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강-에스겔 48장 30-35절(마지막 성)150819-이 근호목사
152강-에스겔 48장 30-35절(마지막 성)150819-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78.235.193)
152강-에스겔 48장 30-35절(마지막 성)1508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48장 30-35절입니다. 구약성경 1229페이지입니다.
에스겔 48:30-35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편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3년 전부터 수요예배시간에 에스겔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3년 2주 만에 에스겔의 마지막에 도달했습니다. 에스겔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동안 에스겔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하고자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제가 늘 설명을 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앞당겨 보여주는 모형 판이었다는 것을 언급을 했습니다. 그 모형 판에 동원된 자들이 바로 멸망당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진흙이나 찰흙으로 모형 판을 만들어도 되는데 진흙과 찰흙이 아니라 살아 꿈틀거리는 인간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형 화하는 작업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볼 때는 그냥 사람으로 봐요. 나와 비슷한 사람, 나는 나고 당신은 사람인데 나 아닌 사람, ‘너’가 되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아무리 인간들이 수천, 수만이 모여 봤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죽 보면서 남은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왔지만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서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나라의 신인 우상을 섬김으로 그들이 망했습니다. 그들이 망하면서 하나님의 성전도 같이 망해버렸는데 성전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마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불태워버렸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는, 택한 특정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여기서 취소가 되는가? 멈추는 것인가? 끝장난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비록 인간들은 실패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남아 있어요. 약속은 남아 있는데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다윗 같은 분을 다시 보내주겠다는 겁니다. 다윗이 오게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준 약속도 같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다윗과 그 자손인 왕들,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요람, 아하시야, 아달랴,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 죽 나오거든요. 18명의 왕들이 죽 나왔지만 그들이 다 실패했습니다. 왕들이 죽 나오면서 점점 더 나쁜 쪽으로 갔어요.
특히 웃시야 같은 왕, 나중에는 여호와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때에는 완전히 멸망하는데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았다, 끄지 않았다고 해 놓고는 마지막에 그 등불을 꺼버려요. 등불을 끄신 그 분이 바로 다윗으로 오셔서 “너희들이 이런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지 못해서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살 수 없었단다.”라고 다시 그들을 찾아와서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줘요. 이야기를 해주게 되면 자기 백성, 하나님의 영원히 구원받을 백성 같으면, ‘아하, 우리가 우상숭배를 한 것이 맞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고 이런 점에서 우리가 메시아가 아니고 우리 스스로 행함으로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구나. 다만 우리는 이미 범죄 한 입장에서 지켜보려고 애는 쓰지만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과 의로움은 다윗언약을 성취하실 분이 오셔서 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전체 역사는 모형이 되는 겁니다. 모형이 되고 그 모형이 있다는 말은 실체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이 에스겔 당시에 그들은 실체로 오시는 분을 고대하는데 그들의 잘못을 느끼면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것이 에스겔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에스겔이 이런 단순한 역사로 끝나버리면 안돼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윗의 완성자로 에스겔 37장의 말씀처럼 하나님 자신이 다윗이 되어서 오시거든요. 오시게 되면 예수님 하는 모든 일은 다윗언약대로 다 이루시는 겁니다.
다윗언약대로 이루신다는 말은 자신이 제사장이 되시고 자신이 제물이 되셔서 자신이 희생함으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십니다. 그 다음에 그것은 다윗언약, 다윗약속에 의해서 본인이 그렇게 일을 했기 때문에 그 혜택은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사람에게만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윗언약의 혜택이 돌아가는 그 사람들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백성이라 하는데요. 왜 그들을 백성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들은 그들의 인생과 운명과 미래를 총 책임질 왕을 기다리기에 그렇습니다.
그 왕을 기름 부은 자라고 이야기하고 헬라말로 하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하면서 부활하기 전부터 그런 언질을 줬고 부활하고 난 뒤에는 “내가 바로 그 다윗이다. 내가 왕이다. 나는 내 백성 건지러 왔다. 누가 내 백성이냐? 나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예수는 단순히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촌구석의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의 왕, 약속의 실체 되시는 분이 오셨습니다.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전제하는 것이 있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를 전제하고 전적으로 왕에게 남은 세월과 팔자와 인생, 자신의 운명과 미래가 전부 다 왕에게 이미 일임이 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를 들면 청와대나 국정원, 혹은 법원의 고위관료나 삼송그룹같은 대기업의 임원이 자기 외삼촌이라고 합시다. “그 외삼촌이 내 인생을 책임질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책임질 겁니까?”
