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126강, 127강) 교만, 말씀의 기능 150917
유튜브(126강, 127강) 교만, 말씀의 기능 150917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126강
127강
이미아(IP:180.♡.90.76)
15-09-19 22:47
126강-YouTube강의(교만)150917-이 근호 목사
오늘은 126강, 제목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흔히들 사람하고 일한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하고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하고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일해서 나오는 생산, 업적, 결실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창조를 달성하십니다.
그렇다면 교만이라는 말은 벌써 개념이 간단하게 정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하고만 일하시는데 내가 하나님하고 일하겠다고 나설 때,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왜 우리가 나서서는 안 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요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물론 우리 생각은 창조주가 피조물하고 같이 상대해도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창조주하고 피조물하고 상대가 직접적으로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 때, 그냥 만들어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 때 그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피조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 되게 했던 그 원리와 원칙에 하나님께서는 중점적으로 주목하십니다. 그 원리와 원칙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독생자 아드님을 주님으로 등극시키는 것이 초점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것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하신 계획이었습니다.
따라서 피조물하고 직접 상대하지 않는 이유가 예수님의 주 되심에 대한 그 모든 작업의 실시는 오직 하나님이 할 수 있지 피조물이 끼어들어서 그 일의 성과를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피조물들의 존재 의미가 없지 아니 하냐, 피조물의 존재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상대함에 있어서 주로 등극하려면 죄가 발생되어야 해요. 죄가 발생되고 그 죄를 의로 바꾸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예수님은 주가 되시는 겁니다.
로마서 11장 3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오묘한 비밀을 누가 알았으리요” 라고 이야기하죠. 이거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일에 감히 피조물이 미리 알아서 끼어들 그런 입장이나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피조세계를 만들 때, 피조물은 그냥 만들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나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만들어질 때에 예수님의 주 되심을, 그걸 밑에 전제로 깔고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주 되심을 위해서 같이 참여하라고 세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미 만들어진 인간은 무엇에 빠졌는가, 오늘 강의할 교만에 빠졌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도 어느 정도 자기의 업적이라든지, 자기의 행함, 가치 같은 것이 약간은 필요했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자기 쪽으로 의미를 두죠.
의미를 두어버리면 뭐가 모독을 받느냐 하면, 예수님의 주 되심을 온전하게 드러내는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이제 방금 교만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교만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보면 뭐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또 인간이 인간끼리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끼어들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교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실을 성경적으로 정리해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브닌나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무엘의 아버지의 첩입니다. 그 브닌나가 아들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무엘의 아버지 이름이 엘가나이고, 그 본처가 한나 인데,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브닌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아기가 없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에 비해서 나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식을 갖게 했습니다.” 라고 자식 없는 본처를 향해서 구박을 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 대목을 볼 때 결국 교만이라는 것은 뭔가 있다는 그 자체가 교만의 원인 제공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대로 같은 나이인데 어떤 사람은 머리가 희어졌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까맣다, “아이고 너는 벌 받아서 머리가 희였고 나는 복 받아서 머리가 까맣다.” 이런 말은 차마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이 안 들겠어요? 나오지요? 둘 다 자식 자랑하는데 저쪽은 좋은 대학 나오고 이쪽은 대학 떨어졌을 때 자연적으로 우쭐댈 수밖에 없죠.
이게 바로 브닌나와 한나의 만남에서 나온 교만의 예 중에 우리가 벌써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가졌다는 거예요. 왜 가졌는가, 가질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가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가질 만한 가치로 내가 이정도 되었다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님으로 하시는 일 앞에서 그게 교만이 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아버지 집에 아들이 둘 있는데, 한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빼돌려 가출하고, 허랑방탕 도시에 가서 다 낭비하고 방탕한 짓을 했습니다. 탕자죠. 누가 봐도 그 탕자는 하나님 앞에 죄지었다고 생각 할 겁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가출해서 재산을 낭비한 반면에 큰 아들은 한 번도 가출하지 않고 아버지 옆에서 봉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누가 나쁜 자인지 벌써 표가 났잖아요. 가출한 탕자는 나쁜 사람, 악한 아들이고 큰 아들은 점잖고 착한 아들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주시고,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 되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원수인 교만이 항상 발생되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의로 바꾸는 것은 주님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맏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맏이를 하나님이, 아버지가 보시기에 맏이는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알지를 못해요. 죄를 알지를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교만할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맏이의 교만이 드러날 시점이 언제냐 하면, 그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도 아직까지 교만하지 않았어요.
