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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37절(가락-결백?)151008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37절 할 차례입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지요..

보통 인간들은 “사람 외에는 안 본다.” 평소에 24시간 관심사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람과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어떤 이벤트를 벌여버려요. 니가 나를 직접 보지 말라는 겁니다. 왜? 직접 봐봐야 목수의 아들밖에 더 되겠어요?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믿을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분이 아니거든요. 인간이 예수를 봐도 자기가 아는 범주 내에서 예수님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때문에 아무리 옆에 같이 따라다녀도 예수님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을 알릴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이한 이벤트를 벌이는 겁니다. 한강 불꽃 축제하는 것 있잖아요.. 이벤트를 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이벤트를 보면서 보통 뭐라고 합니까? 오늘 무슨 날인데..? 매일 하는 게 아니니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겠지요..

예수님께서 명절 끝날에 이벤트를 벌여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으킨 이벤트는 아니고요. 이 초막절 자체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한 것인데, 그 이벤트에서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의미를 언급해버리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할 때에 그 다른 것을 통해서 (초등학교 애들이 줄긋기 하는 것 있지요..?) 예수님의 해석하고 그 벌여진 일과 줄긋기를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생각한 그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하고 전혀 다른 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성질이 급해서 중간의 것 다 생략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면 당신은 뭐하러 왔습니까?”라고 묻고 싶잖아요? 그게 성경해석의 기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재판관(심판관)이에요. 이 땅에 재판관으로 오셨다니까요. 흔히 아는 재판관이 되죠. 재판한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요. 왜냐하면 재판 자체가 의 아니면 죄고 죄 아니면 의가 되잖아요. 원고 아니면 피고, 피고 아니면 원고, 석방 아니면 구속 되잖아요.

그러니까 재판한다는 것은 “니가 뭔데 감히 나를 재판해..?” 인생이 다 그렇다 이 말이죠. 재판한다는 말은 내가 놀던 동네 위에 있어야 돼요. 같은 범주에 있으면 “네가 뭔데?”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재판해 버린다는 말은 “너는 나한테 판단받아야 될 인물이지 니가 건방지게 나를 판단할 주제는, 그런 입장은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재판관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피고가 되어버려요. 판결을 내리는 대로 그게 우리의 운명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벌였다는 말은 “너희들이 나를 함부로 생각하는 그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주 쉽게 말해서 “너희들이 믿는 예수는 여기에 없다”는 겁니다. “니가 알고 있는 예수는 나 아니거든?” 이런 뜻이에요. 왜 그러냐? 너희들이 나 말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우겼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뭐다? 가을이죠. 눈이 오면 겨울이잖아요. 자기 딴에는 안다는 거에요.

그런데 가을을 가을이라고 이야기하고 겨울을 겨울이라고 한다고 해서 구원받습니까? 그것이 재판에 영향이 있습니까? 가을을 가을이라고 한다고 해서 “너는 의인이구나.” 하고 석방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거든요..

인간은 “3+5=8이다.” 그러니까 석방해달라는 거죠. “화성에 소금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으니까 석방해달라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돈을 수 조억 집어넣었잖아요. 노력했다 이 말이죠. 일본 학자가 하도 아프리카에 기생충이 많아가지고 기생충 연구해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기생충에서 해방했다는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거든요. 그러면 석방됩니까?

차라리 “노벨상 받는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못 갑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고 “주의 축복으로 이렇게 지혜 주셔서 최고의 상을 받았으니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소서.”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런 소리한다고 석방이 되느냐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 기준에 대해서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주님도 내 이해 범주 안에 같이 들어와 주소서.” 하는 것밖에 안 돼요.

“구원 그 이후”라는 책을 내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유명한 목사님이 계시지요? 남포교회에 박영선 목사.. 제가 신학교 때에 직접 강의에 참석하고 그 분 테이프 300개를 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박사교회에 있을 때는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하고 그분한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무엇이 문제냐 하면은 내가 이해되는 식으로 구원을 설명하는 게 잘못인 거에요. ‘내가 지금 조금씩 구원이 되고 있지 그지?’ ‘그래 내 구원은 정상적이야.’ 자기가 이해되는 범위 안에서 구원 작업을 시도하게끔 교인들에게 그런 힌트를 준다는 게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어요. 복음이 아닌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려면 내 기준, 내 판단이 계속 유지가 되는 조건이 붙는 거에요. 성경에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그러면 적은 사람이 찾는 길이 구원의 길일까요.. 아니에요. 사람 적은 쪽으로 갔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아무도 몰라요. 이것은 일방적으로 주님 기준을 적용시켜야 돼요.

