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사기 강해 : 의심의 시절) 강의영상 전체보기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사기 강해 : 의심의 시절) 강의영상 전체보기
이름 : 최지영(IP:221.166.133.152)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목: 의심의 시절
강사: 이근호 목사
영상 전체 보기(유튜브)
#1 수상한 통일성
-
#2 해석오류
-
-
#3악의 구체성
-
#4 이유없는 구원
-
#5 자아의 틈
-
-
#6 신앙의 증거
-
#7 밤의 소리
-
#8 내부 충돌
-
#9 허무한 명분
-
관리자(IP:61.♡.138.77)
15-08-09 12:15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수상한 통일성]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누가 시킨 것인지 모르지만 주의 손아귀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음을 도리어 우리의 행운으로 여기고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조차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작부터 끝까지 이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 저희들을 주관하시고 장악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보려는 하나님의 계시는 사사기라는 겁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그 다음에 사사기가 나옵니다. 사사기의 내용은 등장인물이 많다는 거예요.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들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외우는 것도 힘드네요. 많은 등장인물들, 이들이 왜 등장했는가, 왜 등장해야 했는가?
그것은 구원자 없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등장한 거예요. 구원자가 아니면서 구원을 발생시켜주는 그런 존재가 됐어요. 자기들은 구원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남을 구원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구원이 되었어요. 그러나 사사들은 압니다. 누가 나를 떠밀었어요. 누가 나를 떠밀었습니까? 제가 원치 않은 일에 왜 저를 집어넣어요.
그런데 막상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잘못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유 있는 구원. 분명히 구원할 때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날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에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의 위험요소, 선악과를 삽으로 파내야 돼요. 파내든지 전기철망을 삼중으로 치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자꾸 이유를 뒤에다 갖다 대지 마세요. 마치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구원한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왜 안 되느냐 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걸 날 사랑해서 누군가 보내셨구나. 그분이 나의 구원자야. 그렇게 이야기하시는데 막상 구원자가 이야기합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함부로 구원받았다고 니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럴 때 우리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은근히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주님, 저 구원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잖아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 이야기한 사람이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할 것 같으면 애초에 에덴동산부터 추방하지 말아야 돼요. 한 번 실수, 인간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 그래, 실수했어? 내가 관리를 잘못했으니까 에덴동산에 그냥 살아. 선악과는 또 만들면 되니까. 선악과, 그게 뭐라고 그것 따먹었다고 해서 영원히 추방시키고. 더더군다나 납득이 안 되는 것은 혹시나 에덴동산을 찾아올까봐 아예 에덴동산에 못 오도록 적극적으로 거부하십니다. 오지 말라고. 천사로 하여금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스물네 시간 보초서서 생명나무 근처도 못 오도록 에덴동산 바깥으로 차버렸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 취지의 반복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사사기의 내용이 뭐냐고 물으시면, 이스라엘 자체를 反, anti지요. 안티이스라엘로 바꾸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스라엘로 바꾸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공격하는 주체로 바꾸는 것이 사사기에요. 이걸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을 교회로 바꾸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교회가 진짜 참된 교회를 부수는 안티 교회로 작용하라고 각처에 허락하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은 그 교회에 다니고 있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은 붕괴시키는 작업에 우리가 들어온 거예요. 이게 사사기입니다. 이걸 처음부터 모르면 사사기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반대말이 구원 안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의 반대말은 구원이라는 것은 다 짓밟을 거야. 이게 구원의 반대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원은 반드시 구원을 훼방하고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때만 구원이 자기 모습을 뾰족이 내밀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반드시 구원 자체를 훼손시키는 세력이 있을 때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돼있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끝나면 여러분이 그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만 끝나기 전에 가시는 분들이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개인은 왕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에요. 모든 개인은 왜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돼,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게 개인이에요. 왕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왜 왕이 있어야 되지? 만약에 누가 왕을 주게 되면 그 왕을 준 것으로 인하여 그렇지, 나는 왕이 필요 없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말을 끝까지 들어야 됩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나한테는 왕이 필요 없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면, 누가 나에게 왕이라고 소개할 때 당신이 왕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나는 왕이 필요 없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증명이 된단 말이죠. 다만 왕을 이용할 뿐이지. 내가 아쉬운 것, 못하는 걸 채워줄 수 있는 왕을 하나님이 고맙게도 보내주셨구나. 그럼 왕을 통해서 구원을 이뤄봐? 그리스도란 뜻이 왕이란 뜻이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그 왕 덕으로 내가 천국 가서 구원받으면 되겠네, 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거예요. 자기 소견이에요.
사사기 마지막에 왕이 없으므로, 라고 했기 때문에 왕이 없다는 증거가 자기 소견대로 했거든요. 자기 소견과 왕이 있음이 상존할 수 없어요. 같이 있을 수가 없다고요. 그런데 내가 왕이 필요로 한다? 이건 상존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왕이 있어야 되지. 내 힘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아. 나는 죄인인데. 죄인이기에 천국 못 가는데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면 나는 왕에게 복종하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본인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티 이스라엘이란 절차를 안 거친 것이 돼요.
