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사무엘4강) 존재 증명 (사무엘상 2:1-9)
대전-(사무엘4강) 존재 증명 (사무엘상 2:1-9)
이름 : 주향(IP:222.116.177.93)
존재 증명 (사무엘상 2:1-9) 대전-(사무엘4강)
이근호
2015년 7월28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2:1-9
(2: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 원으로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 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2: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2:5)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 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 올리기도 하시는도 다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2: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 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2:9)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 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2장에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나가 처음에 애기를 낳으려고 할 때는 기도 내용이 안 나오다가 갑자기 애기 낳고 난 뒤에 기도 내용이 나왔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합니다. 기도도 주님이 주셔야 된다는 사실, 간단한 내용이에요. 기도를 하는 게 아니고 기도를 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누누히 수백번 이야기 한거에요. 기도를 하게 하신 겁니다.
내가 기도하게 되면 내가 살아나지만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는 기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죽이는 기도. 그게 바로 십자가 기도지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나를 하나의 거름으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주의 기도만 이루어진다면 나는 사라져도 좋습니다. 자기부인의 기도지요! 그래서 기도도 결국은 뭐냐하면 기도도 싸움이다. 어떤 싸움이냐? 내 뜻을 관철할 것이냐 주님의 뜻을 관철할 것인가 하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기도가 싸움과 관련된 유명한 일이 있었지요! 야곱의 얍복 강가에서 있었던 일. “축복해 주시기 전엔 못갑니다.” 축복해 주셔야 됩니다라고 하지요. 기도가 싸움이다, 싸움인데 싸움의 대상이 우리가 정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상당히 어려운 겁니다. 우리가 정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정리해보면 기도라는 것은 처음엔 조용하게 시작 했다가 주님께서 이 기도 자체를 시비거시죠.
시비를 걸어버리면 내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기도에 갑자기 주님의 뜻이 개입이 되는데 주님의 뜻이 어떻게 개입되냐 하면 내 뜻이 찢어지면서 주님의 뜻이 이 안에서 나오게 되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 시작했다는 것이 기도 끝나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의 거름이 된다는 거에요. 하나의 퇴비가 되는 거에요. 내 뜻을 퇴비로 삼아서 주의 뜻을 성사시키는데 나를 그동안 이용한거지요.
주님께서 이용한거지요. 그것에 대한 예가 야곱이 얍복강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자기 혼자 있는데 누가 오냐 하면 어떤 타인이 찾아오지요. 타인이 찾아 왔을 때 야곱은 위협을 느끼면서 여기서 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 싸움이 뭐로 바뀌느냐하면 본의 아니게 기도가 되고 말았어요. 싸움이 기도가 된다? 어떤 경우에 그러냐 하면 나를 위협하고 공격하는 그 분이 내 기도를 들어줄 그 당사자일 경우에만 그래요.
만약에 아버지가 곧 돌아가시려고 하는데 아버지에게 재산이 많다. 그런데 그 아들이 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아버지 저에게 유산을 물려주세요!”라고 자기 혼자 기도하게 되면 이것은 소용없는 기도에요. 자기는 산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다른 형제들은 모여서 갈라서 갖기 다 끝나고 “너 어디 갔었어? 나 기도하러 갔었어! 기도 잘 하고 왔네! 우린 이야기 다 끝났어 도장 이미 다 찍었어!” 이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기도하지 말고 어디로 가야 해요? 줄 수 있는 아버지에게 가서 형제에게 밀리지 말고 싸워야 되지요! 제가 기여한 게 이 정도입니다. 이런 게 있어야 되요. 야곱은 이 기도가 제가 이것을 원합니다가 아니라 야곱 정도 되면 이건 죽기 아니면 살기에요. 이것은 자기가 살기 위한 그냥 본심이 그대로 유발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곱이 하는 싸움 속에서는 야곱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천사와 달려들어서 붙들고 싸움을 하기 때문에 거기서 무엇이 도출되느냐 하면 야곱의 근원.
