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7장 29절(가락-실패자)150917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7장 29절(가락-실패자)150917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29절(가락-실패자)150917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28절 끝에 보면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그를 아노니"라고 되어 있지요?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그를 아노라"의 취지가 뭐냐 하면 이것을 아셔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볼게요. "예수님의 오심으로 파급되는 현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그것이 그 이후에 어떤 파급 현상을 낳았느냐 이 말이죠. 그걸 알려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을 때는 어떤 일이 있었겠는가? 그것을 어떻게 비유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지 않았다."고 생각해보자 말이에요.

그때 거기에 형성되어 있는 신학적이고 사상적인 것이 있겠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셨다." 하는 것과 비교를 해보는 겁니다. 그 차이점이 중요해요. 왜 중요하느냐 하면 '내가 과연 구원받은 사람이 맞느냐?' 또는 '내가 과연 천국 가는 사람이 맞느냐?' 할 때에 그냥 '난 천국 가고 싶어!!' 라고 해서 때우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에 가기 싫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가고 싶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를 어떻게 측정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때의 사상을 알아야 돼요.'에이, 그건 아니지...인생 그렇게 살면 안 돼지.'라고 하는 어떤 차이점을 을 느껴줘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든 안 오시든 상관없이 '그들 사고와 내 사고와 똑같네.'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의 투입이 전혀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상을 알아야 돼요.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풍덩 뛰어들고 난 뒤에.. 뛰어드는 것까지도 안 돼요. 뛰어들었다 하면 그야말로 밥그릇에 숟가락 하나 얹어놓은 것밖에 안 되니까.. 뛰어들고 난 뒤에 뭔가 달라지잖아요. 그 국면(시츄에이션)이 달라지는 그것이 나의 달라짐으로 넘쳤느냐를 본인이 한 번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오늘 강의할 것이 딱 나왔지요..첫째는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 세상은 흘러갔겠는가? 그것을 먼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제가 보통 설교할 때에 주님이 안 계시다 했을 때에 나오는 성경해석을 제가 먼저 언급하는 이유가...(바로 그것입니다.)

제가 수요일날 창세기 설교를 했잖아요.. 설교하니까 어떤 분이 이래요. "왜 목사님은 성경대로 안 합니까?" 이렇게 물었어요. 분명히 설교 시간에 그것을 언급했는데 하도 많은 것을 하다보니까 놓쳤는 모양이죠.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부분을 가지고 "성경대로 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측의 기대하는 성경해석이 뭐냐 이 말이에요. 그래서 "무슨 뜻으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라고 물으니까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왜 빼먹느냐는 거죠. 나는 9절, 10절 했지 그것은 13절에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건 따질 필요가 없는데 어째든 간에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가미하지 않는 설교를 왜 하느냐?"하는 투로 이야기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가만히 들어보니까 취지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땅 만들어주시고 살게 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덕분으로 잘 산다. 영광돌리자. 왜 요런 쪽으로 설교를 안 하느냐?'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땅의 예언적 기능을 빼먹었다. 그것도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수요 설교 때 제가 의도적으로 땅과 선지자의 관계가 뭐냐고 제가 물은 겁니다. 땅과 선지자의 관계가. 선지자의 특징이 뭐냐? 욕얻어 먹는 거에요. 누구에게? 땅 위에 사는 사람에게. 그냥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땅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에게 욕 얻어먹는 사람이 선지자에요.

그렇다면 선지자가 어디에 출현하느냐? 땅에 출현하거든요. 왜 출현해야 되는가? 선지자의 계열이 바로 예수님의 계열이에요. 아벨과 사가랴와 그리고 세례요한과 그 다음 계열이 예수님 아닙니까? 특징이 뭐에요? 땅에다가 무엇을 남긴 거에요. 아벨? 땅에다가 피 남겼지요.. 사가랴? 요아스 왕 때 돌에 맞아 피 남겼지요. 세례요한 쟁반에 목 잘려서 피 남겼지요. 예수님 차례지요. 예수님 뭐 합니까? 십자가 완성된 피 남겼지요.

그러면 땅의 의미는 뭡니까? 피를 받아내는 의미가 땅의 예언적 기능이에요. 이것을 놓치면 안 돼요.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뭘 붙이느냐?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를 뒤에 붙이는 거에요. 무엇을 보고? 땅이 있음에? 아니. 피흘림에 좋았더라. "땅이 예언적 기능을 제대로 발휘함에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겁니다.

땅은 요한계시록에 전쟁터에요. 그래서 수요일 날 초반에 어려운 말을 했죠. 땅이 뭐냐? 세상 끝에서.. 한계.. 다른 말로 경계선. 없어도 되는데 의도적으로 생긴 공간이 땅, 따라서 땅의 의미를 알려면 바다에서 다시 기어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홍해바다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바다에서 나온 백성이라." 이것은 바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물에서 뭍이 된 창조 행위가 언약 안에서 재현되고 재생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겁니다.

