 걸리도록 한 겁니다.

이미 인간을 이렇게 창조할 시점에 하늘에서는 예수님과 미카엘과 악마의 전쟁이 있었고, 그 전쟁의 여파로 뱀은 이 지상을 선택해서 지상에 왔습니다. 그렇다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는 저주해야 될 존재에게 저주하기 위한 근거로써 이 말씀을 줬다면 그 궁극적인 저주의 대상은 악마였고, 이 악마가 인간에게 유혹으로 작용해서, 자기편으로 삼아서 악마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한 겁니다.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선악과로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모든 것이 인간의 운명이나 인간의 팔자라는 것은 사람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있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니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해서 죽음의 의미를 던져준 것은, 하나님께서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이 죽음을 알맹이로 삼아서 핵심으로 삼아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과 안 따먹은 상태에서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팔자, 자기 미래, 자기 운명이 자기 힘으론 어쩔 수 없다는 지경에다가 푹 잠기게 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조치에 의해서 구원이 주어지게 되면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주님의 영광만 돌리게 되죠.

그렇다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자기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가 되고 허약한 입장이라는 것이 여기서 분명히 정립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에서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는 어느 쪽을 부러워하지 말고 나사로 쪽을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렇게 할 위인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고 단정 짓고 거지가 거지 된 것은 자기의 믿음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앞으로 모든 영생이라는 것도 이처럼 우리의 현재 입장을 분명히 알게 해주시고, 이러한 이길 수 없는 부러움과 유혹을 능가해서 주님의 용서하심으로써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미아(IP:122.♡.169.34)

15-11-21 20:17

133강-YouTube강의(문화가 된 기독교)151105-이 근호 목사

이번 강의는 제 133강, 제목은 ‘문화가 된 기독교’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게 되면 보통은 자연스럽게 태어난다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연 속에, 창조세계 속에 인간이 포함이 되기 때문에, 인간도 넓게는 자연에 포함이 됩니다.

근데 인간과 다른 자연물과의 차이점이 뭐냐, 세상적인 그 이성적 안목에서는 이렇게 나눕니다. 사자나 지렁이나 원숭이나 이런 것들은 문화가 없고 인간은 문화를 이룰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렇게 정리합니다. 그런데 문화를 이루는 데는 무엇이 동원되는가, 바로 언어가 동원되고 그래서 마음들이 통합이 되고 결집이 되어서 힘을 합쳐서 문화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 문화라는 것을 인간들은 그렇게 정당화를 하는데 이 문화가 성경에 있느냐, 이 문화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 없는데 이 문화라는 것을 사람들은 무슨 자부심처럼 느끼거든요. 왜 자부심을 느끼는가 하면,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는 요 대목을 사람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서 문화의 통치, 또는 문화 혁명을 이루라는 명령이라고 그렇게 언급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을 주셔서 그리 된 거예요. 복이라 하는 것은 거절한다고 안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이라는 것은 강제력이 있어서 그냥 확장하는 거죠. 그 예가 뭐냐 하면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새나 짐승 만들기도 마찬가지죠. 하늘에 궁창을 만들어놓고 새들에게 복을 주시매 그 새들이 그냥 복을 받아서 확장하는 것이고 팽창하는 것입니다. 새들이 뭐 의논한 것이 아니에요.

땅에 있는 물고기도 마찬가지에요. 복을 주시매 물고기가 가득한 겁니다. 복이라는 것이, 이건 거절한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복을 받았으면 이건 어쩔 수 없이 복을 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고 복의 완성도를 향하여 질주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은 우리가 거부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명령은 그런 게 아니죠.

근데 여기에 나오는 이 복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문화 명령이 아니고 복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지상을 상대로 복을 퍼트린다.’ 이렇게 간단히 정리됩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다면 복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저주가 펼쳐지죠. 그럼 저주는 뭐냐, 창세기 3장에 보면 죽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부터 시작해서 사람들이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땅은 어떤 세상이냐, 저주의 세상이죠.

