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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509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죽음의 기호화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509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죽음의 기호화

이름 : 한윤범(IP:119.192.174.209)

201509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죽음의 기호화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제가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밤 요소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와서 유월절 넘어갈 때 천사 오는지 눈 부릅뜰 때 천사 봤겠어요?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어느 누구 눈에도 띠지 않는 방법으로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내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잡아낼 수 없어요. 구원 방식을.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결과가 되고 난 뒤에 소급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내 행함으로 구원된 건 아니었구나. 이게 벌써 넘어선 거예요. 자기 행함마저 자기 가치, 의미, 체면마저 넘게 하셨어요. 어떻게? S자 갈고리로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나를 주께서는 말씀으로 넘게 해서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는 뭐했는데? 자고 있었지, 뭐. 그게 나의 밤이니까. 나의 밤의 주님의 낮이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유월절 방식은 하나님의 백성은 알아서 혼자서 온전하게 다 해요. 99% 주님이 하고 1% 남겨두고, 이런 것 없습니다. 주께서 건드렸다면 더 이상 우리가 우리한테 건드릴 게 없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뭔가 손질해야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어린양 피로 했으면 그 자체로 완벽해요. 손대면 더 흠집만 나요. 손대면 지저분해져요. 도리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는 역할밖에 안 돼요.

예수 믿었으니까 찬양해드리겠습니다. 찬양대 만들고. 그게 도리어 주님의 은혜를 가리는 역할을 해요.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제가 헌금하겠습니다. 그 헌금이 주님의 십자가를 가려버려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그게 더 가린다고. 열두 사도들, 주님 알고 봉사하러 갔습니까? 성령 받고 고기 잡으러 갔어요. 딱 맞아요.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그런데 고기 잡으러 가서 정신 차려서 이래선 안 된다고 단결해서 교회 만들었습니까? 누가 찾아왔습니까? 바로 딱 그거에요. 주님이 찾아온 거예요. 자기 백성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아차. 요새 내가 정신 못 써서 널 데려간다는 게 빠뜨렸네. 이런 실수, 주님은 없습니다. 실수 안 하시는 분인 것을 믿읍시다. 자기 백성 빠뜨리는 법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택한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린다 했거든요. 끝까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데려가서 쥐고 놓치지 않고 기어이 가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밤에 다 이뤄져요. 우리는 낮에 살면서 사실은 밤이 운명을 쥐고 있다고. 내가 행할 수 없는 내가 행동할 수 없는 세계, 잠재적 세계가 구체적 울산바닥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한 번 구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 뭔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를 만들어내요. 늘. 나한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주시면서 만들어진 그것을 너는 말씀대로 임마누엘 되는 것이라고 우리한테 알려주죠. 내가 구원받는 것도 내가 알아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구원을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구원될 수밖에 없는 그런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나의 구원은 나의 숙제가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와 했던 과제고 숙제입니다. 그 숙제를 왜 내가 해요. 얼마나 나를 믿고 주님을 안 믿었으면 그 숙제를 내가 하려고 합니까?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더 낮아질까요, 더 부인할까요? 이런 식으로. 십자가 더 질까요? 자꾸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서 구원하려는 그 시도, 그것 주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출애굽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요소가 뭐냐? 처음엔 죽음이죠.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그게 밤에 이뤄지지요. 그 다음에 누룩 이야기하는데 누룩이 있어요, 없어요? 누룩 없음이거든요. 평소에 떡이란 우리가 애굽에서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해요. 뭔가 먹는다는 행위는 뭐냐 하면,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나를 살려주는 행위거든요. 살려내는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못이나 철, 의자 이런 건 안 먹어요. 뭔가 먹을 수 있는 것만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로 만드느냐? 우린 인간이거든요. 우릴 인간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누룩을 집어넣음으로써 율법이 들어오면 내가 율법화 돼요. 하나님의 율법 덩어리가 돼요. 율법 덩어리가 되게 되면, 나는 애굽 사람과 특이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주께서 다른 제품으로 만들어버려요.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떡을 먹고, 먹어도 맛있게 폭신폭신하게 먹기 좋은 걸 해야 돼요. 딱딱하고 맛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되거든요.

