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영역 150814
성도의 영역 150814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김창길(IP:118.♡.121.36)
15-09-13 00:23
서울 의존교회150814a (성도의 영역)―이 근호 목사
디모데후서에 보면 디모데라는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디모데를 디모데라고 불러준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불러주는데 그 바울 앞에 이렇게 붙어요. 사도 바울이라 하죠. 그럼 누구의 사도이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 이죠.
그리스도 예수까지는 눈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이니까 눈에 보이고 바울과 디모데의 눈에 보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바울 사이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냐 하는 것을 눈에 보이는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이냐로 뚜렷하게 구체화 되겠죠.
이 논리는 간단해요. 예수님하고 우리가 어떤 사이일까? 라고 할 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디모데한테 배우지 왜? 디모데 자기가 뭔데 내 신앙을 결정합니까? 디모데하고 사도 바울 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거든! 그렇고 그런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바울과 디모데와의 관계야! 그래서 이 디모데를 내 자식이라 내가 낳은 자식이라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보이는 세계를 통해서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 상당히 즐겁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우리 신앙에 있어서 유리한 느낌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히브리서도 그렇고 요한복음도 그렇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너무 큰 숙제를 우리에게 알려줬어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번 적어볼게요. 이 말이 얼마나 이게 어려운 말인지 한번 적어봐야 알아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논리가 있어요. 첫 번째, 보이는 것은 믿음이냐? 아니냐?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했으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보이는 것은 다 엉터리냐? 하는 겁니다. 보이는 것을 언급한 것은 가짜 믿음이냐 하는 그 문제가 생깁니다. 믿음이냐 아니냐?
두 번째가 더 어려워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면 다 옳은 믿음이냐? 그런 논리가 생기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면 다 믿음이냐? 뭐 천국 갔다 온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시중 서점에 가보면 9일 만에 천국 보고 왔다는 사람, 자기들끼리 경쟁이 돼서 나는 5일 만에 갔다 왔다, 9일만에 갔다 왔다. 어떤 사람은 단체로 갔다 왔다. 여행사 하나 차렸으면 좋겠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전면에 내세우면 일단은 사람을 끌 수 있는 유인책 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만 해 준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것이 보통 인간이라 말이죠.
그래서 디모데후서를 시작하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이 믿음이냐 아니냐, 보이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옳은 믿음이냐 하는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해서 모두다 가짜로 들통 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왜 가짜냐 하면 이런 궁금증을 바로 본인의 궁금증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가 창세기에서 죄를 짓고 난 뒤에는 원래 엉뚱한 죄 있는 자리에 우리 인간이 옮겨져 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자리 자체가 문제 있는 자리가 되어 버렸어요. 죄 짓고 난 뒤에요. 죄 짓고 난 뒤에 인간이 뭔가 기대한다는 자체가 이게 죄성에서 나온 결과물이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야지” 그것도 죄야, “예수 믿어야지” 그것도 죄야! 왜? 출발이 나부터 출발하니까! 내가 어떻게 천국갈 수 있느냐 부터 슬슬 누구를 믿어야 가느냐, 그렇게 생각되거든요. 그렇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가 과연 천국갈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네가 증명해 봐라! 남은 모르지만 나는 꼭 가야돼! 라는 그 정당성을 네가 그렇게 주장을 하는데 그 이유를 남들이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해 봐라!
남은 탈락해도 너만 이겨야 돼! 너는 구원받아야하는 이유를 네 쪽에서 끄집어 내보라 말이죠. 끄집어내주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있어요. 첫 번째는 남들이 나를 신앙인이라고 쳐줘야지, 인정해 줘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첫 번째부터 먼저 할 게요. 남들이 나를 신앙인이라고 말해 주면 저는 신앙인 맞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네가 누구냐 라고 한다고 하면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식으로 남을 우회해서 네가 나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나라고 곱게 인정해 줄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상당히 자존심도 없고 겸손한 것 같지만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요. “어떻게 머리 잘 나왔어요?" 이게 뭔 뜻입니까?
내가 머리 잘나왔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요. “아이고 머리 어디서 했어? 엉망이다, 참 걱정이셔! 석 달 동안 어떻게 할래?” 이렇게 나오면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요. 남이 이야기한 그것이 곧 나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점은 남이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왜 내가 되지요? 아무 이유도 없어요. 그 말은 뭐냐, 나는 내가 누구냐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니고 네가 나를 누구라고 불러주는 그 재미로 산다는 겁니다. 네가 나를 꽃이라고 부르면 나는 비로소 꽃이 되고 싶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네가 나를 꽃이라고 불러주게 되면 너는 나에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되어 줄게! 이런거에요.
엄마! 100점 맞았어! 그것을 왜 엄마한테 가져옵니까? 나 오늘 수학 100점 맞았어! 애들이 수학 100점 맞고 엄마한테 가져와요. 이런 애는 별로 없어요. 오늘 100점이지만 나는 이것을 비밀로 하겠어! 나는 소나무 밑에 캡슐로 묻어서 나중에 20년 후에 다시 파볼게! 이것은 쉿 별들도 가만히 있어! 달들도 가만히 있어! 이것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왜 이리 못갑니까? 7곱살 먹은 어린 애가 왜 그렇게 못 살아요? 7살 쯤 되면 인생을 알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못살아요? 왜 자랑질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성적 나쁘다고 성적표 찢고 가출하고 왜 그래요? 그 가출한다고 성적이 올라갑니까? 이미 벌어진 사항인데 있는 사실은 벌어진 사실이 있는 사실이 아니고 남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 그것이 있는 사실이에요. 이 세상에 나 빼놓고 다 죽어 버리면 얼굴에 여드름 나도 견딜 만 해요.
식구가 집안에 아빠하고 딸하고 둘만 살아도 견딜 만 해요. 아빠만 입 다물면 견딜만 하다고 그런 말을 해요. 그런데 집에 여자 형제가 8명에 엄마, 이모 이혼해서 이모까지 한 12명 살고 있으면 얼굴에 여드름 나면 전부 다 입댑니다. 얘가 사춘기네! 여드름 났네! 지나갔어요. 또 얘가 여드름 났네! 또 있다가 오후에 외할머니가 와서 야, 여드름 봐라! 또 그래요. 그러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나 가출할래!
