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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50814b-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50814b-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121.152.195.209)

안양20150814b-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

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밟았다 했잖아요. 밟으면 뭐가 나오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피를 부정하는 걸로 봤잖아요. 그 언약의 피라 하는 것은 피라는 말은 무슨 뜻이다? 이미 누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셨으면 이미 깨끗하게 게임 오버 끝났는데 그걸 욕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언약의 피, 죽음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언약이 붙죠. 약속된 죽음, 약속된 피입니까? 약속된 죽음은 약속이 계속 살아있는 한 죽음도 약속과 결부되면서 죽음 자체가 다시 살아나버려요.

그러면 이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소생이 아니고 이게 부활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앞서서 산 사람은 소생이고,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 이예요. 이거는 죽었다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음 자체가 살아난 사람만 모이는 곳이 부활의 세계, 그걸 가지고 두 자로 천국이라고 합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이 죽음 자체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안 죽어요. 모든 인간은 안 죽습니다. 죽어도 다시 불러내요. 요한복음 5장에서“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그래서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자살은 소용없다고. 자살해서 죽을 거 같으면 나도 죽겠다. 자살해도 안 죽어요. 뭐냐 자살했다는 행위가 살아있어요. ‘니 자살한 인간이지?’ 하고 자살한 것까지 포함해서 살아나버려요. 죽으려고 죽었는데 안 죽는 거예요.

그럼 자살한 사람은 왜 죽습니까?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죽었는데 있는 고통에다 자살한 고통까지 추가됐어요. 왜 잘못됐습니까? 인간은 죽든지 태어나든지 살든지 자기소관이 아니에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살든 죽든 간에 이거는 본인 소관이 아닙니다. 언제 죽을 것이냐, 언제 태어날 것이냐, 언제 오랫동안 살 것이냐, 그거는 참새도 주의 뜻이 없으면 참새도 안 죽습니다. 참새가 오래 산다는 말이 아니고 죽기는 죽는데 주의 허락을 맡고 죽어요. 참새가 시장에 팔리는 것도 주의 허락을 맡듯이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관할 안 하겠습니까? 다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뜻 이예요. 너희들이 살았다고 이야기하지, 하지만 사실은 너희들이 스스로 어떻게 너희 운명을 조정할 수 없는 이미 죽은 자야,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 두 자로 언약, 너희들이 언약을 알아?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똑같은 거예요. 너희들이 언약을 알아? 언약을 알게 되면 산다. 죽는다. 태어났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버렸어요. 자살해도 안 죽으니까 이거 어떻게? 백 상어 입 벌리고 있는데 모가지 집어넣어서 산산조각 나도 안 죽어요. 잠시 살점들이 이별할 뿐이지. 다시 상봉한다니까요. 다시 모아져요. 이게 인간의 팔자고 인간의 운명입니다.

뭐 팔자 봐준다고? 뭐 사주 팔자본다고요? 니가 니 사주를 알아? 죽어도 안 죽는 그게 사주에요. 인간이 왜 사주팔자를 보느냐, 그건 돔배기이기 때문에, 앞부분 다 떼 내고 뒷부분 떼 내고 지가 태어나서 요것만 달랑 하다 보니까 사주팔자 보고 궁합 봐서 저 남자 만나서 잘 사시겠습니까? 잘 사는구나, 부채도사 해서 하는데 심지어 교회 권사님 집사님, 전부 다 거기 가서 날짜 잡고 사주보고 결혼 궁합 보고 안 보는 척 하면서 보고 교회도 나오고 주여, 하고 장난삼아 하는데 인생이 장난입니까? 인생이 장난 이예요?

어느 한 순간도 내 소관에 있는 내 인생, 한 순간도 우리한테는 하나님이 허락한 적 없습니다. 모든 허락은 주님의 허락 권할 하에 있어요. 어머님 돌아가시고 다 뜻이 있어서 돌아가신 거예요. 어머님 돌아가셨다고 애달아하지 마세요. 돌아가신 어머니나 살아있는 우리나 똑같은 입장입니다. 다 같이 죽어있는 입장 이예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죽음은 자체를 교체를 해야 돼요. 어떻게? 내 죽음은 내 죽음을 죽여야 돼요. 내 죽음을 죽이고 뭐로 바꾼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바뀌면 그거는 부활의 세계에 이릅니다. 오랜만에 기쁜 소식 전했죠. 우리는 안 죽는데 그건 죽어야 돼요. 내가 죽는다는 죽음은 죽어야 돼요. 이거 안 죽으면 마귀의 종 됩니다.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 하거든요. ‘살아야 될텐데’ 하니까 자꾸 마귀 종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죽음, 또는 나 같이 비슷하게 생긴 인간들이 장례식장 만들어 놓고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그 언어 속에 언어와 맞춰 있는 죽음 있잖아요. 그걸 지우개로 지워버려야 돼요. 로또 할 때 동전 가지고 앞에 덮쳐 있는 걸 긁어버리면 꽝이 나오든지 100원 나오든지 나오죠. 앞에 덮쳐 있는 걸 긁어야 돼요. 왜곡된 죽음을 긁어내야 돼요. 뭐로? 언약으로 긁어내요. 언약으로!

