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5. 9. 18) 2강
광주 강의(2015. 9. 18) 2강
이름 : 서경수(IP:59.21.105.44)
광주 강의(2015. 9. 18) 19-2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어쩌라고?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서 귀신을 쫓아내게 하셨다. 그래서? 주님이 무엇을 하시든 그분이 나의 주님이 아닌 이상은 그냥 나 밖에서 활동하는 아저씨로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갈 테니까 내 인생에 함부로 개입하지는 마세요.”하고 밀쳐내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에 주님의 기적은 파괴라고 했어요. 새삼스럽게 파괴하는 것이 아니고 파괴된 상태를 밖으로 노출하십니다. 그러면 12제가가 가는 곳에 귀신들이 출몰하겠지요? 처음부터 귀신들이 이 세상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었어요.
이제 두 번째 시간 강의를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누가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대자연이 바뀝니까? 안 바뀌지요. “태양아, 내일은 좀 쉬어라.”한다고 해서 내일 태양이 안 뜹니까? 아니지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먹구름아 물러가라.”고 해도 안 물러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뭡니까? 인생 헛살았네요.
내 말발이 안 먹히는데 기도는 왜 합니까? 결국 기도란 내 말발이 안 먹히니까 화가 나는데 그 화를 풀길이 없으니까 신에게 항변하는 거지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압니다. 알면 수긍을 해야 되는데 왜 수긍하지 못하지요? 내 원대로 안 되면 속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에게 따지고 싶어요.
우리가 하나님께 따졌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답변을 들어보세요. 욥의 예를 봅시다. “이렇게 하시려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답변이 뭡니까? “네가 바다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바다에 물이 많이 있는데 왜 또 비가 내리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 마음대로 됩니다.
주님 마음대로 되는 세상인 것을 우리가 안다고 해서 내 마음이 상쾌해 집니까? 아니지요.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굉장히 수상합니다. 그리고 이 수상한 세상 중에 수상한 자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즉 나는 정상인이 아닙니다. 누가 이것을 알려주십니까? 주님이 알려주십니다.
나는 정상인이 아닙니다. 정상인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니면서 하는 행위가 정상인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으로 보일까요, 비정상적으로 보일까요? 비정성적으로 보입니다. 마가복음 6장 8절을 보겠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이건 정상인이 아닙니다.
9절을 봅시다.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여기에서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신발이 유명메이커인가 아니면 시장표인가?” 이런 것을 따지면 안 돼요.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화가 나지요? 화를 낼 때 사실은 하나님께 화내는 거예요. ‘나는 정상인인데 왜 나를 화나게 합니까?’라는 거지요. 우리가 화낼 때 하나님의 반응은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한다. 왜?’ 이것입니다. 이 정답을 알면 우리가 만족합니까? 아니지요. 반발하면서 인간은 법을 만들어요.
법을 왜 만드는가 하면, 나름대로 정상인 되기 위해서 본인이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을 훌륭하게 치장할 수 있는 규칙들을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가수 안치환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어요. 왜 아름답습니까? 꽃은 자연이 피게 하지만 인간은 자기를 정당화하는 법을 매일 생산해 냅니다. 그러니 자신이 보기에 자신은 아름다운 거예요.
주님의 기적은 파괴라고 했지요. 그럼 뭘 파괴해야겠어요? 우리는 법을 만들어내고 주님은 내 법을 파괴하는 거예요. 사람이 살기 힘들어서 하나님께 화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애써 만든 법칙을 주님이 무시하고 인정해 주지 않기에 화를 내는 거예요.
예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을 나열해 봅시다. 세리, 창녀, 강도, 백부장, 혈루증 걸린 여인의 공동점이 뭡니까? 자기가 만든 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강도라도 구원 받지 못한 강도는 ‘나를 구원해 주면 믿겠다.’고 했지요. 이것이 자기 법입니다. 주께서 어떤 사람을 칭찬하거나 꾸중하실 때 그 기준이 뭡니까?
사람들이 남의 법을 무시하면 ‘막 산다’고 하지요. 남의 법을 무시하면서 막 살지 말고 자기 법을 무시하면서 막 살면 됩니다. 왜냐? 내 법을 내가 지키면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정당화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용서하심의 은혜가 소멸됩니다. 자신이 잘났는데 왜 용서가 필요합니까?