땅의 의미, 새롭게 정리해야 돼요. 뭐, 땅에 산다고 내 땅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부동산 중개업에서 하는 것이고.. 내 땅이 아니에요. 죽어야 될 땅, 주께서 죽으신 땅이고 우리도 죽어야 될 땅입니다. 그 땅의 원주인이 와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땅은 이제는 뒤집기가 되는 겁니다. 뒤집기.

뒤집기는 제가 그저께 부산 강의에서 했잖아요.. 뒤집기의 의미(왜 뒤집기라고 하는지)를 잠깐 설명하고 그 다음에 진도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뒤집기라는 말을 그냥 "반대" 또는 "다름", A가 있고 B가 있다면 그저 "너와 나는 서로 다르다."가 되어버리면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상대주의"라고 해요.

"저, 형님 교회 나오세요." 하면 "그래, 니 하나님은 니가 믿어라. 내 하나님은 내가 믿을게." 끝. 이것은 서로 "다름"이죠? 현대민주주의에서는 표가 다 한 표이기 때문에 "다름"은 뭐냐하면은 그냥 "차이"일 뿐이에요. 그래서 "다름"은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흔히 요새 유행하는 말로 "소통"이라고 하죠. 인문학 강의에서 많이 하는 거거든요.

그냥 "다름"은 "차별"보다도 "차이"를 생각하라.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해요. 차별하지 말고(갑, 을 관계하지 말고) 평등관계에서 각자 개성을 존중하라.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게 엉터리 같은 소리입니다. 사람은 평등하면 지루해서 못 살아요. 권태로와요.

사람이 제일 힘든 것이, 밥 못 먹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고 심심한 게 제일 힘들어요. 그래서 노인네가 오래 사는 것은 복역중입니다. 감옥소에서.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할 일이 없으면 빨리 죽는 게 최고라고요. 심심하면은 사람이 미쳐버려요. 너무 심심하면 자살해 버리잖아요.

사람들은 서로 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서로 존중하라는 거에요. 사실은 이것은 꼼수입니다. 서로 존중해놓고 덮치려고 하는... '내가 니보다 낫다.' 자기 애가 학교 시험치는데 "너, 오는 받아쓰기 몇 점 받았어?" "100점 맞았어." "참 잘 했어." 그런데 "평균이 몇 점인데..?" "백 점이야." 이러면 이제 엄마가 화 내기 시작하는 거에요.

다 백점이에요. 다 백점. 원래 받아쓰기 할 때는 다 백점이라. 그러면 갑자기 화가 막 나요. 애한테 속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애는 속인 게 없는데 갑자기 엄마가 지 욕심에 속은 거에요. "다 백점이라고? 오늘 밥 없어." "너만 백점이어야지, 너만." 온리 유~ 너만 백점이어야지.. 무슨 평등..? 짜증나서 우리는 평등을 용납 못 해요. 반드시 한 발자국 더 앞서 가야 사는 맛이 나는 겁니다.

"똑.같.이. .." 이건 미치는 겁니다. 반대의 다름이라는 것은 각자의 존재를 존중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하고 반대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에요. 뒤집기에요. 그런데 뒤집기가 왜 어려우냐 하면은 다름이나 반대는 니가 있는 것 말고 따로 건전한 것을 만드는 것이고 이게 차이가 나잖아요?

"너는 이런 인생이야?" "아니야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인생이야." 따로 모델을 딱 세워주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포부"가 생깁니다. "그렇지, 나 예수 믿고 난 뒤에 이제는 술 끊고 담배 끊고 드디어 이제는 목표가 생겼다. 전에 예수 모를 때는 내 뜻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에베소서 5장에 나온 것처럼 빛의 형상(거룩과 의-하나님의 공의적 속성)을 본받으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공의적 속성을 마음껏 발휘해서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이를 때까지 몸이 자라듯이 자라나자. 이렇게 하죠.

베드로후서에 보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나오잖아요. 그런 게 쫙 나오니까 목표가 확 생기잖아요. 그것은 사실은 죄를 더 짓기 위한 하나의 율법적 기능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잘 모르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하루하루가 이걸 버리고 이렇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걸 가지고 옛날부터 청교도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순례자의 길(pilgrim)"이라고 해요.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천로역정'이죠.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가야죠. 계속 한 단계, 한 단계 걸어가다 보면...

그 단계 나누는 것이 꼭 그것 같아요. 얼른 보니까 삽화가 어떻게 보면 놀이동산 같고, 어떻게 보면 게임하는 것 있잖아요. 윷놀이 게임할 때 여기는 폭탄, 여기는 함정, 그것 뛰어 넘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 온갖 시련을 만나면 그걸 이겨내는 것, 불교입니다. 이게 불교거든요.

