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201510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1002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기이한 종속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언약의 말씀을 그냥 언약의 말씀으로 기억해서 산 밑에 있는 사람에게 전하면 되는 데 왜 돌 판으로 사물화 된 물체로 만들어서 가지고 내려오게 하셨느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저번에 출애굽기 32장 할 때도 약간 언급했습니다만 이게 종속될 때 하나님께서 왜 돌 판을 줬느냐 하면, 인간은 어디에 신에 종속 된다면 자꾸 상상을 하게 돼있어요. 그 상상한 신이라는 대상이 결국 자기 자신이 부풀어진 하나님밖에 안 돼요. 예수라고 해서 예수에 대해서 알라고 하면 자기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가 상상한 예수 그러니까 제2의 자기 모델로 예수라 생각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그런데 돌 판이라고 돼버리면 판때기 아닙니까? 이건 상상의 여지가 없지요. 돌 판을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신을 지어낸 거란 말이죠. 네가 돌 판 만들어봤어? 돌 판도 없는 것이 네가 무슨 신이냐 말이죠. 네가 신을 믿는다면 네가 신한테 받은 돌 판이 있을 게 아니냐. 그건 모세가 받았지 저는 안 받았습니다. 그럼 너는 모세한테 종속되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가 종속되어야 될 것을 나를 추상화하고 멋있게 만든 이상화된 그런 신에게 종속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구체적인 그러한 물체나 사물에 대해서 종속하도록 돌 판을 들고 온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그 당시 사람들이 모세한테 종속되면 안 됩니까, 하는데 그러면 안 돼요. 돌 판에 종속되어야 돼요.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려우니까 묻고 답하면서 합시다. 누가 돌 판을 가져왔습니까? 산 위에서 모세가 가져왔죠. 그러면 모세가 돌 판의 내용을 다 지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모세 말 듣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모세에 종속되면 안 되지요. 돌 판에 종속돼야지요. 문제는 돌 판에 대한 해석을 누가 해야 됩니까? 모세가 들고 왔으니까 해석자도 모세지요. 돌 판에게 종속되지 않으면 우리가 상상한 여호와니, 예수니, 삼위일체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그건 우리가 지어낸 거라니까.
우리가 가만히 이불 쓰고 상상하면 하늘나라에 멋있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스카이라이프 cf에 나오는 서장훈 같이 얼마나 하나님 같습니까. 삼장법사로부터 해서 부처님, 하나님, 전부 다 똑같이 인간이 자기를 모델로 삼아서 한 이상적인 최고 초월자잖아요. 우리가 기도하면서 그런 것을 자꾸 염두에 두고 상상한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하늘나라를 상상하기를 산타클로스, 어떤 사람은 인자하신 치킨 집 할아버지, 어떤 사람은 금복주 할아버지, 또 어떤 사람은 삼신할머니, 온갖 종류대로 입맛대로 자기가 경험한 기억된 것 중에서 괜찮은 요소를 뽑아서 상상하는데 그건 장난도 아니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 어디에 써먹겠어요. 자기 정당화 외에는 아무것에도 안 써먹는단 말이죠. 그것 말고 실제로 물체화 돼야 돼요.
노아가 비 오기 전에 기도했습니까? 방주를 만들었잖아요. 방주 안 들어가고 기도해봐야 죽습니다. 기도할 것도 없고 그냥 방주 들어가면 돼요. 방주 들어가니까 방주가 저절로 떠서 살았잖아요. 구체적이에요. 다시 말해서 언약이란 구체적이다. 상상한 게 아니고. 예배당 지어놓고 헨델의 음악 틀어놓고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의 큰 성당, 독일에 있는 퀠른대성당 어마어마한 큰 성당, 이태리에 가면 큰 성당도 있고. 그런 성당에 들어가면 굉장히 엄숙하고 장엄하지요. 신이 나올 것 같아. 바로크 그림 그려놓고.