정말 이 질문은 애들도 유치하다 할 만큼 유치한 질문이지요. 외삼촌이 한 7천억쯤 가지고 있는 재벌이라면 그 사람이 내 인생을 책임질 건가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책임질 겁니까? 무슨 일이 잘못돼서 경찰서에 가게 되었는데, 경찰서의 과장쯤 되는 분이 외삼촌인데 외삼촌을 믿을 거예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유치장에서 기도를 할 겁니까? 유치장에 가서 기도를 이렇게 하면 되지요. “예수님이여, 제 외삼촌이 경찰서 과장인데 ‘빽’ 써서 여기서 빼내주도록 과장님 마음에 역사해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둘 다를 포함시킬 수가 있지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은 뭐냐? 일임했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경찰서 유치장에 간 것도 주께서 발로 차 넣은 거예요. 주께 차였는데 거기서 빼내달라고 하는 이것은 하늘에 계신 분과 서로 상충되잖아요. “내가 집어넣었다. 그런데 나보고 빼달라고 하면 내가 집어넣은 취지가 무색하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 집어넣었는데 빼주기는 세상 외삼촌이 빼준다? 그건 이상하거든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백성들의 특징은 뭐냐? “하늘에 계신 외삼촌을 믿고 그냥 죽자.” 이게 요한계시록성도의 특징입니다.
그게 일임입니다. 모든 것을 맡긴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팔자, 내 팔자를 다로 고쳐보겠다는 식으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을 따로 만들어내지 않았어요. 시험 치는 것도 주께서 시험 치게 하셨고요. 모든 환경이 주께서 그렇게 밀어 넣은 거예요. 에스겔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셨다고 할 때에 신약의 사도들이 에스겔을 어떻게 해석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왜냐하면, 그 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의 에스겔과 성령을 받지 못하고 “그런 것은 필요 없다. 내가 알아서 에스겔을 보고 하나님 발견해서 그 하나님 믿고 내가 구원받을래.”라고 하는 사람의 차이가 뭐냐? 그 차이가 있어요.
그 차이가 뭐냐 하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에스겔전체 내용은 인간이 아무리 믿고자 해도 믿을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에스겔뿐만 아니고 성경전체가 그래요. 이 성경전체는 우리보고 믿지 말라고 주신 책이에요. 왜냐하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만 있어요. 믿을 수 없는 내용만 있는데 몇 구절 중요한데 따로 뽑아내서 “내가 믿습니다.” 한다는 이것은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믿을 수 없도록 준책을 가지고 왜 본인이 그걸 믿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것은 말이 안 되지요.
정답은 “에스겔을 보면 에스겔 내용은 이런데 못 믿겠네.” 그게 정답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30절에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성읍의 출입구가 있다는 거예요. 이걸 생각해도 우리에게 에스겔은 믿을 수 없는 책입니다. 왜냐하면, 성읍에 출입구가 있으면 안 되지요. 다 넣어줘야지요, 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다 넣어줘야지요. 출입구가 있다는 것은 심사하겠다는 뜻이거든요. 촌에 가면 원래 울타리가 없잖아요. 도시는 울타리가 있지만 옛날 촌에는 그게 없어요. 도둑이 와서 마당에 고추 널어놓은 것을 걷어가도 할 수 없어요. 담 자체가 없어요.
하나님이 계신 세계에 담이 없다면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 끝에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이 거기 계시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거기 계시다고 해놓고 거기에 출입문이 있다는 말은 경계, 장벽이 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께서 넣어줄 사람과 넣어주지 않을 사람을 구분 짓겠다는 그 말입니다. 성경이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단정 짓는 이유는요, 출입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방인 가운데는 한 명도 없어요.
여기 나오는 문들의 이름을 보면, 북쪽문은 르우벤, 유다, 레위, 이 세지파가 들어가고 그 다음에 동쪽은 요셉, 베냐민, 단 지파고 그 다음에 남쪽은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이고, 서쪽은 갓, 아셀, 납달리거든요. 안동 권씨,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경주 이씨, 그런 것도 없어요. 현재 이스라엘 자체가 역사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역사니까 이 지파는 이스라엘지파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지파만이 여기 하나님 계신 곳에 가요.