야곱의 밑바닥이 다 들통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거에요. 인간은 자기의 심연, 깊은 바닥을 몰라요. 평생을 껍데기 치장한다고 평생을 다 보내요. 진짜 나를 모르면서 그냥 가요. 벌판에 구름이 지나 갈 때 구름이 하늘에서 그냥 지나가잖아요. 구름이 가끔 비는 내리지만 구름이 포크레인처럼 들판을 파고 그러진 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하나님이 오게 되면 “하나님! 저에게 찾아오지 마시고 하나님 볼 일 보시고 가시는 길로 가시죠”
우리네 인생이라는게 이래요. 우리 교회에서 잠시 만나고 교회 끝나고 예배 마치고 각자 헤어집시다! 주님은 주님대로 볼일 보시고 나는 나대로 볼일 보고, 이거잖아요. 그런데 야곱한테는 그게 아니고 야곱을 죽이는 하나님, 야곱을 박살내는 하나님, 거기에 대해서 야곱은 순순히 당하진 안지요? 당하고 있지만 않은 야곱, 야곱이 바로 그때의 근원 뿌리를 보여 줍니다.
사무엘상 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가 바로 인류의 뿌리를 보여 주는 거에요! 인류의 뿌리를 일개 여인이 보여 줍니다. 제가 전에 강의를 하면서 성경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처음 성경 이야기를 할 때 꼭 이야기해요. “자! 여기는 들판입니다. 이 밑에는 원유가 있습니다. 원유를 뽑아 올릴 때 탑을 세워서 밑에서 뽑아 올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뽑아 올릴 때 이것을 뭐라 하냐 하면 이것을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해요. 노아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원유를 뽑아 올리듯이 그것 뿐만 아니라 모세, 다윗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성경에 나오는 예례미야, 에스라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언약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거든요. 계시라 하는 것은 우리가 곡갱이를 들고 아무리 파도 알수 없는 원유처럼 땅 밑의 원유, 즉 뿌리를 주께서 파내십니다.
그렇다면 파내는 장소는 한나가 되지만 파낸 내용은 인류 보편적인 속성을 뽑아내는 겁니다. 어디를 파도 기름은 나오니까! 시커먼 기름이 나오니까! 누가 파도 내가 파면 파랗고 네가 파면 빨갛고 그렇지 안잖아요? 누가 파도 기름은 까맣지요? 한나가 파도 까맣고 이사야가 파도 까맣고 노아가 파도 까맣고 동일한 까만 인간의 근원이 한나를 통해서 보여지게 됩니다.
우리는 한나라는 인물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한나가 뽑아낸 그 내용이 지금 2015년에 있는 우리의 밑바닥의 근원을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궁금해지는 것이 있지요? 목사님! 뿌리가 뭡니까? 뿌리의 내용이 뭡니까? 한나의 찬송 가운데서 한나가 굉장히 감격스러워 하면서 지금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나가 이러한 찬양을 할 때 무엇이 날아가버리냐 하면 자신의 신세 한탄이라든지 신세 타령이라든지 자신의 장래에 10년 뒤나 20년 뒤 장래가 어떻게 된다든지 미래에 대한 설계, 인생 설계가 다 날아갑니다. 의미 없어요! 그렇다면 미래가 날아간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더 살 이유 없습니다.
앞으로 인생을 아무리 더 끌어 봤자 지금 주 앞에 찬미하는 이 순간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오지 않을테니 지금 죽어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아마 더 시간을 끄면 이 기쁨을 상실하고 때 묻을까봐 걱정됩니다. 이 순간, 그래서 믿음은 순간이다. 순간을 지속적으로 이어버리면 뭐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 믿음도 날아가 버린다. 어제의 믿음, 오늘까지 지속 불가합니다. 그건 안되요! 그때 그때 달라요!
그런데 그 순간은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기쁨의 순간은 나의 뿌리가 드러나는 순간, 그러면 야곱의 뿌리는 뭐냐하면 얍복 강가에서 진작에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죠. 약속이라는 ‘나’ 야곱이라는 이름의 인간은 죽어도 마땅하다는 사실, 그 만큼 나는 죄인이라는 뜻이죠. 그게 드러나면서 주님께서 나를 살려 주는 것은 야곱이라서 살려 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는 조건하에 살려 주는 겁니다.