IMF, 이 단체의 약자는 모르겠지만 이 단체가 영화에 나옵니다. [미션인파서블5]에 나오거든요. 이 단체가 스스로 이 단체를 함몰시키는, 스스로 뭉개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포기하고 철회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배후 조종하는 기록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교회의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가 느끼도록 그렇게 하는 조치, 그게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의 신으로 나왔지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소견이라는 항아리에서 그 우물에서 아무리 노력해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나는 자기 십자가 졌다는 것도 자기 생각이거든요. “주여, 저는 저를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뭘 얻고자 하느냐?” “많은 걸 얻고자 하는 게 아니고 구원만 주시면 ....” 그게 바로 주께서 쫓아내신 취지에 안티, 반대로 작용하는 겁니다. 추방시킨 주님의 조치가 옳지 않았다는 거죠. 주님이 옳지 않으니까 나라도 옳아야 되죠. 구원받고자 하는 나는 옳고 그런 나를 구원하지 않는 주님은 무조건 옳지 않은 것이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대든 것이 될까 겁이 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또 묻지요. “네가 내가 왕인 줄 믿느냐? 그걸 믿어서 너한테 이익이 뭐냐?” 혹시 구원될까봐. 또 마찬가지야. 결국은 아무리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를 논해도 나의 나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때 누가 타이밍 맞춰서 해답주시면 좋은데? 제 강의 많이 듣는다고 소문난 장로님? 벗어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되지요? 안 벗어나면 되지요. 이게 구원의 시작인 거예요. 성경은 우리 자신을 되비춰보는 거예요. 남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딱 나네. 이러면 깨끗하게 문제가 끝나는 거예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왜 그들은 자기 소견대로 했을까?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이 구원되고 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거든요. 따라서 그들은 잘 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으면서 어려울 때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자를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시도와 그러한 노력을 다했는데 이스라엘은 안티이스라엘로 변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라고 그건 차마 말 못하지요.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망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을 우리가 수긍하기에는 아직도 우리 자신에게 애착과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구원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기 때문에 이유를 달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해서 유명한 구절 다 동원해서 무조건 이유를 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유를 붙였던 자들이 메시아를 죽였다는 사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겸손한 사람 아닙니다. 다 합리적으로 따지고 다 알아보고 모든 걸 앞뒤로 견주어서 너는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그것도 투표해서 시나고게 72명의 국회의원들 모여서 투표해서 결정내린 겁니다. 누군가 아니라고 했으면 반대가 있었을 텐데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열두 제자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들도 ‘예’라고 했을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강의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갔어요.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만 남아있어요.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내 구원과 연결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렇게 연결되는 가운데서 최고 중요한 것이 빠져버렸어요. 걸림돌이 빠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빠지고 그냥 우리가 아는 사랑 개념,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란 개념으로 마주쳐서 “하나님, 좋은 사랑 실현해보시지요. 값없이 주신다고요? 멋진 사랑이네. 저는 그런 사랑 원했습니다. 저는 긍휼을 원했습니다. 됐지요? 됐네. 거래 성사됐습니다.” 이러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데 되면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의 걸림돌은 이미 사라졌어요. 십자가가 사라졌어요. 십자가를 치워버렸습니다. 십자가를 우회했습니다. 돌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지요. 그들 나름대로 한 신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낮춰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온갖 분에 넘치는 행동까지 다 한 사람들이에요. 우리보다 더 멍청해서 주를 죽게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표를 던졌을 겁니다. 그들의 결정에 우린 찬동했을 겁니다. 왜? 그들이나 우리나 개인의 소견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버리려면 그냥 버리지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라는 표상으로 이스라엘을 찾아왔느냐? 이스라엘이 원래 없던 나라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나라라는 게 없어요. 누가 만든 나라냐 하면,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이루는 하나의 마당놀이로 사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제가 죽 이어나가겠습니다. 애굽 나라뿐이었습니다. 애굽+이스라엘, 이런 혼용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요. 애굽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면서 이스라엘이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겁니다. 이 사건이 밤에 이뤄진 사건이에요. 밤입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인간이 영향력을 줄 수 없는 모든 인간이 잠자던 그 밤, 새벽 2시 40분인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 밤, 인간의 활동성이 중지된 밤에 일어난 사건으로써 이스라엘이 나왔어요.
그러면 밤은 뭐냐 하면, 낮과 낮을 중간에 절단시키는 겁니다. 낮과 낮을 우리는 연속성으로 보거든요. 연속성의 중간을 끊음으로써 시간적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달력이 바뀌어요. 그게 4월인데 1월로 바꿉니다. 그것도 밤부터 시작해서. 유월절이 원래 밤부터 시작해요. 해지고 난 뒤에 유월절 시작되거든요. 밤부터 시작된 나라는 밤으로 돌아가야 돼요. 밤은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고 거기에 들어설 수 없는 시간적인 낯선 영역이에요. 그게 바로 얍복 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놔라. 해가 뜨니 내가 사라져야 되겠다고 하죠.