저쪽은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것 먹으라고 해.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따로 분리시키는 겁니다. 누룩이 없는 떡을 먹어야 돼요. 떡을 먹는데 딱딱하잖아요. 맛이 없지요. 이것은 기존의 인간과 전혀 다른 별개의 인간으로 전환 중이라는 과정을 누룩 없는 떡으로 묘사해줘야 네 자체가 율법화, 말씀화가 되는 겁니다.

여기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지요. 염소 새끼와 어미는 평소에 같이 다녀요. 혼자 돌아다니는 새끼는 없어요. 엄마 옆에 같이 붙어있다고. 그래서 한 덩어리로 봐야 돼요. 이게 우리 보기에는 염소고 염소 새끼잖아요. 주님께서 이걸 율법의 기호로 바꿔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염소와 염소 새끼가 합쳐서 율법화 돼버려요. 그 자체가 율법화 되게 되면 그 안에 뭘 새기느냐 하면, 평소에는 같이 뛰어놀다가 죽는 순간에는 같은 육신적 차원이 개입하지 못하게 해라. 엄마의 젖이 새끼의 죽음 자리에는 엄마의 육신이 거기에 개입되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라는 것이 율법의 기능화가 돼버려요. 율법의 기능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소 이야기가 염소 이야기로 마치는 게 아니죠. 누구 이야기입니까? 바로 모세를 따르는 히브리인들을 기호화한 거예요. 네가 알고 있는 생존이란 이름의 생명에서 전혀 다른 생명으로 전환될 때 죽음을 겪어야 되는데 그 죽음에는 네 손을 떼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건 모든 율법이 주어져서 만들어진 죽음에는 우리 육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엄마 염소의 젖으로 새끼를 삶지 말라. 그럼 이 말은 뭡니까? 다른 젖은 되는 거예요. 같은 덩어리는 죽어야 되는 시점에서는 떨어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이 살고 싶다는 것이 죽는 것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짠 살았네. 이런 생명은 없어요. 이런 영생은 없어요.

살고 싶은 동일성이 주님이 허락한 생명의 세계에는 그 성질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야 돼요. 끊어져야 창세기 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생명나무에서 추방하는 그 취지가 여전히 천국 가서고 살아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었느냐? 예. 따먹어도 살고 싶지? 살고 싶습니다. 안 된다. 네가 그 상태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돼. 생명나무로 가는 것을 차단시켜 버렸어요.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는 그 목숨은 내가 원하는 목숨이 아니다. 원하는 목숨이 아니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네가 보기엔 인간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아니야. 흙이야. 가서 네 주체 파악해. 나가. 그리고 흙이 되어라. 흙이 되라는 자체가 아담이 흙이에요. 그러면 흙이 돼야 돼요.

그럼 우리가 죽는 것도 사실은 기호에요. 무슨 기호? 주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차질 없이 이뤄진다는 걸 표현해주는 그런 역할을 보고 있는 겁니다. 늙어 죽읍시다. 왜? 그것도 하나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늙어죽는 게 하나님 일이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 내가 행동 잘못해서 식구들한테 많은 질타를 받았어요. 지난 낮 설교 혹시 동영상 보신 분 있습니까? 인간은 백날 해도 늙어죽는다는 표현을 하면서 보톡스 이야기까지는 좋았어요. 올리는 행동해서 인간이 어떻게 중력이 이기느냐는 이 소리해서. 우리교회 처음 나오는 교인이 깜짝 놀랐어요. 그분이 나중에 설교 마치고 난 뒤에 예가 너무 적나라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중력에 의해서 주저앉아서 무너져야 돼요. 무너져주는 것이 주의 할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 주저앉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살아보려고 누룩이 가득 들어있는 맛있는 폭신폭신한 파리○○○ 빵 막 먹잖아요. 먹기 좋은 것. 왜 먹습니까? 살려고. 그 빵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돈 버는 이유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스물네 시간 그 외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오직 그것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강제로 율법화 시켜버려요. 네가 그게 목숨으로 보이나? 목숨입니다. 생명으로 보이나? 생명으로 보입니다. 아니야. 가짜야.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돼요. 그건 주님의 과제고 숙제거든요. 들어오는 장면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아예 율법 자체가 우리 내부에 장착이 되고 탑재가 돼버려요. 탑재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그걸 집어넣고 현미경으로 우리를 수술해버려요. 그러면 우리 안에 들어온 말씀이 만개가 돼요. 꽃봉오리 피듯이 하나하나 피우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우리가 영생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언급했는데 말씀이 참 좋아요. 말씀을 보고 질문 하나 던질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오년 됐습니다. 복음 알고 오년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날은 오년입니까, 한 날이겠습니까? 이게 한 날이 돼요. 왜냐? 시작이 밤부터 저녁이 돼야 아침이 되니까.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딸을 일으키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요. 죽은 자야 일어나라고 했습니까?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아침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예요. 밤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침이 나올 수 없어요. 밤은 그냥 들어갑니다. 밤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죽음으로 된 상태. 죽은 자가 스스로 살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그걸 에스겔 37장에 보면 바짝 마른 뼈에요.