내가 아담 안에서 더 살아봐야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 구원해 주느냐!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조건 안에서 바꾸어 우리를 살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야곱은 야곱이 아니고 그때까지의 야곱을 증명하고 야곱을 증거하는 삶이었다면 야곱 이후에는 이스라엘을 증거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명하는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강의 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너의 존재를 증명해라! 네가 인간인 이유를 설명해라!” 굉장히 도발적인 질문이지요. “태 집사님 본인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세요! 그거 뭐 딱 보면 사람이지!”이렇게 되잖아요! 야곱이 이야기하고 한나가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뿌리를 경유할 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 나와요!
나의 뿌리, 아까 원유라고 표현했는데 한나의 뿌리를 경유해서 다시 나올 때 나는 죽어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하는 용도로써 나를 사용할 때 그게 비로소 내가 뭐냐하면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창조주와 관련성이 있을 때만 인간이 됩니다. 나의 창조주, 나의 구원자 정확하게 말해서 나의 구원자와 관련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을 죄인으로 밝혀내고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그 영이 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두 가지를 사용해요. 나는 나를 증명하는 바로 이 방식이 바로 그동안 나를 지탱했던 죄가 된다. 나의 죄가 뭐냐? 나를 증명하는 식으로 나를 드러내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나는 ~라고 하는 것. 이것이 전부 죄가 되지요. 나는 헌금했다! 죄가 되지요. 나는 예배드렸다! 죄가 되지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가 대표적인 죄가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죄인것을 아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능력으로 주신 하나님의 믿음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은 지옥갑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이고 죄가 아니라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가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마을에서 떠나고 우리교회에서 떠난 사람도 많은데 왜 떠났는가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니까 그 사람들이 믿음에 합하지 않아서 떠난 것 같아요. 제 생각에 믿음에 합하지 못해서, 나는 이렇게 믿는데 이근호 목사는 딴 소리를 하거든요.
그래서 더 이상 같이 할 이유 없다고 해서 떠난 것 같은데 그 떠난 사람에게 묻고 싶은 게 뭐냐하면 이것을 묻고 싶어요. 이단이 뭡니까? 당신은 뭘 믿십니까? 그걸 묻고 싶은 게 아니고 만약에 당신은 뭘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성령, 이것저것 총동원해서 이야기하니까 짜증나고 이단이 뭡니까? 쉽게 말해 당신 보기에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이런 저런 사람이 지옥간다고 이야기 하겠지요.
당신이 그 사람이네요. 당신이 이야기한 지옥 가는 사람 중에 당신이 포함되있네요! 그것을 들킬까 싶어서 도망치듯 가버리지요! 그 사람들은 뭐냐하면 내가 잘남을 증명하는 재미로 살았는데, 만약에 목회자이면 이근호 목사의 설교와 성경 귀절로 설교하면 얼마간은 버티고 “새로운 이야기 하네”이래 가지고 교인들에게 인정받아서 주일 낮 설교에서 한 것처럼 (교인들에게) 삥땅 칠수도 있겠지요!
삥땅 아닌것 같은 삥땅을 하는데 이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목회 하는 것이 아니고 과연 예수 믿는다는 우리가 과연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을 자꾸 들이대고 지적하니까 버티기가 참 힘들겠지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이다”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옛날에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나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뭘 알았냐 하면 내가 율법에 흠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 이야기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그 세력에 의해서 나온 고백이라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마귀가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겁니다. 그전까지는 몰랐지요! 자기만 잘하고 자기만 성실하고 자기만 착하게 살면되지 뭐할라고 꼭 마귀를 상대해야 됩니까? 나 혼자 착하게 스스로 양심껏 살면 이게 정상이라 생각되지요.
그런데 그게 배후의 마귀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사실, 왜냐하면 마귀는 너만 증명하면 된다고 생각케 하고 너만 잘나면 된다고 생각케 하고 자꾸 그런 식으로 부추긴 거에요. 너만 착하면 천국 보내준다. 마귀가 그런 식으로 죽 해온겁니다. 그중에 나온 사람이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브닌나 잖아요. 브닌나를 뭐라고 표현 했어요? 1장에서 원수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원수지요! 그래서 브닌나가 왜 자꾸 구박을 하느냐 하면 자기는 아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여자를 정리 하자면 “나는 복받을만해서, 아들 가질만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보시기에 복받을만한 여자다 이게 나의 존재 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에게 뭐가 빠졌어요. 나는 아들 가질 자격이 못되라는 것이 빠져 있다라는 거지요. 그렇잖아요?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빠져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사는 기쁨이 뭡니까? 자기가 잘난 맛에 사는 것이 기쁜거에요. 누가 옆에서 박수쳐주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마귀가 전부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한나는 기도 가운에서 주님이 한나의 모든 것을 찢어버렸어요. 찢어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인류 보편적인 하나님의 계획서가 한나를 통해서 튀어 나와 버렸지요? 그 계획서가 한나가 말하기를 이 계획서 내가 기도 하니까 응답 받은거야! 라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이게 자기가 안 것 같으면 나 믿음 좋다.“내가 찬양해서 응답받았어!” 막상 끄집어내서 내용을 보니까 이것은 개인 소유가 아니예요.