도대체 우리가 누구 장단에 놀아납니까? 방금 장단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누구 장단에 놀아나느냐를 고상한 말로 “영역”이라는 겁니다. 제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것을 이야기하려고 해요. 사람이 예수 믿는다는 신앙, 구원, 천국 이 모든 개념이 본인이 속한 영역 마다 다 달라요. 본인이 어느 영역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그 개념들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이 다 다른데 다 틀려요. 다 잘못 되었어요. 왜냐하면 본인의 영역이라는 그것이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영역은 뭐에 전제하느냐, 당신이 나를 신앙인으로 간주하여 나는 천국 믿어! 예수 믿어 그러니까 이야기 해 봐! 너 예수 믿느냐? 됐어! 됐어! 그 소리를 듣고 싶어서 역시 우리 영역은 같은 형제야! 라고 테두리를 쳐 버리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유교 집안이라서 아파트 생활할 때 현관에 신발이 흩어져 있으면 바로 놓고 나갔다 다시 들어오게 되면 그 집안이 보기에는 당연한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떤 중학교 2학년 아이인데 이오는 날 버스에 타자마자 우산을 접어서 그냥 접지 않고 돌돌 말아서 남한테 빗방울이 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 그 집 가정에서 그게 아주 정상인겁니다.
그런데 비 맞아서 아이고 비다하면서 옆에 물 다 튕기고 신발 벗는데 잘못 던져서 현관 밖으로 튀어 나가 맨발로 가서 다시 들고 오고 이게 모든 식구들이 먼저 그런 짓을 하게 되면 동생이나 자식들도 그런 식으로 하거든요. 그런 식구들 속에서 신발을 나란히 하게 되면 그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갈 때도 알아서 찾아가는데 왜 이렇게 정돈이 되어야 되느냐? 그러면 유교 집안은 저질하면서 너하고 안 놀아! 하잖아요. 이 말은 네가 노는 영역과 내가 노는 영역이 따로 있다는 이 말이죠. 따로 있을 경우에는 다른 영역에서 나를 뭐라고 비난해도 거기에 대해서 개의치 않아!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한 영역에서 나를 뭐라고 비난하고 규정하는 그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나는 당신이 왜 나를 너라고 불러주느냐 이것이 우리의 나라는 겁니다. 디모데후서를 모든 기독교인들이 봅니다. 보면서 자기 영역을 고수를 해요. 자기 영역을 고수를 하니까 디모데후서를 백날 아무리 읽어도 자기 영역에서 남들이 나를 뭐라고 칭찬해 줄 것이냐를 고려해서 디모데후서를 보면서 큐티를 하던지 뭘 하던지 디모데후서 근처도 안 갔습니다.
디모데후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관계가 뭐냐? 모르죠.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주님이니까요. 그렇다면 디모데와 사도 바울의 관계는 뭐냐?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관계가 그대로 디모데와 사도 바울과의 관계가 연결된 겁니다. 연결되었을 때 디모데는 이제는 사도 바울이 갔던 그 죽음의 길을 따라 가야 돼요.
실제로 전설인지는 모르지만 나이 63살 되어서 에베소서에서 곤봉 맞아 죽었다는 겁니다. 저 여신은 신이 아니고 그냥 우상일뿐이다 라는 그 소리를 해서 주민들한테 맞아 죽었어요. 디모데가 에베소서 목사거든요. 맞아 죽은 거예요.
그러면 디모데 맞아 죽었다고 안됐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뭐, 우리 동네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야 라고 할 사람들이 누구죠? 디모데 오래 산다 싶었어! 진작 얻어 맞아야 되는데 이제 얻어맞아? 라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영역은 어떤 영역입니까? 바로 사도 바울이 속해 있는 영역이죠.
그 영역이 어떤 영역입니까? 보이지 않는 분이 지배하고 장악하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를 보고 사도 바울을 보아도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디모데, 사도 바울이 제대로 못 살아서가 아니라 보고 있는 본인의 영역이 수상해서 그래요. 잘못 돼서 그래요.
본인의 영역, 평소의 버릇이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 자기가 선택한 또는 자기가 속해 있는 영역이 나를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나는 사람이고 싶어! 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백날 디모데후서를 봐도 소용없습니다. 디모데후서처럼 살아서 내가 속한 영역에서 칭찬 받으려고 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교회라는 것이 위험한 곳이에요. 교회라는 것은 나름대로 이미 영역이 확정되어 있어요.
우리 교회는 이런 이런 사람을 좋은 신자로 간주하겠습니다. 이미 분위기가 형성된 입장에서 거기에다가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받죠. 그러면 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영역은 뭡니까? 예수그리스도 안이에요. 맞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뭐 그런 쉬운 대답을? 맞잖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제 말은 그리스도 안을 교회 안으로 바꾸지 마라 이 말입니다.
교회 안으로 바꿔 버리면 이게 굉장히 문제가 되어 버려요. 내가 다니는 교회, 출석하는 교회에서 나를 신앙인으로 간주할 것인가? 이게 우선이 되어 버리면 디모데후서를 봐도 이게 소용이 없어요. 왜곡되게 해석합니다. 해석에 오류가 발생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유발하는 사람이죠. 있는 교회 등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움직이는 교회, 움직이면 그게 교회가 되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교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10년간 교회했다, 복음이 안 나온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에요.
계속해서 복음이 나올 경우에만 계속해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존재가 아니고 교회는 사건이에요. 사건이라는 말은 교회는 기적입니다. 오늘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대목이죠.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출몰하는 거예요. 어떻게? 교회가 없어도 되는 곳에 난데없이 교회가 나와 버려요. 다른 말로 하면 난데없이 복음이 튀어나와 버린 거예요.
왜 그러냐, 목사님 왜 그렇습니까? 모든 현실은 나름대로의 영역들이 있어요. 영역들에 맞춰 가려고 애를 씁니다. 당신이 보기에 나는 어떻습니까? 아빠! 아빠 보기에 어때? 이번에 내가 여자하고 사귀는데 아빠 소개 시켜 줄게 아빠 보기에 내 신붓감이 맞아? 늘 이렇게 묻잖아요! 아이고, 무슨 그런 여자를 데려왔느냐 하면 야호! 그러면 아빠, 나 결혼할래!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예수한테 묻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여! 좋은 아가씨 주세요! 하는 이런 기도 말고 예수님, 여자 하나 데리고 왔는데, 예수님 보기에 어떻습니까? 괜찮다고요? 아이고 잘했네! 예수님이 그렇게 응답하십니까? 바이브레이션 넣어서 “그래 결혼해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이야기합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그게 무슨 의미이냐? 네가 사는 목적이 네가 여자 하고 결혼하려고 이 땅에 살아가는 그게 네 존재의 의미이냐? 그게 존재 의미가 아니거든요. 안양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돔배기라는 것 있죠? 상어고기, 머리가 최초이고 꼬리가 마지막 인데 사람들은 중간밖에 못 살거든요. 앞에 것을 몰라요. 뒤에 것도 몰라요. 중간에 끊는 것을 경상도에서는 돔배기라고 합니다. 제사할 때 올리는 돔배기, 이것을 끊어가지고 인생을 논하고 현실을 논하고 주님을 논해요? 태초도 모르고 끝도 모르면서요.
