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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하늘의 광명150930우리교회창세기

하늘의 광명150930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하늘의 광명(창세기 1:14-19)

이근호

15-09-30 21:29

하늘의 광명

2015년 9월 30일 본문 말씀: 창세기 1:14- 19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비워 있는 위 궁창(하늘)에 내용물을 채울 때는, 그 광명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창조원리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만들어진 공간을 채우는 내용물들은 독자적인 의미를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속해 있는 공간 자체가 하나님의 세계로 나아가는 차단막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지상의 인간들이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 오류가 됨을 뜻합니다. 인간들은 해와 달과 별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알 길이 없이 거저 자신들의 생존과 존재에 유리한 쪽으로 그들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마치 세상 전체 인간을 위하여 있는 것처럼 곡해하면서 거기에 맞는 신을 지어내어서 숭상합니다.

따라서 ‘의미의 구심점’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마치 집안에 있는 청소년이 외출할 때, 그냥 아뭇 소리없이 밖을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에게 통보하고 외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 잠깐 친구 만나고 올게요” 왜 이런 통보를 어른에게 해야하는 겁니까? 그것은 이 집안에서 자신은 어른에게 종속되어 있는 입장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함부로 행동해야 하는 입장이 아님을 청소년은 아는 겁니다. 학생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하루 스케줄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학생은 학교 당국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이처럼 해나 달이나 별이나 인간도 보이지 않는 창조주에 종속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사와 연류되어서 움직이는 것이 합당함을 수긍해야 합니다. 청소년이 집안에서 하는 처신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집안 어른이 졸지에 돌아가셨다면 그때부터 청소년 아무에게도 자기 행위 의미에 대해서 허락을 득하든지 물어보지 않을 것입니다.

집안에 있는 가재도구를 자기 생존과 자기 가치를 위해서 임의로 처분하고 관리하고 사용하고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은 옛적부터 인간의 농경생활 스케줄에 동원되었고 과악시대 이후에는 인간의 생활의 윤택과 여유와 편리와 자립을 위한 빈틈없는 원칙을 찾는 재료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인간들의 독자적인 가치와 의미 구축을 위한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 자기 외에 달리 가치 둘 대상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러한 시도는 절대적 허무로 치닫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을 뚫을 능력과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지속적으로 지연시키고 또 지연시킬 뿐입니다. 쉽게 말해서 “갈데까지 가보자”는 식입니다. “끝까지 가보면 뭐가 되겠지”라는 식입니다. 바로 이러한 시간 발상은 미래를 바라보는 자신의 희망을 철저하게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어보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겁니다. 희망없이 사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희망이라는 이름의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을 가지고 인간들이 기대하는 징조가 아닌 다른 징조를 나타내십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징조란 바로 ‘나는 무조건적으로 망해서는 안돼’라는 본인들의 의지의 발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조는 이런 인간들의 기대를 비켜나갑니다. 장차 오실 창조주 자체를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마태복음 2:2에 보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별이 창조주를 지상에 알리는 징조로서 작용해버리면 그동안 자연세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영적 존재들도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 작용하는 계기가 됩니다.

예를 들면, 유다서 1:13에,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유리하는 별’이란 악마에 거기에 속한 인간들의 영적인 본질을 언급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연세계 안에 인간들의 역사의식을 뚫고 영적인 내용을 보여주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나 ‘시간’이 아니라 ‘때’라는 것으로 땅에 세계에 작용하셨습니다. 이는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이 하늘을 장식하는 도배지의 박힌 무늬라고 간주된다면 이 무늬가 실질적인 영적 관련성을 띠고 인간 역사 속에 계시가 침입하는 때가 되게 하십니다. 민수기 24:17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그 자체적으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뽑아낼 별과 관련성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이 별이 이스라엘 안에서 유발하는 효과는 민수기 23:21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창조주께서는 이 지상에 나타나셔서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않으시는’ 작업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숨겨진 영적 세계를 드러내는 징후에 징조요 계시가 되는 겁니다. ‘역사의 기다림’이 아니라 ‘순간’에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2:13에 보면,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들판에 외로이 양치던 목자는 역사의 끝을 한 순간에 보았습니다. ‘허다한 천군천사’들을 보았습니다. 영적인 별들을 본 겁니다. 신명기 32: 8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영적 세계를 소개하는 천사의 위상에 있는 겁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통해서 만났던 그 메시야는 이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본래의 뜻을 담아주셨습니다. 비록 자연세계가 영적 세계를 가리웠지만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창조 안에 담긴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8에 보면,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의 존재 의미는 예수님의 사랑과 연류될 때만 드러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살기 위해 예수 믿지 말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위해 존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5-10-01 15:21