이 순례자의 길은 이미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말이에요. 점이 있고 또 점이 있는데 우리는 이 점을 뭐라고 보느냐 말이에요? 열정이라고 부른다 말이에요. 커피 선전에 나오잖아요. 이 커피 선전 못 봤어요? 티.오.피. 선전할 때 이쪽 점이 있고 목표점이 있으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요, 이것이 바로 블로헤의 '희망의 철학'이거든요. 희망의 철학이에요.

인간은 멈추지를 않는다. 왜? 항상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변증적으로 더 나아가는 것을 소망하는 그 소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이유를 제시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의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달성되면 안 돼요. 달성되게 되면 섭섭해서 못 살아요. 사람이 희망이 달성되는 순간, 자기는 시체와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이유가 뭔데요? 계속 희망이 남아있어야 희망이에요. 그래서 계속 희망을 만들어내요. 조작해낸다니까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했던 이유가 예수님이 메시야로 왔기 때문에 싫어하는 거에요. 그게 토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잖아요. 희망이 있어야지 교단이 되고, 러시아 정교에 돈이 들어와요. 그런데 메시야가 안 돼요. 메시야가 올 때는 허락 받고 와야 돼요. 희망을 만들어 주고 만들어 준 그 커미션을 교회가 먹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는 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어떤 궁지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교인들에게 긍정적 마인드, 적극적 사고방식을 상품으로 제시하고 그걸 돈으로 받아 챙기면 되는 겁니다. 목회 쉬워요. 딱 조폭 표어라니까요. "하면 된다."에요. 다른 것이 필요없어요. "하면 된다." 에요. 아이캔 두잇.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것뿐이고 그것만 있으면 돼요.

더 클래식이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 있잖아요. "마법의 성" 딱 그거라니까. 산 넘고 물 넘고 바다 건너서.. 서세원이 맨날 하던 맨트 있잖아요. 성경을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보면서 현재 자기 꼬라지를 알아요. '아아, 내가 죄인이구나.' 죄인인 순간 뭘 찾느냐 하면 '그러면 내가 앞으로 되어야 될 나의 이상형은 뭘까?'를 드디어 사도 바울 서신을 들추면서 찾는 거에요.

그러면 스스로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스스로에게 차이를 남기고, 차이를 띄어놓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못 났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이미지를 내가 목표로 사는 이것만큼은 좀 대견하게 봐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못 난 것 아는데 이 못난 것을 아는 것도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에 해당되는 거에요. 맞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부인하라 했으니까 부인하는데 그러니까 이 부인하는 것도 목적이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을 향하여 지금 베스트 두 잇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 가상한 노력을 주께서는 좀 알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것을 보시고 너무 성급하게 징계나 가계에 저주를 흘려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뭐냐면 "속에 들어온 게 더럽다."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미처 몰랐던 니 속에 있는 더러움이 그런 희망(호프)과 더불어서 실타래 뽑듯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거에요. 이 죄가 어디까지 나오는지를 우리도 몰라요. 하나의 희망이 끝나면 또 새로운 목표(단계)를 정해놓고 또 올라가고 올라가고 하는 겁니다.

그게 내신성적 방법이에요. 1등급, 2등급,.... 그래서 내신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마일리지가 많이 쌓이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도 천국의 중심부에 있고 그냥 아무 내신성적 없이 강도같이 구원 받은 사람은 저 주변, 변두리에 천국 가장자리에 쳐박혀 있듯이.. 그런데 변두리에 가면 실내기온이 낮습니까? 춥습니까? 얼마나 추웠으면 팬티 바람으로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뒤집기에요. 차이가 아니고 뒤집기입니다. 뒤집기라고 하는 것은 새로운 이상적인 목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내면을 우리의 외부로 띄우고 우리의 외부를 내부로 집어넣는 방법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께서 몸을 입을 때, 그 몸이 아담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성육신 하실 때에 그 몸이 새로운 몸이 아니고 아담의 몸을 입었거든요. 그 몸을 성경에 보면 무슨 몸이라고 하냐면 여성의 몸이에요. 무슨 몸입니까? 마리아의 몸이에요. 마리아는 누구의 딸이죠? 바로 아담의 자손이잖아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인간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이 되는 겁니까?

2000년 동안, 지금 2000년 지났잖아요.. 2000년 동안 교회사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냐 인간이냐,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를 놓고 싸워요. 내린 결론은 "둘 다다." 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한 분 안에 둘 들어있다."는 말도 안 된다. 이것이 결론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죠? 여러분이 3위일체를 잘 모르니까 모르겠죠? "둘 다." 하면 이중속성이 되고, "하나"라고 하면 단성론이 되기 때문에 하나도 둘도 아니에요. 이것은 사군자인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그것하고 비슷하죠?

