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39절 한 번 봅시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지요. 믿는 자에게는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성령이 나오지요. 이 말을 사도바울 식으로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니는 니가 살아서는 안 된다. 너가 살아서는 안 돼. 너가 살지 말고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살아야 니가 살아. 만약에 니가 니 인생 살면 니는 괴로워.”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내 인생은 어떻게 살아도 좋은 환경, 돈이 수백억 있어도 괴로워요. 그것이 내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니 인생 니가 살지말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바꾸어주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닌다. 그래서 내 인생을 내가 쥐고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식으로 내가 살아야 돼요. 내가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그럴 재주도 없고요. 누구를 모실 수가 없어요.
하여튼 내가 산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고 실제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살려주는 경우에만 우리가 살 수가 있습니다.(영생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도 닦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교회에 와서 말씀 지킨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뭐가 와야 됩니까? “니 속(배)에서 성령이 나오리라.”
어디 배를 째든지 해부하든지.. 서양에 이런 동화가 있잖아요. 어떤 닭이 자고 일어나면 금닭을 낳으니까 하나씩 하나씩 받아 모으면 되는데, 그 욕심을 내서 금 있는 줄 알고 째보니까 금이 어딨어요 똑같은 닭인데..
내 안에 예수 있는 줄 알고 째봐야 예수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은 나와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내 인생이라고 봤을 때 이미 그 인생은 왜곡된 인생입니다. ‘야, 내 인생이야. 내 인생이니까 천국보내야지..’ 이미 시작을 그렇게 했잖아요. 시작을 그렇게 했으면 그 금닭 배 째는 것과 똑같은 짓이에요. 째봐야 똑같아요.
베드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구경꾼들이 능력이 나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억울한 거에요. 진짜 능력이 나오는 줄을 조사해 보면 큰 문제에요. 왜? 자기한테는 능력이 없어요. 쉽게 말해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는 거에요. 초반부터 어려운 것 하네요.
교회에서 능력, 능력하는데 그래서 교회가 사기가 되는 이유인 겁니다. 능력에서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능력이 나오는 겁니다. 능력이 없게 하시는 방식으로서 능력을 베푸시는 거에요.
서양 동화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떤 귀족부인이 너무 잘살아서 교만했어요. 남편이 인도에서 무역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무역갔다가 인도양에서 배가 파선해서 뒤집어져가지고 남편을 포함해서 다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은행에 저당 잡혀 놓은 것 부도났을 것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하루 아침에 좋은 옷 다 못 입고 원피스 달랑 하나 입고 쫓겨나다시피(자기 집도 아니니까) 나왔지요.
나왔는데 보니까 그 바닷가에 밀이 많은 거에요. 그래서 같이 쫓겨나온 하녀에게 “야, (배고픈데) 밀이 왜 저리 많아?”하고 물어보니까 하녀가 하는 말이 “부인님이 옛날에 버렸던 거에요.”라고 했더랍니다. 밀이 그만큼 고귀하고 좋다는 것을 이 귀족부인이 언제 알았어요? 자기 것, 내 꺼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비로소 “그딴 밀”이 아니고, 진짜 배고플 때 “정말 중요한 밀”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래서 “존재”라는 것은 “소유가 있을 때만” 존재가 돼요. 내가 가진 것을 테두리 칠 때 이사람이 존재로서, 자아로서, 또는 주체로서 등장이 되는 겁니다. 재산은 얼마고 학력은 이 정도고 애는 몇 명이고 집은 몇 평에 살고.. 내 소유된 것을 울타리 치면 그게 내 존재가 된다는 거에요. “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런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자살하겠지요? 자살까지는 안 가지만 자살 충동이 생기겠지요?
“왜 죽고 싶어요?” “소유가 없는데..” “그럼 소유 없이 굶어죽을 때까지 살면 되잖아요?” 왜 소유가 없다고 앞당겨 죽으려고 했습니까? 전에 있는 버릇이 뭐냐 하면은 나라는 것이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울타리 쳐서 나라고 하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모든 재산 다 날라가고 건강도 잃고 다 날라갔을 때 그냥 죽고 싶은 겁니다. 욥처럼.. 인간이 이 소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님으로 가장 확실하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시점이 무슨 사건입니까? 예수님이 주 되심으로 자신의 일을 다 이루셨다고 하셨던 그 시점이 어느 시점이었습니까?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다 이루었다”를 어디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십자가지요.. 병 고치고 물 위를 걷고.. 산상수훈에서 끝났다. 이게 다 이루었다가 됩니까?
