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식일 151104우리교회마태복음

안식일 151104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안식일(창세기 2:1-3)

이근호

15-11-04 21:19

안식일

2015년 11월 4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3
(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안식일 제정으로 창조를 마감하셨습니다. 이로서 피조물은 그 존재로서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우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피조물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이 됩니다. 즉 안식일+존재물=창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이 안식일의 의미는 빠지고 눈에 보이는 자신의 몸체를 가지고 ‘신의 창조물’이라고 우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의 창조물에서 탈락이 됩니다. 사실 이런 존재가 신이라고 말하는 모든 것이 오류이요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물에 대한 관리를 안식일법 취지를 개입시키시면서 하시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이 세상은 안식일 취지가 담겨 있는 피조물과, 그러지 않는 피조물로 구분되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들도 나름대로 안식의 취지를 자기네들 공동체에 담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안식일 지키는 데 철저를 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 현실이 자기네들 공동체를 지켜주는 현실인양 오해를 하고 됩니다.

마태복음 12:8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범죄가 빠져버린 피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는 안식일을 가지고 새창조에 나서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안식일 완성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안식일 완성과 충돌지게 됩니다.

안식일 차원에서 새 창조에 나서는 원리는 구약 전반을 일관되게 흐르면서 그 깊이를 차츰 더해갑니다. 처음에 등장하는 안식일 원리는, 천지창조를 근거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한 날로 지켜라. …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육 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칠 일째 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는 안식일에 복을 주고,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하지만 신명기에 들어가게 되면, 더 내용에 깊이 더해집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러한 깊이가 신약에 이르면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께서 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출애굽기에 있어 안식일이 그냥 ‘존재함’ 자체를 기념하는 안식일이라면, 신명기에서는 ‘어린 양의 죽음’, 곧 ‘존재의 죽음’의 의미가 가미됩니다. 왜 안식일에 죽음에 가미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충족한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위하여 세상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이는 피조물 자신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더나아가서 인간이 자신의 번영과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안식일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안식일 그 자체의 취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안식일이 주어졌다면 인간이 스스로 죽기 위해 안식일을 지킬 리는 만무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안 죽기 위해 안식일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안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여기지만 실은 ‘자기만 살고 남들은 다 죽는 것’이 죽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진짜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을 죽이고 나머지 인간들끼리 덜렁 남아있어 봤자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으로 간주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이 ‘안식일법’이 죽음을 통해서 인간 세계에서 빠져 나가고 나면 나머지 세게는 진정 안식일법이 없는 피조세계가 되니 그것이 곧 혼돈이요 죽음의 세계 그 자체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철저한 안식일 중심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구약에 나오는 안식일을 철저하게 신생활에 반영했습니다. 정확한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날을 보내는 방식도 치열하게 완벽을 기하려고 했습니다. 이사야 58:13-14에 보면,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안식일법도 모르고 십일조법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니 졸지에 그들은 의인이 되어 천국백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들 이방인에게 주어진 안식일법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에서 나온 안식일법의 완성입니다. 곧 하나님 차원에서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따라서 구원된 이방인들은 오직 예수님의 그 죽음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죄인됨을 근원적으로 소급해서 인정합니다. 죄가 발생되는 곳에서만 의가 생겨납니다. 유대인들은 죄인이 되고자하기 보다는 안식일법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의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메시아’와 충돌을 야기했습니다. 반면에 성령받은 이방인들에게 있어 구원은 전적으로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효과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유대인인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작용했던 의를 차라리 배설물로 여기고 과감하게 털어버리고 아낌없이 버립니다.