예수님은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지만 한 분 속에 어떻게 섞여있느냐에 대해서 "둘이 들어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하나"라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뭐꼬가 뭐꼬? (뭔데?) 물으면 삼위일체는 신비롭기 때문에 말 안 하기 그러면 말 안 하면 정통 되고 말 떼면 이단 되고... 참 편리하지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어디에도 인간이라고 한 적 없고 성경에서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라고 예수님을 한 적도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궁금하지요? 뒤집기를 위해서는 할 수 없이 언약적인 용어가 나오지요. 그게 뭐냐하면 인자(人子)입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인자를 집어넣고 예수님을 이해한 사람을 저는 못 봤습니다. 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아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눈에 띈 학자 중에서는 한 명도 없습니다.

이유가 있어요. 뭐냐하면 신학은 반드시 교회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납득이 되는 용어를 써야 된다는 그러한 요구때문에 인자라는 말을 쓰지를 않는 거에요. 왜? 인자라는 말은 기존의 세상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 인자라는 말을 쓰면 교인들이 못 알아듣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이 알아듣는 말은 뭡니까? "나 인간입니다."에서부터 출발하지요? 나 인간인데 이 생로병사, 고해와 같은 세상을 훌쩍 벗어나서 주께서 준비하신 맨션 아파트 같은 좋은 나라 있겠지요? 나 인간인데 나 그쪽에 가고 싶어요. 그것때문에 오잖아요. 나 인간인데 고생 너무 심하게 했는데 팔자가 더러워서 고생했는데 마지막 희망이 있다면 그래도 죽어서는 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유일한 우주센터니까) 저쪽에 갈 수 있게 해달라는 거에요.

그러면 교회에서 그것에 부응하지 않으면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요. 돈도 안 들어오고 헌금도 안 내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당신은 인간이라도 우리 예수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인간을 바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마중하기 위해서 하나님 본인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만 믿으세요. 사람으로 들어왔다가(인풋)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천사처럼 아웃풋되니까 예수만 믿으세요.

이것이 2000년 동안 교회가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내가 그것을 통과할 때 필요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예.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천주교에서는 7가지가 필요하고 개신교에서는 2가지만 있으면 돼요. 천주교는 놔두고 우선 일단은 등록해야 되고요, (등록해야 심방을 가든 뭐든 하지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세례받아야 되고 그 다음에 성만찬만 있으면 된다구요.

그런데 그 두 가지를 하려면 그걸 집례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겠지요? 집례하는 사람이 사찰 집사는 안 돼요. 그 사람은 거지, 동냥 온 사람들 오면 내보내는 그 일만 하면 돼요. 밤에 그저 지키면 되고. 그럼 누가 해야 되는가? 집사? 안 돼요. 그럼 누가 해야 되는가? 전도사? 안 됩니다. 안수를 못 받았으니까 축복권이 없어요. 그럼 누가 해야 되는가? 임시목사? 임시목사는 되겠다. 목사가 해야 돼요.

그럼 이야기를 다 해봅시다. 목사라는 존재는 인간이 천국 가는 데에 필수적인 위치에 있지요? 따라서 교인들은 목사의 인품이나 자질에 대해서 일체 입을 다물어야 돼요. 왜냐하면 인품이 문제가 아니고 목사라는 그 자리가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신화가 뭐냐 하면은 목사가 바람을 피워도 돈을 밝히고 어떤 화냥질을 해도 목사를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건드려야지 인간이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그러한 '묵계'가 교회에 있는 겁니다.

그것의 이유는 목사 편들기를 하는 게 아니고 이 두 가지(세례와 성만찬)가 빠지면은 구원을 못 받거든요. 목사가 문제 있다고 사찰 집사가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특히 사찰 집사 부인이 할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 사람은 걸레가지고 청소나 하면 돼요. 그러니까 어쨋든 간에 목사가 개판이라도 무조건 전도사가 목회하면 안 돼요. 왜? 이 두 가지가 안 되니까...

적어도 합법, 하나님의 권위, 주의 종이 되려면 무조건 돈 없더라도 목사가 안수를 받아야 돼요. 그래서 목사는 인품이 아니고 위치 이것만 해도 라이센스 값을 하고 있는 거에요. 어디서 잘못 되었냐? 이게 바로 아까 처음에 얘기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방금 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고 난 후에도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요. 전혀 달라진 게 없지요. 왜냐? 눈에 보이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인간을 구원하는 법을 제시해주니까... 예수님이 설 자리가 없네. 예수님이 괜히 왔어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등을 (멋적게) 긁으시면서 "아, 저 나 필요한 사람 없어요?" "없어요." "아, 괜히 왔네." 괜히 왔어요. 왜냐하면 교회에 감독이 있고 장로가 있고 당회장 목사가 있는데 예수가 왜 필요해요? 전혀 필요 없어요. 예수님은 그냥 브랜드만 하시면 돼요. "처갓집 통닭" 브랜드만 있으면 되지, 닭 굽는 것은 처갓집 통닭집 그 주인이 한다니까요.