그래서 한나가 앞으로 증명해야 될 것은 사적인 소유를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그걸 증거 하는 게 아니예요. 나는 이래서 믿는 사람이 맞다. 자기 마음을 증명자라고 한나에게 성신이 임한 것도 아니고 성령이 임한 게 아니라니구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요 사적인 남의 믿음과 우열을 가리는 경쟁에 나서라고 성령을 준 게 아니고 그냥 하나님이 나를 이용한 거지요. 막상 끄집어내서 보니까 내것으로 전환되지 않은 요소!
마치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있어요. 주택 택지 하나를 분양 받아서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고 굴삭기로 짓는데 “여보! 이제 우리 세 식구 아름다운 집을 짓고 이층도 올리고...” 이러는데 툭! 파는데 백제의 유적지가 발견됐습니다. 문화청에 택지 반납하고 자기는 다른 택지로 이사가야 되요. 분명히 내 땅에서 나왔으니 내 것이라 생각되는데 내 것이 아니고 국가의 귀소되야 되는 것이 나와 버렸다는 거에요.
그럼 여기서 뭘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름다운 집을 짓겠다는 것도 다 날아가 버렸어요. 성도가 꼭 그꼴이에요. 주의 은혜 받아서 은혜로 살아야지! 이랬는데 막상 꺼내 보니까 이건 주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인생이 자기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사는, 그래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다. 택지 분양이야 다른 곳에 다시 받아서 살면 되지만 막상 성도를 포크레인으로 파보니까 그 안에 예수 귀신이 있어서 날 잡아 죽이는,
너는 죽고 나는 산다 이렇게 되니까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죠!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나? 인생이 하루아침에 이런 팔자가 됐나? 그런데 이걸 아셔야 되요.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나를 잃어버릴 때가 최고의 기쁨입니다. 나의 미래의 계획, 미래의 설계 내 자신은 이렇게 될것이다. 그런 것들이 1개월후에 또는 1년 후에 아름다운 미래의 계획 같은 것이 현재의 나의 기쁨을 뺏아가면 뺏아갔지 지금 기쁨에 견줄만한 것은 못되고 하나의 순간처럼 보입니다.
순간을 통해서 원유가 분출되지요. 팍! 하고 검은 기름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오게 되면 그것이 사무엘상2장에 나오는 한나의 기도 내용입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계획이 이제 분출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안에서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우리가 예상할 수 있겠어요? 예상 못하겠어요. 예상이 안 됩니다. 사건이라 하는 것은 우연이기 때문에 우연이 필연적 바탕위에 있는 상황이라 우리는 예상 못해요.
왜냐하면 예상이 되게 되면 그것은 필연 속에 포함이 되기 때문에 예상한다는 말은 지금의 미래를 예상한다는 말은 같은 판이 되기 때문에 맨 같은 판이 되거든요. 지평이거든요. 그래서 예상이 되지만 이걸 뚫어 버리면 이것은 전혀 낯선 것이 튀어나와 버려요. 예상 못한 거에요.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사람들에겐 계획이 있고 기대하게 되어 있어요.