이것을 무한한 유한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그냥 넘어갑시다. 하늘나라는 경계는 있지만 한계는 없어요. 어떤 요리사가 요리하는데 보통 채소로 몇 가지 집 반찬을 만들었어요. 분명히 만들어진 요리와 다른 재료 사이에 경계가 생겼지요. 접시에 담긴 것은 요리고 다른 건 요리가 아니잖아요. 경계가 생겼는데 맛을 보니까 무한한 맛이라. 세상에 이런 맛이! 먹으면 먹을수록 무한적인 맛이 나와요. 이게 기드온 삼백 명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축소했는데 더 깊어진 것, 삼만이천 명 왔다가 삼백 명 남았는데 더 깊어졌어. 그게 왜 그런가? 그건 사건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최소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소한도로.
지금 표정들 보니까 니가 언제까지 모르는 소리 하는지 보자, 이런 식인데 계속해서 모른 소리할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A에서 B로 변할 때 과학은 A 포착하고 끝나고 난 뒤에 B 포착합니다. 그래서 A가 원인이고 B를 결과라고 합니다. 이게 실증적 의미이론이라고 하는데 그건 몰라도 되고요. A에서 B로 변해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 뭘 놓치느냐? A에서 B로 변하는 변화 자체를 언어로써 표현을 못해요. 나뭇잎이 노랗다. 노랗구나. 나뭇잎이 푸르다. 푸르구나. 가을 돼서 노랗다. 노랗구나. 가을이 되었네. 이건 되는데 언제부터 노랗게 달라지는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의미체계는 언어체계로 합치되지 않아요.
그래서 언어는 뭐냐 하면, 지금까지 한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말인데, 언어는 중지다. 언어를 따라붙다가 ‘푸르스름’은 안 돼. ‘푸릇푸릇’ 그것도 아니야. 합치되지 않아. 언어는 결국은 헉헉거리다가 정확하려 하다가 포기하고 중지될 때 그게 언어에요. 여러분, 교재 읽어봤습니다. 헉헉거리면서 여기까지 올라온다고 읽어볼 시간도 없었지요.
언어가 현 사실을 표현할 수 없어요. 한계가 있고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인간들 소행이 나쁜 것은 합치되지 않는 언어가 부정확하고 옳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 언어로 맞춰놓고 그 다음에 언어가 상당히 잘 먹혀들어 가거든요. 그걸 나라고 일방적으로 거기다 갖다 붙이는 반칙을 범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으면 신자가 된다. 예수 믿고 신자가 되는데 몇 분 걸렸습니까? 이걸 언어로 사용하지 못해요. 변화될 때 느낌이 어떻고 체온이 몇 도 올라갔으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구원파 가니까 11월 3일 오전 7시에 했습니다. 정확히 7시입니까? 7시 7초였어요, 7시 6초였습니까? 7시 6초였나? 6점 몇 초였지요? 그게 안 돼요. 왜냐하면 시간언어가 동원된 이상은 이건 비겁하게 하다가 안 돼 안 돼 도저히 안 돼. 이미 자기 한계에 들어가서 포기했잖아요. 포기했으면 그 단어를 자기한테 적용시키면 안 되지요. 이미 실패한 걸 도로 자기한테 가져오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 믿으면 성도라고 하니까 성도라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거든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 그건 마음에 더 드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걸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 기록된 걸 좋아하라. 저건 나 이어야 해. 그게 좀 바뀌면 저건 나야. 이게 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다 그렇게 나와요. 안티입니다. 주님에 대한 안티조직이에요. 이 소리 듣고, “목사님, 저는 아닙니다.” 하지 마시고 안티면 그냥 안티라고 받으면 그게 구원의 현장이에요.
사사기는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로 저분이 구원자라고 오해케 해서 결국 이스라엘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열두 지파를 구성하는 띠라는 게 있는데 그 띠가 레위언약이라는 겁니다. 쉬운 말로 은혜입니다. 쉽게 은혜라고 하지 왜 레위언약이라고 하느냐. 은혜라는 게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와 다르기 때문에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레위언약이라고 한 거예요. 그냥 괜히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다 이유가 있어요. 좋은 게 좋다. 은혜다. 그런 은혜 아닙니다. 레위언약에서 나온 띠로, 레위언약은 모세언약에서 나왔거든요. 모세언약에서 나오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했고 땅을 차지하게 한 거예요.
그러면 모세언약이 뭡니까?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모세언약은 모세를 죽임으로써 구원자 없는, 이유 없는 구원을 모세언약이라고 합니다. 구원자 없는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설쳐도 여호수아는 자기 뜻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모세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을 때 그게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건 모세 때문이야. 우리 가운데서 모세 같은 사람 등장하게 되면 우리 조직은 유지 돼,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안티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대립되는 거예요.
제 이야기는 의외로 쉬워요. 주는 대로 먹으면 돼요. 차린 밥상 떠먹으면 돼요. 그냥 곱게 먹으면 될 것을 엄마는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주셨다. 이렇게 꼭 뒤에 토를 다니까 그게 지금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천국에 넣어줬다. 우리를 사랑해서 천국 넣어준 게 아니거든요. 우릴 사랑했다면 애초부터 선악과를 뿌리 채 뽑아버린다니까요. 식목일 누가 만들었어요? 아예 선악과 빼버려야 돼. 그 위험한 나무를 왜 심어놨어요?
