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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Re.. "극락이" 글과 "강도야" 글 사이에 이 내용이 있습니다.묻고답하기묻고답하기

이웃 사랑십자가마을의 질문 답변에서 시작 된 글입니다. 04 6월 5일자 질문제한 용량에 걸려서 주소를 링크 했습니다.처음 질문을 드립니다.(클릭) 최희철 2004-06-05 05:22:25, 조회 : 240, 추천 : 8 --------------------------------------[re] 처음 질문을 드립니다. 이근호 2004-06-05 07:41:41, 조회 : 230, 추천 : 11 ---------------------------------------------------[re] 갈렙의 지독한 자기애 김재국 2004-06-05 22:15:45, 조회 : 167, 추천 : 9 ------------------------------------------------------------[re] 갈렙의 지독한 자기애 이근호 2004-06-05 23:47:07, 조회 : 161, 추천 : 7 ------------------------------------------------------[re] 모세와 이목사님의 대조적 반응 김재국 2004-06-06 00:42:03, 조회 : 194, 추천 : 9 --------------------------------------------------------------[re] 모세와 이목사님의 대조적 반응 이근호 2004-06-06 01:11:10, 조회 : 177, 추천 : 11 -----------------------------------------------------------[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재국 2004-06-07 00:36:46, 조회 : 145, 추천 : 7 ---------------------------------------------------------------[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이근호 2004-06-07 07:22:03, 조회 : 182, 추천 : 7 -------------------------------------------------[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대식 2004-06-07 02:23:00, 조회 : 187, 추천 : 18 이보세요 재국씨 도대체 당신은 관심사는 주님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는 자기 자신(인간)입니까? 양쪽으로 양다리 걸치는 겁니까?님같이 말하는 사랑에 어디 한 두 번 속아봅니까? 그래서 제발 오해 하지 마시고 여기글들을 차근히 읽어보라고 하는 겁니다. 아예 읽을 가치로 여기지 않고 님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하니 늘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겁니다. 님이 말하는 그 사랑이 죽음을 이겨냅니까? 죽음도 못이겨 내면서 지도자의 사랑의 자질을 운운한다면 여기에서는 안먹혀 들껍니다. 왜냐하면 다들 속아봤거든요? 자신에게서 또는 최고의 사랑이 넘쳐나는 목사들에게서 다 속아 본 분들입니다.당신 같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한 율법사가 영생(구원.사랑.가나안.천국)을 따낼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이 당신이 율법사니 그 율법에 뭐라고 나와 있는 지 되묻습니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던데요? 예수님은 그러면 너도 그렇게 하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아주 좋은데 율법사는 거기서 안 끝냅니다. 그의 본색이 지금부터 나타납니다. 자신의 앎을 확장시키고파 합니다. 지식을 자랑하고파 합니다.예수님 그렇다면 누가 이웃입니까? 적어도 율법사는 자기장단에 놀아주는 주님에게 뭔가 통하나 싶어서 더 자기의 의를 펼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오로지 자기 의만 관심 뿐입니다. 그래놓고 영생과 사랑을 운운하지요. 님이 여기서 수십번 답을 듣고도 못들은채 하며 님의 열심으로 일관합니다. 주님의열심엔 관심조차도 없는 겁니다.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 라는 질문에 사랑이 넘치는 지도자에 대해 님처럼 운운해야 할텐데 느닷없이 이웃이라는 의미와 사랑이라는 의미에 전혀 상관 없는 강도의 의미를 집어 넣으십니다. 이웃과 강도가 어찌 어울리는 개념입니까? 율법사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지 라고 본인의 미리 아는 의미를 예수님으로부터 재확인하여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의 봉사자로써 이웃임을 밝히고픈 겁니다. 얍삽하게도 누구입을 통해서요? 예수님 입을 통해서 말이죠 방금 첫 번째 한 질문에 그렇게만 예수님이 대답하면 율법사는 자기 의가 예수님으로 인해 정당화 될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은 전혀 대화 속에서 상관 없는 강도의 의미를 돌출 시키면서 이웃의 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강도 없이는 강도 만난 자도 없을뿐더러, 그 강도 만난 자가 없다면 이웃의 의미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사의 믿음이 맞겠지요 재국님의 주장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예수님은 강도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 강도 만난 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님이 바로 이것을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 성경 해석자들이 이걸 빠뜨립니다. 그래야 율법사처럼 자기를 옳게 여길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들 말대로 선한 사마리아처럼 좋은 이웃이 되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이웃을 사랑하자 다 성경에 있는 말이니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 태클을 겁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였으나 이웃을 만난 본 자는 비로소 예수님이 이웃임을 증거하면서 님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진 자들에게 이웃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님의 불만이 이겁니다. 