그러면 그 기준을 우리가 눈치 채고 알아채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열두 제자가 다 떠나버린 이후에 십자가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의미는 그 누구에게도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여야 됩니다. 만고의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는 넘어지는 걸림돌이어야 십자가 다워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그래, 이거였어!’라고 박수치면서 달려들 내용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고 헬라인, 유대인들이 인간의 대표자인데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습니다. 기적이라는 것은 신은 살아있어서 우리가 예상 못할 일들이 벌어지면 그것은 신의 흔적이다. 따라서 신의 사건과 흔적을 받으면 우리는 구원된 사람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했지만 기적을 원한 그 판단 기준도 십자가와는 매치가 안 됩니다. 헬라인들은 (이것은 상식적이니까 들어두시면 좋습니다.) 신을 자연의 확장으로 보았습니다. 신을 초월자로 보아서 저쪽 노는 세상과 이쪽 노는 세상이 다르다고 본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이 만나를 내린다든지, 홍해를 가른다든지 어떤 기적을 내리면 “아 신은 우리를 찾아왔다.”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그렇지 않고 “신과 인간이 한 동네에 있다.”는 거에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신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아서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가 건너갈 수 없는 위대한 능력 가운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있잖아요.. 또 헬라의 신들이 그래요. 굉장히 능력자라서 폭풍을 일으키고 마음만 먹으면 파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만 인간은 납득은 하는데 능력이 없어서 그냥 순복할 뿐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에게 신을 다루는 방법은 뇌물(공여물)을 바치는 겁니다. 즉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같은 겁니다. 가인이 추수감사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드렸습니다. 제사를 인간이 드릴 때 성의껏, 정성껏 드리기 때문에 신과 자기는 한 동네 사람이죠.

그러니까 안 받는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생각해 보세요. 신이 뭘 받아서 세상을 만든 게 아니고 신이 원래 우리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에 같은 동네에 살잖아요. 신은 안방에 있고 자기는 마당쇠처럼 마당에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살아온 것에 대해서 감사의 표시로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저 생산물(오곡백과)를 바치기 때문에 “양이 적구나. 니가 쩨쩨하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안 받는 것은 아니에요. 신과 인간이 한 동네에 살게 되면 신은 책망하고 나무랄 수는 있어요.

하지만 항상 끝은 용서(용납)가 돼요. “그래 인간이니까 한 번 실수한 게 있어. 그래 한 번 실수할 수 있어. 그런데 다음에는 그러면 안 돼. 두 번 다시 잘못하면 안 돼. 이번에는 봐주지만 다음 번에는 떼찌할거야..?” 같은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요게 돼요.

그래서 폭풍이 한 번씩 일 때는 처녀나 애기(뇌물)을 바치면 되는데.. 그게 가짜잖아요. 그 것을 고상한 말로 신이 자연의 일부로서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신들이 숫자가 많아요. 폭풍을 관여하는 신, 바다를 관여하는 신, 수요일날 이야기했잖아요. 동양 철학에서 특히 대만 사람들은 해신에 신경을 많이 쓰고.. 오늘날 이사가는 신이 따로 있고 동짓날 떡하는 신이 또 따로 있어요. 또 궁합보는 신 따로 있고.. 다 따로 있잖아요.

이 자연적인 신들은 어쨌든 간에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초자연적이에요. 아무리 불러도 저쪽에서 먼저 내비추어야 됩니다. 그것을 “얼굴”이라고 대구 강의에서 했는데 시편에 나와 있죠.. 얼굴이라는 말의 반대 의미는 “시선”입니다. “시선”은 무슨 의미냐 하면 “관찰자”입니다.

관찰자라는 것이 말이 관찰자이지 심사, 회사의 감사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심사의 기준이 있어요. 기준이 뭐냐 하면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언약”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 언약 자체가 초월적이에요. 언약은 이 언약을 만들 때 인간들이 협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계약은 회사끼리 계약할 때 회사 당사자가 다 모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언약”은 “사람은 나가놀아라.” 하고 사람들은 빼버려요. 그리고 누구끼리 만드느냐 하면 “우리들”끼리 만들어요.

