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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인간의 할 일 151028우리교회마태복음

인간의 할 일 151028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인간의 할 일(창세기 1:28-31)

이근호

15-10-28 21:22

사람의 할 일

2015년 10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1:28-31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1: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면 옳은 결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처지에 있지 않고 설명불가능한 누락된 것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하나도 설명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고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확실하게 실패한 한 인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6:23-24에 보면,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직접 연류된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실패한 자로 낙인 찍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만드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즉 가룟 유다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성사될 수 없을 것입나다. 가룟 유다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가 가룟 유다의 역할을 할 자가 필히 등장하기 마련이기에 그에게 주어진 운명도 역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자’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사람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것으로 최종적으로 ‘인간이다’고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코끼리 아니고, 돼지 아니고 사슴 아니기에 사람이다’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진정 사람이 되려면 명령이 아니라 복이 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복’이 임해서 인간이지 명령을 준행해서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수행할 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4:16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후패당함과 같이 움직이는 동반작업이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생김새 말고 인간다워지려면 더 보여줄 게 따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처음 인간의 상황을 보는 겁니다. 처음 인간에게 있어 구태여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복받은대로 살면 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욕망의 화신으로서 이용해먹을 요량으로 부르는 겁니다.

이미 자기를 닮은 가짜 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자기를 정점으로 땅을 정복하는데 있는 힘을 얻기 위한 신을 찾는 겁니다. 이것은 복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입니다. 진정한 ‘땅 정복하는 일’은 자아의 능력이 제거된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이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볼 때, 예수님과의 연관성을 따져봐야 합니다. 인간들은 상호 의사를 주고받고 힘을 결집시킬 줄 압니다.

이는 서로들 끼리 동의점이 임의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동의를 받아서 생긴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세계의 철학이나 과학은 서로들 충분히 납득이 되는 의견들입니다. 설교나 전도에 있어 최종적으로 십자가 사건으로 마감되지 않는다면 그 모두는 철학에 불과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혜와 행위는 천국에 합당치 않는 것으로 판정나지 때문에 인간들이 내세우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품위성이나 지혜성이 일체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죄로 규정됩니다. 참된 십자가 의의는 인간들 보기에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으로 분류됩니다. 배척하고 싶은 철학의 일종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십자가로 최종 결론나지 않는 설교는 가룟 유다 같은 자들이 좋아할 설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인간으로서 해야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땅의 정복’입니다. 땅을 어떤 식으로 정복하느냐에 대해서는 인간이 직접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 연관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먼저 신약에서 ‘땅을 정복한 사례’를 두 가지로 들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1:8-9에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빌립의 네 딸들이 장래 희망으로 예언자되기 위해 신학교 가서 훈련받아 이런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 능력에 휩싸이니 예언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으로 말미암은 땅에 대한 정복’ 현상입니다. 이 딸들에게 있어 각자 자신의 자아 가치를 고려할 바는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예언을 창작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는 빌립보서 4:11-13에 나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자들에게 보낸다는 편지 속에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떠한 형편에 놓여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날 경우는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이 자신을 덮쳐서 그러한 겁니다. 심지어 가난해도 복이 될 수 있고 부유해도 복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복은 예수님께서 참된 사람으로서 ‘땅 정복’에 나선 사례가 표준이 됩니다.

정복이란 비워있는 곳을 차지하는 게 아니라 이미 거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부정적인 수상한 것들이 꿈틀거리면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땅’이란 개념이 인간이 거주하는 개념으로 인간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라 마귀의 관할하는 총지역을 의미합니다. 즉 주님이 결정한 개념이 땅입니다.

주님의 정복의 대상이 되는 곳이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70제자들을 뽑아 일 시키실 때, 제자들은 귀신이 하늘에게 떨어지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눅 10:20) 이는 제자들이 귀신의 쫓아내는 일을 하면할수록 제자들이 독자적으로 벌릴 일이 아니라 주님에게 더욱더 종속된 결과로서 이루어진 현상이라는 겁니다.

