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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 강의- 의의 소스(드레싱) (히 10 :37-39)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 강의- 의의 소스(드레싱) (히 10 :37-39)

이름 : 주향(IP:222.116.177.93)

의의 소스(드레싱) (히 10 :37-39) 안양 강의

이 근호 목사 2015년 9월11일 본문말씀: 히브리서 10장 37-39

(히10: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사람들의 관심은 사느냐 죽느냐 이게 관심사에요. 햄릿의 대사에 보면 사느냐 죽느냐 이게 관심사인데 성경에서의 관심사는 인간이 아니고 내가 다시 온다는 것이 관심사에요. 내가 왔고 다시 온다는 것이 관심사에요. 그렇다면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뭐냐하면 내 관심사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는 게 아니고 내 관심사를 부셔 버린다듣지 내 관심사를 없애고 치워 버리고 주님의 관심사 속에 풍덩 뛰어 들어야 되요.

이것은 육으론 안되고 성령이 와야 되는 겁니다. 아까도 햄릿 이야기 했듯이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세익스피어가 인간의 근원적인 아무리 연구해도 마지막에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 그것만 달랑 남는 거에요. 제일 밑바닥에 뭐 고상하게 이야기 하고 교회 다니고 해도 주여! 이렇게 착하게 오래 살겠습니까? 항상 그 뒤에 붙는 멘트가 있거든요!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면 우리 가족이 잘 살겠습니까? 항상 그게 붙어 있어요.

그것을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위하여 철저하게 이타주의라고 자기를 위하여 철저하게 이타주의이다. 아낌없이 자기를 바치는데 그 바치는 대상이 뭐냐 결국은 지금보다 더 멋있어지는 나의 세계, 나의 현실을 위해서 나는 모든 것을 거기다 쏟아 붓고 투자하게 하는 것이 인간이다. 왜 그러하냐 그러면 나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래서 인간이 스트레스 받고 고민하는 것도 뭐냐하면 내가 소실되고 없어지고 내가 죽는 것. 이것에 대해 자연 적으로 강한 거부감이 유발되겠지요? 그러면 사람이 누구든지 사람이 살아있는 생물체를 보면 여기서 뭐가 나오냐 하면 냄새가 나게 되어 있어요. 꽃에서도 냄새가 나듯이 냄새가 난다고요. 인간이 있으면 냄새를 풀풀 풍기는데 그게 뭐냐하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다른 말로 하면 “더 살고 싶어요.” 이런 냄새가 나는 거에요.

그럼 옆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냄새가 나겠지요? “나만 영원히 살고 싶어요” 그러면 동일한 이 현실에 서로가 더 살겠다는 거에요. 주님은 “비켜라! 비켜라! 이 현실은 너희를 위한 현실이 아니야! 이것은 나(예수)를 위한 현실이다”라고 들이대시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주님 앞에 굴복해야 됩니까? “아~나 아니구나! 저 사람도 아니구나!‘ 이렇게 주님께 복종하면 문제는 깔끔하게 끝나요.

그런데 “우리도 한 고집하잖아요!” 마귀들렸으니까 마귀가 보통 고집이 아니잖아요. 주님의 현실이라고 하니까 주님의 현실에 따로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에 가게를 업소를 또 차리네! 주님의 세계는 인정해주겠는데 주님의 세계에서 나는 얼마나 대단한 존재입니까? 이걸 또 묻기 시작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현실이 주님의 현실이라 하는 것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이 현실을 제일 먼저 만남 나라,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특이해요. 다른 민족은 인간끼리 살고 그 다음에 신을 초빙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결집하고 역사를 만들면서 기존의 자신에 공동체나 국가나 민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이 동의하는 신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달라요. 하나님이 먼저 있고 나라도 없고 이스라엘 민족도 없을 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시고 그 하나님께서 무엇을 쏘아 대느냐 하면은 바로 언약을 쏘아 대면 특이한 현상으로써 등장한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특이해요. 노아 언약을 쏘아 댔는데 지상에 특이하게 등장한 물체가 있었지요? 그게 뭡니까? 방주잖아요! 방주가 보트처럼 놀이용입니까? 아니면 유람용입니까? 아니면 화물용이에요?

