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7-하이데거
201510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7-하이데거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1013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7-하이데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불안이란 양상으로 고지가 됩니다. 고지란 알려준다는 뜻이거든요. 하이데거가 고지란 말을 쓴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죽음이 아니고 뭔가 살아있는 힘이 있는 질서체제처럼 느껴진다, 괴물처럼 느껴진다. 죽음이 우리에게 알려준다. 존재 자체가 그러니까. 그래서 죽음은 자연적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 관한 사건이에요.
하이데거 모르는 사람은 뭡니까? 살다보면 죽겠지. 이것은 죽음은 부록이라. 보통 사람에게 있음이 주고 죽음은 나중에 사는 힘이 빠지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마치 공룡의 꼬리 부분이 죽음이고 덩치는 뭡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밥 먹고 사는 게 다잖아요.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요. 죽음이 풍선에 바람을 불면 그게 사는 게 돼요. 그런 사고방식이 아니면 죽음을 선취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그렇게 살지 아니하면 자신의 근거를 모르는 비-본래적 존재자가 됩니다.
아까 이야기한 왜 비-본래적 자아, 자극에 헤매고 욕망에 설치고 새로운 자극을 향하여 잡담으로 인생 다 보내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거든. 그렇다고만 하면 안 되고 왜 인간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와야 돼요. 그 이유는 세계-내-존재를 내-세계적 존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나중 사건으로 미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죽음을 나중 사건으로 미루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누굴 위한 세상입니까? 아까 인간은 누굴 위해 존재한다? 자기실현을 위해 존재하지요. 그럼 이 세상은 누굴 위해 존재합니까? 나를 위한 존재, 나를 위해 필요한 도구로 존재하지요. 그러다 갑자기 죽으니까 아쉽죠. 그래서 울잖아요. 하이데거는 그런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런데 네가 왜 불안하지? 눈앞에 네 것 있고 해라.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한지 이유를 대라. 왜 공허한 이유를 대라. 공허한 이유를 몰라요. 나 있고 세상 있으면 이론상 자충족적이다. 자기 충족적이다. 그걸로 됐다.
엄마가 시장 갔다고 얘가 울고 있습니다. 엄마가 오게 되면 뚝 그치지요. 엄마의 젖만 있으면 되고 엄마가 옆에 있으면 되잖아요. 그 얘를 충분히 인간성의 절정으로 봅니까, 아직 인간 덜 된 것으로 봅니까? 인간 덜 된 것으로 봐요. 어린아이니까 꼭 물체 같아. 그저 물고기 같아. 물 없으면 허덕거리다가 물주면 됐어요. 주변의 세계란 것이 자기실현, 자기충족을 위해서 족하다. 이거는 인간이 아니고 물질입니다. 물질덩어리에요.
그런데 아까 하이데거는 말하기를 인간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세상을 바꾼다고 했지요. 바꾸면서 뭐가 발생되지요? 불안과 공허가 생기는 거죠. 그 불안과 공허가 어디서 오는지 이 세상에 있을 것 다 있는데 왜 불안하지요? 서울대학 가고 싶다고 해서 서울대학 갔고 사법고시 합격했는데 왜 불안하지요? 죽는다는 문제는 피하면 되니까. 죽을 때는 보약 먹고 링거 꼽고 피하면 되니까. 나중에 오니겠지, 꼬리부분이니까. 하이데거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꼬리 부분이 아니고 중심부분에 죽음이 나를 만든 거예요.
죽음이 나를 있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지요. 불안은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면서 여기서 아까 궁금했던 가능성이란 게 뭐냐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죽음이 나를 만들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죽음 위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비로소 존재자의 의미가 찾아지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시간이 나와요. 책 제목이 [존재와 시간]이죠. 시간은 현재를 이야기합니다.
현재를 의미한다는 것은 기존의 도구적이고 비본래적 실존이 균열, 금이 간 거예요. 화산에 금이 가면서 마그마 나오잖아요. 하이데거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존재 인간이 순간적이고 공허한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고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 번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인간은 현존재가 아니고 거기서 단독자가 된다는 거예요. 단독자는 키르케고르가 먼저 쓴 용어인데 단독자가 되면 거기서 창조적 세계가 새롭게 열리게 돼있습니다.
