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9강 - 재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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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0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9강 - [허무한 명분] (끝)
셋날 아침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정석훈 목사)
계속되는 내분 !!
드디어 마지막 시간으로 강의제목은 '허무한 명분' 입니다. 사사기 12장에 보면, 입다의 딸이 죽고 난 뒤에 입다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겼죠.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따지기를, "암몬 사람들과 싸울 때에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반드시 불로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라고 하지요.
이것은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파하고 돌아왔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똑같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행동합니다. 계속해서 내분이 일어나는데, 그런데 입다는 암몬 자손들과 싸울 때 에브라임 사람들을 불렀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오히려 너희들이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았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4절에서 보면 어떻게 됩니까?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라고 되어있는데, 즉 입다가 길르앗 사람들을 모아서 그만 에브라임 사람들을 박살내버렸다는 겁니다. 입다가 원래 길르앗 사람인데 말이죠.
(삿 12:1) 에브라임 사람들이 모여 북으로 가서 입다에게 이르되 네가 암몬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
(삿 12: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삿 12:3) 내가 너희의 구원치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날 내게 올라와서 나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고
(삿 12:4)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계속해서 5절과 6절을 보겠습니다.
(삿 12:5)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가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삿 12:6)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 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천 명이었더라
살이냐? 쌀이냐?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쟁의 영웅은 나라를 다스릴 합당한 권한이 있다고, 그렇게 스스로 자기를 내세우는 행동인데, 입다가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한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인데, 즉 치는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라는 겁니다. 그게 "십볼렛이냐? 씹볼렛이냐?" 라는 것인데, 이것을 우리나라 말로 기막히게 번역할 수 있는데, 즉 "살이냐? 쌀이냐?" 라는 겁니다. 경상도 사람들은 쌀과 살의 발음을 구분하지 못해요(ㅋㅋ).
하지만 이런 차이는 레위지파의 은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십볼렛' 이라고 하든지 '씹볼렛' 이라고 하든지 말이죠. 그러나 레위지파의 은혜가 끊어지고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즉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여기죠. 그래서 이제는 자기 기준에서 보니, 이런 '너와 나의 차이'를 두고서, 즉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무려 42,000명이나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기 마음대로 !!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말이죠. 비록 이것이 집단적 모습을 띤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으로, 그렇게 간주해 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은 사사기 21장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의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로서 죽여버리고, 남은 400명의 젊은 처녀들을 600명의 남은 베냐민 자손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족한 200명은, 매년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에 올라오는 아가씨들을 납치해서 강제결혼을 시켰다는 겁니다. 성가대 아가씨들을 보쌈을 했다는 말이죠.
그들은 그렇게 해서 부족한 하나의 지파인 베냐민 지파를 채우면, 그게 열 두 지파가 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시도하는 주인공들, 그들이 아무리 승리했고 권력을 장악해도, 여전히 하나님이 보시기는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으로 마감이 되고 만다는 말이죠.
옥경이의 현실 !!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이것으로 과연 함몰이 되고 무너집니까? 그런데 이 사사기를 보면 동행하는 것이 있어요. 사사기라는 A층인 현실층, 즉 관념, 개념, 기호, 언어, 상징, 역사 등, 그야말로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입니다. 현실이란 해석의 결과인데, 즉 이 세상을 보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자기의 현실이 된다는 겁니다.
A층, 즉 현실이라는 것은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그것을 현실이 캐묻게 됩니다. 즉 "네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을 묻지요. 그러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눈물만 뚝뚝 흘리는데, 옥경이의 현실과 똑같다는 겁니다(ㅋㅋ). 묻는 것이 전부 이런 것인데, 즉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좀 살았다 싶으면 자랑질을 한다는 겁니다.
룻과 백부장 !!
그런데 A층 밑에, 즉 사사기 아래층에 동행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룻기는 사사기 9장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그게 지하층인 B층을 형성하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이 구하지 않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왕이 나오죠. 그 왕이 이방나라에서 나오는데,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부재, 마이너스 혹은 '0' 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데, 마치 없는 이스라엘이 밤에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죠.