왜 성당을 화려하게 고딕식으로 지어놓은 이유가 뭡니까? 인간의 예술적인 것이 신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그게 마치 거룩의 절정이고 그 장엄하고 그 숭고함을 인간이 마음껏 발휘한 거예요. 그래봤자 위아래에서 아래쪽이란 말이죠. 우리가 아래쪽에서 생각하는 위쪽은 위쪽이 아니에요. 진짜 위쪽에서 온 것은 돌 판이었고 방주였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얼마나 구체적이에요. 그 당시 제자들에게. 그런데 그들이 먹은 것은 살과 피가 아니었고 포도주와 떡을 먹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노아가 방주 들어가 본들, 모세가 돌 판 들고 와 본들 돌 판 안의 내용과 모세가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돌 판 해석을 모세가 해서 모세가 이야기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은 모세 말을 통해서 돌 판에 접근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납니다. 이 말은 돌 판에 전적으로 종속되기에 실패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로마서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돌 판을 주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구원에 성공하기 위해서 준 겁니까? 실패하라고 준 거예요. 구원에 실패한 자란 인식이 구원의 성공입니다. 십계명 지키는 데 실패한 자가 될 때 안식일 지키는 데 실패하고 십일조 하는 데 실패하고, 탐내는 데 실패하고, 살인, 간음, 모든 게 성공할 게 없다는 걸 인식할 때 구원에 성공자가 되는 겁니다.
왜 성공자가 되느냐 하면, 종속을 돌 판의 내용대로 일치가 되는 그분을 이스라엘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분이 오실 메시아에요. 하나님이 율법대로 십계명대로 완성할 그분을 기다려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어떤 마음으로 기다려야 되겠어요? 내가 아무리 십계명 지키고 율법 지켜도 나는 지킬 만한 인물이 못 됨을 그걸 자인해야 돼요. 그걸 인정해야 돼요.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실패에 종속되는 거예요.
아까 강의 잠시 다시 해봅시다. 사람이 종속되지 아니하면 개 목줄 없으면 미쳐버린다 했지요. 왜냐하면 어디에 매인 바가 없으면 사람들은 홀로 살려고 해요. 나 혼자 살고 싶어요. 그러면 매사에 내가 나한테 물어보고 내가 선택하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우리는 교회 다닌다 치고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선택하면 찝찝하니까 기도를 하지요. “주여, 이쪽이 맞겠습니까, 저쪽이 맞습니까? 내 아들이 울산 아가씨와 해야 결혼해야 됩니까, 서울 아가씨와 결혼해야 됩니까?” 응답받았다. 서울 아가씨로 했다.
모든 인간의 그러한 자기 선택이 모세의 실패와 더불어 동일하게 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가 입었던 그 광채가 산 밑에 내려와서 얼마 못 갔어요. 그것은 언약이 다른 방식으로 성취를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언약은 모세조차도 날아가 버려요. 율법, 십계명 또는 돌 판을 모세가 제대로 못 지켰지요. 그럼 모세 후계자가 여호수아지요. 여호수아가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다. 여호수아 다름에 사사들 나옵니다. 못 지킵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 그 다음에 다윗, 예레미야, 이사야 어느 인간도 이 십계명,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럼 못 지키면 실패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십계명, 율법은 이스라엘을 실패가 일어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현장으로 만들어냅니다. 이게 성공이에요.
우리는 뭘 상상하느냐 하면, 안방에 돌 판이라든지 하나님 주신 보물이 있으면 안방 문만 열면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뻗어 나오는 거예요. 그걸 상상하는 거예요. 안방에 금덩어리 하나 모셔놓으면 다른 문 열 때는 아무렇지 않은데 그 문만 열면 왕~, 왕~, 왕~, 왕~ 이런 음악 들리면서 아무개아 이 문을 열었느냐? 어떤 도사가 와서 이 도끼가 네 도끼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주길 바라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런 메시아를 기다린 거예요. 구름 타고 메시아가 온다고 했거든요. 다니엘 7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늘 하늘을 쳐다보는 거예요. 처음에는 점으로 보이다가 점점 도인이 오는데 도포 휘날리면서 옆에 지팡이 들고 구름 위에서 오더란 말이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그런 식으로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기를 기다린 거예요.
왜냐하면 에스겔에 보면 다윗이 오게 돼있거든요. 다니엘 7장에서는 구름 타고 오게 돼있다고요. 둘을 결합하면 죽었던 되살아나서 다윗이 구름 타고 오면 그분이 바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메시아가 된다는 겁니다. 물론 그 전에 하나의 징후가 있어요. 메시아 이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된다고 말라기에 나와 있으니까.
