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9강-창 1장 26-27(인간)151021-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창세기

9강-창 1장 26-27(인간)151021-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93)

9강-창 1장 26-27(인간)1510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26-27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창 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성경에서 인간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거울을 보고 자기자신을 비춰 봐도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나름대로의 ‘내가 이렇다.’ 하는 이것을 스스로 결정해 놓고, 그것을 포기할 줄 모르고, 자기가 기존에 갖고 있던 ‘나는 이런 인간이다.’ 하는 그것을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강요하려고 하기에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이라는 뜻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에게는 인간은 없습니다. 남들은 인간이고 자기는 혼자 신이에요. 자기는 신이고 자기 빼놓고는 다 인간입니다. 자기 원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를 섬겨야 할 대상자로 보는 겁니다. 집안에 애 하나 등장하게 되면 신이 하나 등장한 것이고 다른 식구들은 그 신 앞에 복종합니다. “아이고, 예쁘다.” 할 때 그 애는 좋아하고 “미워!” 하면 애는 앙앙, 웁니다. 모든 인간은 이처럼 신으로 태어나서 허무하게 죽지요.

도대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오늘 본문이 성경에서 대단히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이렇게 있다 해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하다.’ 하는 것, ‘나는 이런 인간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이미 욕망으로 채워져 있기에, 그걸 미리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않는 한 이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를 절대자요 신으로 간주하면서 오늘 본문말씀 1장 26절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 대목을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되면, 이 대목이 딱 등장하게 되면, ‘그렇지. 인간인 내가 위대하고 절대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도 인정해줬다. 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날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날 건드리면 하나님을 건드린 것이다. 날 건드리지 마라.’하는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몇 년 동안? 2천년동안 그렇게 해석해 왔어요. 그 해석 다 틀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돼요. 모든 주석에 나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다 거짓말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주석, 큐티책자에 나온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다 엉터리에요. 왜 엉터리인가?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이런 인간이라고 해 줄 때만 나는 만족하겠소.’라는 것이 먼저 장착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엉터리같은 자기자신을 갖고 있으면서 확인차 성경을 보는 것은 보나마나 입니다. ‘첼렘’이 어떻고 ‘데무트’가 어떻고 원어를 따져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은 동물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나는 점이 뭐냐? 불과 도구와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인간을 과대포장을 하는데 이사야 2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인간에 대해서 수에 칠 가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내가 누구입니까? 인간은 무엇입니까?” 묻지도 말라는 거예요. 물을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성경은 네가 누구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있는 책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은, 제가 수천 번도 더 이야기합니다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지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 하려면 불경이나 철학책 보면 돼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은 뭐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여기 나오는 이 ‘사람’은 잊으세요. 이 사람은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날라 가버렸습니다.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바다를 만들고 땅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고, 그 다음에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여기서 ‘다스림’이 성립되지 않으면 사람 아닙니다. 다스림이 없다면.

바다의 모든 것,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자가 없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갈릴리바다를 지나가던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이 일어나자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열 두 제자 그 누구도 그 풍랑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이, 조용해!” 한 마디 하니 바다가 잔잔해 졌어요. 방금 읽었던 창세기 1장 26절에 유일하게 합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참된 인간은 마지막 아담 되시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 만물을 다스리니까. 쉽게 말해서 말발이 서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다스림이라는 것이 뭐냐? 권세라고 성경에 나와 있어요. 다스림은 권세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권세에 대해서 마태복음 7장의 산상설교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예수님이 말씀하는 가운데서 듣는 사람이 뭘 느꼈느냐 하면, 어떤 권세, 한 자로 하면 힘, 힘이 느껴진 거예요. 오늘 본문 설교 내용이 난해하기에 개략적이고 전체적인 것을 먼저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다스리는 두 종류의 성질의 힘이 있어요. 하나는 마귀가 다스리는 권세가 있어요. 이 세상의 신이 인간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확인했어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했을 때에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세력자가 지금 인간세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스림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다스림은 비진리적인 다스림이라는 거예요. 비진리적인 다스림. 그런데 예수님의 다스림은 뭐냐? 진리에 의해서 다스려지는데 예수님의 다스림이 진리에 의해서 다스려진다는 그 근거가 뭐냐?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천지를 만드실 때 말씀으로 만들었거든요. 그 말씀이 응축되면 진리가 되는 겁니다. 말씀에 부합되는 다스림 같으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부터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졌기에 말씀이 선포되면 거기에 종속되게 되어 있어요.