왜 우리는 이웃이 될 수 없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강도 개념을 엉뚱하게도 누가 이웃이라는 질문 속에 강도를 통해 이웃이 나타난다고 하는 겁니다. 님은 강도가 누군지도 모르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이웃이 누구냐만 알면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은 집요하게 강도가 누구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밝혀 버립니다. 폭로합니다.안타깝게도 이근호 목사도 아주 어리석게도 강도가 누구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구냐 라는 해석으로 일관 합니다. 이웃이 누구냐는요? 그것은 강도가 누군지, 강도 만난 자가 누군지만 알면 저절로 압니다. 율법사도 다 알거든요 그것은. 다 아는데 구지 예수님이 오실 필요 없잖습니까? 선지자만 보내면 될테고 님말대로 사랑이 넘쳐나는 모세 같은 지도자만 오면 되는데 왜 구지 하늘 영광 버리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왔냐는 겁니다. 강도는 우리 손으로 해결 못합니다. 강도 만난 자도 마찬가지 우리가 도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밝혀 줍니다 우리 또한 강도 만났기 때문이지요. 님 같은 강도 말이죠. 님의 생각에 깔린 그런 지도자 사랑이 넘치는 그런 지도자가 예수님이 말하는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놓고 사랑이 넘치는 지도자가 왜 못되냐고 따지신다면 님은 종교라는 마약에 빠져 있는 겁니다. 우리들도 다 속아본 지라 압니다만 님은 아직도 거기에 자기의 믿음을 걸고 있기에 포기 못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님이 님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는 이상 님은 자력적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강도 만난 흔적을 다 없앨 수 있는, 고침도 회복도 필요 없는 대단한 수퍼맨이겠죠.님 같은 강도가 있으므로 인해 예수님이 진정한 이웃으로 보입니다. 강도가 없다면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은 전혀 알 길이 없지요. 구지 내려와서 이 땅에서 이웃이 누구임을 밝힐 필요 없이 율법사가 알고 있는 간단한 상식 선에서만 알면 되는데 말이죠.또 님이 말하는 가나안 땅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니 님이 지금 완전 곁길로 빠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빠글 빠글한 함 땅입니다. 원수의 성문을 열어야 겠죠. 님이 얼마나 천국을 오해했으면 마귀가 제시한 그런 천국으로 꿈꾸며 환각에 빠져있는 가를 님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원수의 땅에 약속이 있는 겁니다. 죽음의 원수를 해결하지 못하면 님에게서 영생의 약속은 의미 없습니다. 강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웃의 의미는 소용없지요. 저주와 심판의 문제 해결 못하면 구원과 영생은 모든 종교가 일관되게 외치는 마약입니다. 어서 정신 차리고 환상 속에서 빠져 나오세요. 님처럼 환각에 빠져있는 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re] '강도'에 대한 감사. 김재국 2004-06-07 13:06:14, 조회 : 170, 추천 : 8 먼저 제가 강도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신 김대식님께 감사드립니다.그리고 저의 관심사는 자기자신임을 고백합니다.왜냐하면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제가 관심을 기울일 수조차 없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입니다.언제나 문제는 예수님의 속죄제물되게 한 저의 강도행각인 것입니다.지금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강도짓과 에고이즘이 저를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도록변화되기를 간구합니다. 그것은 저와는 상관 없는 예수님의 소관입니다.그래도 간구는 해야되겠지요.질문입니다.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이근호 목사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이웃은 자기가 나서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의 입장에서 결정된다는 유니크한 해석입니다.이웃은 고통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결정되므로 고통당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라는 논리입니다.그런데 저의 질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서드러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즉, 강도만난 자를 보살피는 선한사마리아인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지강도만난 자를 피해서 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사랑(말로만 하는,실천하지 않는)을 통해서는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십자가마을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보살핌의 행위를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사랑인데 거꾸로 강도만난 자를 보살피는 행동을 함으로써자기의를 자랑한다면서요.성도는 선한사마리아인을 본받지 못하고 강도만난 자를 외면하는 불의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위장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가나안으로 상징되는 것은 현재의 삶(세상)과 천국의 이중 상징으로 보고있습니다.십자가마을의 복음의 증거를 기대합니다. -------------------------------------------------[re] '강도'에 대한 감사. 김대식 2004-06-07 21:17:15, 조회 : 254, 추천 : 48 재국님 바로 그 율법사의 관심이 오로지 이웃사랑입니다. 그 속에 자신의 실천을 배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사의 사고방식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자 이겁니다. 