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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a-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a-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6.154)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a-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7장19절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상당히 예수님께서 오버하신다는 느낌이 들지요. 20절에 보면,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앞에 뭐 하나 글자 붙인다면 “가만히 있는 당신을 왜 우리가 죽인다고 당신은 그렇게 혼자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것 봐! 우리는 점잖은 사람이야. 당신이 너무 지레짐작 그렇게 오버해서 스스로 그렇게 자꾸 몰아세우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을 건드릴 의사도 없고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요. 누가 봐도 유대인들의 말이 맞고 예수님께서는 뭔가 지금 본인이 스스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지요.

그래서 제가 시작할 것은 보는데 왜 안 믿어지느냐, 예수님을 마주보고 대화를 하잖아요. 대화를 하는데, 본다는 이유 때문에 영 믿음이 안가. 차라리 예수님께서 구름 속에서 음성으로 이야기하게 되면 “아이고, 신기하다. 구름 속에 어떤 어르신네가 계시는 모양이다. 믿어야지. 저 구름 뒤에 있는 분을 믿어야지.” 이렇게 될 텐데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 믿어져요.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평범해서 안 믿어지잖아요. 너무 평범해서. 좀 멀찍이 떨어지면 신비감이나 흐르지. 완전히 신비를 삭제하고 코앞에 딱 등장하니까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 동네 집 누구 아저씨 아들, 방앗간 집 아들, 이런 식으로 있는 것처럼. 세탁소아들 이런 것처럼. 너무나 평범한 겁니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도 이렇게 예수를 안 믿는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 말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이 보고도 안 믿는데.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허술 하느냐, 믿는다는 이 근거가 이건 무지 무지 허술하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지가 상상해서 얼마든지 예수를 조작해내가지고 믿습니다. 라고 지가 우긴들 “너는 믿는 거 아니야.” “너는 믿는 것 맞아.” 그 판정을 누가 함부로 내리겠습니까? 확실하게 믿는 게 맞아. 확실하게 아~ 이거 믿는 게 아니야. 라고 판정내릴 수 있는 그 위인이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다면 이것은 우리가 뭔가 예수님에 대해서 믿지도 않으면서 그냥 신비로운 분을 그냥 조작해내가지고 자기 미래를 보장받겠다고 이렇게 억지로 부리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믿느냐, 안 믿느냐를 두 가지 던져요. 하나의 율법을 네게 주었다는 거예요. 율법을. 그러면 율법대로 받듯이 너희들이 나를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동의합니다. “그래, 우리 율법 받았어.” “율법 받았지?” “그래, 받았어.” “자, 그럼 율법대로 나를 죽이는 것만 남았지.”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은 것이 어떻게 예수 당신을 죽이는 동기로 작용하는지 그들은 도무지 수용이 안되는 겁니다. 만약에 율법을 받았다. 자, 받았으니까 이 율법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가지고 예수 등장하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으라고 이렇게 분노에 끌어서 죽이게 할 수밖에 없는 원인이 주신 율법 안에 이미 그 안에 힘이 담겨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를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성경책을 줬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의 논리가 그런 논리에요. 참, 터무니없는 논리지요. 이거 오늘날 교회에게 이 이야기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예수님을 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줬다. 이리 되어버리면 이 논리 속에 뭐가 빠졌냐 하면 “하나님 말씀 지켜서 구원받아야지.” 이 요구사항은 확 빠져버리는 거예요.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건 우리 생각이고. 확 빠져버리는 겁니다. 쓸데없는 데 거기에 우리가 가미된 거예요. 그럼 방금한 두 문장을 합쳐봅시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아, 율법을 줬으니까 율법을 지켜서 복 받아서 영생 얻어야지.’ 라는 생각이 합쳐져서 누구를 살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럼 이 논리로 계속 가봅시다. 계속 가버리면 뭐냐 하면 예수님은 맞아죽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사전 작업이 뭐냐, 나를 때려잡으라고 뭐를 줬느냐 율법을 먼저 준겁니다. 율법을 주니까 그들의 반응은 이제는 스스로 구원될 수 있네. 잘만 지키면 구원받겠다. 라는 것이 힘으로 작용해서 어떤 힘인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살해해야 될 힘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누가 누구를 죽인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뭐라고 반발합니까? 나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다. 이렇게 반발하지요. 자, 그러면 빠진 게 있는데요, 유대인들은 나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나를 죽이게 되어있어. 그게 주님의 스케줄이야. 죽게 돼 있어. 그런데 예수님과 유대인 사이에 양자밖에 없는데, 유대인 입에서 뭐가 툭 튀어나왔어요.

