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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 68강 놀라운 구원(마 19:23-28)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 68강 놀라운 구원(마 19:23-28)

이름 : 주향(IP:222.116.177.93)

놀라운 구원(마 19:23-28) 대전- 68강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19: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19장23절부터 합시다.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부자가 천국가기 어려우면 그러면 천국은 누가 간다해야 되지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만 갈수 있다라는 오해가 되지요? 지금 모든 사람이 부자를 지향하잖아요? 그러면 지금 가난해도 언젠간 부자가 되고야 말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잠재적인 부자가 되어 버려요. 부자에 대한 그리움, 부자에 대한 요망과 소망, 이런 것을 품고 있는 한 그 사람은 가진 돈은 부자가 아닐지언정 마음은 부자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주님의 일관된 원칙과 위배되지요. 마태복음 5장을 보통 팔복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팔복이라는 말이 잘못됐어요. 거기서 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이 되요. 이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우린 복 받을 자격도 안되고 그리스도께서 없는 복을 확장시켜 나가요.

검은 잉크를 책상 위에 쏟아 부으면 시커멓게 되지요? 시커멓게 된 그것이 복이란 말이에요. 복은 주님 안에 들어 있지요? 주님이 쏟아 내시면 비로소 닿은 그 곳이 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철저하게 인간이 기대하는 복은 차단 시켜요. 그 차단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차단되지 않으면 주님께서 주시고져 하는 것이 혼란을 유발시키고 곡해와 오해를 유발시키게 되는 겁니다.

아마도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같을껄? 그것은 엄청난 오해입니다. 특히 어려운 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사람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왔지요? 그럼 예수님을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이라는 개념의 범주에 우리고 들어 있고 예수님도 들어 있어요. 주님께선 이러한 인간들의 오해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받아 들여 놓고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지요! 그렇게 되면 하늘나라가 저 위에 있는 게 아니고 인간 속에서 새롭게, 새로운 안목으로 생겨나는 이것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네 옆에 있다라는 거에요. 천국이 네 옆에 있다라는 것이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의 이야기이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보면 네 속에 있다가 되요. 네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속에 있다가 되요.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점령했고 아까 첫째 시간에 제목이 속성이라고 했는데 우리를 포대기 삼아서 밤 담듯이 주님의 속성을 집어넣으면 되지요! 주님은 속성은 우리가 줍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을 단절이라 합시다. 단절의 대표적인 것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구약에서의 광야입니다. 설명하자면 광야란 땅과 애굽 땅과 연결된 동일한 땅이라고 생각하지요. 그것은 니 생각이고, 인간들 생각이고,

여기에 주님께서 사건을 집어넣어요. 홍해 사건, 같은 말로 하면 어린 양이 죽는 사건, 사건을 집어넣으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특이성을 띱니다. 땅인데 전에 살던 애굽 땅과 다른 일들이 일어나는 특수한 일들이 벌어지는 새로운 땅이 되지요. 애굽 땅과 광야는 이미 단절되어 있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이 홍해 바다에 들어섰습니다. 왜 들어섰는가?

홍해 바다를 건너서 애굽에 살던, 자기 옆집에 살던 히브리인들이 홍해를 무사히 건너서 맞은 편 땅에 도달했기 때문에 자기네들은 뒤따라가면 된다고 생각 했지요. 뒤따라가면 되는데 애굽 군사가 들어섰을 때 홍해 바다가 갑자기 합쳐졌지요! 그러면 물어 봅시다. 이것이 개인 성품의 차이입니까? 소속의 차이입니까? 소속의 차이지요! 착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지요? 히브리인 중에도 나쁜 사람들 많잖아요? 이것은 개인의 성품이나 성격이 문제가 아니고 소속의 차이지요?

소속의 차이가 뭐냐 하면 곧 대장의 차이에요. 애굽 대장과 히브리인의 대장 즉, 어르신의 차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단절이 일어났다는 말은 애굽의 왕초하고 히브리인의 대장하고 이 자체가 단절상태로 되었다는 위로 올라가 영적상태로 보면 단절 사태인데 그냥 단절이 아니고 이것을 전쟁 중이에요. 전쟁 중, 싸움하고 있는 거에요. 어른 들 끼리 싸우고 있고 밑에는 친하게 지내고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그럴 수 없지요?