시편 110:1에서는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마귀의 세계를 정복한 그 힘으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정복하므로서 그 백성들이 세상을 행하여 정복을 행사하는 그런 복받은 참 인간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복받은 인간이냐 아니면 저주받은 인간이냐로 구분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신앙의 모든 고백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29 06:42

10강-창 1장 28-31(인간의 할일)1510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8-31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1:28-31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우리가 이 본문에 대해서 미리 안다고 자부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터무니 없는 생각입니다. 왜 그런가? 오늘 본문에 대해서 제대로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이유가, 여기 나오는 인간에 대해서 언급한 그 내용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인간에 대한 내용이거든요.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줬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내 자신에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어요.’라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의 생각해놓은 자기인간관, 자기인간성이 있을거예요. 그것과 성경에 있는것과 대조를 해보시고 비교를 해 보세요. 우리가 내가 생각한 인간관을 원하지 성경의 인간관에 대해서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29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리가 먹고 싶다.’ 또는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 소고기가 먹고 싶다.’ 소고기가 먹고 싶은 나와 소고기를 허락지 않는 창세기 1장 29절의 그 나와 비교할 때 우리는 어느 쪽을 선호하겠느냐는 말이지요. 쉽게 말해서 “나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중요한데 왜 하나님은 사전에 나한테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너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왜 허락도 없고 의논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십니까? 나는 밀어붙이는 그 하나님의 인간관, 인간성이 별로 마음이 당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본다는 것은 결국 무슨 말이냐 하면, 현재 내가 평소에 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것이 원래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거예요. 많은 목사들이 설교를 하는데 이것이 철학인지 성경의 복음인지 구분하는 방법을 제가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마감되지 아니하면 그것은 철학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모든 일의 완성태거든요. 완성, 최종적인 해답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최종적인 해답을 해답으로 설교시간에 제시하지 못한다는 말은 그 설교자가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 철학을 퍼뜨린 것이 돼요.

그러면 그들이 왜 그런 철학을 원하는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게 아니에요. 내가 되고 싶은 이상이 있는데 그것을 신 당신이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그것을 요청하러 온 거예요. 따로 자기모델이 있어요. 하나님이 주신 모델을 원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런것은 치워버립니다. 내가 원하는 모델이 따로 있는데 하나님이 원하는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내가 되고 싶지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 싫어요. 시집 안간 아가씨들 세워놓고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세요.” 하면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이 너무 세다 싶으면 “사도바울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스데반 집사님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사야선지자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삼송그룹 후계자 지금 홀아비인데 결혼하고 싶은 사람?” 하면 “저요! 저요!” 그 사람 교회 안나와도 “내가 시집가서 교회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나올거예요. 무슨 전도를 그렇게 가까운데서 하는지 모르겠어요. 삼송그룹 후계자에게 시집가겠다. 아가씨들이란 말은 빼고 여전도사들 세워놓고 물어본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하고 결혼하기를 그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네 딸은?” 그렇게 나올거예요. “다른 사람 이야기할 것도 없고 네 딸은 누구한테 시집보냈는데?” 이렇게 반격 들어올 겁니다.

다시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은 인간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면 철학이 돼요. 인간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을 만드신 분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을 해석할 때 창세기 1장 28절, 29절을 내세울 때는 “이렇게 될게요.”라고 하지 말고 지금 주께서 제시한 그 인간모델이 내가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나의 멋진 내 모습과 완전히 딴판이라는 사실을 우선 인정을 해줘야 돼요. 완전히 딴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불만이죠. “왜 사전에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만들었습니까? 내 인생에 대해서 미리 언질을 주고 미리 힌트를 주고 ‘이렇게 살아라.’ 한다면 조심해서 살것인데 미래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없이 막막하게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살게 해놓고는 나중에 ‘인생 제대로 살았느니 못살았느니’ 하면서 뒤늦게 닦달내시면,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미래를 모르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란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불만할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차라리 하나님께서 점쟁이가 되어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피하라.” 사주팔자 보듯이 미리 알게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런 언질도 없고 그런 힌트도 없고 그런 뉘앙스조차 언급하지 않으면서 불쑥 성경에 “처음에 난 인간을 이렇게 만들었다. 현재 네 모습과 비교해봐라.” 터무니없이 거리가 멀어요. 따라서 터무니없는 그 인간 너 자신이 성경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가 반칙이에요. 해석 안됩니다. 덮읍시다. 설교 끝났어요. 인간이 무슨 인간을 해석합니까? 엉터리인간인데.