욥이 원망했다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대해서 언급하니까 입이 쑥 들어갔잖아요. 네가 일곱별 만들 때 너는 어디 있었지? 하니까 가만히 있는 겁니다. 너는 돔배기냐? 왜 중간부분이 전부 라고 생각하느냐? 네가 인생에 대해서 뭘 안다고? 머리도 모르고 꼬리도 모르고 중간을 쥐고 있으면서 그것도 짧은 인생을 살면서 네가 알기는 뭘 알아?
그런데 보니까 본인만 중간이 아니고 남들도 다 중간이거든요. 중간끼리 모여서 어떻게 성경에 어떻게 봤냐? 모여서 어떤 영역을 만든 거예요. 영역을 만들어 놓고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 거예요. 누구마음대로 교회인데? 교회는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가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기적으로 늘 등장해야 돼요. 사도 바울처럼 늘 등장해야 돼요. 교회가 늘 등장한다면 더 중요한 말은 교회에 우리가 소속되어 있잖아요. 우리도 매일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늘 우리도 내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보통 엄마가 말썽꾸러기 자식한테 이런 이야기하죠. 너무 답답하니까 “네가 우리 집 안에 태어난 것은 사건이다” “어디서 이런 게 태어났느냐?” 애가 “내 책임입니까?” “이것봐! 어디서 이런 변명은 또 어디서 배워서!” 이건 맞어 사건이야! 사건! 안 좋은 기적이 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좋은 기적이에요.
부모는 자식이 애 먹일 때 예상을 하지만 교회는 예상 못할 때 불쑥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마세요. 그 예상을 빗나가서 낮선 교회, 사건으로 새로운 교회, 신선한 교회, 시원한 교회로 다시 우리에게 복음적인 사건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 그런 교회가 무슨 교회입니까? 의존교회입니까? 의존교회가 될 수 있어요. 주님만 많이 의존하니까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고 목사님이 복음을 전하면 평범한 말이지만 아, 이 순간 저 말씀은 새롭게 들리네! 그러면 예상 밖의 교회가 생겨 버렸어요.
따라서 예상 밖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내가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단 접으세요. 접고, 만약에 이것을 접지 않으면 아는 것에다가 추가해서 아는 것이 되니까 이것은 문제가 됩니다. 일단 나는 모른다고 치고 목사님 말씀만 아옵소서! 그런데 성경말씀을 풀이하고 설명하면 거기서 주님을 새롭게 알아 버리면, 새롭게 안다는 것은 주님의 현존, 여기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면 주님의 살아계심이 너무 강열해서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것은 별 중요한 문제도 아니야! 내가 살고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생겨버리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 주님께서 죽은 딸을 찾아가죠. 모든 영역에서 그 딸은 이미 죽은 거예요. 누가 봐도 죽은 거예요. 거기 식구들 다 죽은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물어봐도 죽은 거예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니까 에이 죽은 자인데 이미 죽었는데 무슨 새로운 것? 이미 죽었는데 조문하러왔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면서 소녀야! 일어나야지 오늘 좀 잠 많이 자네! 이제 일나나야지 식구 만나야지 하고 흔들어 깨우니까 소녀가 아우 잘났다! 그것은 성경에 안 나옵니다만 어쨌든 자고 일어났어요.
묻습니다. 1번 고맙다, 2번 주님이 무섭다, 몇 번입니까? 무섭지요. 왜? 다른 평가를 받을 준비하세요. 지금 까지 내가 알았던 나라는 똑같은 인간들끼리 나한테 쏘아대는 평가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바보, 병신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는 것을 완전히 바보 만들었어요. 예상 못한 이야기를 해 버렸습니다.
분명히 내가 보기에 죽었는데 잔다고 할 때 주님, 그러면 소녀가 문제가 아니고 이제 저는 어떻습니까? 저는 어떤 인간인데요? 라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기다려봐! 다음에 올께! 하고 가버리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유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를 상담이나 하려고 오신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붙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이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엠마오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뒤에 바보가 됐다고 예수님 만나고 손잡고 룰루랄라 이렇게 다니면 얼마나 신나요. 막 사진 찍고 야, 주님과 만나! 이렇게 하는데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주님이네 하는 순간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이 보이지 않죠? 그러니까 제자들이 봤다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또 미쳤구나! 주님을 너무 보고 싶어서 정신이 갔네! 봤으면 어떻게 생겼나 한번 보여 봐! 그러면 할 말이 있어야지요. 다만 주께서 죽었다가 살아 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말?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지금 어디 가신데? 몇 번 버스 가셨데? 마을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셨데? 몰라! 이것 봐, 본것만 알지 모르잖아!