용서받은 것을 감사할 줄 아는 자를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강도와 세리를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창기를 좋아하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창기라고 무조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감사할 줄 아는 창기를 좋아하십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바리새인들은 법을 들고 찾아왔지요. 그 때 주님이 땅에 글을 쓰셨어요. 그 후 사람들은 다 돌아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자신이 내세운 법에 자신이 맞게 될까봐 떠난 거예요. 이들은 남을 치기 위해서 법을 들고 왔다가(남을 친다는 것은 자신이 정당하다는 뜻이고) 주님의 법을 듣고 떠났지요. 순서를 보면, 자신의 법을 가지고 왔다가 주님이 법이 덮치니까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순서가 아닌 다른 순서도 있어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의 법이 오니까 안식일 날 침상을 들고 갔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왜 안식일 날 침상을 들고 가는가?’라고 했어요.
만약 유대인의 법에 ‘안식일에는 라면을 못 끓인다.’는 것이 있다면, 주님은 라면을 끓여 들고 갔을 거예요. 여기에서 어렵습니다. 주님은 새삼스럽게 법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든 법을 뒤집고 활용하는 것이 주의 법이에요. 법을 만드세요. 그리고 잘난 척하고, 정당화하면서 사세요.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너, 용서 받았니?” 이것을 물어요. ‘그렇게 잘났으면 너는 용서 받을 것도 없겠네?’라고 나오십니다. 용서 받을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있지요. 뭐냐? 남 간섭하는 죄를 용서 받아야 합니다. 왜 남을 간섭하는가 하면, ‘나는 그런 짓 안 한다’는 겁니다.
나는 그런 나쁜 짓을 안 하니까 충분히 남을 판단할 자격을 갖춘 사람으로 행세하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또 하나의 죄가 펼쳐진 거예요. 여기에 일괄적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성도는 이미 십자가 피로 일괄적으로 용서받은 자입니다.
주님이 용서해 주셨는데 용서 받은 성도가 왜 용서해 주셨는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그 사람을 어떻게 하겠어요? 나의 고상한 짓이 죄가 됨을 밝혀내는 상황들이 자꾸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에 의한 파괴라는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겁니다.
요나의 기적을 생각해 봅시다.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났어요. 요나의 기적은 ‘단절’을 말해요. 진짜 기적은 살아 있는 내가 얼마나 착하고 놀라운 일을 하는가가 아니고, 내가 낯선 나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존의 나를 붙들고 죽어야 돼요. 그러면 나는 죽지만 나의 신체는 남아 있겠지요? 이 신체에 대해서 진짜 나가, 내가 건너갈 수 없는 저쪽 편에 진짜 나가 준비되어 있는 거예요.
그 준비 된 나는 예수 안의 나입니다. 예수 안의 나가 나의 잉여(플러스 알파)입니다. 그 잉여분이 성령을 통해서 나에게 덮치게 됩니다. 그러면 교체 작업이 일어납니다. 내가 생각한 나와 예수 안에서 준비된 나의 교체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1) 귀신 들렸다. 안 좋아합니다. 2) 귀신 안 들렸다. 좋아하지요. 3) 성령 들렸다. 좋아합니까? 별로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3)을 고집하시는가 하면, 성령이 임하면 내가 성령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나와 교체작업을 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의 나는 사라지고 성령 안에서 주님이 준비하신 나로 바꾸는 작업이 성령의 일입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나는 지우개 받았다.’ 소유하고, ‘나는 책을 받았다.’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신 것이다.”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성령은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이 나를 교체하십니다. 나를 없애버려요. 그러면 새로운 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새로운 나는 주님의 작품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출생 당시 베들레헴에 2세 이하의 아이는 다 죽었어요. 엄마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의 잉여가 뭡니까? 나는 늙어 죽어도 내 자식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마나 손목에 사단의 정보(베리칩)를 새기면 사단의 종이 된다고 떠드는 종교단체가 있어요. 그런데 따져봅시다. 인간은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세포 안에 DNA가 있습니다. DNA는 단백질로 만든 정보입니다.
단백질 하나가 나는 아니지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되지요. 정보가 교체되고 배열되면 복사를 하고, 이것이 세포가 되어서 각자 다른 정보가 함유된 각각의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다 조금씩 달라요. 정보가 다양하기에 지구상에 같은 사람은 없어요. 세상은 정보의 바다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 자체가 정보인데, 사단의 정보를 받았다고 지옥에 간다면 다 지옥 가야지요. 왜 이런 발상이 나왔을까요? 베리칩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출발점이 뭔가 하면,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려와서 돌로 치려했지요. 그 때 예수님은 땅에 글을 쓰면서 뭐라고 하셨지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소리 듣고 다 떠났어요.
