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b-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b-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b-이 근호 목사

안식일과 할례 언약이 어떻게 합치가 되느냐? 안식일과 할례 모두 인간보고 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어떤 분의 기능으로 하나(합치)가 돼요.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있고 할례법이 따로 있잖아요. 그러나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의 동그라미 속에 전체가 안식일이고 전체가 할례가 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그때 문자로 된 것이 점선을 향해서 누구를 경유하게 되면 의가 막 나와요. 할례 쪽에서도, 안식일 쪽에서도 통합해서 나옵니다. 그때 반드시 뭐를 경유해서 나오느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유발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희생, 예수님의 언약의 피(죽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오게 되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되고, 할례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와 안식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킵니까? 성도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죄인으로서 기계에 재료가 되명 돼요. "저는 (마음의 )할례와 안식일을 못 지킵니다." 하고 죄인으로 들어가면 돼요. 그런데 그것은 십자가 이후의 이야기이고, 십자가 이전에는 어떻게 하느냐?

원인도 알 수 없는데 이유도 없이 38년 동안 병든 자거든요. 왜 내가 38년 동안 병 들어야 되는지 몰라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까 38년, 너는 저만큼 해서 37년, 니는 이만큼 했으니까 5년, 니는 나보다 죄를 더 졌으니까 70년 이렇게 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혼자 38년 된 병자에요.

베데스다 못가에 얼쩡거리기만 했지 누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미 하나님의 의 만드는 작업에 이 사람은 참여된 사람이에요. 이 돌아가는 방앗간 기계에 이미 재료로서 참여되었어요. 38년 아니라 39년, 40년이 되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38년 된 저주받은 흔적이 누구 한 마디에 끝났습니까? 어떻게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갔습니까? 물에 들어갔습니까? 들어갈 필요가 없지요. 인간이 하는 방식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 "이야기해도 당신은 모를거야." "왜?" "당신이 모르는 방식, 당신이 해낼 수 없는 방식이니까.. " 만약에 "이렇게 했다." 하면 그대로 흉내(모방)낼 거에요.

그런데 모방하거나 흉내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행함없이 구원받은 거에요.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 나도 몰라. 어떤 분이 와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그냥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져가실 때 내가 쓰레기 분리수거해서 내놓았습니까? 그래서 새벽에 가져가는 그런 방식이에요?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그냥 죄가 없어졌어요.

38년 된 병자가 자기 딴에 조금 더 낫겠다고 미리 담요 준비하고 했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그렇게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베데스다 못에 어슬렁거렸지요. 그래서 저는 주님이 암표 장사같아요. "입장권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팔렸답니다." "두 장 있는데.. 다 보이니까 따라 와, 따라 와." 그리고는 경기장 바깥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데에 가가지고 "용서해줄게." 이렇게 해가지고 천국 가는거에요. 예수님하고 자기들끼리만..

그러니까 그 방식은 내가 아는 방식이 아닌 방식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가 아는 방식, 내가 할 수 있는 방식 같으면 "내가 이렇게 준비했습니다."가 되는데 내가 일체 아는 방식이 없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행하심만 증거할 뿐이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누가 너더러 안식일날 담요 들고 걸어가라 하더냐?" "나를 낫게 하신, 일방적으로 낫게 하신 분이 나보고 티내고 이렇게 걸어가라고 합디다." "그 사람이 누군데?" "나는 모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도 마찬가지죠.

"누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한테 묻지 마세요. 왜? 나는 눈뜬 것, 피동적으로 당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능동적으로 뭘 했으면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이 되더라"가 되는데 그냥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저보고 그런 걸 물으면 안 돼죠.

강간 당한 여자보고 책임 물으면 안 됩니다. "옷차림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물으면 안 돼요. 그냥 당한 거죠. 지금 우리는 주님한테 폭행당한 거에요. 정신적으로.

정리합시다. "안식일과 할례를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못 지킨 것을 통해서 죄인 되면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도 죕니다. 안식일을 못 지켰다고 내가 후회하는 그것도 죕니다. 그래서 우리(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후회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죠.

후회한다는 말은 '조금만 잘했으면 될 건데..' 이러잖아요. 아직도 자기가 개과천선할 만한 믿음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믿음은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당하는 것뿐입니다. '옷차림만 좋았으면 성폭행 안 당하는 건데..' 그러지 마세요. 그냥 당하면 당하는 거에요.

의의로 성경해석 쉽지요? 자, 그런데 오늘 여기 23절 봅시다. 안식일에 사람의 무엇을 건전케 한다고 했습니까? 전신이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에도 나오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니까 베드로가 "발만 씻지 마시고" 하니까 "발만 씻어도 된다." 다 씻은 것이 되죠. 전신이죠. 전신이란 말은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가 행할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원시켜 주는 십자가가 그냥 트랙터에 엔진(발동기) 시동 거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댈 게 없어요. 이런 얼굴 가지고 성형외과 의사에게 한 번 찾아가 보세요. 손댈 게 없어요. "우리 병원 오지 마세요. 손댈 게 없는데 뭐. 완전한데 뭘 고쳐요. 견적 안 나옵니다. 손댈 거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손대지 않을 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끼쳐요. 그러면 내가 내 맘에 안 들어서 손대고 싶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까먹고 있는 중입니다. 두 귀신쯤 들어갔어요. "손대라." "예수 믿는데 이런 짓 해도 되겠어?" "그거 고치면 더 영광 돌릴텐데.." 이것 큰 유혹거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이번 만 잘 된다면..'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마귀의 유혹이 들어온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는 망가졌기 때문에 망가진 인간에게 거기다가 이쁘게, 바짝 마른 뼈에게 호랑이 문신 새겨봐야 아무도 겁 안 먹습니다. 뼈긴 뼌데 호랑이 문신 새기고 이런 거 새겨봤자 조폭 뼈 되는 거 아닝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 속에 살아있습니다. 왜 살아있는가?

바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되었다, 그 죄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귀한테 시험받는 것을 넉넉하게 허락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차례 마귀한테 공격을 받고 마귀의 정찰기가 넘어와서 정찰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자들한테는 프로야구, 여자들한테는 드라마에요. 프르야구 이기고 지고, 강정호가 홈런치고 하는 것에 따라서 남자들의 직장생활이 달라져요.

LG하고 삼성하고 야구를 했는데 9대 일로 삼성이 지고 있었어요. 그 게임에서 삼성이 15대 9로 이겼습니다. LG팬들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드라마에 꼭 못된 게 점점 잘 되고 착한 것들은 점점 궁지에 몰릴 때 하루종일 집 안에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벌써 70회가 넘어가고 드디어 역전되어가지고 못된 게 잘 안 되고 잘된 게 복수가 되게 되면 웬지 기분이 좋게 돼요. 왜? '내가 응원했던건데..'