문제는 돈 허비하고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태도가 그 자기 자신의 재산을 탕진한 그 아들을 위해서 소도 잡고, 가락지 끼우고, 좋은 옷 입히고, 동네잔치 하고, 동네에 자랑하고, 그 순간 큰 아들은 머리가 돌았습니다. 완전히 정신 나갔어요. 아버지한테 이야기합니다. “아버지여, 제가 한 평생 아버지한테 봉사했는데 아버지는 저한테 소 한 마리 잡은 적 있습니까?” 아버지의 말은 “이때다!! 그게 바로 숨겨진 너의 교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하니까 겸손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게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생을 살게 하신 것은 그 매순간순간에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로 하여금 숨어있던 교만들을 자꾸 발췌하고 유발시키는 상황들을 우리에게 들이닥치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보다 성질 더럽고, 나보다 가출하고, 나보다 나쁜 짓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흐뭇해합니까? ‘하나님이 복 주셔서 이렇게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게 바로 우리에게 숨어있던 교만을 유발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기 잘난 척 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얼마나 수집을 했습니까? 아마 그 수집한 보람으로 인생을 살걸요? 성경에서 말한 교만이라는 것은 예수님 빼놓고 다 교만한 자입니다.
이미아(IP:180.♡.90.76)
15-09-19 22:51
127강-YouTube강의(말씀의 기능)150917-이 근호 목사
제 127강, 제목은 ‘말씀의 기능’입니다.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물론 이방인한테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방인한테 율법을 줄 필요가 없느냐 하면, 율법을 받아야 될 민족은 기존에 아버지가 자식 놓고, 자식이 자식 놓고, 자식이 또 자식 놓는 그런 혈육적인 관계에서는 율법 같은 것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식이 이스마엘 있고 그 다음에 이삭이 있는데, 이스마엘한테는 율법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삭에게 율법을 주죠. 왜? 이삭은 이 땅에 없는 자식이었습니다. 그걸 불임여성의 자식인데 약속의 자녀라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바로 율법 자체가,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이제는 하나의 민족이 아니고, 그게 특수한 인물로, 특수한 인격체로 전환되는 절차 속에서 율법이 주어집니다. 쉽게 말해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어떤 단체가 하나의 인물로 응축이 되죠.
그 응축되는 그 절차의 과정 속에서 ‘남은 자’ 라는 것이 나옵니다. 남은 자는 로마서 9장에 나오고 11장에도 나오는데, 남은 자라고 할 때 앞에 붙는 공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행위로 하지 않고 은혜로 남은 자’ 라고 되어 있어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을 정리해야 돼요. 은혜로 남았다는데, 은혜가 뭐냐 하는 겁니다. 은혜라 하는 것은 보통 공짜로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말은 맞습니다. 은혜는 행위 없이 공짜로, 대가 없이 받는데, 뭘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뭘 받느냐, 바로 죄와 저주와 심판을 은혜로 받습니다. 징계도 받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뭘 준다고 하면 마치 산타클로스를 생각해서 나한테 좋은 것을 줄 것으로 그렇게 오해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뭐냐 하면 저주와 심판과 죽음을 은혜로 주십니다. 왜 주시느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덜 아픕니다. 남들이 마지막 때에 얻어맞는 매, 마지막 때 당하는 그 저주와 심판을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에게는 그걸 미리 앞당겨서, 선취라고 하는데, 미리 앞당겨서 저주와 벌과 징계와 죄를 그렇게 안겨줍니다.
어떻게 안겨주는가, 율법을 통해서 그들에게 안겨주죠. 그 율법의 완성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은혜로 주셨다는 말은,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저주받았고, 심판받았고, 참 지옥 백성인 것이 확인되었다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사도 바울의 십자가라는 용도가 뭐냐, 나를 죽이는 용도에요. 그냥 죽이지 않아요. 이유 있는 죽임이에요. 그게 뭐냐, “너는 저주 받아야 해!” “왜요?” 라고 물으면 “율법에 의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볼 때에 죄수로 본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은 이미 영생 얻은 사람이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죄수 아닌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죄수한테 기죽지 마세요. 죄수한테 갑질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심판받기로 작정된 자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니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이 의미를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이미 지옥을 아는 사람에게만 그 말씀의 의미가 있습니다. “니가 지옥을 알아?” “니가 게 맛을 알아?” 하는 것처럼. “니가 지옥을 알아?” 지옥을 안다면 이 세상에 두려워 할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미 나는 지옥을 알았고, 심판을 알았고, 하나님의 저주를 알았으니, 이제는 두 번 다시 내가 살 생각을 저는 접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제는 내 안에 누가 사느냐, 내가 살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율법의 완성을 주었을 때는, 그 완성 안에는 죽이는 작업과 그리고 그리스도자기만 사는 영토 만들기, 공간 만들기가 십자가 안에 마련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으로 십자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자,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입니까?” 라고 이야기 할 거예요. 오늘 제목이 말씀의 기능인데, 말씀 안에 율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완성도 포함되어 있고. 이 말씀의 기능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는 그거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거는 원래 말씀의 핵심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효과라고 이야기해요.