간음한 여인은 평생 처음 법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이 문구를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두세요. 그러면 이 말씀 앞에 그 식구 각자의 법은 무효화 됩니다. 세리와 창기가 법 없이 사는 이유는, 법이 있으나 없으나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법이 있으나 없으나 죄인이고 용서 외에는 대안이 없어요. 내가 사랑받을 것이 없는데 누가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순간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동기가 되지요. 그런데 사랑은 반드시 기쁨으로 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순간 ‘내가 사랑받을 이유가 있나?’ 하고 응시해보니까 새삼스럽게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있구나.’를 알게 되는데 이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외부에서 사랑이 응시하면서 사랑을 줍니다. 그러면 못난 내가 잘난 나로 변하는 것이 아니고, 못난 내가 못났다는 자체가 주님 사랑의 조건이나 소품으로 포함이 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우리가 쓰레기라고 했지요. 원망하라고 했잖아요. 왜? 이미 우리는 죽었으니까.
세상에서 살겠다고 이상한 짓하지 말란 말이지요. 법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이 뭔가 하면 성경에 말씀이 나오니까 이것을 모아서 법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그들 속에는 마귀가 들어있지요. 주님은 그 법을 도로 가져가요. 그럴 때 사람들은 ‘가져가면 안 되는데’ 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간음한 여인을 돌리 치려할 때 주님이 등장하신 것과 같아요. 우리를 정당화 할 법인데 그 법을 주님이 가져가시니까 그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지요. 그리고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런 말씀이 평소 우리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나를 정당화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법을 왜 만들었는가? 남과 차이가 남으로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너와 다르다.’라고 하면서 우월적인 내가 되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죽으면서도 죄가 무엇인지 몰라요. 죄는 법을 만드는 것이 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해서 애써 그리스도의 의를 외면했습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6장 8-9절에서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제자들이 법으로 지키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결국 이것이 뭔가 하면 정상인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상인은 뭡니까? 정상인은 여행 갈 때 단단히 준비하고 가지요.
남이 안 하는 것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남이 한 것을 반대로 하는 것이 법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38년 된 병자를 주님이 낫게 해 주었습니다. “나았어?” “나았습니다.” “잘 가라!” 이게 법이 없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기대한 법과 반대로 한 거예요. 안식일에 침상을 들고 가는 거예요. 이게 ‘법 없음’이에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병자 속에 예수님의 법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법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것이 법이 아니고,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알게 하세요. 그리고 이것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지셨다는 것이 주님의 법이 됩니다. 내 법이 아니고.
교체작업입니다.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법 없이 막 살면 안 되고, 이미 법이 없음을 법 있는 형식으로 보여줄 때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를 증거케 우리로 하여금 그 작업에 나서게 하시는 겁니다. 만약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팡이 외에 아무것도 갖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줄자를 들고 ‘네 막대기는 몇 센치냐, 나는 몇 센치다.’ 이렇게 나왔을 거예요. ‘성만찬을 하라.’ 이것이 나중에 교회의 법이 되지요. 주님이 세례를 주셨습니다. 바울도 세례를 줬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세례 주는 것이 법이 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것이 빠지면 세례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마귀집단입니다.
우리 몸이 이미 주님의 몸으로 교체되었으면 교체되는 과정이 있잖아요. ‘옛날에는 이러했는데 지금은 이렇다.’ 그 절차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보내시는 것을 지금도 멈추지 않았어요. 오늘날 우리를 보냅니다. 다시 묻습니다. 세리와 창기, 강도, 백부장, 나사로 이들의 특징이 뭡니까?
본인이 나대고 싶었습니까? 아니에요. 그냥 있는데 주님이 불러냈어요. 모든 게 법이 없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가? 지시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법이 됩니다. 주님이 ‘무덤에서 나오라’고 하면 그것이 법이 되는 거예요.
10절에 “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디서든지 라는 말은, 특정한 장소가 없어요. 기도원에 가야 합니까, 절에 가야 합니까? 절에 가도 은혜 받을 수 있어요.