이것이 뭐냐면 이 세상과 우리는 한 덩어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죄라는 것이 뭔 줄 몰라요. 짓고 난 뒤에 죄를 알지 우리는 죄를 몰라요. 그냥 세상을 닮아가요. 세상에 한 통속이 되고 세상을 모방하고 세상하고 통해도 너무 잘 통해.

이게 저줏거리에요. 그래서 세상과 우리는 너무 잘 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싫어해요. 왜? 거기에는 일거에 폭격을 해서 다 조져버리고 다 불바다 만들어 놓으니까. 그래서 그런 책이 싫은 거에요. 비록 성경책이지만, 성경책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의 구미에 영 땡기지를 않아요.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너무 과격해서. 너무 과격해서. 소박한 나만의 세계, 아름다운 소년의 꿈과 소녀의 꿈, 그런 꿈이라도 어느 정도 허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것 만큼은 손은 안 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 나의 의미가 되는 그런 것 임재범이 불렀던 하나님 모든 것을 다 바칠 테니까 저 여자 만큼은 허락해 달라는 고백, 고해, 그것처럼 뭔가 "제발 이것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목을 내놓아도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자식(주로) 만큼은 하나님 허락해 주신다면 자식을 위해서 대신 교도소에 갈 테니까 자식 만큼은 지켜주옵소서." 이런 거요.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나타나는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수고, 종교활동 왜? 우리의 욕망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의 욕망의 탱크는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감을 못 잡아요. 이것은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끝도 없어요. 바닦이 없어요. "이 정도면 됐습니다." 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욕망이 벌써 또 생성되어져요.

어떤 사람은 골프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당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주부도박단, 산속에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화투치고 어떤 사람은 프로야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마라톤에 미치고 또 조깅에 미친 사람이 있고 전부다 거기에다가 올인하는 거에요. 그렇게 미치고 해도 예수님한테 미친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한테 미쳤습니까? 그러면 죄에요. 그것도 다 욕망이에요. 분명히 노림수가 이상해요. 뭔가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내가 미쳐도 주께 미쳤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가? 성령이 그렇게 하시죠. 성령이. 우리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지만 성령께서 미치게 만드는 일을 하셔요.

그러니까 본인이 예수에 미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성령이 와서 하시지 본인이 미치지 않아요. 왜? 인간은 반드시 날 때부터 나라는 것의 의미를 두게 마련이에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 )라는 구조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반드시 나는 ( )다. 나는 순교자다. 성도다. 나는 달인이다. 뭐가 반드시 ( ) 안에 있어요. 이 틀 자체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틀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이것을 포기하라고 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어요.

예수 신앙이고 성령을 수십년 받아도 이 틀은 절대로 죽을 때까지 포기 안 해요.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끝까지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다만 이 자리가 아무리 우리가 바르게 그 자리에 사는 것 같지만 이 자리의 내용이 그때그때마다 바뀌어질 뿐이에요. '나는 전에는 술,담배 고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공부해서 성경의 달인이다.'

그런데 성경공부하면 의인입니까? 그 성경공부를 함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 "나는 이 정도야." 하는 것을 과시하는 마지막 카드를 본인의 욕망이 만들어 낸다니까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잖아요. 우리 안 죽습니까? 죽어가는 거에요. 죽어갈 때는 이유가 있어요. 왜? 죄를 지었으니까 죽지요.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욕심. 욕심은 뭐냐?

욕심은 바로 내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율법이라는 것은요 우리는 평생 걸려도 못 지키고 바리새인이라고 욕할 것 없어요. 율법에서 우리는 평생동안 바리새인처럼 몇몇 율법을 가지고 나의 건전함과 나의 고상함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온전한 자아와 내가 그나마도 고마고만 유지하는 자아, 이 두 자아가 평생동안 우리 내부에서 싸우게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내 속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만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사로잡아오는구나." 주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이 모든 구조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런 작업에 유일한 주인공으로서 우리를 재료로 활용해서 주님만 주님답게 드러내는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이용당한 겁니다. 예수님 주 되심에 우리가 이용당한 거에요. 즐겨 이용당합시다.

그 다음에 봅시다. 25~26절에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 말은 뭔가 하면은 곧 27절을 말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거에요. 27절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아까 제가 시간의 벽지라고 했지요? 시간의 벽지라는 것을 무슨 뜻으로 사용했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걸쳐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해석들을 주께서는 다 뜯어낸다는 뜻입니다. 벽지를 뜯어내야 알맹이가 있잖아요. 율법은 바로 주님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해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것이 시간에 관한 거라면 27절에 공간에 관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있는 개체를 분석할 때 시간과 공간으로 분석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자아가 자아를 구축할 때 나는 몇 살이며 어느 집 출신이고 고향은 어디라 하는 것으로 "나는 ( )다." 를 성립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향 어디야?" "지금 몇 살이야?" 시간과 공간으로서 우리 자아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예를 들어 봅시다. 아브람의 고향은 어딥니까? 갈대아 우르 지방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는 없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되어 있지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뭘 중첩시켰느냐 하면은 이 땅에 고향이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본향이 있는 자를 아브라함에다가 중첩을 시키는 거에요. 야곱의 고향은 어딥니까? 가나안 땅이죠. 그러나 이스라엘 고향은 어디에요? 없지요? 야곱에다가 뭘 중첩시켰어요? 이스라엘을 중첩을 시킨 거에요.

그러니까 야곱은 날로 쇠퇴해야 되고 이스라엘은 날로 흥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어디에 갑니까? 지남철이 땅에서 어디로 올라가요? 지남철이 위에 있기 때문에 흙(땅)에 있는 것들을 위로 잡아당겨야 될 것 아닙니까? 왜? 고향이 하늘이니까.. 이 고향이라는 것이 지상에 없음이죠. 없음이 있음을 체포해서 없음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있음 자체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이 있다는 말은 자기 부모가 있고 모든 것이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없음에서 나왔다면 그것 자체를 도저히 알지 못하게 막아버려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너 누구야?" 하면 "나 없는 데서 생겼다."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늘 염려는 오늘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저녁이 되면 우리는 잠을 자게 되고 잠자게 되면 의식이 없고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도 이미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의식이 없이 잠 잤으니까. 자다가 일어나서 "나 있다." 이러지 않잖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얘기했잖아요. 광야의 특징은 뭐냐하면 모든 것을 하루하루로 잘라버린다고 했죠? 다른 말로 하면 일용할 양식인데 언제만 이틀치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줄 때는 이틀치를 줘요. 그 다음 지나면 또 하루치만 줘요. 그리고 욕심내서 많이 긁어모으면 이게 또 썩어버려요. 벌레가 일고 또 썩어버리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자체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썩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왜 썩느냐? 썩은 내가 나니까 성도지. 썩은 걸 아니까. 내가 지금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우리가 성도 맞잖아요. 인간은 중용을 못 이긴다고 했잖아요.