기도를 하든 금식을 하든 뭔가 있기 마련인데 전혀 예상 못하게 뭔가 하나 터져 나오게 되면 그것은 내가 예상한 것 뿐만 아니고 과거의 기억까지 전부 이걸 접어 버리라는 하나님의 신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니가 지난 날 어떻게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일체 신경쓰지 말고 앞으로 니가 어떻게 살 건지 그건 내 손에 맡기고 일체 신경쓰지 말고 다만 그동안 살아온것만 해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앞으로 더 살수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산다면 그것은 여전히 너의 계획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증명을 위해서 네가 시간을 질질 끌어서 더 살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것을 성령이 임하면 네가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 그런 사람이 되는 것. 자! 그러면 진도 나가기 전에 한번 더 물어 봅시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면 이 질문은 지난 오후 설교 마치고 이 집사님이 한 중요한 질문이에요. 믿음이 없다고 해야 됩니다. 우리에겐 믿음이 없습니다. 내가 믿음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진짜 믿음 속에 포함된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라는 취지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안 믿어도 되는 것, 진짜 믿음이거든요! 내가 믿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가짜 믿음입니다. 100%가짜 믿음입니다.
안 믿어도 되는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 그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님이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이 순간이 끝이 아니고 앞으로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도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되풀이 되어 계속 이어져야 되겠지요?“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이런 순간이 찾아오게 될 때 나는 안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할 때 이것이 지금 뿐이야 내일되면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 됩니까하는 질문을 한거에요.
얼마나 중요한 질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내일 되면 또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은혜의 왕 노릇이라고 합니다. 은혜가 지배를 하게 되면 같은 은혜의 성질을 계속 작용하기 때문에 계속 그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을 주실 때 그냥 조용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요란스럽다는 것, 왜 요란스럽냐 하면 우리는 어제 그런 믿음을 가졌잖아요? 내일이면 그 믿음 나의 믿음으로 이미 내 소유로 전환이 되어 버려요.
왜냐하면 육적이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도 깨는데 요란스러워요. 상당히 진지하고 의미있는 질문을 오랫만에 받아봤습니다. 안 믿어도 된다는 게 그동안 얼마나 얻고 싶어도 얻지 못한 행복입니까? 이 순간이 올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이 가벼운 순간이 올 줄이야! 그동안 예수 믿느냐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동안 신앙 생활한다고 얼마나 노고가 많았습니까? 그 말을 얼마나 여러분 사기를 당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적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그냥 다메섹으로 내려가는데 주님이 그냥 찾아왔잖아요! 뭐 했는데요? 사전에 뭘 준비한 적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 아무것도 없음이 그것이 바로 믿음이 찾아오는 현상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값없는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행함과 상관없고, 아브라함에게 네 아비 본토 집을 떠나라고 할 때 아브라함은 뭐라했습니까? 내가 그런 말 들을 줄 알았다. 사전에 준비한 적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아브라함은 의인이라 일컬음을 얻은 거에요. 그 방정식, 아무 행한 것도 없이 의인되는 방식에 있어줘야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만 천국가고 나머지는 지옥갑니다. 정말 이건 누굴 약 올릴일이지 얼레리 꼴레리 할 이야기. 약 올릴 이야기에요. 이것 안 받았지? 요것바라! 믿음생활 잘해 보세요. 열심히 해보세요. 아마 지옥갈껄!
바로 한나가 그 순간을 맞이합니다. 그 전까지는 한나가 울고불고 난리 나났지요? 저에게는 왜 아들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이 뭐 남아도나? 너한테까지 가게! 왜 저에게만 안줍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이 떨어져야 되고 할렐루야! 외쳐야 되고 그래야 되는데 왜 저에겐 안 주십니까? 이렇게 하다가 아들을 주시니까 어떻게 합니까? 도로 드리잖아요! 자신의 죄를 담고 돌려 드립니다.
자! 한나가 찬송을 하는데 이 찬송이 누가복음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송과 동일한 찬송이 됩니다. 누가복음1장 봅시다. 1장에 보면 마리아가 가로되 이렇게 되어 있지요? 51절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에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사무엘상2절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이지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도다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뭘 의미하냐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같은 법칙을 적용한다는 뜻이죠? 아까 이야기한것은 뭡니까? 보편적인거죠? 한나가 기도할 땐 이렇다 마리아가 기도할 땐 이렇다가 아니라 한나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심지어 예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동일한 스케줄에 따라 동일한 내용을 찬양에 담아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 이 원칙을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해봅시다.