"주님이여 가만히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다 보내줄 테니까요. 등록해가지고 심방카드 다 있잖아요. (관리)해가지고 (보내)줄 테니까 그냥 우리한테 맡기시라니까요." 그렇게 나오는 거에요.

자, 여기 오늘 본문에 보니까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냐하면 일단 모든 인간은 누구를 모른다? 진짜 하나님을 모른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런데 모른다는 분이 사람이 되셨잖아요. 그러면 우리가 진짜 성령 받아서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뭘 해야 돼요? '아하, 내가 그동안 진짜 하나님을 몰랐구나...'가 될 때, 예수님의 영이 임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은 예수님 없이도, 예수님 오시지 않은 유대 사회에서도 자기들끼리 여호와 알아요, 몰라요? 뭐, 도사지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구약성경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릴 때부터 다 외우니까. 시편 어릴 때부터 교육해요.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그것은 어릴 때, 3, 4살부터 다 외워요. 무조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면.

그 성경이 그냥 성경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성경들이에요. 심지어 손목아지에다가 천가지고 걸고 목에다가 땋죠.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랍비들 머리 파마같이 해가지고 단발머리로 다니는 사람들 모자 푹 덮어쓰고 군대도 안 가는 열심당원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 온 처처에 출렁출렁 신명기 말씀들을 팔뚝에다가 "쉐마, 쉐마." 해가지고 "전부다 순종할지어다." 지금도 다 하고 있다는 까요. 그들이 .

그들의 주장이 뭡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 할 것 요한복음 7장 28절에 뭡니까?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간단하죠. 모르는 우리가 주님을 알도록 하려면 주님에게 다가가면 되겠네요.. 그런데 이것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 몸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누구한체 찾아가게 되면 우리한테 속해있는 우리의 기존의(현) 세상이 같이 그 덩어리 안에서 따라서 간다니까요.

완전히 우리가 풍선 안에 들어있거든요. 기존 세계에 형성된 이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옛세상이라고 하는데 옛세상을 온 몸에 품고 가요. 그 품은 개념 중에 하나가 뭐다.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주님에게는 인간은 없습니다. 오직 인간(아담)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 인간을 뭘로 바꾸냐 하면 "인간이냐?"-->"죄인"입니다. 인간은 없어요. "죄인"이라고 하면 잘 안 느껴지죠? 그냥 쉬운 말로 합시다. "죄수"입니다. 다니엘 3장에 나오는 말로 "갇혀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죄라는 전기 울타리 안에 갇혀있어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율법이 주어진 것은 가두어진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러면 갇힌 채로 그냥 고스톱이나 치고 살지 뭐.." 아니에요. 저주가 퍼붓는 채로 가두어져 있어요. 부처가 그렇게 고민했던 생로병사는 죄값입니다. 부처는 그걸 모르죠. 부처는 그걸 몰랐어요. 왜 늙는지... 왜 태어나는지....

부처에게 제일 고민은 늙는 것이 아닙니다. 늙을 것을(자리에) 왜 태어나는지... 이게 고민인 거에요. 다시 말해서 부처에게 끝까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었어요. 늙어죽을 것을 왜 태어나는가? 흔히 부부싸움 할 때에 "이럴 줄 알았으면 왜 만났니.." 하잖아요? 자식 때릴 때에 뭐라고 합니까? 안 아픈 데 골라 때리면서 "아이고, 니가 왜 태어났니...?" 그걸 자식한테 물으면 압니까? 태어나게 해놓고... 피동적인 존재에게 그걸 왜 묻습니까?

왜 태어난 줄 모르죠? 부처가 내린 결론이기도 하고 후대 부처의 제자들이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왜 태어났냐 하면 그동안 임의로 연결되어서 태어났다. 이걸 "인연설(연기설)"이라고 합니다. 그냥 무작위로 마주쳐서 관계해서 했기 때문에 죽음은 그 본드(약효)가 다 떨어져서 다시 흩어지는 거에요.

너무 허무하잖아요. 그래서 뒤에다가 후대에 불교에 4단계 교리를 집어넣었어요. 흩어지고 하면서 좋은 본드하게 되면 나중에 사람 된다. 이래가지고 불교도 돈이 나오도록 만들었어요. 그러면 나중에 사람이 되려면 지금 돈을 더 바쳐야지(도를 닦아야지)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쥐로 태어났던 관계가 흩어지게 되고 또 영겁의 세월이 지나게 되면 소로 연결하다가 죽고 난 다음에는 다시 헤어져요.

뿔뿔이 헤어졌다가 인간으로 다시 만나려면 업보(착한 일을 많이 해야)를 쌓아야 인간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된 다음에 또 흩어진다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흩어지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다시 업보가 착한 일이기 때문에 인연이 안 되고 이제는 영원히 흩어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그런 모든 순환구조 노선에서 이제는 이탈한다는 겁니다.