"너 어디서 왔어?" 누가 묻습니까? "니는 어디서 왔는데?" "그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왔어요." 이렇게 하겠죠. "예루살렘은 어디서 왔는데?" 예루살렘은 어디서 왔습니까? 애굽에서 왔겠지요. "애굽은 어디서 왔는데요?" 할 말 없어요. 왜냐면 애굽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되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되려면 누가 개입이 되야 돼요. 위에 계신 분이 개입을 해줘야 애굽나라에서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이 생긴 거에요. 이스라엘 나라가 애굽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애굽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히브리인들밖에 없어요. 히브리인들이니까 이스라엘 사람 아닙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 사람이이에요. 조상이 아브라함이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혈육적인 조상이고..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 모을 때 "애들아, 여기 아브라함이 조상이 사람 나와보세요. 여기 들어오세요. 나갑시다." 그래서 나갔어요? 그래서 나와 보니까 전세 버스 한 2500대 대기해놓았다가 갔습니까? 그들은 뭘 건넜습니까? 홍해바다 있죠? 어린 양 있죠? 홍해 바다와 어린 양 둘의 특징이 뭐에요? 무엇을 보여주는 겁니까? 어린 양은 "죽음"이고 홍해는 "죽음"이잖아요.

같은 인간인데 히브리인들은 살고 애굽인들은 죽었습니다. 누가 정상이에요? 애굽인이 정상이죠. 바다에 들어가긴 왜 기어들어갑니까? 히브리인들은 비정상이에요. 누가 동행했어요? 하나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살아난 거에요. 하나님이 동행했기 때문에 죽은 데서 살아난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이스라엘은요 히브리인들의 나라가 아니고 동행하시는 분의 나라에요. 어린 양의 나라에요. 그게 천국이에요. 어린 양의 나라지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 만들자고 해서 만든 나라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색출해서 탈락시키는 거에요.

가나안 땅은 제거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답지 않은 자를 계속해서 죽여나가요. 나중에는 다 죽여버려요. 다 죽여버리고 진짜 이스라엘은 바벨론 나라로 피신시켰습니다. 다니엘 같은 사람, 에스겔, 이런 사람들은 따로 피신시켰는데 그 사람들 속에는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장착되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남은자(레멘트)고 이야기합니다. "너 남은 자야?" 하고 묻는다면 무슷 뜻입니까? "너 힘으로 니가 구원될 수 없는 자 맞아?" 이런 뜻이에요.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자. "만약에 은혜가 안 왔더라면 너는 천국 못 갈 사람 맞지?"라고 할 때 "네,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앞으로도 그렇고 그전에도 자기 행함에 의미를 전혀 두지 않는 사람.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조금도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 오직 오신 은혜가 나를 조작하고 나를 주관하고 나를 은혜대로 지 맘대로 부리는 것을 흔쾌히 기쁘게 용납이 되고 허락이 되고 인정이 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남은자가 되는 겁니다.

내가 말을 하면서도 참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그리스도 올 때는 어디서 오는지 알아요? 몰라요? 모르죠. 그것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무조건 아니에요. 왜냐면 어디서 왔는지 알아요. 어디서 왔습니까? 갈리리에서 왔지요. 41-43절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리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를 인하여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쟁론 자체가 예수님이 "나 갈릴리 가기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그러면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인간이 한둘이냐?" 이렇게 말했을 거에요. 무조건 너는 아니야. 왜? 내가 아니니까.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 무조건 아닌 거에요.

지금 이 이야기가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 줄 알아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김집사, 어떻게 구원받았어요?" "몰라요." "누가 구원해줬어요?" "그런 사람 없어요." "그럼 어떻게 구원 받았는 줄 압니까?" "그냥 알아져요." "실례지만 어디서 왔습니까?" "저 바다 건너서 왔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 줄도 몰라요.나를 구원해주신 분이 그쪽에서 와서 구웠했겠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만 그 당시에 대화가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성도도 성도 아닌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전을 그렇게 꾸며가는 거에요. 왜? 그래야 너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요한복음 17장 말씀이 맞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가 통하게 되면 주님이 전도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말발로 전도하는 셈이 되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주님의 전도를 가로막는 마귀의 술책에 말려든 게 돼요. 마귀의 종이에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있지요. 실컷 말씀을 전하라고 해놓고 "보내지 않는 자를 누가 전하리요?" 이 말이 참 어려워요. "나는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라고 하는데 주께서는 "나는 니를 안 보냈다." 하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이 말씀이 무서워요) "주여 주여 우리가 주를 위하여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이적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하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어디서 왔지?" "어느 용역사에서 보내가지고 노가다 일했지?" "우리 회사에서는 일하라고 당신을 보낸 적이 없는데.." 기가 찰 것 아닙니까?

그것을 "가봐야 알지." 하지 말고 미리 아는 수가 있단 말이에요. 진짜 주님이 보낸 사람인지 안 보낸 사람인지를 미리 아는 수가 있다니까요. 어떻게요? 내가 아무 행함이 없이 구원받았다는 거에요. 앞으로도 행함 없이 구원 받을 거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고 적극적으로 극렬하게 아무것도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그래도 구원은 돼. 왜? 구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 이야기를 강단에 서서 설교해 보세요. 교인 1000명 있으면 다음 날 두 명 오면 많이 남은 겁니다. 다 가진 않겠고 부동산(건물)이 있으니까 오히려 나가라고 하죠. 회의 해가지고 종용히 불러 가지고 내쫓아 버려요. 그래가지고 교회 커지겠느냐 말이에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7장 자체에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절대로 남을 전도하지 마라. 절대로 믿게 하지 마라. 절대로 꼬시지 마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대원칙이 있어요. 나는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왜? 구원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총괄해서 말한다면 "하나님은 주님만 구원하신다." 입니다. 심지어 이 구원시키지 않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까지 계속 갑니다. 주님 십자가 지실 때 전부 다 떠나버리죠. 주님 곁에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주님께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이제는 너희의 아버지가 되도록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성령 받고 난 뒤에 알던 주님과 성령 받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그 주님과 완전히 반대가 되죠. 그 잘못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 잘못을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주여 제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시험하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미 주인공이 나의 모든 나 됨의 주역을, 내 주체의 자리를 주님한테 도로 보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바울처럼 주님한테 보낸다고요.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내 존재는 주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입니다. 증거가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열심히 사세요. 자살하지 말고 열심히 사세요. 자살해도 물 새거든 그냥 집에 오세요. 온도차 손가락으로 재보는 고생 할 것 없이 그냥 집에 오세요. 왜? 힘들어도 주의 작품이니까. 힘들어도. 외로워요? 아무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그 사람이 주님의 멋진 작품이에요. 그 사람 미술 시간에 A 받습니다. 최고.

