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b-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37절 말씀 할 때 제가 제일 먼저 무슨 이야기를 했냐 하면 사람은 사람을 보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만 보고 세상을 형성하거든요. 사람들은 주님을 아무리 봐도 같은 인간을 보는 식으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아, 저기 예수님 있네. 잘 보여야지.’ 그것으로 끝나요. ‘아 저기 목사님 있네. 잘 보여야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이상한 일을 벌여버리면 “저 사람 누구야? 우리가 아는 그분 아니네.” 하고 낯설게 다시 보게 되지요. 명절 끝날 오순절날에 실로암에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 붓는 행사를 해요. 이 행사는 물질이잖아요. 물동이에 물(H2O)들고 강대상에다가 물을 부어서 흐르게 한다. 이것은 납득이 되지요. 그런데 안 보는데 물이 흐른다. 이것은 납득이 안 되잖아요.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물을 붓는데 이것은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물이 나오게 하면 그게 모든 메시야의 완성이 된다.”는 그 대목입니다. 처음에는 발목까지 오다가 나중에는 넘쳐서 헤엄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옛날에 있던 에스겔 47장 말씀을 물질적으로 쉽게 표현해서 ‘장차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준 거에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아, 지금 우리가 물을 부어서 나오는 그 물이 성전에서 실제로 자동적으로 물이 흐를 때 그것은 에스겔 37장의 완성이고 그렇게 하신 분이 메시야구나.’라고 하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면 안 된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내 기준에는 하자가 없는 것이 되어요. 내가 무식해서 모른 것이지 처음부터 나쁜 게 아닌 것이 된다니까요. 조금 공부를 덜 해서 그렇지 공부를 매진하고 큐티를 더 오래하게 되면 언젠가는 ‘진리가 손에 잡힌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것은 하나의 꿈이고 가능성을 내보이는 것이므로 절대로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똑똑한 것이잖아요. 하나의 교리가 되고 신학이 되어버리므로 안 돼요.
신학교 교리가 왜 복음을 가로막는데요.. 삼위일체 교리, 구원교리, 조직신학, 신론, 기독론, 성화론, ... 왜 이것이 복음을 훼손하는데요.. 그것이 납득되는 언어를 동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어 이야기 잠시 하겠습니다. 이것이 언어와 관련이 되어 있어요.
에스겔은 문자로 되어 있는 거에요. 문자. 문자라고 하는 것은 항상 부재(존재하지 않는 것)을 유발시키는 힘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수상해요. ‘이 부재가 진짜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인간은 항상 무슨 상상을 하는데 현재 있는 것 플러스 알파(잉여), 지금 있는 것 말고 더 나은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왜 지금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뮙니까?” 답변 못해요. “다들 그렇잖아요.” 이렇게 대답해요. “왜 그래야 되는데요? 지금보다 더 낫고 싶어하지요? 지금 있는 돈보다 더 벌고 싶어하는 이유가 뭐지요? 그만큼 살았는데 왜 더 살고 싶어하지요? 왜 ‘더, 더’가 들어가지요?” 이유를 몰라요.
그것을 현재 정신분석학에서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계기로 해서 인간의 욕망은 새로운 것을 계속 창조하고 불쌍하게도 인간의 자아는 거기에 빌빌거리면서 새로운 욕망을 마저 채우려고 헉헉거리며 뒤따라가면서 붙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왜 욕망을 못 다루느냐? 모르겠다는 겁니다. 인간이 왜 내 욕망을 못 다루지요?
“욕심을 버려라.”라는 말은 쉬운데 새로운 신상이 딱 등장하면 왜 그것이 탐이 나지요? 입은 옷은 갑자기 구닥다리가 되고... ‘나는 왜 그런데?’ 이게 왜 그런지 알려드려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기준 만드는 데에 인간이 말려들어서 그래요. 인간이 하나님께 이용당했어요. 세상 전체가 하나님이 자기 언약의 구조를 만드는 데에 인간과 마귀, 모든 천사들의 일을 다 총동원시켜서 주님이 이용해서 그래요.
“나처럼 돼 봐라 이렇게!” 했는데 인간이 헥헥거리면서 못 따라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실패자로 만들어서 스스로 선다는 것, 스스로 살겠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 만든 그 창조원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물고기가 물고기인 이유는 물고기를 둘러싼 바깥 환경이 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물고기는 물에서 만들어져야 되고 새는 바깥에 공기층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져야 되듯이, 인간은 기껏 그런 물고기나 새 정도가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로써 채워지는 세계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은 만들어놓은 거에요.