6강-창 1장 14-19(하늘의 광명)1509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1페이지입니다.

창 1:14-19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네 째 날에는 둘 째 날의 궁창 안에 실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용 만들기입니다. 비어 있는 궁창에 내용을 채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뭘 로 채우는가? 시간으로 채우는 겁니다. 이 세상을 시간으로. 14절에 보면, “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는데 시간으로 이 세상을 가득 채우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시간으로 가득 채운다는 말은 제일 마지막에 만들어진 인간입장에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인간의 힘으로는 차단되어 있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별이 있는 그 궁창 너머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별이라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표현하는 거거든요. 별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달도 그러하고 해도 그러하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제 6일째 만든 인간도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별과 달과 해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창조를 표현해야 되는데 인간이 그 표현하는 것을 만약 잃었다, 놓쳤다 하게 되면 세상은 누구의 표현이 되는가? 인간 본인을 표현하는 장으로 이 세상이 왜곡되게 해석되고 이해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표현이지요.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이 자기의 존재, 내가 왜 있어야 되고, 내가 왜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설명이 인간의 해석이 되고, 행위가 되고, 행동이 되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신을, 하나님을 안다고 우기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방법이 일월성신과 관련되어 있어요. 해와 달과 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그것이 신으로부터 왔다고 표현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별이 원래 표현하는 것, 달이 본래 표현하는 그 표현이 아니고 그 내용은 이미 인간 자신의 잘남, 나는 꼭 살아야 된다는 그것을 설명하고 자기 정당성을 보장하기 위한 신, 성경에서는 우상이라 하지요, 그런 신이고 세상에 대한 해석이고 그것이 쌓인 것을 오늘날 과학이라고 합니다.

모든 과학은 “왜 인간이 필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자기 존재를 정당화 하는 쪽으로 정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물은 왜 흐르는가? 전기사용 하라고 물이 흐른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지요. 감은 왜 열리는가? 인간이 따먹으라고 감이 열렸다.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감 따먹어서 뭐 할 건데? 감 따먹으면 인간이 오래 사니까. 살아서 뭐 할 건데? 그것은 몰라요. 그래서 본래 표현해야 되는 것을 놓쳐버린 겁니다. 놓쳐버린 정도가 아니고 아예 인간위주로 나가다 보니까 하나님의 창조원리가 인간의 존재성으로 말미암아 가려져버린 겁니다.

가려져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창조원리가 인간에게 가려졌다고 낙담하시고 “너희들 때문에 안 되겠다.” 하고 자포자기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 이런 것을 통해서, 인간에게 차단막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시간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위주의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 위주의 시간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하시는데 대자연을 동원시켜가면서 해 나가시는 겁니다. 이걸 풀이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풀이가 이해가 되려면 우리는 먼저 무엇을 알아야 되는가? 세상 모든 대자연이 하나님과 관련되어서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나하고 관련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관련된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이 무슨 취지로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가정에 청소년이 있다면 엄마 아빠는 안방에 계시고 애는 자기 방에 있다가 밖에 나간다 치면 몰래 나가지 않아요. “엄마, 잠간 친구 만나고 올게.” 하고 안방에 있는 엄마나 아빠에게 이야기를 하고 나가지요. 왜 이야기를 하고 나갑니까? 그냥 나가도 될 것을.

