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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7. 24) 2강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5. 7. 24) 2강

이름 : 서경수(IP:14.44.98.169)

광주 강의(2015. 7. 24) 17-2

모든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긴 그림자이기에 십자가가 함유한 내용을 여러 가지 기적과 말씀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은 결국 부활하십니다.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인데 부활하시면 시간과 공간의 창조 전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시면 그 성령 안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묵시세계가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역사도 있고 묵시도 있어 두 세계가 중첩되면서 묵시에 의해 역사가 지배받는 구조가 됩니다. 따라서 묵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볼 때는 ‘마귀에 속한 사람’으로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청년을 볼 때 귀신 들린 청년이지 그냥 청년이 아닙니다. 똑바로 행동하면 귀신이 안 들린다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들려야 했기에 귀신이 찾아온 거예요.

주님의 시선을 사도 바울이 알게 되었고, 12제자가 알게 되었고, 성령 받은 성도도 예수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이 세상 끝이 끝이 아니고, 끝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이미 종말이 된 것입니다. 종말이기 때문에 잠을 자도 깨어있는 상태가 돼요.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먹을 것 다 먹으면서도 늘 깨어있어요. 왜냐?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주께서 지배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무엇을 해도 상관없어요. 이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자유를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에 자유하지 않으면 채찍 맞아요. 자유하지 못한 대표적인 예가, ‘내가 이런 행동하면 저주 받고 내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으로 뭔가를 주저하는 모습입니다.

자유하게 된 성도에게는 걱정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울의 근심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걱정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란 타인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입니다. 그래서 내 사랑은 없고, 남이 왔을 때, 또는 주님이 왔을 때 주님과 나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하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나의 것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기의 것으로 환원됩니다. ‘내가 온 정성을 다해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이런 사랑은 타인이 자기에게 종속된 사람이라고 여길 때만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너는 내 자식이니까 내 말 들어야지.’ 이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은,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라고 주신 것인데, 내가 자식을 내 것으로 만들면 주님이 자식을 주신 취지와 배치가 됩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뭔가를 요구하면 무조건 들어주면서 모성애라고 하는데 이것이 마귀적 발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려면 부모는 자식으로부터 도망쳐야 돼요. 그래야 내 것이 안 됩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했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떠나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요? 백지영의 노래 가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사랑 안 해.” 배신을 당하고 난 뒤에 이제 질렸다는 거예요. 어떤 장로가 교회에 갔는데 교인들에게 환영을 못 받았다면, 그 교회에 안 가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마음은 은근히 자기 소유화 시킨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자기화 시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합니다. 타인을 보내서 나를 속상하게 합니다. 그러면 타인이 등장함으로 내가 상처를 받지요. 주님이 등장해서 나에게 상처가 생깁니다. 그 상처를 주님이 가져감으로 우리가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내 소유로 만들어 내가 아쉬울 때 기도만 하면 즉각 응답하는 그런 분이기를 원해요.

나는 열심히 기도했는데 내 아이가 대학에 떨어지고, 기도도 안 한 옆집 아이는 명문대에 합격했을 때, 질투가 발생하지요. 마치 가인의 제사는 안 받고 아벨의 제사만 하나님이 열납해서 가인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아벨을 죽인 것처럼. 이것이 사랑을 못해서 그래요. 사랑은 내 손에 잡히지 않고, 상처만 남기고 떠나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사랑이 되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듭니다.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결혼도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부부가 없기에 부부 싸움을 할 일도 없어요. 이 땅에서 천국을 맛 본 자중에는 스스로 고자가 되어 결혼을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지요.