십자가에서 뭡니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의 말씀으로 버림을 당할 때 비로소 예수님은 자기 소유가 아니고, 주님이 하시는 일과 결부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일에 의해서 주님(예수님)이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게 되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게 요단강에서 성령을 받아서 되는 겁니다.
그 성령이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바로 "성도"라는 거에요. 엄청나지요. 뭐 성경 몇 개, 산상수훈 지킨다고 해서 천당가는 것 아니지요? 인간 자체가 완전히 다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해석할 때에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해석하면 됩니다. 특수성(특수한 사건)을 통해서 보편성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특수한 사건이지요. 그 특수한 사건에서 미처 몰랐던 세상의 진리, 감추었던 비밀을 거기에서 다 낼 수가 있어요. 비밀이라는 이야기는 로마서 16장에 나옵니다. “감추었던 비밀”. 에베소서 3장에 보면 “창세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 왜 성경에 사도바울은 “비밀”이라는 말을 했을까요? 비밀이라도 알려주면 비밀이 아닌 것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비밀을 없애기 위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비밀을 비밀 되게 하기 위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들어도 모르고 봐도 모르게 하기 위해서 준 거에요. 이게 이사야 6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무식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 알려줌으로써 너희들은 전혀 이쪽 세계에 올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그냥 주님께 감추어 있으면 비밀이 아니에요. 이것을 인간에게 폭로를 함으로써 비로소 비밀이 비밀답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께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비밀이라는 말을 할 때에는 하나님이 비밀로 이야기하고 싶은 대상이 있을 것 아니에요. 그 대상이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본인이 예측하거나 예상한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십자가 알았으면 다 알았네’가 아니에요.
옛날 할머니들이 손자나 손녀 잠재울 때 이야기해주잖아요. 그런데 옛날 이야기 한두 개 하고 끝납니까? 그 다음날 이야기가 또 나오지요? 그래서 손자와 손녀가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우리 할머니 옛날 이야기는 끝이 없어요?”라고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끝없는 비밀이야기가 나오는 하나의 함으로 사용을 한다니까요. 그 함을 내가 소유하면 안 됩니다. 내가 소유하는 식으로 살면 이 사람은 성도가 아니에요.
강제로 공출당하는 거에요. 트럭이라든지 경운기라도 전부다 개인 차도 나라에서 전쟁하기 위해서 공출해가지요. 주님이 주님 되시기 위해서 그전에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공출해가시는 겁니다. 내 안경부터 해가지고 내 옷,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 내 은행 잔고까지 전부다 공출당해요. 그 공출한 것을 어디에다 쓰냐 하면 비밀을 나타내기 위해서 재료로 씁니다.
만약에 주께서 “야, 야. 니 것 쓰고 싶다.”고 하면 우리는 내놓지요. 그런데 사실 중요한 것은 안 내놓고 대충 쓸데 없는 것을 내놓으면서 “이거 주님 쓰세요.” 할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뭘 내놓으라고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놓으라고 하셨지요. 그런데 공출하셨잖아요. “야, 니가 믿음이 있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잖아요. 가장 사랑하는 아들까지 하나님 앞에 번제로 바쳤잖아요.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창조주기 때문에 피조물을 마음껏 공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 못가에서 병이 나았잖아요. 우리 같으면 ‘메르스도 3개월밖에 안 가던데 왜 나는 도대체 벌써 38동안이나 병 들어있는데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불평 할 만도 한데 38년이든 48년이든 어차피 본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는 그 비밀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람은 38년 동안 병 들어야만 하는 거에요.