하면 된다 나도 참이웃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증거하면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겐 능치 못할이 없다 이렇게 일관합니다.(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그래서 십자가마을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라고 주장하지 않고 선한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을 믿자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염려가 되어 반복적으로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님이 그냥 흘러버린 것은 또 강도와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여전히 님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꾸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넘어오고 있기에 님의 해결책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겠죠.뭐 할수 없지요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율법사의 질문이 던져 집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여길려고 예수님의 답변을 이용합니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이웃이 누구냐 라고 묻던, 이웃이 될려고 노력을 하던 정작 우리 깊은 본심을 자기를 옳게 보일려는 것 뿐임을 예수님이 지적하기 위해 강도를 돌출 시킵니다.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일려는 의도가 강도를 당했다고 보시는 겁니다.여전히 율법사는 감을 못잡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전종사자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율법사는 그들이 또 자신과 같은 율법사들이 이웃 사랑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었던 겁니다. 그것은 그 당시 모든 유대인이 의심할 바 없는 이웃 사랑의 위한 하나님의 조치이고, 하나님이 부여한 직분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평상시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사랑을 전파 하면서 절대로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을 언급했는데 그것이 사마리아 인 아닙니까? 상종도 못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교육 된 것 아닙니까? 사마리아 인이 왜 그럴지경으로 유대인에게서는 이웃이 될 수 없었던 겁니까? 유대인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서 내린 결정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이 보기엔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들만의 신학을 구축하였기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강도로 취급하는 겁니다. 왜? 주의 성전의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말이죠. 이 상극인 족속을 대립시키며 동시에 강도와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 하십니다.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유대인의 시각에서 사마리아인을 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마리아 인에게 선함을 붙여 버리고(유대인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유다지파(남은자 나머지 지파 소멸된 오로지 남은자) 거룩을 다루는 최고 성직인 제사장 레위인 율법사 성전종사자 모두를 강도로 몰아 붙입니다. 이 비유 뿐만 아니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실 정도입니다. 일관된 지적입니다.(마 21:13)(막 11:17)(눅 19:46)그러니 강도로 몰린 유대인이 예수님을 곱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님이 십자가 마을을 무조건 남을 정죄하는 단체로 보듯이 말이죠.심지어 그런 지적을 하신 예수님을 강도와 함께 로마법이든 유대인의 법이든 강도 취급해버려(눅 22:52) 강도가 받는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몰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계속 강도로 남아버리니 대중에게서 멀어지면 안되기에 진정한 이웃으로 남을려면 예수님 단 한명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강도가 받는 형벌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실제상황으로 적용되는 묘한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강도로 취급해 버렸는데, 두 강도 중에서 한 쪽 강도가 예수님을 강도로 보고있지 않고, 강도 만난 자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렇게 보는 자 없었습니다. 누구를요? 한 쪽 강도가 예수님을요. 예수님을 강도만난 자로 보는 겁니다. 강도로 몰아버리는 저 유대인과 빌라도 로마인 유대인 다른 강도 모두를 강도로 보고있고, 그들에게 강도 당한 예수님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예수님도 그런 한 쪽 강도를 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분명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던 순 악질 1급 사형수 강도입니다) 강도 만난 자로 봅니다.예수님만 그렇게 봅니다.(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그 한 쪽 강도가 강도로 몰려 십자가형을 받는 예수님을 선한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선한 자에게 요청합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아니 이게 이해 되나요? 납득이 되나요? 한국교인들이야 너무너무 믿음들이 다 좋아서 믿겨진다고 자부들 하시던데 ! 자기도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도 죽어가고 있고, 강도로 몰리든 선한 자이든 이미 죽는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요청입니까?