청소년기에 본인의 존재는 아직까지는 엄마 아빠에게 예속된 거예요. 청소년이 학교에 갔다. 교무실에 가서 “선생님, 다음 시간에는 뭐 할까요? 자습할까요? 생물 선생님이 오늘 출근 안하셨다는데 체육시간으로 할까요?” 이런 식으로 학생이 선생님에게 묻지요. 그것도 학교에 종속되어 있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자기가 거주하는 이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를 하는 거예요. 부모와 집에 있을 때 이 집은 부모집이지 내 집이 아닌 거예요. 나는 부모에게 종속되어 있는 자식이기에 어디에 가도 걱정 안하도록 하기 위해서 “열 시까지 들어올게요.” 하고 이야기를 하고 나가듯이.

우리는 평소에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나님한테 물어봅니까? “오늘 외출하는데 11시까지는 들어올게요.” 이렇게 합니까? 무시로 기도하라는 것이 그 이야기거든요. 이 세상의 주인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이게 안 되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 개척교회를 하는데 교인이 한 세 명이라 합시다. 그 중에 한 명이 전화를 해서는 “목사님, 다음 주부터 교회 안 나가렵니다.” 그러면 세 명에서 두 명으로 줄었잖아요. 그러면 그 목사는 하나님한테 이렇게 해야 돼요. “세 명을 목회하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에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면서 두 명만 목회하라고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왜냐하면, 이 목회를 비롯해서 모든 세상이 자기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두 명 주신다면 두 명 목회하면 되고, 한 명 남으면 한 명 목회하면 되고, 다 나가면 안 하면 되고. 그러면 되잖아요.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자식이 세 명 있다가 하나 없어지면 두 명만 감당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달란트 비유니 재능이 어떠니 하는 이상한 해석들을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역할이라는 것은 역할 자체가 축복이 아니고 그게 저주가 될 수가 있어요.

주신 역할 속에서 원래의 주인 속에 내가 예속되어 있다는 그것을 발견하면 되는 겁니다. 마치 해와 달과 별이 하나님한테 예속되어 있듯이, 들풀과 채소와 과수원의 과목이 전부 다 하나님께, 그 세 번째 날에 예속되어 있듯이 네 번째 날에는 해와 달이 예속되어 있고, 여섯 번째 날에는 인간들이 예속되어 있는 거예요. 여섯 번째 날에는 땅의 짐승들과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본래의 위치를 잊어버렸어요. 자기주제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몇 번이나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복음을 모르고, 기독교를 모르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기독교가 어떠니, 인문학강좌를 하면서 강사들이 “내가 보기에 기독교가 어떻고 예수가 어떻다.” 하는데 제가 그 사람들한테 근본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어딜 봐서 네가 인간이냐는 말이지요. 어딜 봐서 네가 인간인 거예요?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중에게 묻고 싶은 것이 그거예요. 대체 언제부터 네가 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느냐는 말이지요. 주님한테 예속도 안 되어 있으면 그것이 인간이겠습니까?

그들을 말하기를 ‘살아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 안방에 있는 엄마에게, 부모에게 물어봐야지요. “엄마, 내가 움직이고 있는데 내가 살아 있는 거야? 아니면 죽어 있으면서도 사는 척을 하고 있는 거야?” 이걸 물어봐야 되는데 오늘날 현대인들, 현대인들뿐만 아니라 옛날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어요. 자기 맘대로 살아요. 그 당시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겁니다. 이게 불신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겠어요? 오늘날 신자라고 우기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모든 일에 대해서 물어봐야 되는데, 통보하고, 보고하고, 결재 받고, 이게 없어요. 그래놓고 창세기를 보고, 출애굽기를 보고, 성경을 백독을 하고,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하고, ‘주여!’라고 외치면서 통성기도를 하고. 그런 기도를 하라고 누가 물어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조, 과학을 비롯한 모든 세상 분위기,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필리핀, 중국, 미국, 러시아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는 분위기가 누구에게 물어볼 사람이 아무도 없이 자기 위주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은 어디에 묻혀 있는가?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시간으로, 시간이라는 차단막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꽉 눌러놓았어요. 말이 어렵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리 인간이 상상너머의 세계를 생각해도 나오는 것은 소망이라는 이름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아요. 소망이라는 이름의 속임수. 쉽게 말해서 ‘언젠가는 되겠지. 가다보면 되겠지. 갈 때까지 가 보면 뭐가 나오겠지.’ 이걸 네 자로 ‘개혁주의’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에는 어떤 해답은 아무것도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지금 한국교회 전체가 개혁주의교회에요.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전부 다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성경 해석하는 것을 보면 “나는 존재해야 돼. 나는 무조건 존재해야 마땅해.” 이런 조로, “우리 교회는 안 망해야 돼. 우리 교회는 커야 돼.” 전부 다, “우리 가정은 행복해야 돼.” 이렇게 전부 다 자기 위주로 왜곡되게 해석을 해버리는데 그게 로마서 1장에서 우상숭배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숭배에요.