마치 초음속 비행기 타고 가다가 사고 나면 낙하산 펴고 혼자 떨어지고 비행기는 추락해서 불 나잖아요. 혼자 튀어나왔다. 그게 "해탈"이죠. 지금 해탈 받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 해탈하면 뭐 합니까? 그건 모르겠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희망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이 불교가 가나안 종교거든요. 바알 종교에요. 모든 종교는 바알 종교입니다. 가나안 종교에요. 가나안 이전에 심지어 이집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러운 세상 빨리 지나고 좋은 나라 가자." 이게 부활 종교에요. 이시스, 오시리스 부활 종교. 미래가 왜 만들어졌습니까? 부활할 때 잘 해야 거기에 담긴다구요. 왜 새들이 와서 영혼을 데려가는데요..? 독수리가 왜 지키고 있는데.? 중국신화에 배 젓는 것이 왜 나오고, 로마, 러시아 신화에 왜 레떼의 강(기억의 강)이 있습니까? 모든 종교, 폴리네시아부터 지금의 남태평양, 남미의 모든 종교가 부활의 종교에요. 이게 바알 종교라니까요.

바알 종교가 뭔지 알지요?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사방이 얼어서 죽었는데 봄이 되면 싹이 나오잖아요. 그 땅의 힘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이 대지의 힘, 펄벅의 대지의 힘, 박경리의 토지의 힘입니다. 그게. 이 민족이 일본한테 압제당할 때 왜 토지의 힘을 얻어야 했습니까? 바알 종교거든요. 바알 종교의 촛점은 "나는 존재한다."는 거에요. "내가 인간으로 존재한다."

그 인간이 뭐냐? 주께서는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흙"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게 "아담"이라는 겁니다. 그걸 바짝 마른 뼈다귀라고 하고..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만 찾아요. 우리가 지은(행동한) 죄가 아니고, 행동하려고 준비되어 있는 잠재된 죄를 끄집어 냅니다.

그래서 나쁜 일은 우리맘대로 못하고 주께서 나쁜 일을 유발시켜야 나쁜 일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요. 내가 이렇게 나빴어요? 나쁜 일을 주께서 이렇게 유발시켜요. 주위에서 살살 약을 올립니다. 성질이 좋아도 약올리면 화나게 되어 있어요. 일을 끄집어 내는 거에요.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깔끔합니다. 이렇게 정리하세요. "실패는 과거의 순간이 아니라 미래의 순간이다." 이 말은 뭐냐하면 "즐겁게 실패하러 갑시다." 이 말이에요. "즐겁게 실패합시다." 실패가 목표가 될 때 그것은 모든 성공신화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예속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이제는 평생 살아가면서 내 몸에 내가 모르는 실패가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에요. 이게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성공하려고 하면 스트레스 받잖아요? 그런데 실패하겠다는 데 스트레스 받습니까? '주님 오늘도 하루 세 끼 먹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두 끼 먹든지 한 끼 먹든지 이북에서 전쟁해 쳐내려오르고 하는데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유, 언제 한 끼 먹노...'

이걸 기다리고 이것이 목표가 된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얼마나 고마워하겠습니까... 애가 수학 빵점이다. "엄마, 빵점 맞아서 죄송해요." "니는 그게 실패로 보이냐? 수학, 영어, 국어 다 빵점 맞는 순간이 있을거야. 좀 더 기다려봐. 나는 그때를 기다려." 이럴 경우에 있어서 애는 놀래버려요. "엄마 미쳤다."고 합니다. "엄마 다른 사람 같애. 이유가 뭔데?" "성육신이야."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시고 난 뒤에 뭐가 달라진 게 있는데 새로운 모델이 등장하는 게 아니고, 현재 있는 나를 제대로 뒤집어 보니까 그게 진짜 내 모습인데 그동안 위선자로 가면을 쓰고 살은 거에요. 화투를 쳐야 강의가 되는데 화투는 희망이 뭐냐 하면 화투를 뒤집는 거잖아요? 똑같이 보이는 화투를 뒤집을 때 5월 난초가 나오든지 8월 공단이 나오든지 10월 단풍이 나오든지 뭐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뭐냐면 나와야 똥이야. 왜? 주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확정을 지었기 때문에... 물론 똥 종류에도 여러가지가 있겠죠. 30대와 40대가 다르겠지만... 어쨋든 살아봐야 우리는 쓰레기인 거에요. 이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누가 이런 행복을 누리겠어요.

주님이 나타나니까 제자들이 한결같이 한 게 있어요. 주님 앞에 잘 보이려고 했어요. "주님,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에서 이 중에 누가 제일 높겠습니까?" 이렇게 했죠. 주님께서는 제자들 뒤통수를 쳐버려요. "너희들의 할 일은 있다." "뭡니까, 뭡니까?" "나를 배신때리는 거." 주님을 배신하는 거에요.

