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창 1장 14-19(하늘의 광명)150930-이 근호 목사
6강-창 1장 14-19(하늘의 광명)150930-이 근호 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93)
6강-창 1장 14-19(하늘의 광명)15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14-19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네 째 날에는 둘 째 날의 궁창 안에 실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 만들기입니다. 비어 있는 궁창에 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뭘 로 채우는가? 시간으로 채우는 겁니다. 이 세상을 시간으로. 14절에 보면, “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시간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간으로 가득 채운다는 말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인간입장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인간의 힘으로는 차단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별이 있는 그 궁창 너머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별이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표현하는 거거든요. 별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달도 그러하고 해도 그러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제 6일째 만든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별과 달과 해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해야 되는데 인간이 그 표현하는 것을 만약 잃었다, 놓쳤다 하게 되면 세상은 누구의 표현이 되는가? 인간 본인을 표현하는 장으로 이 세상이 왜곡되게 해석되고 이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표현이지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존재, 내가 왜 있어야 되고, 내가 왜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인간의 해석이 되고, 행위가 되고, 행동이 되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신을,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이 일월성신과 관련되어 있어요. 해와 달과 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표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별이 원래 표현하는 것, 달이 본래 표현하는 그 표현이 아니고 그 내용은 이미 인간 자신의 잘남, 나는 꼭 살아야 된다는 그것을 설명하고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한 신, 성경에서는 우상이라 하지요, 그런 신이고 세상에 대한 해석이고 그것이 쌓인 것을 오늘날 과학이라고 합니다.
모든 과학은 “왜 인간이 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자기 존재를 정당화 하는 쪽으로 정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은 왜 흐르는가? 전기사용 하라고 물이 흐른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지요. 감은 왜 열리는가? 인간이 따먹으라고 감이 열렸다.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감 따먹어서 뭐 할 건데? 감 따먹으면 인간이 오래 사니까. 살아서 뭐 할 건데? 그것은 몰라요. 그래서 본래 표현해야 되는 것을 놓쳐버린 겁니다. 놓쳐버린 정도가 아니고 아예 인간위주로 나가다 보니까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인간의 존재성으로 말미암아 가려져버린 겁니다.
가려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원리가 인간에게 가려졌다고 낙담하시고 “너희들 때문에 안 되겠다.” 하고 자포자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 이런 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차단막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위주의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 위주의 시간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하시는데 대자연을 동원시켜가면서 해 나가시는 겁니다. 이걸 풀이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풀이가 이해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무엇을 알아야 되는가? 세상 모든 대자연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하고 관련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관련된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무슨 취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가정에 청소년이 있다면 엄마 아빠는 안방에 계시고 애는 자기 방에 있다가 밖에 나간다 치면 몰래 나가지 않아요. “엄마, 잠간 친구 만나고 올게.” 하고 안방에 있는 엄마나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가지요. 왜 이야기를 하고 나갑니까? 그냥 나가도 될 것을.
청소년기에 본인의 존재는 아직까지는 엄마 아빠에게 예속된 거예요. 청소년이 학교에 갔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 다음 시간에는 뭐 할까요? 자습할까요? 생물 선생님이 오늘 출근 안하셨다는데 체육시간으로 할까요?” 이런 식으로 학생이 선생님에게 묻지요. 그것도 학교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자기가 거주하는 이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를 하는 거예요. 부모와 집에 있을 때 이 집은 부모집이지 내 집이 아닌 거예요. 나는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식이기에 어디에 가도 걱정 안하도록 하기 위해서 “열 시까지 들어올게요.” 하고 이야기를 하고 나가듯이.
우리는 평소에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나님한테 물어봅니까? “오늘 외출하는데 11시까지는 들어올게요.” 이렇게 합니까?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이 그 이야기거든요. 이 세상의 주인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이게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는데 교인이 한 세 명이라 합시다. 그 중에 한 명이 전화를 해서는 “목사님,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가렵니다.” 그러면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었잖아요. 그러면 그 목사는 하나님한테 이렇게 해야 돼요. “세 명을 목회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면서 두 명만 목회하라고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목회를 비롯해서 모든 세상이 자기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두 명 주신다면 두 명 목회하면 되고, 한 명 남으면 한 명 목회하면 되고, 다 나가면 안 하면 되고. 그러면 되잖아요.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세 명 있다가 하나 없어지면 두 명만 감당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달란트 비유니 재능이 어떠니 하는 이상한 해석들을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역할이라는 것은 역할 자체가 축복이 아니고 그게 저주가 될 수가 있어요.
