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a-이 근호 목사
이름 : 충성모(IP:61.77.84.13)
요한복음 7장 22절(가락-율법의 연속성)150903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7장 22절부터 볼 차례입니다. 7장 22절을 보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특수하게 해당되죠. 다른 이방 민족들에게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을 주고 지키라는 그런 관계에서 이미 배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이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 그 당시 유대인들을 보고 이야기하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론했다는 말은 그 율법과 예수님이 관련성이 있다는 말이에요.
관련성이 있다는 말은 이방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알려면 율법과 관련성을 짓고 율법에 의해서 기다려진 메시야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알아야 되는데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힘든 인생, 이렇게 고생만 하는 인생, 죽어서 좋은 데 보내주지 않으렵니까.'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나라는 존재를 잘 되게 해주는 그런 예수로 인식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의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율법을 거론했는데 이방인들은 율법을 배제시켜버리고 '무조건 나를 잘해주시면 얼마든지 내가 순종할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그 메시야상을 억지로 예수님과 일치하려는 그러한 무리수를 두게 되는 셈입니다. 됩니까? 안 되지요?
그래서 이 본문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일단은 유대인을 거쳐야 된다는 거에요. 유대인 거치고 이방인에게 가야지 유대인에게 배척 받지 않고 이방인에게 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11장에 나오잖아요.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 나오잖아요. 또 그것을 언급하고 난 뒤에 그 남아있는 티오(빈자리)를 이방인이 채우는 것이지 원래 본감람나무 자체의 구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거에요.
철저하게 예수님은 유대인으로 오신 분이에요. 왜 그래야 되는가? 그게 언약의 일관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택한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 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 약속은 예수님에게도 유효하다, 그대로 계속 가는 거에요.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오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의 소망이나 소원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전에 합의하거나 협의하지도 않아요.
그냥 하나님의 율법대로 또는 말씀대로 실행에 옮겨버리면 그 결실물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저를 백성 만들어 달라'고 손들고 '저요, 저요.' 하고 불신자도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차라고 하는 것은 철로가 없는 데는 3m 떨어져도 못 가잖아요. 철로가 없으면... 그 철로 역할이 율법이 되고 언약이 되고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예수님이 좋아 보이니까 철로가 깔린 것은 생각도 않하고 그냥 오라는 거에요. 그냥, 그것은 머리속에 이미 다른 예수, 마귀가 가짜 예수를 유발시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오는 거에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었느냐? 왜 다른 민족에게 다 주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었느냐? 상당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같은 인간인데 왜 이스라엘에게만 주고 다른 민족에게는 안 주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서 나올 때 낮에 나왔어요? 밤에 나왔어요? 밤에 나왔습니다. 야곱의 언약에 의하면 밤은 누구 소속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천사의 소속이에요. 얍복 강에서. 낮이 되면 떠나야 돼요. 밤 되니까 대화가 되지 낮이 되면 천사도 야곱과 헤어져야 돼요. 그것은 왜그런가 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처음에 어둠이거든요. 어둠에서 빛이 생기는 그 창조의 과정을 반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그것이 담겨있습니다. 어둠이어야 돼요. 따라서 이방인이 구원받으려면 이방인이 무엇으로 되어야 합니까? 이방인이 어두움이었다는 것이 확정나고 난 뒤에 "어두운 곳에 빛이 비취리라"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겁니다. 갈릴리에 주님이 나타났을 때에 어두움에 빛이 비추는 겁니다. 이사야 9장에 나오는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그대로 인용한 대목이거든요.
어두워야 돼요. 요한복음 1장에 나오죠?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둡다는 것을 알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빛과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영생을 얻는 것에 관심이 있죠. 나라는 것은 무조건 가치있다고 보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가오는 철로, 그 철로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천국으로 깔아놓는 자기쪽에서부터 출발해서 도로 포장을 하는 거에요. 어디까지 이르도록? 예.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 자기쪽에서 그걸 까는 거에요.
이것은 야곱의 언약과 전혀 다르죠. 야곱의 언약은 야곱이 잠자고 있을 때에 꿈에 하나님의 사다리가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눈을 부릅뜨고 낮에 자기 자신을 천국에 데려가라는 겁니다. 인간의 밤은 죽은 자의 것입니다. 밤에는 의식이 없어요. 그냥 시체와 마찬가지라서. 자기의 꿈과 계획도 밤에는 그냥 취소가 되어서 그냥 꿈만 꿀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인간은 낮 중심이에요.