그래서 인간론을 설명할 때, 성경에 보면 이게 있어요. 인간이 인간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해석할 때 ‘이 해석은 실패다.’라는 생각을 잘 안하게 돼요. 자존심이 있어서. ‘기어이 나 자신을 밝혀내고야 말리라. 진짜 내가 누구인지 알고야 말리라.’ 이런 고집이 있어서 억지를 부려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고맙게도 실패한 인간을 하나님이 제시해주셨습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그 실패한 인간만큼은 정말 실패한 인간이 맞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장담할 수 있어요?”라고 했을 때 저는 “그 사람이 실패한 인생 맞습니다.” 하고 장담할 수 있어요.

왜 그런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진정 그 사람은 참된 인간으로서는 실패한 인간이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남들이 그렇다고 이야기하는것 가지고는 안되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된 경우에만 정말 실패한 인간이고 그 경우가 성경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의 말씀에 보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끝부분을 다시 읽어보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룟유다를 누가 창조했습니까? 가룟유다가 스스로 창조했어요? 자기가 만든 거예요?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했다.”고 한다면 자기가 만들어놓고 왜 책임을 가룟유다에게 짊어지우는것같은 어떤 느낌을 주시는 것일까요?

지금 굉장히 어려운 문제인데 이 어려운 문제를 우리가 비켜갈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실패한 인간의 대변자로 나와 있기 때문에. 이 실패한 인간을 분석하고 조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자칭 자기들이 성공한 인간이라고 행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유다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진정 내가 누군지를 파악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가룟유다는 예수님과 직접 관련되어서 예수님에게 평가를 받은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룟유다가 있던 그 자리, 그 자리를 우리는 유념해야 돼요. 그 자리를 찾아가서 다시 창세기로 돌아와야 되는겁니다. 복잡한 문제에요. 가룟유다가 소나 돼지나 양이 아니고 기린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창세기 1장 28절, 29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인데 창조주 되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을뻔 했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가룟유다를 당겨서 창세기 1장 28절 옆에다 둡시다. 가룟유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옆에 두고 우리가 창세기 1장 28절을 보게 된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자체가 복이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사람 만든 것은 맞으니까 인간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복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인간이 바로 곁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인간으로 태어난 것 말고 플러스알파, 단지 인간 말고 인간이 해야 될 일이 추가적으로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볼 때 복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 보기에 같은 인간이라는 그 생김새가 있다고 해서, “소 아니야. 돼지도 아니야. 짐승이 아니고 사람이야.”라는 멘트를 날린다고 해서 “그래, 너는 인간으로서 완전체야.”라고 이야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인간 속에서 뭔가 뽑아낼것이 있어요.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는 겉사람을 후패하게 만들고 속사람을 날로 새롭게 하겠습니까? 속이 달라져야 천국갑니다. 속이 달라져야 합니다. 겉으로 기도 잘하고 목사나 장로 되었다고 해서 천당가는게 아니에요. 재벌집 아들이라고 천당가는것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지옥가는것 아니에요. 물론 가난하다고 천국가는것도 아니고요. 가난하냐, 부자냐, 라는 조건이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님을 아는 새사람, 그런 새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가난하냐, 부자냐, 오래 살았느냐, 일찍 죽었느냐, 그런 것이 전혀 내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전혀 상관없는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돼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는 그 이유는 가룟유다가 예수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를 팔아먹었잖아요.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심정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너는 팔아먹을 가치밖에 안돼. 너는 쓸데없는 존재야.”라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자신의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 느낌이 그 사람의 속마음을 결정했고 그 속마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너한테 좋을뻔 했고 우리 하나님한테는 마땅했고. 네가 날 팔아먹는다고 해서 내 일에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왜냐? 인자는 기록된 대로 그냥 갈 뿐이에요. 그렇다면 “가룟유다 네가 날 팔아먹는 그것도 이 기록된 것이 포함이 되어 있다. 그러나 네가 개인적 입장에서 봐서 너에게는 네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 했다.” 그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어떤 입장에서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가도 주께서는 완전히 꿰뚫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설교가 난해하기에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생김새가 동물이나 식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으로 인간이라고 우길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냐, 아니냐는 것을 결정짓는 요소는 인간 플러스알파로 더 나와야 될 것이 있는데 더 나올 그것가지고 하나님 앞에 평가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 시작할 때 십자가로, 부활도 십자가에 포함되니까, 십자가로 마감되지 않으면, 설교 마지막이 돈이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로, 시작부터 끝까지 십자가로 마감되지 않으면 그것은 주의 종이 아닙니다. 사탄의 종입니다. 교회역사가 나온다든지, 자신의 주의 종됨을 증거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주의 종이 아니에요.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 고백이 나오지 않으면 주의 종이 아니에요. “제가 하는 모든 것이 죄에 불과합니다.” 그 이야기가 나와 줘야 돼요. 그게 안나오면 철학이 되기 때문에.