이거 뭐 여러분 잘 아는 이야기해 볼까요?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 아플 때 분명히 통보를 했는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지체했죠. ‘저 두 여자 인간 만들어야 되겠다. 이 참에 인간 만들어야 되겠다.’ 오빠 일부러 하나님께서 죽이고 사람 만들기 위해서 안 갔어요. 뒤늦게 가자마자 난리 났죠. 진작 오지 죽고 난 뒤에 와서 약도 소용없는데 이제 와서 뭐 조문하러 오셨습니까? 주께서 그걸 전부 다 받아 적어요. 왜, 그게 바로 우리의 죽음을 삭제하지 않는 효과기 때문에. 마귀한테 벌벌 떠는 이유들이 그 안에 들어있어요. ‘진작 왔으면 우리 오빠 살았을 텐데. 늦게 와서 우리 오빠 죽었습니다. 물어내세요. 책임지세요. 전에 먹은 거 잡채 게워내세요. 우리 집에 와서 잔 거 계산 다 하시고 샤워 할 때 뜨거운 물 쓴 보일러 값 내시고.’ 이런 식으로 막 따지고 든다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일부러 죽였다는 거예요. 일부러! 일부러 왜 죽이느냐, 일부러 죽여줄 때 마리아 마르다가 성도기 때문에 오빠 죽으면 성도 아닌 사람은 ‘팔자거니’ 하고 그만 둘 건데 성도기 때문에 누구 멱살 잡고 흔드느냐 하면 예수님 멱살 잡고 흔들잖아요. 옳은 건 아니지만 무조건 예수님 당신과 연루된 사건이란 거예요. ‘일찍 왔으면 안 죽을걸.’ 왜 대접 잘 받아놓고 우리 오빠는 죽이고 대접 소홀히 하고 관심도 없는 남의 집 애는 그렇게 잘 살리고, 야이로 회당장, 언제 야이로 회당장 언제 알아봤다고 그 딸을 살립니까? “소녀야 잔다.”하고.

다른 사람은 또 죽어서 살린 정도가 아니고 이건 그 정도가 아니죠. 안수하매 병이 나았더라. 어떤 사람은 진흙 가지고 바르니까 “ 어떻게 보이느냐” “희미하게 보입니다.”한번 더 발라서 왔다 갔다 하니까 시력이 좋아졌어요. 자동적으로 시력 조정하는 안경을 뭐라 합니까? 다 초점 만들은 거예요.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이다가 마을 밖에 나가 나중에 다시 해보니까 이제는 안수하니까 오, 이제는 저절로 보인 거예요. 그렇게 해주면서 여태 대접받아 놓고 아플 때는 오지 않고...

가서 주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새삼스럽게 다시 이야기해요. “나를 믿는 자는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라는 이야기를 하시고 오빠를 다시 불러내죠. 그 오빠를 불러낸다면 오빠가 가 있는 그 세계는 어떤 세계였습니까? 믿음의 세계죠. 어떤 세계? 믿으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세계, 살아서도 살고 죽어서도 사는 세계, 살아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죽어서는 다시 사는 그 세계를 오빠가 그걸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한번 봅시다. 오빠가 산 것이,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보면 답변해 보세요. 오빠가 산 것이 좋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게 된 게 좋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신가 안 게 좋죠. 그러니까 여러분 가정에 남편들 죽기 기다려서 예수 믿지 마시고 죽기 전에 알아서 기세요. 이 좋은 예수님 있는데 왜 자꾸 다른 루트 거치도록 하면 안 됩니다.

살아있는 게 은혠 줄 아시고 그냥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데 남편 쳐다보다가 남편 안 되면 그때 주님한테 따지듯이 쳐다보면 안 돼요. 그게 사사기거든요. 사사기 할 때는 그냥 혼자 하다가 또 어려울 때는 부르짖고 또 구원자 보내주고, 또 좋다고 하다가, 사실은 죄가 숙성한 기간이라 했는데, 표현을, 꼭 오늘날 우리 모습과 똑같잖아요. 그게 아까 첫 시간에 출발을 어디서부터 했습니까? 우리로부터 출발을 해야 될 걸 어디서부터? 나! 나로부터 출발한 이게 화근이라. 나로부터 출발한 게 화근 이예요.

제가 참 오지랖도 넓죠. 공원에 운동하면서 개 풀고 다니는 걸 다 지적하거든요. 개 목줄 해야 됩니다. 벌금 50만원 냅니다. 목줄 하세요. 한번 했으면 들어야 되는데 다음에 또 그 시간에 안 오잖아요. 개 발랑 듭니다. 들으면 ‘오, 개 누워있어. 개 누워 있어. 그 다음에 가면 목줄 다 하고 다녀요. 어떻게, 집어던져요. 그러니까 몇 번만 하니까 그 다음부터 전부 다 개 목줄하고 다니고. 자전거 다니는 길 아닌데 자전거 타고 다니는 나이 70, 80된 사람들 스톱 시킵니다. 지 나이 많다고 ‘알았어. 알았어.’ 하거든요. 스톱시켜요. ‘못 갑니다. 할아버지.’ 지가 나보다 힘이 약한데 ‘딴 길로 가세요.’‘니가 나이 많은 사람한테’나이가 왜 나옵니까? 여기는 법으로 못 가게 돼 있어요. 가세요. 가는 길이 좁을 때는 자전거는 타고 못 가는데 사람들이 내리기 귀찮으니까 오던 길로 오는 거예요. 나이 70, 80된 사람들이. 단호하게 막죠. 한두 번만 해보세요. 전부 다 다른 길로 가요.

뭐 WMCA 따로 없어요. 이게 WMCA라.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꼭 내가 그렇게 하면 뒤늦게 뒤에 60된 아주머니들이 ‘개 때문에 나오기 싫어. 그 할아버지 얼마나 애먹이든지.’ 나오니까 그제서 궁시렁, 궁시렁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무라니까 뒤에 몰래 들어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주님 혼자 한다고. 뒤늦게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그래 주님 중심이야. 우리가 비겁한 사람이야.”이미 주님께서 죄 처리 해놓고, 다시 말해서 죽음과 부활 이야기하는 것은 뭔 뜻입니까? 불로 싸질러버린다는 뜻 이예요. 아까 처음 시간 이야기해봅시다. 모든 법은 누구한테 줬다? 이스라엘에 줬다. 그런데 이스라엘 누구한테 삼켰다. 바벨론에 삼켰다. 그 바벨론이 지구 역사를 끝내면서 바벨론 말고 다른 바벨론 없어요. 오직 그 바벨론이 그게 확장되어서 220국 현재 나라가 됐다 했죠.