세상에 작가들 중에 어떤 여류 작가는 말하기를 ‘신이시여, 내가 왜 남자가 아니고 여자로 태어났습니까?’ 그것을 누구한테 물을 거에요? 작가가 글을 쓴다고 해서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몰라요. 왜? 그것은 복음 안에서 성령을 받게 되면 비밀에 속하는 거에요. 진짜 성령 받아가지고 “주님, 저는 왜 여자로 태어났습니까?”하고 물으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시는가 하면 ‘내가 너한테만 비밀로 이야기할게. 니가 여자로 태어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런거야. 이제 알았지. 이 비밀을 다른 사람한테 이야기하면 안 돼. 니만 알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 나는 내가 남자가 되고 싶은데 여자가 되어서 분하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아까 강의할 때 소유라고 했지요? 소유는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하는 존재가 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성령 받은 그 여류작가가 ‘나는 예수님의 비밀을 위해서 여자가 되어야 돼.’라고 하면 그 여류작가는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밀스러운 인생을 위해서 여성이어야 된다다는 비밀을 알게 되었죠. 그러면 그때부터 그 여자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 그럼 두 번 다시 ‘나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소리를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남자로 태어나면 남자라는 것을 자기가 소유해버리고 “나는 남자다.”가 자기 존재가 되어버리니까 이 사람은 주님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존재를 증거하게 되어버리죠. 그 사람(피조물)은 주님 보시기에 비밀을 아는 사람답지 않은 겁니다. 속에서 성령이 나온다는 것은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께서 하는 일은 매일같이 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일이고 그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어떤 가수는 말하기를 “다 포기하지마.” 이런 소리를 했다는데 성경은 “다 포기할 만한” 너가 없다는 거에요. 포기할 만한 너를 나는 만들지를 않았다. 애초부터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없는 거에요. 이것이 이해되면 그 다음 말이 이해가 됩니다.
39절 후반부에 “(...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라고 나오는데.. 지금 괄호 안의 말씀 설명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마귀한테 시험받을 때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무엇을 알면 쉽게 풀리느냐 하면 “산다.”는 거에요. “산다.”는 개념은 떡(돈, 밥)을 원할 때는 말씀 속에 “산다.”가 감추어져 버려요. ‘열심히 떡 먹고 살아서 복음 전할게요.’라고 해버리면 “산다.”의 원래의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떡을 포기하고 ‘나는 말씀 때문에 산다.’라고 했을 때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 “산다.”입니다. 왜냐하면 말씀 안에 살아계시는 분이 계셔요. 그분이 예수님이세요. 그것을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는 그냥 “말씀이 살아있다.”라고 했는데 정확히 말해서 “말씀 안에 예수님이 살아있는” 겁니다.
어째서 그런 공식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말씀으로 산다고 했잖아요. 그전에 요단강에서 세례(성령)을 받았잖아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사신 모든 것이 아버지의 말씀 안에서 사셨지요. “산다.”는 표현을 보여주는 분은 예수님 빼놓고는 없어요. 예수님이 사는 것이 사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이 주는 스케줄에 따라서 사셨잖아요.
“말씀이 응하려 함이라” “때가 되매” 항상 표준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가가 표준이지 다른 주기철 목사 이런 사람은 보기 들지 마세요. 지나 내나 죄인인데.. 그 사람은 표준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이 뭡니까? 참된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은 바로 “예수님뿐”입니다. 그것을 “인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만 말씀대로 살고 나머지는 사는 게 아니고 “죽음”입니다. 전부 죽어버린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까 괄호 안의 말씀에서 성령이 온다고 했는데 성령은 누구의 영이냐 하면 예수님의 영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지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여기 39절에 보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라고 되어있지요.
예수님은 성령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아직 저희는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 혼자 성령 받았잖아요.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안 받았어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면 예수님께 있던 성령이 어디까지 간다는 말이지요? 저희라고 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택한 백성들에게로 예수님이 가졌던 성령을 그대로 줄 수가 있는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지 아니하면 □이 아니다.” 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거에요. 이 “그리스도의 사람”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영의 사람이지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우리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누가 “니가 인간이냐?”라고 하거든 “나 사람 아니야.”라고 하세요. 사람이 되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사람이 달라요. 마치 예수님이 보통 인간하고 다르듯이.. 성령을 받으면 누구나 사람이 아닙니다. 관리의 주체가 성령이 되기 때문에.. 성령의 반대말이 악령이거든요. 다른 사람은 악령이 주체가 되어서 관리하지만 성도는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관리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논리는 아주 간단한 논리에요. 그 악령하고 예수님하고 싸웠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누구하고 싸운다는 말입니까? 악령 받은 보통 사람과 성령 받은 성도하고는 이 땅에서 안 싸울래야 안 싸울 수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건드리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할 일이 없어서 산책하려고 돌아다닙니까? 마귀가 이 마지막 때에 우는 사자와 같이 돌아다니는 목적은 택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마귀가 했던 짓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일을 훼방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거든요. 그 성질이 어디 가겠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곳이 십자가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만 무효화시키면 되고 그게 사탄의 꼬봉(종)들이 하는 짓이잖아요. 그러면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려면 어떻게 하면 돼요.. 십자가에 뭔가를 섞어 넣으면 되겠지요.. 이물질을.. 뭘로 섞어 넣으면 됩니까? 행함이죠. 십자가 피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이 성에 안 차는 거에요. 내가 의롭다는 것을 내가 느끼고 싶은 거에요. 그럴려면 과거에 자기가 주인이면서 느꼈던 그 느낌을 십자가에다가 섞어넣어 버리지요.