진짜 안식일법이신 예수님이 안 계신 곳에는 가짜 안식일 지키기, 주일 지키기만 난무합니다. 예수님을 추방하고 남는 곳이 인간들의 자기 경건 자랑 뿐입니다. 쓰레기 같은 힘을 끌어모아 구원에 이르고자 시도하게 되고 이런 죄로 인하여 그 현장에서 복음은 반복적으로 학대받고 무시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 속에서 참된 안식일은 성도 속에서 현실화되어 여전히 작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만족스러워 하시는 안식일의 완성은 십자가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를 통해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교회란 바로 예수님의 이름만 자랑하는 현장입니다.(고전 1:3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처지와 현실이 우리 자신의 행복과 출세와 성공을 통한 자기 존재 과시가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1-05 06:42

11강-창 2장 1-3(안식일)1511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장 1-3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조의 완성, 창조는 안식일이 나타남으로서 마무리가 됩니다. 이것은 안식일 따로 있고 창조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과 결합되지 아니하면 아직 창조는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과 창조와 결합시키는 것이 인간입장에서는 상당히 난해합니다. 왜냐하면, 코스모스하고 안식일하고 어떻게 결합시키지요? 보통문제 아니지요? 인간하고 안식일하고 결합시킨다고 한다면 ‘그까짓 것 안식일 지키면 되지 않는가? 일곱째 날에 쉬면서 예배드리면 결합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미 실패한 경우가 역사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피조세계, 하늘의 별과 안식일을 어떻게 결합시킵니까? 결합되지 아니하면 창조물 취급을 못 받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미 만들어진 것들만 가득 모여 있어요. “혹시 안식일에 대해서 아십니까?”라고 물었다면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런 질문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거지요. 안식교인들 빼고는 예의에 어긋나는 겁니다. 그런 것은 문제 삼지 말아야 하고 그런 이야기는 하지도 말아야 돼요.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안식일을 빼놓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안식일을 제켜두고 우리끼리, 신이 만든 우리끼리 모이자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걸 거부하고 피조물과의 만남에서 안식일을 집어넣어서 만나자는 겁니다. 안식일의 의미를 집어넣어서 만나야 하나님이 만든 합당한 피조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거지요. 안식일을 경유해서 안식일 안에서 만나야 되는데 안식이라 하는 이것이 시간에 속하잖아요. 안식일은 시간에 속하고 나는 내 몸에 속하고, 몸과 시간의 만남, 몸과 시간을 어떻게 조인트를 해야 할 지 난감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껏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와 주는 것으로써 조인트가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유대인들에 의해서 실패로 끝났어요.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결합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일주일마다 돌아오는 날에 교회 나와 주는 그것은 처음 창조의 그 안식일과는 연결이 되지 않고, 그래서 안식일이 빠져버리면 하나님이 처음 창조했던 그 창조의 본래요소가 빠진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피조물이거든요.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는 대로 안식일은 집어넣어야 본래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그렇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데 안식일은 들러붙지도 않네요.

월, 화, 수, 목……, 안식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시간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요. “안식일을 위해서 내 몸 하나 희생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안식일이 뭔데 내가 그 안식일에 내 목을 내놓는다는 말입니까? 말이 안 되거든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상당히 난해한 문제가 되고 마는 겁니다.

“같은 세상에 있는데 안식일을 경유해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는 멘트를 우리가 사람들에게 날려버리면 이 세상은 둘로 나눠져요. ‘안식일을 빼고 이야기합시다.’와 ‘안식일이 완성이니까 그것을 집어넣어야 창조의 피조물답습니다.’ 하는 쪽, 두 종류로 인간이 나눠져 버립니다. 구약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강조한 것이 뭐냐? 유대인들이 이방나라 사람들에게 전도를 할 때 두 가지를 지키면 유대교에 들어와서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쳐주겠다고 한 것이 있어요. 하나는 뭐냐? 할례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이방인이지만 임시적으로 넣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할례를 행하도록 하지 않았다고 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싫어하면서 사도바울에 반대했던 겁니다.