베드로가 나쁜 게 아니고 처음부터 그랬었어요. 베드로 본인이 몰랐죠. '내가 예수님을 차마 배신할 줄이야..' '그건 베드로 니 생각이고..' 그건 베드로가 속해 있는 기존의 세상에 베드로가 물들은 거에요. 그렇지만 껍데기만 물들고 속에는 누가 아느냐? 주님이 아세요. "베드로야 니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자꾸 "부인하리라"를 부인하지 마세요. 원래 베드로는 그런 장치라니까요. 그걸 가지고 장치라고 하지 말고 "소품"이라고 하면 적당해요.

우리는 전부다 소품이라니까요. 여기 파란색 옷 입은 소품 계시고 체크 무늬 소품 계신데.. 전부다 하나의 소품들이에요. 적당하게 주님 배신하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한 배신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고 했지요? 바로 나를 죽이는 기능은 사도바울 본인이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에요.

우리는 배신 때리고 주님께서는 또 죽이고 배신치고 또 죽이고 배신하고 또 죽이고... 그럴 때 사도바울한테 나오는 "십자가에서 나는 죽었나이다."라는 고백이 합치되죠.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미워하고 베드로처럼 주님을 저주하고.. 하는 것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기대와 희망을 듬뿍 갖습니다. 그러다보면 나로 인하여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이만큼 믿는 것도 얼마나 공 들인 건데.... 내년에 더욱 더 신앙의 섬김 가지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되는데.. 내년에 내가 무슨 일이 바빠 가지고 성경도 몇 장 못 보고 기도도 늦게 하게 되면 내 마일리지 다 까먹는 게 아닌가.. ?' 하고 또 걱정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미리(일찍)부터 스트레스 받아요.

마귀만 좋아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주께서 모르는 인간을 가지고 주님께서 알게 하시는 작업이 반복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모른다.모른다. 하고 실패가 반복되는 이 새로운 현실이 기존의 현실과 다릅니다.

기존의 현실은 내가 혼자서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고 나를 관리하고 나를 절제하고 나를 다스리고 지배하고 통제하는 그런 세계였다면, 이 주님 안의 세계는 뭐냐하면 '어째서 이 정도까지 나는 망가졌습니까?'를 확인하기 위해서 주께서 늘 우리에게 시츄에이션을 몰아넣는 그런 이상한 영역이 바로 "주 예수 안"이에요.

이렇게 모르게 될 때 그냥 "니는 모른다."고 하지 않고 쏘스를 집어넣어요. 그런 여러가지 장치를 집어넣어요. 음식할 때 쏘스 뿌리고 드레싱을 넣듯이 우리 속에 집어넣는데 그 집어넣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사도들의 권면과 성경책을 집어넣어요.

성경을 집어넣으면 성경책 앞에서 우리는 갑자기 뭐가 되는가 하면 벌거벗은 채로 되어가지고 우리의 골수와 관절을 쪼개가지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부실함과 나만 사랑하는 너무나 악마적이고 나만 챙기는 이기주의적인 성향을 말씀이 말씀대로 역사해서 우리에게 까발려 주지요.

그게 뭐냐하면은 처음부터 그런 실패자였어요. 그리고 아닌 척 했던 것을 잘라주고 그 가면들을 벗겨버리는 작용을 해주니 이런 맛사지가 없어요. 가만히 있어도 올 맛사지 다 해준다니까요. 머리, 어깨, 무릎, 발. 전부다 다 주물러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아니였었어. 왜 그런데 자꾸 니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가지고 역시 봐라 내가 저 목표를 달성한다. 왜 이렇게 쓸데 없이 해가지고 스스로 마귀한테 놀림을 받냐 이 말이죠.

마귀가 얼마나 놀린다고요. 니 오늘 목표가 뭐였어? 이런 식으로 놀리고 말이죠. 니 올 한 해 동안 전도 몇 번 했어? 심지어 니가 목사면서 전도 몇 명 했어? 이렇게 꾸중하고 그런다니까요. 그 귀신을 왜 달고 다닙니까? 이것은 내가 뭔가 내 나름대로 성공하겠다는 의지 때문에 그런 거에요. 내가 보기에도 그럴싸하고 실망스럽지 않은 자아를 위하여 내가 어떤 목표를 만들어 내는 그 실수(잘못)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에요.

29절 봅시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에 같은 것은 둘이 없다."입니다. 이 세상에 똑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똑같다가 없다."에요. 둘이 있을 때 "똑같다."가 되는데, 이 세상은 "똑같다."가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똑같다."가 안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유일하다."지요.

그러면 아버지께로서 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게 끝났어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시겠죠? 예수님이 하신 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까? 안 됩니까? 제가 한 번 물어봅시다. 강의를 이해했는지.. 예수님이 하신 일로 영광이 돼요, 안 돼요? 영광이 마감났지요? 그러면 우리는 빠져야지..

