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구원 150816
여자로 구원 150816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이근호
15-08-16 13:31
구원의 방식
2015년 8월 1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9:19-23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9: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은 사람하고 상대하며 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마귀와 복음으로 싸웁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하지만 그 마귀하고의 싸움은 구체적입니다. 허황된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두 종류를 구분합니다. 하나는 유대인 부류요 다른 하나는 유대인 외의 부류입니다. 유대인부류에게는 율법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율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외의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기에 율법이 없는 식으로 나가되 그들에게는 사도 바울 자신을 율법자로 행세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율법없는 자들은 율법을 경유해야만 십자가와 통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없닌 이방인들에게 율법적 기능 안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그들의 근원에 대해서 율법과의 만남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죽습니다. 이 죽음에 대해서 사도는 ‘죄의 삯’이라고 규명하는데(롬 6:23) 이 규명은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그 내막이 밝혀집니다.
예를 들면, 디모데후서 3:1-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1)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2)돈을 사랑하며 (3)자긍하며 (4)교만하며 (5)훼방하며 (6)부모를 거역하며 (7)감사치 아니하며 (8)거룩하지 아니하며 (9)무정하며 (10)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11)참소하며 (12)절제하지 못하며 (13)사나우며 (14)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15) 배반하여 팔며 (16) 조급하며 (17)자고하며 (18)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19)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대목에서 ‘네가 돌아서라’고 되어 있는데 만약에 본인 자체가 이 19까지 계명에서 하나로 어기면 본인인 본인에게 돌아서야 할까요? 과연 본인이 본인에게 돌아서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치 않습니다. 바로 이점은 먼저 계명과 율법을 받았던 이스라엘 사람에게서 충분한 근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주니, 그 계명과 율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즉 자기가 생각하는 그 자아를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 율법 너머 있는 세계, 즉 ‘율법 없는 자’의 세계에서 구원의 능력이 주어지는 방식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사람들의 자아구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다고 우기는 그런 주인공으로 본인이 생각합니다. 즉 인간은 끝까지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에게만 의미가 주어지는 것으로 모든 현실을 생각할 줄 아는 자입니다. 곧 ‘자기가 생각하는 자아’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구원은 거짓이요 악마짓으로 판명이 나버립니다. 성경 전체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 추방’과 그리고 신약의 ‘십자가 사건’ 이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펼쳐집니다. 그런데 두 사건 모두 인간의 의견이 전혀 개입되지 않고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가 감행된 일입니다.
‘에덴동산 추방’에는 추방받는 자와 추방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추방당하는 자는 일방적으로 쫓겨나가게 됩니다.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일방적 아이디어의 적용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란 존재란, 이런 하나님의 일방적 작업을 보여주기 위한 인형에 불과합니다.
이는 곧 인형이 스스로 자기에게 가하는 행위는 일체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지 않고 악마의 일로 분류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주신 율법과 말씀으로 자신을 늘 새롭게 갱신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의 행함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여긴 그 결과들로 인하여 새 사람, 새 나라 되었습니까? 대실패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가 진짜 자아라고 우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들을 도용하고 갖다 붙입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입니다. 죽음은 죄의 값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들이 ‘나’라고 여긴 그 ‘나’말고 다른 ‘나’를 구원하십니다. 곧 예수님에게 속한 ‘나’말입니다.
‘내게 속한 나’에서 ‘예수님에게 속한 나’로 내가 나를 옮겨가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는 인간들이 행하기에 ‘불가능한 죽음’을 근거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즉 죽음에서 인간이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이 있습니다. 가능한 죽음은 흔히 아는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인간이 행사 가능한 죽음을 고통의 해소방안으로 사용합니다. 곧 자살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살하므로서 스스로에게 가해서는 양심의 가책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살은 어디까지나 ‘사라져가는 의식’일 뿐입니다.