또 한 가지가 뭐냐? 조건이 안식일을 지키는 조건이에요. 그런데 할례를 행해봐야 이것은 마음의 할례가 아니거든요.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봐야 인간의 전통과 윤리에서 나온 안식일 지키기이기에 이것은 안식일 지키지도 못한 것이 돼요. 안식일을 유대인들이 지키겠다는 것은 진짜 안식일 지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흉내 내는 겁니다. 인간 쪽에서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이것은 불안정한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그냥 형식으로 할례라는 수술을 할 수는 있지만 범죄 한 인간에게는 마음의 할례가 성사될 수가 없어요. 마음이 이미 틀어졌기 때문에 안식일 지키는 것도 원래 하나님이 주신 안식일에 근처도 안 갔습니다. 안식일 지키려면 예수님처럼 지켜야 돼요. 그런데 예수님 같은 마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의인은 주님밖에 없는데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겠어요?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안정 속에 있는 겁니다.

흔히 부부싸움을 하면 각방을 쓴다고 하는데 이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단칸방에 사는 부부는 싸워도 각방 쓸 일이 없어요. 갈 데가 없잖아요. 이것이 안식일 지키는 하나의 힌트가 돼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이 갖고 있던 원리원칙에 의해서 피조물들을 운명적으로 지배하고 묶어버렸어요. 단칸방이에요, 단칸방. 피조물이 안식일을 알든 모르든 관계없어요. 안식일이 담고 있는 내용이 피조세계를 계속해서 몰아넣어서 마지막까지 이끌고 가시는 겁니다. 단칸방이니까.

인간은 안식일을 못 지킨다. 그러나 창조는 안식일의 내용을 함유해야 된다. 그 둘 사이에 길은 없습니다. 그러면 길은 어떻게 내는가? 안식일 쪽에서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 안식일이라는 길을 내면서 우리에게 접근하고 찾아오시는 거지요. 안식일 쪽에서 길을 내면서. 그것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 쪽에서 안식일의 완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되는가? 이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이 내가 하룻밤 자고 나면 만들어지는 현실, 내가 재구성하는 그 현실이 진짜 현실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구성되는 현실은 주님이 구성하시는 주님의 현실이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현실이 아니고 주님께서 안식일을 확대시키는 현실로서 그 현실감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겁니다. 단칸방이니까.

‘나는 교회도 안다니니까 안식일 같은 것 몰라.’ 그렇게 살든 어쨌든 상관없이 저벅저벅, 이미 안식일 주인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쳐들어왔다면 이 세상은 안식일원리에 의해서 누가 뭐래도 적용을 받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규정을 할 때 안식일의 그 내용이 점점 더 폭이 깊어지면서 이스라엘역사가 진척이 된다 해도 같은 말이 돼요. 처음에 안식일이 등장할 때는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했다가 점점 더 깊어지게 되면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했던 그 사건을 함유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기억해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그 내용이 더 깊어지고 구체화되는 거예요. 왜? 그만큼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신 거예요. 그러다가 신약에 오면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나를 믿으면 네가 의인이 된다.” 그쪽으로 계속 가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세상은 주님의 안식일취지를 확대시키는 현실이지 내가 나 살기 위한 적당한 현실은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판단착오를 한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볼 때 착오를 일으킨 겁니다. 판단미스에요.