그렇다면 그게 커지면서 그 안에 있는 그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그 언약 완성 자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 예수님이 완성하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자들이 모든 나라에 오는 시대마다 다 퍼져있으니까 결국은 전에는 모세 율법에 두 세 증인으로서 사람 잡지 아니하면 맹렬한 불로서 소멸한다는 그 법이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경계를 벗어나서 온 지구상에 모든 나라에 구애받지 않고 어린양의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되면 뭐 받는다? 맹렬한 불보다 더 센 벌을 받는다.

그걸 한번 봅시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이제 언약이 퍼진 거예요.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 자, 여기서 묻습니다. 요렇게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주장은 어디서부터 출발해 나왔습니까? 나에서 나왔습니까? 우리에서 나왔어요? 우리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 우리가 어디서 나왔다?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나의 아버지가 이제는 너희 하나님이 되죠. 그러니까 그 우리가 한데 모아지면 어디로? 예수님의 나라로 모아져요. 그 나는 누구와 대조가 된다? 현재 있는 나하고 대조가 돼요.

우리는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의 행복과 나의 잘됨을 위해서 말씀을 지키는 그것이 완전이 주님 중심의 것과 극히 대립을 이뤄왔다 이 말 이예요. 나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해석이 전부 다 거짓말이고 사기고 엉터리고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교회 가서 목사 하는 말에. 나 잘 되기 위해서 왔다가 목사가 당신 잘 된다 하니까 그게 은혜 받은 줄 알고 생각한 거예요. 우리는 날라 가 버리고. 그 출발점이 주님 나에서 나온 우리가 돼야 돼요.

사랑? 우리는 사랑 없어요. 왜, 안 되느냐? 나로부터 나온 사랑은 그 동전 뒤에 뭐가 있다? 증오 있죠. 사랑은 증오와 함께 있어요. 나 하는 대로 안 해주면 이제는 강력한 복수가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게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교회 꽃꽂이 한다? 우리는 사랑인 줄 알았죠. ‘주여 성령에 의해서 꽃꽂이하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그 개가 올 때까지는 미처 몰랐죠. 개가 그 꽃을 뜯어먹을 때까지는 자기가 순수하게 한 줄 알았죠. 그런데 그 교회에서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집사가 보니까 어느 날 내가 꽃꽂이하는 걸 봤어. 봤는데 목사님 집에서 키우는 개가 와서 꽃꽂이한 걸 뜯어먹으니까 그 집사님이 ‘으쌰’ 얼마나 신났겠어요? 남 못 되면 그렇게 신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꽃꽂이하고 남 좋은 일 생겼네. 브닌나, 원수에게 좋은 일 생겼어요. 한나를 괴롭힌 원수 브닌나는 좋아하고 한나는 애 없어서 울고 있고.

모든 출발점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한 게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나로부터 출발한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 십자가는 뭐냐? 니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니가 지금 죽어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걸 동전으로 주께서 일생 살면서 내 삶, 내 죽음을 긁어내야 돼요. 긁어내면 나라는 자체가 애초부터 나로부터 출발한 게 잘못이었고, 우리에서 나온 하나의 실 가닥이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럼 나는 그냥 나면 되지, 하지 말고 우리를 경유해서 나가 돼야 돼요.

내가 왜 삽니까? 물어보지 말고 우리는 왜 살아야 됩니까? 물어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 속에는 누구만 나에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니까 예수님 위해서 우리가 있고, 그러면 나는 누구를 위해서 있다? 예수님을 위해서 지금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살아야지‘가 아니라 살려냄을 당하고 있는 거예요. 누구? 나로부터. 그러면 나만 그렇습니까? 다른 교인들도 그렇죠. 그러면 그 사람들끼리 하나의 형제가 되는 겁니다. 그때 어떻게 하느냐, 서로 사랑하라. 이게 마지막 계명이다. 요한복음 한 가지 계명, 마지막 계명 “서로 사랑하라”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나를 사랑해요? 이거는 어림도 없는 어림 반 푼 없는 소리, 우리는 절대로 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을 경유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면 주님의 형제기 때문에 이게 사랑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조치하는 겁니다. 건드리면 누가 화냅니까? 주님이 화내니까. 주님을 경유하거든요.

여기 참외가 있는데 내가 직접 ‘드세요’가 아니라 이 참외를 누가 깎았느냐 하면 우리 집사님이 깎았거든요. 집사님을 경유해서 깎을 때 집사님이 먹으면서 ‘ 내가 깎았는데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깎은 내가 보람을 느낀다.’ 하잖아요. 물론 집사님이 이걸 아주 두껍게 깎았어요. 거의 반 나갔어요. 내가 봐도 두껍다 싶었는데.

어쨌든 모든 교회는 누가 관리자냐 하면 주님이 관리자니까 내가 관리한 사람을 니가 사랑해야지, 누가 더 못해요? 주님이… 그래서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 이 말이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그게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주의 사랑으로서 소망하고 주의 사랑으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니 믿음 없고 내 믿음 없어요. 우리의 믿음 이예요. 니 소망 없고 내 소망 없고 우리의 소망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만? 십자가를 아는 사람. 그래서 십자가에요. 마지막은 결국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해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는 죽고 날마다 누가 산다? 주만 사는 사람만이 형제입니다. 남편이 형제라면 남편한데 잘해주세요. 그러나 남편이 형제 아니라면 잘할 필요 없습니다. 주 안에서 형제지, 뭐 주 밖에 있는 게 형제겠습니까? 그냥 돈 벌어주고 지 자식 지키려는 그런 육신적 관계지. 이 복음 때문에 갈라서라 하면 갈라서야 됩니다.