하나님은 밤 중심이에요. 이스라엘은 바로 밤에 나왔습니다. 어린양의 유월절 그 밤에 없는 곳에서 밤이 밀어내어서. 밤이 밀어내서 이스라엘이 되었다면 밤의 원칙, 밤의 공식이 작용하는 유일한 국가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율법이 담겨있습니다. 그 율법을 가지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어린양의 피를 유발했거든요.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치게 함으로써 언약이 그 다음 언약까지 계속해서 유지되는 공식은 대신해서 흠없는 제물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정된 제물이 하나님 앞에 제공되는 조건하에 하나님께서 그 구원의 약속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죠. 5년 전에 예수님 믿었다. 3년 전에 십자가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요. 왜냐하면 내가 믿은 게 아니고 믿게 하셨다면 믿게 하신 그 속에 십자가가 평생동안 반복되는 공식이 함께 들어있어요.
안마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안마기 사기 전에 그 가게에서 한번 앉아보니까 두두두두 해가지고 좋다 말이죠. 그런데 집에 와서는 안 되면 어떡할거에요? 반품해야 돼죠? 십자가가 들어오면은 '십자가 믿었다. 이제는 십자가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 생명 가졌다.'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두두두두 계속해서 십자가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 십자가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투입되는 재료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바울의 권면과 사도바울의 교훈들이 투입됩니다.
"주께서 너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그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임을 다시 안마기에 앉아서 두두두두 하고 느끼게 되죠.
그런데 여기에서 모세의 율법을 언급하면서 상당히 중요한 정리해야 될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했잖아요. 창조한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이것을 자연 또는 대자연이라고 합니다. 이 자연은 연속성이에요. 자연은 전부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자연은 연결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죄 짓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가인의 후손들이 자연과 맞싸워서 쟁기를 들고 도시를 만들고 자연과 싸움에 들어가요. 그러니까 힘들죠. 산다는 게. 왜? 자연은 그때 그 풍족한 자연이 아니고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있는 사람을 못살게 만드는 자연이고 거기에서 인간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서 자기 위주로 살면서 그 자연을 견뎌야 되니까. 세상에 있는 지진이나 폭풍은 자기 맘대로 안 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서 생겨난 게 뭔가 하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화해하는 것입니다. 좋은 제스추어를 취하는 겁니다. 내가 신을 이렇게 좋아합니다. 최초로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인입니다. 가인이 신에게 뇌물을 바치죠. 제물을 바치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주신 거니까 이렇게 알아모시겠습니다.' 하고 바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화해하는 제스추어에요.
그런데 화해가 되려면 신이 받아주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창세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은 뮙니까? 안 받죠? 그것은 뭐냐 하면 화해할 조건은 네가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화해하는 조건마저도 누가 제시한다? 하나님 쪽에서 따로 준비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걸 동생 아벨을 통해서 나타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이 율법과 관련 되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 자연은 어쨋든 연속성인데 인간이 자연을 연속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불연속적인 것을 집어넣습니다. 이게 뭐냐면 '언어'입니다. 그 언어라는 것이 들어가 버리면 하나의 틀을 잡기 때문에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컵이 있잖아요. 또 전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컵과 전등 사이에 어떻게 됩니까? 이어지지 않지요. 끊어졌으니까 이것을 뭘로 하냐하면 사물이라고 하고 물건이라고 하는데 물건에는 이름을 붙여요.
컵은 컵이고 전등은 전등으로 딱 끝나버려요. 그런데 대자연은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대자연을 가위가지고 짤라보세요. 공기 중에 공기를 옆의 공기와 짜르면 짤려집니까? 모두 연결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을 자기 위주로 편리하기 위해서 언어를 집어넣고 이름을 붙여서 그것을 필요한 사물로 해놓고 배열을 정해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질서가 생기죠.