이 룻은 모압 여인인데, 꼭 신약의 백부장과 같아요. 백부장이 이방인인데, 그 이방인을 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천국의 본 자손을 추방시키고 그 자리를 다 차지할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 라고 극찬을 하셨다는 겁니다.
(마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마 8: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 자체를 안티 이스라엘로, 즉 스스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하나님은 그런 계획을 잡으신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사기를 통해서 자기 가족부터 먼저 챙기고, 자기 감정부터 먼저 챙기고, 자기 민족부터 먼저 챙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삼손이 민족을 구하는 것과, 여자 1, 2, 3을 따라다니는 것이 똑같다는 겁니다. 그저 "어떻게 이스라엘을 한 번 살려볼까?" 라는 겁니다. 사사들을 12명이나 집어넣었지만, 제대로 해결책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사사 본인부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니, 이스라엘의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나대지 말자 !!
우리는 사사기에 끼어들지를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K1 시합을 할 때 울타리 안에서 싸우는 것을 관중들이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구경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바깥으로 나온 사람이 희망이 있어요. 그러니 "주여 제가 사사가 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대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나대는 것이 문제가 있지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사사인데, 나대니까 사사가 가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댈 때는 반드시 명분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러니 자기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까먹고 덤벼든다는 말이죠. "하나님이여, 이 몸을 바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어머니의 서원대로 제가 신학교에 가서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대지 말고, 쓸데없이 맹세한 입다를 보면서 깨달아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하면서, 그것을 지키겠다는 것은, 그것은 그모스나 몰렉, 즉 이방신을 섬기는 버릇이 또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살아도 주님하고는 같이 살아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지만, 하나님은 성의표시만 하면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어느 하나님이 좋습니까? 우리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성의만 표시하면 복을 주는, 즉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다가, 아쉬울 때 성의를 표시하면 복을 주시는, 그것이 사사기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K1 경기장처럼 울타리가 쳐진 바깥에서 반장이 선생님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자는 말이죠. "아하, 저렇게 나대다가 얻어맞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우리는 무엇을 할 자격도 없이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야말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천국에 간 백부장의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마 "목사님은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그런 사람들의 귀한 명분을 다 무시한다는 말입니까? 가족과 국가를 살린다는 그 고귀한 것을 무시한다는 말입니까?" 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러분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것은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은 아예 우리를 죽여버렸는데, 그러니 명분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야말로 바짝 마른 뼈인데, 거기서 무슨 명분이 나옵니까? 그렇지요?
삼손의 수수께끼와 허무의 극단 !!
그래서 삼손의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낼 때 그 수수께끼가 마치 카메라의 줌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줌처럼 끌어당기는데, 즉 수수께끼를 낼 때, 삼손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수수께끼에 무엇이 있는 줄로 알고, 그만 그 수수께끼에 쫙 빨려서 들어갑니다. 그 수수께끼를 풀면 진리가 나오는 줄로 알고 말이죠.
하지만 허무하면서도 허무한 줄 모르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 바로 수수께끼입니다. 말이 좀 어렵습니까? 무슨 말인고 하니, 수수께끼를 풀어보니, 삼손이 배가 고파서 사자를 때려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그곳에서 꿀이 나와서 그 꿀을 퍼먹는다는 삼손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게 수수께끼의 해답이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수수께끼를 만들게 하신 요인인데, 즉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되는데, 즉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명분 때문에 의미를 두고 산다고 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야말로 허무의 극단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자에게, 주님은 "네가 그것을 알아서 뭘 하려고 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사는 것이 뭔지?" 라고 하면, 주님은 "그것을 네가 왜 알아야만 하는데?"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럼 저는 어떻게 삽니까?"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냥 허무하게 살아"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허무의 끝을 보니, 룻기가 !!
다시 말해서, 주님은 허무의 끝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허무의 끝을 보니, 거기에 지하층에 흐르는 B층, 즉 하나님께서 자기 증명을 위해서 스스로 예정했던, 우리에게 묻지도 않았던 따로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룻기' 라는 말이죠.
요란한 현실, 옥경이 세계, 즉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는가?" 라는 것을 내어놓는 현실세계, 그 밑바닥에 지하수로 흐르는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모압 여인, 저주를 받을 이방 여인이 시어머니를 만났어요. 그 시어머니는 자기의 고향인 모압 땅으로 온 이후에 모든 것을 다 날리고 망했어요. 남편이 죽고 아들들도 둘 다 죽었는데, 그러니 허무 그 자체죠.