위에서 싸우면 밑에서도 싸워야 되요. 그렇잖아요? 소속이 다르니까! 예를 들어 초등학교 운동회 때 같이 친하게 지내다가 선생님이 학생 번호대로 나누다 보니까 한쪽은 백군 되고 한쪽은 청군 되다 보니까 운동회 날은 서로 원수가 되는 거에요. 한쪽은 울고 한쪽은 좋다고 야호! 부르고 왜냐하면 위에서 갈라놓았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어른신의 결정대로 우리 운명은 그 속에 속해버린 거에요. 항아리가 다르면 그 속에 뭐가 들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항아리를 통째로 들고 가게 되면 안에 들어있던 간에 같이 들려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부활로 이동했다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뭣도 모르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려 이미 이사를 한겁니다. 이사 한 것 한 턱 내세요. 이동 한겁니다.

이동한 것을 목사님이 어떻게 압니까? 저쪽에 있는 사람과 단절을 느낄 때 이동 한 것을 알지요. 순복음 교회에선 주여! 주여! 부르짖으면서 행함으로 그저 1등 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 하고 있는데 우리는 기도도 안했어요. 아무 것도 안했어요. 지금껏 아무것도 안했고 앞으로도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어요. 그래서 복음이 한국 교인들에겐 낯설게 느껴지는 겁니다.

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안해야 된다고 하는가? 뭐든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한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안 해서 벌 받는 느낌이 들고 그것은 어르신이 달라서 그래요. 그 쪽 어르신 선악과 어르신이고 이쪽은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안겠다는 어르신이고 어르신네가 달라서 그래요. 전에는 우리에게도 이런 어르신이 있었어요. 뭘 지켜야 되고 행해야 되고 교회에 뭘 해야되고 우리의 어르신이 바뀌었어요.

이 어르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안아요. 이것만 해요. 그냥 달라야 돼! 저쪽과는 달라야 돼! 그것만 원해요. 단절을 설명 할 때에 여기서 다시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게에요. 부자가 천국에 못가면 그럼 누가 갑니까?라고 할 때 제자들은 지금 부자들을 개인으로 본거에요. 소속으로 볼 줄 몰라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오해하기를 지금 제가 예수님 말씀 잘 듣지요? 이렇게 한거에요.

내가, 내가 예수님 말씀 잘 들어서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해 준다는 겁니다. 내가 주님 말을 잘 안들으면 주님이 쫓아 낸다는거에요. 이건 어불성설 말도 안되는 것이에요. 주께선 택한 자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내가 택한 자는 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들의 버릇이 자기가 자기인생을 꾸려 나가는 이것이 더러운 버릇이 되어 버리니까 내가 나를 안 돌보면 책임질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벼랑에서 손 놓으세요. 절벽 끝에서 손 놓으세요. 절벽이 왜 있는 줄 아세요? 손 놓으라고 있는 거에요. 손 놓으세요. 죽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죽으면 또 나사로처럼 살려 줄 수도 있는 데, 아 살아나면 안된다. 군대 생활 또 해야 되니까!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니고 내가 어디에 소속 되어 있는가를 사후적으로 믿어 져야 되는 거에요. “그럼 주님께 소속되어 있는가를 어떻게 우리가 확인한다는 말입니까? 참~답답하네! 그 방법을 이야기 해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뭐냐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라! 누가? 내 인생이 이상하게 꼬여! 이상해! 내 뜻대로 안돼! 안되도 너무 안돼요. 그리고 또 증거가 뭐냐하면 예수님을 백날 믿어도 나는 나이트클럽이 좋아! 화투가 좋고 골프가 좋고 왠지 취향이 저쪽 취향이야! 세상 취향이고 하나님 안 믿고 그냥 친구들과 노는 저쪽 취향이에요. 그걸 날마다 느껴지는 겁니다. 이게 내 힘으로 천국에 갈 입장이 아예 안돼는 구나!

착함 꽤나하고 십일조 꽤나 한다고 해서 주께 먹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이건 내가 손 댈수 없는 거에요. 내 성질을 내가 아는데 내 성질로는 백날 해 봐야 고무줄 당겼다가 툭 놓으면 다시 세상적으로 훅! 가버린다 말이죠! 돈 으로도 못가요~ 하늘나라~ 방금 불러 놓고도 돈이 천국이 돼가지고 갈수밖에 없는 나이에 관계없이 팔십이 되도 마찬가지고 구십이 되도 마찬가지고 거기에 푹 빠져 버리는 그런 식이에요.