주께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강도와 세리와 창기 아닙니까? 그리고 돈만 아는 삭개오. 삭개오 예수 믿고 키 얼마나 컸습니까? 키 별로 안 컸을 거에요. 여전히 키 작았을 거에요. 그것 때문에 고민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젊을 때 우유 안 먹은 것을 후회했습니까? 성도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후회라는 말 자체가 건방진 말이에요.

하나님은 후회할 만한 요소를 우리에게 남겨둔 적이 없어요. 이 요한복음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사도바울의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봅시다. '야, 그때 내가 예수 믿고 그런 짓 안 할 건데 예수 믿고 난 뒤에도 그런 짓 해가지고 나는 이제 지옥간다. 개가 토했던 것을 도로 먹는 것처럼 내가 또 나쁜 짓을 했구나. 히브리서 6장에 보니까 한 번 비췸을 얻고 타락한 사람은 망한다는데 내가 그럤구나.' 바로 그러한 말씀을 대할 때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런데 요한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미 온전케 되심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런 말씀이 흔들리는지 안 흔들리는지를 테스트하는 테스트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주여 한 번 흔들려볼까요?" 이런 식으로. 예수 믿고 난 뒤에 깽판쳐가지고 교도소에 가가지고 "에이 씨 괜히 했어." 하고 후회 한 번 해 볼까요? 후회 안 합니다. 주여.

이 수갑 찬 모습을 수갑 차고 찍고. 이게 멋진 작품이라니까요. 공작 시간에 방학 숙제로 내야 돼요. 주님의 숙제. 사람의 범죄하는 것이 지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 허락이 나야 돼요. 같은 모습으로 수갑차고 지옥간 사람이 있고 같은 모습으로 수갑차고 천국간 사람이 있고 그렇습니다.

같은 강도라도 강도가 보기에는 똑같지만 질이 달라요. 따라서 "오늘밤에 주여 저를 생각해달라"고 이야기할 때 이 강도는 일본말로 하면 사람이 아니므니다. 진짜 성도이므니이다.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본인이 그렇게 예상한 것도 아니에요. 이 사람은 주님의 작품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주님의 작품이 강도의 모습으로 드러난 거에요. 막달라 마리아도 그렇고 기생 라합도 그렇고.. 그런 사람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이 손댄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가지고 "일찌기 하나님의 신(그리스도의 영)이 임했다."고 베드로전서에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성도의 특징은 뭐냐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로? 내가 내 인생을 손떼야 될 정도로. 주님이 친히 손대기 때문에 내 인생에 손댈 필요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뭐 열병식 부러워하지 마세요. 중국에 맛있는 쌈 얼마나 맛있겠노? 그거 집에서 라면 끓여먹으면 돼요.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 그게 훨씬 맛있어요.

세상에 부러워할 게 없다니까요. 그런데 부러워할 게 없는 게 언제 생기느냐? 실컷 부러워하다가 성령께서 내 뜻대로 안 될 때 '참 부러워할 게 없어야되는데 그걸 왜 내가 부러워했지?' 이런 식으로 주께서는 손을 대주시는 거에요. 특히 지금도 일곱 귀신, 이천 귀신이 오도록 주께서는 허락을 하시는 겁니다. 실컷 시달리되 죽을 때까지 시달릴 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거부할 생각도 없고 우리는 욕심을 포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마음껏 죄짓고 마음껏 마귀하고 한 통속이 되어서 까불다가 성령께서 그런 식으로 선하게 인도하게 되면 "아 이미 온전케 되었지..'라는 사실을 소급해서 아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공간과 시간 개념은 없어져요. 왜냐면 공간과 시간 개념에 이제는 더 이상 저촉을 받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28절 봅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여기서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는데 그러면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들이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다고 우겼죠?

그런데 예수님이 중간에 나서서 알지 못한다고 했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식은 뭡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 예수, 성령 삼위일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로 가로막는 그 작업, 구원의 작업이 이미 개시가 되었습니다. 몰라도 돼요.

우리가 알 것은 하나면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주께서는 저를 구원했습니다. 제가 기껏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밖에 못 하겠어요. 쉽게 예를 들면 친구 사이에 "야, 너 엄마를 알아? 엄마 키를 알아? 몸무게를 알아?" "몰라." "엄마의 어떤 곳이 좋아?" "그것도 몰라. 다 몰라." "그럼 너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이 뭐야?" "나 엄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다만 엄마라는 것밖에 몰라. 그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몰라."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자꾸 무식에서 유식으로 나가게 되면 신앙생활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천국간 강도가 얼마나 알았겠어요? 강도가 강도질하느라고 바쁜 데 성경 몇 장 읽었겠어요? 성경 읽고 도 닦기에 바빴겠어요? 안들 알았겠습니까? 자신의 언어적인 오해로 알죠.

누구도 천국가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가요. 사도바울도 그러하고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자기가 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요. 다만 구원해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만 알고 가요. 그 말이 어디 나옵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말은 은근히 책임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지금 활동하시는 십자가한테 넘겨버리고 "나는 몰라." 하고 돌아앉는 거에요. 사도바울이 내뱉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 보면 뭐냐하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같이 십자가를 안 사람만이 우리끼리는 아는 이야기에요.

논리를 따지지 마세요. 그냥 알아요. "죄씻음?" 딱 들으면 알아요. 왜? 죄씻음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행함이 아니고 그냥 믿음으로 의!" 그러면 아는데 꼭 이걸 따지는 인간들은 행함을 가지고 포기를 못하면서 어떻게 내 행함을 포기하고 의를 받아들일까 그 방법을 찾는데 그 방법 자체가 추가적인 행함이 돼요.