자기소망이라는 그 속임수를 자기가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과 별, 이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창조원리를 알려주시는데 알려줄 때 시간을 가지고 알려주시는가? 어떻게 알려주시는가? 인간은 자기의 타고난 소망 때문에 시간을 넘어설 수가 없어요.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겁니다. ‘갈 때까지’가 뭐냐? 그게 시간이에요. 천년이고 2천년이고 2만년이고 계속 가보겠다는 거예요. 2십 만년이든 몇 년이든 계속 가보겠다는 거예요. “시간 끝에 뭐가 있겠지, 시간 끝에.”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이 이미 자기위주로 하는 그 해석, 해와 달과 별, 이것을 통해서 자기위주의 계산을 하는 것이거든요. 사주팔자,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그런 것을 따져서 세상을 설명하려 드는 것이 고대의 과학입니다. 그에 비해 현대의 과학은 “그것은 너무 허황되다. 정확하게 측량해야 된다.” 하는데 그 측량한다는 것이 뭐냐? 자신의 시각범위 내에서, 자기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범위 내에서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최종의미를 주는 겁니다.

“화성에서 소금물이 흐르는 걸 발견했다.”고 NASA에서 최근에 발표했어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잘 하면 거기서도 살 수 있겠다.” 그거거든요. 그게 화성을 만든 목적입니까? 기껏 천국 대신 화성을 선택했습니까? 화성에서 늙어죽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뉴욕에서 늙어죽으나 화성 가서 늙어죽으나 흙 되기는 마찬가지인데. 화성에 피신하게 되면 살림살이가 나아지십니까? 과학이라는 것이 갈 때까지 가보자는 그것뿐이에요. 세상의 모든 것이 “나는 무조건 오래 살아야 돼.” 그걸 정당화하는 식으로 일방적으로 해석을 내려버리는 겁니다.

달과 지구의 움직임을 측량해서 뭘 알았는가? 조수간만의 차를 알았어요. 조수간만의 차를 알아서 뭘 하는가? 진도에 가서 ‘모세의 기적’을 구경하겠지요. 그거 구경하려고 진도에 가서 자가용을 해변 가에 주차하겠지요? 과학적으로 조수간만의 차를 알고 있는 사람은 자가용을 해변 가에서 멀찍이 둘 것이고 과학시대에 살면서도 그저 ‘모세의 기적’을 구경하는데 온통 정신 팔려서 차를 해변 가에 두었다가는 자동차 바닷물에 빠져버려요. 자동차를 해변에서 멀찍이 두겠다는데 필요한 과학이에요.

아기를 임신했는데 의사가 “아기가 좀 부실해 보입니다.” 하니까 돈 많이 들여서 태아에 우수한 유전자를 교체해서 아이큐 150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수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거 누구 좋으라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영광? 아니에요. “내 애니까 내 애는 무조건 존재해야 돼.” 그것 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하는 모든 과학이라는 것이 나한테 의미 있는 거예요. 그리고 원래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든 이유가 차단되어 있어서 그걸 모른다니까요? 무식해요. 왜 죽는지도 모르고 그냥 차단되어 있을 뿐이에요. 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자기 좋으라고 살고 있는 시대에.