안 믿는 사람들은 맨날 신자에게 묻는 게 뭡니까? 선악과 처음부터 안 심으면 되지 왜 심어놨습니까? 교회 깨나 다니고 집사, 장로 됐다 하지만 그 말에 딱 막히네. 글쎄 말이야. 선악과 왜 심어놨을까? 기껏 배운 요령 중에 하나가 선악과 왜 심었냐고 묻는 자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라고 궁색한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어디서 되도 않은 변명인데
이렇게 볼 때 사사기 전체 내용은 이것 하나로 정리될 수 있어요. 네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라. 인간 보고 인간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이러한 태도는 네가 인간이라는 근거를 다시 한 번 조사해봐라. 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나는 인간이라고 그동안 우기면 살아왔는지 다시 말해서 내가 인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본 적 있느냐? 해보라는 거예요. 사사기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증명해요. 내가 인간이니까 밥을 먹고 이렇게 살아있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살아있는 게 맞긴 맞아? 네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나와요. 소크라테스 같아. 말꼬리 잡고 또 묻고, 또 묻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것 맞잖아요. 내가 인간이니까 인간인데 그게 어찌 증명합니까, 라고 한다면, 방금 그 이야기는 당신이 세운 기준으로 그동안 당신을 속여 왔다는 거예요. 내가 만든 그러니까 일단 뭔가 태어나고 난 뒤에 남들 눈치 보니까 예쁜 아들이야, 예쁜 딸이라고 하니까 내가 사람이구나. 남들이 궁시렁거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괜찮아 보이니까 그것이 나에 대한 주체의 정체성인 줄 알고 그걸 그냥 가져온 거예요. 가져와서 나는 인간이라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있는 어떤 누구도 돌멩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는 인간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증명이 왜 틀렸는지 그걸 사사기에서는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딱 두 자에요. 진멸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편한 말로 토벌한다. 너무 지리산 냄새나지요. 태백산맥 냄새 나지 않습니까. 또는 안 쓰는 용어라서 낯설어요. 이게 적당해요. 전멸시킨다. 왜 전멸해야 되는가? 너한테 나는 전멸되지 않을 근거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전멸 당해야 돼요. 저는 죽으면 안 된다는 이유를 내가 댈 수 없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이고 계속 살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그 이유를 댄다고 하나님, 예수를 동원시킨 겁니다. 이건 진멸용으로 했던 용어를 자기가 살려는 용어로 바꾼 거예요. 그 바꾼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낼 때 그들이 불쾌하게 만드는 구원자를 보낸 거예요. 좀 근사한 구원자 없나. 왼손잡이 말고.
왼손잡이는 통계상 10%에요. 에훗이 모압 왕을 죽일 때 왼손잡이라서 무기 수색에 유리했습니다. 보통은 오른손잡이기 때문에 무기가 이쪽에 차있거든요. 그런데 왼손잡이라서 쑤시기에 쉬웠던 거예요. 옛날에 왼손잡이는 장애자 취급했습니다. 베냐민이 오른손의 아들이잖아요. 정상적인 것은 오른손이지 왼손잡이는 제조날짜가 잘못됐는지 뭔가 제조공정에서 문제가 있어서 잘못된 거예요. 그 잘못된 자가 구원자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거든요.
에훗은 모압에게 18년 동안 통치 받고 80년 동안 태평했어요(3장30절). 삼손은 40년 동안 블레셋 통치 받고 20년 동안 독립했고, 입다라는 깡패는 18년 동안 암몬에게 압제 당하고 기껏 숨 좀 쉰 해는 6년밖에 안 됐어요. 입산는 7년이고, 둘라는 23년이고, 야엘은 22년이고, 엘론은 10년이고, 압돈은 8년이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사들끼리 모르는 사이에요. 웃기지요.
그걸 저는 서울 마포구의 싱크홀이라고 합니다. 도로에 구멍이 생겼는데 서로 우리가 몇 년 몇 월 몇 시에 도로에 구멍을 내자고 한 게 아니에요. 무작위로 구멍이 뚫린 거예요. 구멍이 뚫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은혜가 배수구로 물 빠지듯이 은혜가 빠지고 말았어요. 전에 섬이었는데 섬이 아니라 육지로 이어졌어요. 은혜가 빠지니까. 은혜가 쏙 빠지니까 등장한 것은 뭐냐? 그들은 왕이 필요치 않는 개인적인 존재자들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나님을 거론 안 했습니까? 열심히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출처가 달라요. 출발점이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안티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사기가 무슨 내용입니까? 딴 소리 말고 짧게 이야기해 달라. 악의 배양지, 악의 비닐하우스, 악의 시설물. 온도가 4,50도나 올라가는. 제가 올 때 성주군 수륜면으로 왔거든요. 들에 보면 시설물, 비닐하우스 있지요. 갇혀 있으면 마음껏 악이 거기서 숙성하는 곳, 그게 사사기입니다.