인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형상대로”지요. 우리라는 것이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하나가 아니고 “한 분 이상”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한 분 이상”에서 누구는 빠져있다? 인간은 빠져있는 거에요. 이 말은 언약의 성취자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따로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지금의 신학계에서는 몰라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어적으로 이것은 “엘로힘”이라는 복수적 개념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 겁니다. 구라입니다. 하여튼 모르면 아마튜어들 못 알아채게 원어 들고 나오는데 원어라는 것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그냥 인간의 언어입니다. 고대 언어는 한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가 다양해요. 다양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세분화되지를 않았습니다. 언어가 세분화된다는 의미는 경제논리가 복잡해질 때, 복잡하다는 말은 경제구조가 분업화되어가지고 도시가 형성되고 국가가 성립될 때 덩달아 법도 같이 확장되고 성문법, 불문법, 등등 법조항이 엄청나게 많아져요.

처음에 법 하나가 통하던 것이 이제는 사기들을 많이 치니까 그 법을 세분화시키고 또 세분화시키고 또 전문화 시켜가지고 법 조항들이 많아져요. 그만큼 문화가 발달하게 되면 법도 많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과 오늘 본문과 사실은 관련이 있음을 제가 언급을 해드리겠습니다. 어쨌든 간에 이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만든 주체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그것을 과연 사람이 지킬 수가 있느냐 하는 거에요.

내가 내놓치 않은 단어를 상대방이 이해가 될까요? 이해가 안 됩니다. 이야기는요, 자기가 이야기한 사람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무슨 뜻인 줄을 몰라요. 근접하려고 애를 쓰지요.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니가 지금 사랑의 뜻을 알고 지금 내 말에 동의하냐?” “사랑한다니까.” “이렇게 하면 진정성이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돼?” “니가 알아서 해야지.”

그럼 뭐에요..? 믿는다고 해도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해버리면.. 그럼 안 믿는다고 할까요? 그럼 “그봐 안 믿잖어.” 꼭 남자와 여자가 대화하는 것같이 대화가 안 돼요. 장단을 어디에 맞추어야 마음에 흡족한지..

원래 어떤 것도 딱딱 일치가 되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명령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런 뜻입니다. 자식이 엄마한테 “엄마, 만 원만.”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무조건 엄마는 내 말대로 만 원 내놓아야 돼.” 그런 뜻이에요.

그런 강력한 요구조건이 깔려있어요. “어디 쓰려고?” “엄마가 자꾸 물으면 나 이제 엄마한테 돈 달라는 소리를 못 하거든.” “글세, 어디에 쓰려고? 알아야 주지.” “엄마 나 못 믿나?” “믿으니까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알려고 하잖아. 믿으니까.” 이렇게 되면 돈을 줘놓고도 돈 빼앗긴 느낌이 들고 받은 사람은 강탈한 느낌이 들고 돈 주고받고 벌써 안 좋지요..

다시 정리합시다. 예수님은 재판관이기 때문에 인간은 배제됩니다. 그냥 무조건 피고가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제시하는 재판의 기준은 받지 않습니다. 왜 받지 않는가 하면은 처음에 언약을 만들 때 인간은 빼놓고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빼놓고 시작했다는 말은 언약을 지키는 것도 인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말씀을 못 지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어요.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쳤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바친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그것을 부연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행한 것없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 되었으니”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행한 것없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공식이에요. 구원받는 자에게 동일한 공통적 요소로 주어진 거에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조상을 닮아야 되지 않습니까? 조상이라는 것이 왜 조상입니까? 조상의 속성이 반복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계열에 있다. 같은 노선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잖아요. 항상 그 원칙은 믿는데, 그 믿음이 행함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믿어야 돼요.

그러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것”과 “믿습니다!” 믿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믿습니다!”가 완전히 배제되고 추방된 그런 경우를 당했습니까?“ 하고 묻는 거에요. 내가 했는데, 내가 한 것은 언약의 성취에 포함시키지 않고 빼본 경험이 있느냐고 묻는 거에요.