그게 바로 20절입니다.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여기에 귀신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요. 귀신. 유대인들의 생각을 따라 가봅시다. 우리 유대인들은 예수 당신이 뭐라고 당신이 대단한 존재도 아닌데 당신을 죽이려하느냐, 우리는 당신을 죽일 의사가 없습니다. 없는데, 당신은 율법을 받아놓고 율법 받은 티를 내는데 그 율법으로 인하여 필히 당신들은 나를 죽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들에게 서로 소통이 안 되지요. 안되니까 유대인들이 대화가 안 된 이유를 거기다가 첨가합니다. 뭐냐 하면 우리는 귀신이 안 들고 맨 정신인데 예수 당신이 귀신 들렸기 때문에 헛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님 플러스 뭐가 있다? 예수 + 귀신이 있다. 예수님에게 귀신이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기에 나온 결과가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이 있는 우리를 이렇게 모함하고 공격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플러스 귀신 들리면 그래서 공격하게 되어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귀신의 기능은 뭡니까? 귀신의 하는 일은 애매하고 잘못이 없는 사람을 죽이는 기능, 죽이는 기능이 뭐가 한다? 귀신이 한다 이 말이죠. 귀신이라는 것은 상당히 좋은 쪽이 아니고 나쁜 쪽에 속하지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미 귀신들렸다고 인정을 했잖아요. 규정을 했으면 유대인이 보기에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지요. 귀신과 함께 나쁜 사람이지요. 나쁜 사람이 계속 덤벼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죽여야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귀신 들렸다는 말은 우리 유대인 입장에서 당신을 죽여도 우리 잘못 아니고 그 죽이는 근거가 뭐냐 하면 우리는 율법에 의거해서 율법대로 당신을 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합니다. 라고 유대인들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본인의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했잖아요. 율법을 받았으면 율법의 티를 내는데 그게 바로 나를 죽이는 쪽으로 모든 스케줄이 진행된다. 예수님께서 언급을 했잖아요. 그 언급한 그 자체가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고 난 뒤에 예수님이 언급한 것도 대라 말이죠. 쉽게 말해서 “아, 율법 받았다. 어떻게 지키지?” 그럼 예수님은 “아니야, 아니야 어떻게 지키지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내 말하는 거기다가 보태.” 그럼 뭐라고 보탤 것이냐, 우리가 율법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남은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 그걸 보태라는 거죠. 그걸 보태는 게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취지라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의 논리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논리는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반드시 상대에게 필요한 겁니다. 예수님의 율법완성에는 반드시 부정적 역할을 하는 상대자가 필요한데 상대자로 뽑힌 역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유대인들인 거예요. 유대인은 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누구를 대표하느냐 하면 인간을 대표하는 겁니다. 어제 수요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미친 그 곳이 세상을 압축한 것이다. 독일군 모형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작전모의하면서 작대기가지고 밀고 전함, 잠수함, 탱크하고 그 조그맣게 만들어놓고 회의실 만들어놓고 모자 멋있게 쓴 독일장교들이 가가지고 회의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전 세계를 대표해요. 왜냐 하면 약속이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스라엘이 대변자에요.

이스라엘이 망했다면 어느 누가 그 자리에 가도 다 망해요. 누구도. 유대인만 율법 받아서 그런 게 아니고 누구도 율법 받으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고 미워하게 돼 있어요. 율법 그 자체에. 그래서 이 점을 이제부터 난해해질 수 있는데요,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할 때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율법을 발명하신 분은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발견하는 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성도가 돼요. 율법을 발견하면서 무엇을 발견하느냐 하면 율법 주신 분이 예수님 맞지요? 라고 발명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지금 발명, 발견이라는 말을 유대인들은 사용하지 않지요. 왜냐 하면 율법을 성취시키는 문제는 이미 주신 분은 하나님이고 그 율법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누구 몫입니까? 이제는 율법 받은 자기가 잘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고 이미 모든 결과는 누구 손에? 자기 손에 넘어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유대인, 유대인 하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거든요.