그동안 비진리에 의해서 인간세계가 다스려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그렇게 허용을 하신 겁니다. 한시적으로 허용을 하신 거예요. 왜 그런가? 창세기 오늘 본문에서 인간이 무엇이냐, 할 때 인간을 하나의 존재의 대상체로 간주하고 ‘인간이 무엇이냐?’ 이렇게 살피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인간이 밝혀지지 않습니다. 인간을 세워놓고 엑스레이 찍듯이 인간을 탐색의 대상체로, 분석의 대상체로 놓고 아무리 분석해봐야 인간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면 온전히 주님 앞에 서야 되는데, 주님이 분석하는데, 관람자로, 구경꾼으로 옆에 서 있다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은 반칙이지요. 환자가 되었으면 의사 앞에 온전히 서야지 자기자신을 대신해서 엉뚱한 인간으로 해놓고 자신이 환자인 주제에 감히 의사의 자리에서 “저 사람은 어때요?”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입니다. 케이블방송에서 건강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막상 본인의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의 그 기분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에요. 방송을 볼 때는 일단 건강하니까 관찰자의 입장이지만 병원에 가면 관찰자가 아니고 질병이 본인 안에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지요. 관찰자 입장이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다스림이 지상의 다스림으로 된 그 중보자역할이 인간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인간이냐, 하는 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만물이 다스려지는 여부에 따라서 다스려지면 인간이고 다스려지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권세, 힘,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 힘, 권세도 여전히 있는 겁니다. 그 힘, 권세가 올 때는 어떤 존재로, 대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여기에 다스리는 기능으로 밝혀질 때 그걸로 ‘사람이냐 아니냐?’가 밝혀질 거예요. 다스림의 기능이 유지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언약이 있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습니다. 그 약속은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라고 할 수 있고, 말씀이 현실 속에서 다스릴 때 그 다스림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인간이 하나 둘 씩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쉽게 이렇게 보면 돼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침운동을 할 때 늘 코스대로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름길을 발견했습니다. 집에 빨리 가는 길을 발견했다고 해서 운동하는 사람이 그 길로 가서는 안되겠지요? 집에는 빨리 갈 수 있는데 뭐가 빠져버리는가 하면, 운동력이 줄어듭니다. 운동하는 사람에게 지금길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필요한가? 운동하는 동안 경과해야 될 코스, 운동력을 그대로 유지해줘야 되거든요.