요번에 중국에서 수련회 참석하신 분 있죠. ‘니 이상한데 빠졌지? 가지 마라.’ 하니까 ‘가야겠다.’ 하니까 남편이 ‘그러면 나하고 이혼해야 된다.’ 하니까 아내가 뭐라 했습니까? ‘나 이혼하더라도 난 간다.’ 했거든요. 남편이 ‘도대체 어던 단체에 빠졌는지 내가 검정하러 가겠다.’고 중국에서 따라왔는데 수련회 내내 검사하러 왔어요. 마지막에 가서 ‘또 오겠습니다.’이상한데 빠졌나 싶어서. ‘같이 또 오겠어요.’ 이랬어요. 얼마나 감사할 일 이예요?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을 밟으면 네가 당연히 받을 형벌이 당연히 크다. 하는 것은 누가 정했어요? 우리란 쪽에서 정한 거예요.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은 나부터 출발하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성경 덮어버려요. 아무 상관없다. 난 착해서 구원받을 거야. 성령으로 받은 언약의 피, 그리고 성령의 은혜, 은혜의 성령, 아, 나 그거 몰라도 돼, 그렇게 되거든요. 불신자들은. 문제는 불신자들만 그런 게 아니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개인의 행복과 개인의 영달과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마귀가 주는 떡 고물 얻어먹기 위해 온 사람에게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면 이런 부정적인 단어 구절 말고요. 좀 긍정적인 구절로 설교해 주세요. 이렇게 나와요. 잘 된다든지, 소망대로 될 것이라는 이런 거요.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한 게 없다, 그런 것 좀 해 달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거. 그런 쪽으로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피 보세요. 아들을 밟고, 언약의 피, 얼마나 이게 흉측합니까? 부정적 이예요. 귀신 나올까 무섭다. 이렇게 나오고, 모세의 법을 어긴 사람도 맹렬한 불로, 이런 설교 들으면 설교 듣고 난 뒤에 아멘, 할렐루야가 나오는 게 아니고 찝찝해서‘ 전번에 모세의 법을 벌 받는다 했는데 세상에 십일조를 해야 되는데, 이십분의 일조를 했더니만 아이고, 맹렬한 불로 다 날라 가겠네.’ 이런 걱정을 하게 되면 그 교회 가겠어요? 저런 부정적인 교회를 못 가죠. 교회 이름을 지을 때는 부정적 교회 지어보세요. 누가 옵니까? 죽어가는 교회, 내가 거기에 대해서 망하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 부정적 교회, 죽자 교회, 이런 거.

죽으면 사는 게 아니고 죽으면 제대로 죽어요. 죽고 난 뒤에 사는 게 아니고, 죽으면 이렇거든요. 이렇게 쉽게 하면 제일 쉬워요. 죽음이 두 개가 있어요. 죽음 1은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짜죽음 이예요. 요게 동전 가지고 복권할 때 하면 얼마짜리인가 덮잖아요. 껍데기 종이에요. 덮어 있는 껍데기 종이에요. 죽음 2가 이게 진짜인데 이거는 우리와 연결 안 돼요. 우리와 연결 안 돼 있고 그 위에 예수님 하고 연결돼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돼 있어요.

죽음 자체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의 세계입니다. 그게 언약이 살아나니까.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요걸 긁어 없애는 거예요. 성도한테는. 성령을 통해서. 이걸 긁어 없애니까 자랑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죠. 십자가 말고 부활 자랑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자랑한다고요. 십자가 말고 부활을 자랑하는 사람이 바로 신학교 교수들 이예요. 이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서 개척교회 안 하고 유학 간 사람들이거든요. 유학 갔다가 박사 학위 받은 사람이라서 남들 앞에 어떻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느냐, 박사까지 되었으니까 얼마나 믿음이 좋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속여 먹기 참 좋은 사람들 이예요. 그 사람들은 신학교 측에서 밥벌이 할 사람들입니다. 혹시 신학 교수로 있다가 보다 수입이 나은 쪽으로, 큰 교회 당회장으로 직접 스카웃되기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 이예요. 신학교 교수들 모임에서 내가 한 논문에다 뒤에다 그걸 삽입시켜 놨어요. 그 사람들 눈치 챘을 거예요. 복음은 십자가는 생각 안 하고 자기 자리, 좋은 자리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논문 끝에다 달아놨어요. 70이레 라는 논문에 보면 나옵니다.

왜 자꾸 십자가냐, 왜, 십자가는 이제 잊었고 부활의 새 생명 이야기하자. 성령의 열매, 서로 협동하고 서로 화목하고, 이걸 해야지, 왜 자꾸 언제까지 십자가, 제자리 뛰기 하겠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관심 없다는 말 이예요. 어디에 관심 있습니까? 나 살고 싶어요. 여기에 관심 있는 거예요. 어디서 출발했다? 나로부터 출발했다. 나 살기 위해서 잠시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고 끝에는 결국 나 행복과 나 잘 되는 쪽으로 그냥 그걸 노리고 온 겁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수련회 할 때 했죠. 그 룻이란 사람이 나오미를 따라온 이유가 뭘까요?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 것은 나오미 가정이 망했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야말로 오늘 본문 같으면 소멸하는 불이 이게 장난이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거. 다른 신은 믿어도 안 믿어도 그만이지만 선택 사항이지만, 진짜 살아계신 분은 나오미, 우리시어머니를 그 지경으로 폭싹 망하게 하신 하나님 같으면 빙고! 이건 진짜 하나님인 거예요. 그래서 나오미는 그것도 모르고 ‘니가 젊으니까 그냥 고생해도 나 혼자 고생한다.’고 나가라고 미니까 그것을 룻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배제, 내지는 추방으로 본 겁니다. 내가 이런 시어머니 하나님에게 추방당해버리면 안 되잖아요. 어쨌든 이거는 죽어도 같이 주겠다고 다리 잡고 온 거예요. 이제는 결혼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을 본 거예요. 그 하나님을! 그래서 저는 그 룻의 교회를 망하는 교회, 망한 자의 교회,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죠.