그것을 목격자라 하고 그것이 두자로 사도라 합니다. 목격자, 목격된 자, 목격자는 예수님을 경함하는 자가 아니에요. 붙드는 자가 아니에요. 그 때 그 사건에 마주친 자에요. 본인이 그 사건 때문에 이제는 내가 만난 예수그리스도의 나의 평가 외에는 모든 평가는 일체 나의 평가로 간주하지 않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의 사도입니다. 사람들의 시선과 눈치를 안보고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평가로만 계속 가는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 점점 어려워지지요? 내가 큐티해서 이대로 살아야지 한다고 디모데후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바운더리를 나의 영역에서부터 나를 괜찮은 인간으로 봐주는 그 세계에서부터 우리가 출애굽, 거기서부터 우리가 벗어나야 돼요. 왜?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값어치가 떨어져요. 존재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미 이해관계가 있어요. 이것 해 주면 이거 해 주고 이거 해 줄게 이미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옳은 지식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형수님, 이거 해 주면, 시동생인 내가 형수님 이거 도와줄게요. 뭐 이런 것, 그런 것 많이 나오잖아요. 시동생이 형수와 같이 협조해서 회사를 물려받으려고 하는 그런 드라마가 있거든요. 여기서 시청자들이 보면서 이제 진실은 끝났다! 자자들끼리 좋아서 이익에 꽂혀있는데 무슨 진실이 있어요? 진실 없이 이익만 토대로해서 하나의 영역을 만들었다면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누구라고 누가 이야기 해 줘요? 아무도 이야기해 주지 못하죠. 하나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때로는 드라마가 복음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어떤 사람이 붕어빵을 팔고 있는데 어떤 남자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와서 야야, 내 아들아! 형님하고 하면서 왔다 말이죠. 자기는 결혼해서 말 못하는 마누라하고 20년 동안 살고 있는데 그럴 때 새로운 영역에 내가 갔을 때 내가 누구냐를 누구한테 배워야 하고? 그 사람한테 나한테 형님이야 내 아들아 하는 사람한테 어떻게 됩니까? 새롭게 다 배워야 돼요. 그러면 뭐를 버려야 돼요? 20년동안 고생했던 부인은 버려야 돼요. 부인이 알아서 편지 써놓고 어디 갔지만요. 버려야 된다니까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아십니까? 그러면 기존에 놀던 인간의 평가를 포기를 해줘야 돼요. 그리고 드라마 같이 새로운 가정에 살면 되는데 문제는 기존의 있는 사람에게 같이 살면서 눈에 보이면 괜찮은데 새로운 영역의 분은 눈에 안보이네! 주님이 보이지를 않아요. 완전히 바보 되어 버렸어요. 예수님만나고 난 뒤에 주위 사람들이 완전히 바보 만들 듯이 사도 바울이 일종의 바보처럼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믿지를 않습니다. 왜?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 쯤에서 정리를 해 봅시다.
우리가 인생을 살 때 보이지 않는 것에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갈 용기가 있습니까? 이것을 디모데가 묻는 겁니다. 디모데나 사도 바울이나 불교신자한테는 둘 다 바보에요. 왜? 보이지 않는 분을 소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신자처럼 이 사람을 쪼다로 보겠습니까? 우리는 쪼다로 보기에 차마 용기가 없죠. 훌륭한 분인데 그러면 우리는 이 사람한테 미움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어쩌란 말이에요. 디모데후서를 이용해서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 놓고 그 교회가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고 말았어요. 우리 교회 키우고 우리 교회에서 내가 인기를 얻고 남들이 집사님 저를 뭐라고 생각합니까? 목사님 저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게 우리의 목적이 되고 말았어요. 그것은 디모데후서하고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해요. 디모데야 내가 가는 길을 가라! 스승님 어떤 길을 갔습니까? 나는 남들이 보이지 않는 분을 소개해서 나는 죽으러 갔다. 그 다음에 네 차례야, 거기를 갈 수 있느냐?
그것을 가지고 6절을 봅시다.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야, 이거 참 겁나는 이야기입니다. 네 능력이 아니고 네 속의 하나님의 능력, 은사로 하여금 내가 가는 길, 사도 바울이 가는 길을 네가 따라 오게 되어 있다. 이런 겁니다. 내 아들아, 또는 내 제자야! 그런 뜻이죠.
5절에 보면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딸 낳으면 이름을 유니게로 지을 겁니까? 로이스로 지을 겁니까? 로이스도 이름이 많고 유니게도 많습니다. 디모데의 외할머니이고 한 사람은 디모데의 어머니입니다. 그 외할머니와 어머니한테 거짓 없는 믿음이 있었다는 거예요.
거짓 없는 믿음이 있다는 말은 거짓 있는 믿음이 활개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짓 있고 없고를 어떻게 아느냐? 디모데야 나한테 배워서 네가 판단해 봐라! 이제 너한테 편지를 했고 너한테 복음을 이야기할 테니까 거짓 있는 믿음과 없는 믿음을 분간하라! 그러면 거짓 빼어버리고 옳다 거짓 빼버리면 남는게 뭡니까? 믿음이죠.
그러면 그 믿음이 인정받느냐 이 말이죠. 믿음이 있습니까? 물으면 디모데한테 디모데님 저 믿음 있습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뭐라 합니까? 거짓 믿음이야? 옳은 믿음이야? 물으면 그런 것 안 배웠는데요. 그냥 믿음 있으면 된다는데요. 그렇게 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 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지금 까지 이야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이야기할 때 인간이다, 또는 사람이다. 무엇이 인간이냐 무엇이 사람이냐 하는 것은 남들이 같은 인간이나 같은 사람이 너를 인간이다. 사람이다. 쳐 주는 것에 대해서는 전부 다 이것은 부정하세요. 그것은 똑같은 입장에서 서로가 모르는 무식한 입장에서 무식한 인간에게 위로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된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의 그 관계가 지금의 우리의 관계로 유전 됩니다. 그 관계가 뭐냐, 그게 복음입니다. 거짓 없는 믿음, 복음에 대한 거짓 없는 믿음이 한 세트가 되어서 바울과 디모데를 이렇게 충실한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디모데후서를 하면서 우리가 찾아내야 할 목표가 이미 정해 졌습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그러면 목사님 복음이 무엇입니까? 참 급하죠. 이것은 당장 알아야 돼요. 앞에 9절 봅시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원래 이쪽 자리가 에덴동산 자리에 아담이 있었는데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에덴에서 추방되었지요. 그러면 에덴이 아닌 동네에 왔지요. 에덴이 아닌 동네에 왔어요. 그러면 이 동네에 사람들이 있다 말이죠. 하나님의 뜻은 이 동네에 있는 어떤 엉뚱한 저주 받은 동네에 있는 우리를 어느 동네로? 원래 하나님께 복 받은 동네로 지금 옮기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 멀지도 않은 것 같은데 걸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왜 못 걸어가느냐 하면 추방할 때 하나님께서 저주함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가 건너오려면 이 저주와 범죄를 우리의 행위로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을 팔 때 돈 100만원 주고 팔았으면 다시 본래의 자리를 오려면 100만원이 있어야 다시 원래의 자리를 회복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저주를 했다면 그 주님의 저주를 극복할 수 있는 저주를 무효로 둘 수 있는 그 행위가 그 정도로의 착한 행위가 우리에게 나 올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못 나오죠. 그러면 나오는 구원 못 받아요. 끝났어요. 집에 갑시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인데 뭐 교회 와서 여행가고 하는 것이 주의 계획이 아니에요. 성경책의 계획은 이거에요. 처음에는 이랬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되었다. 그런데 건너가야 되는데 9절에 보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우리의 행위로 안 되지요. 그 행위 가운데 기도, 헌금, 전도, 예배 온갖것의 무슨 행동으로도 안돼요. 내가 한 행위가 내가 품고 있는 주어진 저주를 무효로 돌릴 수 있는 그런 요소가 우리 내부에서는 안 나온다는 말입니다.