어느 사람도 사도바울의 편지 보고서 하라, 하라했는데 그 하라, 하라는 것을 전혀 고려치 않고 막 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뭔 행동할 때 “참, 성경 말씀에 하지 말라했는데 이래도 되는가?” 전부다 뭔가 자제를 하고 조심하고 “그래, 이 말씀 어기면 주께 영광을 못 돌리는 거야.” 이렇게 조심들을 하겠지요. 그게 유대인이라니까요. 그게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지시와 명령 줬는데 그걸 깡그리 무시한다? 그것은 본인의 양심이 허락지 않지요. ‘내가 이래서 하나님의 백성 맞아? 이걸 무시하고 백성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양심이 이야기한다. 이건 말이 안 돼. 적어도 은혜를 받았으면 값은 해야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우러나게 되어있어요.

그 선배들이 유대인이에요.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자신감에 넘쳐납니다. 험 잡으려면 험 잡아. 우리는 완벽에 완벽을 기했어. 완벽에 완벽으로 기했으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자, 우리는 완벽하다. 그러면 이 완벽한 근거를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제는 평가에 나서고 그리스도를 재단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심사에 나서겠지요. 왜? 자기는 완벽하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말합니다. 그 완벽에다가 뭘 보태느냐 율법을 발명하신 분을 그 완벽이 살해한다는 내용을 거기에 첨가하라는 거예요. 그걸 첨가해버리면 결국은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을 우리 손에서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율법을 받은 것을 인정한 셈이 되잖아요. 그걸 유대인들은 용납을 못하는 겁니다.

발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요 점을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중국의 동양 의약에 내경이라는 거기에 보면 대둔 혈이 있어요. 이 대둔 혈이 나온 경위가 뭐냐 하면 어떤 주추시대에 유명한 목수가 임금님이 궁궐을 지라하니까 궁궐을 지으러 갔습니다. 목수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하는데 두통이 굉장히 심했어요. 두통이 굉장히 심했는데 그래도 나무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어요. 다리를 다치는 순간 머리는 안 아픈 거예요. 다리를 다쳤으니까 머리가 안 아파. 좀 있다 보니까 또 머리가 아프고. 우연이겠지. 그 다음에 또 발을 다쳤는데 순간 머리가 안 아파요. 그 이야기를 했더니만 나중에 시험을 해봤어요. 침으로 자기 발을 딱 하니까 머리가 안 아픈 거예요. 그럼 이건 뭡니까? 발견이죠. 발명 아니지요. 숨어있는 내용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한 거죠. 혈기라고 하는데 한의학에서. 경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여튼 혈기를 발견할 때 그게 발견입니다. 발명 아닙니다. 발을 찔렀는데 머리가 안 아프다는 그러한 방법은 누가 발명했어요? 그건 중국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에 모릅니다. 하여튼 누가 발명했는지 몰라도 돼요. 자기만 편하면 되니까. 건강하면 되니까.