그러고 난 뒤에 그걸로 만족합니까?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내일은 내일의 희망찬 해가 떠오른다.’ 또는 ‘살다 보면’ 하든지 안 그러면 “♬행진~” 하든지. 그러다가 나이 80넘으면 아무 소리조차 못 내고 죽어버려요. 어디로 가는지도, 어디로 사라지는지도 모른 채로. 기껏 한 평생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놓고 하나님, 하나님, 운운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본래의 해와 달을 어떻게 운용하는가? 시간 속에 하나님이 원래의 창조의 시간을 담습니다. 그게 시간이 아니고 ‘때’(카이로스)라는 거예요. ‘때’를 집어넣어요. “때가 되매” 이 ‘때’를 집어넣는데 대표적인 것이 마태복음 2장 2절에 나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별은 인간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인간이 알아낸 조수간만의 차이, 그것 때문에 달이 있고 별이 있는 게 아니에요. 해와 달과 모든 별은 메시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안방 부모님이 메시아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안 방이에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안방의 어르신네는 사라져버리고 단독주택에 자기혼자 살아요. 이 집은 왜 지었는지, 해는 왜 만들었는지, 달은 왜 뜨는지를 몰라요. 그저 이용해 먹자, 그것뿐이에요. 별은 저기 왜 있는지? 안드로메다는 왜 있고 은하수는 왜 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게 뭐냐? 징조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여기서 해와 달은 그 징조를 나타내거든요.

그 징조가 품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아는 하나님 위주가 아니고, 이것은 십자가에 장차 죽을 목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한 징조로서 앞당겨서 해와 달과 별이 천장 도배지의 무늬처럼 하늘에 박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도배지의 무늬 하나가 땅에서는 우리 인간으로 태어난 거예요. 민수기 24장 17절에 보면,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한 별이 뜬다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별과 관련해서 이 지상에 별을 뽑아내는, 별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사전조치로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애굽에서 분리시켜서 광야로 행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인들이 달려들게 만들었습니다. 달려드는 모압, 달려드는 주변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이 합체가 될 때, 하나로 모일 때 그 때 별의 원래 가치, 원래 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하고자 했던 창조원리가 비로소 밝혀집니다. 민수기 23장에 보면 어떻게 밝혀지는가? 2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스라엘에 한 왕이 등장하는데 그 왕은 장차……, 현재의 광야의 이스라엘 말고 장차 언젠가는 오실 것인데, 신약에서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온 그 때 오시지요. 오시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내에 보이지 않는 왕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 이스라엘 왕이 이스라엘 내에 동행함으로 인한 효과가 뭐냐? 이스라엘에게 주는,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특이한 효과가 있어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의 패역, 죄와 허물을 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겁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자 이스라엘 왕이 장차 오시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에 징조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징조를 민수기에서는 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별이 오게 되면 비로소 네가 희미하게 봤던 그 실체가 징조로만 주어졌던 것이 이제는 실체가 되어서 지상에서 주물럭주물럭 어떤 기능을 하실 것이고, 어떤 일을 하실 것이고,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데 그 활동과 기능을 통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하고 반박하고 달려드는 세력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영적인 의미를 뿜어내고 분출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다서 1장 13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유리하는 별들’ 악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까 별과 해와 달과 이 세상을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도배지, 도배지에 박혀 있는 무늬라고 했습니다. 도배지가 뜯겨나갈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도배하신 원래의 주인이 도배지를 뚫고 이 지상에 등장하게 되면 그동안 해와 달과 별이 그저 프린팅 된 도배지, 얇은 습자지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습자지, 저는 다른 표현으로는 비늘이라는 표현을 하는데요. 해와 달과 별, 이런 것을 비늘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인간도 하나의 물고기의 배면에 붙은 비늘처럼 얇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입니다. 인간이 두께를 가지니까 자기 잘났다고 하는데요, 주님 앞에서는 그냥 하나의 비늘, 또는 인광, 공동묘지에서 뼈들이 반짝거리는 그 인광, 그냥 명멸하는 불빛, 흩날리는 반딧불, 또는 어항에서 분출되고 있는 공기방울 같은 것, 그것이 지상에서 위로 떠오르게 되지요. 온 천하에 떠오르게 돼요. 마치 휴거하듯이 떠오르게 되는 겁니다. 비늘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 없다는 그 뜻이에요. 고기 자체가 중요하지 거기 붙어 있는 비늘 한 조각이 뭐가 중요합니까?