그러면 이스라엘 지파가 아닌 사람들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주께서 출입문을 만들어서 아무나 들락날락 하는 곳이 아니고 들어갈 사람만 들어가도록 심사하고 지키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 책은 결국 이방인들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이방인들은 이 책 봐도 구원 못 받아요. 구원 못 받으니까 이방인들이 하는 소리가 뭐냐? “나는 이 책 안 믿는다.” 자기 구원 안 받으면 무조건 안 믿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니까 들어갈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스라엘도 안 믿어요.
왜 안 믿는가? 열 두 지파가 들어간다면 에스겔 다음의 책들은 필요가 없어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전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 어차피 주님께서 다윗으로 오셔서 성전 지어서 자기가 넣어주는 사람은 들어가면 되지 메시아가 왜 필요합니까? 십자가가 왜 필요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에스겔을 근거해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다윗같이 오실 분을 기다렸어요. 그리고 나중에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가 온다고 하니 엘리야도 기다렸습니다.
제 말을 잘 이해 못하시는 것 같은데 다시 하겠습니다. 에스겔은 역사 이스라엘이잖아요. 그 내용이 역사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이 망했고 지금 장차 이런 성전을 만든다는 역사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역사를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역사를 믿지요. 그런데 그 역사를 믿기 때문에 오실 메시아를 못 알아보잖아요. 그러니 신약의 사도된 입장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아무도 못 믿는 거예요. 사도들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못 믿는 거예요.
이 성경책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장에서 다시 볼 때만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위한 에스겔이라는 것을 그 때 받아들이는데 그걸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스겔을 믿는 믿음은 없어요. 십자가를 믿는 믿음뿐이에요. 에스겔을 믿으려면 십자가를 믿어서 십자가의 의미로 에스겔을 다시 찾아가야 돼요. 에스겔 열심히 믿고 에스겔에 십자가를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왜냐? 에스겔 자체는 역사니까, 우리는 역사적 존재니까.
인간은 역사적 존재에요. 역사에 실제로 있는 것만 믿어요. 역사가 없는 것은 안 믿어요. 그리고 역사를 믿기에 오실 메시아를 믿는 것도 역사적 예수를 믿습니다. 역사상에 오실 메시아를 믿었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에요. 메시아를 믿은 거예요, 메시아. 어떤 메시아? 우리가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이 인식에 일치되고 부합되는 사람을 유대인들은 기다렸던 겁니다. 다니엘에 보면 메시아가 올 때의 흔적의 힌트를 줬어요. 그게 뭐냐? 구름타고 온다는 거예요. 인자는 구름 타고 이 땅에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인자가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구름타고 손오공이 옵니까? 그래서 재판할 때 물었어요. 그래도 혹시 예수가 메시아가 아닌가 싶어서 물었어요. “당신이 오실 인자, 다니엘이 말한 그 인자가 맞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 이렇게 하니까 오려면 처음부터 구름타고 오지 장차 죽고 나서 구름 타고 오는 그것은 사기라고 보고 죽여 버렸잖아요. “더 이상 이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 병고치고 기적 일으킨다는 소문 듣고 뭔가 그런가, 했었지만 역시 말 빨이고 허풍이네. 믿지 말자. 요새 이단이 한 둘이 아닌데 그 이단중의 하나가 예수다.” 그래서 살해한 겁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타난 사울이라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라 하는 것은 이단이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리는데 자기가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죽고 난 뒤에 부활하셔서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의 사울을 만났지요. 그리고 열 두 제자에게 죽고 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 내 손에 난 못 자국을 만져보라.”고 했지요.
그러면 처음부터 자기백성에게 다 이야기를 하지, 처음부터 바리새인, 사두개인, 각자에게 찾아가서 명함 돌리면서 “안녕하십니까? 제가 메시아입니다. 제가 이렇게 죽고 난 뒤에 부활했습니다.” 이렇게 하지, 처음부터 부활해서 찾아오시지 왜 그렇게 하는가? 역사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고 할 때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이라 하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잃어버린 양은 주님의 머리와 마음속에만 있고 아무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나다나엘도 몰랐어요. 나다니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혼자 기도하러 갔을 그 때 예수님이 보물찾기 하듯이 “여기 한 명 있네.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을 때부터 내가 알았다.” “누구십니까?” “너는 참 이스라엘이라 간사한 것이 없구나.” 주께서는 이스라엘 하나를 찾아내는 식으로 찾아냄을 당할 때 그 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베드로야, 네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던지니까 고기 많이 잡혔거든요. “주여, 저에게서 떠나소서.” “아니야.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
이처럼 방법은 다 각자 달라요. 방법은 다르지만 그 이스라엘을 뽑아내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문 이름이 열두 지파인데 그게 역사적 열두 지파는 아니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이 다윗이거든요, 다윗이 오셨는데 왕이거든요. 왕은 갑 질을 해요. 왕은 자기 백성을 뽑아낼 수 있는 권한이 아버지로부터 부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열두 지파를 뽑아내는 거예요. “그러면 뽑아낼 때 어떤 원칙을 적용시킵니까?”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핵심에 이르기까지 좀 오래 걸렸는데 이게 오늘 본문의 핵심이거든요.