또 한 가지 발견의 예를 들어봅시다. 루프라이라는 독일 사람이 디프테리아균을 발견했어요. 디프테리아균이 있는 사람의 혀를 보니까 하얗게 점막이 올라가 있는 거예요. 점막을 긁어가지고 현미경으로 보니까 뭔가 파란색 막대기 모양의 물체가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분명히 이것이 균을 일으키는가 싶어서 배양을 했어요. 배양을 해놓고 그 배양된 걸 가지고 토끼에다가 이걸 주사를 해놔 봤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토끼가 잘 뛰어놀아. 그래서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이렇게 생각했는데 토끼가 갑자기 헉헉거리며 죽었다 말이죠. 배양된 것을 토끼한테 심어주니 토끼가 갑자기 죽었어요. 아하! 그러니까 이게 귀신의 장난이 아니고 병의 원인은 박테리아의 푸른색 균에 있다. 그것을 발견해가지고 거기에 면역체를 해가지고 디프테리아균을 면역을 했다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뭔가 나쁜 균을 배양을 해서 토끼한테 집어넣어줬지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꾸 유대인에게 시비 거는 것은 유대인들은 토끼에요. 자기 속에 뭐가 들어있는 줄 몰라요. 자기는 합리적이고 율법 줬으니까 우리를 대표해요. 말씀을 줬으면 사도바울의 권면 있잖아요. 사도바울의 편지 나온 거 뭐 하라, 어떻게 섬겨라, 서로 사랑하라, 분을 품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온갖 명령을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그 만큼 은혜 받아서 이제는 말씀 정도는 지킬만한 그런 역량이 있다고 자부하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유대인들은 구원받는 것은 은혜로 받고 영광 돌리는 것은 행함이라 생각하거든요.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질 때 그들은 거저 나왔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것은 이제 그 홍해 건너가시고 시내산에서 뭘 줬다? 십계명주고 말씀 줬잖아요. 이건 누가 봐도 딱 뭡니까? 은혜 받았으니 이제는 은혜 받은 티를 내서 영광 돌리면서 나한테 은혜 주신 것에 고맙다고 감사하게 되면 이것은 내 백성이라는 그런 공식이 딱 나오잖아요. 여기에 백 명 천명의 사람이 모여도 전부다 고개 끄덕이고 순서상 그래요. 순서상 홍해다음에 시내산 십계명. 이건 누가 봐도 그 순서잖아요. 그 순서를 바꾸는 아이디어는요, 예수님 안 만나고서는 아무도 몰라요. 대표로 저주받으라고 율법 줬다는 사실을 홍해 건너고 했다는 사고방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 아무도 안 들어요.

구원을 할만 해서 구원해줬고 그러니 구원받는 것은 기적이고 그 다음에 기적 받았으면 그냥 입 닦고 이리 있으면 못된 인간이잖아요. 이제는 말씀 주신 거 가지고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살면 그게 영광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게 토끼 속에 있는 디프테리아 병균임을 아무도 모른 거예요. 그게 바로 죄의 숙성입니다. 균을 배양하는 거예요. 어디 안에서? 유대인 안에서 균을 배양한 겁니다. 그게 뭐냐, 죄의 발견입니다. 누가 발명했어요? 주님이 발견한 그것을 죄를 그 인간에다가 심어놓고 결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할 때 멸망했겠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할 때에 멸망했겠습니까? 멸망의 최종의 마지막 자리가 어디입니까? 십자가. 예수님을 죽이라고 그리스도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할 때, 그 때 그들은 자신의 극단을 드러낸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고 율법으로 의를 얻을 것 같으면 십자가는 헛 죽은 것이다. 십자가에 헛 죽은 것이 아닌 것을 너희들이 안다면 율법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처음부터 우리는 죄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될 것이다. 그런 쪽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로운 가능성이 전혀 없지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다 죽은 거죠. 예수님이 죽을 때, 모든 인간이 다 죽은 거예요. 니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신은 죽었다. 했잖아요. 니체는 뭘 모르는가 하면, 신이 죽었을 때 본인도 죽은 걸 모른 거예요. 신을 죽여 놓고 자기만 살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신이 죽을 때 인간도 같이 죽은 거예요. 다 죽은 겁니다. 하나님은 죽음 자체로부터 그게 처음 자리에요. 홍해가 시작이고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십자가가 처음자리이고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진행되는 겁니다. 십자가로부터.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흘러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3장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하는 그것을 저는 영어로 한 번 쓰겠습니다. 쉬운 영어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부담 주는 영어는 쓸 줄 모릅니다. now 거든요. 현재에요. 현재. 그런데 인간은 현재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현재라고 해도 쪼개고 분할이 가능해요. 짧은 기간도 쪼개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과거와 미래로 또 쪼개져요. 과거와 미래뿐이지 현재는 인간이 다룰 수가 없습니다. 현재를 어떻게 인간이 소지합니까? 그 사이에 끼어있는데.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있는데. 현재에 속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더 이상 과거와 미래가 날아가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now 현재에 속한 사람은 더 이상 과거와 미래에 어떤 행동도 우리한테 어떤 영향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영향력이 우리한테 행세하지 못해요. 다른 동네로 붙잡혀버렸어요. 붙잡혀서 다른 동네로 가버렸어요. 영원한 현재의 영향을 받아요. 그런데 과거와 미래의 영향을 받게 되면 계속해서 우리는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지난 낮 설교에 빈 페트병 찌그러진다고 했잖아요. 완전히 찌그러지듯이 찌그러지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가 살아갈 때에 보세요.