방주는 그야말로 우리가 아는 것처럼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이 땅에서 쓸데없는 물건이 바로 방주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어요. 예수 믿는거요? 제대로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없는 거에요. 친구 다 떨어지지요! 말다툼 했다고 다 떠나가지요. 이 세상에서 내가 기대하고 구상하는 모든 것을 산산 조각 내버립니다. 예수 어디에다 써 먹을거에요? 취직하는데 도움 됩니까? 결혼 하는데 도움이 되겠어요? 아무 쓸모 없어요.

왜냐하면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이 아니고 언약이 아닌 예수라면 그 땐 쓸모 있어요. 왜냐 우리가 만들어 낸 예수이기 때문에, 날조된 예수이기 때문에 아주 쓸모 있어요. 예수님 이거 하면 이거 해주실거죠? 저거하면 저거 해주실거죠? 다 쓸모 있어요. 그러나 그냥 청량 고추처럼 씹다가 갑자기 먹다가 아~ 맵다던지 쓰다던지 예상 밖으로 당황스럽게 만드는 그런 사태는 주님의 주특기입니다.

전혀 기대하거나 예측한 것 없이 돌발적으로 우리에게 딱! 쏘듯이 줘버리죠! 그렇게 언약이 쏘게 되면 예를 들어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전에 설계 안 했지요? 그냥 언약이 오니까 설계 도면까지 같이 왔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방주를 볼 때 어떤 생각을 했겠어요? 이거는 내가 생각 했던 게 아닌데!~ 이건 내 식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닌데!~ 그런 생각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그렇죠? 늘 하겠지요? 이건 내 아이디어가 아니데!~

더 깊이 들어가면 내 인생이, 내가 원하던 인생이 아닌데!~ 그런 생각 들겠지요? 혹시 그런 생각이 들면 행복해 하시기 바랍니다.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뭔가 남들과 달라요. 남들은 예측한 대로 노력하잖아요? 예측에 맞추기 위해서 목표 정하고, 목적 정하고 거기에 내가 맞춰서 행동을 적절하게 노력해서 그 목적에 일치하려고 애쓰잖아요? 이게 언약이에요? 애씀입니까? 노력이고 애씀이죠?

언약은 전혀 예측이 안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난 너무 지루해 왜냐하면 너무 많이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힌두교나 불교 신자들만 있는 곳에 도 닦고 있는데 한 200명 모여서 도 닦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와가지고 “ 야! 우리가 머리 깎고 도 닦는다고 구원 받는 게 아니야!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거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굉장히 신선하지요? “정체를 밝혀라! 네가 언제 서양 선교사를 접촉했느냐?” 막 이러고 추궁도 하겠지요?

그런데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거야! 그러면 식상해! 고만해! 많이 들었다! 고만 해라! 많이 들었다는 식으로 식상한거에요. 이젠 지루한거에요. 권태로운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우리에게 권태롭게 하려고 지루하라고 예수 믿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은 내가 생각하는 ‘믿는다’를 매일같이 내가 예측한 믿음과 믿음의 결실을 생각한다면 늘 예측 못할 믿음의 증거들을 우리의 인생에다가 수 놓듯이.

여자들이 심심할 때 수 놓잖아요? 십자수 놓듯이 우리를 팽팽하게 해 놓고 예수님의 자기 증인으로써 자기 기능으로 수를 놓아요. 바늘이 들어 올 때마다 아프지요? 아프지만 우리가 예수의 모습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증인으로 수 놓아 지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수 놓을 천, 원단만 제공했을 뿐이고 아름답게 수 놓은 분은 주님이지요! 그 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구원받은 사람의 수놓아진 모습은 강도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떤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창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생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간통했고 살인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믿는다고 예수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삭개오 같이, 막달라 마리아 같이, 라합 같이, 다윗 같이, 사도바울 같이)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으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제부터는 그들보다 더 엉뚱한 사람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방인입니다. 그동안 이방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제 나름대로는 없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유대인이나 아니면 유대인과 가까운 곳에서 호응을 보내는 주는 이방인이 있는데 지금 우리는 뭐냐하면 유대나라 하고는 거리가 멀었고 전혀 상관없습니다.