우리가 성령에 의해서 기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한나의 찬송, 마리아의 찬송, 주님의 기도, 사도 바울의 기도가 공통적으로 나올 때 이것이 성령이 하신 내 안에서 하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이것은 인간의 누가 되도 관계없어요. 누구나 성령이 임하게 되면 같은 취지의 기도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같은 취지의 기도가 나온다는 말은 지금 성도한테는 동일한 원칙을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네 자로 하면 무차별성이다. 테러범들이 기관총을 쏠 때 차별을 두지 않지요? 무조건 무차별로 쏘지요? 무차별성이라는건 인물보지 않고 어른 아이 상관없이 다 쏘아 버리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 그 사람의 신분이나 태도 이런 것 관계없이 무차별성으로 같은 원칙을 적용시키죠! 이 무차별성의 한계를 넘어서 무한이 된다면 이 무한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적용시키는 지상의 원리가 된다. 지상의 원리이니까 유한이 아니고 무한이니까 신에 속한 속성이 되죠.
그런데 이것은 이 땅에서 무차별성입니다. 무차별성이 한나의 기도에 나왔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특별히 제 얘기를 이라는 말은 해서는 안된다는거지요. 하나님, 저 아시죠? 그것도 특별히도 아니고 트~윽별히 저에게는 특별조치를 취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기도는 반칙성이 있는 기도 입니다. 주님께서는 특별히 대우해주시지 않습니다. 그냥 기관총으로 무차별 갈겨 버리시지 원칙으로 물총에서 물 나오듯이 주님의 기관총에서는 한나의 찬송이 무차별성으로 나와 버려요.
그런데 그 나오는 내용이 뭐냐 여기 사무엘에 나오잖아요.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7절에 나오지요 마리아의 찬양에서는
(누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누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누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이러한 원칙이 나온다는 것은, 이제부터 좀 어려운데 여러분들이 잘 들으실테니깐 이게 뭐냐 하면 브닌나가 원수잖아요! 자기는 아들 있다고 자랑 질 했다 말이죠! 한나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아들을 못 낳게 하신 겁니다. 서러움 받아라! 그런데 그 서러움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받는 서러움에 동참케 하는 서러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무차별적인 원칙이 있는데 뭐냐하면 주님이 이 땅에 살면서 겪었던 그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경험하고 체험하게 하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는 무차별적으로 성도에게만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외로움입니다. 왜 외로우냐 소통이 안되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외국말이라 안 통하는 게 아닙니다. 같은 언어인데 이상하게 방언처럼 되도록 성령의 언어가 되도록 하는 겁니다. 성령의 언어는 룰루루 랄랄라가 아닙니다. 그냥 또박또박 이야기 했는데 예수님은 진리시다 라고 했는데 저쪽에서 듣기엔 방언이 되버려요. 방언의 구조다 이렇습니다.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는 것, 문장을 만들 때 주체의 자리를 비워놓고 주체의 자리에 항상 예수님을 집어넣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겐 방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 존재 증명하기 위해서 말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내가 ~이러이러 하다로 문장을 만들기 때문에 “나는 아들을 가졌다” 브닌나가 한나 앞에서 자랑 질 했지요. 아들을 가졌는데 그 아들이 누구의 아들이야 하면 나의 아들이다라는 거지요. 그런데 너는 너에겐 아들이 없잖아?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복 받은 자이고 네가 저주 받은 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아들뿐만 아니고 나는 □이다. 에서 □안에 아들을 집어넣어도 되고 돈, 승진, 권력등을 다 집어넣어도 되고 여기에 모든 걸 다 집어넣어도 됩니다. “나는 승진 했는데 너는 승진에서 탈락했잖아! 나는 건강한데 너는 감기들었잖아! ” 전부다 집어넣어도 되요. 그런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프다, 내가 나는 아들이 없다, 나는 가난하다 이러면 성도입니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내가가 앞에 있는 이상 나는 노숙자이다 성도에요? 성도 아니에요? 이게 바뀌어야 성도가 되는 겁니다.