어떻게? 쪼개진 단편적인 것이 아니고 세상 전체가 한꺼번에 인간이란 말을 안 한다고 했지요. 현존재라 했지요. 단편적이 아니고 전체적인 존재가 현존재를 통해서 솟구쳐 오르겠지요. 그러면 본인은 알파요 오메가가 되는 겁니다. 쪼개진 단편을 보는 게 아니고 세상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현존재에 매달리는 게 아니고 존재 자체가 그대로 나한테 오게 되면, 이걸 현존재에서 현재라고 이야기에요. 시간으로 말하는 나라는 존재, 나는 현재가 돼요. 현재가 되면 누가 주인공이내? 전에 있던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지금이 나를 매일같이 새롭게, 새롭게 매일같이 생산해내고 창조해 낸 결실물이 지금 나의 신체요 몸뚱이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하이데거는 창조적으로 현재를 형성한다.
그러면 창조적으로 형성하면 이게 지속적인 게 아니에요. 고대인들은 현재를 눈앞에 있는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지속한다는데 나를 볼 때 내가 지속적인 게 아니니까 나에 대해서 집착을 안 하지요. 매일같이 굿모닝입니다. 매일같이 뷰티풀 선데이. 자기를 볼 때 매일같이 아름답고 감사하게 되고 새로운 한 날과 새로운 몸을 주신 것에 대해서 고맙다고 나오지요. 고맙습니다, 죽음이여. 굉장히 역설적이잖아요.
세상의 죽음은 도피 대상입니다. 죽으면 안 돼. 이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죠. 죽음은 재수 없어. 우리 가정에 누가 죽었다면, 재수 없어. 도망쳐야 돼. 결국은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은 죽음과는 멀찍이 떨어져야 돼. 공동묘지 근처 가면 안 돼. 귀신 나와. 이렇게 되면 세상은 자아실현을 위해서 등쳐먹고 이용만 하게 되며 죽음이 부활이 돼서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죽음을 하이데거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근성이라고 하지 않고 엄습이라고 해요. 근성과 엄습의 차이를 압니까? 근성이란 일종에 습관 같아서 내 안에 내재된 버틸 수 있는 것, “나, 근성 있지.” 불안이란 예측된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근성으로 이겨낼 수 있지요. 일곱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마음 준비가 된 것은 근성이고, 여덟 번째 일어날 줄 알았는데 더 망했을 때는 엄습이고. 뭔가 불안이 온다고 해서 불안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이데거는. 예측한 불안은 불안도 아니라는 거예요. 시험에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이건 불안도 아니에요.
하이데거의 불안은 미래에서 부딪칠 정말 낯선 죽음을 현재에 미리 존재의 조개가 입이 열리면서 우리에게 계시되어 엄습할 때만 아는 거예요. 엄습이 되면 더 이상 자아실현을 위해서 사는 자체가 불안을 위발했고 이것이 내가 헛된 공상적인 상상의 엉터리 나를 나라고 착각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엉터리 존재의 특징이 뭐냐? 계속 지속을 요구한다는 거예요. 지속을 엄습을 통해서 쪼개야 돼요. 분열돼야 돼요. 분열되면 매일, 매일이 새 날이 되면서 마태복음 6장 말씀처럼 그 날의 염려는 그 날에 족하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박 목사님 그렇게 살아갑니까? 지속입니까, 파편적입니까? 하루하루. 이럴 때 그 인간은 깊이 있는 인간입니다.
이 시간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과거-현재-미래, 기존의 세계-내-존재자들이 알고 있던 그런 시간이 아니고 바로 죽음을 선취해서 나온 현재. 인간이 시간을 느끼는 게 아니고 시간이 그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는 현존재를 새롭게 만들 때 그 사람은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현재만 사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어제 죽으나 내일 죽으나 현재만 사는 거죠. 그건 역사가 아니고 묵시가 되겠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 비역사적 방식으로 존재를 규명한 것이 전기 사상이에요. 후기사상은 비역사적 방식이 아니고 역사과정 자체가 결정적인 거죠. 이제부터 후기사상입니다. 제가 쓴 용어에 의하면 묵시적이죠. 현재만 있으니까. 죽음을 앞당겨서 죽음이 만들어낸 거죠. 이것을 불트만한테 걸려드니까 하이데거의 사상은 십자가의 반복이죠. 십자가가 선취하는 거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고 십자가는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늘 반복이 되지요.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십자가 사상을 철학적 용어로 바꾼 거예요. 존재라고. 기존의 사람들은 존재가 숨어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존재,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있고 내가 죽어서 천국 가려면 예수도 믿어야 되고 십자가도 믿어야 되지요. 그런데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이거는 비-본래적이죠. 왜냐하면 자기 자아실현하기 위해서 천국 간다는 자기실현을 위해서 세계 내 움직였던 예수님이 죽었던 세계 내 사건 있잖아요. 그걸 자기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이 이해했는지 자꾸 묻고 싶어요. 그래야 그 다음 진도가 돼요.
