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28강, 129강), 세상에 대한 용서, 우는 자의 복 20161008
유튜브(128강, 129강), 세상에 대한 용서, 우는 자의 복 20161008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128강
129강
이미아(IP:180.♡.90.76)
15-10-11 00:06
128강-YouTube강의(세상에 대한 용서)151008-이 근호 목사
오늘은 128강, 제목은 ‘세상에 대한 용서’입니다. 세상에 대한 용서를 하려면 용서하는 자리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근데 용서를 누가 할 수 있느냐, 용서할 때는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하라고 했으니까, 방금 이 두 개의 말을 연결시켜 보면 주의 자리에서 주의 이름으로 용서가 되어야 이게 실효성이 있는, 하나님에게도 용서가 되는, 그 제대로 된 효과 있는 용서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감정대로 용서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자리를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거는 하나의 용서가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권력에 대한 굴욕 아니면 굴종, 복종을 하면서, 힘이 무서워서 복종하면서 “나 당신 용서해줄게” 라고 자기 형편을 모면하려는 그런 수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에 대한 용서가 하나님의 성도가 될 때 어떤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적용시키는가, 그것은 주님의 자리가 될 때에 용서가 된다고 방금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자리에 가려면 우리의 자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자리에 가야 되는데, 그러면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알아야 되겠죠.
우리가 어떤 자리가 되어야 하면 내가 지금부터 더 나은, 훌륭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내가 어떻게 확보해나갈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욕구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낫기 위해서, 잘 되기 위해서, 훌륭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저한테 뭘 해 줄 수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나오죠.
바로 그 생각을 접어야 됩니다. 그 생각과 주님의 생각과 바꿔치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뭐냐, 내가 지금보다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은 존재가 되느냐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기 잘되기 위해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데 자기 잘되는 것을 포기하고 “주여, 저를 망쳐도 괜찮습니다. 망하게 하셔도, 주께서 망하게 하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려면, 이건 기적에 속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는데 그 제자들이 평소에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막상 풍랑이 일어나니까 다급하고 우선적인 관심사는 살아야 되겠다는 겁니다.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곁에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예수님, 예수님 하지만 급할 때는 살고보자는 것이 우리들 마음속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는 거예요. 내 살고보자가 먼저고 그 다음에 내가 살기 위해서 허겁지겁 찾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나로부터 중심을 두고 내가 다급하니까 숨이나 쉬자는 식으로 예수님을 찾게 되는, 자기 본색이 드러난 거죠. 그래놓고 우리는 남을 평소에 성경대로 용서하라고 하니까,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식으로 착각해서 나는 나한테 범죄 한 자를 용서해서 하나님한테 영광 돌리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할 때는, 그거는 배부를 때고, 그건 숨이나 좀 쉴 경우에 그러한 자기 윤리적 자기 솜씨를 발휘해서 멋있는 사람 티내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정작 자기에게 급한 일이 일어났을 때,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다든지, 간암 말기에 걸렸다든지, 사기를 당해 부도가 났다든지, 집안이 깨진다든지, 애가 아프다든지, 갑자기 애가 차사고 나서 연락이 왔다든지, 빚쟁이에게 쫓긴다든지, 그리고 자신이 몰래한 일이 공개적으로 언론에 보도가 되어 지리산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서 과연 예수님은 분입니까?
나의 착함을 그동안 덮어주기를 은근히 고대했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던가요? 이게 바꿔치기 돼야 됩니다. 따라서 세상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서 우리보고 시킨 이유는 뭐냐 하면 니부터 과연 용서를 받았느냐, 정말 니가 나의 용서함을 제대로 알기는 아느냐, 그것을 우리에게 실습시키고 실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만나는 장을 조성해 주신 겁니다.
말로는, 우리가 지식으로는 “저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합니다.” 했는데, 그걸 한번 실습해보자 하는 거예요. 살아가면서 실습할 때 과연 내 잘남을 증명하는 용서가 발휘되는지, 아니면 정작 주님의 용서만이 나에게서 나왔는지, 그것을 니가 스스로 한번 체험해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포기해야 되느냐 하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그 세상에 대해서 용서를 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아 나를 쳐다봐라! 나는 너희들과 같이 않아.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그러한 우수한 존재야.”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잘 돌아봐야 합니다.