방금 이야기한 걸 보세요. 제가 시편도 인용하고 그 다음에 에스겔 인용하고 이사야, 다니엘 인용하고 여러 가지 인용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성경이라는 언어를 돌파하는데 인간의 한계가 있어요. 저 개념에 합치되는 것이 이런 일일까? 아니면 저걸까? 성경이 돌 판이 문자로 돼 있잖아요. 문자에 합치되는 그런 상황이 우리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어떤 사건일 수 있다고 짐작하는 겁니다.
성경을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오늘날 기독교 신자, 교인도 마찬가지고 성경 말씀을 주셨잖아요. 이걸 읽는단 말이죠. 읽는 동시에 무슨 마음이 드느냐 하면, 읽고 순종해서 지켜서 복 받아야지. 영광 돌려야지. 이게 나오잖아요. 문제는 글자에 담긴 뜻을 어느 인간도 해명하거나 해석하거나 해독할 수가 없다니까요. 해석에 실패해야 돼요. 이 말은 우리가 지키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을 정리해봅시다. 돌 판이란 이 물체가 인격화 되는데 있어서 모세와 짝을 이뤄서 왔어요. 그런데 인격화 시키는데 모세가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세마저도 돌 판을 완성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시고 모세에게 여러 가지 세부 율법을 줘요. 돌 판에는 양쪽에 십계명밖에 없어요. 그리고 십계명을 사수하고 돌 판을 보호하기 위해서 세부적인 규칙과 조항들이 주어진 겁니다.
돌 판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어야 되고 제사장이 되려면 제사장 복장부터 해서 가계, 족보부터 법으로 줬어요. 그리고 제사장들은 그냥 창 들고 보초만 서는 사람이 아니고 매일 같이 제사를 드릴 사람들이고 제사에 필요한 제사법들이 있어야 되고 제사 기구들이 있거든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돌 판을 안치할 수 있는 상자 만들기와 상자를 보호할 성막 만들기도 겸하여서 법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돌 판이 내려왔다는 말은, 모든 보조적인 법들은 돌 판을 지키기 위한 이중, 삼중의 장치가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주장에 의하면 돌 판을 놓고 콘크리트 벽으로 하든지 그걸 적들로부터 사람 손대지 않도록 보호하면 지킨 거잖아요. 율법을 지킨 거잖아요. 보디가드 한 게 맞잖아요,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율법은 그런 식으로 지키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양을 잡아야 되고 매일같이 상번제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게 아주 희한한 일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드라마 이야기해서 천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복음을 위해서는 뭐든지 다 씁니다. 어떤 백수 남자가 여자 하나 만나서 인생 바꿔보려고 치킨 집하는 나이 많은 아줌마 꼬셔서 그 집에 들어오려고 애를 써요. 아무것도 없어요. 전직 속초 경찰관인데 이래서 들어왔어요. 자기는 마당에 텐트만 치고 자겠다는 거예요. 처음에, 처음에. 다 그렇게 들어와요. 나중에는 안방까지 기어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처음 말과 달라요.
돌 판이 돌멩이 같으면 어느 장소에 비나 안 맞게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 말씀은 뭐냐? 과연 언약이 그냥 물체로 끝날 것 같으냐고 묻는 거예요. 돌 판이 나중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거든요. 그 중간 과정을 이스라엘 역사가 돌 판과 동행하면서 사람 되는 절차를 다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 절차, 과정이 장차 신약 시대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전혀 십자가 구경도 못하고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멀리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 절차가 이미 이스라엘 절차 속에 포함돼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돌 판은 물체 맞아요. 이 물체가 물체로 곱게 있는 게 아니고 자꾸 말썽을 일으킨다고. 무슨 변화가 일어나요. 자꾸 변화가 일어나서 돌 판을 처치를 못해요. 돌 판이 가만있는 게 아니에요. 돌 판이 사람을 죽인다니까요. 일을 벌여서. 아까 백수가 꼬시는 이야기는 <이브의 사랑>이란 드라마입니다.
이게 개나 소 같으면 마당에 묶여서 가만있으면 좋겠는데 이게 인간이 되어서 인간 속에 자기 의지가 있고 욕망이 있겠지요. 니체에 의하면 권력으로 향하는 욕망, 의지. 나는 홀로 사는데 필요한 나만의 영역을 기어이 확보하겠다는 의지 말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남자가 나와 결혼하면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해줄게, 이렇게 해놓고 고무장갑 하나 사주고 끝나버리잖아요. 추석에 전 붙이는데 고스톱 치고 있지요. 약속대로 안 되거든요. 왜냐하면 사람은 개, 돼지가 아니고 인간이란 말이죠.