그런 기능을 할 때 두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과해야 된다는 것. 또 하나는 과정이라는 것이 있어요. 지금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뭔가를 경과한다는 것 하고 과정이라는 것 하고는 뉘앙스가 달라요. 일단 과정이라는 것은 아닌데요. 과정이라는 것은, 시작하는 사람이 과정을 거쳐 도달할 목표지점을 미리 알고 ‘그래, 이것을 통해서 저기 가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물이 불어난 냇가가 있어요. 저쪽에 보니 징검다리가 보여요. ‘저 징검다리 통통 건너서 건너편으로 가야지.’ 하면 징검다리는 하나의 과정이 되는 겁니다. 경과가 아니고 과정이 돼요. 왜냐하면 시작점과 목표점을 미리 당겨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경과라는 것은 뭐냐? 의사에게 “선생님,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면 의사가 하는 말이 “과정을 봅시다.” 이렇게 하지 않아요. “경과를 봅시다.” “내가 죽을 겁니까, 살겠습니까?” “그것은 경과 봐야 압니다.” 이러거든요. 경과라 할 때는 목표점이 빠져버려야 돼요. 그 경과 속에서 몰랐던 것, 예상 못한 새로운 인간상이 거기서 얻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걸 경과라고 해요. 신앙생활은 과정이 아니고 경과에요. ‘내가 이렇게 예수 믿으면 나중에 죽어서 천당 가겠지.’ 이것은 내가 생각한 나의 목표지점에서의 하늘나라지만 막상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사람을 좁은 길로 데려가게 되면 그 과정 자체가 경과를 통해서 계속해서 수정되는 겁니다. 이게 바꿔치기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산상설교에 “맹세하지 말라”는 말을 해요.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 5:34-36) 이 말은 뭐냐하면, 네가 바뀌지 않는 너의 입장에서 미리 앞을 내다보는 것은 그 개념들이 바뀌지 않는 너에게서 나왔기에 이것은 오류고, 곡해고, 오해에 불과하고 이것은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엉터리에요. 주께 맡기게 되면 예상 못하게 주께서 손을 될 텐데 성령을 안 받은 입장에서 성경을 보니까 자기가 길을 찾아요. 천국 여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꼬불꼬불꼬불, 사다리타기 합니까? 미로찾기 해요? 그렇게 해서 찾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선교단체에서 하는 대표적인 것이 뭐냐? 천국 그려놓고 밑에 지상 그려놓고 가운데 십자가 그려놓고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천국 간다는 겁니다. 그 십자가는 지금 구원받지 못한 내가 예상하는, 내가 임의로 결정지은, 죄인이기에 죄인답게 엉터리로 조작하고 날조한 십자가지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 했는데요? 자신의 구원을 자기가 아는 식으로 가는 것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고 했지요. 남포교회 그 목사의 잘못이라면 그게 잘못된 거예요. ‘구원 그 이후’라는 그 코스를 자기가 미리 짐작하는 그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엉터리에요. 대표적인 엉터리가 천로역정이라는 겁니다. 청교도 책인데 잘못된 거예요. 청교도를 보면 옛날 토속, 민속놀이 하는 것 같아요. 도, 개 ,걸, 윷, 모, 던져서 건너뛰고, 잡고, 가다보면 골인지점이 나오고요. 그래서 교회가 놀이하는 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코스놀이가 아니에요. 놀이동산이 아니에요. 매일같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입니다. 매일같이 “죽으면 죽으리라.”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는 당겨서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맡기면 되는데, “맡기면 이거 주실 거지요?” 이게 문제인 거예요. 하늘나라가 전당포입니까? 과정이 아니고 경과를 하게 되는 거예요. 이 경과에 대해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항상 부딪히는 것이 뭐냐? 예정론에 부딪혀요. “주께서 나 택한 것 맞습니까?” “네가 알아서 뭐하는데?” 자기가 그 경과에 들어가지 않고 미리 당겨서 알겠다는 거예요.

우리 인생을 어디에 맡기는가? 주님의 권세에 맡겨야 돼요. 왜냐하면 주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폭풍과 바람도 잔잔해졌어요. 주님 앞에 우리가 맡겨지게 되면 우리는 누구하고 대화해야 되느냐 하면, 남하고 잘 해보려고 하지 말고 주님과 대화해야 돼요. 맨날 주님은 우리더러 이렇게 하지요. “잔잔해라. 잔잔해!” “주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잔잔해라. 입 다물라! 그 입 다물라! 잔잔해라, 이 폭풍아!”

“우리는 왜 다스림을 받아야 됩니까?”라고 물으면 인간은 물리적으로, 의학적으로 아무리 분석해도 나오지 않는 것이 인간을 두르고 있습니다. 사랑, 미움, 애정, 행복, 이런 추상명사에 해당되는 것들로 인하여 사람들은 굉장히 울고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기도 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날 사랑하지 않고 아내가 날 미워하고, 이것 때문에 자살한다니까요.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자존심이 세다 보면 빵을 줘도 “이런 거 나 안 먹는다.” 하고 집어던져요.