이는 곧 ‘사라짐 자체에 대한 의식’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즉 “내가 사라지면 나의 고통도 사라지겠지”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연 그 ‘사라짐’이 무엇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일인지를 모릅니다. 그 근거는 바로 ‘불가능한 죽음’에서 비롯된 겁니다. 불가능한 죽음은 그 인간에 행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경험한 바로 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인간들이 아무리 반복해서 죽어도 도달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이 죽음과 일반인의 죽음의 차이는 바로 ‘부활’로 증명됩니다. 이 부활의 영을 사도 바울은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의 행함으로 도달될 수 없는 세계 안에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죽음’의 능력이 ‘가능한 죽음’에 쫓기다시피 사는 우리네 인생에 관여하면 우리는 한 눈 팔다 칼에 베이는 것처럼 돌발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선악에 관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선악을 안다는 것은 자체적인 선으로 자신을 의롭게 하고 죽음조차 벗어나 천국에 이르고자 하는 시도를 보이게 되는데, 성경 말씀은 단호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가진 자는 죽음에 이르는 자”라고 말입니다.
즉 성도는 말씀만이 현실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늘 자기 위주의 환상을 죄형식으로 만들면서 사는 그 죄에서 이미 구원받았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부활의 세계로부터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런 자들만이 지금도 마귀와 싸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자아가 환상에 불과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인순
15-08-25 20:18
여자로 구원 / 150816
설교: 이근호 (주일학교)
녹취: 정인순
오늘의 하나님 말씀은, 여기 여자 나오죠? 드보라, 드보라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여잔데 지도자예요. 박근혜 대통령 같아. 여잔데 대통령 된 것과 같아요. 여자가 원래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항상 누가 대장이 되느냐 하면 남자가 되어야지 여자가 되면 절대로 안 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야빈이라는 적들이 쳐들어오니까 남자 총사령관이 겁이 많아 가지고 바락이라는 사람인데 자기 힘으로 못 이길 것 같으니까 하나님의 사사 하나님 믿는 드보라를 찾아와서 “내 대신 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시되 승리한 것은 내가 한 걸로 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한 거예요. 남자가 비겁하게 연약한 여자한테 찾아와서 “드보라 아줌마, 아줌마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해놓고 나중에 승리했거든 내가 했다고 하면 안 되겠어요? 내가 했다고 쳐주세요.”라고 이렇게 바락이라는 사람은 이렇게 남자가 비겁하게 했어요. 남잔데 좀 비겁하지요.
원래 남자하고 여자하고 하나님이 따로 만든 이유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하게 되어있어요. 보호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 태민이?보호 알아요? 만날 보호만 받다가 보호 알아야지요. 남자는 보호를 하는 거예요. 남자 밑에 여자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이래야 돼요. “걱정 하지 마! 내가 있잖아, 내가 지켜줄게. 적들아, 오너라. 내가 지켜줄게.” 이래야 남자예요. 그리고 여자보고 “걱정 하지 마. 내가 너를 지켜줄게. 심지어 내가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을게.” 이게 남자예요. 알아들었어요? 나중에 장가갈 때 잘 알아들어야 해요. 그게 남자라고. 일찍 주례하는 건 아니지만. 그게 남자예요. 사랑한단 말 할 필요 없어요. 보호하는 게 사랑이에요. 그냥 지켜주는 게. 다른 분들 맞지요?
그런데 바보같이 남자가 “아! 무서워.” 적들이 너무 숫자가 많으니까 힘이 세니까 그만 자기가 보호해야할 여자를 “아줌마, 나오세요. 믿음 좋잖아요. 나오세요.” “아니, 아저씨! 왜 이러세요? 하나님께서 당신 보고 적들을 처단하라는데.” “적이 많아요. 나는 무서워요. 아줌마가 좀 해주세요.” 이렇게 해서 드보라 선지자를 딱 세우고 자기는 숨어서 벌 벌 벌 떨고 있었던 거예요. 가끔은 그런 남자가 있어요. 그런데 옛날에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드보라 아줌마가 이렇게 얘기 했어요. “바락, 총사령관이니까, 바락 장군님, 제 말 잘 들으세요. 당신이 이렇게 당신 역할 포기했기 때문에, 이번에 분명히 전쟁은 승리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조금도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승리는 남자들의 승리가 아니고 오직 여자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을 했어요. 그러니까 바락이 하는 말이 “그래, 당신이 승리하면 되잖아.” “아, 나 아니야. 나 말고 다른 여자, 당신이 남자로서 책임을 포기했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여자 할 거예요.”