철학은 뭐냐? 사람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것이 철학이에요. 그러면 복음이 뭐냐? 고린도전서 1장에 의하면 십자가는 인간에게 어리석게 보이기에, 이해되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어리석어서 꼴보기 싫다고, 그런 악취를 내게 피우지 말라고 밀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원래 창세기에 나오는 그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그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십자가와 어떻게 연결짓는가? 그 연결 지금부터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없어요. 하나님이 없어야 돼요. 무신론자가 돼야 돼요. 하나님께서 끼어든 것은 언제냐 하면, 죄짓고 난 뒤에 끼어들거든요. 인간이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면 안돼요.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을 믿으면 안돼요. 그러면 뭘 믿어야 되는가? 하나님이 나한테 이루어지게 한 그 일이 곧 현실인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현실속에서 현실에 충실하게 살면 되지 인간이 신을 따로 찾으면 안된다는 그 말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다는 이것은 굉장히 수상한 거예요. 이것은 자신이 원래 만든 인간에서 벌써 벗어났다는 겁니다.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저는 이야기합니다. 모든 유신론자는 다 무신론자라고. 저는 그런 결론을 내릴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생을 힘들고 어렵게 살다보면 내가 신이 있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은 다 내 욕망의 화신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기만 알아요. 그것을 자기만 알고 있어요. 목사들, 한 3, 40년 장로생활 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암묵적으로, 우리끼리는 다 아는 이야기에요. 신은 애초부터 없었고 그리고 처음부터 이미 신을 믿지 않았어요. 얼마나 신을 믿지 않았으면 신을 믿으려고 애를 썼겠어요.

창세기 1장의 인간은 신을 믿은 사람도 아니고, 신에게 부르짖는 사람도 아니고 기도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다스리고 정복하면 돼요. 그냥 달린 땅콩이나 까먹고 바나나열매나 따먹고 그냥 살면 돼요. 신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40대 아들이 매일 술 먹고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아버지, 오늘도 잘 지내셨습니까?” 한다는 것은 사업 망했다는 뜻이에요. 그냥 살면 되는데 왜 자꾸 아버지를 찾습니까? 아버지 유산 내놓으라는 말이에요. 찔찔 울면서 “아버지! 등 뜨뜻하십니까? 보일러는 잘 때고 있습니까?” 왜 주제넘게 오버하고 있을까요? 왜 평소에 안하는 짓을 해요? 나 망했으니 아버지 사는 집 담보 잡혀서 사업자금 대달라는 뜻이거든요. 유별나게 아버지를 찾아요. “아버지! 아버지! 주여, 주여!” 왜 찾아요, 왜? 그냥 살면 되지 왜 찾습니까?

신이 없이 살아야 돼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것은 신이 없잖아요. 우리를 보호하는 신은 없어요. 우리를 보호하는 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에 날라가버린 겁니다. 주님도 버림받았어요. 주님도 버림받았다고요. 우리가 뭔데 보호받아야 돼요?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있네. 이 십자가 내용이 포함 안 되면 그것은 설교 아닙니다. 주께서 지켜 줄거라고? 그거 설교 아니에요. “신을 찾은 죄값으로 우리는 지옥갑시다.” 이렇게 돼야 돼요. “우리가 신을 찾은 죄값으로 지옥가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되어야지요.