인간은 누구에게 붙어 있을 그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이 대단한 줄로 알고 있어요. 통영에 가서 거북선을 보세요. 거북선 모형을 해 놓았는데 지붕에 뭔가 붙여 놓았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지붕에 붙어 있는 기왓장에 지나지 않아요. 어디에 붙어 있을 때 인간에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 인간을 대신해서 영적싸움을 해 줄 분이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세상 모든 비밀이 공개되는 시점이 바로 그 ‘때’입니다. 창세전부터 감취었던 예정된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영적인 의미를 각자 부여받게 됩니다.

영적인 의미가 오기 전까지는? 물질적 의미밖에 모르지요. 그 물질적 의미란 오히려 인간 자신이라는 신체를 유지하는 변명으로서 잘못되게 해석해 온 거예요. 성경에 나온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시를 줬는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 덩치,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언약을 줬다고 오해를 하게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뽑아내기 위한 거예요. 마술사가 검은 천을 가지고 재주를 부립니다. “자, 여기서 뭐가 나올까요?” 했는데 그 검은 천속에서 비둘기를 쏙 뽑아내듯이 이스라엘이라는 검은 천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최후의 남은 자, 주님의 메시아를 뽑아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을 뿐이에요. 이스라엘 내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그 제사자체가 이스라엘을 절대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제사라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본인들이 제사하는 그 행위가 자기를 구원한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성전 있겠다, 제사장 있겠다, 제사법 있겠다, 그 삼위일체를 다 갖췄으니 우리 민족만 구원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성전 불태워버렸지요? 성전 불타버리고 제사장은 추방당하고 포로 잡혀 갔지요. 제사법도 다 잊어버렸지요.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하나도 없는데.

마치 요즘 예를 들면 ‘나는 교회도 갔다. 집사 직분도 받았다. 헌금도 꼬박꼬박 했다. 이것은 삼위일체도 아니고 4위, 5위, 6위 일체 했으니까 하나님이 날 구원하겠지?’ 그게 바로 자신이 비늘에 지나지 않는 것을 모르고 하는 생각이에요. 자신은 기껏 해와 달과 별, 그런 비늘 하나밖에 안돼요. 우리는 날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표현되어야 될 것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그 따로 있는 것을 놓치고 잊어버렸어요. 그것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유리하는 별, 악마, 그 마귀가 아담에게, 인간에게 엉뚱한 것을 집어넣어 줬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신이 되리라. 나는 너를 이제 신이라 부르리라. 작은 신이라 부르리라.” 마귀가 그걸 심어줬거든요. 심어주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왜 정당하고, 나만은 왜 오래 살아야 되고, 나만은 왜 죽지 않아야 되는가를 자꾸 증명하고 설명하는 식으로 평생을 다 보냅니다. 교회 나오고, 신학도 공부하고, 성경을 봐도 “나는 복 받아야 되고 나만은 천국 가야 돼.” 그거 설명한다고 계속해서 나와요.

맨 날 묻는 것이 “목사님! 제가 예정된 것이 맞습니까? 제가 선택된 것이 맞습니까?” 맨 날 이 질문이지요. <능력자>라는 TV프로그램 보니까 인간이 하는 짓을 그대로 잘 보여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연세대 4학년 학생이 나왔는데 우리나라 치킨이라는 치킨 맛은 다 꿰뚫고 있는 사람이에요. 치킨에 대한 능력자라는 거예요. 어느 정도인가? “저는 치킨을 먹고 나면 그 뼈를 버리지 않습니다. 물에 씻어서 그 남은 뼈들을 맞춰봅니다.” 그래서 제대로 한 마리의 전체부위를 다 튀겨냈는지, 뺀 것이 없는지를 확인한다는 겁니다. 뼈들을 재조립해서 닭 한 마리의 형체를 보는 겁니다. ‘아하, 한 마리 온전하게 보냈구나.’ 뼈를 위치별로 놓아서 한 마리의 온전한 모습을 파악하는 겁니다. 그걸 뼈의 복원이라 합니다. 뼈를 복원해요.