복음은 그냥 외침이고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맞아요. 그냥 소리에요. 그냥 외침이지 납득이 아니라니까요. 열두 제자를 보냈잖아요. 열두 명이 사람들에게 뭘 가르쳤습니까? 주님의 메시야 됨을 가르쳤잖아요. 그런데 설득시킨 거에요? 아니지요. "모이게 하신 것은 주께서 모이게 하셨습니다."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모였다가 다 흩어졌지만 하여튼 모이게 하신 것은 주님이에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분명해질 거에요. 두 가지 예를 듭시다. 하나는 둘 다 이방인인데요, 벡부장을 봅시다. 백부장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합니까?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할 때 자기가 사전에 '요런 멘트를 날리면 주께서 나를 기뻐하실거다.'라는 생각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지금 그 백부장은 평소에 하는 일이 뭐냐면은 "앞으로 갓. 뒤로 돌아갓." 그것 하고 있다고요. 중대장이니까. 평소 하는 대로 부하들과 내가 이런 관계라면 주님도 이런 관계일 것이다. 하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단어를 구사해서 기껏 표현한 것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라고 했는데 주께서는 그 말 자체가 훌륭해서 칭찬하는 게 아니고 그 믿음 자체, 그런 고백이 나오는 원천 자체에 대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알고 계신 거에요.

그 다음에 12년 동안 병든 여인이 뒤에서 옷가를 잡았죠? 뭐 지나 내나 예수님 옷 다 잡고 난리 났어요. 전부 "주여!" 하고 붙들고 환영인파가 난리에요. 그런데 몰래 쥐었거든요. 몰래 잡으면 구원받습니까?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주무르지 말고 몰래 옷가를 만지면 되겠네요.
어떤 방법, 행함이 없다니까요. 주께서는 일체 그런 것을 보지를 않아요. 쿧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왜 기도할 때 두 손 안 모았어?" "왜 안 꿇어앉았어?" "왜 이렇게 퍼져가지고 기도하는 거야?" 그런 걸 묻지도 않는다니까요..

이미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중심을 보시고 특이한 것, 아담의 계통에서 나올 수 없는 특이한 계통, 그야말로 은혜의 계통에서 나온 것을 주께서 먼저 아셔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 전에 주께서 먼저 우리를 알아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없어요.

주께서 지금 중심을 다 보고 있는데 우리가 새삼스럽게 겸손한 척하고, 회개하는 척하고, 반성하는 척해보게 되면 오히려 주님보시기에는 가증하고 토하고 싶으실 거에요. "욱!" 제발 좀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니까 "주여 어디가서 죽을까요? 아프가니스타에 가서 죽을까요? 이디오피아에 가서 죽을까요?" "그러지마, 그냥 니 집에서 TV 드라마 보다가 죽어."

뭘 그렇게 자꾸 어떻게 인공적으로 꾸미냐 말이죠.. 꾸미면 불연속이 되어버려요. 주님과 우리 사이는 연속이거든요. 그냥 밀려온 거에요. 주님의 성령이 끊어지지 않고 밀려왔는데 우리가 다다갈 때는 꼭 '오늘 기도는 여기까지. 오늘 성경 본문은 여기까지. 끝.' 접어가지고 성경본문은 내일 또 보고. 꼭 우리는 단절시켜요.

예배는 11시부터 12까지. 그 다음부터는 예식장에 참석. 우리는 단절시킨다고요. 예식장에 가면 주님이 거기에 안 계십니까? "언제 주님 예배 받으시고 언제 예식장까지 오셨습니까?" 이럴까요? 자꾸 시간과 공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단절시키는데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원천을 주님처럼 묵시의 존재로 출발하기 때문에 현재 육신이 있으니까 자연적으로 우리는 욕망이 들끓어요.

여기에다가 뭘 겹치느냐? 주께서 포대기처럼 하늘에서 겹쳐버려요. 우리는 내 육신이 바쁘다가 성령께서 자극을 줘버리면 갑자기 육신의 것이 날아가 버리면 우리 빈자리에는 누가 보입니까? '아 이미 구원됐잖아? 미쳤어 왜 내가 고민했지? 행동 똑바로 할 걸. 그런 짓을 왜 했지. 후회된다.' 이런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 발견 해야돼요. 그런데 그게 얼마 가지는 않지만. 다시 먹구름이 와가지고 돌아보면 또 돌아보면 '아이구 예수 믿습니다. ' 하고 예수 믿는다고 자기 자랑 하기 바빠가지고 이게 덮쳐지고..

그래서 늘 주(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의 죄를 지적케 하십니다. 뭘로? 말씀(사도바울의 명령과 권면, 신구약 전체)을 가지고 우리를 늘 권면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이 땅에서 내가 예상 못한 특이한 존재로, 나도 감당이 안 되는 특수한 존재로 내가 벌써 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남한테 자랑해봐야 욕만 얻어 먹잖아요. 자랑하지 마세요. "니가 미쳤구나." 이렇게 됩니다. 그것을 글로 쓸쓴다든지 말로 할 때는 나오는 것이 "우리는 다 죄인이고 또 주님(십자가)만 보이거든" 하고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책임으로 넘겨버리세요. 십자가(+) 기호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죽으신 분이 지금도 십자가 앞장세워서 활동하고 있다 이 말이죠. 나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숨쉬고 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주님 책임으로 넘기세요. 얼마나 전도하기 쉽습니까? "아이고, 집사님 제가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실거에요." 이렇게 자꾸 주님한테 넘격버리세요. 좀 무책임해지세요. 오늘 참 좋은 말 나온다. 제발 우리 인생에 대해서 책임지지 마세요. 자기 인생에 책임지지 마세요.

'내가 그때 딴 남자를 만났으면 가정생활이 행복했을 텐데..'라고 하지만 이런 남자 만나게 되어 있어요. 다른 남자 왔다가도 이 남자가 그 남자 죽여버리고 나한테 오게 되어 있다나까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선택이 아니에요. 주님의 선택이었습니다. 띠띠고 원치 않는 길로 앞으로도 갈 것이고 뒤에서 온 것도 마찬가지에요. 통째로, 회고적으로 종합해서 보게 되면 모든 것이 통째로 주님의 작품이지 내 작품은 요만큼도 섞이지 않았어요.

과속해서 5만원 뜯겼는데 딴 사람은 안 걸렸는데 하필 그때 순경이 용무 보다가 뒤돌아서가지고 내가 걸려가지고.. 모든 것이 경찰이 왜 있는가? 주께서 그 사람을 거기에다 박아놓으신 거에요. 돈 사랑하지 말라고 보이스피싱에 걸려가지고..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오늘 본문 내용이 이겁니다. "너희는 나를 아느나?" 이 말이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그래요? "우리는 우리를 안다." "니가 나를 모르니까 너를 안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자꾸 나를 알고 아는 나처럼 '저 사람을 한 번 분석해 볼까?'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예수를 못 믿는 거에요. 우리는 남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요? 왜? 주께서는 그때그때마다 인간 자체를 자꾸 바꾸니까요.