이 질서가 뭐냐 종교의 주문 같은 겁니다. 주문을 외우는 이유는 인간의 불연속적인 언어를 가지고 대자연을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도를 실컷하고 기도 뒤에다가 뭘 붙이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몇 자 집어넣으면 '대자연이 내 말의 효과를 따라서 뭔가 나한테 유리하도록 자체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재편성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언어에 있었으면 좋겠네.' 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 수련회 할 때에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 이야기 했잖아요. 가사에 보면 뭡니까? '떠난 사람이 그쪽도 아마 나를 사랑했다고 나는 일방적으로 믿을래'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불연속적인 모든 것을 연속적인 것으로 바구니에 담으려고 하는 거에요. 오병이어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배고프잖아요? 배고플 때 떡과 물고기를 주니까 배부르잖아요. 그러면 끝난 문제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시냐면은 네가 비록 배고프다고 요청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제공한 것은 이 요청에 부합해서 배 부를 만큼 준 게 아니고 열두 광주리의 잉여, 여분의 것이 남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질서와 언어를 쑤셔넣어도 숭숭숭 손가락 사이로 빠지는 것이 있어요. 인간은 자연을 다스릴 수 없는 겁니다. 자기 필요한 것만 골라담아서 어떤 언어체계를 만들기는 하지만 자연이 거기에 다 담기지를 않아요. 여분(잉여)의 것이 빠져나온다니까요. 빠져나온 것이 결국은 뭘로 바뀌었는가 빠져나온다는 것은 결국 감당을 다 못했으니까 그게 바로 폭풍이고 지진이고 재앙이고 가뭄이고 갑자기 가족의 몸이 아프다든지 하는 것들이잖아요.
'진작 가뭄을 위해서 기도할 껄' 해도 소용이 없어요. 이미 가물어버리면. 장마올 때 장마만 올 줄 알았더니만 이렇게 태풍이 지나갈 줄 몰랐다. 진작 알았으면 한 250mm만 내리시고 그 다음 260mm부터는 북한에 내리옵소서. 이렇게 흥정을 해야 될텐데, 우리는 그런 내 말과 내 질서체계로 자연의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인간은 자연을 대할 때 그런 식으로 언어와 질서를 동원해가지고 그나마도 버티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아요.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 창세기에 첫째 날이죠. 첫째 날 빛이 있으라 둘째 날 하늘을 만드시고 셋째 날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를 내라 이렇게 되는데 날이 계속 이어지면 여덟째, 아홉째, 열째 이렇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디서 스톱이 됩니까? 일곱째 날에서 스톱이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일곱째 날에서 스톱이 되는지 몰라요. 왜 일곱, 1.2.3.4.5... 가 되는지.
이 말은 뭐냐면 대자연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계획에 의해서 자연을 일방적으로 유지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자연 속에 누가 포함되는가 하면 우리 인간이 포함이 되어있어요. 그러면 인간은 보통 큰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 있을 때는 일부분으로서 그냥 포함 되면 그만이에요.그런데 뭘 따먹었어요?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따먹는 순간 인간은 그 부분이면서도 부분이 아닌 것처럼, 마치 관찰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기가 따로 나와 버렸어요.
그러면 뭐냐하면 인간이 뭘 만든다? 인간이 바로 현실을 만들어요. 세상은 ( )가 만든다. ( )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인간이 들어갑니다. 인간이 그때부터 자기를 위한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각자 각자 제 각기 니 세상 내 세상은 다 달라요. 니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은 다 달라요. 공산주의 북한이 보는 세상과 남쪽에서 보는 것이 달라요. 남쪽에서는 "유감" 이라고 하는 것을 사과라고 보지 않고 그냥 "안 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해요. 보는 것이 다 달라요.
세상은 자기가 다 만든다는 뜻이죠. 자기가 만들면서 자기가 만드는 방법으로서 언어라는 것, 법이라는 것을 동원시켜가지고 '신이시여, 나름대로 법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요정도 복은 기본으로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내가 또 정신차려가지고 더 착한 일을 하게 되면 마일리지와 보너스(성과금)은 또 주셔야 됩니데이.' 이런 식으로 인간은 자기 세계를 구축합니다.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선, 악은 누구를 위한 선, 악입니까? 자기를 위한 선, 악이죠. 그러나 원래 선악과는 누구를 위한 선악과입니까? 하나님을 위한 선악과인데 남의 나무 과실을 지가 따먹고 이제는 자기를 위한 선악체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 선악체계에 율법이 들어오니까 하나의 법이 들어오니까 '옳다쿠나 드디어 이제 땡잡았다.' 그 율법이 들어오면 그 율법의 벌칙도 같이 들어오겠죠. 이걸 지키면 복을 받고, 못 지키면 벌을 받는다는 게 오니까 이제는 완전히 신이 났어요.
왜? 평소에 자기가 세워놓은 법에 대해서 자기가 지키기 때문에. 그런데 그 법이 인간들이 다루는 법이 아니고 누가 다룬다? 예수님이 자기가 주어 되기 위해서 다루는 법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법을 지키고 인간이 만든 그 법에 대들면 손가락 사이에 그 율법의 모든 진수는 다 빠져버리고 없어요.