자, 그리고 29절을 보게 되면 그렇다면 여기 언약의 피라고 했죠. 언약의 피! 그럼 이 사람이 지옥 가게 된 것이 기준이 뭐죠? 기준이 뭡니까? 사람이 누굴 평가할 때 ‘난 당신을 이렇게 봅니다.’인터넷 보면 있잖아요. 이 근호 이단이다. 글 많이 올려있죠? 이 근호 왜 쫓겨났는가? 글 많죠. 그럼 저는 그 사람이 직접 나타나면 이렇게 할 거예요. ‘그렇게 보는 기준을 제시하세요.’ 그럼 그가 기준을 이야기해요. ‘당신은 개혁주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이단입니다.‘ 그럼 개혁주의 신학이 기준입니까? 성경 어느 대목에 개혁주의 신학이 어느 글자에 나오죠? 예fp미아에 나옵니까? 이사야에 나옵니까? 어디 나오죠? 안 나오죠. 그 사람은 성경을 버린 거예요.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닌 겁니다.

나 같은 우리끼리 모인 곳이 기준이 되었어요. 나 같이 우리끼리 모여 있는 걸 보니가 저희끼리 개혁주의 신학을 만든 거예요. 그거로부터 이단이냐, 아니냐를 결정내리는 겁니다. 저는 거기에 걸려들었고, 걸려들어서 목사 면직 당했고, 그 노회에서 면직 당했고, 그렇게 된 거죠.

그렇다면 그거는 이 근호 이야기고 여기와는 관계없고, 성경 이야기로 돌아와 봅시다. 성경에서 마지막 기준이 뭡니까? 1번 부활, 2번 십자가, 몇 번입니까? 부활이 아니에요. 1번 부활, 2번 십자가, 3번 성령의 공동체, 4번 성령의 열매, 몇 번입니까? 십자가에요. 십자가! 성령의 열매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공동체 교회를 자랑하는 게 아니에요. 부활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 다른 1번,3번, 4번은 전부 다 예수님을 지금 나처럼 살아있는 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2번은 뭐냐, 나는 살아있는데 주님은 죽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이 기준이 되는 거예요. 살아있는 나를 죽은 예수님이 ‘너도 나의 죽음 속에서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준은 오직 2번, 예수님 십자가밖에 없어요. 그러나 다른 기준들은 ’잘 살아라.‘ 이렇게 돼요. ’살고 있어요?‘ ’주님 덕분에 잘 살아요.‘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예‘ ’기도 많이 하면 더 살려줄게.‘ 이렇게 된다니까요. 이거는 마귀가 좋아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제가 가룟유다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정말 가룟유다 이야기를 꼭 들으셔야 돼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이유가 뭡니까? 스승을 팔아먹었죠. 스승 팔아먹으면 다 자살해야 됩니까? 가룟유다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뭐냐 하면 우리의 깊은 본성 속에 가룟유다 같은 속성이 들어있다는 걸 보여준 거예요. 왜, 마귀와 결탁됐으니까.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뭡니까? 에베소서 2장 1절, 불순종의 영들에게 지배받았으니까 다 있는 거예요.

가룟유다가 자살한 것은 자신의 양심이 어느 정도로 그 양심의 고통을 커버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에 자살한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이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런 인간은 내가 용서하지 안 해.’라고 자기가 자기를 처벌 내린 거예요. 그게 마귀적입니다.

첫째 시간에 뭐라 했던가요? 절대로 여러분들을 벌 내리지 마라 했죠. 주님이 허락해서 사는데 마치 내가 양심 고아서 내 힘으로 나한테 엔진 가동시켜서 이만큼 살았다고 하면서 내가 나한테 시어머니 노릇한다니까요. ‘니가 그렇게 은혜 받고도 또 나쁜 짓을 해?‘ 내가 나한테 시어머니 돼서 막 한다고요.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우리가 우리자신을 나무랄 자격이 됩니까? 그 순간이 마귀 짓 이예요. 아, 그게 마귀 짓입니다.

애를 멀리 유학 보냈다. 그런데 엄마가 화를 막 냈다. 그래도 속으로 계산, 컴퓨터가 막 돌아가요. 내가 이렇게 남편에게

화내고 나쁜 짓 하게 되면 유학 간 애가 억울하고 고통스럽겠노.‘ 갑자기 주님이 스위스 보냈는데 내가 스위스 보낸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면 나는 뭐가 돼요? 누굴 방해해요? 주님이 하시는 기준을 되도 않은 내가 짠, 졸라 맨 개처럼 내가 팬티 입고 앞에 등장한 거 밖에 더 됩니까? 주님께서 밉니다. 좀 나와라. 지금 안 보이거든.

우리 공부하는 중에 이야기하는 거 보면 기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제가 말씀을 잘못 드렸죠? 오버했죠? 내가 주제파악도 못해서 간섭했죠.’라고 하면 상대방 이야기는 뭐냐 하면 지금 목사님 덕분에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살아요.이거요. 나 곧 죽어도 괜찮아요. 이런 소리 들으면 곧 죽어도 괜찮아요. 이겁니다. 이거에 도달돼야 돼요. 나 목사 당신 보고 사는 게 아니고 주님 덕분에 살아요. 주님을 보고 살아야 돼요. 주님을! 주님이 허락해서 이만큼 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주님이 살려주시는가? 나는 내 힘으로 못살거든요. 왜, 주님의 죽음에 의하면 나는 죽어 마땅한 인간입니다. 지금 살아있으니까 어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데 사실은 그 짓이 다 의미 없어요. 취직했어요? 의미 없습니다. 나가도 의미 없고 아무 의미도 없어요. 몇 년간 남편하고 󰀞 의미 없습니다. 아무 의미 없어요.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만 의미 있기 위해서 의미 없게 한 거예요.