혹시 아는 친척 가운데 유대인이 있습니까? 없지요? 유대인하고 사돈의 팔촌 그런 관계 아니지요? 이스라엘 친구도 없지요? 이렇게 이스라엘과 관계없는 이방인이 구원된다는 것은 둘 중 하나에요. 그 중 하나는 구라이던지 하나는 진짜이던지 둘 중 하나에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진짜냐 가짜냐 그게 문제입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조건이 있어냐 되요. 그게 뭐냐하면 언약과 매치된 이방인이어야 된다는 조건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안돼요. 예를 들어서 모세 율법이라든지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은 안돼요. 쉽게 말해서 “저! 이방인인데 십계명 지키겠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안돼요! 그거 안됩니다. “저 이방인인데 방주 만들겠습니다” 안돼요! 구약의 언약의 대상은 이스라엘 입니다. 나훔이라는 선지서가 있어요. 요나, 미가 다음에 나훔이거든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훔이라는 책은 니느웨의 멸망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요나, 미가, 나훔이잖아요, 요나에서 누가 회개 하지요? 니느웨 성이 회개 하지요? 그런데 그 다음 다음에 누가 멸망한다고요? 그 니느웨가 멸망한다고요. 이건 뭐냐하면 임시, 비 정규직이에요. 계약직이었어요. 그러면 이방인을 구원한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구약은 이방인을 경유해서 결국 누구 구원으로 마감되냐 하면 이스라엘 구원으로 마감되요.

이방인조차 이스라엘을 위한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을 위한 언약은 구약엔 없어요. 그러면 이방인은 언제 구원 받습니까? 이스라엘 본 자손이 “에잇! 난 이딴 거 안 믿어! ”라고 해서 티오가 생겨요. 빈자리가 생기면 그때 충원하는 구조 조정이 일어나서 빠질 건 빠지고 탈락될 건 탈락될 때 그렇게 이스라엘 가운데서 빠져 버리면 그걸 영어로 (remnant)라고 하고 남은 자에요.

다 남은 자가 아니고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 가운데 남은 자와 남은 자가 아님은 어떻게 구분 할까요? 그건 로마서 9장에 보면 나와요. 남은 자중에 탈락한 사람은 뭐냐? 행함으로 구원 받겠다 하는 사람은 다 탈락이에요. 그런데 은혜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어요. 유대인 가운데 그 사람만 남은 자에요. 그게 엘리야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이여! 나만 남았나이다”

그건 뭐냐하면 원래는 이스라엘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남은 자가 되야 되는데 워낙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겨서 사사기 이전은 누구와의 전쟁이냐하면 이방 나라와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다면 사사기 때는 누구와의 전쟁이냐하면 이스라엘 내부의 자기네끼리 싸워서 12지파중에서 11지파로 1지파가 날아가 버리는 것으로 끝나 버리잖아요. 내부 전쟁이잖아요.

정리하자면 사사기 이전 여호수아에서는 언약이 있는 쪽과 언약이 없는 쪽이 싸우는데 언약이 있는 쪽이 싸움을 잘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있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중간에 개입하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새롭게 알아져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다? 이건 한 두 번 해서 이기겠어요. 두 세판 정도 해야 되는데 이것은 한 번에 끝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아마 골리앗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줬더라면 이마를 단단히 무장하고 나왔을 거에요. 그 땐 다윗이 못 이겼을지도 모르죠! 삼 세판이다고 다시 하자고 했을거에요. 하늘나라에 무슨 삼세판이 있습니까? 패자 부할 전 같은 건 없어요. 한번 승리케 된 것으로 구원 받습니다. 승리한 것으로 자기 인생 끝났어요. 주께서 친히 손대시는 인생. 왜냐하면 내가 주도가 아니고 언약이 주도하기 때문에,

그럼 언약이 주도하면 내겐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언약이 주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선 나를보고 승리케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보고 승리케 해주세요. 이것이 구약에서 계속해서 보여주는 주님의 기능이었습니다. 강의 다시 해봅시다. 노아 방주가 특이하지요? 노아 방주 이후에 특이한 것이 뭐냐하면 언약 위주로 사람 안보고 언약이 있는 쪽이 승리하는 게 방주 만큼이나 특이 현상이 되는 겁니다.

방앗간 주인인 기드온이 뭘 할 줄 알겠습니까? 언약이 있는 쪽이 승리케 했을 때에 그러면 “목사님 참 쉽네요? 언약이 있습니다! 하면 되잖아요?” 그런 말을 안 믿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언약을 주신 분이 언약이 있고 없고를 먼저 알기 때문에 “언약 믿습니다”라는 말을 해도 그건 빈 말이에요. 내가 예수 믿습니다!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믿고 안 믿고를 누가 아시기 때문에? 주께서 다 아시잖아요!