아까 어떤 분이 이야기한 것처럼 지하철에서 전도를 30년 동안 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자기한테 찾아와서 “교회 다니겠습니다.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아무 소리를 안 했거든요. 그래서 실망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전도했어도 한 명도 전도가 안 되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니까 누가 말했는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한 자리에서 복음 전하는 것을 보고 감동받아서 각기 알아서 교회에 갔습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미국에 어떤 사람의 실화를 담은 비디오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것을 보고 어떤 성도님이 목사한테 물었잖아요. “목사님, 왜 그걸 궁금해합니까? 전도해놓고 본인이 왜 그걸 궁금해하지요?” 참 뛰어난 질문이에요. 5년 동안 제일 뛰어난 질문이에요. 정말 뛰어난 질문이에요. 왜 그걸 궁금해합니까? 전도하면서 뭘 기대했어요? 내가 평소에 주인공이었던 그 버릇을 그대로 거기에다가 담은 거지요. 그러니까 누굴 전도하고 누굴 믿은 거에요? 자기의 행위를 믿은 거에요. 그게 극단적인 악마의 모습입니다.
경건의 모습을 띈, 순교자의 모습, 거룩의 모습이 가장 악마적인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보고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신 거에요.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을 막고 본인도 못 들어가는 그 역할을 그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해야 되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축구의 골대잖아요. 그렇다면 골대에 열한 명 선수가 다 패널티킥을 막는데 그 역할을 바리새인들이 하는 거에요. 천국에 못 가도록 할 때 그냥 서있습니까 아니면 뭘 뱉어냅니까 그들이 뭘 전파하잖아요 한 명의 교인을 얻기 위해서 그들이 바다 끝까지 가잖아요. 그러면서 그들이 전도한 내용이 뭡니까?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복 받아서 천국 간다. 신명기 봐라. 말씀을 지키는 자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는다고 성경에 분명히 있잖아. 그리고 십계명을 봐라. 이 말을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는 말이 분명히 있으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자 없는 바른 그 소리 그대로 한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겠지요.
따라서 오늘날 교회 목사들은 뭐라고 합니까? 사도바울의 권면과 명령을 무시하지 마라. “니가 용서받은 것처럼 서로 용서하라.”고 했으니까 “하라.”고 해야 상급받고 의롭게 되고 천국갈 때 인정받는다. 이게 주의 뜻이니까 지켜라. 나는 목사로서 성경 그대로 했기 때문에 나는 하자가 없다. 이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 교회 아마츄어들이 알 수가 있나..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런데 성령 받는 사람은 알지요. “성도님은 헌금을 했습니까? 십일조 했습니까?” 성령 받은 성도는 묻습니다. “목사님은 왜 그걸 궁금해하지요? 니(목사님)나 잘하세요.” 왜 남의 일에 궁금해해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제가 의존교회 강의할 때 디모데했잖아요. 가르친다는 말의 내용은 뭐가 되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목사가 가르친다는 이 가르침도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했잖아요. 내가 당신을 가르친다는 것이 절대로 내가 당신을 가르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 가르침 속에서 가르친다는 이 행위를 통해서 내 존재가 삭제되고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승천해야 성령이 오니까)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된다는 사실을 저는 언급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르침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가르침 천만 번을 받아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어떤 행위도 거부당할 죄라는 것을 알지 않는 한 당신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증거하는 거에요. 성령이 임하면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39절 또 해봅시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한가? 지금 제가 질문하는 취지가 뭐냐하면 예수님은 성령 받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만 성령 받으면 되지 우리는 왜 (성령을) 받아야 되지요? 성령 받아야 구원받기 때문에...(라고 답할 수 있는데) 그러면 안 주면? 안 줘도 괜찮잖아요. 