결혼해도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 아니기에 온전한 사랑이 아닌 것에 메여서 주님의 온전한 사랑의 기쁨을 훼손할 이유가 없다고 결혼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 정도 되는 분이 하면 좋은데, 좋은 상대 만나려고 욕심 부리다가 결혼 못한 노처녀, 노총각이 ‘나는 주님만 사랑해!’라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 사랑은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상처를 냅니다. 23절에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멀쩡하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그 아버지 야이로는 상처를 입었지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했지요. 큰 상처입니다. 방랑했지요. 얼마나 큰 상처겠어요? 그 상처로 말미암아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데, 상처를 아는 마지막 테스트가 뭔가 하면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에서는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의미는, 아브라함처럼 되지 않으면 믿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집에 있는 아들을 아브라함처럼 다 제물로 드려야 구원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신 분이 성도 누구에게나 그런 상처를 주신단 말이지요. 본문에 보면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어요. 그래서 야이로는 주께 간구합니다.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라고.

야이로에게 이런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까? 이런 요구를 한다는 것은, 내 딸이니까 내 딸을 건강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왜곡된 모습이죠.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이 귀신 들렸다는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몰라요. 그냥 보통 사람입니다. 남의 딸이 아니고, 내 딸이 죽어가고 있어요.

내 딸은 내게 속했고, 내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뭔가? 예수님이 병도 고치고, 능력도 행한다고 하니까 그 예수님께 찾아가 ‘내 딸을 살려주세요.’라고 간구한 거예요. 이런 마음 자세가 자기 시선이죠. 자기 시선은 자기 현실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 현실은 다 눈에 보입니다. 보이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나는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런 식이지요.

그래서 십자가는 나의 믿음을 부숩니다. 예수 믿는 것을 없애는 것이 십자가 능력이에요. ‘네가 뭔데 날 믿어? 날 믿지 마! 마귀에 속한 인간이 왜 날 믿어?’ 이게 주님입니다. 믿음이란 주체가 바뀐 상태를 말합니다. 주께서 일을 할 때 믿음이지 내가 시작한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같은 원인을 넣으면 동일한 결과가 나올 때 이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식사량을 줄이고 하루에 30분씩 운동하면 뱃살 빠집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보세요. 뱃살 빠졌잖아요. 원인을 집어넣으니까 반드시 동일한 결과가 나왔어요. 이게 과학이기에 인간은 ‘내가 예수 믿으면 반드시 구원 받는다.’고 합니다. 이게 과학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행함을 집어넣으면 반드시 천국 가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지요. 이건 과학이기에 성령이 필요치 않아요. 성령 없이도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니 얼마나 반복음입니까? 내가 믿어 내가 천국 간다는 것은 신앙이 아닌 문화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문화생활 했지요?

문화생활은 원인을 집어넣으면 결과가 나옵니다. 충분히 납득되고 이해가 되지요? 교회 목사가 이런 사례를 설교시간에 나열합니다. 감사헌금 해서 복 받은 것, ‘장로가 십일조 안 해서 벌 받아 사업이 망했는데 회개하고 십일조 해서 복 받았다.’ 이런 이야기. 다 사기입니다.

반대 경우가 더 많아요. 십일조 해서 망한 사람이 더 많다니까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리새인이잖아요. 그들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척을 당했어요. 기독교 방송에서 간증한다는 사람들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 충성해서 복 받았다는 소리입니다.

혹시 간증하는 분 중에 십일조하고, 윤리 도덕적으로 살다가 저주 받았다는 소리 합니까? 방송국에 초청 받아 간증할 기회가 생긴다면 제대로 된 간증을 하세요. 누가 불러주면 그것은 주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뿐이잖아요.

그렇다면 구원 받는 시선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 없고 주님에게서만 나오지요. 따라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허수아비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이 어디서 ‘갑’질을 해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교역자가 당회장 눈치를 본다는데, 저는 눈치 보는 부교역가 더 미워요. 얼마나 신앙이 없었으면 당회장 눈치를 봅니까?