왜 신학자들이 하이데거를 좋아하는지 알겠지요. 성경에서 해석이 안 되고 논리가 연결 안 되는 걸 하이데거 철학으로 논리가 다 연결돼요. 어떻게 연결된다고요? 존재는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일 뿐이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건 어디서 나왔다? 숨어있는 존재에서 나온 존재자일 뿐이라고 돼있지요.
그걸 신학으로 바꾸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이 내가 여기 있다고 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다고 된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눈에 안 보이지요. 그러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존재 그 자체가 되는 거예요. 존재에서 만들어진 우리가 존재자이기 때문에 존재자의 의미는 존재의 의미를 듬뿍 담을 때면 그 사람은 본래적 존재가 돼요. 만약에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본래 원초적인 창조주를 잊어버리면 인간은 그냥 자극적이고 쾌락적이고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오늘도 새로운 만족을 찾아다니는 떠도는 부유하는 기름 같은 존재밖에 안 된다.
그런데 기름 같은 존재자지만 사람들은 줄곧 그것으로 사는 이유는 뭐냐?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거울 보면 자기만 보이기 때문에. 그리고 거리에 나가면 상대방이 보이기 때문에. 내가 보이고 상대방이 보이고 그것이 내가 다룰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어디서 왔는지 묻지를 않아요. 왜? 깊이가 없으니까. 일단은 보이니까 보이는 나를 어떻게 만족시키느냐고 하니까 얄팍한 존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얄팍한 내가 얄팍한 나에게 어떻게 변화시켜서 존재의 깊이를 아는가? 그거는 실패라는 거예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실패지만 가능성이 있다. 뭐가? 네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다. 죽는 건 나도 압니다. 아니야. 네가 있음을 본체로 보고 죽음을 하나의 부록으로 본 게 문제였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고 십자가를 부록으로 본 것이 문제라는 거죠.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복음이잖아요. 그 십자가를 내가 있는 중심 자리에 박아버려야 돼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는 게 성도의 양심이라 했지요. 성도가 아닌 자의 양심은 뭐라고 했습니까? 로마서 2장 15절 말씀처럼, 비겁하게 변명하고 고소하고 고소해도 도 변명하고. 이렇게 한 평생 다 보낸다고 했잖아요. 성도의 양심은? 사도 바울처럼 누가 찾아와요? 주님께서 심령 한 복판을 공격해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너희 것이다.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자의 것이 천국이다.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만들고 있는 거예요. 식은 붕어빵보다 만들고 있는 붕어빵이 맛있잖아요. 주님께서 지금 놀고 계신 게 아니고 천국을 만들고 있어요. 우리 심령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천국 만드는 거예요. 그걸 말씀대로 만든다고 하는 거예요. 하이데거의 말씀해석이 또 나옵니다. 이해되는가 싶어서 제가 자꾸 연관시켜서 이해를 돕는 거예요.
이게 전기사상이라고 했잖아요. 전기 사상은 비역사적이라면 후기사상은 역사적이라 했지요. 그래서 나온 책이 존재와 시간이 아니라 [시간과 존재]에요. 역사적으로 한다면 하이데거도 결국 존재하다가 다시 세상적으로 나갔다고 오해하지요. 하이데거가 말하는 역사는 그런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줄곧 지속되는 역사가 아니에요. 뭘 말하느냐? 묵시가 뚫고 나오는 겁니다.