저주의 세상에서 문화를 일으킨다? 그럼 그 문화가 긍정적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문화를 인정해줄까요? 결코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다보면 나중에 죽는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그 모든 면면이 죽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몸부림치는 거예요.

마치 지옥에 가면 구더기가 꿈틀거리듯이, 살아보려고 애를 쓰듯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인간 하나하나가 구더기가 되어 가지고 안 죽어 보려고 사는 겁니다. 살고자 하는 그 모든 요소에 저주가 끼어들지 않은 대목이 없습니다. 다 끼어들어요. 그게 인간의 불안을 조성합니다. 아무리 성공해도 성공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혹시 이 성공이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불안이 연이어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그런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된다는 말은, 인간은 뭔가 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자신의 행위에서 나온 업적가지고 어쨌든 간에 더 수명을 연장해보려고 애쓰면서 몸부림치는 그러한 지경에 있다고 보면 되죠. 그러니까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그 믿는 대상이 문화라는 겁니다.

결국 이 문화라는 말은 무엇과 통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본래의 복이 담긴 그 계시가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이 건전한 문화도 괜찮지 않느냐? 이 건전한 문화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한 요소가 빠져버려요. 그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목사라는 겁니다.

어떤 목사는 목회를 할 때, 그 목회 하면서 ‘나는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하는 그러한 취지가 자기 목회에 담겨있을까요? 담겨있지 않죠. 그렇다면 그건 목회가 아니고 문화입니다. 문화는 유사계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았는데 자기들이 살아보려고 애쓰면서, 자기방패막이, 자기를 커버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면서 내놓는 그 업적, 그게 바로 문화인데 기독교도 문화에 속하는 겁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고.

인간의 행함이라는 것은 전부다 문화 만들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 만들기가 되게 되면 그 만든 당사자는 절대로 자기를 저주받아 마땅함으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은 문화가 계시의 차이점이 뭐냐, 그것은 구약의 레위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전을 만들고 성막을 만들고 옷을 만들 때는 사람들은 그것을 문화로 생각해요. ‘아! 탤런트talent가 많아서, 재주가 많아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러한 제작물, 문화물을 만드는구나!’ 하는데, 그 만들어진 성막 자체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까요?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죽음이 빠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실제로 죽음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징표가 나오는 식으로 레위기에 나오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의 법을 그런 식으로 활용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안식일이 문화입니까? 안식에 나무를 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어떻게 보면 문화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안식일의 위반자가 만약에 내 혈연관계에 있는 내 자식이고 내 딸이고 내 아들이라면, 내 남편이고 내 아내라면, 본인이 돌로 쳐 죽일 정도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내 자식 키우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행함을 집어넣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문화라는 것은 뭐냐, 탁 깨보면 공들였던 나의 행함이 거기에 수북이 담겨있습니다. 문화는 나의 행함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을 안 믿을지언정, 자기가 만든 업적을 누가 비난한다든지 누가 공격하게 되면 참지 못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비난해도 그거는 참습니다. 누가 예수를 비난해도 참습니다. 하지만 내가 세운 내 교회, 내가 개척한 교회를 누가 공격하면 그 목사는 아마 참지 못할 겁니다. 저주받으라고 그런 욕설이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우리는 사도 바울의 편지, 로마서 9장에서 나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왜 우리는 지금이라도 주님과 끊어져도 마땅한 존재인가를, 그것을 자인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내가 어떻게 행하냐에, 내가 어떤 경건한 문화를 내놓느냐에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우리 몸 자체가 주님의 계시에 결과물이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결과물이라면, 고 결과물을 탁 깨놓으면 뭐가 날아가느냐, 내가 행하였던 모든 문화적인 요소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모든 것이 죄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우리의 내부가 주님 앞에 감사로 이어지게 되어야겠죠.

‘문화가 된 기독교’ 이것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만든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인들이 모인 교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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