회당장이 지금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은 게 아니에요. 다만 주님께 걸려든 거예요. 자기 딸이 나았다고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러나 딸이 낫고 난 뒤에 생각해 보세요. 차라리 딸이 아프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괜히 병 주고, 약 줬다는 생각이 듭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제일 부러운 사람은 건강하게 병원을 청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퇴원하면 아니겠지요. 어쨌든 회당장은 어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심각한 상황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상처라고 했습니다. 해결책도 없는 무능한 인간들이 모여서 위로하는 친목 단체가 교회입니다. 해결책도 없는 인간들이 모여서 마치 자신들 때문에 교회가 커진 것처럼 위로를 받는 자들이 교인들입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가 되어야 해요. 공동체에서 쫓겨났다고 신자가 아닙니다. 쫓겨난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동체를 만드는데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건전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다.’ 이것이 지방교회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해도 공동체가 안 됩니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어디 있든지 주님이 주체가 된 사람입니다.

어쨌든 주께서 낫게 해 주면 좋겠는데 그 뒤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어요. 25-27절에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12년 된 이 병자는 야이로와 대비가 됩니다. 야이로는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내 딸을 낫게 해 주세요.’라고 했지만, 혈루증 환자는 자신이 너무 더럽고 미천한 존재이기에 주님께 누가 되지 않게 하려고 뒤로 와서 주님 옷에 손을 댔을 뿐입니다. 이 여인은 야이로보다 예수님의 주체 됨에 훨씬 가깝지요?

모든 사건들은 십자가를 함유하고 있다고 했는데, 십자가 사건 후 예수님은 공중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 전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이야기고, 우리에게 반복되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데 딸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마가복음 5장이 나의 현장이 됩니다. 이건 허공에 있는 창에서 나를 가지고 하나님이 마가복음 5장의 계시를 펼쳐 보이시는 겁니다. 그래서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창조하십니다.

완성된 말씀을 가지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말씀을 창조하십니다. “너는 인간이 아니고 말씀이다.”라고. 그래서 성도는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근거로 이런 일이 터졌는가?’를 말씀으로 확인하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자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모든 행동이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적용시키는 증인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12년 된 혈루증 환자는 십자가의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는 오직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 사실을 혈루증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십자가 안에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을 때 이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지요. 제가 어제 아내에게 온 카톡 동영상을 봤는데, 세 살 된 쌍둥이가 할머니 흉내를 내는데 찬송가를 불러요.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에 ‘주여!’하고 부흥회 흉내를 내는데, 그 장면을 보면서 제 아내는 우겨 죽겠다고 난리에요.

부흥회 흉내를 낸다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몸이 아파봐야 돼요. 내 몸, 내 재산, 내 젊음이 다 나의 것인데 이 나의 것에 상처가 나야 돼요. “누가 내 것을 건드려? 감히 누가 내 인생에 흠집을 내. 누구야, 마귀야?” 주님은 “네가 바로 마귀다.”라고 하십니다. “네가 왜 화를 내는데?”

상처가 났을 때, ‘주께서 상처를 회수해 가시는구나.’ 욥에게 상처를 주시고 그 상처를 회수해 가시잖아요. 가져가면서 잊었던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혈루증 여인이 어떻게 주님께 처신했는지 보게 되지요. 당당하게 예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몰래 뒤에서 옷을 만졌지요. 그 때 예수님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하셨어요.

누구의 믿음입니까? ‘네 믿음.’ 그러면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떻게 해서 생긴 믿음입니까? 12년 동안 안 아팠으면 나올 수 없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12년 동안 아프게 하신 그분이 믿음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일을 겪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것이 총괄적으로 십자가를 믿게 하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했지요.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십자가가 모든 것의 마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이 결국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 일어난 거예요. 오늘 치과에 간 것도 반드시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치과에 가서 의사에게 들은 말이 “혀에 힘주지 마세요.”라는 거예요. 일부러 혀에 힘을 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입을 벌였는데 이가 아프니까 자동적으로 혀에 힘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의사가 혀를 강제로 눌러요. 주님 앞에 우리가 살아갈 때 자꾸 우리의 행함이 나옵니다. 이 행함을 성령으로 꾹 누르면 그 때 십자가가 보입니다.