그것이 이사야 45장에 있는 거에요. “하늘에서 의가 쏟아진다.” 하늘에서 남자가 쏟아진다는 노래가 있는데 하늘에서 음식이 쏟아진다는 그런 영화도 있고.. 이사야 45장 8절에 하늘에서 의가 쏟아질 때, 모든 것이 주님(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당하게 하기 때문에 주님은 재판관이고 심판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나쁜 짓을 해도 그렇게 답답하지 않아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장에서는 6자로 표현합니다. “내어버려두사” ‘그래, 니 맘대로 해. 어차피 니 맘대로 하는 것도 내 의를 채우는 데 말려든 거야.’ 하나의 공장 부속품으로 말려든 거에요. ‘그래, 너는 너대로 살아.’ 너대로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바라는 것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지옥은 절대로 갈 수가 없어요. 죄를 지어도 지옥은 못 갑니다. 지옥은 가야될 사람만 가도록 주께서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요. 천국도 마찬가지이고.. 천국은 가기 싫다고 ‘나 천국 안 갈래.’ 이렇게 떼를 쓴다고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니는 반드시 천국 가야 돼.’ 하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7장을 통해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물이 성전에서 나와버리면 그것을 물질적으로 쳐다본 사람은 “어, 실로암 물이네.” 다 보이지만, 마음에서 물이 나와버리면 이것은 마음에 물이 나온 사람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물 나오나?” “응, 나 물 나와” “니는 왜 물(생수)이 나오지? 니 미쳤나? 나한테는 안 나오는데 너는 왜 물이 나오나?” “몰라. 나도.” “니는 왜 나를 닮지 않았지?” “글쎄말이야.”
이 세상은 노동을 해야 돈을 주잖아요. 싸워야(노동해야) 돈을 얻어요. 그러면 두 사람이 쟁기를 갈았는데 둘 다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둘 다 지옥갑니까? 아니지요.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두지요.. 그러면 쟁기를 간다는 행위를 통해서 천국, 지옥을 끄집어 내보세요. 이거 수능에 나옵니다. (웃음)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천국갈 행위와 지옥갈 행위를 구분하세요. 이거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이 죄사함을 받았으면 죄사함 받는 본인은요, 설명할 수 없어요. 뭘 해야 죄사함을 받지..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뭐, 철야를 했다든지, 기도원에서 작심하고 40일 금식을 했다든지, 뭐,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다든지, 1년에 백 명씩 전도를 했다든지 뭐가 있어서 그것을 근거로 구원을 받은 것 같으면 그것을 내세우겠는데, 진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아니, 벼락 맞은 이유를 알겠습니까? 벼락 맞은 거에요. 성령 받은 거에요. 그게 바로 여기서 “물이 나온다.”는 겁니다. 물이 나오는 샘터로 우리를 만드는 거에요.
요한복음 4장에서 여자는 물질이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양동이를 들고 옴으로 해서 물길어서(중력을 이겨서) E=½G²해서 에너지를 이겨가지고 우물에서 낑낑해서 물을 긷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본인이 우물이 된다는 것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전에 없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까 첫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내 구원이 나에게 납득이 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이해가 안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안 해도 된다고 이야기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나에게 일어나 버리고... 그래서 내가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가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은근히 안 했더니만 정말 안 되고.. ‘에이, 안 하니까 진짜 안 되네.’ 하고 포기하니까 진짜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도 공로가 우리한테 오지 않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인데 그 은혜에 나의 행함, 나의 애씀이 조금이라도 박히는 경우를 일체 용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이 혼자 노시고 있는 게임(시체놀이)에 말려든 거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목 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같이 거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자, 우리가 이 본문을 모른다 치고, 우리가 금요철야 할 때, “주여, 믿습니다.” 할 때, 주께서 “니가 믿어?” “믿습니다.” “그럼 내가 너한테 뭘 줄까?”라고 할 때,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 항목이 있잖아요? 그 항목을 우리가 사전에 생각을 합니까? 안 합니까? 열심히 기도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노림수가 있지요. 기도 안 하고 달라고 하면 너무 뻔뻔스럽고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고 사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해놓고(불교에서는 업보를 많이 쌓고) 그 다음에 달라고 할 때 좀 덜 미안스럽고 뭔가 내놓은 게 있잖아요.
