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창 1장 28-31(인간의 할일)151028-이 근호 목사
10강-창 1장 28-31(인간의 할일)151028-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93)
10강-창 1장 28-31(인간의 할일)15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8-31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1:28-31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우리가 이 본문에 대해서 미리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터무니 없는 생각입니다. 왜 그런가? 오늘 본문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여기 나오는 인간에 대해서 언급한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인간에 대한 내용이거든요.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줬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내 자신에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의 생각해놓은 자기인간관, 자기인간성이 있을거예요. 그것과 성경에 있는것과 대조를 해보시고 비교를 해 보세요. 우리가 내가 생각한 인간관을 원하지 성경의 인간관에 대해서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29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리가 먹고 싶다.’ 또는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 소고기가 먹고 싶다.’ 소고기가 먹고 싶은 나와 소고기를 허락지 않는 창세기 1장 29절의 그 나와 비교할 때 우리는 어느 쪽을 선호하겠느냐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나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중요한데 왜 하나님은 사전에 나한테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너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왜 허락도 없고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십니까? 나는 밀어붙이는 그 하나님의 인간관, 인간성이 별로 마음이 당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현재 내가 평소에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거예요.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이것이 철학인지 성경의 복음인지 구분하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마감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철학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모든 일의 완성태거든요. 완성, 최종적인 해답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최종적인 해답을 해답으로 설교시간에 제시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 설교자가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 철학을 퍼뜨린 것이 돼요.
그러면 그들이 왜 그런 철학을 원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게 아니에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이 있는데 그것을 신 당신이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그것을 요청하러 온 거예요. 따로 자기모델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모델을 원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은 치워버립니다. 내가 원하는 모델이 따로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내가 되고 싶지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 싫어요. 시집 안간 아가씨들 세워놓고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하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이 너무 세다 싶으면 “사도바울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사야선지자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삼송그룹 후계자 지금 홀아비인데 결혼하고 싶은 사람?” 하면 “저요! 저요!” 그 사람 교회 안나와도 “내가 시집가서 교회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나올거예요. 무슨 전도를 그렇게 가까운데서 하는지 모르겠어요. 삼송그룹 후계자에게 시집가겠다. 아가씨들이란 말은 빼고 여전도사들 세워놓고 물어본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하고 결혼하기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네 딸은?” 그렇게 나올거예요. “다른 사람 이야기할 것도 없고 네 딸은 누구한테 시집보냈는데?” 이렇게 반격 들어올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은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면 철학이 돼요. 인간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분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을 해석할 때 창세기 1장 28절, 29절을 내세울 때는 “이렇게 될게요.”라고 하지 말고 지금 주께서 제시한 그 인간모델이 내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나의 멋진 내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라는 사실을 우선 인정을 해줘야 돼요. 완전히 딴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불만이죠. “왜 사전에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만들었습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주고 미리 힌트를 주고 ‘이렇게 살아라.’ 한다면 조심해서 살것인데 미래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막막하게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살게 해놓고는 나중에 ‘인생 제대로 살았느니 못살았느니’ 하면서 뒤늦게 닦달내시면,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미래를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불만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차라리 하나님께서 점쟁이가 되어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피하라.” 사주팔자 보듯이 미리 알게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런 언질도 없고 그런 힌트도 없고 그런 뉘앙스조차 언급하지 않으면서 불쑥 성경에 “처음에 난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다. 현재 네 모습과 비교해봐라.”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어요. 따라서 터무니없는 그 인간 너 자신이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반칙이에요. 해석 안됩니다. 덮읍시다. 설교 끝났어요. 인간이 무슨 인간을 해석합니까? 엉터리인간인데.
그래서 인간론을 설명할 때, 성경에 보면 이게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해석할 때 ‘이 해석은 실패다.’라는 생각을 잘 안하게 돼요. 자존심이 있어서. ‘기어이 나 자신을 밝혀내고야 말리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야 말리라.’ 이런 고집이 있어서 억지를 부려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고맙게도 실패한 인간을 하나님이 제시해주셨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그 실패한 인간만큼은 정말 실패한 인간이 맞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장담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실패한 인생 맞습니다.” 하고 장담할 수 있어요.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 그 사람은 참된 인간으로서는 실패한 인간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남들이 그렇다고 이야기하는것 가지고는 안되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경우에만 정말 실패한 인간이고 그 경우가 성경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의 말씀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끝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룟유다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가룟유다가 스스로 창조했어요? 자기가 만든 거예요?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했다.”고 한다면 자기가 만들어놓고 왜 책임을 가룟유다에게 짊어지우는것같은 어떤 느낌을 주시는 것일까요?
지금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이 어려운 문제를 우리가 비켜갈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실패한 인간의 대변자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실패한 인간을 분석하고 조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자칭 자기들이 성공한 인간이라고 행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유다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진정 내가 누군지를 파악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는 예수님과 직접 관련되어서 예수님에게 평가를 받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룟유다가 있던 그 자리, 그 자리를 우리는 유념해야 돼요. 그 자리를 찾아가서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야 되는겁니다. 복잡한 문제에요. 가룟유다가 소나 돼지나 양이 아니고 기린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창세기 1장 28절, 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인데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뻔 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가룟유다를 당겨서 창세기 1장 28절 옆에다 둡시다. 가룟유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옆에 두고 우리가 창세기 1장 28절을 보게 된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사람 만든 것은 맞으니까 인간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복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인간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인간으로 태어난 것 말고 플러스알파, 단지 인간 말고 인간이 해야 될 일이 추가적으로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볼 때 복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 같은 인간이라는 그 생김새가 있다고 해서, “소 아니야. 돼지도 아니야.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야.”라는 멘트를 날린다고 해서 “그래, 너는 인간으로서 완전체야.”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인간 속에서 뭔가 뽑아낼것이 있어요.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는 겉사람을 후패하게 만들고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하겠습니까? 속이 달라져야 천국갑니다. 속이 달라져야 합니다. 겉으로 기도 잘하고 목사나 장로 되었다고 해서 천당가는게 아니에요. 재벌집 아들이라고 천당가는것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지옥가는것 아니에요. 물론 가난하다고 천국가는것도 아니고요. 가난하냐, 부자냐, 라는 조건이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님을 아는 새사람, 그런 새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가난하냐, 부자냐, 오래 살았느냐, 일찍 죽었느냐, 그런 것이 전혀 내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전혀 상관없는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는 그 이유는 가룟유다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팔아먹었잖아요.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심정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너는 팔아먹을 가치밖에 안돼. 너는 쓸데없는 존재야.”라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신의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 느낌이 그 사람의 속마음을 결정했고 그 속마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너한테 좋을뻔 했고 우리 하나님한테는 마땅했고. 네가 날 팔아먹는다고 해서 내 일에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왜냐? 인자는 기록된 대로 그냥 갈 뿐이에요. 그렇다면 “가룟유다 네가 날 팔아먹는 그것도 이 기록된 것이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러나 네가 개인적 입장에서 봐서 너에게는 네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 그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어떤 입장에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가도 주께서는 완전히 꿰뚫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가 난해하기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생김새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으로 인간이라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냐, 아니냐는 것을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플러스알파로 더 나와야 될 것이 있는데 더 나올 그것가지고 하나님 앞에 평가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시작할 때 십자가로, 부활도 십자가에 포함되니까, 십자가로 마감되지 않으면, 설교 마지막이 돈이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로, 시작부터 끝까지 십자가로 마감되지 않으면 그것은 주의 종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