의미 왜 없게 하느냐? 나만 의미 있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순간순간 의미 없게 한 거예요. 그게 바로 맹렬한 저주와 연계돼 있는 언약의 피입니다. 부활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아닙니다. 공동체 아닙니다. 성령의 공동체 아니에요. 십자가에요. 그걸 본문이 이야기합니다. 넘어갑시다.

30절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무섭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하느냐 하면 가룟유다처럼 자기 양심 찾고 자기 주장, 내 의로움 챙길 때는 무서운 분 이예요. 그런데 의미 없습니다. 이러면 괜찮아요. 왜냐 하면 이미 나는 내가 찾는 내가 없기 때문에. 주님 안에 내가 있으면 그걸로 끝났지, 바깥에 따로 나를 세울 이유가 없어요. 예수 안에 있으면 그걸로 족해야 되지, 그걸 구경하려고 산 높이 올라가서 저 앞에 있는 나란 인간이 예수한테 잘 놓여 살고 있는 그걸 사물로 관찰할 일은 없다 이 말이죠.

그림 그려볼까요? 산, 뒤에 무슨 산입니까? 석수도서관이죠. 옛날 도서관인 줄 알고 가보니까 완전히 크게 돼 있다 이 말이죠. 산이 있는데 우리 공부하고 있잖아요. 산에다 나를 상상해서 이미지를 올려 보내는 거예요. 여기서 쌍안경 들고 관찰하는 거예요. ‘졸지 말고 똑바로 공부해. 공부 똑바로 해야지.’이거 왜 필요하죠? 필요 없잖아요. 주께서 보내시고 여기 주와 함께 있으면 이걸로 끝난단 말이죠. 이걸 보기 위해서 바깥에 나가서 또 제 3의 관찰지역을 우리가 찾을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엄마가 ‘야야, 너 외국에 공부하기 힘들지?’하니까 ‘주님 덕분에 잘 있어요.’‘아유, 내가 그 소리 들으니까 기분이 좋구나.’ ‘엄마는 돈만 보내주면 돼. 내 걱정 안 해도 돼.’

원수 갚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한 제대로 된 기준만이 심판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 기준이 뭐냐, 언약의 피입니다. 이렇게 설명해 줬는데도 우리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저보고 욕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성경을 보면서 십자가만 보이느냐, 딴 거 그렇게 많은데 왜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왜 성령의 열매도 그렇게 온유 화평 그렇게 있는데 왜 십자가만 있느냐는 거죠.

십자가는 명령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기준 이예요. 이거는 하고 안 하고는 의미 없어요. 십자가만 의미 있어서 의미 있는 곳으로 쪼이냐, 안 쪼이냐, 그게 문제지, 십자가를 믿어버리면 그건 가짜 십자가지, 십자가는 믿음의 대상이 안 됩니다. 돔배기가 아니고 끝까지 다 있는데, 보세요. 어떻게 부분이 전체를 커버합니까?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건방짐, 교만 이죠.

전체가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는 이게 기준이 되고 기준에 중심이 있어요. 죽 나무가 있고 소나무 있다가 갑자기 삐쭉 큰 게 있으면 전봇대, 작은 채송화 있다가 불뚝 솟아오르면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러면 다른 사건, 노아 홍수사건, 계 돈 탄 사건, 애 공부 잘한 사건, 있더라도 십자가 우뚝 보면 이게 심판 기준이다 이 말이죠. 이걸 지금 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왜 이걸 안 보고 이런 거 보느냐 이 말이죠. 이건 동전 가지고 긁어내야 돼요.

자, 32절 봅시다. 갑자기 진도 빨리 나가죠. 중요한 게 지나갔으니까 빨리 지나가는 거예요.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 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자, 이 말씀 나올 때 이런 형편이 나올 때 요 말씀 이해하려면 딱 하나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언제 우리가 주님 때문에 고난 받았고 언제 우리가 주님의 큰 싸움 했습니까? 저는 모르는 이야깁니다. 이러면 정답 이예요. 아, 그때 신천지와 싸운다고 애먹었다. 이러면 잘못 이예요.

말씀은 주님이 왔다 가버려요. 히브리서 10장 읽었잖아요. 요 말씀이 이미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지나가고 또 지나가는지 지금 실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한 건 참외 먹고 직장 나가고 설거지 했을 뿐인데 그거 했을 뿐 이예요. 그런데 그게 신앙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매치가 안 되죠. 우리는 설거지 하는 것이 마귀와 싸운 것이다? 나는 남아 있는 세제하고 싸운다고 그렇게 싸웠는데 주님은 마귀와 싸웠는데 그게 어떻게 그게 논리적으로 연결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이미 주께서는 이미.

주님의 기준이 뭐냐 하면 십자가 기준으로 봐서 이미 그거는 썩었다고 본 거예요. ‘그때 니 설거지 하면서 설거지만 생각했지? 니 설거지한다고 다른 생각 안 했지? 그게 내가 마귀와 싸운 효과야.’설거지할 때 그릇 깨질까봐 ‘아이 미끄러워’ ‘ 그거만 생각했지? 거봐. 다른 사람 같으면 설거지 하면서 설거지 하고 내가 어떤 지 다른 생각할 텐데. 요거만 생각했잖아. 너 자신을 잊었잖아.’ 그게 바로 승리한 거예요.