여기가 세상이라면 밑에 존재가 있거든요. 존재가 뚫고 나오면 현재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BC5세기에 뚫고 나오면 BC5세기 현재가 되겠지요. 그 다음에 AD2세기에 뚫고 나오면 AD2세기 현재가 되겠지요. 19세기에 뚫고 나오면 존재가 되겠지요. 하이데거는 이걸 기본 기분. 기분이란 말은 그 당시 사람들이 진리라고 할 때 오래 갈 것 같지요. 뉴턴의 만유인력이 진리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인슈타인에 와서 상대성원리로 바뀌었잖아요. 진리가 자꾸 바뀌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진리라 하지 않고 근본 기분이라고 해요. 그냥 기분이라 하면 각 사람이 다르니까 그 시대를 아우르는 기분을 근본 기분이라고 하이데거만 쓰는 특수용어지요.
하나에 예를 들면 고대철학에서 그 시대의 진리가 뭐냐 하면, 피지스, 요새 말로 물질적인, 물리적인 것. 물리학을 physics라 하지요. 지금은 마음 따로 물질 따로 있잖아요. 옛날에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기본 물질을 피지스라 합니다. 그걸 하이데거는 그 당시의 근본 기분이라 하는 거예요. 모든 기분은 기분이기 때문에 앞에 붙는 게 뭐냐? 어떻게 전 세계를 빛으로 된 물질로 보느냐?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이 아닙니다. 마음, 양심까지 합쳐서 포함시킨 개념이에요. 그게 경이로워서 그래요. 쉬운 말로 놀라워라. 고대인들은 세상을 경이롭게 본 거예요. 그게 그 당시 근본 기분입니다.
그래서 후기사상에서 시간과 존재에서 말하는 현재라는 것은 보통 말하는 역사가 아니고 묵시가 뚫고 나온 거예요. 그걸 나열한 것이 후기사상이라고 보면 돼요. 전기사상을 부정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근대과학에서 기분은 판단이 들어가요. 처음에는 경이롭다 했지요. 데카르트 이후에 회의와 의심의 기분. 같은 뜻이에요. 그런가하여 의심하는 것. 의심과 회의의 기분에 지배받는 이 시대가 근대과학시대에요.
의심과 회의의 기분에 속해요. 근대인간은 주체사상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규정을 하는 거예요. 옛날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지금은 내가 의미를 줘야 돼요. 꽃이라 하매 꽃이 되었다. 규정을 하다보니까 판단을 해야 돼요. 판단하기 위해서 무규정에서 규정으로 나오기 때문에 의심과 회의를 하게 되는데 결국 믿을 것은 자신의 힘밖에 없어요. 그 시대를 계몽의 시대라 합니다. 계몽은 깨우침, 깨어남. 예를 들어서 선진국 앞에서 아프리카는 덜 계몽된 거고 깨어있는 것은 유럽이죠. 그렇게 비교하면 쉽지요.
계몽의 시대에서 나온 게 뭐냐? 이념이 나와요. 진보 이념. 이제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다. 더 발전하자, 진보하자. 진보하지 회사는 무너지고 진보한 회사는 되는 거예요. 진보한 치킨 집은 되고 진보하지 않은 치킨 집은 망하고. 모든 게 경쟁이에요. 비교. 그래서 제가 설교에서 싸움에서 돈이 생긴다 했잖아요. 싸워야 돈이 되는 거예요.
진보하는 목적이 뭐냐? 각각의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에 세상은 수단이 되는 겁니다. 당신 어떻게 살아요? 우리는 말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친절하게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 욕구충족의 끝은 자아실현. 아줌마끼리 말하면서, 아파트 샀다면서?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에요. 차 바꿨다며? 왜 바꿨습니까?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죠. 넓은 아파트가 안전하니까. 좋은 동네로 이사해야 해. 가난한 동네는 불안해. 좋은 동네에는 순찰차가 자주 다녀요. 그래서 안전 확보와 욕구충족이에요. 돈 벌어서 좋은 동네로 이사 가야 돼요. 청담동 간다고? 아이고, 좋겠다.
이게 계몽이에요. 계몽하기 위해서 분석해야 돼요. 분석하기 위해서 만족하면 안 돼요. 의심해야 돼요. 회의해야 되고. 배신당하는 것보다 배신하는 게 쉬워요. 그렇지요. 쉬운 쪽을 선택해요. 그래서 그걸 한 마디로 약았다고 해요. 약지 않으면 못 사는 세계.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이라고요?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기분이라 하는 겁니다.