이 요청에 희한한 대답도 너무너무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둘 다 강도 신분인데도 지금 둘만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웃됨을 누리고 있습니다. 둘 다 깊은 물에 잠겨 꼬로록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서로가 강도 만난 자로 보면서 말이죠. 아니 더 정확하게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을 선한 자로 더 깊게 봅니다.(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과 한 쪽 강도와의 이웃됨을 누리는 그 낙원에, 그 함께 함에, 재국님과 저와 십자가 마을이 끼일 틈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 아니냐 라고 또 물으시겠죠? 제발 재국님! 님은 지금 강도 만난 자입니다. 강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도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데 선함을 베풀겠다고요? 제발 그러지 마시고요, 한 쪽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밖여 꼼짝 달싹도 못하는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세요. 그런 전혀 움직이질 못하는 사랑도 이웃됨도 전혀 하질 못함을 인정 못하고, 지금 잘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있기에 이웃 사랑 실천에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님을 강도 만난 자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님을 보는 시각처럼 자신도 십자가에 꽁꽁 매달려 있는 자로 보시길 바랍니다. 강도처럼. (이 때 터저나오는 말씀이 너희는 가만히 서서입니다. 아무데나 붙이는게 아닙니다. 자신이 꽁꽁 묵여있다는 것을 볼때만 출 14:13-14의 의미가 제대로 보입니다 양사방으로 애굽 군사, 홍해가 가로막고 어디 나갈 틈이 없는 꽁꽁 묶인 상태입니다. 그저 죽는 길 뿐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나는 마땅히 죽여야 할 자임을 통감하는 그 자백 속에서만 요나의 표적이 의미가 있습니다.)그 속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 선함 분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외쳐 보세요. 예수님도 죽어가고 있네요? 그런데 선한 분이 왜 죽으셔야 하지요 우린 강도이지만 예수님은 강도 아니잖아요? 선하신 분이 왜 강도로 몰려 죽으시나요. 우리야 당연한 형벌이지만 주님은 옳으신 분입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행하신 모든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그 나라가 임하는 그 때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제발. 이라고 외쳐 보십시오.재국씨! 님이 분명 자신을 강도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 강도라는 표현은 여기 지금 벌어지는 논쟁에서 처세술적인 노림수로 이겨보고자 하는 그런 이유로 강도다 그래 나 강도다 우짤래 이런 의미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 고백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나온 고백, 다름아닌 예수님 때문에 나온 강도라는 고백이다면 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사랑 베푸는데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걸 정죄하는 십자가마을의 모순을 끝까지 밝히겠다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 정작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강도로 몰아버려 죽여버린, 이젠 강도 없는 세상, 선한 사마리아인만 남아 있는 세상을 꿈꾸는 그런 우리 자신의 모순을 먼저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폭로 당해서 나오는 고백이길 바랍니다.십자가 마을은 구원받은 한 쪽 강도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외쳐 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 뿐이라고요. 그것만 바라보자고요. 그분이 지금도 저 장대 높이 달려 있음을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또 자기 신앙 관리로 넘어와서 이제 더 이상 쳐다보는자 없이, 서로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경쟁을 펼치는 겁니다. 어쩌면 님도 지금 선한사마리아인 되기를 절대로 포기 못하면서 여기서 펼치는지도 모르지요. 지금 이런 현실이 펼쳐지기에 예수님은 여전히 그 당시나 지금이나 강도로 몰리고 있습니다.못 박아라 못 박아라(눅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눅 23: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눅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눅 23: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65번 극락이 찾아낸 이웃, 66 강도야! 꼭꼭 숨어라, 67 구원은 없다 2004년 6월달 학생회 공부 내용입니다. 그 글들 내용과 연관이 되어서 글을 올립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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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8 묻고답하기 매정한 복음 이사야 최고관리자 04-09-10
1,247 묻고답하기 Re..예배 묻고답하기 최고관리자 04-09-09
1,246 우리교회 Re..행 12"18-23 (교 만)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04-09-09
1,245 우리교회 [일반] 아래 9월 6일 모임은 9월 5일 동은교회 예배임을 수정합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4-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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