인간은 물리적인 인간, 화학적인 인간, 그 이상의 뭐가 있어요. 뭔가 힘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고 어떤 힘에 둘려 있는 거예요. 뭐가 이렇게 인간을 힘들게 하고, 심지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해야 되는데 그것 말고 더 원하는 것이 있는 것, 그 욕망과 욕심, 그 정체, 그 괴물의 정체가 뭐냐? 인간이 경과를 해봐야 알지 인간이 미리 짐작하면 안됩니다. 성경에서 하나의 예를 들면 이사야 5장 11절,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지금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뭐냐? “밤새도록 술 퍼마시고 아침이 되어도 또 술 퍼마시고 포도주에 취하면서 심심하니까 연회장에 각종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보조를 맞추었어도.”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여호와의 행하심에 관심이 없다는 것.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입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잊었도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온다는 이것은 경과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 경과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들어온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힘이 세니까 “그러지 마!”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권세 이전에 인간이 생각하는 권세는 뭐냐? 영웅적인 힘, 어벤저스 같은 것, 놀라운 영웅적 힘을 발휘하는 것, 터미네이터, 단번에 때려 부수고, 망치 들고 설치고, 쟁반 던지는 것, 토르, 캡틴 아메리카,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권세는 뭐냐? 상처받고 채찍에 맞는, 희생당하는 힘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은 주님이 돼요. 아무리 인간들이 연구하고 탐구해도 발견되지 않는, 우상하고의 차이가 확실하게 나는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희생의 힘입니다. 악마한테 이기는 것은 희생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피, 살과 피를 흘린 것, 그 피가 악마를 이기지 그 외에 배트맨, 스파이더맨, 이런 것으로는 마귀를 못이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을 원해요. 몰래 은행에 숨어들어가서 나에게 돈 가져다주는 그런 것을 좋아해요. 나에게 잘해주는 영웅들을 원한다는 그것은 그만큼 어릴 때부터 내가 신으로, 절대자로, 하나의 꼬마신으로 죽 살다가 이제는 어른이 된 신으로 살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거예요.

누가 그런 경과를 줬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적하라고 마귀가 이만큼 키워온 거예요. “목사님,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마귀는 지금 내가 되고 싶은 대로 그만큼 구원해주기 위해서 나에게 보이지 않는 힘으로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그 세력이 마귀입니다. “너 그러면 나중에 부자 못된다. 너 그러다 몸 아프면 어쩌려고? 너 그러다가 꼴찌 하는데?” 이게 바로 나를 이만큼 키워온 악마의 힘입니다. 그 악마의 힘에 대해 전문가들이 있어요. 세 글자인데 부흥사들입니다. 교회 부흥사들. 또는 금요철야기도회에서 강대상 두드려가면서 부흥사 되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두고 성경에서 마귀의 졸개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를 알아요. 어릴 때부터 새끼 무당으로 자라나서 어른이 되어서도 ‘남한테 지면 안돼. 나는 성공해야 돼. 나는 성공신화를 일궈야 해.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이런 식으로 꼬마신이 어른신이 된 거예요. 이것을 후원하고, 격려해주고, 독려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그 힘이 바로 마귀의 힘입니다. 마귀가 마귀를 부르고 귀신이 귀신을 불러낸 거예요. 여호와의 하신일은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사야 5장 12절의 말씀처럼 여호와의 하신 일은 관심조차 없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전혀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길로 갔거늘.” 그런 구절 전혀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탕자입니다.” 그것도 관심이 없어요.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관심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가? 그걸 기대하게끔 마귀는 우리 내부를 조작했고 우리는 그 조작된, 잘못된 기억에 의해서 자아가 만들어져서 우리는 원래 늘 찾던 그 분, 나에게 잘해주는 그분, 그분 찾아서 오늘도 절로, 그리고 교회로 갑니다. 절로 (저)절로 가고, 교회로 (저)절로 오고. 온천하가 마귀세계라 하는 이것은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했더니 미움 받는다? 마귀의 세계 맞잖아요. 마귀의 세계를 증명해 보세요. 증명해 보는 방법 간단하지요. 진리 전하고 복음 전하면, 진리의 힘, 복음의 힘을 전하면 미움 받게 되어 있어요. 칭찬받지 않습니다.