물체가 인격화 되면서 원래 돌 판에 들어있는 어떤 분이 장차 와서 해야 될 일을 미리 앞당겨서 이스라엘이란 현장,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삼아서 그 기능들을 뿜어내고 있는 거예요. 세계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퀴리 부인이 있지요. 그 사람이 왜 죽었느냐 하면 연구를 너무 많이 해서 방사선에 쪼여서 죽었거든요.
방사선이 뭡니까? 그냥 돌멩이가 아니에요. 거기서 알파파, 베타파, 감마선이 나온다고요. 이게 사람의 세포를 변질시켜서 암세포로 바뀌게 해요. 그래서 암 걸려 죽었어요. 돌이 그냥 돌이 아니라니까요. 방사선이 나오는 돌은 위험해요. 그래서 일본에서 나오는 고등어도 안 먹잖아요. 그냥 물질이 아니고 살아서 우리를 죽인다니까요. 방사선이 돌 판에서 나오는 거예요. 온 세상 사람들 다 죽었어, 이 말입니다. 왜? 위의 거룩한 분이 아래로 내려오니까 아래 있는 사람이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고 놀래버린 거예요. 성전이 바로 언약궤가 있는 곳이잖아요. 무시무시한 것이 이스라엘 속에 드디어 잠입이 시작된 겁니다. 그들은 돌 판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자 시도했지만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께 속은 거예요.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을 인간의 모든 죄를 다 파냅니다. 그냥 죽이지 않아요. 다 파내서 이스라엘을 텅텅 비게 만들어요. 인간의 중요한 것을 다 없애버리는 방사능 같은 그런 힘이 그 돌 판에서 뿜어 나오게 돼있습니다. 너희들 다 죽었어! 다 죽은 거예요.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말씀 하실 새, 제자들과 많은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들었지요. 그들 중에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앉는 순간 그들은 다 죽은 겁니다. 아무도 살 수가 없어요. 그 말씀대로 심판할 거예요. 일점일획이라도 헛되지 않고 그 말씀대로 심판할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이 종속되면 됩니다. 아무 걱정할 것 없어요. 그 말씀이 죽이시면 죽으면 돼요.
말씀이 우릴 죽일 때 반드시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게 돼있습니다. 죄가 주어진다는 말은 그 배경에 이 죄를 대신해서 이 죄를 의로 바꾸는 장치를 그 바닥에 부착한 채 우리에게 죄를 지적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죄인, 죄인 할 때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죄를 지적하면서 그 죄를 자체적으로 해소가 되게 돼있어요. 자체적인 해소,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 화해라고 합니다. 또는 화목이라고 해요. 마지막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제일 마지막에 화목제에요. 그리고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써 그냥 죽은 게 아니고 화목제물로 죽었어요.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죽었다는 말은, 돌 판이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냈다고 보면 됩니다. 장터를 만든 거예요. 보통 촌에서 행사 있다고 하면, 유지 온다고 하면 마을 청년들이 청소하지요. 깨끗하게 소제하잖아요. 그 소제 작업을 할 때 장사 치우라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중요한 것을 영접하기 위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다 소제하잖아요. 소제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평생을 통해서 성령이란 비로 우리를 소제하는 거예요.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다 추방시키고 진짜 물도 안마시고 밥도 안 먹어도 상관없는 그런 소중한 것을 담기 위해서 우리는 청소를 해서 그리스도만 담아내는 그분만 보물로 담기 위한 그릇이 되는데 그걸 자비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라고 로마서 9장에서 그렇게 언급하는 겁니다.