국수 건질 때 망 가지고 건져보세요. 국수만 남고 물은 빠지잖아요. 그처럼 다 빠져요. 쑥쑥 다 빠지고 자기한테 유리한 거만, 자기 의롭게 될 것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다 빠져버린다고요.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6장에서 율법을 언급하는 거에요. 너희들이 율법을 국수건지 듯이 다 빠졌으니까 율법에 의하면 너희들는 나를 죽이도록 되어 있다. 너희들이 신주단지 모시 듯이 하는 율법에 의하면 필히 유대인들은 누구를 죽이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되어 있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도 율법 아는데 니가 귀신 들렸구나. 율법에 니 죽인다는 대목이 어디 나오는데?" 이렇게 나온 거에요.
누구 말이 맞아요? 그림을 하나 그려 봅시다. 율법은 문자, 언어로 되어 있지요? 언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로 제 10계명밖에 없지만 예를 들어서 제 11계명, 장차 예수라고 자칭하는 인간이 올 텐데 그때는 유대인들이 그 예수를 죽이게 될 것이다. 라고 문자로 나와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말에 동의하겠죠? 왜? 11계명이기 때문에. 그러나 10계명은 탐내지 말라로 끝나 버려요. 그 뒤에 예수에 관련된 조항은 없어요. 11계명 자체가 없어요.
없잖아요? 11계명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 말이 맞는 거에요. 왜? '조항에 없는 이야기를 니가 왜 덧붙이냐?'는 겁니다. 손가락 사이로 슝슝 다 빠지고 주님은 뭡니까? 본래 율법은 인간이 지킬 수 있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을 만드신 분(예수님)이 율법을 지키라고 준 자기 율법인데...
목욕탕에 옷 벗어 놓았는데 자기 옷을 입어야지 나보다 덩치 큰 옷을 입으면 안 되잖아요? 율법은 자기가 입기 위해서 있는 옷인데 유대인들은 자기 옷도 아닌데 남의 옷을 가지고 그것도 그냥 "안 맞다." 하면 되는데 그것을 가위로 오려 재단을 해가지고 자기 몸에 딱 맞는 율법을 만들어놓았어요. 그러면 그 율법을 자르고 남는 모퉁이를 모아놓게 되면 반드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율법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로마서 2장에 나오는 것인데 "할례를 행하라." 했지요? 할례를 행하라 했을 때 유대인들 생각은 뭐냐면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버리면 그것이 할례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뭘 놓쳤지요? 신명기와 예레미야에 보면 뭡니까? "할례를 행하되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했죠? 마음의 할례를 무슨 수로 행합니까? 마음의 끝을 어떻게 잘라요? 자르는 가위가 있습니까?
아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대자연은 연속되어 있지요? 인간 자체는 단독적으로는 불연속적입니다. 불연속적이므로 연속적인 것을 감당을 다 못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자기 임의대로 구분지어요. 요거는 코스모스고, 요거는 채송화고.. 이렇게 구분지어요. 채송화와 코스모스를 연결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다 빠져요. 채송화와 코스모스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보이지 않는 소리, 그런 것은 다 빠져요. 그냥 내가 보기에 코스모스와 채송화로 딱 구분돼요.
그리고 사물에다 뭘 붙입니까? 이름을 붙이는 거죠. 그 이름을 붙일 때 그 사물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 먼저 본인한테 이름을 붙이죠(부모가 붙이고 또 자기 자식에게 붙이죠). 그 이름을 붙이는 쪽이 뭘 만든다? 세상을 만들죠. 그 만든 세상이 이름의 세상, 언어의 세계가 되는 거에요. 그 세계는 불연속되고 연속되지 않아요. 왜 코스모스가 있느냐? 몰라요. 간단한 질문 아닙니까?
"저것을 코스모스라고 한다." "선생님 질문 있습니다. 왜 코스모스는 왜 있습니까?" "야,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코스모스는 키 작은 것으로부터 진화되었어." "진화될 때 흐름은 어떻게 됩니까?" "흐름은 다 끊어졌어." "흐름이 다 끊어졌으면 도약이 되는데 도약이 되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잖아요?" "인간은 그것밖에 몰라. 입 다물고 있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연속되지 않은 존재에게 "이 우주는 누가 만들었지?" 라고 하면 "주님께서 율법으로 만들었어요." 이 우주 전체를 말씀으로 만드셨다고요. 그게 시편 119편에 보면 잘 나와 있어요.