아까 지하철 8호선 타고 오는데 젊은 아낙같아요. 둘이 이야기하면서 “니 애 돌잔치할 때 뭘 잡았노?” 하고 물어요. 서울말로 물어요. 경상도 사람 아니니까. 공 잡았다는 거에요. 그런데 엄마가 바보에요. 공 잡아서 송종국이 될 일 있습니까? 축구 선수 될 일 있어요? 배구 선수 할랍니까? 아예 돌상 위에 그 공을 치워놓아야지. 사전에..
그러니까 이거는 엄마의 선택이지 애의 선택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주님한테 말려들었어요. ‘주님이여 열심히 기도할 테니까 그저 돈 벌게 하소서.’라고 하는데 우리 돌잔치에 돈이 없어요. 나 좋아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영덕대게도 없고, 그저 못 먹는 거, 개고기만 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주신다는 게 뭐냐? “니 배에서 생수가 나리라.” 이게 뭐 좋다고. 좋습니까? 호스도 아니고 갑자기 왜 배에서 생수가 나와요. 그것도 납득이 안 되지. 내 몸은 물체고 내 몸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간암 3기나 몸에서 뭐가 빠질 때 피 흘릴 때 그때 같이 물이 흘러나오는 경우를 빼고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니 몸이 물질로 보이냐? 이제부터는 바꿔줄게. 생수가 나올 만한 영적 존재로 바꿔줄게.’ 이게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야..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이 강의를 한 3년 전인가 에스라 느헤미야 대전 강의할 때 설명하면서 제가 얼마나 어려움을 느꼈는지..
왜냐하면 내 몸이 성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이게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어요. 몸은 body(신체)잖아요. 성전은 주님의 거주지에요. 주님이 거하시는 거주지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신체도 부동산이 되어야 되는데 주님은 하나님이라 이 말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니까 나를 모실 건축 구조물은 없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더 골치 아프게 되어있어요. 주님을 모실 건축 구조물은 없고 우리 몸은 신체, 키 얼마, 몸무게 얼마 이렇게 제한되어 있고.. 제한된 몸에 주님을 어떻게 쑤셔넣고.. 이게 이게 이상하게 매치가 안 되네.. 연결이 안 되잖아요. 그게 왜 연결이 안 될까? 어렵게 말씀드려서 존재론적으로 따지니까 연결이 안 되는 거에요.
“내 몸이 있다. 주님은 거기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있음”과 “있음”이 연결이 안 되게 되어있어요. 완전 노는 게 다르기 때문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친구야, 어젯밤에 니가 내 꿈에 나왔거든. 그런데 너는 내 꿈에 왜 안 나오는데?” 이것이 지금 시빗거리입니까? 막 윽박지를 내용입니까?
“오빠, 귀신 꿈 꿨어.” 하는데 오빠가 귀신 꿈 꾸는데 꿈 속에 들어갑니까? 어쩌라고? 여자친구가 어제 귀신 꿈 꿨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빠는 꿈도 안 꾸고 잘 잤는데 뭘 어쩌라는 거에요?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꿈꿀 때 귀신 나오면 오빠가 와서 꿈 속에서 보디가드가 되어서 “귀신아 물러가라.” 해야지요. 애교부린다고 그런 용어를 쓰는 모양인데..
지금 예수님 이야기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우리 신체에서 도대체 무슨 물이 나와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보고서 그냥 넘어가자는 거에요. 있다 치고, 믿는다 치고 그냥 넘어가자..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그냥 넘어가자.”가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너 문제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에요.
그런데 문제를 지적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리면, 그 뒤에 나오는 그 다음 말씀도 우리는 곡해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우리교회에 오신 여러분들은 “내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지적받기 위해서 교회에 오시라고 했어요. “나 잘났습니다. 나 이쁘지요? 나 사랑해줘.” 이런 식으로 오지 마시고 “도대체 나한테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어떤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으로 지적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와야 돼요. 그래야 그 사람에게 말씀만 담기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한테 적용되는 말씀이 일차적으로 아니고, 이건 예수님 본인이 본인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해석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 본인이 본인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신 겁니다. “니가 지키면 안 돼. 지킬 수도 없을뿐더러..”
제가 첫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처음에 언약할 때 누구를 빼돌렸다? 인간은 나가있고, 우리라는 집단끼리 했다고 했지요. 우리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지요. 한 분이 아니고 다른 분이 있지요. 그럼 다른 분은 뭐하는 분인데? 한 분은 말씀을 주시고 다른 분은 말씀대로 완성시키시는 분이 인간을 만드는 거에요.