그러면 구원자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구원자가 그들을 구원했잖아요. 구원 안 했습니다. 구원 안 했는데 그들을 10년 동안 해방시켰다는 그런 이야기는 왜 나왔느냐? 해결 되지 않는 구원자를 보낸 겁니다. 개인이 소견에 보기에 옳았다는 그 바탕이 있는 이상은 이건 사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도 해결이 안 돼요. 누가 구원자가 되도 해결이 안 돼요. 이미 바탕은 나를 위한 구원이어야 참 착한 하나님이란 인식이 벌써 발생됐기 때문에 어떤 구원자를 보내도 그건 구원 안 됩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 강의 제목을 [수상한 통일성]이라고 정했어요. 통일 됐는데 굉장히 수상해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저주받으라고 끝내지 왜 이스라엘을 없는데서 따로 만들어냈는지 그 이야기를 계속 해봅니다. 이스라엘을 만든 목적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보면 혼돈에서 질서가 만들어지잖아요. 왜 만들었지요? 혼돈 그냥 두지 왜 질서를 만들지요?
혼돈에서 질서, 이 말은 내가 왜 있지,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 내가 왜 있지? 이 말은, 내가 없어도 되는데 내가 없다고 해서 태양이 주저앉습니까? 달빛을 잃어요? 그건 예수님한테나 해당되지 우리는 해당 안 되지요.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햇빛은 빛나고 있습니까? 유명한 팝송 있잖아요(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왜 태양은 빛나고 파도는 치느냐 이 말이죠.
이별은 만남보다 훨씬 쉽지요.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 이별은 만남보다 아주 쉽지요. 이게 왜 쉬우냐 하면, 사랑은 억지기 때문에 그래요. 좋은 말 할 때는 적으세요. 사랑은 억지에요. 혼돈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우리가 사는 건 힘들어요. 그런데 뭐가 쉬우냐 하면, 내가 죽는 게 쉽다니까요. 나로서는 어렵지만 나한테 원한 가진 사람은, 저 인간 죽여 버릴까. 저쪽에선 쉬워요. 지금도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20년 믿고 30년 믿어봐야 한 순간에 나, 예수 안 믿는다. 그동안 사랑보다 이별이 훨씬 쉬워요. 한 순간에 삐끗하면,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난 예수 안 믿습니다. 그동안 믿는다고 얼마나 용을 썼고 변비 걸릴 정도로 애를 썼지만 그냥 모든 걸 내려놓으니 그게 하나님 안 믿는 게 그렇게 편한 걸. 여러분 다들 그 기분 아시지요. 하나님 안 믿는 즐거움을 편함을 아시잖아요. 오늘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 믿지 마세요. 어색해요. 우리 본성에 안 맞아요. 그냥 본인만 믿으세요. 줄곧 본인만 쥐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직 나만 사랑하세요. 그게 우리를 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것은 악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악아, 기어 나와. 창조마저 창조 자체를 붕괴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증명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자기성을 파괴함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는 겁니다. 파괴당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할 줄 모르지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못하잖아요. 남은 다 죽여도 난 안 죽잖아요.
[매드맥스] 영화 보세요. 핵전쟁으로 다 죽어도 호주의 사막에 누구 하나 이상한 마스크 쓰고 등장하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가 그리던 진짜 모습이에요. 다 죽어라, 다 죽어. 신격호고 뭐고 롯데고 다 무너져, 다 무너져. 하지만 우리 집은 안 돼. 우리 집 보일러는 안 돼. 그러니까 누가 못 되고 망하고 이혼하면 신이 나. 그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 망하는 재미로.
그래놓고 누굴 믿는단 말이에요. 우리는 누굴 믿은 적이 없어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천국 준다고 하니까 그게 탐이 나서 믿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절대로 우리는 교회 나와도 절대로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계명 만들어낼 수 있어요.