그래서 창세기 1장부터 성경 전체가 뭐냐 하면 "인간들아! 말씀대로 살아라." 이거에요. "말씀에 합해서 살아라." 이 말을 "말씀을 지켜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흐름대로 말씀의 사람이 발생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인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관심이 없다는 말은 그 사람은 인간이라고 우겨도 인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연속적인 존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말씀에 관계 없으면 나같이 닮은 인간만 인간이고 지 마음에 안 들면 짐승이 되어요. '저 짐승같은 놈!' 이 말은 '너는 왜 나 안 같애?' 이런 뜻이에요.
"저, 이단!" 이거 무슨 뜻입니까? "나는 정통이다." 연예인들 중에 괜히 미운 사람있지요. 나한테 해준 것도 없는데 괜히 미운 사람.. 그건 얼굴 모습이 자기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거에요. 그런데 자기 취향이 아니니까 미워해도 됩니까? 아니죠. 이게 전부다 "나"라는 카테고리(범주)에 갇혀 있는 거에요.
세상은 누가 만든다? 내가 만들어요. 우리는 24시간 내 세상 만드는 것밖에 못 해요. 바깥에 있는 것도 가져올 때 내 것이 되고.. 내 것 아닌 것은 쓰레기 버리듯이 갖다 비우면 돼요. 그래서 자기 부모도 자기 말 안 들으면 "문딩이, 나가 죽어라" 이렇게 하잖아요. "이 쓰레기야 나가 죽어라" 내 맘에 안 든다 이 말이거든요.
마음에 들면 "내 새끼야" 하지요. 갑자기 자기 소유가 되어 버려요. 그런 인간에게 율법을 줬다. 율법을 주니까 이 율법 가지고 자기 세계 만드는 데 보탬이 되는 법인 줄 알고, 하나님이 내 세계 만드는 데 협조하는 줄 알고 모아 놓은 거에요. 모아 놓고 뭐 하느냐? 언어니까 언어대로 하는 거에요.
그런데 언어 속에 예수님만 있지 나는 없거든요. 그러니까 "니가 귀신 들렸다 율법에 어디 그런 내용이 있느냐?" 하는 거에요. 유대인들은 원래 예수님한테 반박을 해요. "니가 죽는다는 내용이 율법에 있느냐?"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22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라고 되어 있죠? 자, (오늘 제일 어려운 대목에 왔는데) 지금 율법에 대해서 누가 누구한테 줬다고 얘기해요. 예수님께서. 누가 누구한테 줬느냐? 모세가 너희 조상에게 주었다. 그렇게 되어 있죠 . 괄호 열고는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까지 언급되지만 일단은 모세가 그들의 조상에게 율법을 주었잖아요.
그러면 이건 뭡니까? 이미 율법 자체에 뭐가 덮혀 있다는 말입니까? "역사의 이끼"가 덮혀 있지요? 그러니까 주님은 "역사"를 뭐로 보시는가 하면 "벽지"로 보는 거에요. 그 시간의 벽지를 뜯어 내는 겁니다. 모세가 주었다는 말은 결국 뭡니까? 모세는 또 누가 낳았느냐를 언급해야지요. 모세는 누가 주었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때문에 율법을 주었기 때문에 모세가 왔겠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중간에 공통점이 들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아들의 죽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직접 아들을 바쳤고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아들이 저주 받았죠? 단순히 복 받은 정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저주를 받았잖아요. 그리고 자기가 원치 않는 아들에게 뭐가 돌아갔습니까? 축복이 돌아갔잖아요. 에서를 밀어줬는데 야곱이 거짓말해서 복을 받았다.
그러면 이삭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거짓말, 나쁜 짓 했으니까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서 나쁜 짓 하는 자를 벌하시고 속아넘어가는 피해자 편에 서서 세상이 모든 것이 정리가 되어야 되는데 정리가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거짓말 하는 쪽으로 마감이 되었죠. 참 정의로운 하나님입니까? 피해입은 자가 있는데 피해 입은 자는 뭘 받았다? 피해 입은 자는 저주를 받고 거짓말 한 쪽은 복을 받는 세계.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 아닙니까?
그리고 그 야곱이 자기가 거짓말 한 이 모든 것의 그 의미를 안 것은 바로 자기도 아들 형제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독자, 요셉을 죽여버리죠. 아무리 관객들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야곱 본인, 아버지에게 요셉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왜? 알리바이가 성립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해서 유독 특별하게 입혀놓은 그 요셉의 옷에 피가 묻어 있으니까요. 요새 같으면 유전자 검사하겠는데 그떄는 그것도 안 되었죠?