나 올 수가 없어요. 그러면 왜 그게 못 나옵니까? 라고 물으면 그 답변이 의외로 굉장히 의외스러워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이미 구원해 놓기 때문에 구원이 안돼요. 이게 나한테 선악과가 있잖아요. 선악과가 있으니까 행위로 악에서 선한 행위를 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착한데 지옥 보냅니까? 아무리 봐도 착해! 그게 궁금해서 같은 영역의 다른 사람에게 묻는다고 했죠. “나 신자지?” “신자지!” 되게 착해, 착하기 때문에 착한데 왜 꼭 구원 받아야 됩니까? 그것으로 이미 구원됐는데요.
행위로 이미 구원을 시작해 버렸는데 다른 방식이 들어올 틈이 없네! 들어올 틈이 없는 거예요. 태어난 내가 이미 태어나고 난 뒤에 내가 어릴 때부터 간난 아이가 머리가 아주 좋아서 “그래, 내 인생 태어났으니까 이제 내 팔자 내가 알아서 관리해야 된다. 이렇게 생각해서 오줌도 안 싸고 열심히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팔십까지 살았어요. 그러면 구원됩니까?
그것은 네 생각이고! 마귀가 구원을 막는데 선악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막아버려요. 착해야 구원받는다. 착한 일에 매진해라!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나물하느냐? 훈계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훈계 해 버려요.
네가 그랬어야 되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런 행동을 했어야 되느냐? 우리가 우리 자신 계속 훈계하고 나무라면 나무랄수록 우리는 착각의 늪에 점점 더 깊에 빠집니다.
어떤 치과 의사가 실수를 했어요. 눈이 나빠서 그런지 썩은 이빨 놔두고 멀쩡한 이빨을 빼버린거예요. 그래서 고소를 했거든요. 고소를 했지만 이빨은 벌써 썩었다고 생각하고 갖다 버렸으니 없잖아요. 멀쩡한 이빨을 빼버렸으니까 고소하고 치과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유사한 비싼 이빨을 거기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게 원래 자기 이빨입니까? 가짜 이빨이죠. 원래 자리를 뿌리째 뽑아 버렸어요.
그래서 이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구원될 것을 뿌리째 막아 버렸어요. 착하게 살면서 구원된다! 끝!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어떻습니까? 구원 자체를 그 엉터리 같은 구원을 아예 취소시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구원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도 구원 못 받아! 이게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구원 받을 필요가 없거든요. 그런데 구원받을 필요가 없는데 일부로 죄를 적셔가지고 일부로 이 땅에 33년 동안 살게 하시고 다시 또 구원을 받아요. 이게 구원이라고 우리한테 시범적으로 보여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다른 사람은 처음부터 구원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구원 받을 그런 가치조차 없는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무슨 구원을 언급합니까? 구원파들 미워요. 나빠요. 구원파 너무 나빠요.
구원 파는 보세요. 내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 먼저 이유를 설명 해 보세요. 라고 이야기 해 보세요. 당신은 사랑 받기로 작정되어 있습니다. 라고 시작하거든요. 그러면 사랑 받기로 작정되어 있는 사람을 왜 쫓아냈습니까? 라고 물어 보세요. 그렇게 사랑할 것 같으면 한번 딱 먹었다고 그것 실수 한번 한 것 가지고 추방해 버리고 그러면 에덴동산 자체가 문제있지요? 선악과를 아예 파 내어버려야죠. 그 위험 요소를 왜 심어놔서 따 먹게 해서 하나님께서 왜 그런 실수를 벌렸는지 전부 다 하나님의 실수이네요?
하나님이 죽으리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죠. 선악과 따 먹으세요! 이래야죠.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거봐 죽잖아! 이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애를 낳고 난뒤에 깨끗한 요가 있어야지 거기다가 애 요에다가 서너 마리 뱀 집어넣고 잘 키우라고 하면 잘 키워집니까? 안 키워지겠죠.
뱀 집어넣었죠. 선악과 집어넣었죠. 그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담 하와가 어쩌란 말입니까? 그것도 과일도 진짜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게 아니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따 먹어라! 따 먹어라! 막 소리가 나오는 것 같아요. 이게 하루 이틀 같으면 꾹 참을 수 있는데 다음 날 되면 똑같아요. 더 잘 익었어요.
우리 같으면 20년 참았으니까 봐주겠지! 해서 따 먹었어요. 따 먹는 순간 죽어 버려요. 죽으라고 인간을 만들어 놓은 겁니다. 구원받지 말라고요.
9절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부르신다는 그것이 우리의 행위 안에 들어있는 겁니까? 안 들어있는 겁니까? 안 들어 있죠. 우리가 행위 안에 들어있으면 우리가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모르는 이야기에요. 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기적이에요. 이것을 진심으로 보고 있다는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물에 끄집어내야 전에 우리가 물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거든요. 물에서 꺼내줘봐야 물이 척척해야 내가 미쳤지 왜 물이 왜 젖었지? 아 내가 저기 빠졌구나! 보니까 거기에 내 발자국이에요. 기어 빠져나와 물이 이렇게 됐구나! 나는 결과입니다.
“나” 라는 자체가 결과에요. 그런데 우리는 나를 뭔가 새롭게 나답게 되게 하는 원인으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제일 큰 문제는 마귀가 너부터 새로 시작하게 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를 꼬이고 있는 겁니다. 마귀만 꼬이고 있습니까? 주의 종들이 다 꼬시고 있죠. 목사들이요.
고객들이 손님들이 업소에 온 이유가 교회가 업소인 것을 이제 알았는데 업소에 온 이유가 여러분, 온 이유가 여러분 원하는 것 있죠? 주께서 들어주십니다. 그것을 상품으로 걸고 왔다 이 말이죠. 목사님, 저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교회 오는 사람 바와 같습니까? 목사님, 제가 누구입니까? 네가 누구인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뭐 차사고로 기억이 갔습니까? 같은 친구가 떠 밀어서 물에 빠졌습니까? 이것은 이브의 사랑이라는 대목입니다.
그렇게 오는 게 아니거든요. 이게 아쉬운데 이게 내 능력으로 안 되는데 나는 가치 있는데 이게 있어야 가치가 원상회복이 되는데 이것 좀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내가 섭섭지 않게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이것 때문에 옵니다.