“아, 과거에 내가 이런 희망과 기대가 있었는데 왜 내 뜻대로 안되지?” 이게 뭘 시작하는 겁니까? 과거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과거부터 시작해가지고 그러니까 미래라는 것은 뭐냐, 미래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과거등장하면 동반해서 미래도 같이 등장해요. 앞으로는 잘할게. 앞으로는 잘할게 라는 말은 뭐냐 하면, 무엇을 전제로 깔은 거예요? 과거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안 드니까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 미래라는 시간을 내가 도입해서라도 내 자존심 회복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것은 뭐냐 과거의 미흡하다는 것, 판정은 누가 내립니까? 이게 과거에 속한 과거의 열매인 내가 과거를 판정하니까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이게 왜 반칙이 되는가 하면 전체 안에 내가 부분이 있으면서 부분이면서도 전체가 이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객기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죠. 전체를 말하려면 전체 바깥에 나가있어야지요. 자기가 전체를 보는 것은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범위 내에서만 포착된 그것을 가지고 마치 전체라고 우기는 게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의 인간의 현실관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은 구겨져야 돼요. 전부다 이건 구라입니다. 전부다 거짓말이에요. 이 선입감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now, 현재에 속한 분이 예수님이고 시간 속에 속한 자는 유대인이고, 둘이 만난 거예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는 반드시 나를 죽이게 되어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율법을 준 이유라는 거예요. 나를 죽이라고 미리 당겨서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만, 토끼 안에 디프테리아균을 배양해가지고 집어넣은 거예요. 토끼는 까불지요. 깡총 깡총. 그런데 토끼가 90년 살다가 야들아! 건물은 큰애가 하고 땅은 둘째가 하고 셋째는 내 빚이나 갚아라, 하고 이런 식으로 유언하고 죽을 때 그게 토끼입니다. 돌아가신 그 아버지가 토끼라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만 토끼인줄 알아요? 우리는 토끼새끼이고.

다윗이 말하기를 모친의 죄가 내 속에 배양돼있는 겁니다. 이것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죄 지으라고 줬기 때문에 내가 이거 따로 뽑아낼 수 없어요. 왜, 우리는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태어난 입장에서 나 말고 따로 분리가 되어버리면 나는 원래부터 나쁜 인간 아닌데 내 속에 요런 나쁜 게 들어있기 때문에 내가 나쁘다, 되어버리면 이게 온전한 죄가 아니고 죄도 있고, 의도 있고 이렇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라고 합니까? 죄가 있고,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십자가를 져버리니까 몽땅 죄야. 내가 나쁜 짓 안하면 착한 사람이고 의롭다 한 그것이 십자가 앞에 딱 서버리면 몽땅 죄가 되어버려요. 몽땅. 그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너희가 간파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왜 간파하지 못했을까요? 인간은 시간 속에 과거와 미래라는 역사 속에 잠겨있어서 역사를 못 벗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사를 못 벗어나요. 그러니 역사라 하는 것은 이것이 솔솔 잡아당기거든요. 역사를 잡아당기면 역사를 처음시작한 분과 역사를 마감하시는 그 분의 움직이는 선반위에서 역사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탄자를 끌어당기면 양탄자에 있는 무늬가 있잖아요. 양탄자의 무늬가 인간의 문화고 문명이에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라는 책에 나와요. 모든 문명과 문화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자연의 의지라 합니다. 문명이란 날씨와 기후로 끝. 인간이 몇 층을 짓고 어떤 공업화를 해도 아무리 문명을 발달시켜도 그것은 아열대성 열대성 저기압이라든지 그 다음에 이상기후 온난화 그리고 지진판 갈라지면 다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로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지진이나 가뭄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가지고 세상을 뒤엎어버리지요.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고 밑에 지편에 있는 것을 올리면서 인간 언어로 묘사한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그러니까 바깥의 위에만 소통하는 언어가지고 인간 바로 밑에 있는 주님이 천사가 심판의 경우들을 묘사를 하니까 이걸 풀어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풀어내는 방법은 뭐냐 하면 십자가와 함께 죽는 자만이 이것을 풀어낼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푸느냐 하면 예수님이 유대인을 만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자신의 뜻을 알려줄 때 반드시 나쁜 역할 하는 것 어떤 누가 짝이 있어야 하느냐 하면 유대인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인간들이 요한계시록을 마음껏 해석하게 하세요. 반드시 그게 필요해요. 맘껏 해석하게 해놓고 다했지! 했지! 그걸 뒤엎으면 돼요. 후라이팬에 해물전 할 때 한 번 튕겨가지고 엎으면 돼요. 엎어보면 그게 뭐가 묻었는가 하면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가 묻어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해석은 전부다 어린양의 피로서 해석하면 해석 다 온전한 해석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후의 요한계시록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는 어떤 정보만 알게 되면 이 7년 대 환란 천년 후 무슨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던 이 환란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살아남을까? 라는 해석만 요한계시록에 가짜 해석으로서 범람하게 되고 그게 온갖 아이디어가 다 들어가요. 베리 칩이고 밸리 댄스고 간에 다 들어간다니까요. 거기에.