짐승의 피면 짐승의 피인 줄 압니까? 모르잖아요? 그냥 피가 묻었으니까 그리고 증인이 한두 증인이 아닙니다. 증인이 열 명이라. 하여튼 그떄는 단결을 잘해. 입 다물고 있었어요. 아버지한테 그 짐승을 이야기한 형제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거에요. 얼마나 보세요. 인간이 권력에 약합니까? "봤지? 형 말 안 들으면 동생도 죽는 거 알지?"
살아있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는 거에요. 약속이 살아있고 말씀이 살아있으면 인간은 다 죽은 거에요. 왜냐하면 말씀에 대해서 "좀 지켜보고요.."가 필요 없어요. 못 지킨 것으로 판명나면 이미 그 사람은 산 자가 아니고 끝까지 가봐야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가 시험 문제 받아봐야 0점입니다. 이름 써도 0점이에요. 0점 맞으라고 율법을 준 거에요. 선생님 중에 성질이 고약한 사람 같으면 해봐야 이름만 쓰고 먼저 나가는 아이 같으면요 시험지를 그냥 안 줘요. 다른 아이 같으면 "시험 잘 쳐라." 하고 고이 나눠주는데 이 아이한테는 시험지를 구겨서 팍 던지면서 "잘 쳐라! 이 놈아." 하고 던져줘요. "니 같은 게 어디 우리 반에 들어와가지고.. 잘 쳐! 임마." 하고 시험 자체가 그 인간을 모독하고 부정해버리죠.
그게 바로 율법이에요. 율법을 돌돌 말아가지고 정수리를 때리는데 유대인들은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고 시험지 들고 시험치고 있다니까요. "십계명을 지킬게요. 사도의 권면과 명령을 지켜서 우리는 바르게 삽시다." 이러고 지금 시험치고 있다니까요.
시간의 벽지를 뜯어내는 겁니다. "인간이 그동안 옛날에는 율법을 이렇게 지키고 이렇게 지켰다" 그 모든 율법을 지켰던 것을 다 '두두두두' 하고 전부다 인테리어를 새로 해요. 일군들 와가지고 흑판 다 끄집어내고 벽지 다 뜯어내버리면 역사라는 것이 뜯어져 나가죠. 그러면 역사 전체가 뭐에요? 인간이 율법을 지켜보려고 애썼던 그런 성과나 시도, 그 노력, 거기에 뭐가 투입되겠습니까?
율법 이렇게 하면 일주일만에 뗀다. 율법 abc. 율법정석. 정철 율법완성. 그런 율법 참고서를 유대인들은 율법 지키겠다고 온 국민에게다가 다 퍼뜨린 겁니다. 자기가 학원 강사(돛대)니까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제일 윗계급에 고상하게 놀고 있고, 무식해서 못 하는 사람들은 7단계, 제일 밑바닦에 율법도 못 지키는 자들이고 그들이 강도고 세리고 창기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누구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이 서열과 계급이 발생되었다는 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이 대자연을 인간이 자기의 의로움, 자기의 가치, 자기의 자존심을 어떻게든 챙겨보려고 시도했던 흔적들입니다.
흔히 요새 식으로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교리이고, 그게 바로 신학입니다. 교리, 신학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언어로 되어 있죠?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볼 때 여기 다섯 명의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이들이 삼위일체를 이해할 때 서로 덤벼들겠지요? 왜? 언어니까. 인간 내부에 의식이 언어로 짜여져 있거든요. 언어로 되어 있는데 언어의 기표(표기)가 자기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의사다." "나는 누구다." 이렇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잖아요.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의사다."라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의사라는 의미에 나는 합당하다.'라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언어 중에서 돌아다니는 "의사"라는 표현, 이 얼굴을 "기표"라고 합니다. 여기에 담긴 의미를 "기의"라고 합니다. "기표"와 "기의" 이것을 합해서 언어라고 합니다.
표기하는 방법 "나는 의사다."라고 차용함으로써 이것이 일시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국민연금제 잘못해가지고 걸려들면 "나는 조금 나빴습니다." "조금"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죠. "조금"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날아다니는, 우리가 쓰는 언어 중에 하나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 표현을 못 해요.
그래서 기껏 비스므레 한 언어를 동원해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구축할 때 그것이 한시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주니까 나는 누구인줄 모르죠. 하지만 율법만 지키면 졸지에 자기는 뭐가 되지요? 율법을 지키면 신명기에 보면 뭘 받는다? 복을 받지요. 그래서 자기는 복 받는 사람, 안 죽고 오래 살고 윤택하게 사는 사람이고 싶어하는 그 욕망에 기어이 율법을 지키려고 합니다.