제가 원래 뼛국 안 좋아합니다. 조○○ 뼈다구 맛있게 먹긴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뼈에 살점 얼마 없고 뼈가 더 많은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축축한 뼈거든요. 이 뼈는 바짝 마른 뼈거든요. 바짝 마른 뼈가 서울대학 나왔느니, 무슨 박사니, 한 달 수입이 얼마니, 손님이 하루에 몇 명 오니, 키나 몇 센티니, 미스코리아니, 전지현과 아는 사이니 그거 아무 필요 없어요. 전지현도 바짝, 박근혜도 바짝, 노태우도 바짝, 죽은 이순신도 바짝, 우리도 바짝, 너도 바짝, 바짝 마른 뼈에요. 희망 없습니다.

오죽 희망 없으면 물었겠습니까? 인자야 이들이 살겠느냐? 저 같으면, 참 기가 막힙니다. 살기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예언자가 되어서 주의 말씀이 임하면 능히 살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하사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요. 조마루 뼈다구 군대. 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짝 마른 뼈니까. 그게 복수가 아니고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단수입니다. 144000, 1을 다른 말로 하면 144000돼요. 숫자에 대해서 이번 겨울수련회 요한계시록 할 때 할 거예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1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양성은 오직 그리스도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몸도 하나 주도 하나요. 눈이 발더라 하지 말라. 모두 한 성령 받았다. 한 성령, 한 세례, 한 몸, 한 교회.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는 기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호에 불과해요. 우리 역할, 우리가 정하지 않습니다. 너는 방주 만들고 야곱아, 너는 손자한테 안수하고.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한 거예요. 아브라함아, 너는 나그네 생활해야 되고. 나그네 생활했다고 더 상급 받고 방주 만들었다고 더 낫고 그런 것 없어요. 각자 역할이 다를 뿐이죠. 어떤 사람이 심는 사람, 어떤 사람은 물주는 사람,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게 전부 다 하나 속에 있는 거예요. 교회 이름을 사실은 우리 교회보다 하나 교회도 괜찮아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는 붙어 다녀요. 하나입니다. 사실은 어미 몸에 붙어있는 새끼니까 하나로 붙어 다니죠. 하지만 새끼를 잡을 때 어미로부터 떼어내야 돼요. 왜냐하면 죽는 순간이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 개입돼야 돼요. 어미나 새끼나 하게 지냈는데. 어미가 새끼를 더 잘 알지. 아니요. 내가 나를 몰라요. 내가 나를 아는 것은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만 알지. 나는 나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보통 성경말씀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런 게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일상 살면서 일이 안 될 때 뭐라고 합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약간 용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그 소리해놓고 지가 생각해도 믿음이 너무 좋은 기라. 어찌 이런 좋은 믿음을. 사도 바울 같아. 사도 바울 소원이 죽는 거니까. 주여,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살기 싫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굉장히 대단한 사도 바울처럼 근사한 줄 알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 허당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요. 니 안 죽이고 하나밖에 없는 니 딸 죽인다. 주여,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딸만큼은 살려주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그 딸 누구 딸인데? 주여, 그런 말 하지 마시고 무조건 내 딸은 내가 지킵니다.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이라며? 농담도 못합니까. 그런 소리 마시고 차라리 나를 죽이시되 딸만큼은 살려주옵소서. 결국은 자기를 죽여 달라는 것은 거짓말한 거예요. 딸은 여전히 내 소속이니까 자기 소유가 돼있어요. 그러니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다는 말은, 이미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생명을 기호화한 새로운 음식이 되는 겁니다. 이미 너는 죽어도 살았어. 네가 죽는 것은 죽는 게 아니야. 저녁 때 잠자는 거야. 안식하는 거야. 잠 깨면 천국에 도착할 거야. 이 말을 신약적으로 하면 굉장히 쉬워요.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살리라. 로마서 6장을 말씀을 이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보다 먼저 부활의 첫 열매되신 분이 있거든요. 그분이 뭐냐? 예수님만 사시면 예수님과 함께 붙어있는 사람들도 함께 살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그 대목 기억나시죠.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 과정을 우리가 목격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사실. 내가 죽는 장면을 내가 옆에 서서 보고 싶어. 사후의 세계 같은 책들 보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일어났을 때 자기는 분명히 몸은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이상하게 죽은 시체가 사람들이 울고불고 경찰이 오고 하더라. 그걸 자기가 봤다는 거예요. 보고 얼마 후에 병원에서 깨어났다는 겁니다. 깨어나니까 너 뭐 봤노? 길바닥에 내가 누워있는데 어떤 사람이 깨어나라 하고 인공호흡하고 그러더라. 그걸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기분 나쁘더냐? 아니. 빛 속에 있었어.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게 간증이 돼요.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구나. 그렇게 믿는데 이게 구라가 돼요. 왜냐하면 불교신자가 고백하는 것도 똑같아. 이슬람교인도 똑같아요. 심지어 종교가 없어도 빛 가운데 있다가 되돌아 왔다는 겁니다. 여러분 죽으면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계곡이 있어서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럼 뭐냐? 죽음 대신 두 자로 졸도. 신경의학에서 그걸 졸도로 봅니다.