주신 역할 속에서 원래의 주인 속에 내가 예속되어 있다는 그것을 발견하면 되는 겁니다. 마치 해와 달과 별이 하나님한테 예속되어 있듯이, 들풀과 채소와 과수원의 과목이 전부 다 하나님께, 그 세 번째 날에 예속되어 있듯이 네 번째 날에는 해와 달이 예속되어 있고, 여섯 번째 날에는 인간들이 예속되어 있는 거예요. 여섯 번째 날에는 땅의 짐승들과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본래의 위치를 잊어버렸어요. 자기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복음을 모르고, 기독교를 모르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어떠니, 인문학강좌를 하면서 강사들이 “내가 보기에 기독교가 어떻고 예수가 어떻다.” 하는데 제가 그 사람들한테 근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딜 봐서 네가 인간이냐는 말이지요. 어딜 봐서 네가 인간인 거예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중에게 묻고 싶은 것이 그거예요. 대체 언제부터 네가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느냐는 말이지요. 주님한테 예속도 안 되어 있으면 그것이 인간이겠습니까?
그들을 말하기를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 안방에 있는 엄마에게, 부모에게 물어봐야지요. “엄마, 내가 움직이고 있는데 내가 살아 있는 거야? 아니면 죽어 있으면서도 사는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걸 물어봐야 되는데 오늘날 현대인들,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어요. 자기 맘대로 살아요. 그 당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겁니다. 이게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어요? 오늘날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모든 일에 대해서 물어봐야 되는데, 통보하고, 보고하고, 결재 받고, 이게 없어요. 그래놓고 창세기를 보고, 출애굽기를 보고,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하고, ‘주여!’라고 외치면서 통성기도를 하고. 그런 기도를 하라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조, 과학을 비롯한 모든 세상 분위기,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필리핀, 중국, 미국, 러시아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는 분위기가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이 자기 위주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어디에 묻혀 있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시간으로, 시간이라는 차단막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꽉 눌러놓았어요. 말이 어렵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리 인간이 상상너머의 세계를 생각해도 나오는 것은 소망이라는 이름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아요. 소망이라는 이름의 속임수. 쉽게 말해서 ‘언젠가는 되겠지. 가다보면 되겠지. 갈 때까지 가 보면 뭐가 나오겠지.’ 이걸 네 자로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에는 어떤 해답은 아무것도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전체가 개혁주의교회에요.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전부 다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성경 해석하는 것을 보면 “나는 존재해야 돼. 나는 무조건 존재해야 마땅해.” 이런 조로, “우리 교회는 안 망해야 돼. 우리 교회는 커야 돼.” 전부 다, “우리 가정은 행복해야 돼.” 이렇게 전부 다 자기 위주로 왜곡되게 해석을 해버리는데 그게 로마서 1장에서 우상숭배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자기소망이라는 그 속임수를 자기가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 이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창조원리를 알려주시는데 알려줄 때 시간을 가지고 알려주시는가? 어떻게 알려주시는가? 인간은 자기의 타고난 소망 때문에 시간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겁니다. ‘갈 때까지’가 뭐냐? 그게 시간이에요. 천년이고 2천년이고 2만년이고 계속 가보겠다는 거예요. 2십 만년이든 몇 년이든 계속 가보겠다는 거예요. “시간 끝에 뭐가 있겠지, 시간 끝에.”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미 자기위주로 하는 그 해석, 해와 달과 별, 이것을 통해서 자기위주의 계산을 하는 것이거든요. 사주팔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그런 것을 따져서 세상을 설명하려 드는 것이 고대의 과학입니다. 그에 비해 현대의 과학은 “그것은 너무 허황되다. 정확하게 측량해야 된다.” 하는데 그 측량한다는 것이 뭐냐? 자신의 시각범위 내에서, 자기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범위 내에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최종의미를 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