바로 그런 해석 때문에 누가 돌아가셨다? 밑바닥에 그 십자가 그리스도가 죽은 거예요. 그 해석은 뭐냐 하면 “신이시여,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거기서 나온 해석이거든요. 우리는 살려고 이 땅에 만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만든 인간 같으면 살려는 생각은 쑥 들어가 버리고 “제가 언제 주님을 죽였습니까?” 이 이야기만 나오면 돼요. “아, 이래서 죽였군요.” 라는 것을 사도바울의 권면과 요한계시록의 말씀과 요한복음을 통해서 “아, 우리가 유대인과 한패이군요.” 이걸 알게 되면 해석 끝난 겁니다.

바로 우리 손에 의해서 주님이 살해당했고 그것만 인정하는 사람만 건지시는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공식이.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게 나온 거죠. 왜 그러느냐 하면 제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하는 것은 후라이팬 위에서 노는 게 아니고 주님이 십자가에 있던 그 밑에서 숨어있는 것에서 이게 바깥으로 바뀌면서 나온 고백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엎어져 자다가 휙 뒤집어져서 잔 게 돼요. 엎어져 잘 때는 온갖 것 가식적인 것들이 자기 덩어리에 장착돼 있지요. 헌금은 얼마 했고, 교회당 몇 개 세웠고, 설교 몇 번했고 다 있지요. 그런데 이걸 뒤집어버리면 바로 내가 행한 그것으로 인하여 그것이 나의 의라고 오해해서 예수님을 제가 모독했습니다. 하는 고백으로 뒤집어져 나오는 거예요.

방금 강의한 것을 한 가지로 이야기하면 뭡니까? 토끼다. 나는 토끼다. 그거면 돼요. 실험용 토끼는 그 안에 디프테리아균을 배양하는 하나님께서는 죄를 숙성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겁니다. 아브라함이 언약 받고 난 뒤에 바로 가나안 땅에 못 살았습니다. 4대를 기다려요. 400년을 대기하고 있어야 돼요. 왜 대기해야 됩니까? 가나안 땅 원주민들에게 죄가 숙성되어야 되기 때문에. 죄가 숙성되어야 돼요. 숙성된 타이밍에 맞춰서 이쪽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다가 히브리인들을 끄집어냈잖아요. 그러니 죄와 죄인의 만남에서 누가 더 났고 누가 더 못 났고 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이 구원받습니까? 신명기9장5절,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6절,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성경을 보고 있는 누구를 보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 자신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냐, 우리의 대표자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토끼거든요. 우리가 목이 곧은 백성이에요.