한쪽 뇌가 마비가 됐는데 한쪽 뇌는 가동이 되어 자기가 뭘 봤다는 것은 평소에 한쪽 뇌가 과거에 봤던 생활에서 나오는 이미지를 연장, 동일화 시켜서 말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냥 기억 속에서 조립과 편집한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기억은 항상 가짜입니다. 참 기억이란 말 자체가 성립 안 돼요. 기억하는 순간 기억을 조작해낸 겁니다. 이건 간단한 실험으로 대번 알 수 있어요.

친구야, 반갑다고 동창을 만났는데 뒤에서 치는 거예요. 너도 왔나. 보세요. 자기가 관심 없으니까 옆에 지나가도 모르잖아요. 기억은 전부 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항상 일부밖에 봅니다. 그리고 하나를 집중하면 나머지는 배경으로 빠지면서 잊히게 되고 내가 집중, 몰입한 것만 기억나게 돼있어요. 그런 체험으로 예수를 믿으면 그게 예수를 믿는 것이겠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상상한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냐? 실제 상황이거든요. 애굽 나라와 이스라엘이 분리되거든요.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34장.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아까 어미젖으로 새끼를 삶지 말라는 것, 육신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이미지와 경험과 체험은 죽음이란 단절 앞에서 스톱이 돼야 된다는 것. 네가 알던 세계는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될 세계에서는 도저히 상상 못할 도저히 예상 못할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네가 알아서 걸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인도자가 있어야 돼. 중보자가 앞서 가야 비로소 거기에 참여될 세계가 너를 위해서 준비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양 죽고 난 뒤에 홍해로 인도하지요. 홍해에 운하 있습니까? 없지요. 홍해가 잘하면 헤엄치면 건너갈 수 있는 바다 같아요? 아닙니다. 물론 바다 깊이가 차이 나겠지요. 그러나 모세가 인도한 홍해는 아무리 봐도 죽을 수밖에 없는 파도가 치는 깊은 바다였습니다. 그걸 알고 히브리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여기서,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러한 절망, 주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 절망은 주님의 절망이 아니고 내 절망이죠. 우리가 절망을 주께 바치면 주께서는 그 절망으로 예상 못할 희망을 줘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절망 드리면 하나님께서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절망 드린 게 아니에요. 그 희망마저 절망으로 바꿔주시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거예요. 갑자기 치킨집이 안 된다든지. 깜깜해. 할 수 있는 모든 건 끝났어.