뽑아낼 때의 그 원칙이 뭐냐? 그 원칙이 문 이름에 나와 있어요. 제일 북쪽에 보면 르우벤과 유다와 레위, 이것은 누구 소생의 아들들인가? 야곱에게 두 아내가 있어요. 하나는 레아, 다른 하나는 라헬이지요. 사실은 라헬을 앞장세워야 됩니다. 야곱이 처음 사랑했던 진정한 본처는 라헬입니다. 그리고 마트에서 1+1로 세일하듯이 갖다 붙여준 여자가 레아입니다. 그래서 라헬이 주가 되고 레아는 보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을 열둘을 낳았습니다. 이 열둘을 낳는 그 과정을 하나님이 역사적으로 일으켰어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원칙에 의해서 왕은 자기 백성을 뽑아냅니까?” 물으신다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행위들이 있어요. 그 행위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욕심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망, 욕심에서 나와요. 야고보서 1장 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세상 전체가 죽음의 세계거든요. 죽음의 세계라 하는 것은 죄가 왕 노릇 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 죄는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잉태된 겁니다.
따라서 “저기 인간이 있네.” 라고 할 것이 아니고 “저기 죄를 유발하는 기계가 있네. 죄 생산기계가 저기 또 있네.”라고 해야 되지요. “우리교인 몇 명 되었습니까?” 그렇게 묻지 마시고 “죄 생산 기계가 몇 대 들어왔습니까?” 이렇게 보시면 돼요. 교인 수는 대외비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니까요. 두 명인지, 몇 명인지, 하나도 없는지 저도 몰라요. 주께서 아시겠지요. 자칫하면 숫자 세고 있다고 전염병 돌아서 있는 숫자도 다 사흘 만에 죽는 수가 있어요. 죽어도 할 수 없지만.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두 아내의 욕심의 산물입니다. 여자는 둘이고 남자는 하나거든요. 그 하나의 남자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아내기 위해서 온갖 교태와 애교를 부리면서 그저 그 남자의 자식을 낳음으로써 정실부인이 되겠다는 쟁탈전은 결혼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혼하면서 시동이 걸렸어요.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게임이었어요. 결국은 라헬이 죽었지요. 언니가 더 오래살고. 자식의 숫자도 누가 더 많은가? 언니는 8명이고 동생은 4명입니다. 8 대 4, 약분하면 2 대 1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여자들은 “내가 너보다 자식을 네 명이나 곱으로 많으니까 나는 남편 사랑을 곱 배기로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어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백성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신부라고 하는데 성경의 원칙이 뭐냐? 신부에서 신랑을 찾아내지를 못해요. 반드시 신랑에 의해서 신부가 규정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이 뭐냐?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차지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탐욕이고, 그게 죄고, 그게 사망을 낳는 거예요.