'내가 이런 짓을 했어? 내 입에서 요런 욕이? 나도 내 뜻이 아닌 것 같아.' 나도 몰라요. 몰라도 돼요. 주님 꺼니까. 주님이 자기 것을 마음대로.. 발만 씻겨준다고 베드로가 아는 척 했잖아요. "발만 씻기면 됩니까? 전신을 다 씻겨주셔야죠."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과 연관시켜면 뭡니까? "오른손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오른눈이 범죄하면 빼버려라."

그런데 발만 씻겨버리면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것이 없어요. 전체가 다 온전한데 왜 빼요?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완벽하게 착하다는 말이 아니고 죄 짓는 데 앞으로 활용도가 있다는 말이에요. 니 오른눈 빼버리면 20년 후에 앞으로 죄 지을 거 죄를 못 짓잖아.. 그러니까 눈알은 박혀있어야 돼요. 박혀있어야 이 눈 가지고 나이 80 넘어서 죄 짓지..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일, 죄 짓는 일에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끝까지 죽을 때까지 치매 걸리면서도 지 자랑하고 끝까지 죄 짓는 거에요. 그런데 남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어요. 뭐냐? 그래도 십자가로 구원 받았다는 이 느낌. 이 느낌은 뭐지? 정말 이상합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의 역사를 매일같이 시간의 벽지를 지금도 뜯어내고 있습니다. "잊어라. 맡겨라. 이미 너는 내 것이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세상살이 하기 힘든 것이 자기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 가장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세상한테 잘난 척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양념치고 요리한 우리 자신을 주께서 그것마저 알고 계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b-이 근호 목사

안식일과 할례 언약이 어떻게 합치가 되느냐? 안식일과 할례 모두 인간보고 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를 씻어주는 어떤 분의 기능으로 하나(합치)가 돼요. 인간에게는 안식일이 있고 할례법이 따로 있잖아요. 그러나 이것을 이렇게 보면 돼요. 하나의 동그라미 속에 전체가 안식일이고 전체가 할례가 되는 겁니다.

할례를 행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오고 안식일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그때 문자로 된 것이 점선을 향해서 누구를 경유하게 되면 의가 막 나와요. 할례 쪽에서도, 안식일 쪽에서도 통합해서 나옵니다. 그때 반드시 뭐를 경유해서 나오느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유발하게 돼요. 그래서 하나님의 희생, 예수님의 언약의 피(죽음),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나오게 되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되고, 할례 지킨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할례와 안식일을 우리는 어떻게 지킵니까? 성도가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죄인으로서 기계에 재료가 되명 돼요. "저는 (마음의 )할례와 안식일을 못 지킵니다." 하고 죄인으로 들어가면 돼요. 그런데 그것은 십자가 이후의 이야기이고, 십자가 이전에는 어떻게 하느냐?

원인도 알 수 없는데 이유도 없이 38년 동안 병든 자거든요. 왜 내가 38년 동안 병 들어야 되는지 몰라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나는 이만큼 죄를 지었으니까 38년, 너는 저만큼 해서 37년, 니는 이만큼 했으니까 5년, 니는 나보다 죄를 더 졌으니까 70년 이렇게 되는데 전혀 그런 것이 아니고, 혼자 38년 된 병자에요.

베데스다 못가에 얼쩡거리기만 했지 누가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미 하나님의 의 만드는 작업에 이 사람은 참여된 사람이에요. 이 돌아가는 방앗간 기계에 이미 재료로서 참여되었어요. 38년 아니라 39년, 40년이 되어도 마땅한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38년 된 저주받은 흔적이 누구 한 마디에 끝났습니까? 어떻게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갔습니까? 물에 들어갔습니까? 들어갈 필요가 없지요. 인간이 하는 방식이 아니라니까요.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집사님!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 "이야기해도 당신은 모를거야." "왜?" "당신이 모르는 방식, 당신이 해낼 수 없는 방식이니까.. " 만약에 "이렇게 했다." 하면 그대로 흉내(모방)낼 거에요.

그런데 모방하거나 흉내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행함없이 구원받은 거에요.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해서 나도 몰라. 어떤 분이 와서 대신 죽으심으로써 그냥 죄를 가져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져가실 때 내가 쓰레기 분리수거해서 내놓았습니까? 그래서 새벽에 가져가는 그런 방식이에요? 그냥 살았어요. 그냥 살았는데 그냥 죄가 없어졌어요.

38년 된 병자가 자기 딴에 조금 더 낫겠다고 미리 담요 준비하고 했습니까? 그런 거 없었어요. 그렇게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베데스다 못에 어슬렁거렸지요. 그래서 저는 주님이 암표 장사같아요. "입장권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팔렸답니다." "두 장 있는데.. 다 보이니까 따라 와, 따라 와." 그리고는 경기장 바깥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데에 가가지고 "용서해줄게." 이렇게 해가지고 천국 가는거에요. 예수님하고 자기들끼리만..

그러니까 그 방식은 내가 아는 방식이 아닌 방식이죠. 따라서 우리는 내가 아는 방식, 내가 할 수 있는 방식 같으면 "내가 이렇게 준비했습니다."가 되는데 내가 일체 아는 방식이 없이 했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히 주님의 행하심만 증거할 뿐이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누가 너더러 안식일날 담요 들고 걸어가라 하더냐?" "나를 낫게 하신, 일방적으로 낫게 하신 분이 나보고 티내고 이렇게 걸어가라고 합디다." "그 사람이 누군데?" "나는 모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도 마찬가지죠.

"누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한테 묻지 마세요. 왜? 나는 눈뜬 것, 피동적으로 당한 것밖에 없기 때문에.." 내가 능동적으로 뭘 했으면 "이렇게 했더니만 구원이 되더라"가 되는데 그냥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저보고 그런 걸 물으면 안 돼죠.

강간 당한 여자보고 책임 물으면 안 됩니다. "옷차림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물으면 안 돼요. 그냥 당한 거죠. 지금 우리는 주님한테 폭행당한 거에요. 정신적으로.

정리합시다. "안식일과 할례를 어떻게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못 지킨 것을 통해서 죄인 되면 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려고 애쓰는 것도 죕니다. 안식일을 못 지켰다고 내가 후회하는 그것도 죕니다. 그래서 우리(성도)가 인생을 살면서 후회한다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죠.