11절에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여기에서 영접지 않을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김씨는 영접하고 최씨는 영접하지 않고 그런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몰라요. 우리는 어떻게 되어도 괜찮아요. 결국은 실패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가락교회 강의에서, ‘실패는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 있다.’고 했어요.
과거에 실패가 있으면 두 번 다시 실패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되고 그것이 자기의 법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에 실패를 해요. 마지막에 실패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실패가 기정사실이기에 감사가 안 될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물을 마셨는데, 물을 마시는데 성공했네요? 실패해야 하는데 성공했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이것이 잉여에요. 성공하고자 하는 것은 나에요. 그런데 그 성공한 나를 기어이 실패자로 만드는 것은 내가 미처 모르는 내가 껴안아야 될 실패자로서의 나입니다. 이 둘을 합치면 그것이 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진짜 내가 되는 나를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이것을 ‘순례자’라고 하는데, 순례자가 아니고 ‘쓰레기’입니다. 결국 쓰레기로 끝나니까요.
쓰레기인데 물을 마시고, 쓰레기인데 옷 입고. 제가 입은 옷은 누가 사주신 건데, 제가 깜짝 놀랐어요. 여기에 DAKS라고 되어 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이 모두는 정해진 것이 아니잖아요. 이 말은 ‘네 인생은 네가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는 거예요.
걱정을 하면 법을 만들어요. 원리, 원칙을 만드는데 그러면 우리가 바리새인이 됩니다. 그리고 뜻대로 안 되면 삐치지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내 잘남을 드러내기 위한 법이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 가정은 이러해야 돼. 남편은 몇 시에는 귀가해야 되고, 아들은 10시 이전에 귀가해야 되고---. 이런 법은 결국 주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을 거리로 우리는 계속 법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정신 차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11절을 봅시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법으로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버린 먼지를 버리면 안 돼요. 비닐봉투에 모아서 증거로 남겨야 돼요. 이건 뭘 의미하는가 하면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아! 너희들 제가 되는 것 싫지?’ 이런 뜻입니다. ‘네가 남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힘들고 싫지?’ 이런 의미입니다.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나라가 있는데 저희들이 인내해야지요.’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왜냐? 하늘나라에 가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텐데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참아야지요. 이런 마음이 잘못된 마음입니다. 사실 모든 인간은 비정상이고 사는 것이 힘들어요.
싫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자들 앞에 아무 이유도 없이 끌려나온 어린아이가 등장해요. 어린아이는 자기를 사랑해주면 그가 강도이든 천사든 관계없어요. 그냥 감사해요. 철없는 여자를 보면 남편이 부정부패해서 비난을 받아도 남편을 편들어요. 분명히 남편이 잘못했는데도 편드는 여자들이 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남편이 최고야!’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나오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은 정의도 진리도 관심 없어요. 무조건 내 남편은 내가 지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에는 이런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무조건 내편 들어달라고 하기에. 행여나 남편이 자살을 했다면 ‘우리 가정 우사시켰다.’고 해서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딸이 제에게 하는 소리가 “아빠는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해요. 저는 그 마음이 저에 대한 사랑이라고 여기고 감사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제자들이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와 함께 있는 내가 중요하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 보기에는 예수님 말씀이 엉뚱하게 들리지요. 그래서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하여튼 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은혜가 무엇인가? 은혜란 이질적인 것을 준다. 기적이 무엇인가?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파괴되어야 마땅한 존재인 것을 폭로시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데리고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이 기적으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이 ‘나는 어느 편인가?’를 알아야 될 그것이 주께서 원하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내면서 점점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뭘 지적합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묻고는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이건 뭐냐 하면, ‘나는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지 저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들에게 뭔가 베푸는 것 같지만 사실은 ‘너희들은 나와 같이 이 세상에서 이질적인 존재다.’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고난 받고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하시니까 ‘제가 있는 한 그런 일을 결코 없을 것입니다.’라고 나왔고,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는 과격한 말씀을 하셨지요.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라 당신의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너는 이제 끝났어.’가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는 내가 누구인지 너희들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정리해봅시다. ‘나’가 있는데,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애굽)에 소속되어 있어요. 만약 누가 나를 낯설다고 하면 내가 낯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속해있는 세상과 같이 그걸 몰고 온 것이 낯선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라고 하지요. 심지어 고스톱을 쳐도 지역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라요.