목이 곧은 백성이 헌금을 해봐야 목이 곧은 헌금 나오고, 기도해봐야 목이 곧은 기도 나와요. 백날 회개해봐야 목이 곧은 회개 나온다니까요. 구약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신약에서는 이것이 더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구약에서는 자꾸 뭘 주는가 하면 장래의 어떤 가능성을 비취는 것 같지만, 신약에 오면 시간 전체를 통째로 했기 때문에 내일 하는 게 없어요. 지금이에요. 지금. 지금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야. 구약에서 뭐라고 합니까? 지금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야. 앞으로 니가 똑바로 안하면 니들은 다 진멸해. 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신명기에 보면 어떻게 되어있는가 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했잖아. 너가 내 말 안 지키면 너가 이 땅에서 저주 받는다고 이야기했지? 과연 너희들은 진멸당할 것이야. 라고 이야기해버려요. 신명기 끝에 보면. 성경이 뭔가 여유를 좀 줘야 되는데 이미 결론을 내려버렸어요. 너가 아무리 애써도 너는 결국은 이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제가 하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명기 끝에 나와 있어요.

결국은 너희가 끝에 나왔을 때, 이렇게 이야기해라. 우리가 쫓겨남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그렇게 고백해라. 마치 이스라엘이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너의 운명을 너희 스스로 경영하지 못하는 것이 이미 확신해진 것처럼 그렇게 미리 예언을 해버려요. 그 예언을 누가 비틉니까? 아무도 비틀 사람 없습니다. 비틀지를 못해요.

우리는 길을 찾지 마세요. 길을 찾는다는 자체가 객기입니다. 괜히 길 찾아봐야 그 길 아니거든요. 그냥 사시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기대와 뜻대로 안되게 해주시는 사태가 일어날 거예요. 그게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길 찾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뭐냐 하면, 우리의 희망을 박탈하는 것이 주님의 개입이에요. 우리의 꿈과 희망을 다 박탈해버립니다. 왜 박탈하느냐 하면 십자가는 영원한 현재잖아요. 그러면 5년 후도 십자가고 10년 후도 십자가로 구원받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뭐냐 하면 끝에 가도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 십자가가 은혜라는 것을 미리 우리가 여기서 우리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2014년도에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우리는 또 생각해요. 십자가 은혜 알았으니까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까 바르게 살자, 이리 되어버려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 의미가 날아가 버려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결국 어떻게 살던 결국은 십자가 은혜밖에 없다면 2014년도에 일어났던 이런 사고방식을 여기서 삭제시키고 박탈하는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차피 마지막에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잖아요. 그런데 그 은혜를 미리 우리가 당겨서 받아버리면 그 십자가 은혜를 받아버린 나, 나 자신을 긍정해버리는 그런 오류가 돼요. 따라서 십자가라 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피와 살로 구원했다. 이게 십자가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계속해서 남아있는 게 뭡니까? 십자가 남기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여기서 계속 삭제당하는 일이 일어나요. 그럼 뭘 삭제하느냐, 삭제할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삭제할 것이 우리가 마지막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삭제당하는 게 뭐냐, 주 앞에 삭제 당할 것만 이제는 만들어내는 업무만 남아있는 거예요. 마음대로 사세요. 어차피 삭제 당할 건데. 고상하게 산다고요? 그것도 삭제 당해요. 막 산다고요? 그것도 제거당합니다.

제 논리가 좀 이상하게 보입니까? 저는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십자가 은혜를 이제 알았잖아요. 고 안 거 내일되면 삭제당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알았다는 것이 어디에 모아지느냐 하면 십자가 은혜를 알았으니까 십자가는 남겨두고 알게 된 나를 내가 귀하게 여겨버려요. ‘아, 십자가 은혜를 알았으니까 나는 너무 중요해.’ 그래 버리면 십자가를 누가 가리느냐 십자가 은혜 받은 내가 가려버려요. 은혜를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복 주시겠지. 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복이 뒤틀어지면서 “이건 뭡니까? 하나님! 이래가지고 동업하겠습니까? 왜 이러십니까? 주께서 힘을 팍팍 실어줘야 복음을 전하던지 하지. 이렇게 협조안하시면 제가 무슨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라고 나올 때 그게 진작부터 삭제 당해야 될 죄에 한목에 포함이 돼있었는데 그것은 과거에는 그런 일이 때가 아직 안돼서 안 생겼어요.