창세기 2장 1절에 분명히 나와 있거든요. 천지를 창조하시고 안식일을 만들었다. 만드신 분이 우리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만들었으면 그 안식일의 원리원칙이 어디 가겠습니까? 그 피조세계 속에 함께 엮이고 결합되어 있는 겁니다. 피조물 따로 있고 안식일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세계의 모든 움직임이 영글어서 안식일의 취지를 표현해주는 겁니다. 안식일의 원리 속에서 우리가 헤엄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헤엄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안식일이 점차 확대되어가는 그 내용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하신다면, 천지를 창조했을 때 기념했던 그 시간이 내용이 더 깊어지는데, 종 되었던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게 되면 거기에 뭐가 포함되는가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할 때는 십자가의 죽음이 포함돼요. 그래서 저벅저벅 다가오시는 그 안식일의 주인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옵니다. 그 안식일 안에는 어떤 상실, 누락, 죽음이라는 것이 담겨 있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서 천지를 창조할 때는 안식일을 내다보면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마지막 제 7일을 내다보면서 천지를 창조했는데 이것이 신약에 와서 내용이 완전히 폭로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해서 천지가 창조된 것이 돼요.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십자가의미를 알면 영생이고 천국가고, 십자가 모르면 지옥 가는 겁니다. 왜? 처음부터 그랬었으니까. 처음부터 모든 피조물은 안식일의 취지를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네가 범죄 했다.’는 것을 지적할 때는 안식일 가지고 지적하고 안식일 안에는 어떤 분의 죽음이 담겨 있기에 죽음 가지고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만 의가 있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의가 없습니다. 중립지역에서 착한 일을 더 보태고 첨가한다고 해서 의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대차대조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 댁 보일러가 사흘간 고장이 나 있었어요. 우리 집 보일러 고장 난 것보다 걱정이 더 돼요. 노인이 사는 집이니까. “많이 춥지요?” 하면 시어머니 값 한다고 겨울잠바 껴입고 계시면서도 “하나도 안 춥다.” 하는 거예요. 예의 차린다고요. 가보니 집이 써늘한 거예요. 토요일도 전화 못하고, 일요일도 못하고 월요일 아침 9시 되자마자 전화해서 보일러 고치는 사람한테 연결했거든요. 보일러기사가 어머니 댁에 갈 때 저나 제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가야하는데 이 기사가 전화도 없이 그냥 갔거든요. “할머니 보일러 고장 났다면서요?” 이미 제가 우리 어머니 치매환자라고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듣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갔어요. 우리 어머니가 “우리 집 아무 문제없다. 안방 뜨끈뜨끈하다.” 그렇게 한 거예요. 살고 있는 주인이 아무 문제없다고 하고 언뜻 봐도 문제없어 보이니까 그냥 돌아가 버린 거예요.

‘왜 우리 어머니 댁 보일러를 고장 나게 하셨을까?’ 생각하니까 복음입니다, 복음.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수용을 해줘야 돼요. “나 죄인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목회자지만 목회하는 족족 죄가 됩니다.” 이래야 그 목회자가 구원을 받아요. “내가 선교사인데 선교하는 족족 죄만 남발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줘야 그 선교사가 구원을 받아요. 지금 보일러가 고장 났거든요. 지금 수리공이 왔잖아요. 엄살 피워가면서 좀 오버해가면서 “얼어 죽을 뻔 했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래야 고장 난 보일러펌프를 고쳐요.

우리 어머니 하는 말이 낯선 사람이 찾아오니 겁이 나서 “우리 집 아무 문제없다. 안방이 뜨끈뜨끈하다.” 뭐가 뜨끈뜨끈해요. 써늘하니 냉방이 되어가지고. 아침에 가 보면 옷 다섯 개나 껴입고 있어요. 그게 뜨끈뜨끈 한 겁니까? 주님께서 왜 오셨겠어요? 부처나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도사들, 위대한 사람들, 똑똑하고 덕성 있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데 예수님이 왜 오셨겠습니까?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김수환 추기경, 성철스님, 그렇게도 사람이 많은데 주님이 왜 오셨겠어요?

어느 누가 와도 근원적으로 ‘나는 죽어도 싸다.’는 것을 유발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은 누가 오게 되면,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남한테 자랑 질하기 바빴지 ‘죄인입니다.’ 하는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와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알겠지요? 교회가 있어도 구원이 안 되는 이유를 알겠지요? 자기 잘난 체 하고 자랑 질 하려고 교회가 모인 거예요. 연세 많아서 돌아가실 것 같으면 “얘야, 한평생 산 것이 죄인이다.” 이 한마디만 하면 얼마나 좋은 권사님이십니까?