구원받는 것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무슨 일의 효과입니다. 무슨 일의 효과냐, 정작 말씀에 들어있는 핵심에 의하여 발생된 열매죠. 그럼 핵심이 뭐냐, 예수님의 주 되심입니다. 예수님의 주 되심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영광 받는 것이 예수님의 주 되심만 될 때 영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 말씀처럼 예수님의 주라고 시인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주 되심만이 드러날 때만 영광 받고 그 외에는 영광을 받지 않습니다. “저는 겸손합니다.” “저는 착합니다.” “저는 성실합니다.” 그런 것 영광되지 않습니다. “니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주라고 생각합니다.” “왜 주냐?” “저를 심판했기 때문에 주시고, 저를 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 주가 되십니다.” 라고 주 되심의 십자가를 증거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지금도 활동하는데 그 안에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그 말씀을 가지고 확장시키는 일에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그 확장시키는 그 작업 중의 하나가 율법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계속해서 확대시켜 나갑니다. 그러면 소위 잘난 체 하고, 나는 이만하면 착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에게, 특히 불신자도 그렇지만 신자도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예수 믿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예수 믿고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이것은 의롭고 착하다고 주장할 수 있어요.
그럴 경우에 율법이 이제는 들이닥칩니다. 십자가가 율법을 완성했거든요. 십자가 새 언약이 율법을 완성했거든요. 완성했기에 이제 흘러내리는 겁니다. 완성했기에 완성된 차원에서 이제는 율법을 적용을 시킵니다. 완성되지 않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는 것으로 멈추지만, 완성된 상태에서 율법을 적용시켜버리면, 이 율법 자체가 하나의 미끼가 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면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그 자체가 성도로 이미 구원받았음을 확인하는 쪽으로 이게 회수되게 되어 있어요.
구원된 자이기에 말씀이 이 땅에서 내가 죄인으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말씀 속에 십자가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사도의 말은 구약의 율법처럼 율법적 기능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사도가 사도 된 것은 십자가의 영, 능력 때문에 사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도가 전한 내용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 사건이 살아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살아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까지는, 그 전에는 율법이 있었거든요.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의 말씀처럼.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사도의 모든 권면과 지시와 교훈 속에 십자가가 살아있다는 말은, 그 사도의 권면도 우리에게 율법의 가능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중에 하나인 야고보 사도도 있습니다. 야고보가 하는 말이, 야고보서 2장 11절에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너가 비록 간음을 아니 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자, 간음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살인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은 살인한 그 율법만 적용된 줄로 알았더니만 야고보서 2장 10절에 보니까 살인 한 자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간음한 자라는 규정도 함께 엎쳐서 죄가 죄인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율법을 주신 분이 동일한 분에게서 율법이 나왔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율법이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주 되심을 위하여 누가 살인을 했다면 그 살인은 동일하게 옆에 있는 간음죄도 함께 겸하여 간음죄를 짓게 된 사람으로 규정받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인을 했지만 간음하지 않았잖아요? 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이법은 지켰지만 이법은 안 지켰습니다. 또 이거는 선하고 이거는 악하고”, 하는 그걸 새삼 따지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것이 아니고. 왜 주님이 죄를 의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주님밖에 없느냐를 증거 하라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이 주어졌거든요. 그래서 자기의 정당함이나 아직까지 나는 이 정도로 착하다는 말은 그거는 주 되심을 모독하는 말이고 율법의 기능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 다 지켰다가 어느 것 하나 안 지켰다면, “맞습니다. 전체 다 어겼습니다.” 라고 해줘야 예수님의 주 되심을 나타내서 주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말씀의 기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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