이건 비-본래적이죠. 하이데거는 이걸 경이로움, 놀라움, 이 세상 노을 보고 놀라고 아침 해 뜨는 걸 보고 눈물 흘리고. 그런 것도 있어요. 오페라 가수 소리 듣고 울지요. 그리고 열심히 신에게 기도했더니만 한 골 넣었을 때, 또는 9회 말 역전되었을 때 울잖아요. 너무 좋아서.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좋아서 울지요. 신이여, 감사합니다. 아직 경이가 남아있지요.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경이로만 돌아가서는 안 되고, 뭐로 가야 되느냐 하면, 경이의 기분으로는 옛날로 돌아가니까 안 되고 경외의 기분. 현재 의심에서 경외. 경이는 어떤 뜻입니까? 대자연이 숭고하다고 하잖아요. 숭고하지만 나는 안 변했지요. 그냥 숭고한 걸 감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경외는 뭡니까? 내가 신 앞에 굴복하지요. 경외는 이미 자기 무릎 꿇은 상태잖아요. 모세야 신발 벗어라. 이건 경이가 아닙니다. 떨기나무에 불 붙었네. 이건 경이로운데 거기서 목소리 들리니까 경이에서 경외로 바뀌잖아요.
여러분 중세미술에는 원근법이 없어요.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것은 마귀적 유혹을 받을 수 있어요. 눈으로 보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봐야 되고, 그래서 중세에서는 시각보다 청각이 발달됐어요. 쉐마! 들으라! 들어서 실천하는 것이지 네가 자꾸 보려고 하지 마. 거기는 마귀가 우상화 되어 끼어든다. 그래서 동방교회가 신상 만드니까 서방교회에서 아주 싫어했어요. 눈으로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들어야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듣는가? 무슨 주파수로, 개소리? 아니 내면의 소리, 양심의 소리, 신의 소리로 듣는 거죠. 신앙생활을 그렇게 한 겁니다. 경외의 기분은 내가 무릎 꿇어야 될 대상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의심에서 경외로 어떻게 바뀌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건 빨간 걸로 쓸게요. 의심에서 경외로 바뀔 때는 경악해야 된다. 경악하지 아니하면 겸손하지 않다는 거죠.
이래 보니까 하이데거가 철학자잖아요. 특히 천주교 신학자들의 하이데거를 굉장히 좋아해요. 어떻습니까? 들어보니까 철학자 같아요, 신학자 같아요? 그냥 경이롭다, 숭고하다고 하면 칸트거든요. 철학자지만 경외한다는 것은 경이가 아니고 구체적인 어떤 분에게 무릎을 꿇는 거잖아요. 하늘에서 경외한다. 이건 말이 안 돼요. 뭔가 하늘을 만드신 분이 있다는 걸 경외하잖아요. 그리고 겸손이에요.
결국 불트만에 오게 되면,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게 경악이에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게 경악이 되는 거예요. 안 그래도 그 당시 사람들이 교회 안 다니고 신학자들 싫어하는데 하이데거가 철학적으로 신학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복음을 다 이야기해주니까 신학자들이 참 편하게 되었지요. 하이데거철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용어를 집어넣으면 완전히 복음이 돼버린 거예요. 하이데거를 안 좋아할 수 없지요. 성경해석에서 영향을 안 받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철학은 물론이고 신학 쪽에서도 유명한 인사 되었습니다.