사람들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신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점을 모르는 그것도 몰라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내가 죽는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바꿔버려요. 나만 살고 남들은 다 죽는 그것이 죽음입니다. 얼마나 외롭습니까? 나만 살고. 인간은 죽어도 안 죽거든요. 인간은 죽어도 안 죽어요. 왜냐하면 죽고 난 뒤에 자기가 어디로 갈 생각만 하기 때문에 그 생각이 살아 있는 한 자기는 영원히 살아 있어요. 죽고 난 뒤에 귀신이 되어서 ‘나는 지금 어디에 가 있지?’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잖아요. 그게 바로 살아 있는 거예요. 자기의식이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아픔을 느끼는 것은 죽은 사람이 아니고 산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보세요. ‘나는 이제 어떻게 살까?’ 갑자기 살 마음이 뚝 떨어져버려요. 그게 죽음이에요. 그 논리를 좀 더 전개시키면 이렇습니다. 인간들끼리만 남고 진짜 생명이 죽은 것이 죽음이에요. 예수님 떠나보내고 인간들끼리 남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걸 죽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예수님 없는 곳, 다시 말해서 피조세계, 창조세계에 안식일로 오신 분이 빠져 있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제 죽음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이게 죽음이에요. 천지창조 할 때 마지막 안식일이 있어줘야 피조물이 생명을 얻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이 빠져버리면 안식일이 빠진 상태의 피조세계는 헐떡헐떡, 숨은 쉬지만 나중에 흙이 되고 죽어버립니다. 그게 죽음이에요. 안식일 없는 창조세계는 창세기에는 없습니다. 안식일 없는 창조세계가 없다는 그것을 유대인들은 갖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받아서 들은풍월이 있다 보니 그런 겁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부지런을 떨고 열심을 내네요. 그것은 에스겔에서 또는 예레미야에서 언급을 했거든요. “너희들이 안식일을 안 지켜서 망했다 안식일을 지켜라.” 특히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너희들이 안식일에 놀았는데 안식일은 금식하고 회개하는 날이다.” 하니까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곧이듣고 안식일 날 구제하고 회개하면서 그렇게 하는 그것이 안식일 지키는 것인 줄 알았어요.

안식일 법을 지켜서 나오는 그 의라는 것을 생산하고 작동하기 위해서 본인들이 안식일 법을 나름대로 자기들끼리 지키면 안식일 법 지켰다는 것이 성립되는 줄로 오해하는 겁니다. 오인한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셨잖아요. 그런데 그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분을 죽음으로써 내보내니까 남는 것은 뭐냐? 가짜 안식일 법만 남았어요. 가짜 안식일 법이 남아 있으니까 유대인에게는 그냥 안식일이고 기독교에서는 주일이 된 거예요. 주일 성수가 여기서 나온 거예요. 주일성수가 가짜입니다. 주일이 뭔지, 안식일이 뭔지, 십일조가 뭔지 전혀 모르면서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있으니까 그 바탕이 백날 역사를 뜯어고쳐도 마찬가지잖아요.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방식은 뭐냐? 안식일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령의 세례를 줘버려요. 안식일도 모르고 십일조도 모르는 사람에게, 율법이 없는 자에게 성령세례가 주어져 버리면 이것은 율법 없이 의인이 되어버렸네요?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안식일을 지켜야 되고,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십일조라는 것은 없으니까) 여러 가지 헌금도 해야 되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된다.”고 했는데 이방인들은 성령이 오니까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오실 메시아가 주님 맞지요?” 이런 고백을 하게 되니 졸지에 의인돼버린 거예요.

마치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냥 연못가에 있었는데 병이 나았을 때 주변 병자들 보기에 얼마나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겁니까? “너 어디서 병 나았어? 물 동할 때 너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병이 나았지?” 그 병이 나은 경로를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안식을 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가고 의인이 되어서 영생을 얻는다면 뭔가 우리가 고수하는 그 경로 말고 다른 경로가 있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3장에서는 “율법 외에 한 의”라고 한 거예요. “율법 외에 한 의.”