“당신이 왜 남자로서 포기 했느냐 하면, 저 적들을 보세요.” 적들을 보라고 하니까 적들이 “바락, 나와. 한판 붙자.” 이렇게 하니까 “적들이 힘세지요?” “그러니까 내가 피했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적들이 세도 우리나라의 여자보다 더 약한 존재입니다. 그게 당신 눈에 보여야 되는데 당신 눈에 안 보였어요. 우리는 하나님 믿고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누가 세냐, 우리가 세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여자가 아니라 강아지, 개가 나가도 이기게 되어 있는데 당신은 그런 믿음이 없이 숫자가 많다고 나한테 미루고 자기는 빠지고 이게 무슨 지도자급 남자입니까? 따라서 이번 전쟁은 당신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어떤 여자가 할 거예요.” 하고 드디어 약속을 했습니다.
하고 난 뒤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옛날 전쟁은 대장 왕초만 죽이면 돼요. 이상하게 전쟁을 하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셔 가지고 이스라엘은 이기고 적들은 도망치게 했어요. 그중에서 대장이 있는 한 전쟁은 안 끝났거든요. 그래 그 대장이 시스라 대장이 그중에 야엘이라는 여자의 집으로 들어갔어요. 평소에 그 여자와 잘 아는 사이 같아요. 아는 사이에 가 가지고 “헉헉, 아줌마, 내가 적한테 쫓기고 있으니까 나한테 물 한 컵 주세요.” 그래서 야엘이 “아저씨, 아는 아저씨네. 전쟁 중이었어요?” “네, 전쟁 중에 쫓기고 있습니다. 물 한 컵 주세요.” “예, 물 드릴게요.”
물 먹고 난 뒤에 “아줌마, 나 잠 와서 그런데 잠 한숨 푹 자고 갈게요.” 해놓고 아줌마 집에서 푹 잤거든요. 자고 있으니까 이 야엘이라는 여자는 알아요. 이스라엘 우리나라와 싸우는 나쁜 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알아서 야엘이라는 아줌마가, 아줌마는 원래 힘이세요. 기둥 같은 절구 통 같은 것을 번쩍 들었어요. 낑낑. 장미란 역도선수 그 정도 되는 힘이 있는 모양이라. 남자가 이불을 덮고 자고 있으니까 뾰족한 끝을 가지고 여자가 찍어 버렸어요. 전쟁하는 것도 아주 겁나게 전쟁 해. 자고 있는 것을 깨워서 ‘한 판 붙자’ 이게 아니고 그냥 자고 있는데 적들은 아무 대책이 없고 자고 있는데 사정없이 뾰족한 장대를 뽑아가지고 찍었어요. 찍으니까 시스라가 살이 좀 쪘지만 뱃살을 뚫고 방바닥에 그냥 꽂혀가지고 바비큐 하듯이 그 중에 걸쳐 가지고 꼼짝 못하고 그냥 죽었거든요.
그때 누가 들어왔느냐 하면 뒤늦게 바락이 들어와 가지고, “헥헥, 야일, 시스라가 여기 안 왔느냐?” 아는 체 하면서. “제가 잡았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세요.” 이건 열대자로 누워있고 가슴에는 말뚝이 꽂혀있고 죽어 있거든요.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왔던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야엘이 적을 이겼다. 전쟁 끝. 전쟁 마감. 전쟁 끝났습니다. 연약한 여인이 굴러온 적을 잠재워 놓고 그냥 말뚝 박아 가지고 전쟁 끝냈습니다. 역시 여자는 위대해요.” 하고 그때부터 야엘을 높이기 시작했어요.
그걸 드보라가 듣고 바락도 듣고 “역시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연약한 여자를 통해서도 구원하는 걸 보니까 남자로서 참 부끄럽구나” 바락은 굉장히 부끄러워했겠지요. 연약한 여인도 승리하는데 적들은 아무 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적을 가지고 괜히 숫자 보고 쫄은 거예요 숫자가 많다고 벌 벌 떤 거예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시키시는 일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을 방해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하고 그냥 말뚝 가지고 찍어버리면 여러분 것이 되는 거예요. 잘못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여러분, 하나님 위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자가 비겁하게 여자 앞장세우고 자기는 살려고 빠졌지만 하지만 약한 여자라도 많은 숫자의 군사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