믿음 간단하지요? 나를 안 믿으면 돼요. 모든 일은 예수로 끝나버렸어요. 똑같은 사람이 둘이 없다니까요. 왜 내가 예수가 되어야 돼죠?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본문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나를 만들어놓고 나에게 모든 걸 시켰다. 심지어 누가 구원받는지 누가 지옥가는지 이미 심판을 누구한테 맡겼습니까?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이미 심판을 아버지께서 맡겼지요.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에 하자나 어떤 실수나 빠뜨리기, 졸음운전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실수가 없지요. 됐잖아요. 그러면 됐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나가있으면 되고, 빠져있으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세상에서 버릇이 뭐냐하면은 내 인생은 누가 관리하면 든든해요?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해야 든든하고 그냥 관리하지 않아요.

반드시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목표를 머리속에 그린다니까요. 다음 주일부터는 교회 10분 일찍 나가기. 요렇게 그려요. 다음부터는 기도할 때 10초하지 말고 15초로 늘여봐야지.. 자꾸 늘인다니까요. 자꾸 해요. 그러면 기도를 10초하다가 한 5분 동안 하게 되면은 5분 동안 한 것으로 끝나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냥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성상... 주님 이제부터 기도 못한다고 절 무시하지 마세요. 전에 는 10초했다고 무시해도 되는데요, 이래봐도 저 5분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결국 뭡니까? 주의 일이 주 십자가로 끝난 게 아니고, 내가 5분 동안 기드하는 것으로 일단은 끝나 줄 때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게 뭐냐하면 예수님만 영광 받으면 짜증난다는 것. 누가 또 영광 받아야 된다? 나도 같이 영광 받게 같이 곁다리 끼워달라는 거에요.

그게 바로 일곱 귀신 들어온 거에요. 말이 일곱이지 일곱 귀신은 괜찮아요. 한 오백 귀신 들어오면 기가 막히죠. 대충해서 일곱 귀신 들어온 거에요. 기도도 해야지 성경봐라 사돋바울이 권면하잖아 무시로.. 나훈아 노래 있잖아. 무시로, 무시로, 무시로 기도하란 말이야. 무시로. 무시로 기도하라. 왜 기도 안 해? 전도하라. 서로 좋은 것은 나눠주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잖아? 이게 왜 안 해. 왜 안 해.. 누가 지적해요? 내가 나를 지적한다고요. 이상적인 모델을 찾으면서..

자, 그러면 이번 시간 2분 남았는데 인자(人子)합시다. 인자라는 것은 뭐냐하면은 하나님도 아니에요. 인간도 아니에요. 인자는 뭐냐하면은 바로 인간이 알 수 없는 지역에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언약 안" 이라고 합니다. "언약 안"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방주 안"이지요. 노아 언약이 방주 안이거든요.

노아 당시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을 때 그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잘못된 일이 아닙니까? 이쪽 세계에서는 잘못된 일이 아니고 일상적이 일이지요? 다시말해서 방주가 없을 때는 잘못된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 방주가 뚝딱뚝딱 만들어지게 되면 그쪽 모든 일들이 뭐가 되지요? 사람들이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노아 언약이거든요.

예수님은 무슨 언약? 새언약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간은 인자밖에 없다." 했을 때에 그걸 모르고 먹고 마시고 사업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고 하는 것은 큰 실수가 되는 거에요. 그 사람들을 가지고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죄수"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는 거에요.

다윗이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에게만 죄 졌다."고 했어요. 이는 다윗 언약을 알기 때문에 비로소 아는 거에요. 인간은 사람에게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지으려면 인간에게 죄를 지어야 죄가 되어요. 인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마지막 아담(로마서 5장)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만이 인간이에요.

그러면 함부로 때리면 되겠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누구에게 한 것이다? 예수님 자신한테 한 것이라는데요. 누가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사도바울이 다메섹에 내려갈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잖아요. "사울아, 사울아 니 참 고생이 많구나.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는데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죽였는데 언약 안에서 뭐가 되었느냐 하면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그렇게 해석을 해버리지요. 그 해석을 우리 인생에 뒤집어 씌워버리면 내 인생은 요만큼도 남지 않고 있다 가 됩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없는데 내가 왜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들을 하십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고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것으로 사는데 왜 내 인생이라고 우겨가지고 자꾸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개발해 내십니까? 그것은 왜 그러냐? 실패가 미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떄문에 그렇습니다. 실패가 과거에 있으면 뭐 하는 줄 알아요? 우리는 후회합니다.

'바보같이 그때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되는데...' '아휴, 그때 참 눈이 삐었지.. 그 남자하고 괜히 눈 맞아가지고 아이고, 딴 남자하고 할 걸 괜히...' 자꾸 실패가 과거에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떻게 살아도 우리는 미래에 가면 몽땅 다 실패하도록 꺠우친 그것이 성공입니다. 뭘 해도 주여 주님한테 성공되면 저는 족합니다. 라는 말이 성도의 고백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요한복음 7장 29절.rtf (109.1K), Down:16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0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