그래서 이제 손을 다 털고 돌아가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꼴아 박도록 하셨구나" 라고 했을 때, 그때 룻이 뭐라고 합니까? "빙고! 어머니는 약속의 땅에 적용되는 원칙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끝내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 몰랐습니까?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이게 이방 여인의 입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고백인데,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가짜이죠.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허무로 몰아넣는 분입니다. 즉 "같이 허무하자. 같이 죽자"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심사는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있었는데, 즉 자기 아들의 죽음에 관심이 있는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이란 말이죠.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나실인 - '율법의 인격화' !!
A층, 즉 이 현실층 때문에 B층이 숨어있는데, 그런데 그 숨어있는 B층의 존재의 존재여부, 이 B층이 A층으로 올라간다는 겁니다. 그럴 때 A층에서 B층과의 만남에서, 즉 B층이 현실에 드러납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나실인' 인데, 이 나실인은 율법의 인격화, 즉 "이제는 율법을 너희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삿 13:5)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죄를 증명하는 절차가 곧 법인데,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내는 절차가 바로 법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 라는 것인데, 이게 로마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람이 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죄책감만 증가한다는 겁니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너희들은 저리 가세요 !!
그러니 "법을 지켜야지" 라고 하면, 법에서 "저리 가라" 라고 하지요. 즉 "법은 네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 법을 지키기 위해서 따로 인격자를, 즉 인물을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그게 시편에도 나오고 말이죠.
(히 10: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법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허무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내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저도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 그 받은 티를 팍팍 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지만 법은 "저리 가세요!" 라고 하는데,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았으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이지, 도대체 무엇을 지키겠다고 합니까? 그런 자들은 꺼지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로마서 8장 4절의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라" 라는 말씀을 들이대면 반박하는데, 하지만 그 말씀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지, 인간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러분이 여기에 얼마나 속았습니까? 복음을 알기 전에는 "성령을 받아서 율법을 지키자" 라는 말에 얼마나 복종을 많이 했습니까? "여러분이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 성령을 받았으니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라는 말에 그동안 세뇌를 많이 당했을 겁니다. 그렇지요?
목사라고 설치면서 설교시간에 하는 말이 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그 죄책감만 증가할 뿐입니다. 법이 주는 저항감이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보다도 더 빨리 달아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법의 완성을 붙잡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증서를 써주면 이혼이 됩니까? 주님께서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이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간음죄가 달라집니다. 한 번도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사람이 가장 간통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인데, 다만 기회가 닿지 않았을 뿐이죠. 남자가 나이 90이 되면 인간이 되는 줄 압니까? 애초부터 인간이 된 적이 없는데, 여러분이 인간인 것을 증명해 보세요.
여자를 쫓는데, 그만 블레셋에서 해방이 !!
그러니 허무하다는 말이죠. 삼손은 민족이고 무엇이고 자신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의식,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 무의식의 감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조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실인이야. 나는 하나님의 예정된 사명을 감당해" 라고 하지만, 그 내부는 여자 1, 2, 3만 남아있었죠.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양다리를 걸치지는 않았는데 말이죠(ㅋㅋ).
어찌되었든 삼손 자신은 모든 힘을 자기가 원하는 여성을 차지하는데 몰입을 하는데, 놀랍게도 그런 과정에서 블레셋이 죽어나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을 시킵니까? 삼손은 자신의 개인적인 욕구와 욕망을 발산하면서, 그 부산물로 나오는 것이 "블레셋은 죽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도 구원에 해당이 됩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
나실인이 무엇인고 하니, 이번 강의가 어려워서 저도 걱정이 많이 되었는데 말이죠.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초월합니다. B층은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엇이 있긴 있지만 그것의 존재 확인은 A층, 즉 언어의 존재층에 올라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겁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삼위일체의 우상성 !!