교재 2페이지 봅시다. 하이데거가 해석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중간에 보면, [진리 역시 결국 그 자체로 동일한 것, 불변적 것, 영원한 것을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즉 하이데거의 경우 어떤 것이 A, 그것이 다른 것, B로 드러나는 걸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우 진리는 A를 바로 A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 다음에 그 밑에, 밑에. [해석이란 개념도 어떤 것을 A를 바로 A로 전달하는 행위는 틀림없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것은 동일성은 물론이지만 그런 A를 전달하는데 해석이란 것은 하나의 역사적이고 가변적 인간 세계에 전달하는 것이 해석의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하이데거의 전기사상이 아니고 후기사상을 말합니다. 후기사상이 그때그때마다 계시가 되어 등장한다고 했지요. 계시, 나타난다. 은폐된 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나면서 비-은닉이 돼요. 비-은닉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하면 숨어있지 않다는 뜻이잖아요. 하이데거가 쓸 때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무리 나타나도 은닉된 것을 주안점으로 해서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나타나면
십자가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활동한다고 하면, 신학자들은 뭐로 봅니까? 사도 바울을 이렇게 했다고 하잖아요. 자꾸 나타난 사도 바울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사도 바울은 자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숨어있는 십자가를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에 말씀이 나타났다고 할 때 나타난 문자로 해석하면 안 되고 영으로 해석하란 말이죠. 말씀 안에 누가 계신다는 뜻이에요. 하이데거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해봅시다. [그렇다면 어떤 A를 바로 A로 표현하는 뜻은 무엇일까? 변화 내포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을 철학에서 이념이라 한다.] 이념이란 순수형식을 말하는데 형식은 구체적 내용을 담지 않은 형식을 순수형식이라 해요. 내용이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역사에 따라서 이념이 근본 기분에 따라서 그 진리가 그 이념의 내용이 채워지겠지요. 그게 바로 그 시대에 합당한 해석이 된다는 거예요.
신학자들은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그대로 가져와서 성경해석학을 펼치는 겁니다.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걸 개혁주의라 하는 거예요. 내가 보니 이해를 못하시는데 차분히 말씀드릴게요. 루터가 해석했잖아요. 루터 해석을 가져오는 게 개혁주의 아니라고 오늘날 개혁주의가 말하는 거예요. 루터는 루터 시대의 해석이 있을 거고. 들어보면 하이데거 철학이라니까. 후기철학. 오늘날은 오늘날의 삶에 적합한 해석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진리는 날마다 개혁돼야 된다는 말이에요. 지금 개혁주의 신학에 속한 교수들이 다 그런 이야기한다고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진리가 확정됐다는 말이에요,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에요? 그때그때 다르다는 말이고 최종 진리는 뭡니까? 갈 때까지 가봐야 된다는 거예요. 완전 강남스타일이에요. 갈 때까지 가볼까~ 그래서 내가 개혁주의를 이단으로 공격하는 거예요. 그들의 아무리 공부해도 하이데거를 못 벗어나요. 방금 이야기한 하이데거 해석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이데거 공부 왜 했는데? 하이데거 공부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복음과 관계성에서 하이데거가 과연 복음인지 따지는 것 아닙니까.
그 말을 우리 십자가마을이 욕 얻어먹는 다른 말로 바꿔볼까요? 너만 진리가? 너만 목사가? 너만 성령 받았나? 그게 이 말이에요. 개혁주의든 하이데거든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이든 그들의 관심사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떤 진리를 알면 나를 구원할까? 이겁니다. 관심사가 그것밖에 없어요. 그때그때 그 시대의 근본 기분을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하이데거의 주장에 의하면, 하이데거만 해도 유명세 떨 만하지요. 죽음을 선취한다는 말이 얼마나 고상한 말입니까. 십자가 언급하니까. 개혁주의학회 교수들 하는 말이 십자가 복음을 오늘날 현대적으로 적용해야 된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십자가 복음을 알아서 그들을 구원시켜야 된다고 하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이야기했잖아요. ①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셔서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
②그 은혜에 추가해서 죄 용서하는 십자가 은혜까지 주셨다. 1번, 2번에 모든 교회가 속해서 그걸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세워도 틀리지 않다고 장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됐다고 했지요. 제가 진짜 복음 세 번째를 이야기했잖아요. 1번, 2번이 아니라고 세 번째가 있다고.
세 번째가 바로 말씀이 직접 나타났을 때 하이데거에 의하면 사람들은 경악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어버렸습니다. 예수님 죽인 것을 내가 받아들여서 구원받고자 했던 이 시도, 정작 주님 나타나게 되면 그분을 자기 손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정도로 인간은 자기로부터 시작해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로부터 또는 세계-내-존재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하이데거에 의하면 도구적 존재자에요.
하이데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하이데거를 공부한 것은 기존의 모든 신학이 하이데거 범주 안에 있다는 사실을 제가 밝혀주는 겁니다.