시편에 보면 그런 말씀 나온다고요.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했거든요 (시 139:2) 나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잖아요. 개인, 개인에게 일어났던 일이 있잖아요. 심판관이 다 있어요. 권투 할 때 심판과 야구나 축구경기 할 때도 심판관이 다 있다구요. 주께서 다 아세요. 아는 대로, 고백하며 살면 됩니다. 그래서 늘 하는 말이 막 사세요! 막 사시란 말이에요. 누구 의지하고? 심판관 의지하고 보시는 분 의지하고,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7) 바다 끝에 가도 거기 계시고 자살하려고 산 속에 가지 말고 여기서 자살해! 산속에 가서 자살하나 여기서 자살하나 주께서 다 아시고 마포대교에 가서 자살해도 다 알아요. 죽으려고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수면제 구할 때도 주님께서 옆에서 서 계시며 “얼마 입니까?”할 때도 보고 있다니까요

사람은 못 죽어요. 무슨 자살을 해요! 죽어야 자살도 하지! 안 죽는데~ 오늘 강의 핵심이 그것까지 나올꺼에요. 그건 조금 있다가 이야기 할거지만 주님의 안목은 우리가 쓰는 개념 있잖아요? 그 개면하고 달라요! 왜? 언약을 경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언약을 경유하지 전에는 이방인이라니까요! 다시 할께요. 이방인은 뭐냐 이방인 보고 이방인이라고 하면 기분 나빠 합니다.

여기서 이방인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이방인 아닌 족속, 민족을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라고 하냐 하면 “네가 뭔데”이렇게 나오거든요? 이방인 아닌 쪽은 뭐라고 하게 되냐 하면 “우리는 언약 있다!” 우리 집엔 언약 있다. 우리 집에 정수기는 얼음 나온다. 우리는 언약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러면 이방인들이 피식 웃고 그러지요. 우리 집엔 칼 있다, 우리 집에 무기 있다, 우리 집에 활 있다, 우리 집에 군사 있다고 해야지 그러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는 말이 너희 이방인들은 언약이 없으니까 믿는 구석이 뭐냐하면 칼이 몇 정이냐 말이 얼마나 있느냐? 군사가 몇 명이냐? 기껏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믿어요. 우리 집 재산 많다, 우리 교회는 교인 많다, 우리 교회는 헌금 많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정통적인 축복된 교회 맞잖아? 줄 창 이런 것만 쥐고 있다니까요? 나는 청화대에 아는 사람 있어! 그게 삶입니까? 그게 노아 방주 안의 삶입니까? 다른 말로 그게 언약 안의 삶입니까?

시편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너는 활과 병거를 의지하지 말고 사람 수에 의지하지 말고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는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께선 이것만 구하기 때문에 그렀습니다. 빨간 색으로 쓸테니 잊지 마세요! 딱 한자에요. ‘의’입니다. 너가 재산이 얼마나 있느냐를 묻는 게 아니고 "너! 내 앞에서 의인 맞아?" ‘의’만 이야기 하는 거에요. 로마서에 올 때까지 아무도 이것을 언급한 사람이 없었어요.

로마서에 사도 바울에 의해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이 의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었구나! 인간에게서 나온 의가 아니라면 인간의 행함과 인간은 노력은 뭐에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훼손시키는 방해 공작에 해당됩니다. 누가 방해해요? 내가 나의 구원을 매일 같이 방해공작하고 있어요. “하나님이여! 기도 했습니다. 복 주시겠죠? 하나님이여! 이렇게 착한 일 했습니다. 복 안 주기만 해봐라!”

누가 누구를 방해하는 거에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하는 거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의를 행했습니다. 이 의로 거기에 합당한 것을 성과급으로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그렇게 몰랐던 나의 이방성이에요. 나의 이방 화, 그동안 몰랐던 진실한 내 모습이에요. 끝까지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자존심을 포기 할 줄 몰라요.

매슬로우의 욕구설(욕구 5단계)에 보면 첫째가 생존의 욕구, 두 번째가 안전에 대한 욕구, 셋째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넷째가 성취, 존경에 대한 욕구, 다섯째가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네번째인 자존감의 욕구는 자존감이 있다라는 말이 아니고 자존감에 대한 욕구가 있다라는 말이라니까요.