정리해봅시다. 돌 판을 모세가 들고 왔지요.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통해서 돌 판의 본 해석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왜? 인간은 언어를 들어야 그걸 지킬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뭘 하라 하면,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걸 듣는 순간에 살인해서는 안 되는구나, 살인하면 죄가 되는구나. 그렇다면 살인 안 하게 되면 우리는 죄가 없지요. 의인 되지요. 복 받은 사람 맞지요. 살인했을 경우만 죄인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요. 그런 사고방식이 저주받은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세 편에서 실패하면 모든 인간이 실패로 끝나요. 모세를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 각자 마음속에 살인 안 하겠습니다. 살인하면 내가 개입니다. 저를 죽여도 좋습니다, 라고 마음은 그렇게 먹지만 사실은 살인 말라는 본래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럼 살인하지 말라는 본뜻은 뭡니까? 돌 판에 들어있는 메시아를 너희들이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언제 우리가 예수님 만난 적도 없는 예수를 죽였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마련이죠. 그런 질문이 요한복음 7장 20절에 나옵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당신 귀신 들렸도다. 우리가 언제 당신을 죽이려고 했는가? 예수님이,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렇다. 때가 되면 이구동성으로 저 예수를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칠 때가 올 것이라는 겁니다. 원래 너희가 나빠서가 아니라 그런 족속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실패해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다 끝났다고 치고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자기 실패에 종속되게 살면 돼요. 오늘도 실패하자. 이게 하나의 가훈이 돼야 돼요. 가게 문 열고 손님 오면, 오늘도 실패해야 된다. “어서 오세요.” “아이고, 이 집 음식 참 맛있는데.” “맛있어요? 제가 했거든요.” 오늘도 실패다. 오늘도 교만했구나. 모든 상황이 의로 바꾸기 위한 준비 단계로 소제당한 청소당할 것이 매일같이 생겨나야 돼요. 까불어야 돼요. 까불거리며 살아야 이게 바로 내가 주님보다 나를 사랑하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구나. 자기한테 소중한 것이 생겼으면 그 다음 상대적으로 예수님은 덜 소중하게 되거든요. 얘가 갑자기 공부를 잘했다. 그러면 하나님께 일단 감사하지만 사실은 공부 잘하는 얘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가리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새순교회에 그런 일은 없겠지만 갑자기 교인이 다섯 명 더 왔다. 그러면 교인들이 어떻습니까? 교인이 문제가 예수님이 중요하지. 그런 마음 들겠어요, 안 그러면 주께서 좋은 꿈꾸게 해서 다섯 명 와서 감사합니다. 이제 교인들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올 가능성이 많아요. 이러다가 우리 교회가 오백 명 될지 몰라. 오백 명은 너무 심했나. 올해 가기 전에 백 명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하게 되면 갑자기 다섯 명이 다섯 더하여 열 명 나가버리면 주님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내 것 왜 건드립니까? 분명히 실패하라 했거늘 우리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성공을 기대했습니까? 성공한 채로 고요하게 유지하기, 이게 우리 소망이잖아요. 성공된 채로 성공이 가득 찬 채로 손 안 대고 줄곧 그렇게 가기.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이것뿐이지 가져가는 것은 안 하기 그냥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또 주시고, 또 주시는 하나님.
모세가 하나님께 대들었던 이유가 뭐냐? 왜 하나님이 주신 내 백성을 이렇게 말 안 듣게 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화낸 거예요. 너희들 때문에 내가 못 살겠어. 이것 때문에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갔어요. “하나님이여, 교인들이 복음을 안 들어서 못 살겠습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 목사한테 뭐라고 하겠습니까?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이 니 교인이야? 갑자기 니가 왜 들어가?” 인간은 성공할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돌 판을 통해서 돌 판 유지하는 것, 지키는 것, 관리하는 것, 보존하는 것, 방법을 다 이야기했습니다. 한 마디로 해서 언어거든요. 율법이란 언어로 하나님 뜻에 일치, 합치, 맞추도록 마음껏 자기의 행함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 행함이 하나님 앞에 거북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가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정성을 다하여 나름대로 지킨다고 다 지킨 그것이 어디에 한계 있느냐 하면, 내 소중한 것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게 돼있습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할 때 평소에 자기가 미워한 사람이 안식일 어기면 아미 제일 먼저 나서서 돌로 쳐 죽였을 거예요. 어디 거룩한 하나님의 법을 어겨. 그런데 안식일에 나무한 사람이 만약에 자기 자식이라면? 나, 기권. 돌 안 던질래.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나.
여러분, 아버지가 자식을 죽여야 돼요. 그게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왜 죽여야 됩니까? 나한테 가장 소중한 제2의 자신이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돌 던지지 않으면 우리는 비어있는 그릇밖에 안 돼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합당치 않다 해놓고 그 뒤에 나오는 자기가 미워져야 돼요. 자기가 미워서 자기가 돌을 던져야 돼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안목을 알아야 돼요.