그럼 인간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인간을 만듦으로써 인간이 알아서 구원된다는 소리를 일체 못하고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을 통해서 모든 영광과 모든 말씀의 완성은 진짜 인간, 독생자(주님)만이 모든 것을 이루어서 주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재료로서, 거기에 도구로서 끼어든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주의 일에 말려든 겁니다. 이용당한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이용당하세요.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이것이 백부장의 신앙이잖아요. “마음껏 이용해주소서.”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 우리가 만약에, 여러분들이 12년 동안귀신 들렸다면, (그런 분은 안 계시겠지만) 어떤 사람은 50년 동안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하여간 12년 동안 귀신 들린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모든 사람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빨 아파도 3개월만 아픈데 나는 왜 이런 벌을 받아서 12년 동안이나 허리가 펴지지 않습니까?’라고 대들거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렇게 된 것도 주님을 주님되게 드러내려고 하신 거지요?”라고 믿으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해서 그 다음부터는 멀쩡해진 거에요.
여자가 멀쩡한 게 아닙니다. 주님이 들어있으면 허리가 안 펴져도 주님 보시기에 멀쩡하고 펴져도 멀쩡하고.. 허리라는 신체가 펴졌느냐 안 펴졌느냐에 관계없이 “네가 나를 믿는다.”는 그것이 천국 백성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병자를 얼마나 낫게 했습니까? 귀신을 얼마나 내쫓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실컷 기적을 보여주고 기적을 맛보게 한 그것이 오히려 믿음 없음에 대한 통보에요. 베드로 장모가 열병 들렸다가 나았지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지요? 결국 베드로가 한 소리가 뭡니까? “난 당신은 저주한다.” 그 소리밖에 안 나오잖아요. 차라리 평소에 새벽마다 우는 닭울음소리가 기적으로 느껴져야 돼요.
보이지 않는 언약의 적용이 기적이에요. 그런데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봤어요. 교회 올 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훌륭해질 수 있습니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온 거에요. “왜?” 훌륭해져야 복을 더 따낼 수 있는 당당함이 있으니까.. 그저 복 때문에 훌륭해져야 되고, 훌륭하기 위해서 말씀지켜야 되고.. 이거 준비하려고 교회에 온다 이 말이죠. 영광이라는 것은 빈말이고요. 지 영광이 중요하지 남의 영광이 뭐 중요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이 주의 일을 훼방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제가 정답을 냈습니다. 이 말씀은 누구한테 적용한 것이다? 주님한테 먼저 적용한 것이다. 우리한테는 적용이 안 됩니다. 속 시원하지요? 완전 생수, 우리나라 식혜 한 사발 들이키면 시원하잖아요. ‘아, 우리한테 주신 말씀이 아니구나.’
주님의 신체가 성령이 나오는 몸이 되어버리면 그 성령이 우리가 헤엄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물고기가 어항을 만든 것이 아니고 어항이 만들어진 곳에 물고기가 지 세상인 양 마음껏 헤엄치지요. 사실은 물고기가 수영 솜씨를 부린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물이 있으니까 수영이 되지 물이 없는 데서 혼자서 퍼덕거려봐야 지가 발악하는 것밖에 안 되지요.
마음껏 우리가 복음(진리) 안에서 십자가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은 홀로 있다는 게 아니고 성령 안에서 성령이 헤엄칠 수 없는 그 생수의 강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발목이고 그 다음에는 점점 깊어지지요.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하면은 처음에는 성령이 내가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중에는 ‘성령은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니구나.’(를 알게 되지요.)
그냥 바다의 물고기처럼 퍼덕퍼덕 놀기만 하면 되지 ‘오늘도 바다 수위가 25m구나.’ 그런 거 계산하지 마세요. 전체가 푹 잠기면 돼요. 푹 잠기게 되면 내 생각할 필요 없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꿈 있잖아요. 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면 사실은 꿈이 아니에요. 진짜 꿈은 현실하고 동일합니다.
그러나 꿈에서 이미 벗어난 경계선이라고 할 때는 경계선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으로 임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상태가 사실은 완전한 상태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에요. 그 말은 정확하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된 몸이 성전입니다. 그러면 영광된 몸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느냐.. 예수님의 그 몸이 죽어야 돼요. 그러니까 아무도 이것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자살하냐? “약속된 죽음”을 죽어야 해요. 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은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역사”가 만들어져요. “인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만들어진 그들의 의지와 협동으로 역사가 이어졌다. 학교 교과서에 다 이렇게 나옵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역사의 주체가 있고 주체의 지혜와 노력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사실은 더 정확히 말해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방민족과의 투쟁 속에서 역사, 역사가 다듬어지지요.