목사님, 저는 어디서 왔습니까? 하면 목사가 당신 부모한테 물어보라 하죠. 당신 부모가 낳았으니까 있지! 우리 부모는요? 아니 그것을 묻는 이유가 뭡니까? 물으면 모르죠. 그냥 묻고 싶네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 속에 포함이 안되어 있어요. 따라서 부르심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우리 행위를 공격하고 거부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우리개의 행위가 만나요. 나의 행위와 또 나를 향한 주님의 행위, 어느 힘이 세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됩니다. 주님의 행위와 나의 행위를 극복하게 되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행위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그것은 주님의 행위가 나보다 더 센 거예요.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나보다 센 거예요. 그렇다면 나 같은 다른 인간들의 평가에 우리는 주눅들지 않고 거기에 고민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 보이는 내가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면 보이는 너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니까 네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도 지금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아니라 말입니다. 사실은 제가 이것을 이야기할 때 짧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구약성경 전체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놓고 그 은혜가 네 행위로 유지 하려고 해 봐라. 얼마나 노력한다고 십계명 지키고 제사 지내고 은혜준 걸 유지하자! 은혜준 것을 유지 하자! 만약에 우리가 탈락하면 은혜가 다 떨어져 나간거야! 유지 하자!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은혜가 뭔지 몰라요. 은혜가 지금 주신 게 은혜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주신 은혜는 그 사람이 포기 할 때 비로소 속에서 나오는 게 은혜에요. 뭐냐, 내가 너 때문에 희생되었다!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그게 은혜인데 이스라엘 사람들, 이스라엘 나라가 같이 산다는 것,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 그것을 은혜로 생각한 거예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잖아요. 하나님께서 가족 화목하고 건강 주시고 이런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거예요. 진짜 은혜는 그게 파토 날 때 파탄 날 때 비로소 파탄 난 나, 아무 것도 아닌 나, 교도소 가는 나,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죽었다는 그게 은혜인데 그게 숨겨진 은혜인데 그게 사도 바울이고 그게 디모데거든요. 그게 복음이고 그 복음을 알아듣는 것이 바로 양심적인 진짜 옳은 믿음인데 전부 다 가짜 믿음이 난무하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가짜 믿음이 있다고 치고 어떻게 진짜 믿음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면 바꿔집니까?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내 질문을 잘못 오해한 거예요. 우리 행위는 하나님이 하는 계획을 못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 때문에 희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 때문에 고생했기 때문에 주님은 고생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무슨 행위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이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감안을 해 줘야 돼요. 나는 이렇게 좋게 이야기를 하는데 저쪽에서 울고 있다면 분명히 우는 이유가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안에 포함이 되어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물어봐야죠. 주여! 왜 우십니까? 주여, 왜 아파하십니까? 주여, 십자가 왜 지십니까? 이렇게 물어봐야 돼요.
우리가 여기 봉투에 헌금해서 내는데 주님은 울고 있거든요. 주님이여! 지금 제가 헌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십니까? 주여, 저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주여, 제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데 왜 이렇게 우십니까? 처음부터 네가 잘못 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우신다. 네가 헌금을 하던 하지 안 하던 관계없이 처음부터 주여! 죄인의 표시입니다. 이렇게 드리는 게 아니고 보시옵소서! 이러고 있다 말이죠. 안 해도 되는 헌금을 이 귀한 돈을 냅니다. 이렇게 있다 이 말이죠.
그것을 보고 답답하죠. 주님이 보시기에 소녀가 자고 있는데 모든 사람은 전부 다 울고 있는 거예요. 이 영역이 달라요. 그러니 주님이 잔다 하니까 유대인들이 비웃더라! 십자가가 세자인데 그것을 네 자로 고치면 어리석음,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는 어리석음을 각오 하세요. 어리석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푹 쉰 김치처럼, 어리석음에 푹 젖어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서울 의존교회150814b (성도의 영역)―이 근호 목사
디모데가 사도 바울한테 복음에 대해서 알았다고 해서 디모데가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종, 바른 믿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보이지 않는 주님을 위해서 모든 보이는 것을 포기 했던 그 믿음이 바른 믿음이거든요. 그 믿음을 디모데가 가진 것을 보고 디모데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저 사도 바울이 주님을 어떻게 알았기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포기 할 수 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포기 했다는 것은 아까 처음 시간에 했지만 남들이 알고 있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는 평가를 포기 했다는 말이에요.
첫 째 시간하고 연결시킵시다. 나는 당신 눈에 좋게 보이고 싶은데 당신 나 어떻게 생각해? 그래? 그럼 내가 고칠게! 이게 없다 이 말이죠.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내가 결정되어 버리면 자연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가 거부되는 거예요. 주님이 보시기에 틀리는 것은 거부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과 이미 바운드가 연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너하고 따로 영역을 만들 생각은 없다 이 말입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죠. 이미 주님과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가 됐기 때문에 남한테 지체가 못 돼서 환장할 일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것은 어릴 때나 놀아죠! 좀 끼워죠! 이렇게 되지만 어른 되면 어린 양 할 수 없는 거고 주님과 하나가 되었으면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평가나 그들과 한 편 먹으려고 그렇게 애쓸필요가 없고 아부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모여 교회하려고 애를 쓰지 말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궁금한 것이 사도 바울이 복음을 어떤 식으로 이해했기에 사람의 평가나 사람과 함께 한 편먹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아주 가볍게 느낄 수 있느냐? 그것은 9절입니다. 복음이라 하는 것은 뭐냐, 디모데야! 너 이런 마음이 같은 마음이지? 디모데한테 묻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하심이 아니잖아요.
행위로 하심이 아니면 곧 행위로부터 구원을 받았느냐를 묻는 겁니다. 지금 이 선이 있잖아요. 이 선이 무슨 선이냐 하면 전에는 하나님의 형상, 원래 있던 이쪽이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이 선을 넘어서서 지금은 마귀의 종이 되어서 선악과, 이쪽선 행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위장하는 그런 시대에 있다 말이죠.
그러면 이쪽에서 이쪽으로 어떻게 가느냐를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우리가 안돼요. 될 수가 없어요. 다만 사도 바울이 보여 주는 것은 사도 바울 당신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하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당신한테 전도해서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하면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분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을 또 보여 주세요! 한다면 나는 못 보여 준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쪼다요. 당신을 구원한 사람을 또 보여 달라면 필요할 때면 보여 줘야지! 그런데 우리 주님은 한번 오셨다가 떠나 버리셨는데 어떻게 보여 줘요. 하나의 사건인데요. 사건을 어떻게 되풀이 합니까?