그게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십자가, 이제 그게 현실화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믿으라고 준 게 아니고 내가 십자가야. 나한테 일어난 사태가 십자가 사태에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게 바로 강도질 하지 않은 강도가 되는 겁니다. 비로소 우리는 절망 가운데 강도가 되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눈을 돌려보세요. 나와 똑같이 망해버린 사람이 보이고 동질감을 느낄 거예요. 그 작은 소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니나 똑같구나. 똑같아요.

왜 우리는 사실은 그게 우리의 뿌리거든요. 우리의 뿌리는 살아있으면서 뿌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절망했을 때 그 시점이 뿌리에요. 우리가 뿌리의 자리에 도달했을 때 몽땅 죄를 씻어준다는 것이 비로소 은혜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뭐라 그랬습니까? 발만 씻으니까 왜 씻기십니까? 그래야 죄 없어진다. 그럼 발만 씻지 말고 나머지도 씻겨주세요, 하고 옷을 울러덩 벗으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발만 씻겨도 다 씻긴 게 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면 다 씻긴 것이 돼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손댈 것이 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언제 방해하느냐 하면, 나름대로 내 사업과 내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자신감이 넘치니까 그런 주님의 은혜가 내 앞에 가려졌어요. 내가 잘났는데 주님께 기도할 게 뭐있어요. 이제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저는 한 신앙하고 한 믿음 하니까 제가 알아서 제대로 해서 바르게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 다음부터 그 일이 또 절망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 아니구나.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맞구나. 이게 이스라엘의 기호화 또는 율법화,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화 되는 겁니다. 푹신푹신한 맛있는 빵을 먹지 않고 누룩을 먹는 자체가 이미 인간 자체가 다른 세계에 도달한 인간들만 행할 수 있는 율법이 임플란트처럼 탑재돼있는 인간들만 행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럼 요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구원받은 티를 냅니까? 그건 막 사시면 돼요. 그게 뭡니까? 내 인생은 누가 뭐래도 내가 원하는 식으로 관리할 거야, 라는 식으로 사세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소에 늘 하던 십자가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병행해서 아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것이 성도의 말씀화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지켜서 경건하게 되는 것이 말씀화가 아니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어진 말씀 앞에서.

분을 품되 해 지도록 품지 말라는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도저히 그 말씀을 못 지킵니다. 특히 여름에는 해가 길어요. 성질날 때 기다렸다가 저녁 때 성질내고 그렇게 못합니다. 성질날 때 성질내고 꾹 참다가 해지거든 보자. 이런 것 없어요. 해지기 전에 풀어야 되는데 다 풀기는커녕 해지고 난 뒤에 퇴근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설치려고 하는 데 그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말씀도 우린 못 지켜요. 왜? 못 지킬 때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이미 기호화된 말씀화되고 복음화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못 지킨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지요. 못 지켰는데 이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이미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에요. 면류관 반납하고 말이죠.

이 말을 한꺼번에 요약해서 말하면 뭐냐 하면, 죽음의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그 뜻이죠. 새끼를 잡을 때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는 것은 죽는 순간에 율법의 진수가 죽음과 더불어 결합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날마다 죽노라는 말 있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사실은 죄가 되고 주께서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날마다 죽이시는 그 작업이 살려내는 일환이 되는 거예요. 나를 살려내는 절차 중에 나를 살리는 절차가 있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그러면 이 율법이 날마다 죽으라 하니까 날마다 죽으란 것을 행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날마다 안 죽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날마다 죽도록 그렇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죠. 아브라함 평소에 믿음의 행동이 뭐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간단하죠. 뭘 행한 게 있어야 행하지.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잖아요. 그건 주님이 행하신 거죠. 주님께서 말씀을 지킬 때에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집어넣어준 거예요.

천사 셋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지요. 내년 이만쯤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할 때 텐트 뒤에서 누가 웃었지요. 늙은 나이에 무슨 얘를 낳아. 무슨 낙을 보겠다고. 사라가 웃었지요. 웃어서 천사가 삐져서 취소했습니까? 아들 있음이란 말은 지키란 말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얘 낳도록 열심히 애쓰란 말이 아니고 말씀과 더불어 능력이 같이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은 전지만 한 것이 아니 전지전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지만 되고 전능은 빠져있어요. 알기는 진짜 많이 알아요. 십자가로, 창세전부터 예정돼있습니다. 예정됐으면 뭐합니까? 예정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벌벌 떨고 있는데. 예정된 대로 할 건테. 벌벌 떨기는 왜 떠는데?