그게 딱 이 세상이 어둠이라는 뜻이잖아요.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오히려 핍박한다는 요한복음 1장의 말씀,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 마귀에 속했다는 것을 어떻게 달리 더 설명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한다는 이사야 6장 5절의 이 말씀, 어떻게 더 증명이 되지요? 모든 세상자체가 어떤 힘에 눌려 있는데 그 힘은 너희들 보기에는 정말 좋은 힘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예수님 십자가의 안목으로 볼 때는, 바로 악마의 힘에 너희들이 아주 즐겁고 기쁘게 거기서 행복을 찾고 만족을 누리면서, 더, 더, 더, 더, 음주측정 하듯이 더, 더, 더, 더, 더, 계속해서 그것을 요구하는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사야 2장 아까 읽었던 대목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이게 이사야 2장 22절의 말씀입니다. 3장에 넘어가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여기서 그 의뢰했고 의지한 대상이 뭐냐?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 이 모든 것을 의지했습니다.

요새말로 하면 과학이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이끌어낼 수 있는 잘된 사람, 유명한 사람, 권세 있는 사람, 미래를 예측하는 마술사, 요술사, 과학자들, 그들을 전부 다 의지했습니다. 왜? 자기를 키워주니까. 어떤 힘, 기존의 힘을 더 증강시켜 주니까. 기존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경과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으로 보는 거예요. 이 힘만 있으면 언젠가는 저 천국도 따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약, 로마서에 나오듯이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행함으로, 여기서 부지런히 행하면 그것이 밑천이 되어서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고 그렇게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가르쳐 왔던 겁니다. 그러면 그 행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행하려면 네가 갖고 있는 것으로 재량껏 행해야지요. 성의와 정성을 다 표해야지요.

그러나 사도행전, 예수님의 복음서를 보게 되면 12년 동안 병든자, 귀신들린자, 본인의 의사 아니었고 38년 된 병든자,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것이 자기의사가 아니었습니다. 세리 삭개오는 세리된 것이 자기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주님이 자기 집에 방문하는 것도 자기 뜻이 아니었고, 자기키가 작은 것도 자기 뜻이 아니었고, 주님 오시는 그 타이밍에 맞춰서 키가 작은 탓에 보이지가 않으니 나무위에 올라갔을 뿐이고, 주께서는 그걸 예상했고, 삭개오에게 찾아갔고, 돈 많은 세리가 돈을 초월하는 성도가 된 것, 이 모든 것이 새로운 권세에의 진입이고 새로운 권세가 찾아온 거예요. 십자가의 권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어요. “네가 높은자 되려고 하지 마라. 그런 것은 세상권세자들이 하는 짓거리다. 너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춰야 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으면 천국에 못간다.” 제자들이 생각하기를 ‘그러면 어린아이같이 어떻게 되지?’ “어린아이 되는 것? 내가 알려줄게. 경과 속에서 쓴잔을 마셔야 된다.” 어린애가 된다고 해서 키가 작아지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아빠!” 혀 짧은 소리로 재롱이나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쓴잔을 마셔야 한다. 그런데 그 쓴잔은 나부터 마신다. 그 내가 마신 쓴잔을 너희가 마시게 되면 너희들은 비로소 기존의 악마의 세력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그제야 발견할 것이다.”

성령이 오게 되면 육에 속한 것과 성령에 속한 세계가 사뭇 다르고 전혀 다른데 어떻게 다른가? 양쪽 다 서로 다른 권세를 발휘하고 있어요. 성령을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권세 안에서 헤엄치게 되어 있지요. 왜? 권세니까. 어떻게? 옛날에 우리가 마귀를 못벗어나서 마귀 안에서 헤엄치던 그 양상으로 이제는 성령 안에서 헤엄치게 되면 주님께서 관리해주시고 주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탄식소리와 신음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령께서 탄식하며 기도합니다. “너는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돼. 아버지의 뜻을 아는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미리 아신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다 한 저 자를 주여, 반드시 영광스럽게 해주옵소서.”라고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지요. 우리는 눈만 뜨면 그저 힘, 힘, 힘을 주옵소서, 힘을 주옵소서. 이것은 마귀가 예수님을 두 번째 시험할 때 그 시험한 거예요. “네가 뛰어내릴 수 있는 힘,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힘이 있으면 너는 목회 성공할 것이다.”