후회한다는 말은 '조금만 잘했으면 될 건데..' 이러잖아요. 아직도 자기가 개과천선할 만한 믿음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런 믿음은 갖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당하는 것뿐입니다. '옷차림만 좋았으면 성폭행 안 당하는 건데..' 그러지 마세요. 그냥 당하면 당하는 거에요.

의의로 성경해석 쉽지요? 자, 그런데 오늘 여기 23절 봅시다. 안식일에 사람의 무엇을 건전케 한다고 했습니까? 전신이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요한복음 14장에도 나오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니까 베드로가 "발만 씻지 마시고" 하니까 "발만 씻어도 된다." 다 씻은 것이 되죠. 전신이죠. 전신이란 말은 구원받고 난 뒤에 우리가 행할 것이 아직 남아있다? 안 남아있다?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구원시켜 주는 십자가가 그냥 트랙터에 엔진(발동기) 시동 거는 그 정도가 아니에요.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댈 게 없어요. 이런 얼굴 가지고 성형외과 의사에게 한 번 찾아가 보세요. 손댈 게 없어요. "우리 병원 오지 마세요. 손댈 게 없는데 뭐. 완전한데 뭘 고쳐요. 견적 안 나옵니다. 손댈 거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손대지 않을 때 가장 하나님께 영광을 끼쳐요. 그러면 내가 내 맘에 안 들어서 손대고 싶을 때 그 사람은 주님의 영광을 까먹고 있는 중입니다. 두 귀신쯤 들어갔어요. "손대라." "예수 믿는데 이런 짓 해도 되겠어?" "그거 고치면 더 영광 돌릴텐데.." 이것 큰 유혹거립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이번 만 잘 된다면..' 하는 그 자체가 이미 마귀의 유혹이 들어온 겁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는 망가졌기 때문에 망가진 인간에게 거기다가 이쁘게, 바짝 마른 뼈에게 호랑이 문신 새겨봐야 아무도 겁 안 먹습니다. 뼈긴 뼌데 호랑이 문신 새기고 이런 거 새겨봤자 조폭 뼈 되는 거 아닝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우리 속에 살아있습니다. 왜 살아있는가?

바로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되었다, 그 죄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마귀한테 시험받는 것을 넉넉하게 허락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백차례 마귀한테 공격을 받고 마귀의 정찰기가 넘어와서 정찰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남자들한테는 프로야구, 여자들한테는 드라마에요. 프르야구 이기고 지고, 강정호가 홈런치고 하는 것에 따라서 남자들의 직장생활이 달라져요.

LG하고 삼성하고 야구를 했는데 9대 일로 삼성이 지고 있었어요. 그 게임에서 삼성이 15대 9로 이겼습니다. LG팬들은 일이 손에 안 잡힙니다. 드라마에 꼭 못된 게 점점 잘 되고 착한 것들은 점점 궁지에 몰릴 때 하루종일 집 안에 별로 기분이 안 좋습니다. 그런데 벌써 70회가 넘어가고 드디어 역전되어가지고 못된 게 잘 안 되고 잘된 게 복수가 되게 되면 웬지 기분이 좋게 돼요. 왜? '내가 응원했던건데..'

이것이 뭐냐면 이 세상과 우리는 한 덩어리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죄"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죄라는 것이 뭔 줄 몰라요. 짓고 난 뒤에 죄를 알지 우리는 죄를 몰라요. 그냥 세상을 닮아가요. 세상에 한 통속이 되고 세상을 모방하고 세상하고 통해도 너무 잘 통해.

이게 저줏거리에요. 그래서 세상과 우리는 너무 잘 통하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싫어해요. 왜? 거기에는 일거에 폭격을 해서 다 조져버리고 다 불바다 만들어 놓으니까. 그래서 그런 책이 싫은 거에요. 비록 성경책이지만, 성경책이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의 구미에 영 땡기지를 않아요.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왜? 너무 과격해서. 너무 과격해서. 소박한 나만의 세계, 아름다운 소년의 꿈과 소녀의 꿈, 그런 꿈이라도 어느 정도 허락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것 만큼은 손은 안 댔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남은 나의 자존심, 나의 의미가 되는 그런 것 임재범이 불렀던 하나님 모든 것을 다 바칠 테니까 저 여자 만큼은 허락해 달라는 고백, 고해, 그것처럼 뭔가 "제발 이것만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목을 내놓아도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자식(주로) 만큼은 하나님 허락해 주신다면 자식을 위해서 대신 교도소에 갈 테니까 자식 만큼은 지켜주옵소서." 이런 거요.

그것이 우리에게 죄가 나타나는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수고, 종교활동 왜? 우리의 욕망은 어느 정도인지 우리의 욕망의 탱크는 어느 정도인지 그 깊이를 감을 못 잡아요. 이것은 아무리 해도 부족해요. 끝도 없어요. 바닦이 없어요. "이 정도면 됐습니다." 하는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욕망이 벌써 또 생성되어져요.

어떤 사람은 골프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당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주부도박단, 산속에 비닐하우스에 들어가서 화투치고 어떤 사람은 프로야구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마라톤에 미치고 또 조깅에 미친 사람이 있고 전부다 거기에다가 올인하는 거에요. 그렇게 미치고 해도 예수님한테 미친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한테 미쳤습니까? 그러면 죄에요. 그것도 다 욕망이에요. 분명히 노림수가 이상해요. 뭔가가 있어요. 사도바울은 내가 미쳐도 주께 미쳤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러면 사도바울이 그런가? 성령이 그렇게 하시죠. 성령이. 우리도 마찬가지고. 사도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지만 성령께서 미치게 만드는 일을 하셔요.

그러니까 본인이 예수에 미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성령이 와서 하시지 본인이 미치지 않아요. 왜? 인간은 반드시 날 때부터 나라는 것의 의미를 두게 마련이에요.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 )라는 구조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반드시 나는 ( )다. 나는 순교자다. 성도다. 나는 달인이다. 뭐가 반드시 ( ) 안에 있어요. 이 틀 자체를 포기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 틀 자체가 죄라는 겁니다. 이것을 포기하라고 해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어요.

예수 신앙이고 성령을 수십년 받아도 이 틀은 절대로 죽을 때까지 포기 안 해요. 아니 할 수가 없어요. 끝까지 주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십니다. 다만 이 자리가 아무리 우리가 바르게 그 자리에 사는 것 같지만 이 자리의 내용이 그때그때마다 바뀌어질 뿐이에요. '나는 전에는 술,담배 고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성경공부해서 성경의 달인이다.'