우리는 전지밖에 안 돼요. 전지전능이 안 돼요. 안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방법을 몰라요. 왜 방법을 안 알려주느냐? 우리는 죽는 게 방법이에요. 그냥 주께서 죽이시면 그게 주께서 실행한 방법이고 늘 죽어야 되는데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 하룻밤 자고 저녁에 죽으세요. 죽으시면 새 날을 주십니다. 아침에 다시 일어나지요. 그날 염려는 그날로 마감을 하세요. 새 날은 새로운 날이 주께서 또 하루치를 주시는 겁니다.

그게 광야에서 만나를 하루치만 주죠.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광야에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하루치로 잘라서 사건화, 카스테라 자르는 것처럼 자른 거예요. 일주일에 한 경우만 이틀 치를 줘요. 그건 뭐냐 하면, 자르는 율법의 완성된 상태가 안식의 상태기 때문에 이틀 치를 줘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내일 더 먹고 살겠다고 분명히 사람 수대로 모아야 되는데 2.2리터 해야 되는데 5리터로 더 가져오면 거기서 난데없는 벌레가 생기죠. 벌레의 용도는 뭐냐? 썩게 할 기능을 갖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이 몸은 교체가 돼야 되기 때문에 우리 몸은 썩어가야 돼요. 썩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불신자한테는 해당 안 되지만.

썩는 그런 역할도 하고 그리고 매일같이 주의 은혜로 새롭게 사는 역할도 하고. 이래저래 울산바닥에 살면서 바빠요. 주의 일한다고 바빠요. 매일같이 돈 번다고 바쁜데 그 돈 버는 게 주의 일이 되니까 얼마나 바빠요. 돈 못 벌어서 걱정하고 자식 걱정, 남편 걱정, 아내 걱정, 하세요. 그게 주어진 우리의 숙제니까. 하면서 그런 걱정과 우리가 되어가는 것은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진로는 다른 노선으로 주의 개입으로 하게 돼있다. 그 전체가 우리가 복음화 돼있는 전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예수 믿으라고 돌아다니는 게 전도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게 전도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침에 맛있는 빵을 먹었을 때 그 빵은 무슨 빵이 되겠습니까? 분명히 이스트를 넣었지만 그 빵은 주님이 주신 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폭신폭신한 맛있는 빵을 먹으면서 무교병을 매일같이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먹는 순간 우리는 안식의 날에 포함이 돼있어요. 나이가 70, 80이라고요? 아니요. 천년이라고요? 아니요. 하루입니다. 그날에 매일같이 창조의 날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루가 천 날, 천 날이 하루 같이 우리는 주님 주신 그리스도 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리스도의 날이 마감될 때까지. 그 날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27절 봅시다.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다고 했지요. 이제 이해되시겠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이에요. 노아와 방주가 한 세트로 언약인 것처럼 이스라엘 자체가 율법, 이스라엘 합쳐서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율법을 오해해서 기존에 애굽에서 알고 있던 목숨 유지한다고 하다보니까 하나님께서 교체해버려요. 어디에서? 광야에서.

그래서 애굽을 몰랐던 홍해를 몰랐던 사람들로 교체하는데 기간이 40년입니다. 왜 40년이냐? 원망의 세월아, 빠이빠이입니다. 40일 동안 정탐하고 원망했기 때문에 원망이 그들의 기호가 됐어요. 그들 자체가 내가 원망하는 게 아니라 원망 덩어리로 이미 기호화, 율법화 되었어요. 원망이 있는 자가 못 들어가는 나라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원망하게 되면 내가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원망 덩어리가 돼버려요. 원망 덩어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의 나라가 되니까 지옥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원망을 하게 하고 그걸 없애는 작업, 그 작업을 새로 잠재돼있는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교체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도 못 들어가죠.