그러면 율법 외에 한 의를 지키면 되지 않는가? 율법 외에 한 의는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 그걸 지켜버리면 율법 외에 한 의를 믿는 게 법이 되고 마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으라는 것은 법이 아닌데 이게 법으로 이해해서 예수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지옥 갑니다. 십자가 믿고 지옥가고, 예수 믿고 지옥가고, 언약 믿고 지옥가고, “성령을 받아라.” 했다고 성령 받으려다가 지옥가고……. 그렇게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마션>이라는 영화가 있거든요. ‘마션’이란 화성사람, 화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화성에 우주비행사가 혼자 남았어요. 나사에서 구출하러 갑니다. 화성에 남겨둔 상승선이 있어요. 화성궤도까지 올라가는 상승선인데 화성에 미리 놓아둔 것이 있거든요. 화성기지에서 그 상승선 있는 곳까지 이동해서, 그 상승선을 타고 올라가서 지구로 귀환할 우주선과 만나야 됩니다. 우주선에서 화성의 상승선에 이런 지령을 내립니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 것. 우리가 다 조종한다.” 화성의 우주선에서 상승선을 조종하면 상승선에 탄 사람은 아무것도 안합니다. 오히려 상승선의 무게를 있는 대로 줄여요. 무거우면 원하는 도킹지점까지 올라오지 못한다고.

복음하고 똑같아요. 다 버리는 거예요. 다 버림. 다 버리고 수동적으로, 피동적으로 위에서 조종하게 되면 도킹에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예요. 왜? 주님의 자기과제고 자기숙제기 때문에. 요한복음 6장의 말씀처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도킹하는 것이다. 만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생명이 없는 세계, 그 화성에서 그 우주비행사는 혼자 남아 있어요. 그 부동산 전부 자기 거예요. 얼마나 신날까요? 아닙니다. 거기서 못 살아요.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본향으로 가야 돼요. 지구로 귀환해야 됩니다. 귀환할 때는 수동적이에요. 피동적으로 해야 귀환돼요. 이미 돌아갈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처음 천지를 창조하고 안식일을 만든 그 본래목적은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라고 천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분이 그 내용을 담고 이 세상, 화성 같은 땅, 죽음밖에 없는 이 세계에 왔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지금 지구가 본향이라고 여기고 지구에 생명이 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주님께서 과연 그런지 안식일 법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가짜 안식일을 지키는 거예요. 가짜 안식일을 지키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가짜 안식일 법을 지키기 때문에 누구를 배척하느냐 하면, 진짜 안식일의 주인을 죽음으로 배척하는 동시에 본인들은 진짜 안식일의 주인을 죽음으로 내 보냄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지옥이란 사실을 노출시켜서 까발린 셈이 되어버렸어요.

<마션>이란 영화에서 휴스턴의 ‘나사’에서는 오직 하나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출작전, 구출작전이에요. 그 화성의 비행사가 나사와 교신 중에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지도 모른 채 빨리 자기 구조하러 안온다고 욕을 막 한 거예요. 욕 했다고 해서 구출 안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십계명 어기고 범죄 했다고 해서 주님이 구출작전을 취소되거나 “에이, 잘 먹고 살아라.” 하고 손 놓고 가시는 분이 아니에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를 벌 줄 수밖에 없어요.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영어로 ‘in spite of’,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강력한 십자가의 능력으로 끌어당기게 되면 주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먼저 가 계신 어떤 그곳에 가요. 우리가 아는, 죄인이 생각하는 천국 아닙니다. 죄인이 생각하는 천국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니까 그런 곳이 아니에요.