그런데 성경공부하면 의인입니까? 그 성경공부를 함으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 "나는 이 정도야." 하는 것을 과시하는 마지막 카드를 본인의 욕망이 만들어 낸다니까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잖아요. 우리 안 죽습니까? 죽어가는 거에요. 죽어갈 때는 이유가 있어요. 왜? 죄를 지었으니까 죽지요. 죄는 어디서 나오는가? 욕심. 욕심은 뭐냐?

욕심은 바로 내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율법이라는 것은요 우리는 평생 걸려도 못 지키고 바리새인이라고 욕할 것 없어요. 율법에서 우리는 평생동안 바리새인처럼 몇몇 율법을 가지고 나의 건전함과 나의 고상함을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온전한 자아와 내가 그나마도 고마고만 유지하는 자아, 이 두 자아가 평생동안 우리 내부에서 싸우게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 7장에 나오죠. "내 속은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지만 또 다른 내가 있어 나를 사로잡아오는구나." 주께서는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워서 이 모든 구조가 우리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런 작업에 유일한 주인공으로서 우리를 재료로 활용해서 주님만 주님답게 드러내는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이용당한 겁니다. 예수님 주 되심에 우리가 이용당한 거에요. 즐겨 이용당합시다.

그 다음에 봅시다. 25~26절에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이 말은 뭔가 하면은 곧 27절을 말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거에요. 27절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아까 제가 시간의 벽지라고 했지요? 시간의 벽지라는 것을 무슨 뜻으로 사용했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걸쳐있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해석들을 주께서는 다 뜯어낸다는 뜻입니다. 벽지를 뜯어내야 알맹이가 있잖아요. 율법은 바로 주님이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해석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이것이 시간에 관한 거라면 27절에 공간에 관한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외부에 있는 개체를 분석할 때 시간과 공간으로 분석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 자아가 자아를 구축할 때 나는 몇 살이며 어느 집 출신이고 고향은 어디라 하는 것으로 "나는 ( )다." 를 성립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향 어디야?" "지금 몇 살이야?" 시간과 공간으로서 우리 자아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예를 들어 봅시다. 아브람의 고향은 어딥니까? 갈대아 우르 지방이죠.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고향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는 없다고 히브리서 11장에 되어 있지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지고 거기에다가 뭘 중첩시켰느냐 하면은 이 땅에 고향이 없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본향이 있는 자를 아브라함에다가 중첩을 시키는 거에요. 야곱의 고향은 어딥니까? 가나안 땅이죠. 그러나 이스라엘 고향은 어디에요? 없지요? 야곱에다가 뭘 중첩시켰어요? 이스라엘을 중첩을 시킨 거에요.

그러니까 야곱은 날로 쇠퇴해야 되고 이스라엘은 날로 흥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어디에 갑니까? 지남철이 땅에서 어디로 올라가요? 지남철이 위에 있기 때문에 흙(땅)에 있는 것들을 위로 잡아당겨야 될 것 아닙니까? 왜? 고향이 하늘이니까.. 이 고향이라는 것이 지상에 없음이죠. 없음이 있음을 체포해서 없음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있음 자체가 무슨 문제가 있는데 왜 문제가 있는가 하면 인생이 있다는 말은 자기 부모가 있고 모든 것이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없음에서 나왔다면 그것 자체를 도저히 알지 못하게 막아버려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너 누구야?" 하면 "나 없는 데서 생겼다." 이렇게 이야기를 안 하잖아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늘 염려는 오늘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 오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고 되어 있지요? 그러면 저녁이 되면 우리는 잠을 자게 되고 잠자게 되면 의식이 없고 우리는 있느냐 없느냐도 이미 우리 소관이 아니지요. 의식이 없이 잠 잤으니까. 자다가 일어나서 "나 있다." 이러지 않잖아요?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날 얘기했잖아요. 광야의 특징은 뭐냐하면 모든 것을 하루하루로 잘라버린다고 했죠? 다른 말로 하면 일용할 양식인데 언제만 이틀치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안식을 보여줄 때는 이틀치를 줘요. 그 다음 지나면 또 하루치만 줘요. 그리고 욕심내서 많이 긁어모으면 이게 또 썩어버려요. 벌레가 일고 또 썩어버리고.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 자체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썩는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왜 썩느냐? 썩은 내가 나니까 성도지. 썩은 걸 아니까. 내가 지금 늙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아니까 우리가 성도 맞잖아요. 인간은 중용을 못 이긴다고 했잖아요.

"너 어디서 왔어?" 누가 묻습니까? "니는 어디서 왔는데?" "그들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합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왔어요." 이렇게 하겠죠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4,892 우리교회 피할 길 150920 고린도전서 15-09-20
14,891 설교 피할 길(고린도전서 10:12-13) 고린도전서 15-09-20
14,890 자유게시판 127강-YouTube강의(말씀의 기능)150917-이 근호 목사 로마서 15-09-19
14,889 자유게시판 126강-YouTube강의(교만)150917-이 근호 목사 로마서 15-09-19
14,888 강의 나+잉여 150918 마가복음 15-09-19
14,887 자유게시판 201509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6-칼 바르트 에스겔 15-09-18
14,886 자유게시판 201509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6-칼 바르트 [신학] 15-09-18
14,885 강의 실패자 150917 요한복음 15-09-18
14,884 강의 유튜브(126강, 127강) 교만, 말씀의 기능 150917 로마서 15-09-18
14,883 자유게시판 4강-창 1장 9-10(땅)150916-이 근호 목사 창세기 15-09-17
14,882 묻고답하기 도마의손 요한복음 15-09-17
14,881 우리교회 땅 150916 예레미야 15-09-16
14,880 자유게시판 대전- 67강 놀라운 구원(마 19:1-22) 마태복음 15-09-16
14,879 자유게시판 대전-(사무엘5강) 완제품 (사무엘상 2:2-9) 사무엘상 15-09-16
열람 ➜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09-16
14,877 강의 칼 바르트 150915 [신학] 15-09-15
14,876 자유게시판 56강-고전 10장 7-11(사건의 거울)150913-이 근호목사 고린도전서 15-09-14
14,875 자유게시판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09-14
14,874 묻고답하기 가계의 흐르는 저주 - 15-09-14
14,873 자유게시판 48강-신 8장 15-17절(하나님의 시험)150913-이 근호 목사 신명기 15-09-13
14,872 자유게시판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b-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15-09-13
14,871 우리교회 하나님의 시험 150913 신명기 15-09-13
14,870 우리교회 노아 150913 아가서 15-09-13
14,869 우리교회 사건의 거울 150913 고린도전서 15-09-13
14,868 설교 사건의 거울(고린도전서 10:7-11) 고린도전서 15-09-1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