여기 출입구가 있고 여기 어떤 장벽이 있어서 안과 밖을 구분했다는 말은 ‘여호와 삼마’라는 이 성이 포위되었다는 말이에요. 성은 각 방향이 2.4킬로 정사각형인데 그 성이 포위되어 있는 거예요. 어디에 포위되어 있는가? 이 어두운 세상, 죄악 된 세상에 포위된 겁니다. 그 포위된 한 가운데 거룩한 하나님의 성, 여호와 삼마, ‘여호와 여기 계시다.’는 천국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면 그 어두운 세상, 그 죄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해서 죄 많은 세상의 죄인이 깨끗하고 거룩한 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이 성에 같이 참여되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은 죄를 의로 바꾸어주는 장치가 이 문, 열 두 개의 문, 각 방향별로 세 개씩 열두 개의 문에 탑재되어 있어요. 바깥에는 죄고 안은 의로운데 그 절대적인 죄를 절대적인 의로 바꾸는 장치가 열 두문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 열두 문의 이름마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이 있어요. 그렇다면 야곱의 언약이라는 것은, 야곱의 가족이라는 것은 뭐냐? 욕심과 탐욕과 질투와 그리고 죄의 범벅이가 된 야곱 가정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진척이 되면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로 바꾸어지는 그 장치가 그 열두 지파의 내부 작용에 의해서 그 죄 속에서, 죽음 속에서 희생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담당자가 누군가 하면, 라헬, 본처가 담당을 하고 있습니다. 본처가 마지막 낳은 자식의 이름이 베냐민이에요. 라헬이 죽어가면서 낳은 애를 두고 “아이고, 불쌍한 것. 내가 죽고 나면 무슨 수로 언니와 싸워? 이제 난 너 낳다가 죽는데. 나는 패배자인가? 그래서 나는 슬프다.” 그래서 더 이상 언니에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자식을 언니보다 더 많이 가지는 그런 기회가 상실되었다는 뜻으로 그 때 낳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안의 슬픔이 자식이라는 모양새로 나온 것이 ‘베노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걸 반대로 해석했어요. 그 슬픔의 아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 내 사랑하는 라헬 너의 죽음을 거름으로 해서, 죽음을 재료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결실물,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열매를 맺듯이 그 죽음이 있는 자리, 사랑의 이름으로 죽은 그 죽음 속에서 사랑의 결실이 나오면 그것이 바로 죄를 의로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마지막 메시아가 그런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라헬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열 두 문의 배치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동쪽과 서쪽에는 라헬계열의 자식들을 배치를 해요. 6대 6같으면 동서 6명은 라헬 쪽, 남북 6명은 레아 쪽, 이렇게 되겠는데 8명이고 4명이다 보니 메시아가 오는 동쪽에는 전부 다 사랑하는 본처인 라헬계열이 포진하는 식으로 배치하고 있습니다. 요셉, 베냐민, 단, 이렇게 돼요. 라헬이 잉태치 못할 때 빌하라는 여종을 자기 이름으로 대신 야곱에게 줘서 아기를 낳게 했어요. 종은 여주인에게 소속되어 있으니까, 종이 자기 이름으로 남편에게 자식을 낳았으니까 종에서 낳은 아들이라도 종의 소유가 아니라 자기 소유가 되지요. 빌하의 소생 중 단과 서쪽에 보면 배치되어 있는 납달리가 역시 빌하가 낳은 자식입니다.
북쪽 문에 레아 본인 자식으로 르우벤, 유다, 레위가 있고요, 시므온은 남쪽 문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남쪽 문에 잇사갈, 스블론. 레아가 라헬에게 시기 나고 욕심나서 안 지려고 실바라는 자기 여종을 야곱에서 줘서 낳은 아들이 아셀과 갓입니다. 이 둘은 서쪽 문에 배치되었습니다. 대체로 보면 메시아가 오는 쪽을 라헬의 소생인 요셉이 마중 나가는 식이고 그 뒤를 레아계열이 뒤 따라가는 식입니다. 문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포진을 했을 때에 여호와삼마, 여호와가 여기 계신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면 그 문들은 누굴 표현하느냐 하면,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 예수님의 기능, 십자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열 두 개의 출입구에 새겨져 있는 겁니다. 안에는 십자가 있고 그 십자가의 표현이 열 두 문에 그려져 있다면 저 바깥에 있는 메시아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 바깥에서 성에 들어오면서 여기 십자가의 효과를 받아서 그들의 어떤 죄도 이 안에서는 의인으로 바꾸어져서 여호와삼마, 하나님과 영원히 사는 천국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면서 뭐로 오는가 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신부로서 오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야곱의 두 아내가 있어요. 사실 야곱이 관계했던 여자는 네 명이거든요. 이 네 명에서 나온 열 두 명이 있지만 야곱은 숫자로 1이고 라헬, 레아는 숫자로 2가 되고 빌하와 실바까지 하면 숫자로 4가 되지요. 다양성, 다수에서 하나로 모아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호와 삼마’라는 말은 뭐냐?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이 세상에 천국은 오직 한 곳밖에 없다는 거예요. “여기여기 모여라!” 그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 외에는 다른 천국은 없어요.