‘아, 십자가를 내 행함으로 가렸구나.’ 그런데 행함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과거를 염두에 두니까 행함이 나오는 거예요. ‘과거보다는 더 나아야 해.’ 이런 생각이죠.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의 행함이 상관없다는 것을 알려주면 ‘아, 내가 십자가를 잊어버렸구나.’ 혀에 힘을 줬는데 강제로 혀를 누르니까 ‘내 행함이 불필요한 것을 또 잊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예상 외로 일이 잘 풀릴 때는 십자가를 잊어버려요. 내가 행동을 잘 해서 복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습니다. 이것은 ‘죽은 아들 때문에 네가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란 자격으로 미리 앞당겨 이 땅에 잠시 등장한 거예요.

아들을 낳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아버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가 아니라, 이삭이 아브라함을 낳는 거예요. 마치 예수님 때문에 마리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왜냐? 예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니까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주를 위하여 지어졌습니다.

5장 30절에서 예수님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하십니다. 이게 지금 예수님이 연기하시는 겁니까? 예수님은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 나간 것을 자신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12년 혈루병 앓은 여인은 아무것도 아닌 비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이 자기 시선으로 보니 혈루병 여인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내가 잘났다’는 사람은 비켜가고 우리들이 보기에 못난 사람을 찾아갑니다. 타인은 나에게 환원되지 않는 자입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은 이미 나에게 환원된 사람이에요. 시시해서 보기도 싫어요.

그런데 내가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람, 영원히 나의 것이 되지 못할 사람을 제자들 앞에 주님이 세웁니다. ‘내 옷에 손을 댄 사람이 누구야?’라고 물으니까 제자들은 뻔한 대답을 합니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주님은 지금 자기 몸에서 능력이 나간 특수한 사람을 찾습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이 특수자의 신분에서 특수자를 위해 죽는다는 사실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왜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보통 사람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배반했잖아요.

베드로에게 특수자는 권력자들뿐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보다 못해 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된 자가 체포하는 자를 구원할 능력이 있는 자란 사실을 베드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보다 못한 분이 나를 구원하실 분이란 것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나보다 못한 분으로 인하여 내가 구원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보다 못한 존재보다 나는 더 못난 존재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나의 자리인 것을 잠시나마 깨닫게 됩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한 형편에서는 병원에서 일하는 청소부보다 더 못한 존재인 것을 인정해야 돼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음을 받아들여야 해요. 비록 저 여자는 청소부이지만 건강에 대해서는 나보다 월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우리교회도 의사들이 있는데 어제 저희교회 성도님 병원에 가서 공짜로 링거를 맞았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그 여 성도가 내과 전문의인데 자기도 다른 내과에 가서 치료중이랍니다. 자기 병원에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요. 내시경을 한 달에 200건 넘게 한답니다. 그러니 그 의사가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과 의사들끼리 서로 상담하면서 치료를 한답니다. 항상 나보다 못한 소자가 우리에게 십자가를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시하는 자보다 더 무시당한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뜻이 함유된 것이 바로 12년 혈루증 앓은 여인입니다.

이 여인의 병이 나았지요. 그 이후 예수님은 회장당 집으로 가지요. 그런데 회당장 딸은 이미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불고불과 난리가 났습니다. 이미 죽었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시니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사실은 예수님이 비웃음을 살만한 요인을 제공하신 거지요.

죽은 아이를 잔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경험한 바이지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제대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방송국에서 초청하거든 방송국 PD가 비웃는 말을 하세요. 시청자가 비웃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복음 전한 것입니다.

비웃지 않고 여러분을 존경한다면 뭔가 잘못 된 거예요. 비웃음을 당하도록 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아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술어가 달라야 합니다. 주어 뒤에 오는 술부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술부가 와야 돼요.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복음을 이미 들었잖아요. 본문을 보면 어떤 설교가 진행될 것인지 예상을 하는데 그 예상을 비켜가야 해요. 그 설교를 비웃고 다시는 그 설교를 듣지 않겠다는 사람이 생겨야 해요.