그래서 이집트는 역사가 없어요. 이집트의 조각이나 그림 같은 것은 무심코 한 지점을 쳐다보고 있습니다. 왜? 이집트는 관심사가 천상의 하늘나라지 이 지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집트가 사막에 위치하잖아요. 아침에 나가도 사막, 저녁에 나가도 사막.. 똑같은 광경이라 우울증에 걸리면 안 되니까.. 이집트는 딱 떨어져 있어가지고 이방민족과 별로 싸움을 안 했어요. 중세 시대인가 싸운 기록이 있고 그 전 고대 이집트는 그대로 죽 가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백성들)의 희망은 이 사막이 다가 아니고 죽고 난 뒤에 이시스, 오시리스 신이 와가지고 우리의 영혼에다가 맞춤옷을 입듯이 새로운 영혼은 준다는 거에요. 따라서 몸은 미이라로 만들어가지고 잘 보존해놓고 두뇌는 끄집어 내서 거기에다가 영혼을 준다는 겁니다. 결국 역사가 별로 없어요. 피라밋도 마찬가지고 전부다... 피라밋은 무덤이에요.
그런데 중동, 이라크,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맨날 싸우닫보니까 그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민족의 정체성 때문에 역사를 만들어내는데 역사를 만들면서 바알신(우상들)이 등장해요. 우리 민족은 이런 신들이 지켜줬다. 마르둑신 같은 경우에.. 길갈미스 같은 최초의 민족신화들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만 정통민족이라는 거에요. 유목민족이고..
그런데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 사건의 확대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세상의 중심은 인간의 존재함이지요? 그런데 성경 전체의 내용은 뭐냐 한 쪽은 사형시키고 한 쪽은 사형당했다. 이게 우주의 중심이라는 겁니다. 이게 사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범우주적으로 영향을 입혀요.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별이 있으라!” 하매 별이 있었더라. 지금 우리가 힘을 합해서 “하나 둘, 별이 있으라!” 하면 별이 있어집니까? 아니지요? “바다야 잔잔하라!” 하면 잔잔해집니까? 세월호 탔던 애들 중에 예수님 같은 사람이 없는가 보지요. “파도야 잔잔하라. 배야 바로 서라.” 했으면 바로 섰을 건데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들이 우주의 중심이 된다 안 된다?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고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우리는 길길이 뛰어봐야 그야말로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찻잔 속에 물결(잔물)에 불과해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찻잔 속에 고요가 되어버리고.. 양갱 속에 밤톨이라고 했잖아요. 젤리 속에 있는 하나의 양갱처럼 그냥 흔들리는 거지요. 그런데 자기 진동(행동)의 폭이 좁아요.
그렇게 하다가도 90되어서 죽어버리면 나중에 기억이 나질 않고.. 자기 딴에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다큐멘터리를 내고 하는데 그것은 한반도 어느 지방에 있는 한 사람의 몸부림이지 전체 이집트하고 필리핀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더더구나 해와 달하고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도 조수간만의 차가 있는데 별의 인력(중력)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그것을 오바마(미국) 대통령이 “달아 좀 조용히 해!” 하면 갑자기 조수간만의 차가 없어집니까? 그러니까 인간들이 무능력자라구요. 그저 지가 살려고 애를 쓰는 것뿐이에요.
그럼 교회에서 왜 통성기도 하느냐? 자기 교회 키우려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하고 아무 관계 없어요. 완전히 절이에요. 절. 주의 나라에 관계 없어요. 자기 다니는 교회에 그저 부자들 출석해서 헌금해가지고 교육관 새로 지으려고 그러는 거에요. 목사가 시키는데 목사가 왜 시키느냐.. 자기 교회거든요. 자기 노후 대책이 거기에서 나와요. 그러니까 목회가 뭐냐하면 목사 지 혼자 발작하는 거에요.
양이 목자한테 얻어먹고 어디에다가 돈을 내느냐.. 이쪽에다가 내야지.. 이런 식으로.. 그러나 예수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언약대로 (그냥 자살하면 안 돼요.) 죽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주를 바꿉니다. 모든 해와 달(우주)을 다 바꿔버려요.