성경말씀은 언어가 아닌데, 살아있는 인격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보았지요. 즉 "나 여기에 있고, 너 거기에 있다" 라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이론이 삼위일체입니다. 왜 이러한 삼위일체가 엉터리인고 하니,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의 존재를 가두어 놓고, 자기가 삼위일체 외부에 존재하듯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피조물인데, 내가 존재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도 나와 동일한 존재함의 속성이 있으니,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라고 했던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천국에 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부터 나온 신학입니다. 삼위일체에서의 하나님은 주님이 아니고 하나님인데, 그러니 우상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모자가 빨갛다" 라고 한다면, 모자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습니다. 그러니 "모자가 빨갛다" 라는 것이 모자에 대한 모든 것인가요? 그게 아니라,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것이다" 라는 것이 모자의 속성에 맞는 실체가 되죠. 엄마에게 "모자가 빨갛다" 라고 하면, 엄마는 "모자는 머리에 쓰면 된다" 라고 합니다. 모자와 합치되는 것은 기능이지, "빨갛다, 노랗다" 라는 색깔이 아니라는 말이죠.
지금 B층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인 예수님 A층으로 올라오니까, 사람들은 그만 그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는다' 라는 믿음이 자기 존재에서 나온,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자기 믿음을 정당화하는 욕망에서 나온, 즉 자기 실체에서 나온 더러운 속성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것이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고,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되는데,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믿고자 합니까? 믿지 않으면 됩니다. 지금 마지막 시간이 위기인데,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위기입니다(ㅋㅋ).
목사님, 이 땅의 '나'가 천국에서의 '나' 입니까?
어떤 사람이 묻기를, "목사님, 어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 있는 자아와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같은 자아를 가진 인간입니까? 아니면 다른 인간이 됩니까?" 라고 하는데, 이것도 수 년이 걸려서 만든 질문인데 말이죠. 뭔가 궁금해서 열심히 연구하다보니 만들어낸 질문인데, 즉 "이 땅에 사는 내가, 그와 동일한 나로서 천국에 살게 되는 것입니까?" 라는 것인데, 걱정 반 우려 반인데, 합쳐서 전부가 염려라는 말이죠.
천국에 갈 때는 '나' 라는 것이 그냥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호출을 당한, 그런 언약의 호출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나' 라는 존재를 그냥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셔야만 합니다. '나' 라는 것은 예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 !!
이렇게 되면 세상이 끝나고 난 이후에 속성은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먼저 하나는 긍휼의 그릇,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것 밖에 없어요. 진노의 그릇에 맞도록 새롭게 피조가 된 자는 지옥에 모이고, 주님의 긍휼의 속성이 담긴 자들은 긍휼을 입고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그때 알았다고 하는 조흔이의 외침소리가 남) 저는 저 소리가 전혀 낯설지 않은데, 인천에 있는 녹매교회의 설교를 들으면 항상 나는 소리이니 말이죠(ㅋㅋ). 설교자에게는 저런 소리가 일종의 추임새가 되는데, 힘이 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행했던 인간의 축척된 행함은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의 말씀대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갑니다. 그것이 '행위책' 인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어떻게 행해도 그것은 "네가 반드시 행해야만 했던 행위이다" 라고 해서, 그 책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리신다는 겁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예를 들어서, 강도의 경우라면 주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그런 강도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라고 하면서 가져가 버리신다는 말이죠. 그게 우리를 위로하는지 나무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속성이 자기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허락도 없이 주님께서 장악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나실인 - '고유시간을 확보한 인물' !!
그것을 나실인을 통해서 보여주지요. 삼손은 없는데, 나실인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아기가 없는 곳에 그 속성을 집어넣기 위해서 마노아 가정에 나실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실인이란 무엇인가요? 나실제 괴로움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게 '구별된 자' 라는 뜻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바로 고유시간을 확보한 인물이라는 것인데, 고유시간을 확보했다는 말은, 보통은 해와 달과 별에 의해서 시간이 지나가지만, 나실인은 그 머리카락에 의해서 고유시간을 확보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 즉 옛 하늘과 옛 땅에 저촉을 받지 않는,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간을 체크하는 것이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담겨있다는 말이죠.