이 자존감은 자존심이 세야 되는 게 아니고 내 자아보다 더 센 욕망이 나로 하여금 “네 자존심을 세워야지! 니 자존심 죽으면 안돼! 그러면 너 답지 않아!”라고 내 속에 있는 다른 목소리, 다른 욕망이 나로 하여금 자존감을 앞장세우며 살도록 부추긴다니까요. 그게 뭐냐 이방인이에요. 이방인이란 말은 혼자서는 이방인이 아니에요. 그럼 이방인이 뭐냐? 우리가 단군의 자손, 배달의 자손인데 문제는 언약을 받은 유일한 민족, 이스라엘 민족과 대비가 되면서 우리는 졸지에 이방인이 되는 거에요.

이방인의 역할이 있어요. 뭐냐하면 언약을 훼방하고 훼손하고 공격하고 저주하는 그런 역할들을 우리는 하게끔 되있어요. 이것이 성경의 신․구약 전체의 언약적 체제에서의 전체내용입니다. 그런데 감히 우리가 이방인 주제에 뭘 요구한다? 구원을 요구하잖아요? 이것은 언약에서 나온 구원을 나에게서 나온 구원이 해코지하고, 공격하고, 핍박하고, 멸시하고, 미워하는 기능으로 나오게 되있어요.

뭘 앞장세워서? 아까 자존감을, 나를 구원 안 해주면 주님 싫어! 날 구원 안하고 날 재끼고 간다면 주님 미워할꺼야! 이런 것, 어느 세월에 해결하고 구원 박겠습니까? 구원된다고 했어요? 안된다고 했어요? 아까, 이방인의 구원은 빈자리가 생겼을 때 유대인에게서 구조 조정이 일어났을 때 그 때 빈자리가 생겼을 때 구원 된다고 분명 했지요? 다시 합시다. 이방인은 자체 구원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리에서 티오가 생겨야 빈자리 채우는 식으로 된다는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에서 빈자리가 안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안 생겨도 네가 생기라고 할 권한이 없다니까요! 애초부터 내놓은 자식인데 애초부터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건 하나님이 원하는 ‘의’가 없다니까요! ‘의’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알아서 주시는 거에요. 노아가 술 끊어서 구원 받았습니까? 노아가 술 끊어서 구원 받았어요? 방주에서 나온 후에 얼마나 술을 먹었든지 자기가 옷 벗은 줄도 모르고 주사도 무슨 하체 벗는 주사가 다 있는지?

얼마나 쳐 먹었는지 자기 옷 벗은 줄도 몰랐어요. 술 끊어서 구원 받은 것 아닙니다. 술 먹으라고 권하는 거 싫어요. 술 먹으면 개 된다고 보는데, 제가 이야기 하는 것은 언약이에요. 언약, 왜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 하느냐? 은혜로 의롭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는 싫어해요. ‘의’만 좋아 하는데 ‘의’가 없잖아요. 의가 없으니까 (하나님)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노아 의로움 뿐만 아니고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죄인을 구원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 자기 의가 된다니까요!

지금 구원을 우리가 신경 쓰면 안된다니까요! 구원은 우리 소관이 아니에요. 주님 소관이라니까요!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한번 봅시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해요? 우리하고 상대해요? 예수님하고 상대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언약이 옛날 노아의 방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언약과 상대해요. 로마서 3장 25절 한번 봅시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역시 하나님이 누구를 상대해요? 예수님을 상대하지요. 예수님이 성취했습니까? 예수님이 성취 했어요? 안 했어요? 성취 했지요? 일 끝났지요? 그럼 우리 구원도 끝난거에요. 내가 내 구원에 손댈게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아요. (26절) 자기도 의로우시고, 하나님이 지금 자기를 위한 일을 했을 뿐이에요. 우리 구원이라고 안헸어요! 그런데 우리가 왜 자꾸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뭔가 사고방식이 글러먹었어요. 잘못된 거에요.

참 성경 특이하지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특이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은 뭐라고 했습니까? 특이하잖아요. 여러분! 성경을 알고, 복음을 아고 특이한 것을 느끼잖아요. 어디가 특이하냐? 친하게 지내던 사람도 원수지간이 되고 동창생도 남처럼 되고 전부 가만있어도 소통이 안 되는, 의미 소통이 안 되는 그런 식으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요.