얼마나 욕심이 많으면 교회를 다 나옵니까? 교회 안나오면 갓바위로 가겠지만. 요새 갓바위 난리도 아니에요. 얼마나 욕심 많았으면 사주팔자를 보겠습니까? 사주팔자 보던 버릇으로 교회 와서 기도하는 거예요. 새벽기도하고 금요철야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되어 있잖아요. 말은 뭘 하라고 명령으로 되어 있지만 최초의 명령은 이것이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가 명령이에요.

그게 명령이고 이것은 명령이라고 안하고 복이라고 합니다. 복은 명령이 아니에요. 가만있으면 뒤에서 떠밀어서 떠밀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바다에서 “바람아 잔잔하라.”고 하면 잔잔해지는 거예요. 파도끼리 의논해서 ‘5분 뒤에 잔잔해질까?’ 그런 것은 없어요. 그 즉시로 잔잔해지는 거예요. 어렵게 안하고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복의 능력은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복을 주겠다는데 “저는 겸손해서 안받겠습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복은 오게 되면 그냥 오는 거예요. 까라면 까듯이 그냥 복이 넘쳐오는 거예요. 해일이 방파제 타고 넘어오듯이 그냥 오는 겁니다.

설교를 쉽게 하기위해서 미리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복이 어떤 복이냐? 두 가지를 말씀드릴게요. 사도행전 21장 8절부터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이게 복이에요. 예언하고 싶어서 예언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성령이 임하니 예언한 거예요. 이게 복이라니까요? 이 네 명의 처녀 말고 옆집 아가씨들도 예언한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집 딸 넷만 예언하면 돼요. 그게 주어진 복이니까.

사람들이 아주 잘 알고 있는, 이 말씀 듣고 은혜 안받았다 할 수 없는 그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4장의 말씀인데 사도바울이 무슨 은혜를 받았는지 보세요. 11-13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게 정복이에요. 이 사람이 미국을 가나 영국을 가나 어디에 가도, 사도바울에게는 어디에 있으나 그게 문제가 안돼요. 한국이든 북한이든 나이지리아든 문제가 안돼요. 왜?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 캡슐 안에 놓여 있으니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창세기 1장에서 28절의 정복하라, 명령이 아닌 복이 사도바울에게 임하니까 사도바울은 “주님이여, 이제부터 정복하겠습니다.” 이럴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냥 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가난하게 되면 가난할 수 있는 복, 말이 이상하지요? 가난하면 가난할 수 있는 복, 부하면 부할 수 있는 복, 저 복, 이 복, 어떤 복, 어떤 복이라도 살아가는 자체가 복이니까 빌립보서 4장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또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는 자들아. 너희들만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할게. 범사에 감사하고 있지? 범사에 감사하는 복 받았지, 그렇지? 그거 잘 간직하고 있지, 그렇지?” 간직할 필요도 대상도 아니에요. 매일같이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다 하는데 뭘 간직해요? 모자라면 또 채워주시는데. 그 능력을.

사도바울의 이 능력에서 사도바울이 기대하는 자아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런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자체가 없어요. 자기가 그런 것을 생각할 주제나 입장이 못됩니다. 그러니 성도는 성도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도를 만들어가시는 거예요. 만드시는 거예요. 만드시는 재료는 주님만 알고 있습니다. 내게 선한 일을 시작하신이가 마무리도 짓는다(빌 1:6)는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시작하신 이가 끝까지 하나님의 선한쪽으로 마무리를 짓는 겁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나오지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게 복입니다. 이게 명령이 아니고 복이에요. 명령은 없어요. 그냥 복받은 티만 내면 됩니다. 그게 뭐냐?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겁니다. 이걸 명령으로 생각해버리면 대학교선교단체가 되어버려요. 취직못한 애들 모아놓고 복음학교 같은데 보내는 거. 그냥 취직해서 살면 그게 복인데, 그게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주께서 주시는 복인데 왜 따로 애들을 모으냐는 거예요, 따로. 뭐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뭐가 그렇게도 궁금해서? 따로 모으게 되면 이런 불상사가 생깁니다. 따로 모으게 되면 모인 그 단체가 기준이 되어서 그 안과 밖을 그들이 판단 지어버려요.