자, 에스겔 전체를 봅시다. 3년 만에 끝나는데. 에스겔 전체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만 신인가? 다른 신도 신이다.’ 그랬잖아요. 인간은 자기한테 유리한대로 자기 신을 선택해요. 이것은 신부가 자기 마음에 드는 신랑을 찾아가는 식이 되는 겁니다. 바알이라는 것이 ‘내 신랑, 내 남편’이라는 뜻입니다. 호세아에 나와요(호 2:16). 그런데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남편이 여기 있는데 왜 엉뚱한 남편을 찾느냐? 이 음녀야! 간음한 여인아!”(사 57:3)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에서 음녀, 간음한 여인이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여호와삼마, 그 도성, 그 천국 말고 다수를 생각하는 그것, 그것은 다 간음이고, 음녀고,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인간이 신을 선택하지요? 그것은 욕심에서 나온 거예요. 각자의 신을 서로 존중해주고 옹호해주면 전부 다 이단들입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신은 진짜 신인가? 그것도 이단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고 본인, 신부가 선택한 신랑은 전부 다 이단이며 그들이 어떤 결과를 내도 그것은 우상숭배며 그것은 욕심에서 나온 거예요. 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이 왔기 때문에.
골로새서 3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순종치 아니하는 자식들에게 임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탐심은 곧 우상숭배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라고 하는 그것이 우상숭배고 탐심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게 만드시고 따로 예수님께서 유일한 메시아로 올 때에 아무도 예수를 못 알아봐요. 이래서 모든 각자의 개성과 다양성은 완전히 하나님에게는 무가치한 것으로 다 처리해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 천국 갑니까? 천국 갈 자격 있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신구약 아무도 못 믿습니다. 믿지 말라고 준 책이에요. 믿으면 우상숭배가 돼요. 믿으면 거짓입니다. 예수, 십자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거짓이에요. 예수님이 찾아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영으로 찾아가게 되면 비로소 오직 한 군데 예수 안, 나사렛 예수 안, 나사렛 동네의 그 목수의 아들이라는 예수 안에서만 천국이 있고, 의인이 되고, 거룩이 되는 겁니다. 그분이 몸을 버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은 거예요.
따라서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신랑 되시는 분이 먼저 신부라고 결정을 해놓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을 받아 보니까 오직 신랑이 나의 운명과 모든 팔자를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지요. 그러면 우리가 “나 예수 믿는데 너 예수 믿느냐?” 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교회 되는 것이 아니고 “나 안 믿었어. 너도 안 믿었지? 그런데 주께서 믿게 하셨다.”는 그 그룹, 그런 모임이 생겨나는데 그들이 바로 신랑이 하나밖에 없는 한 신랑의 신부들이에요. 신부들.
신랑이 신부를 결정해서 된 그 신부들. 그들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1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그 그룹을 하나로 봐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그룹을 하나로 보고 자기는 하나로 쳐주지를 않아요. “내가 믿습니다.”가 아니라 “주께서 믿게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저를 사랑하시잖아요.” 한 베드로의 고백처럼.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기부터 출발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주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내가 이렇게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잖아요.”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입에서는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잖아요. 천국 가는 것도 주의 솜씨고 주님의 기술이었고 주님의 재주였고 주님의 예정된 선택이었잖아요. 그걸 저한테 물으면 안 되지요. 제가 언제 주님을 선택했습니까? 제가 주님을 믿겠다고 언제 나섰습니까? 나서봤자 탐심이고 욕심인데. 나 잘되기 위해서, 내 가족 잘되기 위해서 믿은 것인데 제발 그런 것은 짓밟아 주시고 주님만 쳐다보는 믿음만 남게 해 주옵소서. 내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서울 대전 부산 찍고 목포 가서 살든, 어디 가서 살든, 오늘 살고 내일 죽든지 간에, 살든지 죽든지 저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장래를 염려할 권리마저 우리 신랑 때문에 박탈당했습니다.”
신랑은 늘 이야기합니다. “내가 신랑이라니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우리보고 매일 이야기해요. “내가 신랑이야. 신랑이 신부 하나 보호 못하겠어?” 주일학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남자의 임무는 딱 하나다. 보호다. 여자를 보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사랑한다.’ 그 따위 소리 하지 말고 보호만 하면 된다.” 보호해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너 보호해줄게. 네가 너 보호할 생각하지 마.” 지금 그 신랑과 살고 있다면 그것이 ‘여호와삼마’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믿는 믿음이 다 욕심에서 나온 믿음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늘 그 믿음을 삭제하시고 취소시켜 주시옵소서. 주님으로 인하여 믿게 되었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성도되게, 백성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152강-에스겔 48장 30-35절(마지막 성)150819-이 근호목사.hwp (64.0K), Down: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