‘우리 동네는 이렇게 합니다.’라는 말은, 우리 동네에서 나는 평균인이고 정상인이라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에게 이질적인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으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하신 겁니다. 정신 빠짝 차려야 됩니다. 우리는 계속 정상인으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이질적인 주님이 우리를 가만 두지 않고 비정상인 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병자로 살아가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나 +알파’입니다. 알파는 잉여에요. 그럼 ‘잉여를 줘야 받지?’ 라고 하는데, 현재 우리 안에 들어있어요. 숨어있지요. 트라우마처럼. 내 욕망을 내 마음대로 못해요. 사도바울이 말했잖아요. ‘나는 선하고 싶지만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다.’
내가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됩니다. 이상하지요?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내 뜻대로 되는데 자살합니까? 어떤 사람이 내 약점을 이야기한다. 자살할까요? ‘반갑다. 동지여!’ 하면서 반겨야 합니다. 우리는 내 자신에 대해 잘 몰랐는데 남이 내 약점을 알려주니까 고맙지요.
다윗의 취미가 살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야 장군을 죽였지요.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의 죽음은 자신을 위해 ‘꺾어진 뼈’로 봅니다. 다윗 때문에 죽은 자가 또 있지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일주일 만에 죽었어요. 죽은 후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1)웃었다. 2)슬펐다. 3)멀쩡했다. 몇 번입니까? 멀쩡했지요.
‘주께서 알아서 죽였는데 내가 왜?’ 이런 식입니다. 이미 다윗의 정보력은 일곱 살, 아홉 살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한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죄인’이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상한 심령이지요. 상한 심령을 축구공으로 표시한다면 까맣지요. 까만데 까만 것을 묻히는 것이 뭐가 문제됩니까?
까만 공에 연탄재가 묻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연탄재가 묻으면 깨끗하게 씻고 싶지요. 그러면 깨끗한 축구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의 법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나+알파=죄수’가 됩니다. 죄수는 뭘 해야 됩니까? 벌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벌은 이미 구원 받은 후의 벌이기 때문에 이것이 축복이 됩니다. 저주가 없어요.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수가 되어도 주께서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용서입니다. 그리고 용서를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그냥 ‘사랑’이라고 하면 감이 안 오는데, 죄를 거쳐서 용서를 거쳐서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잘난 나를 +알파가 더해서 죄수가 되고, 죄인에게 용서가 오고, 용서받은 죄수가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고, 자랑거리로 이 땅에서 마음껏 그리스도를 증거케 하는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광주를 연고지로 하는 야구팀이 [기아 타이거즈]인데, 이 팀이 1회에 9대 0으로 마쳤습니다. 2회에 4번 타자 나지완이 만루에 나와 홈런을 쳤어요. 그래서 13대 0이 되었습니다. 8회까지 13대 0으로 이어지다 9회가 되어 역전을 당해서 13대 14로 졌어요.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아픔이 적어요. 나지완이 괜히 홈런을 쳐서 잔뜩 기대를 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줄 것은 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립니다. 별 고민도 없어요. 갑자기 자기 인생에 대해 자신감이 생기면서 기대를 겁니다. 공부에 큰 취미가 없던 딸이 장학금을 받아 왔어요.
처음부터 기대를 안 했으면 괜찮은데 일이 잘 풀려요. 성경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합니다. 이미 주님은 벼르고 있어요. 뒤통수 칠 준비하고 있어요. ‘그래, 마음대로 좋아해라. 보이는 것 마음껏 소망해.’ 결국은 말씀대로 됩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소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제공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기대하고 소망을 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면 실망하게 되지요. 그리고 화가 나고 주님께 따지고. 이것은 일곱 살, 아홉 살 때의 정보입니다. 철딱서니 없는 때입니다. 그저 나밖에 없고 +알파가 너무 적어. 나중에 총 정보를 알게 되면 우리는 뭘 해도 실패자고, 뭘 해도 용서받은 자인데, ‘나 +알파’ 용서 받은 자가 평생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해 온 겁니다. 범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자들은 좋다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실망으로 끝날 줄 그들은 미처 몰랐습니다. 귀신 쫓아낼 때 그들은 곧장 하늘나라에 들어갈 줄 알았지 예수님을 부인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사랑하기에, 그들을 기뻐하기에, 그 모습을 오히려 즐거워하기에 저희들이 구원을 받았사오니 우리에게 용서만 크게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10. 8. 08:3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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