그런데 우리 교인들은 약아서 ‘저는 이 설교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압니다. 그 잘못된 부분은 목사님이 채워주세요.’ 이렇게 나오니까 저는 그 부분을 채워줘야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 말고 다른 것으로.

죽은 자를 향해 ‘잔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용어입니다. 그런데 죽은 자에게 다 ‘잔다’고 하지는 않아요. ‘잔다’고 하셨을 때는 예수님이 반드시 깨워줄 자라는 말입니다. “주님 만나기 전에는 영원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소급에서 처음 죽은 것도 죽음이 아니었고 잠자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님 오기 전에는 ‘잔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을 몰랐는데 주님이 등장해서 잔다고 하시면 자는 것이고,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누가 비웃어요?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모든 유대인들이 다 비웃었지요. 주님이 비웃음을 유발하는 말씀을 계속 하셨어요.

사람들의 관심사는 죽은 야이로의 딸이 어떻게 사는가, 죽은 나사로가 어떻게 사는가 이 점에 관심이 있어요. 그런데 관심 둔다는 자체가 결국 예수님께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야이로라는 동그라미 속에, 이것이 야이로의 현실입니다. 야이로의 시선으로 봤을 때 딸이 죽었습니다. 안타깝고 괴롭지요.

그런데 이 경계선에 누구를 초청했습니까? 예수님을 초청했지요. 야이로는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예수님을 초청하는 순간 이 경계선이 예수님이 주체가 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현실에 예수님이 잠시 도와주러 온 것으로 생각한 거지요. 이 야이로의 오해는 오늘날 우리들의 오해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당 증축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합시다.” 이게 무슨 뜻입니다. 교회 증축은 자기들 현실이고, 여기에 예수님을 초청해서 자기 뜻 이뤄 달라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있는데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진짜 ‘역사하는 힘’은 이 경계선 자체가 인간의 문젯거리인데, 이 문젯거리를 구겨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이 종이가 자식이 가져온 성적표라고 한다면, 무서운 엄마는 성적표를 보고 자식에게 “회초리 가져 와!”라고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엄마는 성적표를 찢으면서 “학교 가지 마!” 이렇게 나옵니다. 이 때 자식은 놀라지요. 부모님이 자식을 교육할 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얘들이 주체잖아요. 그들이 예상 못할 술어를 달아줘야 얘들이 겁을 냅니다. 그런데 얘가 예상하기를 1) 회초리로 때릴 것이다. 2) 화를 낼 것이다. 3) 엄마가 실망하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이처럼 얘들이 예상하는 범위 내에서 엄마가 행동하면 엄마는 얘들 손아귀에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4번까지 번호를 제시하면 엄마는 5번으로 답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상 못하는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남편이 술 먹고 놀다가 새벽 3시에 귀가하면서 예상을 합니다. 아내가 화를 낼 것이다. 이불 뒤집어쓰고 못 본 척 할 것이다. 나가라고 고함을 칠 것이다.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아내는 뭘 해야 하는가? 남편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큰 충격을 받을 때 그 효과는 30년 갑니다.

왜 아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남편을 사랑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네 인생은 네가 살아라. 내 인생은 내가 살게.’ 이런 식이지요. ‘우리 피차 선은 지키면서 살자.’ 이렇게 나오지요.

주님은 ‘잔다’는 표현으로 야이로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자들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들은 비웃었지요. ‘죽은 것이 확실한데 잔다고?’ 이 때 주님은 어떻게 합니까? 잔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깨웁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명하셨습니다. 소녀는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후 소녀와 야이로, 그리고 그 광경은 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 전부터 이 딸과 이 집은 예수님께 속한 가정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로의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아쉬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특이한 사건들을 유발시켜서 그 사건의 의미를 주님이 해소해 가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의 일은 없고 모두가 주님의 숙제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 숙제를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모든 것이 완료되었는데, 이제 그 절차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일이 십자가를 위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일이 십자가 중심이라는 간단한 공식만 우리가 알고 있었는데, 이것이 현실로 다가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5. 8. 12. 08:24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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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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