대전에서 강의했습니다만, 메시아란 뭐냐?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이 가능한 그게 메시아죠. 이걸 다른 표현으로 하면, 모든 변화를 고정시킬 수 있는 분이 메시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인간에다 고정을 시켜놓았어요. 이것까지만 이야기하면 “맞네, 맞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네.” 그렇게 하잖아요. 그런 생각을 방지하기 위해서 제가 설교 처음에 가룟유다 이야기를 언급한 겁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했다.”고 했단 말이지요.

왜 그런 소리를 들었는가? 가룟유다가 단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와 관련성을 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관련지을 때 우리는 어떤 평가를 받을거냐는 말입니다. 그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빌립집사의 네 딸 이야기를 했어요. 그들은 그냥 예언자에요. 예언이라 하는것은 자기의 부귀영화에 소용되는것이 아니잖아요. 사도바울이 하는 모든 일이, 어려움에 처하고, 풍부에 처하고, 가난에 처하는 이 모든 것이 자기 사적인 영광을 위해서 하는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적인 영광을 위해서 하는것이 아니라는 말은 사도바울이나 빌립집사의 네 명의 딸이나 자기자신에게서 어떤 핵이 빠진 거예요. 자신의 속사람은 본인이 아니고 자기의 속사람을 지금 장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죄짓고 난 뒤에는 참된 인간인 주님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그 정복당한 자로서 된 사람이 사도바울이고 빌립의 네 딸이고 오늘날 성도고 우리들입니다. 정복이라는 그 연결고리가 있어야 돼요, 정복.

따라서 땅을 다스리라고 했을 때 ‘아하,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 그런게 정복이 아니고 정복하라는 이 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정복했는가가 모델이 되고 정답이 돼야 돼요. 여러분, 비어있는 땅, 황무지는 정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비어있는 땅은 정복이 아니에요. 그냥 차지하는 거지요. 정복이란 말의 뉘앙스가 뭐냐? 뭔가 꿈틀거리는것이 있을 때 정복이 돼요. 전쟁할 때 정복한다는 말을 하는데 빈 사막을 차지해놓고는 “전하, 제가 정복했습니다.” “어딜?” “사하라사막을 정복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을 정복해야지 그게 무슨 정복입니까? “태평양을 정복했습니다.” 말이 안되지요.

시편 110편에 보면 예수님은 정복했어요. 마귀가 지배하는 땅을 정복했습니다. 따라서 정복이란 개념을 우리가 쓰면 안돼요. 우리는 인간도 아니기에, 우리는 다른 인간상을 갖고 있기때문에 성경개념을 직접 연결시키면 안돼요. 예수님을 경유해서 연결시켜야 돼요. 예수님이 마귀를 정복했다면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했던 일, 귀신을 추방하는 일은 예수님의 권세를 가지고 했지요. 대전강의에서 그 이야기를 했지요. 열두제자가 귀신을 쫓아낼 때 “귀신 쫓아냈다고 좋아하지 말라.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좋아해라.” 너는 종속되어 있지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하청업체가 아니라는 그 말이지요.

어떤 일을 벌였을 때 그 다양한 일을 통해서 종속됨이 더욱더 단단해져야 돼요. ‘주님 아니면 이런 일이 있을수가 없어.’ 그렇게 돼야 돼요. “주여, 제가 했나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주께서 50명을 목회하라고 개척교회 열었는데 10년 지나고 세 명이 남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한것이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가난에 처하든지……, 예를 들어도 비참한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가난에 처하든지 풍부에 처하든지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마음껏 활개치시고 활동하시는 그런 장으로 된 것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만 누리는 복입니다. 할게 없지요.