아까 다섯 명이라고 했죠? 다섯 명이 지킨 것이 다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 다르지요. 왜? 세상은 누가 만들기 때문에? 내가 만들기 때문에. 세상은 내가 만들어요. 내 세상 내가 만들지 남이 만들어 줍니까? 자기 범주 내에서 내 세상 내가 만듭니다. 이왕 만드는 것 어떻게 만든다? 주님 앞에 복 받으면서 계속해서 도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세상을 만드는 거에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너는 율법 몇 개 지켰어?" "다섯 개", "나는 여섯 개" 이게 바로 예수님 찾아왔던 부자청년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나이다." 부자 청년의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제자들도 거기에 동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놀랬지요?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 이것은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바로 옆에서 듣다 보니까 자기 이야기라. 그러니까 "누가 구원 받겠습니까?" 주님의 뜻은 "아무도 구원 못 받는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러 온 게 아니야."
주님은 우리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 세상은 우리가 가 만든 세상 안에 내가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 세상을 버린다는 말은 그 안에 들어있는 나도 버리는 겁니다. 건질 만헤야 건지지 건져봐야 가치도 없는데 뭘 건져요. 주님께서 건지는 것은 오직 자기 세상(세계)만 건져요. 어떻게? 자기 세상의 일부를 가지고 우리한테 "칩"처럼 박아넣어요. 그것을 "임플란트"라고 합니다.
기초를 박아넣고 기초 위에다 전부다 예수님이 지킨 율법완성을 거기에다가 다 박아요. 그 다음에 그것을 가져가십니다. 그것을 박아넣을 때 교체가 되거든요. 그 교체가 뭐냐? 죽여버려요. 죽이고 대신 박아넣기 때문에 마치 이삭 옆에다가 수풀에 어린 양을 준비해놓고 양을 집어넣고 죽어야 될 이삭을 살려낼 때, 그 양이 있던 그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장소 이름)'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말이거든요. 이 말은 여호와께서 하실 기능 중에 하나가 발휘되었다는 말이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자기 생명을 갖고 들어오는 기능을 하세요. 이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붕 떠버려요. 만약에 이만기나 강호동처럼 덩치 큰 사람이 내가 앉아 있는데 여기서 밑에 팍 떨어지면 나는 붕 뜨지요? 밑에 기초 들어오고 우리는 내 자리 놓쳐버리고(잃어버리고) 붕 뜨고 공중에 떴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던 강호동이 턱 받아주게 되면 우리는 강호동 품속에서 의인이 됩니다.
차고 들어오고 우리는 자리 박탈당하고 붕 떴고 내려오면서 졸지에 이제는 나의 소뉴, 나의 세계는 날아가버리고 주님의 세계의 일부로서 부분으로서 우리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 작업 중에 하나가 바로 율법을 거론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율법을 감당할 수 없다. 너희들이 아는 언어체계, 세상체계에서는 율법의 정신을 전부다 수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22절) 자 이 말씀을 언급해봅시다. 이것을 누가 얘기했죠?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죠.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뭐냐면 바로 19절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요 대목을 계속 이어가는 겁니다.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했지요? 만약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한 사람 있으면 누가 안 죽는다? 예수님이 안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거론한다는 것은 내가 율법대로 죽는 스케줄은 이미 확정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그냥 죽으면 안 되지요. 율법을 준 사람에게 '아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자가 정말 없구나. 그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는 주님의 말이 정말 맞는 말이구나. 그것을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율법을 우리가 못 지켰다는 말은 율법을 지키려고 덤벼드는 우리 세계 자체가 문제가 있다.?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는 거죠? 문제가 있는 것을 다 모아놓으면 누구를 살해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미워하고 살해하게 되어 있는 그런 세력이 우리 안에 있다는 거죠.