그게 뭐냐하면 언약이 그냥 언약으로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받게 되면 나를 가지고 능력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내가 예측 못하는 거에요. 나로 인해 관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두두둑! 친구들 떨어져 나가는 소리, 교인들 떨어지는 소리 두두둑! 전부 다 들려요. 주께서 일하는 중입니다. 중국 영화에서도 이런 영화가 없어요. 황당무개 하다고 해야 할까요?

구원 받는 우리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네 구원, 우리 구원 듣지도 않아요. 개 무시 해버리고 주님이 자기 의로움에 작업에 일환으로서 졸지에 우리가 한 것도 없이 의가 되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런 혜택은 이방인에게 주어진 혜택이 아니고 이 혜택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혜택인데 이 이스라엘이 고마운줄도 모르고 이걸 차버린 거에요. 왜? 이스라엘의 구원은 잠정적 구원이기 때문에 그래요. 영원한 구원이 아니고, 어렵다! 어렵다!

구약의 일시적이에요. 왜냐하면 아직까진 언약의 완성단계이기 때문에, 음식이 다 끝난게 아니에요. 요리가 레시피, 양념 아직 다 안 넣었어요. 음식이 마감이 아직 안되었어요. 아이고 머리카락이 있네! 머리카락 빼버리는 거에요. 완성된 레시피를 위해서 중간에 뺄거 빼고 구조조정하고 남은자만 그리스도와 합하도록 한거에요.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 멸망했는데도 불구하고 남은 자만 건지는 그 원칙을 주님이 십자가 지고 그대로 이방인인 우리에게 그대로 덮쳐버린 겁니다.

그래서 쟁반에 누워 있기만 하세요. 소스 뿌려대서 묻히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아까 강의 제목 뭐라한다 했나요. 방해공작이라 하려했는데 바꿔야 겠어요. 소스로 해야 겠어요. 소스가 뭐에요? 가만히 채소 있는데다가 갑자기 소스 뿌리잖아요? 맛있다고 먹고 소스 뿌린 분이 맛있다는데, 주님이 맛있다는데 나의 입 속에 소스 막 들어가고 힘들어도 그건 상관없어요. 주께서 맛있다는데요.

그것이 누가 복음2장에 나옵니다. 목자가 양치고 있을 때 하늘에서 소리 나지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소스 발려진 인간은 기분 좋다는 말이거든요. 내가 기뻐서 소스 부은 인간은 그렇게 맛있다, 제목을 맛있다고 해버릴까? 하여튼 내용이 그거에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 씌운거에요. 무엇으로? 하나님의 의로, 제목을 이걸로 정합시다. 의의 소스.

뒤집어씌운다니까요. 그런데 그것을 누가 방해공작 합니까? 뒤집어 쓴 내가 평생토록 방해 한다고요. 기도 했으니까 응답해 달라! 되지도 않는 “네가 뭔데? 저 나름대로 의롭잖아요?”이렇게 나와요. 정말 우리가 의롭다면 주의 의만 보여 드립시다. 그리고 뭐는 빠진다? 나의 의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쏙쏙 뺍시다! 다 뺍시다! 나는 무가치한 존재이고 씨잘대기 없는 존재이고 아무 쓸모없는 존재인 것을 날마다 우리가 발취해 내세요.

그것을 한마디로 줄여서 뭐라해야 하냐하면 씨잘대기 없는은 너무 길어요. 쓸모 없는도 길어요. 간단하게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에게 의의소스 부어서 주님이 티오(빈자리)에 합류케 해주셔서 천국이라는 재벌 회사에 신입사원으로 취직하게 하신 그 어렵다는 취직을, 회장님 앞에 면류관 갖다 바치도록 신입사원으로 취직시켜 주신 내가 시험을 쳤습니까? 회장님이 기분 업! 되서 너! 너! 너해서 뽑아 자기 의롭게 소스 부어버렸는데

원래 재벌들의 빌딩이 높잖아요? 35층에서 창문 열고 소스 갖다 부어 버리니까 길에 가던 나그네가 소스 얻어맞는 그런 식이 된니다는 말이죠!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지금도 주님이 친히 하세요. 이미 완성했던 것은 반복이 가능 합니다. 반복이라는 말은 완성을 했기에 가능한거에요. 완성을 안하면 아직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나 완성이 되면 이제는 같은 것을 무한 복제하면 되요.