나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 나는 나 외에 누구에게 절하지 않는다. 나는 나 외에 어떤 것도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나만 섬긴다. 내가 쉬는 날이 안식일이다. 부모가 나한테 유산 줄 때만 부모님께 공경한다. 나한테 못 되게 하면 차에 깔려 죽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해. 그건 로맨스니까. 팔계명은 뭡니까? 도둑질. 내가 아쉬울 때 도둑질하면 하나님도 봐줄 거야. 그 다음에 뭡니까? 십계명도 못 외우겠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용납된다. 기생 라합을 봐라. 이런 식으로. 십계명이 뭡니까? 나는 탐심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문자로 안 썼을 뿐이지 이미 우리 속에 그것이 잠재돼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질서에게 악을 발췌해놓고 그 질서를 뭐로 바뀌느냐? 혼돈으로 바꾸면서 왕을 등장시킵니다. 누구냐? 진짜 이 세상을 만든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만드는데 그 나타나는 방법은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것, 이게 하나님의 스스로 자기 파괴거든요.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거기서 포장지 뜯듯이 거기에 진짜 우주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방식, 이 방식을 사사기에서 사용하십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18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해석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 끝에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것은 부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히브리서 1장 10절에 의해서. 그냥 부수면 만든 이유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바꿔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영존할 것이지만 그리스도 외에는 영존 못한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허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드신 분이 만들었다고 하면 될 텐데 왜 꼭 부수면서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한 번 만들어진 것 부수지 말라는 것이 마귀 생각이고, 만들어졌기에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존재증명이라고 했지요. 자기성을 스스로 파괴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파괴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낯설고 인간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그 발언에 대해서 동의할 위인이 없습니다. 전부 다 한 통속이기 때문에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성경을 해석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될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적어볼게요. 영희가 죽다. 또는 같은 말로 철수가 죽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 보기에는 영희라는 개인이 죽는 게 되지요. 영숙이는 안 죽었는데 영희가 죽었잖아. 개인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죽다’를 주사기로 뽑아내봅시다. 죽음이 영희를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나타냈다고 봅시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죽음을 주사기로 뽑아내면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노리는 것이 바로 그거에요. 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너를 이용해서 죽음이 실제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영희 같으면, 나는 살아있고 나는 실제라고 여기지만 진짜로 너의 주인, 너의 왕은 네가 아니고 너를 죽게 하는 죽음이 너의 왕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죽음이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주사기로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우리가 주어부분에 턱하니 건방지게 앉아 있잖아요. 이걸 앞에 세우고 영희를 뒤에 세우는 거예요. 죽음이 영희로 하여금 죽게 했다. 그러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희가 살았다. 사실은 이 말은 성립 안 돼요.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고 하면 안 되고, 계속 사는 생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영희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될 때 피조물들의 다양성은 날아가고 60억 인구는 날아가고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주님이죠) 원리원칙 아래 전부 다 모든 것이 종속되고 묶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책이에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해석할 때도 그것을 거기다 집어넣어줘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단체 하면서 많이들 안 외웠습니까? 시험 치고 하지 안 했어요? 꼭 중요하게 나오는 말씀은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꼭 나오지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그런 구절.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중요한 구절이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데 그건 중요시 하면서 그 앞에 선교단체라는 것이 주어 부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어 부분으로 하게 되면 영희나 철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연적 존재가 돼요. 자체적으로는 존재증명이 안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을 경유할 때 비로소 본래 자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신학교 가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안 하고 싶었는데 주께서 나를 이용하고 싶데. 나는 기꺼이 이용당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만 자랑 되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거죠.
그렇게 주체가 바뀌게 되면 사사기에 나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나? 내가 주체 자리에 왜 있지. 나는 아니야. 나는 주께서 하신 결과 자리에 있어야 돼. 이렇게 옮겨지는 겁니다.
이렇게 바뀌는 걸 해석오류라고 하는데 이런 해석오류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요. 그것은 교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주체 자리를 내놓을 생각을 안 해요. 신이 나한테 뭘 해줄 겁니까? 만약에 내가 원하는 걸 해준다면 저도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뭘 내가 행하면 30배, 60배 약속한 것 주시겠습니까? 내가 30배 받으면 15배 정도는 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 60배 받으면 30배 내놓겠습니다. 100배 받으면 50배 내놓겠습니다. 계산해보는 기라. 200 같으면 100은 남잖아요. 그런 계산은 밝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왜 이런 해석오류가 발생되는가?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문제풀이를 보세요. 국어시간인데 다음 중 지문의 내용과 가장 먼 것은? 1, 2, 3, 4, 5번. 그 아이는 5번이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줄자로 재봤거든요. 가장 먼 것은 5번이란 말이죠. 굉장히 쉬운 문제를. 이게 old perceptions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배웠어요. 얼마나 쉬워요. 이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문이 여기 있고 가장 먼 것은 이거란 말이죠.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 얘 걱정돼요. 시킨 데로 안 하고 분명히 연예인, 배우 한다고 설칠 수 있어. 특이해요.
여기서 해석오류가 일어났지요. 선생이 묻는 질문과 답하는 인간이 서로 다른 지평, 다른 층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층을 이루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층으로 비약, 도약할 수 없습니다. 도약할 수 없으면 저쪽 층에서 와서 건져내면 되잖아요.
[어벤져스]가 왜 생겼습니까? 안 되니까 생겼잖아요. 보통 사람이 안 되니까 힘 센 사람으로 악한 자를 이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아래층, 우리 인간 층에서 은근히 고대했던 바의 연장에 있어요. 누가 나를 구원할 자 없을까? 드디어 왔구나, 흑기사.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기다림이란 비록 내가 못하지만 나의 의미는 한계를 벗어나서 누가 나를 구원해줄꼬, 라고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요 근래 강의하면서 그랬잖아요. 큰 암소가 들어온 이유가 뭐냐? “아빠, 내 마음에 암소 들어왔어.” 아빠가, “암소가 너보다 큰데 네 속에 어떻게 들어가?” 마가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귀신 이천 마리가 청년 속에 들어갔지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귀신이 그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느냐 말이죠. 납득이 안 돼.
이게 왜 암소가 되느냐 하면, 암소에 대한 모든 의견을 나에게서 출현,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동일성이라 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세계와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는 그것이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여호와증인의 표지에 저 푸른 초원이 나오잖아요. 여호와증인들 잔디밭 못 가져서 환장한 것 같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이슬람에 나오는 천국 개념도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사막 지역이 척박했겠습니까? 분수가 나오고(전기세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들판에 골프장이 있고 거기에 옵션 하나 추가된 것이 미인들. 그게 이슬람 교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경전입니다.