안 줄 권한이 있잖아요. 꼭 주님께서 누구한테 뭘 줘야 됩니까? 안 주시고 주님 혼자 구원받으시면 되는데 왜 그러셔야 하는가.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37절에 나옵니다. 37절 다시 봅시다. “명절 끝날에”라고 했는데 명절이 초막절이죠. 초막절 끝날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예언이죠. 그렇다면 성전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어요. 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또는 예수님께 성령이 나와야 되는가? 예수님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 안에 성령 받은 사람이 또 성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약속이 있어요. “성전만들기”라고 사전에 약속을 했습니다. 성전을 만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거주지를 확정짓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이 뭡니까? 라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거주지를 만드는 작업”
출애굽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건져낸 이유가 하나님이 건져낸 부산물 가운데 성소가 되기 위해서 했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앞에 불러다가 애굽에 보낸 것은 그들을 불러다가 이 모리아 산 앞에서 내 앞까지 예배드리기 위해서 했다. 그러니까 성소가 되기 위해서 한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성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1장, 22장에 보면 두 개의 보좌가 나오는데 하나는 어린 양의 보좌가 나오고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지요. 이 보좌가 나온다는 것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볼 때 일곱 촛대에 다니지요. 일곱 촛대라는 것이 구약에 보면 성전에 가지가 일곱 개 난 촛대가 나와요. 그러니까 전 우주의 성전화라고 보면 돼요.
성전이 어떤 가건물이나 부동산 어떤 구역에 있다가 이것을 전 우주로 확대시킨 거에요. 그러니까 성전 만들기에요. 왜 성전을 만드는가? 거주지거든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 거주지가 필요하냐? 여기에서 비로소 사도바울의 그 어려운 개념이 풀리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때가 되매..) 거주지가 될 때 “안과 밖”이 결정됩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받지요? 그 “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안”.
“안과 밖”이 되려면 그렇게 결정되게 할 수 있는 그 우리의 주인님께 특정한 거주지가 성립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안과 밖”이 확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예수 안”이 확립될 경우에만 “밖”이 있는 거에요. 따라서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이게 맞는 말이에요.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는 뭐가 있어야 돼요? 천국이 확정되게 되면 그 외(except)는 전부다 지옥이 되는 겁니다. “안과 밖”이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습관이 뭐냐 하면은 자기 거주지가 있잖아요. 이 때 자기 거주지를 house(빌라, 아파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인간은 자기 존재가 거주지에요. 인간은 아버지 집이 거주지가 아닙니다.
만약에 아파트에 방이 다섯 개 있다고 칩시다. (제법 사는 집이지요) 그리고 애가 한 세 명 있다고 합시다. 아빠 서재, 아빠 엄마 같이 쓰는 방, 나머지 방1, 방2, 방3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애의 거주지가 어디입니까? 처음에 태어날 때는 아기겠지요? 그런데 점점 자라나면 자아가 자라납니다. 그래서 한 6살쯤 되게 되면 “엄마 나도 내 방 줘.” 이렇게 됩니다. 그 방이 거주지가 아니에요. 내 방을 달라고 하는 그 “자아의식”, 그 “주체성”이 거주지에요.
여기, 이 시점에서 내가 부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 부부가 둘이 한 몸 된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각자 거주지가 있는데 무슨 한 몸이 돼요. 평생 살아봐요. 한 몸이 되는지.. 안 돼요. 본격적인 영토 싸움하려고 붙은 거에요. 둘 다. 니가 나한테 붙든지 내가 너한테 붙든지 둘 중에 하나가 붙어야 돼요. 그런데 둘 다 만만치 않아요. 끝까지 자기 영토 양보 없어요. 끝까지 안 돼. 그래서 황혼이혼이 많잖아요.
그래서 니 영토 양보 안 해도 되고, 양보하는 척하면서 둘 사이에 돈이 등장합니다. “집은 내 이름으로 해줘. 땅은 내 이름으로 하고..” “차는 그러면 누구 이름으로..” 그러면 자아를 서로 존중해주고 영토 안 건드리기, 자기 거주지(자아 주체성) 안 건드리기, 그 다음에 돈으로 얼추 정리가 되었습니다. 집은 아내 이름으로 하고 나머지, 유산 받은 땅은 남편 이름으로 정리가 되었어요.