무엇을 무한복제 하느냐? 갈라디아서 3장1절에 십자가만 무한 복제하는 거에요. 갈라디아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 진 것이 15년에서 25년 사이가 되요. 확실한 날짜나 연대는 모르니까 이미 지나간 십자가 사건을 두고 십자가가 앞에 보이잖아! 이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난 십자가 아는데 혹시 나처럼 누가 십자가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는 그런 뜻이란 말이죠?

사도바울은 사람들 꼬시려 온 게 아니에요. 괴수 모집 하려고 온 게 아니고 십자가 모르면 꺼져 주세요. 이런 뜻이잖아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 모르면 꺼져 주세요라고 할 때 사람들이 궁금할께 아닙니까? 십자가 아는 것 하고 모르는 것 하고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말할거란 말이죠. 사도 바울은 율법에 행위를 아직도 내가 지금보다 나아질수 있다는 향상적인 관점, 내가 내 행위로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 받은 게 아니고 여전히 바리세인입니다. 나가주세요. 좋게 말해서 나가주세요이지 사실은 꺼져 주세요.

나는 내 백성이 아니면 건져 줄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예수를 못 믿는 것은 당신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신 거에요. 억지로 믿지 말라고 하는 말 자체 속에는 뭐가 들어가 있습니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개무시, 갑자기 제목 바꾸고 싶지만 이젠 안 바꿀 겁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개무시, 이게 바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했던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개무시 해 버리고 뭐로 바꾸느냐 인간을 인간이라구요? 인간은 없습니다. 물질 밖에 없어요. 죽음은 물질화 합니다. 흙이 되잖아요. 물질로 바꿔요. 물질 됐잖아요? 죽었잖아요? 지금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 치르고 화장터에 가서 가루가 됐잖아요? 자! 가루를 딱 놓읍시다. 쟁반에 가루를 놓고 필름을 돌려 시간을 거꾸로 해보면 화장터에서 가루되기 이전에 장례식장 모습 나오겠지요?

화면을 해 놓고 필름을 거꾸로 돌려 보면 장례식장 나오고 울고불고 난리하는 모습도 보이고 장례식장 나오기 전에 부주 얼마나 들어왔나 돈 세는 것 보이겠고 이것보다 더 앞으로 돌려보면 큰 아들 집 나오고 작은 아들 나오고 딸은 출가외인이다라고 유언하고 하는 게 나오고 더 돌려보면 80세 때쯤 나오고 더 돌리면 70세 때 나오고 다방에 앉아 다방 레지 손 만지고 있는 것 나오고 60세, 50세에는 구조조정 할 때 안 잘리려고 애쓰는 것 나오겠지요? 20세 때는 취직 어떻게 해 볼라고 하는 것 나오겠지요?

인생을 아무리 80, 70을 살아도 결국 뭐가 된다? 필름 돌려 보면 물질이 된다. 물질이 잠시 환등기 안에서 보면 잠시 잠깐 애인 만나고 튕기다 다른 남자 만나고 결혼하고 이런 것도 전부다 하나의 허기이고 잠시 인간인 줄 알고 착각해서 영원히 인간으로 살 줄 알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문제는 이 물질을 가지고 인간의 물질을 언약이 동원되면 주님의 인생에 다시 거꾸로 필름 돌려보면 네가 아브라함이고 네가 노아이고 네가 다윗이고 네가 언약에 속한 야곱이다.

이것을 다 합해서 이름 지어 보면 그리스도인, 이름 짓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렇지요? 다니엘 속에서 장래의 지혜를 발견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베드로 전서에 보면 나오니까 노아에게도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베드로 전서에 보면 선지자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다 들어 있으니 그 그리스도의 영이 바싹 마른 뼈 도는 흙에 와버리면 우리의 과거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그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로 곧 우리의 부분 부분을 보여 주는 거에요.

아하~ 내속에 노아 들어있고 내속에 야곱 들어 있고 내 속에 아벨 들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내가 30대에서 40대 까지는 아벨의 시간이고 50대에서 60대에 사장과 한바탕 하는 것은 엘리야 시대이고 70대에는 다방에 가서 비싼 것 시켜서 쌍화탕 먹고 화장 떡칠한 마담 손 잡았을 때는 누구로 할까? 다윗, 밧세바 범했던 경우이고 이게 이방인은 유대인이 되야 돼요.