나실인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인격으로 나타나버린 인물이죠.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보통의 제사 제물에는 사람의 신체일부가 들어가지 않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더럽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중보자가 있는데, 즉 우리 인간이 더럽기 때문에 어린양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린양이 들어갈 자리에 더러운 것이 끼어들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화목제물에 무엇이 들어가는고 하니, 나실인이 서약한 기간 동안에 자라난 머리카락은 포함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나실인인 그 인간이 훌륭하다는 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여주는, 즉 율법의 인격화로서 미리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장착을 한 것이죠.
(민 6:18)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
여자가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장착이 되면 삼손은 두 가지를 보여주어야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사명을 받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인해서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40년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셨음을 압니다. 그것을 알기는 알지만, 그런데 여자가 좋은데 어떡합니까? 이것은 자기가 자제하고 절제해서 될 문제가 아닌데, 절제할 수 있었다면 아마 벌써 절제를 했을 겁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체제에서 벗어났어요. 사랑을 받지도 말고 사랑을 하지도 말고, 그냥 혼자서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워요. 물론 자식들이 올 때는 반갑지만, 갈 때는 더 반가워요(ㅋㅋ). 와서 "어머님, 이것을 드세요" 라고 하는 것도 귀찮은데, 물론 그것도 돈이 있는 경우이고 말이죠. 그러니 혹시 부동산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절대로 내놓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튼 우리는 절제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안 됩니다.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뭔가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하나님의 신인 성령이 임하면 오히려 우리의 껍질이 더 벗겨지고 말아요.
여자를 밝히는 것이 나실인의 사명에 포함이 돼 !!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삼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족을 해방한다는 사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여자만 밝히는데 자기의 머리카락에서 나온 힘을 다 던졌죠. 그렇다면 성공을 했습니까? 여자를 하나라도 건졌습니까? 세 명을 다 놓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게 나실인의 사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은 그래야만 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또 계산을 해서 일부러 이 B층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졸지에 자기가 의인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아래층에 등장하는 룻은 윗부분인 A층, 즉 옥경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위의 A층은 율법이 살아있는데, 여기서 율법의 인격화가 된 사람이 나실인 삼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위층의 삼손과 아래층의 룻을 나란히 놓고 보면 보다 명확해집니다. 삼손은 율법의 인격화인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신을 받았지만, 그 머리카락은 자신의 정욕과 자신의 욕망에 소비를 했습니다. 마지막에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막상 수수께끼를 풀어봤지만 허무로 끝났지요. 하지만 허무로 끝난 그 자리가 얇은 습자지가 되어서, 십자가가 이곳을 뚫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 !!
그래서 로마서 1장 3절과 4절을 보면 뭐라고 합니까? 목소리가 제일 큰 권사님이 한 번 읽어주세요.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고 하는데,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습자지를 뚫었다는 말이죠.
(롬 1: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분이, 즉 살아있는 다윗이 메시야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노골화된 현실세계를 뚫은 유일한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습자지를 뚫었는데, 그러면 습자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해요. 이것이 바로 허무하게 사는 것인데, 극단의 허무, 즉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나서, 사랑해도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 것도 아닌, 그 어떤 명분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허무하면서도 허무하지 않은 척을 하며 살아왔던 세계가 바로 옥경이 층입니다. 개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을 해야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세계,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재미로 사는 세계라는 겁니다. 복음은 그것을 뚫는 것인데, 우리 자신이 뚫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만약에 자기가 뚫으면 허무를 자기 손에서 해소하려는, 그런 종교적인 시도에 불과합니다. 즉 "주여, 이 정도로 낮추면 되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말이죠. 몽골에서 선교하는 어떤 분이 쓴 '내려놓기' 라는 책이 있어요. 그것도 상하로 되어있는데, 내용을 보니 복음은 없고 자기 자랑만 가득하다는 겁니다.
허무와 내려놓기 !!