그거 정리되고 난 뒤에 “우리 친구로서 친하게 지내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가 좋으려면 밑에 돈 문제부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돼요. 그걸 밍기적 미루면 아내가 자꾸 불안해해요. 그걸 정리해주면 아내는 그 다음부터 남편한테 맛있는 낙지볶음도 해주고 잘해줍니다. ‘나 이거 해가지고 나중에 큰아들 줘야지..’ 속으로 온갖 계획, 구직의 꿈을 다 꿉니다. 그것 안 해주면.. 결국 한평생 아내로 그만큼 봉사했으면 반 이상은 가져가야지요. 반 플러스 알파로 가져가야지요. 그것 안 되면 사랑과 전쟁 3편 나옵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부부들은 이것을 미리 알아서 결혼 하게 되면 통장을 각자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명한지 아니면 바보인지 안 그러면 결혼 왜 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각자 하고 있어요. 서로 돈문제 안 건드리면 부부 사이가 좋습니다. 그러나 돈문제 건드리면 “엄마 나 이혼할까?”하고 친정에 오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인간의 자아라는 거주지는 양보가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부부 간에 양보가 되었어요. 왜냐하면 거지로 갔기 때문에... 밥 먹기 위해서 시집에 하녀로 팔려갔거든요. 밥만 먹여주면 좋아요. 그대신 여자는 아들을 낳아야 해요. 왜냐하면 재산을 줘야 되니까. 아들을 낳는 조건 하에 밥만 먹여주게 되면 그집 귀신이 되는 겁니다. 참 옛날 이야기에요. 왜 성경 이야기하다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지...
그런데 이게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하면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남편이 양보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하는데).. 인간은 스스로 양보할 수 없어요. 양보해봤자 양보했다는 그 착함과 의로움이 나의 거주지에 하나의 재료로, 나를 풍족케(경건하게) 만드는 재료로 또다시 나의 존재를 더 강화시키는 이런 낭패를 당해요. 분명히 내 인생은 없어져야 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더 고상하게 거룩하게 훌륭하게 내 인생이 위대해져 버려요. 나중에는 정신병자 되어버린다니까요. 성령을 안 받았으면서도 성령 받은 티를 내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한테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목사는 교회로부터 탈출해야 된다고. 목사가 교회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목사의 게임하는 장소에요. 지 까부는 장소고 교인들은 같이 까불고 놀아나고.. 천하를 모르고 끄집고 까불고 난리나요. 재미나게 놀고 있어요. 왜 교회에서 벗어나야 되는가? 성령을 받은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데 목사가 교회로 살게 할 가능성이 아주 농후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회 나가면서 퇴직금 더 챙기려고 하고.. 주는데 받으면 훌륭한 목사에요. 그런데 더 챙기려고 하는 이유가 그 동안 예수 십자가 이야기가 전부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그 본색이 다 들통난 겁니다.
목사가 안 그런 척하지요. 그러나 사모는... 사모 등살에 못살아. “내가 니 보고 살았나? 니 가진 재산 보고 왔지..” 사모는 아내 아닙니까? 아까 거주지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분명히 이야기합시다. 이런 자리 아니면 어디서 밝히겠습니까? 거주지 확보하려고 결혼했다고 누가 밝히겠어요?
그러나 그 거주지는 성령이 오게 되면 파쇄, 다 부숴져야 돼요. 두 개의 거주지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두 개를 용납하게 되면 “내 안”과 “내 밖”이 따로 생깁니다. 그런데 따로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 내가 질문을 하지요. “만약에 당신이 천국 갔는데 당신이 사랑하는 딸이 지옥에 있다면 당신은 천국에서 기분 좋겠습니까?, 당신은 택함 받아서 천국 왔는데 사랑하는 딸(요새 아들은 별로니까)이 지옥에 가 있다면 천국생활이 싱글벙글 신이 나겠어요 안 그러면 슬프겠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거에요.