그렇게 되면 기존에 있던 우주(별들)는 떨어지잖아요. 그것을 가지고 저는 세 자로 이야기했죠. “도.배.지.” 이 세상은 하나의 도배지에요. 하늘에 있는 별 있잖아요. 그 별이 전부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만 유지되는 도배지라니까요. 그런데 뉴턴의 과학은 갈릴레이 이후에 그 도배지를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인간으로, 인간을 위한 도배지로 바꿔버렸어요. 호킹 박사 같은 경우는 이렇게 바꿨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말합니다. 별 하나, 너 하나, 별 하나, 나 하나... 별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달에 가서 토끼가 방아 찧고, 방앗간이 없어가지고 거기에서 방앗간을 만들어서 방아를 찧고 있습니까? 전부다 모든 의미 속에 하나님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인간의 무늬로 다 바뀌었어요. 언제부터? 과학 시대부터..
화성에 소금물 흐른다. 뭘 어쩌라고.. 화성 가서 살란다. 거기 가서 살아도 90살 되면 죽어요. 여기 요양보호원에서 죽으나 거기 요양보호원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니까요. 기껏 피신한 게 노아의 방주도 아니고 소금물입니까? 모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도배지, 자신의 무늬에요. 부산에 가면 등산하고 전부다 바위 위에다가 (김일성도 아니면서) 자기 손가락 찍어서 ‘내가 여기 왔노라. 보았노라.’ 하고 자기 흔적을 찍어요.
그것도 모자라서 (절도 아닌데) 교회 벽돌에다가 자기 이름 써가지고 벽돌 바치고.. 무너져야겠네.. 자기 이름 보려면..
주님의 무늬여야 되는데 인간의 무늬로 만든 게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을 누가 만들었는가.. 이스라엘이 만든 거에요. 그런데 시편 103편에 보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에서 너희들이 예상도 못한 새로운 성전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너희들 보기에 그렇게 기이하다는 겁니다.
기이하다는 것의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뿔이 하나 달린 신화적 동물들있잖아요. 옛날 평풍 보면 나와있잖아요. 희귀(괴귀)한 것, 그런 동물들을 상상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없지요. 만약에 그런 괴물 나오면 때려잡아 죽일 겁니다. 왜? 우리 인간만의 역사 속에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게 있으면 죽여버려요. 그래서 죽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외계인이에요. 이질적이에요. 누가 믿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세상의 중심인데 어떻게 합니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 자만이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동참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동참한 사람이 있기는 커녕 동참이 뭡니까? 말이 안 되지요. 착한 나를 알아달라고 하는데 무슨 동참이 됩니까? 안 되지요. 예수님도 죽으셨는데 내가 뭔데 우리는 안 죽어야 되지요?
그러니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주님이 죽으신 것을 믿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안 죽으려고 한다 이 말이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는데 십자가를 따라갈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거에요. 이렇게 잘생겼는데(괜찮은데) 왜 죽어야 되지요?
그래서 아무리 언약이라고 해도 내 마음이 즉흥적이고 충동적이면 절대로 남은 다 죽어도 절대로 나는 안 죽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욕망(충동)이에요. 따라서 아무리 해도 말씀대로 못 지킵니다. 결론 끝. 우리는 성전이 될 수가 없어요. 나부터 살자고 하는데 무슨 성전이 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나는 살고 싶어요.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아니라고요? 그러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러면 되는데, 우리보고 이러지 말라는 거에요. 우리보고 예수님 흉내내지 말라는 겁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부처가 되는 종교에요. 팔정도 지켜서 부처가 되는 겁니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태도, ... 불교 이사람들이 얼마나 바보들인지... 바른 행동, 바른 태도라는 것이 혼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서 환경이 도와줘야 될 문제입니다. 속에는 배고픈데 ‘나쁜 생각, 나쁜 생각’ 백 날 해봐야 진짜 나쁜 생각도 나요. 속에는 배고픈데 억누르고 싶어도 바깥에 유혹을 받아 마음속으로 간음을 하면 간음죄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내가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면 불교신자 되지요. 그런데 자기가 다룰 수 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머리 깍잖아요. 머리부터 깍고 동안거 (겨울에 점 하나 찍고 육 개월 동안 쳐다보기) 하잖아요. 그거 하다가 나오면 뭐합니까? 중들 동안거 하고 나오면 우편함에 뭐 있는 줄 압니까? 전기세 나옵니다. 그거 시주해야 갚을 수 있어요. 이건 바보들인지 위선자들인지.. 아마 위선자들일 거에요. 지 도를 밑천으로 돈 벌려고 하는 인간들이에요. 대신 도닦아줄 테니까 지한테 돈 갖다 내라는 거에요.