인간이 하는 짓거리가 그 짓거리입니다. 과학이 하는 짓거리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신을 찾아갑니다. 나는 왜 정당하게 존재하고 나는 왜 잘났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정보들을 모아서 조립하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자기 좋으라고. 일어나는 모든 사태를 자기가 더 살아야 되고 자기만큼은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명거리로 다 수집해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소원은 죽는 게 소원이에요. 죽어서 오드리헵번을 만나기 위해서랍니다. 오드리햅번 만나서 무슨 소리 하려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으로 인해서 이 세상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인사하고 싶어서, 그래서 빨리 죽어서 오드리햅번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오드리햅번 인형(피규어)도 얼마나 예쁘게 잘 만들었는지. 하나님께서 TV를 왜 줬겠습니까? 그걸 보면 인간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자기를 위한 소꿉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영적으로 유리하는 별과 동일해요. 마귀의 속성과 똑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 동방박사를 찾아오게 한 그 별을 통해서 어떤 세계로 성도를 인도했는가? 누가복음 2장 13절에 들판에서 양을 치던 자들이 목격한 것이 있습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이 있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이 있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해와 달과 별이 표현하고 있다. 무엇을 표현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표현한다. 창조원리가 뭐냐? 장차 이 시간이 끝나는 날에 이 세상을 만드신 그 주인공 되시는 분이 이 땅에 오신다는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마치 청소년에게 안방의 어르신네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이 세상 어르신네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 도배지는 이제 뜯겨나가야 돼요. 해와 달과 별이 다 뜯겨나가고 때가 되매 그 넓고 황량한 한 밤의 들판에서 쓸쓸하게 양을 치고 있는 그 목자에게는 이 시간이라는 것을 뚫어버리고 장차 마지막 때 주어질 그 때가 그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게 뭐냐? 허다한 천군천사가 찬송하는 소리를 목자는 듣게 돼요. 보게 되고 듣게 됩니다. 끝에 봐야 될 것을 미리 보게 하신 겁니다.

시간의 흐름이 그 목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어요. 이미 하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천사들 하나하나가 다 별이거든요. 지상에 있던 별, 하늘의 그 허다한 별을 위해서 지상에 그렇게 많은 별들이 있었던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그 별들이 바로 인간의 숫자라고 했어요. 그러면 허다한 그 천사의 하는 일은 뭐냐? 베드로전서 4장 7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 마지막 때가 어떤 때인가? 마지막 때에 어떤 징조를 보이는가? 8절에,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아,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우리가 아는 도배지가 뜯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새로운 도배지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어떤 짓을 하더라도 사랑으로서 그 모든 죄를 덮어주는 역할을 위해서 지금도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짐승과 채소와 들풀, 채송화, 올챙이까지, 모든 만물이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주님의 사랑을 표현하는데 열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뭐합니까? 우리는 뭐 합니까?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그런 너 자신의 생존에 급급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대구계명대학교 교훈입니다. 교훈은 그렇게 정해놓고 애들 취직시키기 바쁘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구하라는 말은 새삼스럽게 구하면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니고 이미 우리를 통해서 그 나라와 그 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피동적이기에 우리는 수동적으로 움직이면 돼요. 그 나라 의를 마음껏 표현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나 위주의, 내 생존, 내 잘남 위주를 날마다 꺾어버리는 사태가 주님에 의해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진척되고 있습니다.

해와 달이 하는 일에 우리도 살포시 끼어듭시다. 그리고 함께, 더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하나의 도배지 무늬로서 그냥 우리 자리를 견지하고 있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그리고 우리의 역할이 축복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님의 옷자락에 새겨져 있는 사랑의 판박이가 되게 해주옵소서.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몽실몽실 올라오는 어항속의 공기방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반짝반짝 보여주는 비늘처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얇게 살아서 내 것이 따로 없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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