이것에 답변은 두 가지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1. 싱글벙글이다. 2. 속상하다. 몇 번입니까? 평소에 “내 안”에서 “주님 안”으로 마음을 미리 바꿨으면 됐을 것을 가지고.. 그러니까 딸을 그동안 “내 안”에 있는 딸로 본 거에요. 그래서 우리 딸을 줄세워 보냈는데 다른 여자애는 앞에 가는데 지 딸은 삼 등으로 가다가 엎어져 서버리면 “아휴, 내 딸..” 이렇게 하지요. 그런데 자기 딸이 만약에 이 등하다가 일 등으로 엎어지면 “야, 내 딸!” 이렇게 나오지요. 일 등하니까.. 이 모든 게 뭡니까? 내가 거주지잖아요.
거주지의 특징이 영원불변이에요. 영원함.. 교회 영원한 것 없어요. 자기 영원하라고 교회에 다니지.. 자기 자신을 영원하게 만들기 위해서 교회 다니지 교회 영원하라고 교회 다니지는 않거든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이미 거주지에 합세한 거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계속 나온다는 말은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오잖아요. 심지어 그 물은 어느 정도의 물이냐 하면 내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물. 이거는 홍수같애. 박태환이 헤엄쳐가지고 ‘휴, 벗어났다.’ 이렇게도 안 돼요.
그 성령을 받는 게 아니에요. 성령 안에서 헤엄치고 있지. 성령은 우리보다 부피가 커요.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의 물방울 같은 거에요. 성령 안에서 노닙니다. 이게 신약의 특징이에요. 그러나 구약의 특징은 성신 안에 노는 게 아니에요. 성신이 온 사람에게만 일시적으로 기능을 할 뿐입니다. 성신은 일시적이에요. 성령은 완결형입니다. 성신은 개울가고 성령은 큰바다에요.
‘성신’이라는 이름의 가수가 있고 영화배우 중에 ‘성령’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요. 김성령이 있고 박성신이라고 옛날에 박재란 딸이 있어요. 내가 ‘성신’ 나올 때마다 은혜 받습니다. 그런데 일찍 죽었어요. ‘성신’도 있고 ‘성령’도 있는데 얼마나 믿음이 좋았으면 딸 이름을 그렇게 지었나 몰라요. 그래서 미스코리아 진이 되었나 몰라요.
흔히 하는 질문입니다.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성신’은 한 번 비췸을 얻고 끝났어요. 그러나 ‘성령’은 주는 게 아니고 그 안에 풍덩 집어넣어 버려요. 왜냐하면 그게 주님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거주지가 두 평, 세 평이 아니거든요. 넓어요. 성령이 넓잖아요. 그래서 그 안에 빠지면 나갈 구멍이 없어요. 한번 천국 안에 갇혀보실랍니까? 천국은 나갈 길이 없어요. 완전히 막혀있어요.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고 했어요. 완전히 죽기 싫어도 거기에 영원히 살아야 됩니다. 천국은 나를 위한 거주지가 아니고 나를 죽여버리고 주님의 거주지기 때문에 거기에서 ‘내 딸(아들)은 왜 못 오는데?’ 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도 내 남편이 아니고 아내도 내 아내가 아니에요. 그때는 천사와 같아서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갑니다. 이 땅에서 처녀인 사람은 죽어서도 처녀입니다. 영원히 결혼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결혼 못 하면 거기에 가도 결혼 못 해요. 그냥 예수님하고 결혼했다 뿐이지 (혼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라고 하는 것은 한시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흙(형체)으로 있을 동안만 한시적으로 주의 비밀을 증거하기 위해서 남자와 여자가 된 거에요. 남자, 여자와 비슷한 개념이 하나님의 오른편, 왼편입니다. 왜 하나님은 오른편으로 구원하지요?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오는데 왜 하나님은 하필 왼손은 안 하고 오른손만 합니까? 한 쪽이 일해서 한 쪽은 혜택을 입은 거에요.
보통 우상은 하나님이 일해서 비는 우리한테 혜택이 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체적으로 혜택을 입을 자를 자체 안에서 생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혜택을 못 입어요. 우리가 죽고 난 뒤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사람이 혜택을 받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착한 분이니까 혜택 주세요.” 하면 안 줍니다. “너는 죽어야 돼.” 죄인에게는 어떤 혜택도 주지 않아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조건 하에 죽고 난 뒤에 부활의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조건이에요.
이게 로마서 6장에 나오잖아요. “함께 세례받아서 함께 죽었으니 함께 살리라” 산다는 말은 반드시 전제를 까는데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사는 거에요. “니가 죽은 자라면 살 수 있다.”지, “니가 살아있다면 살 수 있다.”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어 버리면 내가 연이어 사는 것이 되니까.. 내가 사는 식으로 천국가서도 계속 사는 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삶은 아닙니다.