제자들이 지금 너희 눈에는 부자가 개인으로 보이느냐 하는 이것이 부자와 예수님의 만남의 취지입니다. 부자가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이렇게~했습니다. 개인이 내가 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구원받을 당사자인 나는 주님 앞에 이 정도로 성의를 표했습니다라는 그것이 부자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예수님을 따르는 12제자들도 어찌 그리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지~

“그래~! 저 사람이 저렇게 착한데 설마~주께서 구원 하겠지!” 그런데 모든 소유를 팔고 따르거라 했을 때 근심하며 돌아갔잖아요? 그것이 개인의 한계입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팔고라는 말을 안하셨으면 따라 갔을 거에요. 왜냐하면 개인은 거절합니다. 단체로 오세요. 이게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개인 입장은 안 받습니다. 단체 입장만 예약 받습니다. 그러면 그 단체가 누구냐? 구원 받을 단체를 인간은 몰라요. 인간에겐 자기의 어르신이 있습니다. 마귀가 있습니다. 귀신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을 봅시다.
(마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있지요? 사람 나오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강한 자가 나오지요? 사람 위에 뭐가 있다?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강한 자가 있다. 그런데 더 강한 자가 누구냐 담을 넘어 온 도둑이 와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최고의 강한 자 그 강한자 보다 더 강한 자가 누구다? 예수님 본인이다. 누가 믿겠어요? 행색이 초라한대~

몰라요. 또 허리춤에 암행어사 마패라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남원 고을에서 사또 보다 더 강한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춘향이는 더 강한 자를 사랑했잖아요? 얼마나 복음적입니까? 변 사또가 “나한테 수청을 들라!, 아닙니다, 저는 일부종사 합니다.” 그 다음에 변 사또 목 자르고 암행어사가 얼굴 가리개(사선紗扇)하고 묻잖아요. “네가 관가의 기생이니까 마땅히 나한테 수청을 들라!” 오너는 다 똑같아! 오너는 남자라 다 똑같네! 이렇게 됐거든요!

그때 흐뭇해하면서 “나다! 춘향아~”하면 “서방님~” 이 이야기가 바로 영화 암살에 나옵니다. “당신은 왜 같은 동지를 배신했습니까? 나는 조선이 해방될지 몰랐거든!” 구원의 상태를 앞서서 아시는 분은 주님 밖에 없어요. 제자들은 모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강한 자에게 굴복하잖아요! 그 강한 자의 대표가 어린 소녀였습니다. “아저씨! 내가 봤는데” 성경에선 소녀로 나오지만 사실 주인집 강아지가 짖어도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 거에요. “가만있어!, 멍~멍” 세상의 개는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지금도 짖고 있습니다.

“네가 예수 믿어 구원받아 천국 간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런 소녀들이 철딱서니 없는 소녀들과 개들이 한 가득 있어요. 우리 속에 특히 20대 젊은 애들에겐 주위 친구가 전부 철딱서니 없는 개입니다. “네가 세상을 알아?” 이렇게 놀리고 “네가 세상의 강함을 알아?”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을 보세요. 그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한계입니다. 자기의 한계, 자기 힘으로 강한 자를 이긴다? 못 이긴다? 그러니까 마귀는 계속해서 베드로를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베드로가 “제가 죽기까지~” 목숨을 담보로 했지요? 도박판에서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칩으로 쳐주지 않아요. 이런 것은 돈으로 안쳐줘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 내놓을 돈이 없어요. 우리는 도박할 자격이 없다니까요. 우리에겐 내가 구원될 수 있도록 거는 도박 자금이 일체 없다니까요! 부자를 보세요. 돈 나눠주라고 하니까 근심하며 돌라가는 것을 보세요.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내 것 가지고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내 목숨을 구할 만한 값을 내 쪽에서 내놓을 수가 없어요.