하이데거는 해석이란 언어가 자체적으로 일어나도록 존재에서 계시되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텍스트는 존재가 스스로 나오는 처소라고 이야기한 거죠. 그래서 인간은 언어의 창시자가 아니라 존재의 부름에 대한 응답자다. 하이데거가 후기철학에서 그런 이야기해요. 존재의 부름이란 응답자가 인간인데 언어로 응답받는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언어, 텍스트를 통해서 은폐된 존재가 사건화 되게 되면 그것이 우리에게 언어적 사건으로 찾아와서 존재로 되돌아가는 이것이 하이데거의 후기사상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강의를 여기서 끝내면 안 되겠지요. 복음을 이야기했잖아요. 항상 우리 강의를 그렇습니다. 들어보면 다 일리 있잖아요. 그러나 복음이냐고 했을 때 과연 복음입니까? 하이데거의 문제점은 첫 번째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과연 복음이 가능성을 언급합니까, 불가능성을 언급합니까? 가능성을 언급하면 현존재, 인간 존재가 긍정돼요.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취지가 날아가 버려요. 추방할 때 조금만 고생해라. 찾아갈게. 그런 식으로 추방한 게 아니거든요. 아예 추방했잖아요. 새로운 피조물은 기존의 것을 염두에 둔 피조물이 아니고 쫓겨난 인간이 원형이 아닙니다.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듭니다.
하나님이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 그 범주가 인간이 끼어들지 않아요. 아담은 끼어들지 않습니다. 아담은 단지 상징으로서만 끼어들지 아담 자체는 끼어들지 않아요. 아담은 무늬라니까. 무슨 무늬? 예수님의 무늬가 되는 거예요.
복음은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만 살아있어 활동하는 게 복음이에요. 내가 어떻게 이용하는가? 그건 복음 아닙니다. 모든 일이 주님 홀로 이루는 게 복음이에요. 우리는 복음의 보디가드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해볼까, 하는 것은 복음에서 나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여, 내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이건 복음한테 묻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게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주님의 정의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가능성이 있으면 안 돼요.
주의 말씀 속에 있잖아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것은 가능성을 언급한 거예요, 불가능성을 강조한 거예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우리 가운데 누가 높으냐고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들이 쓴 잔이 마셔야 한다고 할 때 쓴 잔이 뭡니까? 쓴 잔을 예수님이 먼저 마셨지요. 포도주가 쓴 잔입니까? 포도주 마시고 싶어 하겠다. 술 취하려고.
쓴 잔은 주님도 주춤했습니다. 아버지께 어떻게 안 마시는 방법 없느냐고 물었잖아요. 저는 이것을 예수님의 자아라고 했고, 예수님의 자아는 하나님의 언약의 주체를 위해서 예수님 자아를 바꿔치기 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할 수 있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 자아가 언약 안에서 새롭게 구성될 주님의 주체로 바꿔집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 누구나 가능성 됩니까? 가능성 되는 게 아니죠. 오히려 불가능성을 고백하는 거죠. 뭘 해도 안 되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하이데거는 가능성을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십자가 복음과 원수입니다. 십자가는 보면서도 안 되고 들어서도 안 되고 오직 마음으로도 안 되고.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나오는 말씀 있지요. 안 돼요.
제가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목회한다고 유명 인사됐다는 거예요. 제가 그분한테 이야기했어요. 목회를 왜 합니까? 목회 할 사람이 그렇게 없던가요? 목사가 목회하는 것은 죄라는 걸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진짜 목회는 누가 합니까? 주님이 혼자 하시잖아요. 살아계시니까. 주님의 목회가 시원찮습니까, 부실해요, 오류가 많습니까,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있어요? 목회를 주님 혼자 잘하고 있는 왜 우리가 목회를 해야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목회 실패자로 부름 받아서 진짜 목회는 주님만 하셨다고 증거하라고 목회자 된 거예요. 주님만 증거하면 돼요. 우리 성도는. 이게 복음이에요. 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데 기존의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신학이라고 해서 어떻게든 사람을 달래고 꽤서 교회라는 걸 만들어내기 위해서 온갖 고상하다는 십자가, 복음, 언약, 다 동원해서 하이데거처럼 불가능하지만 가능합니다. 이런 식으로 현혹하잖아요. 주님이 성령 준 사람은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꼬시지 마세요. 교회 오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옵니다. 왜? 주님이 복음적으로 이끄시기 때문에. 이게 주님의 목회와 우리 목회의 차이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도 하이데거철학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51013b 부산강의.hwp (32.5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