주님이 가신 곳이 있는데 그걸 처소라고 해요. 주님이 가신 그 처소, 베드로도 함부로 가려다가 주저앉은 그 곳, 그 처소로 가는데 그것은 오직 율법의 완성, 안식일의 완성, 성령이지요, 십자가지요, 율법의 완성의 코스만 밟아서, 안식일의 완성을 통해서 가게 되는데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면서 제시하는 것이 뭐냐?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그 십자가복음을 성령께서 앞장세워서 그들에게 다가와서 그들로 하여금 수동적으로 만드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만들면서 그들이 갖고 있던 의를 전부 다 버리게 만들지요. 쉽게 말해서 흔한 말로 까인다고 하거든요. 실컷 까이면서 너절하게 다 버려요. <마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상승선 안에 있던 물건들 다 버려요. 화성에 다 던져버립니다. 온갖 잡동사니 다 버려요. 자기가 입은 우주복 외에는 다 던져버립니다. 심지어 상승선의 무거운 뚜껑도 제거해버려요.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그 던져진 것들을 보게 되면 그동안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고 나름대로 의인인체 하면서 자기를 신앙인 척, 경건한 척, 성화된 척, 거룩한 생활하고자 투자한 모든 것, 그동안 십일조 한 것, 주일성수 출석한 것, 거기에 오후예배까지 나오고, 새벽기도 나오고 성경 쓴 것, 방언 한 것까지 이 모든 것을 다 던져 버려요. 우리교회게시판에 어떤 분의 질문에 답한 것처럼 “차라리 주 앞에서 탕자가 되고 차라리 불의한 청지기가 되어라. 그것이 이 세상의 어떤 자보다 더 지혜롭다. 부처, 소크라테스, 철학박사, 공자, 맹자, 그것보다 더 지혜로운 자는 불의한 청지기다.” 따라서 “나는 생명 없는 곳에서 태어나서 줄곧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법을 지킬 가능성은 없습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 오히려 우리에게는 그동안 몰랐던 죄가 더 발산됩니다. “그 십자가 능력 앞에 우리는 수동성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의 피동적인 존재로 남게 하옵소서.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 없지만 오직 자랑거리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성경에서는 조심스럽게 그걸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안식일의 완성, 십자가에 포함된 사람이 진짜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정말 기뻐하시고 “정말 보기에 심히 좋았다.”에 편입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미처 몰랐는데 십자가에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더러운 세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하여주시니 그 더러운 세계가 뭐 그리 탐이 나서 거기서 출세하고 싶고 유명하고 싶어 얼마나 우리가 몸을 사렸는지, 그 세계에서 실패할까봐서 얼마나 두려워하고 스트레스 받았는지. 이제는 주님 바라보면서 그런 근심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5,017 우리교회 천사의 권세 151108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8
15,016 설교 천사의 권세(고린도전서 11:7-12)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8
15,015 자유게시판 133강-YouTube강의(문화가 된 기독교)151105-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5-11-07
15,014 자유게시판 132강-YouTube강의(부러움)151105-이 근호 목사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7
15,013 강의 나는 가짜다 151106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15,012 묻고답하기 십일조란? - 최고관리자 15-11-06
15,011 강의 예외자 151105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15,010 강의 유튜브(132강, 133강) 부러움, 문화가 된 기독교 151105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6
15,009 자유게시판 서울 의존교회151009a,b (이상하자)―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1-05
15,008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5. 10. 23) 1강 마가복음 최고관리자 15-11-05
15,007 자유게시판 11강-창 2장 1-3(안식일)151104-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1-04
열람 ➜ 우리교회 안식일 151104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1-04
15,005 우리교회 [일반] 십자가마을이 좋은 이유-송민선 성도님의 글 [일반] 최고관리자 15-11-04
15,004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이 좋은 이유 - 최고관리자 15-11-04
15,003 묻고답하기 목사님 안녕하세요? - 최고관리자 15-11-03
15,002 자유게시판 목사님, 성령에 관한 질문입니다.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5-11-03
15,001 묻고답하기 "삼위일체" - 최고관리자 15-11-03
15,000 자유게시판 55강-신 9장 18-21절(진노 앞에서의 기도)151101-이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1-01
14,999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2 - 힘과 기계 잠언 최고관리자 15-11-01
14,998 자유게시판 63강-고전 11장 2-6절(남자와 여자)151101-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1
14,997 우리교회 진노앞에서의 기도 151001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1-01
14,996 우리교회 남자와 여자 15110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1
14,995 설교 남자와 여자(고린도전서 11:2-6)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1
14,994 우리교회 예수님이 하신 일 151101 - 최고관리자 15-11-01
14,993 묻고답하기 천사의 권세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1-0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