그걸 가지고 우리는 우리 안에 그런 귀신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그냥 성경만 지키면 복 받는 줄 알고 문자대로 되는 줄 알고 그렇게 해보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할례 언급했죠. 그 다음에 안식일 언급했잖아요.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행하는 것은 그 당시에 누가 했습니까? 지금 유대인이 지금 하고 있죠? 너희들이 하는 할례와 그 안식일이 왜 결국은 나를 살해할 수밖에 없는 동기, 원인이 되는지를 주께서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이제 아시겠죠? 그것이 23절에 나옵니다. 한 번 봅시다.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자 유대인들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할 때에 무엇이 투입됩니까? 자신이 율법 지킨 것을 투입시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율법을 지켰으니까 분명히 선한 마일리지가 쌓일 것이고 그 마일리지 쌓인 것은 나한테는 필요 없고 저 사람에게 돌려주시면 저 사람은 분명히 죄가 많아 병 들고 아팠는데 내 남아도는 의로써 저 사람의 죄를 없애주시고 하나님의 그 자비를 받아서 낫게 해주세요.' 순서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날 그들이 열심히 해 봤는데 과연 사람이 온전하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여 우리가 안식일을 제대로 지켰습니다.'라고 하려면 반드시 우리들이 하는 모든 말발이 실제로 병든 자도 병이 낫는 그런 성과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장담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유대인 보기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위반자지요. 위반자인데 이상하게 안식일날 멀쩡하게 손마른 사람이 낫고, 38년 된 병자도 낫고 하니까 병이 낫는 루트, 하나님으로부터 병이 나아오는 그 통로가 어느 한 쪽은 가짜지요. 어느 쪽이 가짭니까? 유대인이 가짜고 진짜는 누굽니까? 예수님이 진짜지요.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이 진짜라고 고백하면 되는데 그걸 진짜라고 고백을 못 하는 이유가 "예수님이 하신 것이 진짭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율법 지키는 것하고 자기가 율법 지키는 것에 공통점이 없을 경우에는 누가 율법의 위반자가 됩니까? 논리상 본인이 위반자가 되지요. 위반자가 되어 버리면 그 다음에 더 큰 문제가 뭐냐?
사람이 율법을 위반했으면 어떤 대목에서 위반했는지 본인이 알아야 되는데 자신은 지금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거에요. 꼭 오늘의 한국교회 같애. 다 기도하고 열심히 "주여, 주여 집 사주세요." 그저 애기까지 동원시켜가지고 통성기도 다 시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집은 안 사주고.. 무슨 성과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있다고 우기는 거에요. 자기 세계니까. 그러면 이 안식일과 율법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는지는 그건 우리가 봐야 되겠지요. 자. 아까 배운 것을 복습해봅시다. 여기에 컵과 전등은 따로 구분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 다르기 때문에. 이것은 컵이고 이것은 전등이기 때문에. 컵 달라고 하는데 전등 달라고 하면 안 되요. 그 사람한테는 예의가 어긋나는 것이죠.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데
그러면 안식일은 십계명 제 4 계명이죠? 천주교에서는 3계명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할례는 십계명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계명이죠? 그러면 구분되지요? 구분 되면 뭡니까? 안식일은 안식일대로 행하고 할례는 행하면 되지요. 만약 할례만 행했는데 안식일은 자동적으로 지키는 그런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할례를 행해라. 안식일 그 십계명 무시해도 된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한 적이 없거든요.
십계명 지킬 것 지키고, 십계명도 그냥 십계명입니까? 일계명 지켜야 되고, 이계명, 삼계명,... 열계명 다 지켜야 되는데.. 그러면 아홉 개 지키고 한 개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십계명을 못 지킨 것이 되지요? 거기다가 추가해서 또 할례를 행해야 되고. 이게 하나로 통합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가 만약에 열심히 말씀대로 살았는데 집안에 우환이 생기고 일이 꼬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만 있어봐라 지난 번에 헌금을 했지? 11시 예배인데 10시 반까지는 갔잖아? 아! 세상에 성가대 하고 내 가운을 안 치웠네. 아 참, 다음에 다른 사람 것도 치워줄께요. 하나님. 이번에 내린 벌은 철회해 주세요. 아 그걸 빠뜨렸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지키는 조항들이 있어요. 하루에 석 장 성경보고 30분 기도하기. 이렇게 하는데 바빠서 성경 3장 보다가 전화가 와가지고 껌뻑 앚고 두 장밖에 못 봤을 때 그 다음에는 넉 장을 봐야돼요. 그래야 벌을 안 받아요. 그렇게 하든지.
'아하 지하철에 사람이 엎어 있는데 지갑에 보니까 천 원짜리인 줄 알았는데 만 원짜리밖에 없는데, 그걸 아셨구나.' 내 생각까지 다 알아가지고 '내가 다음에는 손이 짚히는 대로 하겠습니다. 재수 없어서 5만 원 걸려도 할 수 없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이래가지고 혼란스러워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것은 십 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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