그렇다면 주님의 일은 간단하죠. 주의 일인지 마귀의 일인지 어떻게 아느냐.. 나의 모든 기준(나의 평가 기준, 나의 판단 기준, 세상을 보는 세계관)을 박살내고 묵사발내면서 낯설게 다가올 때 그것이 주의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실패했습니까? 초월자 하나님, 기적 기적을 바라던 자기 기준의 뭉개짐을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거에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라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그 말을 도저히 용납을 못하는 거에요.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말씀대로 했지요.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다가 돌로쳐서 죽이라는 민수기 말씀대로 짱돌 들고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여인을 치는 것을 당신도 동의하라. 그래야 당신도 우리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라고 했는데 주님께서 차마 그 이야기하실 줄을 몰랐죠.

지금 유대인들에게는 그 간음한 여인이 현미경 속에 하나의 시료(조직)에요. 이것 치기에 바빴지 자기 자신을 치는 것은 못한 거에요. 주님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것(바퀴벌레 같은 존재인 나)을 치자. 나를 쳐야 이 나라의 정의가 회복이 된다.”라고 하신 겁니다.

유대인들에게 왜 “정의”가 중요하냐면은 창세기 18장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이 창세기 18장에서 기도하는 내용이 뮙니까? “ 이 땅에 무엇이 있으면 벌 받지 않는다?” “의인 50명, 45명, ... 10명만 있어도 안 받죠? 그만큼 의인을 많이 생산하게 되면 유대 나라는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마일리지가 많이 쌓이고 의인이 없어져 버리면 위태위태한 거에요.

그래서 오늘날 자칭 건전하고 자칭 개혁주의라고 하는 목사들의 설교가 뭡니까? “이 어두운 세상에 의인 열 명이 없는데 여러분들이 의인 되시렵니까?” 이런 설교하고 있잖아요. 성경 내용도 몰라요. 의인은 원래부터 없었어요. 의인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개입하신 주님이 언약대로 없는 데서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죽으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을 지금 만들고 있어요. 어제 집안에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삼형제가 부부간에 다 모여가지고 구룡포에 회 먹으러 갔는데 회를 떠가지고 초장하고 채소가 마련되어 있는 식당을 찾아야 돼요. 거기서 쓰끼다시는 없어도 회만 먹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여자들이 우르르 회를 뜨러가고 남자들만 모여 있는데 50분이 지나도 안 와요.

그래서 제 동생 보내고 또 누구 보낼 참에 한 시간이 다 되어서 왔어요. 그것을 보고 느낀 것이 있습니다. 회를 다 떠서 먹는 것이 아니고 지금 거기에서 회를 만들고 있는 거에요. (하도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고기가 있으면 고기를 썰어서 회를 만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다려야 되죠.

왜? 주님은 일하시고 우리는 노니까요. 천국 만들기, 지옥 만들기 우리는 그 과정을 봐야지 결과를 보면 안 됩니다. 왜? 결과 보고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지옥 안 가고 천국 갈래.” 하면서 천국이 아닌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천국을 낼름 가지려고.. 실제로는 언약에서 배제되어서 지금 자체가 지옥인데..

주께서 지옥 만드는 재료로 자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인은 꿈은 좋다. “나 죽어서 천국 갈래” 그런데 “누구 맘대로? 니가 무슨 자격으로?” 지금 천국이 되어야 그때 천국에 갑니다. 천국은 “어디 갈래? 골라잡아라.” 하는 데가 아닙니다. 은행 알 뽑기 하는 데가 아닙니다. 대학이 있고 “어느 대학 갈래?” 하고 원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서울대학에 간다면 서울대학 벌써 수업 시작했습니다. 그래야 본과가 감당이 되지요. 시험에 합격했어도 과정에 못 따라가면 퇴학당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천국 가기 전에 그 전에 벌써 천국을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려요? 알려드릴까요? 이겁니다. “물질” 위주에서 “마음” 위주로 바꿉니다. “물질” 위주라는 것은 과학이거든요. 모든 것이 과학이에요. 사람의 몸을 해체해버리면 신체라는 것이 장기의 총집합체가 되지요. 60조~70조 개의 세포 덩어리가 되지 주께서 말한 그 “몸”은 아니에요.