주변에 못된 인간들, 주변에 나보다 못한 인간들을, 주변에 나에게 사기치고 나에게 욕했던 인간들이 주변에 나타났을 때는 우리는 갑자기, 예를 들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용서를 가공하는 그러한 찬스로 이용할 가능성이 우리한테 농후합니다. ‘자 이때다. 내가 저들을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확인받고 사랑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찬스가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자기의 의를 위한 이용꺼리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되면 우리는 내가 다시 한 번 내 존재를 발견하는 것으로서 세상을 보는 셈인데, 주님께서는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발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발명합니다. 어떻게?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냅니다. 근데 우리는 있는 나를 보다 훌륭한 나로 발각되고 발견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큰 차이가 있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주실 때 내가 세상을 향한 용서가 빛이 나는 경우를 성도한테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용서한 대로 그쪽은 오히려 나를 이용하는 기회로 삼게 되죠. 나는 바보가 되고 나는 그야말로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철딱서니 없는 존재로 전락시킵니다. 백날 용서하세요. 그들은 백번 이용합니다.
내 용서가, 내 용서로 그들은 감동받지 않습니다. 전도할 때 돈 주지 마세요. 돈만 뺏깁니다. 어떤 경우에도 전도할 때 내가 기대한 전도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 내 전도로 그 사람이 예수 믿게 된다면 나는 발명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내가 새롭게 발견되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나님께서는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퍼붓는 모든 용서가 다 실패로 끝나게 해주십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은 우리 주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널려있습니다. 나의 하는 거룩함과 나의 경건과 나의 착함의 효과가 완전히 다 무산되고 소용없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
그 속에서 은근히 노렸던 나의 잘남도 같이 망가지도록 할 때에 우리는 그러한 일을 했던, 비로소 내가 미처 몰랐던 죄를, 용서라는 가면 뒤에 숨었던 진짜배기 나의 음흉한 나의 악마성을, 주님은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걸 발각시키고 노출시킬 때 하나님의 성도는 내가 꾸준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시 한 번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때그때마다 주님의 용서에 근거해서 값없이 발명되는 것이 우리의 성도라는 존재를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미아(IP:180.♡.90.76)
15-10-11 00:11
129강-YouTube강의(우는 자의 복)151008-이 근호 목사
제 129강, 제목은 ‘우는 자의 복’입니다.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이 말은 울게 되면 울었던 그 대가를 따로 준다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울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주님이 주신 축복받은 자만이 신이 나서 원 없이 울 수가 있습니다.
‘울었으니까 이제는 웃게 되겠지.’ 라는 그런 기대는 안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화 있을 진저 너의 웃는 자여 너희는 애통하며 울리라” 여기 웃는 자가 바로 저주받은 자이고, 21절에 보면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이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울면 이제 웃을 수 있습니까? 라는 말이 아니고 나라는 것이 울음을 통해서 내가 다른 나로 바뀌는 작업을 주께서 울음을 통해서 실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주 정답을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에 있어서 내 울음이 개입되면 안 되고 주님의 울음이, 이 세상을 보시고 우시는 그 울음이 내가 납득되는 울음이 아니고 주님만이 아시는 울음이 우리 속에 침투되었을 때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주님의 울음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세상을 보고 우셨다는 것은 주님이 세상을 보시는 안목이 따로 있을 것이고, 우리가 평소에 한이 맺혀 우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에서의 범위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 이것 안 되면 울 겁니다.” 라고 딱 정해놓은 것이 있어요. 그거 안 되면 울고 그거 되면 좋다고 히히대고 그러죠.
그게 이 범위, 범주를 저는 한계라고 다시 표현합니다. 운다는 것은 자기의 한계를 자력으로가 아니고 주님의 힘에 의해서 자기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넘었을 때 자기가 그동안 애쓰고 자기가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아쉬움 때문에 엉엉 울게 되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 인간이 통째로 주님의 관리하는 그 영역으로 넘어온 셈이 되는 겁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성도를 울리시는가, 주님의 울음에 동참시키시는가, 그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어디에 응축되어 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에 모든 것이 해당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신이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신이에요.
안 죽고 그대로 있던 신이 아니고 죽은 적이 있는 신, 아주 특이한 신이죠. 죽었던 적이 있는 신이죠. 예수님이 자진해서 이렇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안 죽는 신을 원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나간다, 죽으려고 나갑니까? 살려고 나가잖아요. 그러면 교회 나가서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면 살려 줄 거예요? 아니면 요렇게 하면 살려 줄 거예요? 요래 하면 지금보다 행복하게 살려 줄 거예요? 지금 이러한 요구조건들이 예배 시간 내내, 모든 예배 중간 순서, 순서마다 거기에 계속 보이지 않는 관념적인 신을 향하여 쏘아대고 있는 겁니다.