마더 테레사 있지요? 성녀 테레사의 착한 일 한 것을 다 모으면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본인이? 복음은 딱 하나입니다. 어떤 것을 내놓아도 어떻게 희생하고 봉사해도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를 구원하지 못해요. 아무리 50년 동안 개척 교회하면서 봉사해도 죽기까지 문둥병 치료하고 백날해도 우리는 안 됩니다. 집 팔아 바치고 뭘 바쳐도 교회에 다 바쳐도 절대로 요만큼의 복 하나 안 들어옵니다. 이런 것을 교회에서 외쳐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적금 하듯이 십일조 해도 선교 헌금해도 애들 성적 하나도 안 오르고 여러분이 복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완악함만 더 증감 될 뿐이지요. 점점 더 마귀의 속성에 가까이 되지요. 완고한 고집은 평신도에서 집사, 집사에서 장립 집사에서 권사, 장로 되면 될수록 그 완고함이 점점 더 철근 같아요. 강해요. 석고에서 다이아몬드까지 점점 더 강해져 목사 쯤 되면 와~그걸 누가 깹니까?

그 목사랍시고 마음속에 어쨌든 나는 목사인데 하는 그 기득권을 무슨 수로 깨요? 차라리 목사되면 이렇게 해야 되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마귀야! 네가 나를 망하게 하려고 목사되게 했구나! 이제야 네 술책을 알았다!” 이런 고백을 해야 돼요. 그렇게 하면 목사해도 괞잖아요. 그렇게 되면 자기 본심을 증거하게 될테니까 그러면 괜찮은데 그것을 숨기고 복음 가르쳐서 교회 한번 해보겠다는 그래선 안됩니다. 19장 28절 한번 봅시다.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께서 들뜬 제자들을 떠 띄어줘 버렸어요. 붕~ 띄어줘 버린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 중에 누가 높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그런데 뒤에 나오기를 심판이 있다 하니까 이거는 더 기분이 업 된거에요. 뭐가 빠졌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뭐냐하면 네가 권세자가 되려 하지 말고 내 쓴잔을 마실 수 있느냐 이 말이죠? 누가 더 크나이까라고 할 때 어린 아이를 데려 왔잖아요? 이처럼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고 했지요?

그러면 낮추려면 있던 자리에서 낮춰야 할텐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의도적으로, 한껏 높여 놓고 낮추라고 하니까 차라리 그 소리를 안 들었으면 그냥 있던 자리에서 낮추면 되는데 한껏 부풀어져서 부푼 가슴을 안고 이미 부풀어진 것을 어떻게 낮춥니까? 점점 더 주님과 멀어지지요?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으로 인해 새로운 정보를 앎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내막을 알면 알수록 천국과는 더 멀어지는 거에요.

자! 어디가 고장 났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주제가 못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귀가 점령했기 때문에 자기를 더욱 교만케 하는 욕망이 더 커지는 이상한 기계에요. 고장난 기계가 된거지요! 이것을 신약에서는 육이라 하지요! 한마디로 육이에요. 요한복음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이게 무슨 새로운 의미가 창출됩니까? 육은 육이다(6=6)? 오는 오다(5=5)? 사는 사다(4=4)? 이건 예수님 말씀만 못 알아듣는 게 아니에요. 요한복음도 못 알아듣고 사도 바울 말도 못 알아들어요.

너희는 육신이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전에 예수님을 육으로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성경 백독해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왜냐하면 그걸 듣게 되면 본인이 육이기 때문에 자기를 더 높이는, 안 그래도 지금 성향이 자기를 더 못 높여서 환장한 그런 욕망에다가 휘발유를 더 붓는 거에요. 단절을 경험하지 않으면 쓴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결코 열 두 보좌에 앉지 못한다. 왜냐 열 두 보좌의 역할이 있어요. 기능이 있어요. 그게 뭐냐 12지파를 심판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12지파를 심판하는 것은 나중 문제이고 제일 먼저 심판하는 어르신은 누구냐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방식이 뭐냐? 그것은 주님이 멘트 날리는 모든 것이 심판의 멘트잖아요. “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게 심판이에요. 속했다는 게 세상에는 인간들만 있는데 거기에 주님이 와 버렸다는 말이죠.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천국은 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속에서 솟아나는 거지요?