분석하고 해체한다는 것은 벌써 해체하기 전부터 ‘나는 정육점의 고기덩어리로 보겠나이다.’를 이미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세계에서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인 사람이 스탈린이거든요. 자기 국민부터 해가지고 1500만을 죽였어요. 히틀러는 게임도 안 되고요. 800만밖에 더 죽였습니다. 천 단위와 백 단위의 차이입니다.

완전 두 배 이상 죽였는데 왜 죽였느냐.. 과학적, 역사적, 유물 사관론에 의하면 인간은 고기덩어리에요. 고기 안 잡습니까? 소고기 먹잖아요. 혁명에 지장되는 것은 죽여야지요. 사람이 아니고 고기니까. 도킨스라는 사람은 인간은 안에 들어있는 “DNA”라는 유전자를 보전하는 하나의 사물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희미하다.’하면 유전자를 바꿔치기 해서 아이큐(IQ) 150으로 나오게 하면 됩니다. 이런 것을 과학에서 “유전자 조작연구”라고 하고 벌써 많은 단계에 이르렀거든요. 돈만 있으면 그 사람도 새로운 인조인간 로보트로 만들어집니다. 이것도 “물질”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잖아요. “마음”이잖아요. 그런데 과학에는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요. 학교에서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데 이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다른 것이 아니고 과학적 사고방식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사는 덕목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물질을 물질문명으로 잘 드러내는 데 지장되지 않는 존재로 바꾸는 데 필요한 법칙을 소시민 만들기.. 이게 윤리에요.

존 듀이의 실용주의입니다. 진리는 없어요. 이렇게 해야 남한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피해를 입히는 사회는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과학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이고 그런 겁니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인 진리는 이미 국민교육에서 날라가 버렸어요.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독도를 위해서 바친다는 것은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리를 위해서..라고 하면 초국가적이 되어요. 초국가적인 인간은 필요가 없어요. 그런 인간은 국가에서 필요가 없어요. 이런 사람은 잘못하면 아나키족(무정부주의자)가 될 수가 있어요. 초국가주의는 톨스토이처럼 그렇게 돼요. 도스토예프스키는 무정부주의는 아니에요.

톨스토이는 무정부주의자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약간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 사람은 어떤 주장은 없고 다만 바른 종교(기독교)가 되어야 사람이 산다. 그 정도 (이야기)하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에요. 그런데 톨스토이는 이상국가를 생각해요. 이상국가를 하려면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마음껏 자신의 영적인 자유를 보장해주는 국가, 그야말로 “유토피아”지요.

머리에는 있는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그런 국가를 꿈꾼 거에요. 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지금 얼마나 좋아들 합니까? 왜? 지금 돈 때문에 전부 시달리고 있으니까 도피처라도 있어야지 그런 책이라도 봐가지고 대신 위로해야 되니까..

거기서 나온 것이 바로 공동체운동이잖아요. 야... 이거 위험한 거에요. 공동체운동을 두 자로 줄이면 “밥퍼”!! 이 공동체운동이라는 사기에 넘어가지 마세요. 모든 신부, 성당, 수도원, 수녀원이 공동체운동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이 “돈(자금, 자본)”입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해서 돈만 끌어당기는 거에요. “이런 고상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을 하는데 돈 안 댈 거야?” 마지막에 이것으로 끝나요.

그러면 돈을 모으면 돈을 관리하는 사람(임원진)이 또 따로 있겠지요. 이게 바로 구원파잖아요. 유병언이.. “투자한 만큼 돈 돌려드리겠습니다.” 구원파 신자들한테서 이래가지고 돈 모았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다른 교회가 비판을 못 하지요. 왜? 다른 교회도 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예배당 세웠습니다. 돈 내세요. 이 논리가 똑같은 논리거든요.

언제 주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던가요..? 주님은 그렇게 하신 적이 없었어요. 왜 주님을 그것을 그렇게 이해를 안 합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나(하나님)는 받는 하나님이 아니고 주시는 하나님이다.” “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한테 뭘 받아가지고 복 주고 그런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시편(구약)에도 그런 하나님은 없었어요. “니들이 뭘 바쳐?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내쪽에서 줄 수 있는데 ‘바쳐라, 제사하라. 제물드려라.’ 그것 말고 내쪽에서 너같은 인간 하나를 따로 준비했는데 그 준비된 인간(존재)은 이 두루마리(성경책)에 기록된 것을 홀로 완성하기 위해서 나의 언약의 파트너로 이 땅에 와서 일을 한다.”