사물 같으면 하겠는데 사건인데 어떻게 해요! 사물도 마찬가지에요. 아까 배즙이 맛있다! 그런데 또 먹었어요. 그 맛이 안 나와요. 왜? 그런 게 하나의 사건이기 때문에 이미 떠나가 버리면 똑같은 사건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 법이에요. 이 말은 주님의 존재에서만 사건이 나오고 내 존재에서는 사건을 붙잡을 수 없는 형편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나는 사건이라도 좋아요. 매일같이 나 같은 인간을 주께서 인도하셔도 주님이라는 존재가 확실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온 사건이라 하면 기꺼이 사건되어 드리겠습니다. 주님의 보이는 증인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어리석구나! 하면 사도 바울이 원래 십자가는 어리석어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보고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십자가의 그 최후의 허들을 뛰어넘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말 뛰어 넘었습니까? 그러면 어리석은 것을 나는 기꺼이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만 어리석은 게 아니에요. 같은 영역에 속한 나 같은 똑같은 인생 모두다 어리석은데 너도 어리석고 나도 어리석은데 왜 나는 십자가를 구원의 능력으로 알게 되고 왜 너는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이큐의 차이가 아니고요. 신체 달리기 100미터 몇 초의 차이가 아니고 이게 뭔가 그냥 탁치고 터치하고 간 사건의 차이라니까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한테 너한테는 나타나고 왜 우리한테 안 나타나는데? 그것을 왜 나한테 묻느냐? 주님이 혼자 살아계셔서 그냥 탁 치고 저녁때 가서 내가 예수님이다 하니까 예수님이여! 하는데 가버리는데 어떻게 해요? 우리 동네 갑시다! 소개합시다! 주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그냥 가 버렸어요. 그러면 다른 제자들도 나타나면 그만이고 안 나타나면 할 수 없는 거죠.
참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지금 어리석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인데 어리석은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또 뭡니까? 지금 행위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왜냐, 행위를 연발하게 되면 행위를 예상한 내가 행위가 축적이 돼서 자꾸 엉뚱한 나로 점점 더 강력한 하나의 철밥통이 되어 갑니다. 철밥통을 열어보게 되면 5년 전에 어떤 행위, 6개월 전에 어떤 행위, 15년 전에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것, 20년전에기도 해서 암에서 낳은 것, 모든 행위가 축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 맞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무슨 말이 안 나옵니까? 내 행위로 하심이 아니오라는 말이 도저히 고백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짜 믿음, 엉터리 믿음입니다. 주님이 탁 치고 간 믿음이 아니고 자기가 공들여서 애쓰고 옆에 사람 흉내 내서 신앙의 모델을 잡아놓고 많잖아요. 주기철 목사 등의 모델케이스를 잡아 놓고 그것 따라 붙이면 나도 신자가 되는 양, 남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남들의 시선을 맞춰 주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이것은 불교신자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행위로 하심이 아니요 했으니까 행위로부터 구원되면 됩니다. 내 행위로부터 구원되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떤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이 되어 버리면 됩니다. 내 구원에 도움이 되었던 행위가 하나도 없고 내 구원에 방해가 됐던 나쁜 행위도 하나도 없어요. 어떤 나쁜 행위도 내 구원을 막아 설수가 없습니다. 나의 어떤 짓거리도 내 구원을 해방놓을 수가 없습니다.
왜? 내 행위로 하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그러면 우리의 행위가 아니면 그러면 누구인데? 여기 9절에 나옵니다. 두자로 자기, 자기 뜻대로! 보통 남녀 사이의 자기라는 말을 붙일 때 어떤 경우 입니까? 이미 내 모든 것을 가져간 순간에만 자기 라고 부르죠. 내 자기 여기 없고 네가 다 가져갔다! 나는 당신을 볼 때 전에 내가 나를 부르던 내 자기를 나는 당신 속에서 찾으리라! 자기야!
더운데 고양이 걸음으로 몰래 에어컨 딱 켰는데 자기가 하는 말이 “꺼라!” 한 마디에 딱 끄죠.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면 그냥 넘어 가죠. cf에 그런 게 있어요. 왜 내가 좋아 하는 사람이 나를 다 가져가도 우리는 왜 즐거우냐! 왜 더 편하냐? 그것은 당신이 나와 살아주는 것이 내 행위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기쁜 뜻대로 나랑 같이 살아주니까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내 모든 것을 가져와서 내 대신 당신이 내 자기가 된다 할지라도 나는 거기서 박수를 치겠다! 지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럴 때 자기 라고 하죠.
보통 자기는 신혼 초에 많이 하고 한 3개월 지나면 없어집니다. 거기다가 애기를 낳게 되면
잘됐어요. 부를 명칭이 없다가 애기를 낳게 되면 누구 아빠! 하면 끝나요. 우리의 행위하고 하나님의 행위하고 놀랍게도 대립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초월적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왜? 개입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행위와 대립된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 대립되는 그 증거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빠진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십자가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 그러면 당신 말대로라면 하나님에 다가 십자가 보태면 되는데 그게 바로 가짜 우상입니다. 하나님에다가 십자가를 보태지 말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끄집어내어야 돼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끄집어내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우리 행위대로 구원해 준게 아니죠. 가 함께 겸하여 나옵니다.
십자가 자체적인 능력으로만 우리가 구원됐지 십자가 믿어준다는 행위라든지 십자가에서 순교하겠다는 그런 각오는 전혀 우리 구원에 보탬이 안 된 것 맞죠?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십자가 알고 선교한 것 이것 우리 구원에 요만큼도 보탬 안된 것 맞죠 라고 해야 돼요. 왜냐하면 진짜 하나님은 십자가 그것으로 십자가 속에 일체 우리의 행위를 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전히 빼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뜻처럼 우리의 뜻을 보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면 안돼요. 우리와 대립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남북이 분단됐는데 화해하려면 이러면 돼요. 북한이 지뢰를 미리 깔아 놓는 그 군인 전문가를 10명 초대해서 뷔페 가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고 용돈을 챙겨 드려서 우리 남쪽 휴게소에다가 지뢰 한 500개를 깔고 수고 했습니다. 또 봉투 드려 보내고 우리 거기서 한 500명 죽으면 화해가 돼요. 어떻습니까?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적대관계는 용납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화해 관계는 용납을 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지뢰 두 개 하지 말고 지뢰 500개를 하라 말이죠. 무슨 뜻인지 모르는군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만 하지 말고 성경에 십자가만 있는게 아니잖아요. 십자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서로 용서하라! 술 취하지 마라! 전도하라! 기도 하라! 있잖아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믿어라! 온유와 화평도 네가 행해라! 베드로후서 1장에 보면 온유의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뭘 더하고 평소에 본 받고 그것들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500개 까는 거예요. 그것을 행하면 구원됩니까?