우리가 "이 정도로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이에 대해서 주님은 "그것마저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또 한 층을 더 낮추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고 다시 묻지요. 그러면 주님은 "그것도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더 낮추고 말이죠.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즉 "네가 천성적으로 허무한 존재임을, 기원적으로, 시원적으로 허무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네가 알기까지는 너는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A층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자기가 예수를 믿는 사람임을 자랑으로 삼고, 자기에게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세계가 바로 옥경이의 세계라는 겁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라고 물으면, "저는 어릴 때 어떻게 했고, 또 어른이 되어서는 어떻게 했습니다" 라고 하겠지요. 그러면 주님은 "그것은 행함이니 지옥에 가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의 속성으로, 인간의 동일성을 유지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우리 자신이 살아있는 한, 우리 자기 자신의 속성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유지하는 이상, 우리의 갈 곳은 단 한 군데인데, 그것은 지옥 밖에 없다는 겁니다.
지옥에서도 여전한 부자의 행세 !!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거지인 나사로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갔는데, 그런데 지옥에서 하는 행세를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는데, 나사로에게 지시해서 자기에게 물을 좀 갖다 달라고 말이죠. 세상에 살든 버릇을 지옥에 가도 버리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자기 속성이 자기 실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가서라도 자기 속성 버리지 못했다는 말은,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곧 지옥이라는 겁니다.
(눅 16: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여러분, 지옥이 궁금하십니까? 보고 싶어요? 지금 마음껏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면 "서로를 보고 인사하시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하세요" 라고 하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서로를 보면서 허무를 보라는 겁니다. 최 허무, 김 허무, 박 허무, 그렇게 서로서로 허무로서 악수를 하시면 된다는 말이죠
사사기는, K1 격투기 경기장 !!
다시 정리하면, "사사기는 K1 격투기 경기장이다" 라는 겁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이방인은 들어갈 수도 없고 관여할 문제도 아니죠. 다만 바깥에서 구경하면서 지켜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삼손을 보면서, "끝에 허무로 끝났구나" 라고, 즉 허무해야하도록 태어난 것이 곧 천성적인 인간의 속성이란 겁니다.
그런 허무한 상태에서 습자지에 귀를 기울이면, 물론 귀를 기울인다고 해서, 10년이 지나도 나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허무로 살자" 라고 하면서 포기할 때 뚫고 들어옵니다. 산 다윗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뚫고 들어오면, 그게 우리를 삼켜 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이 우리를 삼켜버리면, 그것은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기적이죠.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것이 기적이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받았다면, 다른 기적은 버려야 합니다. 다른 기적은 자기가 있다는 유혹거리가 되기 때문에 가져다 버리세요. 재산을 버리라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재산은 꼭 쥐고 있어야만 자식에게 버림을 받지 않아요. 부동산을 꼭 쥐되, 자기의 가치는 허무 자체임을 알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자기의 가치는 허무의 끝장인데,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삼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보았자, 인간은 자기 감정을 위해서 핑계되고 변명하며 소비할 뿐입니다. "나 의인인데, 이 정도는 어때?" 라는 식입니다. 그런 본색을, 그동안 자기도 미처 몰랐던, 자기에게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 구원을 받는 자의 절차로서 그것을 행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머리카락이 잘리는 삼손 !!
이제 사시기의 마지막 대목인데,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립니다. 그런데 머리카락 속에 해와 달과 별로 측정되는 시간이 아닌 B층, 즉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서 예정된 시간이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잘려버리는데, 그리고 드디어 블레셋은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삼손을 죽이는 장소가 의미심장한데, 그게 블레셋의 신이 있는 다곤의 신전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죽은 분인데, 즉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라는 신명기21장의 말씀처럼, 나무에 달려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계시적 시거널이 됩니다.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자가 맞아요. 그런데 그 저주를 받은 자에 동참하는 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자신의 행함은 죽고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신 21: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A층에서는 십자가 사건이 15년 전의 지나간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는 순간 밑바닥에 흐르는 B층이 항상 현실층을 장악하고 있었죠. 그러니 경계는 있지만 한계가 없는 존재인데,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보기에는 죽은 자로 보이지만, 내가 십자가 안에서 너희들을 보니 너희들이 바로 죽은 자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한 쪽에서만 본 차이인데, 즉 그들은 이 땅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자의 입장에서, 즉 자기 쪽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오류가 생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래층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본 차이는 놓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하면서 영웅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소위 스타의식인데, 하지만 삼손에 와서는 스타의식이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허무한 것으로 끝났고 말았어요.
전혀 다른 흐름이 흐르는 '룻기' !!