주께서 일 하시는데 그러면 구약에 제사드려라. 무엇을 하라. 십계명을 왜 주셨느냐? 실패하라고. 니가 그것을 지키려고 하면서 너의 그 음흉한 의도, 나만 성공하면 돼. 나만 살면 돼. 나만 천당 가면 돼. 이런 사적인 자기를 위한 신을 여호와라고 우기는 그 잘못된 것을 다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옷에 먼지가 묻었을 때 스카치테이프를 가지고 떼면 먼지가 다 떨어지잖아요? 그게 율법이에요. 그게 와야 죄가 드러나요. 나는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적인 면이 율법이 와야 다 드러나요. 노아의 아들 세, 며느리 셋이 다 같이 들어가서 홍수에서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고 누워있을 때 벌거벗고 누워있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내는 수법인 것을 노아의 아들들은 몰랐어요.

다 방주에 탔기 때문에 다같이 구원받은 줄로 알았지, 설망 우리 가정에 저주가 섞일 줄은 몰랐다는 거에요. 그러나 저주받을 자는 주께서 그때 그때 만들어내요. 그 만들어내는 방법은 납득이 되는 방법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하체를 내놓고 벌거벗는 방법이 저주를 유발하는 방법이고 또는 천국갈 사람을 골라내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준하고 달라요.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이 얼레리꼴레리 했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이런 존재밖에 안 돼?’ 하고 놀렸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들의 덮어주는 은혜성이 날아가 버린 거에요. 자기 힘으로 구원된 줄 알고 자기가 알아서 배(방주) 타서 구원된 줄로 생각하는 거에요.

믿는다는 것이 은혜가 아니었고 자기 결단이고 자기 기준의 발산이었던 겁니다. 함과 가나안은 내가 아는 기준으로 괜찮은 행동을 한 것으로 인하여 나한테 구원이 주어졌다는 공식을 유지한 거에요.

그런데 야벳과 셈은 아버지의 그 모습을 통해서 자기 모습을 본 겁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자식의 내면의 모습을 대변해서 보여준 거에요.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아버지께 저주 받을 때 진짜 내가 아버지 앞에 서서 당해야 될 진면목을 다 보여준 거에요. 그 십자가가 사실은 죄인이라면 누구나 당해야 될 십자가거든요.

주님은 죄를 용서하지 않으니까. 죄 앞에서는 깡패에요. 봐주는 것이 없어요. 아까 우리교회 이상민씨가 하나님은 싸이코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어요. 사실은 우리가 싸이코거든요. 그런데 왜 주님이 싸이코로 보이느냐.. 우리는 항상 우리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주님 앞에 접근(어프로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도리어 주님께서 싸이코로 드러내야 ‘내 판단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암시를 주님께서 마련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망가질게. 내가 망가질게. 사실은 누가 망가져야 돼요? 우리가 망가져야 되는 것을 워낙 우리가 안 망가지고 항상 우리는 뭘 주장하느냐.. “결백”을 빼놓고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합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이는 죄가 없다. 강도질했다고요? 가정이 불우해서 그렇습니다. 도적질했다고요? 어려서 조실부모해서 그렇습니다. 누가 모함했다고요? 사회가 그 사람의 가치를 몰라서 그만큼 사랑을 안 베풀어서 그렇습니다. 어려서부터 관심을 두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저런 소리 하니까 결론은 모든 이는 죄가 없는 거에요.

죄가 없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죄에 차이가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유대인들은 계급이 7단계에요. 제일 높은 단계는 사두개인,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 다음에는 서기관들, 제일 낮은 단계가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이 말은 그들을 욕하는 것이 아니에요. 희망이 있다는 거에요. 단계를 밟으면서 율법처럼 살게 되면 나처럼 될 수 있다. 다만 나한테 양육받아야 되고, 지시받아야 돼. 이것이 오늘날 교회 질서입니다.