모세가 못 들어가면 누가 지도자인가? 지도자는 없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모세언약에서 모세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아니에요. 갈렙도 아니에요. 그럼 누구냐? 없어요. 모세언약이 지도자입니다. 이제는 지도자 없이 들어가 봐라. 보이지 않는 지도자가 지도자다. 이미 너희는 새롭게 기호화 되었으니까. 너희 자체가 율법화 되었으니까 들어가라. 누구 없이? 모세 없이.

여호수아 있잖아요. 여호수아는 자꾸 모세 이야기만 해요. 날 믿지 마. 나도 너희들과 똑같아. 하나님이 언약한 대로 이뤄질 걸 믿을 뿐이에요. 두 사람이 믿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믿는 사람 두 사람이 지도자가 아니고 두 사람이 모세언약을 경유한다고. 믿었으니까. 내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대로 될 거야. 그래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누가 마중 나오지요? 하나님의 천사가 오지요. 신발 벗어. 꿇어 앉아. 이 땅은 여호수아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네 앞서서 천사가 전쟁해서 너한테 선물로 줄게. 됐나? 됐습니다. 되지 뭐.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고 알아서 다 한다고요. 참 이게 믿어지면 고맙겠는데. 내 인생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천사가 되게 바빠요. 우리는 잠자지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천사는 야근 매일 해요. 밤을 관장하시니까.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매일같이 얻어먹기만 하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으면 하나님이 손해잖아요. 아니에요. 우리가 얻어먹으면 얻어먹을수록 우리가 복음화 돼요. 신약이니까. 옛날에는 율법화지만. 이젠 복음이에요. 우리가 걸어 다니는 복음이 돼버립니다. 누가 두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되었지. 그것 말고 네가 뭘 했는데? 난 아무것도 한 것 없어. 그냥 막 살았어. 이게 복음이에요. 그게 언약 완성이라니까요. 언약을 지킨 적 없습니다. 언약이 알아서 우리를 생산해냈지 우리가 언약 지킨 적 없어요. 언약이란 지키지 말라고 준 거예요. 언약은 따로 있어요.

오병이어 떡 먹었잖아요. 그것 큰 실수한 거예요. 떡 먹고 헤어졌잖아요. 요새 말로 병 낫고 절에 간 거예요. 병 낫고 지옥 간 거예요. 한 번 은사를 맛보고 지옥 간 거예요. 진짜 은사는 병 낫고 잘 되고 복 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 그게 있어야 은사 받은 거예요. 제자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능우 집사님이 질문했지요. 베드로가, 영생이 말씀이 있는데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베드로가 알아서 갔습니까? 베드로가 몰라서 한 거예요. 베드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지가 경험한 것까지만 그걸 종합해서 편집해서 질문으로 나와요. 내일을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까지 알아요. 그 베드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베드로 하여금 왜 그런 고백을 하게 하는가? 베드로가 하는 고백마저 베드로가 기호화 되면 그게 말씀화 되고 율법화 되면 베드로에게 더덕더덕 붙어 있는 그 말씀을 본인이 지키는 게 아니고 꼭두각시고, 기호화 시킨 주님이 베드로에 장착된 말씀을 주님이 지켜서 베드로로 하여금 구원케 하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굉장히 바빠요. 우리는 왜 바쁜가? 주님 생각해서 바쁜 게 아니고 내 일 하느라고 바쁜데 그것마저 주님의 복음화 되도록 주께서 함께 따라 붙으면서 바빠요. 둘 다 다 바빠요. 임마누엘이라. 우리는 돈 번다고 바쁘고 돈 버는 그 죄를 의로 바꾼다고 바쁘시고. 우리는 맨날 돈만 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면 돼요. 알아서 바꿔줘요. 안 믿어져요? 그럼 불신자에요. 진짜 그게 믿어져요? 그럼 신자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뭐 있습니까?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마세요. 자기 인생 책임지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괜히 꿈꾸지 마세요. 환상입니다. 나에 대한 환상, 미련, 자존심이 남아있어요. 그냥 사시고 그 냥 사시는 것도 주께서 일부러 그냥 사시게 하신 주님의 작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말씀화되고 기호화되고 율법화되고 그렇게 일을 벌이신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집어넣은 것이고 십자가 지신 분이 한 패 먹도록 그렇게 하신 것을 이렇게 믿어지니 이것마저 성령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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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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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