그러면 이제 룻기를 봅시다. 룻기는 이와 전혀 다른 흐름이 흐르고 있죠. 룻은 "망한 집안을 하나님이 망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망해도 좋습니다" 라는 식으로, 같이 그곳에 뛰어듭니다. 정말 이상한 여자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인 나오미조차 말렸는데, 즉 "나이도 젊은데 희망이 있다. 새로 시집을 가라. 요즘 세상에 그건 흠이 아니다. 총각들은 아이가 있고 이혼을 해도, 착하고 예쁘면 무조건 좋아한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예쁘고 착하면 기회는 항상 열려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룻이 뭐라고 합니까? "저는 어머니를 보는 게 아니고 어머니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이름을 바꿔요. 마라, 즉 '슬픔의 여자'로 말이죠. 기쁨으로 갔다가 슬픔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래층에 있는 룻기는 '출애굽 대기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제는 외부에서 건져주지를 않으면 대는 끊어지는데,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개입합니다. 율법의 인격화는, 삼손의 경우에는 그가 다곤의 신전에서 죽을 때, 비로소 그때 그는 나실인의 사명을 마감합니다. 나실인이 된다는 것은 죽어야한다는 것을, 즉 "아하, 율법의 완성은 죽음이구나" 라는 것을 비로소 삼손은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실인 삼손은 그동안 이스라엘 지배의 명분이었던 다곤 신상에서 죽어요. 다곤 신상의 기둥 둘을 붙잡고 죽는데, 이것을 가지고 건축가들은 시비를 걸어요. 삼천 명이나 들어가는 곳의 건축기둥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래서 손으로 기둥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쇠사슬로 묶었던 것을 잡아당기니 기둥이 무너지면서 다곤 신전이 무너졌다고 말이죠.
시간이 남아도는지는 몰라도, 되지도 않는 것을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겁니다(ㅋㅋ). 이것은 지문에서 가장 먼 것을 고르는 문제와 똑같은 짓인데, B층을 모르고 A층에서 놀던 버릇을 그대로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겁니다. 창조과학회가 바로 그러한데 말이죠.
이 세상이 곧 수수께끼 !!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그런데 옛날 유물을 파면, 땅을 파면 거기에 예수가 나옵니까? 이 세상은 수수께끼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이것인데, 이 세상 자체가 해답이 없다는 말이죠.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십자가는 19금이 아니기에 !!
이 세상에서 해답을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은 허무입니다. 90년을 살아도 해답을 모르고, 또한 몰라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알아야 된다고 하는데, 주님은 "네가 뭔데 알아야 되느냐?" 라고 하죠. 그러니 우리는 모르기 위해서 태어났는데,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습자지를 뚫고 십자가가 들어오면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모든 연령이 다 시청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어떤 분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 라고 하는데, 아이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아이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통성기도를 하는 쌍둥이 아이들처럼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아이들은 나름대로 허무를 압니다. 그것이 절차인데 말이죠. 나름대로의 허무를 느낀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엄마, 시험문제를 한 개나 틀렸어. 죽고 싶어"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허무입니다. "내가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되겠는가?" 라는 식으로 허무를 느낍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신 절차야" 라고 하면, "무슨 그런 주님이 다 있냐?" 라고 하는데, "어, 주님께 관심이 있네?"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에 대한 관심이 곧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욕심인데, 무엇을 기대합니까? 만약에 "엄마, 나는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어요" 라고 하면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용돈을 타기 위한, 스마트 폰을 얻기 위한 술책일 수가 있어요. 그런 특별한 것을 원하지 마시고, 허무로 태어난 원천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그것이 이미 하나님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를 바랍니다. 즉 "너도 허무하냐? 나도 허무하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곧 율법의 인격화 !!
지금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출애굽 대기상태에 있는데, 그래서 삼손은 조금 자란 머리카락과 자신의 목숨을 바꿉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줍니까? 나실인, 즉 율법의 인격화는 반드시 언약대로 죽는 죽음을 거칠 때 비로소 그 사명은 마감된다는 겁니다. 그게 나실인의 사명이란 말이죠.