여러분 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오시면.. 바리새인입니다. 아비는 마귀(악마)에요. 마귀가 교회에서 그 짓하게 만드는 거에요. 성경 마태, 마가, 누가복음 전체가 그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죄 없다고 하니까 죄가 더 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

거기에 누가 또 편승했는가 하면 철딱서니 없게시리 열두 제자가 같은 편이라.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습니까?” 죄가 있다는 말 자체도 인간 나라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에요. 죄가 있다는 것은 잘만 하면 죄를 줄일 수 있다는 말로 통용되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악마적인 말입니까? 줄일 수 있는 죄는 우리한테 없어요.

죄라고 하는 것은 니 죄, 내 죄가 다 동일한 죄의 권세(지붕)에 같이 덮여있는 겁니다. 예수님 모르면, 예수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장 22절)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똑같아요. 도토리 키재기에요. 똑같습니다. 성화된 인간이나 안 된 인간이나 덜 된 인간이나 똑같아요.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라고 이야기하신 거에요. 또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하니까 먼저 되기 위해서 나중에 된다고 하는데 나중 돼봐야 더 나중 온 사람보다 먼저 된 자인데요. 또 “상석에 앉지 마라”고 하니까 당회장 목사는 일부러 겸손을 떤다고 말석에 앉으려고 하는데 나중에 말석이 상석 돼요.

도대체 주의 말을 알아먹지를 못해요. “그냥 살아. 죄인이야.” 이런 뜻인데.. “뭘 하고 살아도 죄인이야.” 그런 뜻을 가지고 “잘하면 죄를 줄일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줄인 폭만큼 주님께 영광이 된다는 거에요. 그것을 안 줄이면 영광을 가리고...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 영광을 가려요. 십자가를 사랑하면 교도소에 가도 영광이 되고...

“십자가”가 뭔데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행위의 주체를 주님께 돌리는 것이 십자가의 의미 아닙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나를 모릅니다. 십자가를 아시는 분에 의해서 십자가만 알면 되지 구태여 내가 나를 알 필요가 없거든요. 어차피 너, 나가 모여서 십자가를 증거하는 교회가 되기 때문에 단독적으로 나를 떼내어서 ‘내가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겁니다.

식당에 가서 스테이크를 먹을 때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우리는 한우입니다.’라고 했으면 어디를 잘라도 한우잖아요. 그런데 전체를 잘라가지고 일부를 가지고 ‘이것은 뭘까?’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한우의 육질이 다 통하잖아요. 하나님의 피가 목사님한테 와서 스톱이 되고 그러질 않잖아요?

예수님의 피가 흐르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생명이 흐르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 생명을 보지 행함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마귀도 그것을 알아요. 야고보서 2장 말씀하고 다르게 들립니까? 오리지날 야고보서 2장 말씀을 들려 드릴게요. “하나님을 믿느냐 잘 하는도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믿으려면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된다 라고 이야기한 거에요.

그런데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믿음은 내가 만들고 행함도 내가 붙이는 이런 행함은 애초부터 귀신의 행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행함이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 이야기잖아요. 이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행함을 두 가지 예를 들었어요.

하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칠 때, 평소에 자기 아들 못 죽여서 환장을 했습니까? ‘저 아들 언제 잡나?’ 하고 기다렸습니까? 기다렸으면 주께서 테스트할 필요가 없어요. 제가 개고기를 못 먹습니다. 그런데 게고기는 특히, 영덕대게를 좋아하는데 주님께서 ‘네가 영덕대게를 먹는지 보자.’ 이러면 테스트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우리가 못하는 것을 알아요. 우리가 어떤 한계에 잡혀있는 것을 아세요. 미운 자식은 때려죽일 수 있습니다. ‘니 때문에 못 살겠다. 호적파라.’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은 어느 정도냐 하면 “니 살고 내가 죽을게” 부모가 진짜 자식을 사랑하게 되면 늘 마음 자세가 그래요. 자식 시집가는데 “시집 가서 혼자 살아라. 더 이상 혼수도 없다.”라고 말은 하지만 늘 뒤를 살펴가지고 ‘혹시 김치 떨어진 게 아닌가. 젓갈 없지?’ 늘 이렇게 괜히 와서 살펴요.