지금도 많은 목사님들은 개척교회 하면서 이런 행운의 시나리오를 짭니다. ‘어느 병든자가 우리교회에 와서 병고침 받았다고 소문나게 되면 이 동네 저는자, 병든자, 정신병자, 다 몰려와서 교회 부흥되고 예배당 새로 짓게 되면 나는 큰 교회 당회장이 될 것인데.’라는 꿈, 목사치고 그런 꿈을 안 꾼 사람이 없을 거예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든지 가게 되면 그 사람이 주의 종이라고 소문이 나서 부름 받아 나선 그 몸이 사창가에서 전도하면 다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고, 밥 퍼주면 밥 얻어먹고 다 예수 믿게 될 것이고 나는 유명하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당했던 시험을 똑같이, 목사뿐만 아니고 모든 교인들도 매일같이 겪는 일입니다. 그 권세, 그 경과, 주께서 몰아넣은 경과 속에서 내가 나조차 다스릴 수 없는, 나를 둘러싼 마귀의 힘조차 내가 다스리기는커녕 빠져나갈 수 없는 입장인 것을 그 경과 속에서 깨닫게 해주시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주 앞에 맡기게 되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그 십자가의 권세가 그 죄를 의로 바꿔주는 권세를 맛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인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존재가 아니고 그 기능을, 그 기능 속에서 일하시는 주체자, 예수님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1장 26, 27절을 지은 겁니다. 처음에 난 인간은 모형이었고 그림자였습니다. 첫 번째 아담은 둘째 아담의 상징물이었습니다. 표징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미지에 불과했던 거예요.

진짜 인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진짜 인간, 그 인간들이 모인 것이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주신 권세와 내가 원하는 세속적인 권세가 싸워서 늘 십자가의 피가 승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지만 그 저주마저 대신 채찍 맞음으로 가져가신 그 은혜만 우리를 포위하고 우리를 늘 인도하고 다스려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9강-창 1장 26-27(인간)151021-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22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7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4,992 묻고답하기 (8탄) 어느 목사님의 질문과 답변 민수기 최고관리자 15-10-31
14,991 자유게시판 10강-창 1장 28-31(인간의 할일)151028-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0-29
14,990 우리교회 인간의 할 일 151028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0-28
14,989 강의 사무엘상 7강(누구나 메시야), 마태복음 69강( 12보좌성) 151027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0-27
14,988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0-26
14,987 자유게시판 54강-신 9장 13-17절(깨진 돌판)151025-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0-25
14,986 자유게시판 62강-고전 11장 1절(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151025-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25
14,985 우리교회 깨진 돌판 151025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0-25
14,984 우리교회 예수님의 어릴적 151025 - 최고관리자 15-10-25
14,983 우리교회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151025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25
14,982 설교 그리스도와 사도와 성도(고린도전서 1:1)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25
14,981 묻고답하기 남자와 여자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25
14,980 강의 혈연관계 151023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15-10-24
14,979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7장 40절(가락-거주지)151015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15-10-23
14,978 강의 [15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41 - 가시적 초월 잠언 최고관리자 15-10-22
열람 ➜ 자유게시판 9강-창 1장 26-27(인간)151021-이 근호 목사 창세기 최고관리자 15-10-21
14,976 자유게시판 십자가마을 문서파일 부탁 [신학] 최고관리자 15-10-21
14,975 우리교회 인간 151021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0-21
14,974 자유게시판 대전- 68강 놀라운 구원(마 19:23-28)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5-10-21
14,973 자유게시판 대전-(사무엘 6강) 속성 사무엘상 2:6-9 사무엘상 최고관리자 15-10-21
14,972 자유게시판 61강-고전 10장 30-33(하나님의 영광)151018-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18
14,971 자유게시판 53강-신 9장 9-12절(돌판)151018-이 근호 목사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0-18
14,970 우리교회 돌판 151018 신명기 최고관리자 15-10-18
14,969 우리교회 하나님의 영광 151018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18
14,968 설교 하나님의 영광(고린도전서 10:30-33)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5-10-1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