신명기에 나오듯이 말 안 듣는 아들이 있거든 아버지가 다루지 말고 마을 이장한테 가서 이장이 돌로 쳐 죽이도록 하라고 할 때 누가 내 대신 돌 던지라고 하겠어요. 성경에서는 말 안 듣는 자식이죠.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말 잘 듣는 자식인데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하셨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바로 기이한 일이라니까. 우리가 믿는 십자가가 우리 힘으로 능력으로 아무도 믿을 수 없어요. 기이해도 너무도 기이해요. 인간의 상식에서 나올 수 없는 거예요.
누가 신자라고 할 때 항상 그거는 구라라고 생각하시고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이한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잘해주면 사랑하고 못해주면 미워하는 게 인간의 마음인데 그게 아니고 사랑하는 내 자식을 돌로 쳐 죽이는 마음인데 얼마나 기이합니까? 여기에 참여해야 돼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이는 그 죽음에 저라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겠다고 나설 수 있어야 돼요. 나설 수 있으려면 착하고 멀쩡한 아무 탈 없고 고상하기 짝이 없고 착하기 짝이 없는 나를 내가 미워지는 마음이 생겨나야 돼요. 그게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안 되지요.
그러니까 본인이 그렇게 선택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러면 도 닦는 것밖에 안 되니까 그런 부질없는 짓하지 마세요. 나는 부족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저절로 사시면 매사에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게 발견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실망될 거예요. 주님이 소중하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는데.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찬송을 부르는 중에 벌써 4절쯤 되면 그 찬송을 부르는 내가 더 소중해. 예수님보다.
돌 판은 가만 놔두면서 거기서 업무가 진행됩니다. 그것은 너의 죄를 위해서 아무 이유도 없는 정말 흠 없는 양을 잡으라는 겁니다. 그걸 행하지 않으면 돌 판은 있으나마나 한 거예요. 돌 판이 있으면 반드시 효과 봐야 돼요. 뭐냐 하면, 죄 지음, 무심코 지은 죄가 돌 판이 있는 언약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것이 의로 달라지는 변화와 효과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 중간에 들어가는 게 뭐냐 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을 상번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돌 판 중심으로 제사가 되고 연기가 피어올라요. 누가 또 죄 지었구나. 죄 지은 자의 죄가 공중으로 날아가고 그 대신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베드로전서 4장 8절에 나오지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들이 뒷걸음질해서 노아의 하체를 덮는 거예요. 담요로 덮어주는 거예요. 수치스러운 것을 덮어줌으로 말미암아 나한테 안 보인다. 내가 덮어준 담요 예쁘네, 그것만 보이는 거예요. 이건 제가 이야기한 종속이에요. 개 목줄이에요. 우리가 덮어준 담요가 인식이 되려면 담요 없이는 발가벗은 채로 살 수밖에 없음을 우리가 스스로 기쁘게 수용해줘야 돼요. 주여, 덮어주지 아니하면 제 꼴이 엉망입니다. 그걸 인정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덮어주는 사랑에 종속돼야 돼요.
그래서 돌 판을 중앙에 두는 겁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을 그 주변에 깔아놓고 돌 판에서 나왔던 담요가 이스라엘 전체를 제사법이란 이름으로 덮으면 이 나라는 거룩한 언약의 나라가 됩니다. 그게 제사장 나라, 신약으로는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사람이 되는 거죠.
끝으로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덮어준다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개체, 개별자는 날아가 버립니다. 내 담요가 아니거든요. 우리의 담요지 나만 덮는 담요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저는 식구가 많은 집안에 태어나서 갑질 당하면서 살아왔어요. 남자들끼리 한 방에 네 명이 들어갔어요. 네 명이 뭡니까? 삼촌 세 명, 저와 사촌까지 해서 여섯 명까지 들어오거든요. 요 하나 깔아놓고 이불 하나 던져주고 끝나는 거예요. 제일 큰 삼촌이 새벽 되면 이불 하나를 둘둘 감아버려요. 밤에 시원해. 이불 없어요. 자기는 푹 잤지(그 삼촌은 이미 돌아가셨어요). 나머지는 속옷 차림인데요. 벌벌 떠는데요. 추워서 서로 붙어있고.