이걸 동일성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단절이 없어요. 내가 꿈꾸는 세계가 곧 천국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천국 단어 끄집어내서 이건 내가 원했던 그 세계라고 한 거예요. 베드로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 가면 누가 높습니까? 다들 그렇게 했지요. 주님께서 칼질을 했어요. 잘라버렸어요. 칼질하는데 누굴 동원했느냐? 그 당시 권력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아저씨(하여튼 싸지도 없어), 저 잡힌 예수와 한 패지요. 내가 봤는데.” “왜 이러느냐? 네가 지금 실성을 했구나. 정신 차려라.” 당장 하옥하라고 싶을 거예요. 아가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봤는데 예수와 함께 돌아다녔잖아.” 내가 아는데. 그러니까 베드로가 더 적극적인 부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옆에서 불 쬐던 사람들도 그런가 하여 바라보고 있고 해서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됐냐? 이만하면 됐어? 이러면 예수와 관계없는지 됐어?”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놀아납니다. 타인의 시선에 놀아나는 이유는, 본인한테 눈이 박혀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오후설교에 아예 목을 잘라버려라. 거기다 십자가를 박아 넣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의 머리라는 거예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통제력을 쥐고 있어요.
오후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해요. 너는 나만 바라봐. 저 사람 보지 말고. 너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게 한 얼굴이었어. 내가 너를 보는 시선을 위하여 영희는 그동안 간음했어야 했어. 영희가 죽는 이유는, 죽음이 영희를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시선을 위해서 소경된 자가 필요했고, 간음한 여인이 필요했고, 38년 된 병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는 자가 아니라 구원에 쓰이는 자에요. 구원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제넘게 그걸 요구하지 마세요.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이미 구원의 작업 속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할 뿐이에요. 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바로 내가 보는 내가 관찰해서 정리하는 나의 현실을 나에게 더 이상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지요. 좀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한 것은 악을 구체화한 거예요. 그러면 질서의 중앙부분이 꼭 있어야 돼요. 그 중앙부분에 두 나무가 사이좋게 있어요. 두 개의 나무가 배후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어쨌든 둘로 보입니다.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는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여기서 물이 나옵니다. 생명수가 나옵니다. 생명수가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을 적시면서 에덴동산은 낙원이 되었어요.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두 나무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그 형상은 조건부로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교재 1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그런데 이 의미가 두 개의 층으로 구분 지어진다. 하나는 사법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 혼돈에서 질서로 다듬기 위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혼돈을 방지하고 질서체계를 잡기 위해서 의미가 주어지는 최종적인 것은 법적인 권위가 부여되는 의미가 바로 사법적 영역이에요. 그런데 사법적 영역보다 더 높은 영역이 바로 도덕적 영역이 있어요. 이건 법 없이도 사는 세계, 바로 동양철학에서는 이걸 추구하는 겁니다. 법 없이 사는 것.
법 지키는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람이 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치면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되게 돼있어요. 이게 아쉽지만 인간의 법집행의 한계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 마지막 대목이에요. 바로 베냐민지파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정의롭게 법집행을 했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안 됐어요. 이스라엘이 빵꾸났어요. 한 지파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빨 하나 빠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가 아니에요. 이건 엉뚱한 나라가 된 거예요. 안티이스라엘 된 거예요. 본인들도 당황스러워요.
그러면 베냐민지파가 왜 법을 어겼느냐? 법 위에 뭐가 있다고 했어요? 법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원래 법이란 법 위에 선함이 있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써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이것을 지키면 당신은 선합니다, 라고 하기 위해서 선을 위해서 법이 있었는데 이게 더 연구해보니까 법을 위해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 자체를 무조건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예 중에 하나가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법을 지키기 위해서 행할 선행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왜냐하면 사람마저 착한 일 해놓고 법 지켰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나는 법대로 했다. 너만 법대로 했나. 나도 법대로 했다. 법은 하나인데 선이 너무 많아져요. 하나의 법인데 선이 백 개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까불지 마. 잔소리하지 마. 무조건 법대로 해. 법이 우선되고 선이 밑에 내려가게 됐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법대로 안 하면 착한 게 아니다. 이렇게 돼야 나라꼴이 돼요.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고 하면 나라꼴이 안 되잖아요. 법은 법이고.