공관복음에는 네 옆에서 사도 바울의 편지에선 네 속에서 천국이 올라온다고 했고 속에서 올라 올 때는 죄와 의가 올라오는 거에요. 우리의 죄와 더불어 의가 올라옵니다. 언약이 오면 양쪽을 다 뽑아내요. 언약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시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 매일같이 반복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천국으로 끄집어내는 겁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구약에는 다윗의 나라이지요. 한번 적어 볼께요. 구약의 다윗부터 합시다. 구약부터 다윗의 나라입니다. 다른 모든 이방나라를 통치하는 세계,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어요. 누가? 열심히 기다렸지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오실 자가 당신이니까?: 이것이 바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되요. 이 의는 어디에 오게 되는가 하면 우리 마음에 들어와요.

마음의 할례를 받듯이 마음속의 의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의 의가 되어 버리면 우리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어요? 하늘에 있지요?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와 버리면 우리의 마음을 포장하고 있는 신체는 뭐냐하면 이 땅에선 나그네가 되지요! 나그네 또는 떠돌이 또는 방랑자 다른 말로 하면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 (최백호). 사도 바울의 소원은 옷 갈아입는 거에요. 어서 육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받았던 (계시록) 하늘의 속한 옷으로 갈아입는 거에요.

옷 갈아입는데 앞에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요, 죽었다고 옛날 옷을 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거에요, 갈아입는데 문 밖에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어요? 왜 이래요? 무슨 일 있어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가 옷 갈아입었다가 옷 벗어 버리고 다시 세상 옷으로 바꿔 입고 나왔어요. 아이고~! 철없는 누이동생들 잘못 만나서 이제 편안히 쉬려고 했는데 쉬지도 못하고 삑! 호출 받고 다시 이쪽 세계에 와서 또 고생하고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너 안 죽은 것 맞지? 너 가짜로 죽었지?” 이렇게 욕 얻어먹고,

스데반 집사의 입장에서 보면 불쌍해요. 세상사람 전부다 왜 불쌍하냐? 어르신이 없어요. 그 쪽에는 마귀가 어르신이거든요. 마귀가 얼굴이 빨게요. 중세의 그림에 보면 옛날 버전은 마귀얼굴이 빨게요. 그 색깔 따라 세상 모두가 홍조라 빨개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이 만약에 천사처럼 하얗다면 자기 혼자 하해. 그러니까 미운 오리 새끼라 했어요? 오리 속에 백조가 하나 끼여 있는데 불쌍해요. 나중에 보니까 백조에요. 이렇게 외로와요. 외롭고,

이렇게 외로우면서도 안타깝고 그들이 모른 것에 용서가 되고 그런겁니다. 앞으론 여러분 얼굴 색깔보고 구분하세요. 빨갛거든 공산당이 아니고 마귀 색깔이 빨가니까 (저쪽이고) 하야면 그런 사람이 (이쪽이고) 이게 본성이 달라요. 그것은 개인이 착하고 안착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직 어르신네가 달라서 그래요. 그러면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요. 잘 하려고 하지 마세요. 가만있으면 어르신이 만들어 줄거에요.

어떻게? 단절의 순간이 올겁니다. 절망의 순간, 실망에서 더 나아가면 절망이 기다립니다. 보통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실망하잖아요? 그것은 저차원적이고 고차원적인 실망은 성령이 역사하는 실망은, 절망은 내 스스로 인생을 손 댈수 없다는 것을 아는, 그런 절망까지 가도록 하셔서 절망 속에서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면 나는 버려져도 되는 처지에 놓여있는 그것이 나. 그동안 무심해서 몰랐던 나는 뭐냐? 하나님이 버리면, 버려도 될 만한 쓰레기 같은 나, 이게 바로 나에요.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로마서 9장 3절 봅시다. 혹시 나중에 다시 미국 강의할 기회가 되면 이 본문을 다시 하고 싶어요. 내가 주님으로부터 끊어진 자라고 할지라도 주께서 쓰시고자 한다면 저는 군말하지 않겠습니다. 죽는다는 말이 자살한다는 말이 이런 순간을 가지고 자기 죽음이라고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털 끝 만큼도 내 일이라는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저주가 일어나도 주의 일이고 축복의 일이 나도 주의일이고 나를 천국 보내도 내가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셔서 주님은 자석이고 나는 거기 붙어있는 쇳가루가 되서 자석이 당기니까 나는 할 수 없이 끌려가는 거에요. 예전에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교실에서 떠들면 선생님이 어떻게 합니까? 벌주는 방법들이 다양한데 그 중 하나가 귀 잡아당기는 것이 있어요. 졸면 그냥 깨우면 되는데 선생님이 화가 나니까 자고 있는 것을 귀를 잡아당기니까 끌려오지요?