나실인은 포도나무에 관련된 것, 즉 술을 마시면 안 되지요. 누가복음 22장 18절에 보면, 바로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시키죠. 예수님은 자신이 나실인이라고 증거하시는데, 즉 "나의 죽음이 곧 율법의 인격화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인격화된 것을 믿으면 구원받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B층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에 말이죠.
(눅 22: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B층과 A층의 경계를 뚫고 A층으로, 즉 기호의 세계, 상징세계, 현실의 세계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죠.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 부활한 이후에 자기의 세계로 가셨는데,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은 임시적인 정류장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보다 보아스가 더 좋아요 !!
그런데 이 원리가 다윗을 탄생시킨 룻기에 그대로 있어요. 룻기에 보아스가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보아스가 참 멋진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보다 보아스를 더 좋아해요. 첫째 부자이고, 둘째는 여자가 과부라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인데, 완전 드라마죠. 셋째는 남자가 침착하다는 겁니다. 성급하게 "내 아이를 낳아도" 라고 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물어보고 정당하게 권리를 사서, "내 아내가 되어줄 수 있습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아스는 이용을 당했는데, 나오미에게 말이죠. 늙은 여우에게 그만 이용을 당했어요. 여러분도 할머니를 조심해야 합니다. 할머니 정도가 되면 이미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났는데, 이제는 자기만을 사랑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귀찮다는 겁니다. 집으로 가고 지금 여기에 없어서 감히 이런 말을 하는데 말이죠. 아직 가지 않고 여기에 있습니까? (ㅋㅋ)
노선의 교체 !!
아무튼 할머니 나오미는 부자이면서도 자기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으로 보아스를 이용했는데, 그래서 그가 낳은 자식을 죽은 자신의 남편의 호적에 그만 올려버립니다. 그 방법이 바로 노선의 교체인데, 즉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의 교체라는 겁니다.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법적인 장남이 따로 있고 마음속의 장남이 따로 있는데, 이게 무슨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인데 말이죠. 즉 주님 마음속의 장자는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인간의 족보에서 이탈시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아들이 아니면서 아들이 되게 하는 작업, 그러한 작업을 위해서 기존의 법적인 아들을 죽여버리고, 죽은 그 아들을 다시 살려내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
그 아들을 죄로 말미암아 죽이고, 그 하나님의 아들 호적에 넣기 위해서 죽은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시는 겁니다. 그게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라는 로마서 8장 9절의 말씀인데, 그리고는 11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너희도 살리시리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모든 효과는 철도 노선을 교체하시는 룻기의 법칙에 의해서, 즉 다윗언약의 법칙에 의해서, 육에서 영으로, 그렇게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작업을 그렇게 구약부터 시험을 해왔던 겁니다. 물론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보면서,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는데, 극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습자지를 뚫고 올라온 십자가를 알아버리니, 그동안에 자기가 노력했고 알았던, 그렇게 교회에서 했던 것이 너무나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이야기처럼 너무나 돌아왔다는 말이죠. 정말이지 쓰잘떼기 없는 짓을 했는데, 이미 다 이루었는데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두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습니까? 허무하게 되어있음을 새삼스럽지 않게 여기게 하시고, 허무하기에 날마다 십자가를 감사히 여기는 저희들이 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10,09 재정리함 - 녹취 구
강의를 들으면서 마치 등산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초반부에는 좀 힘들었는데,
어느 정도 탄력이 붙으니 진도를 따라붙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산할 때 다리가 풀리면 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신나고 허무하게 사사기를 공부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설교를 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닌데,
그것을 설교하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으로 특이한 종족이라는 것을 아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같이 참여하면서 동족의식을 느끼는 분들도 그렇고 말입니다.
외계인 무리를 보면 어디에 신고해야 합니까? ㅋㅋ
감사합니다.
첨부파일 : 15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사사기(의심의시절)(8,2~4)(총9강)(강의정리)--재정리.zip (491.3K), Down:17
구득영(IP:203.♡.97.152)
15-10-14 23:06
강의하신 목사님과 녹취하신 목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덕분에 행복하고 허무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첨부파일에 다 들어있습니다.
겁도 없이 사시기를 설교하던 때가 새롭네요.
물론 그때는 담임목사여서,
"개판같은 담임목사 때문에 교회를 다 말아먹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못했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