누가? 중들이.. 누가? 목사들이.. 대신 기도해줄 테니까 당신은 돈이나 내라는 거에요. 내가 기도원에 가서 철야해 줄 테니까.. 왜? 의인은 간구하는 능력이 있는데 지가 의인이거든요. 그 수법을 얼마나 써먹었습니다. “그래 우리 목사님은 주의 사자니까 능력이 있고 우리 같은 회사인들은 잔업하느라고 바빠가지고 기도도 안 하는데 그러면 대신 기도해가지고 우리 가정 좀 지켜주세요.”
이것은 토속종교입니다. 옛날부터 있던 정통 종교(신앙)입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십자가 아무도 못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기에 대한 미련 때문에 안 져요. 그리고 끝까지 주님한테 말씀지키고 순교하면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결국 내세우는 것은 자기 결백입니다. 나만 구원.. ‘주여 아시지요. 제 마음 결백합니다.’ ‘그래, 니 결백해서 니가 구원받아라.’
이 결백하고자 하는 게 이 마귀에요. 내가 그토록 발견할 수 없었던 마귀(괴물)가 이 소리하면서 (주님께 대들면서) 내 속에 들어있었던 거에요. 보편적으로 들어있었던 거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안에 뭘 끄집어낸다? 귀신 끄집어내죠. 그러면 귀신이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까? 떠돌게 되지요. 이게 뭡니까? 인간은 귀신과 합체 되는 거에요. 이 놈의 귀신이 나가봐야 다시 일곱 귀신(친구) 데리고 갈 데 없으면 또 들어오는 거에요.
그런다고 늘 소지할 수도 없고.. 소지해봐야 또 들어와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귀신을 방어할 수 있는 그런 체제(능력)가 우리에게는 없어요. 주님 믿겠다고 아들 바치고 돈 바치고 목사님 섬기고 넥타이 사드리고 교회 열심히.. 그렇게 해도 어느 한 순간에... (우리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마는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연히 설교시간에 말을 실수해가지고 (그런 뜻도 아닌데)“‘아무개 집사는 너무 형식적인 것을...” 이렇게 한 마디 했는데 본인보고 이야기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목사님 저보고 이야기했지요?” 삐져버렸어요.
이 삐진다는 게 뭐에요? 나는 그런 욕을 들을 만큼 그 정도가 아니고 나는 결백하다. 그 동안 뭘 믿었어요? 자기 결백을 믿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속에 있는 마귀(괴물)를 믿은 겁니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결백하다. 자 이제 주님의 솜씨를 보세요. 결백한 것은 못 고칩니다. 그냥 놔둬요.
그리고 마귀 있음을.. (나는 마귀라고 했지만 성경 로마서에서는 죄라고 합니다.) 나는 죄를 짓고 싶지 않더라도 어떤 다른 죄덩어리가 나로 죄 짓게 한다. 그러면 그 죄덩어리를 내 힘으로 추방시키지를 못 합니다. 그냥 놔둬요. 그리고 그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 아까 노아 이야기 했지요. 담요를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 담요로 그 죄를 덮어주게 되면 그것을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뜻은 없앤다는 것이 아니고 정확한 말은 덮어주는 거에요.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옛날에 성전에 언약궤 무서운 율법 위에 속죄소가 있는데 그 무거운 뚜껑(카파르라고 하는데)을 덮어줄 때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으면 그 덮음이 효과가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중적입니다. 내 괴물이 있고 이 괴물은 들썩들썩거려요. 틈만 나면 ‘나는 결백하다. 나는 결백하다.’ 영화 「700」에 보면 나와요. “나는 관대하다.”
‘나는 결백하다.’라는 말의 뜻은 ‘모든 잘못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라는 것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했습니까? 지나가는 사람이 잘못한 거에요? 강도가 잘못한 거에요? 강도가 잘못했잖아요. 이것은 누가 봐도 강도가 잘못한 거에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도 지나가는 제사장 지문 뜨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누구를 지적합니까? “너 왜 그냥 지나가냐 이 말이죠.” “제사장아 니는 은혜 안 받았나?” “니는 담요 없나?” 이런 뜻이에요. “니는 사랑의 담요 없어?” “니가 강도만난 사람이야.” 이런 뜻이에요. 지금 강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들은 뭐냐 하면 “나는 결백한데 강도가 와서 나쁜 짓을 했기에 강도보고 나무래 주세요. 저는 피해자잖입니다.” 이런 소리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세상에 내가 왔는데 너희들 질고 때문에 내가 죽었잖아. 그러니까 나만 피해자고 나만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이 주님의 기준이고 우리는 그 기준에 말려든 겁니다.