주님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요. “ 너 나와! 나와!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 (손목)시계 풀면서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조폭인데요! 지금 나하고 장난치나? 이렇게 끌고 나오듯이 주께서 우리를 끌고 나와요. 그러니까 끄는 모습이 2등이고 1등이고 끄는 모습이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고 어르신이 귀 잡고 강제로 끌고 있는 거에요. 그럼 우리는 겸손 한다고 감사한다고 하고 뭘 감사해요? 이건 더 잡아 당겨야 되요.

“네가 감사하다고 하면 교만 안하는 줄 알아?” 돌아서면 또 교만해져요. 그럼 또 잡아당기시고 어디 까지 갑니까? “ 주여! 저주하실지라도 잡아 당기이소!” 주께서 저주할지라도 주께서 쓰신다면 막 잡아당겨 주이소 될 때까지 나야 어떻게 되든 주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무익한 종이오니 쓰실대로 쓰시다가 나중에 버리셔도 괜찮아요. 이 정도까지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죠. 어르신이 있고 내가 아리라 다른 분.

그 분은 나의 주. 그래서 주라고 하는 거에요. 이것은 평소엔 못 느낍니다, 언제 느끼냐? 내 뜻대로 안될 때 느껴지지요. 뭐든지 내 원대로 안 될 때, 뜻대로 안 될 때 느껴지는 겁니다. 자! 다시 마태복음 19장 봅시다. 어려운 게 남았습니다. 26절 제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사람은 왜 만들어 놨습니까? 답이 있잖아요. 사람은 왜 만들어 놨지요? 할 수 없게, 그렇지요! 아~ 진도가 이제 잘 나겠네요.

“뭐를 해도 너는 안 되게 되있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를 주께서 구원하시는 현장에서는 이 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이걸 집어넣으십니다. 사람으로는의 자리에 이근호를 대신 넣게 되면 이근호는 할 수 없으되, 설교 할 때나 강의 할 때 너는 할 수 없으되를 반드시 집어넣어요. 만약에 그것을 안 넣으면 설교자, 너는 할 수 없으되를 안 넣으면 설교 끝나고 난 뒤에 “ 이번 설교 제가 했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뭐가 빠졌어요? 주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을 한거에요. 자기가 실껏 설교하고 복음 전하고 마귀 일을 한거에요. 반드시 주의 일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의 대변자로서 나를 사용 하십니다. “주여!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주님이 “그래? 사용해줄께!” 그럼 “어떻게 사용 할건대요?” 주님이 “마태복음 19장 26절로 사용할께!” 너는 할 수 없으되로 사용할 께” 네 인생 네가 산 게 아닌 것을,

그래서 기차 탈 때 제일 뒷 칸을 타라고 한 게 아닙니까? 뒷 칸에서 지나오는 철로를 바라보란 말이죠? “나는 이렇게 철로를 달릴 수 없으되 기차는 예수 안에서 달리고 있구나!” 늘 이렇게 바라봐야 되요. 늘 뒤를 보면서 바라봐야 되요. 앞을 보시지 마시고 뒤를 봐야 되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가지 마시고 더 낮은 곳을 향하여 가시길,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이 말 속에는 “제자들아! 너희들이 내게 묻는 취지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다.”

제자들이 “주님이여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우리를 대신해주는 질문을 고맙게도 지금 우리를 대표해서 주님께 이야기한겁니다. 이런 질문들을 주님께 직접 하면 되는데 왜 나에게 하는지.. 사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또 삐져서 “그럼 나 안 할래!”하죠. 뻔해요. 뒤에 나올 멘트가 뻔해요. 안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하지마라는 말입니까? 맨날 삐지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자! 여기서 어려운 게 또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 ) 할 수 있다. 에서 할수있다 앞에 뭘 집어넣을 수 있습니까? ( 다 : All ) 하나님은 모든 걸 할 수 있지요? 그러면 “나는 여자인데 주님이 나를 남자로 바꿀 수 있습니까?” 나는 여자인데 남자로 바뀌는 것이 ( 다 )에 포함이 되요? 포함 안돼요? 포함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 다 )는 이미 확정된 ( 다 )에요. 여기에 나의 소원이 끼여들면 안돼요.