만약에 교통경찰이 단속하는데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내려 보니까 “아버지? 웬 일이십니까?” “볼 일 있어서.” “바깥에서 보니까 아버지가 달리 보이네요. 3만 원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3만 원짜리 끊고. 왜냐하면 공무원은 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매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법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취합니다. 아예 법을 무시하는 거예요. 이걸 사다니즘이라 합니다. 나 같으면 법 같은 건 없어. 이게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베냐민지파가 길 가는 나그네의 첩을 윤간해서 죽여 버린 사건. 그 사건도 나쁘지만 그러한 것을 오히려 감싸주면서 그 범인만 내 놓으라는 다른 지파의 요구조건을 무시하고 우리 지파는 우리가 지킨다고 나선 그것, 우리가 법이야. 각자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 거예요. 우린 그리스야. 유로 말 안 들어, 이런 식으로 우리가 법이라고 나설 때 극한 악을 통해서 법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은, 법이 시키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요구하는 쪽이 미안스럽게 하는 것. 요새 메르스 때문에 손 씻으라고 엄마가 무심코 던졌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복수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 소리 듣고 손 씻다가 나중에 손 껍질이 다 벗겨졌어. 12560번 씻어서. 손 씻는데 두 시간 반 걸리고. 그럼 엄마가,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것 안 시킬 게.” 이걸 성화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라는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법 주신 주님이 나한테 미안해야 돼. 너무 착하니까. 어쨌든 이 두 가지 방법은 다 나한테는 법 따위는 없다. 나는 법 위에 있다는 것.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나 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법을 동원함으로 말미암아 법 위에 각자 있다. 각자 소견대로 행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에덴동산은 어떻습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인간 위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어요. 이게 법이냐 하는 겁니다. 이것 법 아닙니다. 법 아닌데 하라, 하지 말라는 뭐냐? 이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법과 약속의 차이점이 뭐냐? 법은 지켜야 될 대상이 있지만 약속은 약속 내린 분이 스스로 알아서 그걸 완료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만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서 구원받는 겁니다. 웬 횡재인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왜 우리가 이걸 왜 몰랐는가? 해석오류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러면 해석오류를 목사들이 똑바로 가르쳐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엉터리로 가르치면 되느냐?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해석을 해도 우리한테 불쾌한 해석은 아예 차단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을 전하면 좇아내 버리죠. 바른 복음이라고 계속 전하자, 그런 것 없습니다. 설교 듣다가도 도중에 나가버려요. 누구 말마따나 허리끈 쥐고 당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고. 우리교회 방식은 그냥 나가시는 방식으로 해요. 중간에. 오늘 낮에도 한 분 나갔는데 더워서 나갔겠지. 에어컨 고장 났으니까. 저는 그렇게 믿을래.
인간 층에서 위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은 의도적인 단절에 의해서 항상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는 이런 사실을 갇혀있다고 이야기해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인간은 갇혀있어요. 이걸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약속은 뭐로 돼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로 돼있지요. 그러면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 안에 갇혀있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갇혀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그냥 죽으면 돼요. 정말 복음 쉬워요. 그냥 죽으면 된다고요. 자살할까요? 누가 사이다에 농약 안 탐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게 벌 받고 있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팔십 넘은 노모가 계십니까?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혹시 여러분 중에 구십까지 사는 분은 복역기간이 길어졌어요. 어떤 사람은 구십삼 세, 백세까지 사는 분이 있어요. 제대가 자꾸 지연되네. 예수님은 서른세 살만 살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는데 우리는 무슨 좋은 날 보겠다고 스스로 말뚝 신청하고 또 말뚝 받고. 진급도 못 하면서 맨날 중사로 있으면서. 그것은 은퇴해서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자기는 살아있으면서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어떻게? 이삭이 죽거든요. 자기가 이삭을 잡았으니까. 이삭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의 본질을 말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해줬습니다. 이삭은 아들로서의 죽음이거든요. 아들이란 말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고 예수님도 아들이라 하는데 아들은 확정된 신분이란 뜻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설치한 아들 사이와의 관계에 그냥 포함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자식이 죽어요. 입다가 객기 부린다고 이번 승리만 주신다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내가 죽이겠습니다. 제일 먼저 누가 나왔습니까? 자기 딸이 나온 거예요. 마치 강인국이 김옥균을 죽인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지요? [암살] 이야기입니다. 매국노 강인국이 자기 딸인 줄도 모르고 쌍둥이 딸을 자기 출세에 방해된다고 내일 결혼하는데 그 딸을 암살하는 그 내용이에요. 혹시 복음에 도움 될까 해서 제가 일찍 봤어요. 과연 입다가 나오네.
입다의 잘못은 뭐냐 하면, 이 땅의 아버지란 위치가 가짜란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진짜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자기가 아버지 행세하려고 건방을 떤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위치나 조직은, 그것은 혼돈스럽기 때문에 무너져야 될 사항이거든요. 모든 질서는, 가정이고 모든 것은 무너져야 돼요. 그래서 사사기의 내용은 국가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정 내부도 다 무너져요. 다 무너지게 하고 뒤에 멘트 하나 달아요.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면 우리 가정은 왜 안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다고 여기는 것은 해석오류입니다. 지문의 내용과 제일 먼 것은 5번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안 무너졌느냐 하면, 누가 내 형제고 모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형제가 있기 때문에 안 무너진 거예요. 하지만 안 믿는 딸, 안 믿는 아들이 있다면 헤어져야 돼요. 물론 누가 어디로 헤어지는지는 제가 장담 못하겠어요. 믿는 아버지 지옥 가고 안 믿는 딸이 천당 가는 식으로 헤어질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왜? 인간의 믿음이란 가짜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가 나의 판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거든요.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관계는 전부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동성애 문제가 나오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데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인가 하면서 우리도 정당한 부부가 되도록 법적인 조치를 내려달라고 자꾸 데모하는데 여성이 여성과 결혼하고 남성과 남성이 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