그러면 그 강도를 남대문 시장에서 팔아요, 동대문 시장에 가면 팝니까? 아니면 수입품을 어디에서 팝니까? 안 팔아요. 이게 팔게 되면 돈을 주고 사게 되어서 행함이 들어가서 안 돼요. 그러면 기도할까요? 기도하면 행함이 끼어들어서 안 돼요. 그러면 십일조 할까요? 십일조도 안 돼요. 그래서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런 것들이 주의 일이 아니라고 했지요. 교회 섬겨도 안 돼요. 끼어드니까..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내가 뭘 할까요? 내가 뭘 해야 얻을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궁금하지요? 진짜 이거 모르고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내가 뭘 할까요? 여기에 대한 정답은 “내가”를 없애요. “내가”를 없애는데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나(I)를 자리를 바꿔서 목적어 me로 만들어줍니다. 저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고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바꿔버려요.
‘우리 애 군에 간 거, 전방에 빠지게 된 거, DMZ 간 거,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일주일 전에 운행했던 세월호는 괜찮은데 일주일 후에 운행했던 세월호는 빠져죽었거든요... 그러니까 같은 배가 사람 태우기에 따라서 그렇게 빠진 거에요. ‘그때 주께서 물에 빠뜨렸습니다.’ 라고 안산에 있는 학부모 중에 성도가 있다면 그렇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 말은 ‘우리 애뿐만 아니고 우리 애가 대표가 되어서..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라는 것을 되찾아주는 것의 의미로써, 시범조로 내 애를 먼저 천국에 보냈습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되지요.
그러면 노란 리본은 달지 말아야 돼요. 리본을 단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라는 뜻인데 특별한 일은 애가 빠져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잃어버렸던 주님의 성령 안에서 헤엄친다는 것이지요. 성전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거든요. 나는 성전의 구성원, 벽돌이고 성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거든요. 예수님만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전이 되는 것이지 내가 따로 독립적으로 성전이 되면 성전이 한두 개가 아니고 서로 성전 만든다고 난리일 겁니다. 니 성전 몇 평이고..?
그냥 사시면서 내 뜻대로 하지 않게 해주시는 주님의 솜씨를 보시면서 “예, 고맙습니다.” 하지 마시고 “안 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또 저를 죄인 되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은혜를 주셨군요.” 이렇게 하셔야 돼요.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인이 안 되게 되면 이미 가진 것을 내 것이라고 우길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항상 처음처럼,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 제일 밑바닦처럼, 십자가에서 주님과 같이 죽었던 강도의 자리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서 “내가 나 된 것은 전부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나타내야 돼요. 그러면 그것이 이 땅에 나타난 주님의 기준으로써 우리를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기준으로써 내보내지요. 그것을 가지고 “가시적 초월”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목수의 아들이었지요. 누가 봐도 목수의 아들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봐도 보통 대한민국 사람이지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눈에 보이지만 초월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어떤 경우가 그러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원천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람에게 죄 지은 적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죄를 지으려면 내가 주체가 되어야 되고, 내가 칼을 쥐고 내가 결정해서 죽여야 되는데, 주님께서 내 손에 칼을 쥐게 하시고 원흉을 만나게 하셔서 죽였거든요. 그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희한한 발상, 기이한 발상이죠.
성질나서 죽였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성질나게 하신 것을 곰곰이 따져보니까 주님의 기준 세우는 데에 말려들었어요. 우리는 이용당한 거에요. 이 이용당한 기쁨은 대단한 거지요. 천국 백성이라서 이용당하지, 다른 사람은 이용 안 당하고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잖아요. 저는 독자적으로 사는 것은 이제 없습니다. 어디, 어느 행동도 독자적인 것이 없습니다. ‘주께서 의미가 있어서 저를 가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면 그게 바로 주님처럼 이 땅에 살아있는 주의 종으로 살아가는 거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성전이라는 기능이 있어야 성전인 것처럼 우리는 성전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자꾸 주님(성령)께 이끌려서 주님만 증거하게 하고 주님의 공로만 높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니 참으로 성전인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께서 생명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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