지옥간 사람이야 지 이름으로 계속 살지요. 천국 갈 때는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언약으로 바뀌어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요?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입어야 천국에 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의 완성의 혜택을 완성시킨 사람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바랐으니까..
그래서 모든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렇게 보면 돼요. 특수성을 통해서 보편성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그 특수성은 어떤 특수성이냐? “다 이루었다.”는 특수성. 그런데 자기 거주지에 있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다 이루었다.”는 것은 망한 거잖아요? 인간 세계에서 늙어죽었다는 것 말고, 죽었다는 것은요, 어떤 말로 해도 그것은 실패한 거에요.
‘아휴, 그 양반 좀 살았으면...’ ‘아휴, 안중근 의사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칭찬받았으면 뭐 하노..’ 안중근 의사 아내가 있었지요. 몰라요? 연구 대상도 아니고.. ‘좀 더 살았으면.. 젊은 나이에.. 40도 못 되어서 죽으면 되겠어? 안 됐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해도 제 명에 못 살고 죽으면 우리는 실패로 간주하거든요.
그 말은 무슨 뜻이에요? 내 거주지 안에 내 소망이 있는데 치매 걸려가지고 온갖 화냥질을 해도 그래도 나는 오래살고 싶다. 남들 다 죽는 것 보고 내가 최후에 유일하게 남은 자(only I)로 살고 싶어요. 나만 살고 싶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우리 나름대로의 거주지가 따로 있다.’ 이 말인 거죠.
자 이제 그러면 설명이 되었습니다. 왜 배에서 성령이 나와야 됩니까? 그것은 에스겔 47장의 예언대로 성전에서만 계속해서 물이 흘러나온다는 그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물이 나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나온 물은 예수님께서 성전이고 그 다음에 성령받은 자가 성전이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들에게 성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지성전? 아니요. 하나밖에 없는 성령이 사람 성령을 통해서 다 드러나는 거에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교회가 한 성령이라고 했죠. 내 성령, 니 성령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김 성령, 박 성령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한 성령을 받은 거에요. 그 다음에 한 성령을 마신다고 하지요? 우물 하나에서 물을 마시는 거에요. 여기 생수기가 하나인데 물을 마셨잖아요. 전부다 하나씩 마시는 거에요. 무슨 니 상급이고 내 상급이 있습니까? 같은 상급이죠. 아니, 천국 가서도 상급 자랑, 딱지치기 하려고요? 천국 가서도 가방 자랑(명품 자랑)하려고 합니까? 그게 무슨 천국이겠어요? 한 쪽은 상급 없다고 삐져가지고 울고 있고 한 쪽은 좋다고 하고.. 그게 무슨 천국이에요. 천국에 가서 촛불집회 할 일 있나..
도대체 천국을 몰라요. 왜? 본인이 주인공(거주지의 확장)이 되니까 천국은 내 거주지의 확장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주여 따라가겠나이다.” 하니까 니 거주지는 안 된다는 거에요. “처소를 마련해야..” 하니까 “나도 처소에 가면 되지요.” 하니까 “니 처소는 아직 안 만들어졌어.” 니 처소의 확장이 처소가 아니에요. 우리의 처소는 찢어버려요. 내 처소는 찢어버린다고요. 애초부터 우리의 처소는 없었어요.
처음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주의 것, “주 안”에서 태어난 겁니다. 예레미야에게 그런 이야기 하지요. ‘선지자가 된 것은 신학교 갈 때 니가 맹세(결심)해서 된 것이 아니고 나의 맹세이고 니가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선지자로 책정을 입었다. 나 너하고 의논하지 않았다.’ 이 말이거든요. 우리가 성도 되는 것도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았어요. 창세전부터 이미 예수님과 아버지가 의논하고 끝났어요. “재는 사랑 받아야 돼. 재는 미움 받아야 돼.” 이미 끝난 상태를 후차적으로 통보 받은 것뿐입니다. 통보 받은 인생이 이런 인생이에요.
우리 인생을 보게 되면 ‘통보’, ‘통보’.. 이미 주께서 확정하신 그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따라서 이렇게 보면 됩니다. 주님께서 성도를 친히 만들어내시지 내가 성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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