‘마귀야 나오너라’ 이러면 마귀한테 지게 돼 있어요. 마귀? 누구하고 싸우려고 왔지? 싸울 대상이 없네. 이러면 마귀가 ‘아이구, 졌다.’ 이러고 가버려요. 지가 나서겠다고 돈키호테도 아닌 게 지가 기사도 아닌데 삐쩍 말라가지고 풍차 보고 말인 줄 알고 ‘이 풍차야 덤벼라.’ 풍차가 아니고 나쁜 놈아 덤벼라. 마치 미친 인간처럼. 세르반테스가 그거 쓸 때 그 당시의 허위적인 기사 계급을 노리면서 의도적으로 썼어요. 세르반테스의 먼 후 제자가 누구냐, 니체입니다. 모든 게 위선이고 거짓의 세계, 그 사상이 그대로 흘러 내려와요. 문학적으로 보게 되면.

그런데 우리가 사는 게 전부 다 뭐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설거지라면 이거는 패배한 거죠. 주께서 맡긴 설거지, 요거만 집중하세요. 그러면 주께서는 마귀를 이긴 걸로 쳐주시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야, 이건 진짜 어려운데, 마치 ~~ 아닌 것처럼. 사도바울의 모든 해석입니다. 마치 ~~ 아닌 것처럼.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마치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옵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 남편 있는 자는 남편이 없는 것처럼“ "강아지 있는 자는 없는 것처럼”강아지가 지금 자고 있잖아요. 보세요. 아무 소리도 안 나잖아요. 없으니까. 우리가 잠시 투명인간이 되게 되면 마귀하고 누가 싸웁니까? 주님하고 싸우기 때문에 승리만 생길 뿐 이예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누가 나섰다? 자기 양심을 들고 나왔잖아요. 돈키호테 같이. 자살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나보고 벌주지 마세요. 안 그래도 지금 산다는 자체가 더운 날 벌 받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주께서 적절하게 조치를 하니까 니가 니 인생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더운 날 오게 모이고 적절하게 할 테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룰 테니까 니가 마귀도 모르면서 내가 아는데 니가 나대지 마라 이 말이죠. 오늘의 교훈은 나대지 마라.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이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요 내용은 또 굉장히 쉬워요. 요거는 드라마나 영화 보면 많이 나오는 대목인데요. 쉬운 예를 들면 롯데 그룹에 지금 경영권 싸움이 벌어졌는데 롯데 마트에 캐시, 제일 말단 캐시 하는 만약에 서른 중반 쯤 되는 막 결혼하든지 애를 낳은 엄마가 캐시를 하고 난 뒤에 한 달 만에 월급 50만 원을 탔어요. 두 시간 정도 하니까 50만 원 되겠죠. 타고 난 뒤에 롯데 사장님을 향하여 ‘사장님 고맙습니다. 사장님 아니면 큰 일 뻔 했어요.’ 이렇게 한 것이 방금 요 본문의 성취입니다. 윗동네는 집 사고 난리 났죠. 지금 일본 말만 하고 한국말도 못하는데 기자하고 싸우잖아요. 그런데 그 사장을 전혀 몰라도 롯데 마트 제일 말단 직원은 사장님에게 너무나 고마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누가 승리자에요? 롯데 사장이 승리자에요? 말단 직원이 승리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직원이 승리자가 되죠. 그러면 옆에 운동권이 설칩니다. ‘캐시, 다음에 우리 집회 할 때 데모할 때 꼭 참석해야 됩니다. 하게 되면 일당 5600원에서 5700원으로 오른다고 해야 됩니다. 이러면 지금 그 노동운동 하는 사람은 어디와 관계있어요? 노동운동하는 사람은 뭔 뜻입니까?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이게 아니고 ’절대로 우리의 산업은 빼앗기면 안 됩니다.’가 되죠. 왜, 누구하고 싸워서? 이 더러운 세상과 싸워서 이겨야 되니까.

그러면 싸우는 건 좋은데 그 처음에 했던 말단 직원의 행복은 누가 줍니까? 그 노동운동 반장이 줘요? 누가 줘요? 아무도 안 줘요. 왜 안 줍니까? 마음을 낮췄잖아요. 아이 마음 낮춘 것도 못 느꼈어. 그냥 살아. 착하게 사는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되게 마음 낮춘 것 같은데 본인은 자연스럽게 월급 줘서 감사한데 얼마나 고맙습니까? 이것 때문에 애 용돈 주고 참 좋았어요. 하면 노동 반장이 ‘그게 20만원 뜯겼어. 20만 원 뜯긴 거야. 당신이 착취당한 거야. 원래 당신 월급이 80만원이었어. 지금 50만 원이니까 30만 원 뜯겼어. 이참에 데모하자.’

괜히 쑤셔가지고 히브리서 10장이 못 이루게 될 판이라. 그냥 사세요. 주께서 감사하면 모든 게 다 일거에 다 이뤄졌습니다. 데모하지 마시고 그냥 감사하며 사세요. 팔자려니 하고. 아는 게 화근이라. 괜히 알았어. 노동현장 괜히 알았어. 모르고 살면 살찔 걸 괜히 해서 얻어맞고 나중에는 쫓겨나서 자기 부인까지 데모하다 같이 분신자살하고. 쌍용 그게 뭔데, 내 인생을 망칩니까? 가만히 보면 누가 바보에요? 쌍용 자동차가 바보 아니고, 그 데모했던 쫓겨났던 노동자 가족들이 바보에요. 어떻게 자기 인생을 쌍용에다 맡기냐 말이죠. 아휴, 자기 인생을 자동차 회사 거기에 겁니까? 아휴, 바보 같은 인생. 주님한테 걸어야지 거기에 걸어요? 복음을 몰라서 그래요. 사실은 다들 그래요. 복음을 안 게 기적이지. 그게 정상이죠. 바보 되면 바보인 줄 알고, 바보 되는 게 똑똑한 거예요. "어리석은 자를 택하사 똑똑한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그 작업을 모르고" 억울하다는 말은 지가 마음을 안 낮춰서 그래요. 푹~~ 낮추세요. 발로 밟으세요. 그러면 그냥 있는 거 먹는 걸로 족한 줄 알면 됩니다. 이러다 보면 여기서 북한 되겠다마는. 아바이 은혜입니다.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고. 이제 본문 쉽죠?