우리의 소원이 응답이 안 되는 이유가 뭐냐? 이미 우리의 일은 주께서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이미 상의가 끝난, 이미 이야기가 끝난 사항을 양동이에 담아 뒤짚어 엎어 씌워 주어지는 거에요. 애가 결혼을 한다. 주께서 아버지와 아들이 상의가 끝난 이야기에요. 끝난 이야기라서 결혼을 하게 된 거지요? 우리의 소원이라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면 뒤를 보란 말이죠. 뒤를 보면 주님의 계획 잡힌 것이 철로화 되어 우리에게 오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기도 할 때 뭐라 하냐 하면 “주의 뜻은 알거든요. 하지만 이거 하나 살짝 이뤄주세요!” 쉽게 말해 “내가 밤 따러 갈 때 밤을 많이 떨어지게 해 주세요!” 어떤 행동도 목적을 은근히 기대 안하는 적이 없어요. 사전에 잡채 무칠 때도 맛있게 하옵소서. 오뎅 넣고 돼지고기 좀 넣고 시금치도 넣고 간장은 얼마나 넣으면 될까? 기대하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그 기대를 기차 앞에서 타고 보면 은근히 잡채를 맛있게 하고 싶지만 뒤쪽에서 보게 되면 결국 주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신 잡채이고 내 인생,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 다 )라고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내가 여기에 끼여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획 잡지 말까요? 계획 잡지 말까요라는 말조차도 이미 계획된 말을 입에서 뱉어 내놓거든요. 그래서 이미 주께서 다 아시는 만큼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그 다음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주께서 아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처럼 이것 달라, 저것 달라는 그런 기도는 하지 마시고 기도 할 때 이렇게 하세요.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라고 기도 하세요. 그것이 주기도문이에요. 그럼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 있어야 감사 하지요?” 그러면 주기도문의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 하세요.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것도 아시고 의인되게 하신 것에 감사 합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해도 제자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마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베드로에겐 장점이 있어요. 뭐냐하면 오지랍이 넓다는 거에요. 성질이 가만있지를 못하고 궁금하면 물어야 되는 성질이 장점이라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을 대신 물으니까.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에서 모든 것을 다 버렸잖아요. 주님께선 다 하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렸잖아요.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다)에 포함이 안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버려도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 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기 것을 다 내놓았는데 덜 내놓았어요. 아직까지 멀었어요. 나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다시 복습해 봅시다. 진도 나가야 힘들고 내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주께서 버려도 상관없는 자가 나라고 했지요? 쓰레기인데 뭘 내 놓아요?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쓰레기인 것을 더욱 더 절감하게 됩니다. 이 말은 내 쪽에서의 착한 일이 내 구원에 요만큼도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를 매일같이 아주 기쁘게 수용합니다. 안 해도 구원 받았으니까 늘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벌 받는 게 아니고 죽는 것도 복이 되는 거지요! 마리아의 오빠가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이제 죽는 것을 겁내지 않겠지요? 마리아의 오빠하고 같은 동급이에요. 믿는 자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죽어도 원래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코스이고 누구나 다 죽잖아요! 원래는 다 죽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베드로가 한 말이나 아까 부자 청년이 한 이야기와 유사하지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도 지키고 주님을 찾아 왔는데 제가 무얼 얻겠습니까? 영생을 주시옵소서란 이야기나 베드로와 부자야! 이 정도는 바쳐야 구원 받지! 그 정도로는 안돼! 우리 정도는 되야 돼!라는 생각이나 둘 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쳤나이다 라고 하니까 뭐라고 하십니까?