개인용 담요, 나만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개인구원 없습니다. 개인구원을 실패로 간주하시고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나,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것 실패입니다. 믿음 아닙니다. 그걸 내놔야 돼요. 구원받겠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힘으로 성공하겠다는 겁니다. 내놓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내 구원은 이제 안중에 없어요. 예수님 하신 게 눈에 들어와요. 나는 종속되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내가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작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공장장 아닙니다. 나는 물건 나올 때 마지막 검사만 할 뿐이에요. 이것 당신 공장인가? 아니. 우리 사장님 공장이야. 이렇게 돼야지, 그래 내 공장이야. 일개 직원 주제에 그런 소리하면 안 되거든요.
네 인생 네 거야? 주님의 인생이야. 주님의 인생이고 주님의 몸이에요. 한 모퉁이 맡아서 할 뿐이에요. 얘 둘이면 둘 키우고 하나면 하나 키우고 그것만 맡았을 뿐이에요. 하나님이 무슨 복을 줘서 다섯이면 다섯 명 키우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그렇게 할 뿐이에요. 우리는 세상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내 맡은 일만 하지만 그게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한 몫만 맡았을 뿐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경쟁적으로 사업 벌이고, 경쟁적으로 남보다 부자 되려고 하고, 늘 이기고 싶어 하고, 내 자식이 네 자식보다 낫다. 자꾸 경쟁으로 나서지 마세요. 스트레스 받습니다. 니는 니 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맡은 일로 살면 되는 겁니다. 말은 참 쉽다. 말은 쉬운데 우린 남과 시합하지 않으면 살 재미를 못 느끼니 이게 문제가 되거든요. 옆에 집 지으면 더 큰 집 짓고 싶고, 뭐하고 싶어 하고 그런데 그것도 실패다. 그것도 실패의 현장이에요.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이 올 때는 율법에서 방사선이 나온다. 무슨 방사선?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죄를 더하는 데 뒤에 은혜가 장착돼있어요. 죄를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느니라. 죄가 도달되게 되면 겸하여 구원받았음이 되는데 이 구원이 나만의 담요가 아니에요. 나만 덮는 담요가 아니고 주님 주신 담요는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고린도전서 10장 17절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주님께서 한 사람마다 쟁반에 떡을 준 게 아니고 한 떡을 떼어서 줬거든요. 그러니까 준 떡을 먹으면 내 떡이 되는 게 아니에요. 떡을 먹는 순간 소환이 된다니까요. 하나에. 떡에 떼어져 나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어요. 하나가 확장되고 확대될 뿐이에요. 자기 자신보다 하나 됨을 아는 사람은, 내 몸이 주의 몸의 일부, 지체에 불과하다는 걸 아는 것이지 홀로 사는 것, 내 몸은 내 것이다. 내 몸은 나한테 소중한 것이야. 너한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소중한 거지요.
그래서 술, 담배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고, 욕하지 말고 함부로 나쁜 짓하지 말라는 것은 니 몸이 니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잖아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값으로 산 몸이 되었으니 주께 영광 돌리라는 말이, 니 몸이 아니고 너를 위함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에 함부로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세로 들어온 주제에 아무데나 못 박고 하면 집 주인이 별로 안 좋아해요. 나중에 못 다 뽑아야 되잖아요. 남의 집을 빌려 사는데 자기 좋다고 못 다 박고 후작질 하면 주인님이 싫어하시잖아요.
내 몸이 늙어 죽은 것 맞아요. 아플 때도 있고 암에 걸릴 때도 있습니다. 암에 걸리더라도 주인이 알아서 암에 걸리게 한다면 곱게 죽을 수밖에 없어요. 할 수 없어요. 죽더라도 이렇게 나를 죽이시는 그것은 뒤에 이미 살게 하셨기 때문에 언약 안에서 한 몸이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허다한 죄를 덮어주기 위해 담요용으로 자기 아들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는 뭐만 반복합니까? 십자가란 담요가 날마다 반복하게 되면 우리는 죄를 느끼고 실패를 느끼지만 그것이 우리한테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는 것, 내일 되면 뭘 해서 실패할까요? 모레는 뭘 해서 실패할까요? 왜? 우리는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충만하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인에 매인 개처럼 차라리 종속되어서 살게 하옵소서. 홀로 살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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