찬송가 4절 끝까지 부르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거예요? 또는 설교 시간 안 졸고 끝까지 들으면, 축도까지 받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겁니까? 어쨌든 간에 내가 안 울기 위해서 교회 온 거예요. 내가 울기 위해서 교회 온 것이 아니고, 이 울음이 끝나고 이제는 행복만이 남는 그걸 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때는 뭐냐 하면 내가 납득이 되고 내가 이해가 되는 그런 결과를 교회에서 보따리 풀어놓고, 내놓고 그걸 달라고 하나님께 윽박지르는 셈이 되죠.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근데 이 우는 것이 처음에는 그렇게 시도를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우죠. 몰아세우는데, 자신의 원통함과 분통함에서, 자기 인생에서 이거는 원통함이고 이거는 분통함이고 이거는 애절한 일이고 이거는 정말 낭패된 일이라고 자기가 정해놓은 범위가 있어요.
근데 그 경계선을 넘어서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원통하고 주님 보시기에 애석하고 주님 보시기에 절대로 안 되는 그 영역이 있어요. 그 영역을 넘어서면서 뭘 성도는 깨닫게 되는가 하면 그동안 내가 울고불고 한 것이 내 인위적으로 내 마음대로 정해놓은 경계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거는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그 운신의 폭이 작아요. 자기 딴에는 울부짖고 노력해도 몇 백 미터 소리 안 들립니다. 자기 집에서 울부짖으면 아파트 아래층에서 시끄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빛이 있으라고 해서 빛이 생깁니까?
갈릴리 바다 건너갈 때에 예수님께서 바다야 잠잠 하라 할 때에 바다가 잠잠해졌지, 그 열 두 제자가 합쳐서 하나 둘 셋 바다야 잠잠 하라고 하면 바다가 잠잠해집니까? 그만큼 인간들이 한 맺혀서 외치고 아무리 굿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통성기도 해봐야 그 효과는 전혀 없습니다. 괜히 악에 바쳐서 외치는 것밖에는 안 돼요. 통성기도 하는 자체도.
실제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효과는 전혀 없습니다. 기도나 금식 외에는 나갈 유類가 없다고요?(막9장29절 참고). 기도나 금식 한 번 해보시죠? 왜 예수님께서 기도나 금식 외에는 이런 類가 없다고 했습니까? 기도나 금식을 함으로써 니가 기대한 것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니가 정작 기대하지 않았던 것,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납득이 되는 나의 세계가 이게 다 죄악된 것으로 이게 폭파하느냐, 그런 것을 경험하라고 기도하고 금식하라고 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기도나 금식해봐라 그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너는 니가 세운 경계선을 니가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기도 열심히 하면 복 받는다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 헌금하게 되면 헌금 대가로 삼십 배 육십 배 준다는 것, 십일조 하게 되면 창고에 가득 차게 해주신다는 그자체가 바로 내 세계에서만 통용되고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나의 잘못된 오해소지였다는 겁니다.
그 창고는 어떤 창고인데요? 내 창고 아니거든요. 주님이 원하는 것이 채워지는 그 창고에 가득하지 내가 원하는 창고에 가득하지 않습니다. 성경 보면 말씀은 전부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끼어든 거예요. 시편에 나라고 한 것은 전부다 예수님으로 다 바꿔치기 해서 해석이 되어야 돼요.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버리셨나이까” 하는 그 시편 22편에 나오는 그 기도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해서 완성시켜야 될 그 본문 말씀이에요. 다윗마저도 아니에요. 다윗마저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납득이 되는 내가 되어서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거죠.
내가 정말 성도라면 날마다 우리는 내가 이해가 안 되고, 내가 스스로 납득이 안 되는 다른 방식으로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져 나간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추후적으로 그걸 새삼스럽게 느껴야 돼요. ‘어? 이거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니네!’
다른 날 같으면 울지도 않을 일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일을, 성령이 와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하는 영이 와서, 그 탄식은 주님의 탄식이거든요. 주님의 탄식이 성령 안에 계셔서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남들 보기에는 탄식하지 않아도 될 일에 대해서 탄식하면서 주님과 함께 애통하는 경험을 하게 될 때 이거는 오늘날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굉장히 낯선 이야기입니다. 낯선 경험을 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여, 왜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에 평생을 그렇게 허송세월 보냅니까? 너무 가슴 아픕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할 때 주님께서 먼저 했던 거예요. 주님이 했던 그 마음이 성령을 통해서 들어오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동일하게 그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잘 되는 것 때문에 한 맺힌 것이 아니고, 왜 세상은 십자가를 못 알아보고 십자가를 모독합니까? 그것 때문에 가슴앓이 하고 가슴 아플 때, 그것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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