노숙자를 도와주든 거지를 도와주든 목회자가 할일은 이것을 바꾸는 거에요. 이것을 어떻게 바꾸냐 목회자 본인이 바뀌어야 되지요! 어떻게? 두세 사람도 내 이름,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 교회다. 이 말은 천국에 오지 말아야 되는 사람은 안 와도 좋습니다. 이렇게 되야 되요. 천국에 못 갈 사람은 안 오셔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오셔도 상관없는데 오시는 것도 주의 뜻이지만 안 오셔도 구태여 저희는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체로 여기지 않는 분이 교회라고 우기는 것.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찬송이나 모든 찬송이 마리아의 찬송도 성도에게 똑같은 내용으로 적용이 되요. 그 적용의 원칙은 주체 부분에 예수님을 집어넣는 것, 그러면 이제 묻습니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도 성도가 아니다 했어요. 자! 그럼 오늘 마지막으로 물어 봅시다! 예수님 대신 ‘하나님’을 집어넣으면 성도 입니까? 성도가 아닙니까? 성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그 자리에 집어넣는 것을 개혁주의 사상, 칼빈주의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건 이단 사상입니다. 그러면 같은 응용문제인데요. 그 자리에 삼위일체 집어넣으면 됩니까? 안되는거에요. 왜 안되는가? 삼위일체나 하나님을 넣으면 왜 안되는가 하면 이것이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반드시 하나님은 타인으로 와서 내가 미처 모르는 나의 죄를 발췌를 해 줘야 되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삼위일체를 믿고 또는 예수님만 믿어버리면 내가 잘난 사람이 되버리면 이건 100%가짜 입니다. 내가 죄인으로 전환되어 줘야 해요. 죄인으로 전환 될 때 주님은 바로 죄인을 부르러 왔다! 는 공식이 나를 거름으로 사용해서 나를 퇴비로 사용해서 이게 구축이 되어 있어야 되요. 어느 현장이나 어느 장소에서나 구축이 되야됩니다.
만약 집사님이 밴드를 조직해서 클래식 밴드를 만든다! 그러면 그 현장에서 집사님이 뭘 느껴야 되냐 하면 참! 내가 죄인이구나! 이렇게 해야 되고 더 나아가서는 주여! 저를 안 살려 주셔도 괜찮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해야 되냐 하면은 그런 생각을 해야만 주변의 마귀가 눈에 들어와요. 악마가 눈에 들어 와요. 악마는 사기를 치거든요. 악마는 그 자체가 거짓말장이니까 사기를 치는데 너! 이거 원하지? 내가 그걸 갖고 있다! 나한테 복종하면 준다.
사실은 모든 인간이 사기꾼들입니다. 남을 꼬실 때 너 이거 필요하지? 갖고 싶지? 내말 들어라 이거 줄께! 이게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꼬실 때 그렇게 했어요. 너 이 밴드에 들어오고 싶지? 이 밴드는 시청에서 기본급은 줄 수 있어 들어오고 싶지? 내 말만 잘 들으면 취직시켜 줄께! 이것 사기꾼입니다. 이렇게 돼야 되요. 너 지금 밴드에 들어오고 싶지? 차라리 죽어라! 아무 의미 없다! 나도 의미 없는데 그냥 의미 없는 것 끼리 모여서 의미 없음을 통해서 저 하늘이나 바라보자! 그럴 때 영광이 되는 거에요.
또 하나 예를 들면 병준이가 결혼할 때 영광 돌리는 방법은 결혼 의미 없다. 하객으로 온 아줌마들 집에 가세요. 식장에 찾아올 필요 없습니다. 식권은 드리겠지만 결혼은 해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축하하지 마세요. 결혼해도 죽는데 축하해서 뭐 합니까? 그런 마음으로 했겠어요? 그래서 젊은이들은 사탄의 미혹에 빠지는 겁니다.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사탄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잠언서에 보면 노인들의 격언을 귀담아 들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인들이 그냥 노인된 것이 아니다. 그 만큼 사기를 당했다. 전도서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어요? 청년들아! 마지막 때가 오기 전에 너는 주의 말씀을 들어라! 다른 말로하면 지혜자의 말을 들어라 이런 뜻이에요. 지혜자의 말이 뭔데요? 그것이 무엇인데 들어야 됩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이런 지혜를 갖고 목회를 한다면 청년들아! 교회와서 비젼 비젼하지 마라! 네가 본 이 교회도 다 헛된거야!
네가 교회와서 기도하는 것도 죄야! 글쎄요? 그것을 젊은 애들이 알아들을지? 듣는 애들도 있어요. 우리교회 청년도 있는데 그건 드믄 일이고! 거의 못 알아 들을걸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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