자기를 관찰하지 마세요. 주께서 주시는데 왜 내가 관찰합니까? 관심 더 받을 건데. 지가 관찰하니까 되도 않은 욕심 있고 거기에 마귀가 틈타고. 데모하라고. 괜히 욕심만 더 키워서 있는 행복 다 뺏어가 버리고.

35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방금 나오네요. "큰 상을 얻느니라" 어디서 준다? 하늘나라에서. 보세요. 우리가 기준이 확실한 언약의 피가 기준 같으면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죽은 자가 죽는다 해서 그게 뭐 섭섭해요? 그게 나사로에 의하면 죽은 자가 산 자인데, 예수 안에서 산 자잖아요. 예수님이 죽잖아요. 죽기 전부터 이미 죽으러 오신 분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으면 우리의 허상이 동전으로 긁혀 나가면 진짜 죽음 안이 그게 부활의 세계에요. 죽어도 잠자는 게 되니까. "소녀야 잔다" 할 때는 분명히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는 이게 산 자가 되는 겁니다. 자고 있어요. 그래서 소녀가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주님 말대로 '아우~ 잘 잤다.' 이렇게 깨어나는 거예요. 울던 사람들 눈물이 확 말라버렸어요. 뭐 자는 애가 사흘 동안 자는 게 아니고 '아우, 잘 잤다. 좋은 아침' 이러고 일어난 거예요. '누가 깨웠어?' 이러고 일어난 거예요. 인간 자체가 다르죠. 완전히 인간 종류가 달라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은 완전히 인간이 딴 인간 이예요. 팔자 운명을 이미 주님이 다 가져갔어요. 우리가 걱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이걸 담대함! 이걸 큰 상! 라고 하죠. 상에는 차등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한 분의 상을 여러 명 나눠주기 때문에. 하나가 다양이 되기 때문에. 동일한 상을 받습니다. 그래서 큰 상 작은 상 없습니다. 다만 이 세상을 보기에 큰 상이 되는 거예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도 큰 상이니까 큰 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 뒤에 말이 딱 나옵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자,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그 놈의 잠시가 몇 년 이예요? 아휴, 답답하죠. 지금 히브리서 쓴 게 언젠데 그 놈의 인내하라 하는데 그 인내를 언제까지 하느냐? 자, 요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돔배기, 앞 끊기고 뒤 꼬리 끊기고 뭐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시간 계산이 내가 태어난 것부터 1년 2년 합니다. 매년마다 생일 축하합니~󰁖. 하죠.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겨울에 태어나~󰁕 매년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당신을~ 매년 이러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시간은 뭐냐 하면 1년 단위로 1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합쳐버리면 이 시간은 죽은 시간 이예요. 한번 산 것은 시간이 필요 없어요. 영원히 사는 거예요.

그러면 인내는 뭐냐, 기다리는 게 아니고 그때가 되게 되면 우리는 되돌아와서 인내한 게 돼요. 1년을 기다렸든, 3년을 기다렸든. 태어나자마자 5개월 만에 주님 오셨든 간에 큰 인내를 한 거예요. 인내를 하고 뭐라 하느냐 하면 '금방 오셨네.' 이래요. 금방 오셨네!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예를 들어서 남편이 미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출장을 갔는데 기약이 없어요. 온다는 소식이 없고 '곧 갈게' 해놓고 계속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아내가 지쳐서 남편 돈 가지고 애들하고 골프를 쳐서 마지막 골프 치는데 그 골프장에 10년 만에 남편이 나타났어요. 지금 남편 온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지금 왜냐 하면 이게 언더파가 되느냐 그 문제가 남았어요. 이번 골이 좋은데 기다려봐라. 기다리고 이거 마저 넣고 내가 환영해 줄게. 땡그르 들어가니까 아오, 여보 잘 있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항상 우리의 지속 속에 있는 우리의 의식의 사이에는 우순이 시간을 장악해요. 제일 중요한 문제가 시간을 먼저 장악해요. 그러면 나머지는 뭐냐, 전부 다 잠깐이 됩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사건을 하되 우리가 기다리는 사건을 허무하게 만들어버려요. 다 허무하게 만들어버려요. 그 허무한 시간 속에서 갑자기 주께서 들이닥치니까 '진짜 주께서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셨네.' 라고 돼 버려요. 그래서 이 말씀대로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죽어있는 인간이 꽉 있거든요. 동전으로 긁어내면 우리는 안타까워하잖아요. '주님 이번 이거 적금 부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하다가 갑자기 주님 등장하면 어떻게 됩니까? '언제 오셨어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킬 생각하지 마세요. 잠깐이면 잠깐이란 걸 느끼도록 해주실 겁니다. 쓸데없이 이걸 또 지킨다고 뭐 '주여, 2천년 지나왔지만 잠깐 믿겠습니다.' 안 믿어져요. 본인 하는 일을 하세요. 주께서 깜짝 쇼를 벌리실 겁니다. 그러면 '잠깐이네' 이렇게 하실 거예요. 오늘 37절까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삶과 죽음의 틈 사이에서 생명이 나왔기에 그 틈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돼 주시옵소서. 그 틈에서 절대적 기준, 언약의 피가 이 세상과 오는 세상 전부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이제와 원천과 끝을 이제는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50814b-히10장28절(중간 부분) -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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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2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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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