(마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무엇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답변은 너희가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을 줄이면 ‘너는 나처럼’ 이죠! 그럼 주님이 지금 어디로 가시고 있습니까? 지금 주님이 심판 하려고 가는 길입니까? 아니면 십자가로 가는 길입니까? 십자가로 가시죠! 옛날에 동네 서커스가 올 때 어른들은 돈이 있으니까 입장료 내고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동네 꼬마들 서커스 보러 들어갈 때 어디로 입장합니까? 출입구 저 뒤쪽에 천막 친 곳에 천막 들추고 들어가 보면 문이 뒤가 되고 그래요. (아까 두번째 강의 제목을 뭐라고 했습니까? ‘단절)

서커스 단원들의 탈의실도 되고 주님은 어디로 들어가십니까? 지금, 위로 올라갑니까?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곳으로 가요?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곳으로 가잖아요? 보통 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하면 남한테 미움받는거요. 미움 너무 받으면 자살해요. 나중에 도망치다 도망치다 자살합니다. 그 정도로 사람은 한 끼 못 먹어도 괜찮아요. 두 끼 못 먹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남한테 미움 받으면 세 끼 먹어도 자살해요. 세 끼 먹은 채로 자살한다니까요. 사람은 단순히 소나 개처럼 밥이나 먹고 끝이 아니라 물론 개나 소도 있지만 인간은 남에게 미움 받고 못삽니다. 그래서 소위 공직자들 가운데서 횡령 했다든지 비리 저지른 사람들이 관악산 나무 밑에 가서 죽잖아요. 미움 받고는 못삽니다. 재벌들은 카메라 뒷구멍으로 빠지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공개적이라 “날 봐라!” 하시면서 “내가 어디로 빠져서 천국가는지를 한번 봐라!” 보니까 누가 믿었어요? 아무도 안 갈 그 길을 따라서 주님은 사라집니다. 따라간 사람 있어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했지만 제자들 다 도망쳤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방법을 어떻게 해요? 그 떠난 구멍을 들어오면 되지요! 주께서 그때는

전에는 예수님만 죽으신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들고 마치 삼손이 인간들이 출입하는 성 문을 원래 자리에 있어야 되는 성 문을 삼손이 화난다고 어깨로 문짝을 들어 버렸지요? 삼손이 가는 곳마다 뭐가 되요? 문이 되는 겁니다. 예전에 사사기 했던 대목 다 잊어 버렸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가지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속까지 성령으로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베드로의 마음은 뭐가 됩니까? 안에 뭐가 들어 있어요. 십자가가 속성이 되어서 십자가를 보이는 삶을 삽니다. 그것이 단절의 삶입니다. 돈? 좋지! 그러나 구원의 영역은 아니야! 그래, 승진? 출세? 좋아! 다 좋지! 돈 버는 것도 다 좋아! 하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의가 될 수가 없어! 전도? 선교? 다 좋아! 좋아! 교회에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게 뭡니까? 사람들한테서 사랑 받거나 플러스 하나님에게 칭찬 받고 싶어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잖아요. 난 그런 거짓말 안 믿지만, 돌고래는 가능 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칭찬받고 사랑받는 것 없이는 못 삽니다. 왜 그렇게 고생하고 힘들게 희생하고 사는데 뭘 노리고?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누가 나를 알아준다면 이깟 것 고생도 내가 흔쾌히 받아들이겠다. 그래서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하나가 없으면 못 살아요. 굉장히 힘들어요. 왜 나를 나답게 할 수 있는 건 알아줄 사람이 옆에 없잖아요.

힘들지요! 그래서 따라 죽는 사람도 있고 그러는데 정말 힘들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예수님 믿고 삽니다. 예수님이 남편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소원대로 해줘요? 예수님이 그렇게 해주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해요. “죽어라!” 나는 사랑받고 싶은데,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살리기는 오히려 “네가 너를 죽여라!”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아니고! 독한 남편!” 정말 독한 남편이에요.

뻔히 줄 밤을 주시면서도 밤 따러 가는 걸 벌벌 떨게 만들고 뻔히 잘 될걸 알면서도 돌아보게 되면 필히 그렇게 될 일을, 인생을 조바심 나서 벌벌 떨게 해서 밥도 못 먹게 만들고 우리네 인생이 왜 그래요? 그것은 바로 믿음 없는 너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믿음 없어도 돼! 내가 너에게 믿음이 되어 줄께!”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에요. 나의 믿음을 믿지 마시고 믿음 없는 나를 폭로시키시는 주님이 믿음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지금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제자들 아무도 안갑니다. 우리하고 똑같아요. 하지만 기뻐하세요. 안돼는 인간들을 십자가 지시고 성령 주셔서 기여히 그들로 하여금 즐겁게 주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 별난 인간 없고 똑같은 인간인데 어르신네가 달라서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습니다. 이제 부터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치를 내리더라도 주안에 있는 증거인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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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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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