십자가 은혜 받고 난 뒤에 새로운 죄가 나왔기 때문에 삭제될 죄가 주께서 십자가를 가지고 또 만들어냈어요. 십자가가 자꾸만 뭘 만들어내는가 십자가가 제거될 죄를 만드는 그러한 현장을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계속해서 가게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말처럼 주께서 원치 않는 길로 계속가게 만들어요. 그렇게 되면 이 말은 뭐냐, 미래라 하는 것은 과거와 동반해서 같이 와요. 과거 등장하면 반드시 미래가 있게 돼있어요. 인간의 현재는 없어요. 요거는 과거고 요거는 미래고 그러면 현재는 그 사이에 있잖아요. 그 사이가 몇 센티 돼요? 그 사이해도 사이를 또 잘라버리면 사이는 그냥 사이일 뿐이지 아무 면적이 없어요. 폭이 없다니까요.

그냥 두 개의 대립되는 시간적인 만남의 선이지 거기에는 폭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의 만남이지 거기서 그걸 따로 핀셋으로 현재를 뽑아내는 순간 이미 그건 과거가 돼버리니까. 생각해보면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그래, 이게 현재야.” 하면 벌써 과거가 되어버렸는데. 현재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현재는 주님만 현재지 우리는 현재에 들어갈 수 없어요. 폭이 있어야 들어가지요. 우리 5분 동안 현재로 합시다. 말도 안 되는 순간이에요. 5분 동안 현재는 없어요. 주께서는 날마다 현재로 만들어내지요. 날마다. 과거에도 주와 함께 있으니, 그게 과거에 주와 함께 있다는 것도 현재고 5년 뒤에 주와 함께 있으면 5년 뒤의 우리의 미래가 아니고 주님과 함께 있는 그건 현재에요.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일 때는 과거를 생각하지 마세요.

“과거에 말이야.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과거는 말이야.” 이리 되어버리면 그건 현재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미래라고 그걸 브랜드 붙이는 셈이 되니까. “내가 그 땐 이 미래를 몰랐지.” 하지 말고 “이 현재를 몰랐지.” 그러세요. 내일되면 또 주님 주신 현재라는 핀셋에 같이 또 있습니다. 현재는 무엇을 삭제한다? 과거와 미래를 삭제한다. 왜 삭제하십니까? 과거 생각하지 마라. 과거 생각하지 않으면 뭐가 날아가요? 미래도 같이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뭡니까? 성도는 과거를 생각 안하니까 걱정도 없고 근심도 없고 불안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깜짝 깜짝 경기들 일도 없고, 남편이 집에 오면 누구세요?

“내가 과거에 미안해. 내가 술 먹고 때렸잖아.” “언제 때렸는데요? 저는 기억나지 않는데요.” “앞으로 잘할게.” “뭘 앞으로 잘해? 지금 현재만 생각합시다. 앞으로 나는 안 믿어요.” 미래 큰소리치는 인간 안 믿고 과거의 내 해꼬지 한 것을 잊어버렸으니까 나한테 뭐가 없습니까? 복수심이 없지요. 복수심이 없으면 몸둥이가 제로에요. 존재의 가벼움. 복수가 없으니까. “니 한 번 봐라. 내가 때려죽일 테다.” 이게 없으니까. 갑자기 뭔가 텅 빈 것 같아. 다이어트 중 이런 최고의 다이어트가 없어요. 속이 텅텅 비어있으니까. 바나나, 가슴살 안 먹어도 돼요. 복수가 없으니까. 성경에 보세요. 복수는 누구한테 맡기라 했습니까? 복수는 현재한테 맡겨야지. 왜냐, 복수는 현재로 하기 때문에. 나의 과거에 입각해서 복수하지 않거든요. 주님이 복수해요. 왜냐 하면 그 때 일어난 일이 주님이 알아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때 현재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복수도 그 때 현재에 가서 일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첫 째 강의한 것은 못 알아듣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도대체. “왜 잘했는데 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느냐. 앞으로 잘할 건데 말씀대로 잘 살 건데 협조하지.” 일체 없어요. “니는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야.”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가락-요한복음7장20절(현재의 기능성)150716a-이 근호 목사.hwp (31.0K), Dow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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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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