언약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하시고 망했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이방인도 자동적으로 망했다는 거에요. 그 망한 쓰레기장을 이제는 나의 남은 인생으로 껴안는 게 중요합니다. 껴안아야 되요. 그리고 바르세인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바로 매일 같이 바리세인 노릇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구원 받은 사람은, 천국가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알면 구원 받아요. “주여! 내가 또 바리새인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혼 증서만 내어 주면 나는 이혼해도 되는 인간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바리세인의 사고방식을 어찌 그리 닮았는지, 지남 낮 설교에 그런 걸 했잖아요. 이혼 증서만 써주면 이혼이 됩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 하니까 제자들이 그야말로 통곡하듯 울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면 장가 안 갈꺼에요“

얼마나 새로 장가가고 싶었으면 “이럴줄 알았으면 장가가지 말고 혼자 살껄” 요새 우리 교회에 혼자 사는 것이 재미 들린 분이 왔어요. 나이 42살인데 “목사님,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네요” 결혼 해본 적이 없어요. 아직도 총각인데 그렇게 편하답니다. 모르겠어요. 좋은 사람을 못 만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기술도 있어요. 우리 교회 그래픽 올리게 되어 있지요? 그분 이십니다. 아직까지 다윗의 죄를 못지었어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쉽지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방인한테는 해당이 안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이방인은 본격적으로 언약이 적용이 됩니다. 구약에 실패한 것, 사사의 이야기, 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삼손이 여자 따라 다닌 것도 다 우리 이야기이고 에스더 같은 경우는 뭡니까? 위기일발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때 아하수에로 왕이 잠 안자고 창고에서 서류 안 봤으면 다 죽었어요.

그런데 잠이 안와서 서류 들춰 보다가 왕에게 잘한 사람은 어떻게 대우해 주면 되는가? 이렇게 해서 모르드개가 살았잖아요. 그처럼 그런 위기가 성도에게 몇 번이나 올지 몰라요. 완전히 죽었다 싶은데 나를 공격하는 쪽에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헤헤 거리면서 좋게 대할 수도 있고 이번 계획 죽어도 안됩니다라고 하다가도 갑자기 계약해 주세요하고 들어 올수도 있는 문제이고

그것은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것도 전부다 주님의 뜻이다 그런 상투적인 말 하지 말고 언약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되게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의를 위해서 우리는 의로운 인간으로 살아야되는 팔자로 우리에게 언약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간단하지만 중요한 질문들을 하지요 “목사님 성도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굉장히 간단한 질문인데 본인에겐 심각한 질문이죠.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돌아서면 또 모르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다니는 하나님의 의를 수집하며 사시면 됩니다. 내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감사하면 되요. 범사에 감사하면 되요.

분명히 행동 개차반이에요. 분명히 내 욕심이고 이익이에요. 내 고집, 자존심, 자존감 이런건 죽을 때까지 포기 안합니다. 분명히 내 자존심과 이익을 위해 했는데 그것을 의로 바꿔 주시는, 바꾸게 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면 되요. “에이씨! 우산도 없는데 비가 오다니” 그렇게 하다가 “이 가을에 비 맞으면 운치도 있고 낭만적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또 감사가 되지요.

히브리서 다시 하번 봅시다. 히브리서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냐하면 우리에겐 죽느냐 사느냐가 관심사라고 했지요? 그런데 히브리서 10장 37-39절에 보면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주님의 관심사는 뭐였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주님에게만 있지 우리의 사느냐 죽느냐의 관심사엔 관심이 없어요.

도사가 도포 휘날리면서 휙! 빨리 지나가게 되면 물리학에서의 모든 운동은 에너지운동이에요. 속도가 빨리 지나가면 여기서 굉음이 나게 되고 그 영향력으로 파도가 치면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빠른 기차나 자동차가 지나가면 내 차가, 작은 차가 막 흔들리잖아요. 주님께서 도포입고 휙! 지나가면 우리는 내 생각 하다가 “뭐지 이거? 왜 갑자기 특이한 현상을 느끼지? 어떤 힘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이미 주님이 활동하는 영역 속에 내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맨이에요. 신약에선 말한 신약적인 이스라엘 사람이에요. 그러면 신약적인 이스라엘 사람에게 언약이 적용 되는데 언약이 어떤 체계이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첨부파일 : 안양강의 히브리10장 37절.hwp (65.5K), Down: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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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0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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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