‘혹시 애기 낳고 애 키울 사람 없지?’ “엄마 못 키운다. 엄마 절대로 안 키운다.” 그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려우면 나한테 데려와. 내가 키워 줄게.’ 그런 뜻이거든요. 세상에 자식 사랑 안 하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그것도 이쁜 자식인데.. 그런데 그 자식을 죽이라는 거에요. 이게 바로 행함입니다. 이 행함은 내가 죽었다가 깨나도 나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행함입니다. 그 말은 ‘내 몸은 원천적으로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군요. 아, 나 착각했어. 내 인생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했어. 아,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보니까 내 인생 내 것이 아니네.’라고 하는 겁니다.

자 아까 처음에 이야기할 때 주님은 재판한다고 했지요. 재판할 때 보여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겠지요? 땡, 탈락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재판할 때 우리한테 원하는 것은 뭐냐? 우리가 행할 수 없는데 주께서 행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은 것을 도로 회수하는 쪽에서 가져와요. 그것을 성경(고린도전서)에서는 “은사”라고 합니다. “줬잖아. 추석 선물 줬잖아.” 주님께서 주신 것을 회수해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브랜드(상표)가 고급 프랑스 브랜따노 같이 아주 좋은 천국의 상표가 붙었기 때문에 그것만 가져가요. 그러면 안 받았으면 어떤가? 안 받았으면 티가 나요. 자기가 정성을 다하여 충성하면서 예배당 공작 시간에 만들어낸 인공물을 내놓습니다. 안 받습니다.

주께서 안 받는 것 리스트가 있습니다. 십일조 안 받고, 주일성수 안 받습니다. 선교헌금 안 받고 감사헌금 안 받고, 전도 안 받습니다. 방언 안 받고 기도 안 받습니다. 왜? 우리가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빡 세게 하면 요 정도”라고 예상했잖아요. 예상된 것은 안 받습니다. 이것은 뭐냐 우리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에요. 그것은 조작물이고 인공물이에요. 내가 생각해놓은 나의 희망사항이지 구원이 아닙니다.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낯선 구석이 튀어나올 겁니다. ‘주님이 이런 식으로 나를 엉뚱한 길로 인도하시네.’ 그 엉뚱한 것이 삽입되어 들어왔습니다. 박수칩니다. 그 엉뚱한 것이 아주 귀한 거에요. 아까 상민씨가 “목사님 어떤 분들은 착한 일을 한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질문을 해왔어요. 그래서 답변하기를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고 감정적이고 기분따라 행동해놓고 즉각 돌아서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식으로 포장하면서 인간의 논리와 이성을 거기에다가 집어넣게 되어있어요.” 기분따라 해놓고 “나 참 잘했지?” 이것이 인간이에요. 그래서 나는 잘난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엄마 나 그림 그리고 싶어” “너 그러면 미대 가.” 해놓고 “엄마 나 참 잘했지?” 하는 거에요. 그러면 처음에 미대 가고 싶다고 한 것은 그냥 기분상 해보고 싶어서 한 거에요. 정신분석학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충동적, 즉흥적, 돌발적”이라고 합니다.

울릉도에서 어떤 애가 모델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런 소식 못 들었어요? 웃는 사람 같으면 TV본 사람입니다. 울릉도에 사는 애가 모델 한다고 하니까 아무도 모델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말렸어요. “제발..(보니까 소질 없으니까)” 그런데 부잣집 같으면 “해봐라.”가 되는데 울릉도에 사는 사람이 이혼 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울면서 공개적으로 방송에 나온 거에요.

어떤 애는요 엄마가 목사인데 맨날 드럼만 쳐요. 수요일날 9시에 JTV에 부모가 감당 못하는 애들에 대해서 나오는데 모든 게 즉흥적이에요. 그러면 그것을 막아야 될 것 아니냐.. 막아도 상관 없어요. 막은 상태에서 억지로 어떤 일을 하면 무슨 구실만 달면 “그때 엄마가 막았잖아.” 해가지고 모든 책임을 말렸던 엄마한테 다 돌립니다. 지가 결정해놓고 잘 되면 지 탓이고 못 되면 전부 엄마 책임으로 다 돌려요.

그러니까 인간은 선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선한 일이라고 우기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주여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이벤트를 준비하셨군요.” 이 말은 우리 인생 전체가 나의 이벤트가 아니고 주님의 이벤트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요한복음 7장 37절-결백.hwp (58.5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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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4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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