그러면 십자가 말고 다른 것을 깔아 버리면 뭐가 성립이 안돼요? 적대관계가 성립이 돼요? 안돼요? 성립이 안 되지요. 주님이 이만큼 성의를 표했고 우리도 그만한 믿어주는 성의를 표하면 합쳐서 구원받는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화해하는 방법이 인간적인 아이디어에서 그 정도밖에 안 나와요. 그 정도가 되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다는 것인지를 북한 지뢰 전문가 불러서 한 500개 깔아서 우리 군사 500명 죽이면 좋게 화해된다니까요.
초빙해서 죽이라는데 못 죽여서 환장했는데 초빙해서 총가지고 우리군사 500명 죽이면 얼마나 화해가 잘되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쉽게 이야기 합시다. 우리나라 장관 자리에다가 반을 새누리당 국회의원을 다 채우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박근혜 욕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왜? 화해니까 반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 또 당신이 문재인 정점 받거든 장관자리 반은 우리 새누리당 하는 것 알지? 알지! 다 반 줘야지! 그러면 무슨 야당 여당이 있어요? 야당 여당 없이 다 같은 한 패죠.
그게 화해입니까? 철저한 적대관계가 유지 되려면 조금이라도 우리 행위가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에게 욕설이 날아와요. 저주가 날아와요. 하나님이여! 저는 하나님 믿고 성령 받아서 이렇게 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족족 저주가 날아와요. 하나님, 내가 예수 믿고 바르게 사는데 세상에 이렇게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하는 족족 저주가 날아와야 돼요. 네가 못한 것 네가 잘한 것이 전혀 네 영생 천국 가는데 오늘 밤에 천국 가는 것에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왜 그 정도로 너는 평소에 너와 내가 적대관계인 사실을 네가 왜 인정을 못하느냐? 우리는 주님을 적대관계로 안 보고 우리가 제대로 못 모신 시어머니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좀 더 잘 해 줄 건데, 너무 돈을 사랑해서 내가 못했습니다. 앞으로 착하게 바르게 살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면서 자꾸 적대관계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성의껏 표하면 이런 관계를 좋은 관계로 생각하는데 그런 관계 아닙니다. 십자가가 빠져 버리면 복음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있다는 말은 모든 행위는 가져가라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모든 행위의 뭐다? 모든 행위의 연발, 여기에 총을 붙이면 우리의 행위의 모든 연발총, 우리는 끝까지 계속 행위에 의존하고 행위에 의미를 두고 우리의 나쁜 행위는 후회하고 착한 행위는 의싸 의싸하는 그런 행위를 하도록 주께서 유도 합니다.
이 말은 쉽죠. 평소에 잘들하고 있으니까요. 이번 주 착한 일했으니까 복 받을 거야! 나쁜 짓 했으니까 금요일쯤 되면 사고 날까 싶어 스스로 걱정하는 이런 것 참 잘 하거든요. 내가 이렇게 못 났는데 애 유학 보내났는데 애 기숙사에 전기하나 나갈까 싶고 내가 이렇게 나쁜 짓 했으니까 이런 것, 내가 이렇게 착한 일 했으니까 아마 우리 애가 장학금 받게 될 걸!
자기 하고 멀리 유학간 아이 하고 무슨 근거로 캐나다로 유학간 아이하고 무슨 연결을 시킵니까? 그러나 우리 엄마의 심정은 유학보낸 심정은 그게 아니거든요. 기도를 빡세게 해서 기도의 효험이 물 건너고 바다 건너서 델타항공 타고 미국에 가기를 원해요. 그게 연발이에요. 아직 우리는 우리 행위로부터 구원이라는 것은 차후 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깨달아야 될 문제이지 우리스스로 깨달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행위를 포기를 못합니다. 왜,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내 행위 내세우는 것, 그래서 잘못했을 때 반성하는 것, 이것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혀 우리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만 우리는 골라서 행하는 우리의 속셈, 이럴 때 자기의 행위를 믿지 않죠. 이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믿음은 자기의 행위를 믿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뭐대로 하심이다?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게 은혜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같은 말이에요. 은사, 네 속에 은사 있다! 하나님의 은사, 여기 6절에 보면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은혜, 은사 다 같은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은혜가 무엇이냐? 여러분 다 알고 계시죠. 알고 계신데 제가 질문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쳤습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이삭을 받쳐서 구원받았습니까? 이삭을 안 받쳐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이삭을 받쳐라! 만약에 테스트인데 이것을 통과하면 믿음이고 통과 안 하면 믿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삭을 받쳐서 구원받은 겁니까? 안 받쳐도 구원 받는 겁니까?
로마서에 이상한 말이 있어서 그래요. 이 믿음이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나온 믿음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은혜로 난 믿음 같으면 가만있어도 은혜로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아들 이삭을 받치라는 행위를 요구했느냐 이 말입니다.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것은 행위로 난 것이 아니고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행위를 요구한 거예요.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행위 없으면 은혜를 안다? 모른다? 어떤 하나님의 행함이 없으면 은혜를 몰라요.
행위를 하라! 그것을 무효로 돌리는 가운데서 행함이 은혜로 바뀌죠. 실컷 열심해 했는데 수고했다! 구원은 은혜로 되는 거야! 야야, 그러면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시켰습니까? 하잖아요. 그것은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왜 가만히 있으면 은혜를 모릅니까? 은혜를 잘 알지요. 아니야 너는 너를 몰라! 너는 내가 알아! 너는 행위만 쥐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거든! 행위를 전복 시키고 뒤집어엎기 위해서는 실컷 행위를 해 놓고 아니네!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이게 아니네! 예수님의 십자가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는 열심히 행위하도록 그렇게 유도 하는 사태들이 자꾸 일어나요.
성경에 이런 것 있잖아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습니까? 딱 한 가지 오른 손이 해 놓고 죽이면 돼요. 오른 손이 하는 순간 왼 손으로 정보가 전달되기 전에 죽여 버리면 왼손이 모르게 되겠죠. 인간은 죽지 않고서는 전혀 모르죠. 그 방법은 너무 참혹하고 그 외에 다른 방법은 뭐냐, 오른 손이 하는 그것마저도 오른 손이 하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