복이 쳐들어와서 복이 복답게 활동하는데 우리가 거기서 할것이 뭐가 있습니까? 문제는 주님께서 계속해서 그 사람을, 속사람으로 겉사람을 정복해야 되기 때문에 우리가 바로 마귀에 속했다는 인식을 해야 돼요. 그래야 정복대상이 되기 때문에. 뭘 해놓고 은근히 자기자랑을 하는거예요. 누가 오른뺨을 칠 때 왼뺨을 내놓으면 괜찮아요. 성경말씀대로 왼뺨 내놓고 한방 얻어터질 때에 “주여, 제가 내놓았습니다.” 이러면 안돼요. 그게 또 마귀짓이라. 성경말씀을 내가 지키는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내가 정복한 셈이 되어버려요. 그것은 그리스도와 직접 연관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했다는 그런 평가를 받게 돼요. 가룟유다의 이런 평가가 마태복음에만 박혀있지 않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모든 구석에,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 자리의 옆에 딱 박아놓고 묵상을 하든 뭘 하든 그렇게 하시라는 말입니다. 가룟유다같은 요소가 이미 우리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냥 좋은말로 하는게 아니에요. 피로 할 수밖에 없는것은 마귀를 이겼던 그 피가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작용을 하기에, 우리는 우리가 저질러놓은 모든 죄에 대해서 주께서 자기의로 전환시킬 수 있음에, 모든 일에 주님의 활동하심을 느끼기에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 때 결국 이 땅이라는 개념도 달라지지요. 이 땅이라는 개념은 여기는 그냥 땅이라고 되어 있지만 장차 이 땅은 바다의 짐승이 올라와서 차지하는 땅이 되는데 왜 그런 땅이 되는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땅은 그런 식으로 마귀한테 일시적이고 한시적으로 점령을 당해야만 하는 땅이고, 우리는 그 땅이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이며 그것이 우리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인줄 알고.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담한테는 하나님이 없었다. 왜? 아담자체가 하나님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냥 살면 돼요. 마찬가지로 오늘날 십자가복음 안에서 사는 우리에게도 역시 우리를 보호할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를 보호해줄 하나님은 없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도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생각해버리면 그 하나님을 생각한 그 순간 하나님과 잘 사귀어보자는 나의 자아상을 내가 억지로 또 만들어내요. 우리는 항상 결과물로 살면 되는데 결과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뭔가 자꾸 미래에 내가 기대하는 어떤 이상체를 나름대로 만들어내는조로 자꾸 신을 거론해요. ‘지금까지 주께서 도와주셨으니 내년이 되어도 은혜 주실거야.’라고 할 때 주께서는 “네 맘대로 그런 생각하지마. 내년에 어떻게 할지 너는 몰라. 네가 왜 함부로 희망을 품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할 수 없어요. 주께서 바꿔줘야 할 마음들이 계속 튀어나오지요. 그게 나와줘야 돼요. 성경말씀은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범사에 감사한다.”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항상 절망하지요. 절망보다 더 못된 것은 후회한다는 것, 이게 더 못됐어요. 후회하니까 착해 보이고 잘나 보이잖아요. “주여, 제가 이렇게 죄를 지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후회하는것 자체가 반성후의 내 모습은 근사해진다는 어떤 희망같은것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이고, 그냥 사세요, 그냥! 그냥 사세요. 후회도 하시고 그냥 끼 부리고 사세요. 평생을 끼 부리고 사시되, 주님 앞에서 잘난체도 하시되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스스로 인정합시다.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급하면 ‘주여, 주여’ 급하면 ‘하나님, 하나님’ 찾고 ‘나는 유신론자’라고 자부하고, 그렇게 사세요.

하지만 우리가 내세우는 신이 아니고 우리는 결과물로 주어질 때 주님의 산물로서, 우리가 나를 결과물로 여길 때 비로소 엮여지고 나타나시는 주님,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고백했던 주님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의 은혜입니다, 주의 사랑입니다, 할 때는 내가 먼저 생각했던 그 하나님자리를 지워버리고, 그걸 지워버리고 나를 결과물로, 주님이 주체가 되고 주인공이 되어서 나는 결과물로 엮일 때 그 때 비로소 등장하는 주님, 그러니까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하나님 가지고 뭘 하려는지, 어떤 노림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잘 믿으면 조그만 소망하나 얼른 들어줄지 알았습니다.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보디가드같은 하나님,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주님부터 버림받은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버림받았기에 저희들이 주님의 사람 된것을 또 다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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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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