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강의- 65강 자기 축하 (마 18:21-22)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강의- 65강 자기 축하 (마 18:21-22)

이름 : 주향(IP:222.116.177.93)

자기 축하 (마 18:21-22) 대전강의- 65강

이근호

2015년6월30일 본문말씀: 마태복음18장21-22

(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 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 찌니라

18장 21절 하기 전에요 지난 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을 어떻게 해석 한다고 했습니까? 우리 이제 모이자 모이면 주님이 오신다 이런 게 아니고 주께서 모이게 하실 때 비로소 함께 계신다는 뜻이죠!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사람이 모이자모이자 해서 모이게 되면 자기 이름을 삭제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질 못합니다.

“야! 오늘 누가 모이라 했어? 내가 모이라 했어! ” 자기 이름이 살아 있어 버려요! 오늘 여기 모임 장소 찾아오느냐고 애먹었어! 그럼 자기 이름이 살아 있지요! 모이게 하신 것이 주께서 강제로 모이게 하셨다는 것을 모인 자들이 다 알 때 총무 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회장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겠지요! 그러면 그 모임에서 예수님의 이름 빼놓고 다른 이름을 여기에 거론 할 수 없겠지요! 앞장세워 내세울 가치를 부여 할 수 없겠지요!

그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가 그렇게 되야 하잖아요! 총동원 주일?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 목사가 기획하고 전도사가 총동원 하자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요. 자! 총동원 주일이라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요! 태평양에 고래 살지요? 그렇죠! 태평양에 분명히 고래가 있을 게 어닙니까? 그러면 고래. 총동원 주일 하나 안하나 태평양에 고래가 살잖아요! 살도록 그냥 나두면 되지요! “여기! 고래들 한번 모이세요! 왜 모이는데요? 그냥 살게 놔두지!”

태평양에 살다가 별이나 달에 가서 삽니까? 태평양으로 가서 살아요. 지금 이 세상에 주의 백성이 있잖아요. 그러면 살도록 가만 나두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모이는데요. 살도록 나두면 되는데 하여튼! 정신 나간 부모들이 자꾸 걸핏하면 자식들 보고 모이라해요. 소집한다고요. “야! 야! 보고싶다! ”하고 또 소집하고, 월말에도 너희 안오냐 하고 소집하고 주욱 소집해서 바쁜 애들 또 소집하고 꼭 유산 좀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해요.

안 오면 유산도 없다. 이런식으로 그럼 자식들은 유산 보고 억지로 가고 그 유산을 일찍 나눠주지도 못하고 나눠주면 또 자식들이 천대할 것이고 안 나눠주면 형제들 끼리 싸움할 것이고 아예 안 나눠주면 억지 형태가 되고.. 모이기에 힘쓰라! 하는 명령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모이기에 힘쓰도록 작용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작용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바쁜데도 모이게 된 것은 주께서 모이기에 힘쓰라는 말씀대로 주께서 그렇게 되는 거에요.

거기에 내 이름 집어넣을 수 없는 거에요. 하나도 어렵지 않지요! 성령만 받아 버리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이게 안 받아 놓고 받은 척 하니까 골치 아픈 거에요. 주님과 함께 모였다는 말은 그들이 주님만 쳐다보게 되면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나라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안에서 필수이므로 성령안에서 의와 평화와 희락이라 따라서 하늘나라는 성령안에서라고 했기 때문에 지구안에서 우리나라안에서 파키스탄안에서 이런 지역과 어제와 오늘, 시간과 공간 개념은 예수안에서는 날라가 버리고 없어집니다.

한때 천국이었다던지 그런 소리해서는 안되요. 성령안에서는 한 때 라는 건 없어요. 엘리야, 모세가 그때도 그들은 주님 안에 있었고 변화산에서도 주님과 함께 있었고 그때는 역사 속에 있기 때문에 장차 주님이 오겠지만 막산 그들이 구원 받고 보니까 처음부터 자기가 있을 때 부터 주님은 거기에 활동하고 계신다는 것을 모세, 엘리야는 알지요!

지금 만약에 우리가 죽어서 천국엘 가게 되면 천국 가기 전에 있었던 이곳 대전과 오늘 6/30일도 주께서 함께 만들어 주신 6/30이고 주께서 만들어 준 대전 바닥에 있었던 거에요. 대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있었던 것이고 6/30일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주님 안에 있는 거지요.

시간과 공간은 별 의미 없다고 뺄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의 이름에 효과를 더 깊게 크게 느끼게 되는 것. 그런데 백번 이야기 하는 것이 뭡니까 21절에 베드로가 못알아 듣는데 그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몇 번이나 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숫자가 나오지요! 그럼 숫자 한번 따져 봅시다. 1과 그다음에 2라고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요? 그 다음은 3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계속 나가면 베드로가 몇 번 용서한다 했습니까? 일곱 번이라 하지요! 지금 베드로가 일곱 번이라고 이야기 할 때 베드로는 뭐를 이야기 하냐하면 용서해 주는 주체를 베드로 자신이라고 본겁니다. 그러면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해도 용서는 누구에게서 나온다? 내가 한 번 해주고, 내가 두 번 해주고, 내가 세 번 해주고, 이렇게 해서 내가 일곱 번 해주게 되면 내가 저 사람에게 용서한 게 되겠습니까?라고 한거지요?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자기 것이 절대로 남에게 전달 될 수가 없다했지요! 주일 낮에도 언급 했지만 개체의 속성은 다른 개체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이건 뭡니까? 그건 에 생각이고 주일 낮에 예를 들었던 유튜브 영상이요. 다섯 살 여섯 살 된 애들이 “찍지 마라!” 한 거 있잖아요. 한번 찾아보세요. 애들 둘이 서로 언니하고 동생하고 싸우는데 누가 옳은가 논쟁하며 싸우고 있는데 아버지가 카메라로 찍고 있으니까 “찍지 마라” 한 거에요.

자기 둘 만의 공간에서 그 아인 제3의 시선, 응시를 느낀거에요. 그런데 찍어 주세요라고 안하고 찢지마라고 한거에요. 이 논쟁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나’다 라는 거에요. 이 모임의 영광과 모든 의미는 내가 나한테서 나와서 나에게 회수되야 되는데 (카메라)로 찍어 버리면 찍는 저쪽에 내가 신경써야 되잖아요. 그러면 주체가 아버지가 되어 버리는 거에요. 이것을 인간들은 제일 싫어한다니까요!

누가 주인이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어야 되는데 그 누구에게 평가나 심판이나 누구에게 지시를 받아 버리면 타고난 본성은 내가 주인인데 내가 타고난 본성대로 행동을 못할 때 거북스러운 겁니다. 남자들이 결혼하고 난 뒤에 자기 아내들에게 제일 싫어하는 게 뭐냐하면 잔소리하는 거에요. 제일 싫어해요. 그래서 요새 젊은 남자들은 잔소리 빼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여자. 요새 뿐만아니라 예전에도 남자들은 그랬지만 잔소리 빼놓고 내가 하라는 데로 다 움직여 주는 여자.

옛날 남자들은 그렇게 살았어요. 그래서 옛날 여자들의 덕목 가운데서 최고의 덕목은 절대 투기해서 안되는 것, 여자에게 그것마저 하지 말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남자가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거에요. 내가 시키는 데로 내 마음대로 하고 내가 무엇을 해도 너는 잔소리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옛날 교회에서는 이걸 무엇이라 하냐 하면 돕는 베필, 남자 입장에서는 최고의 돕는 자가 남편이 원하는데로 다 해주되 절대로 남자에게 잔소리 하지 않는 여자 이것을 최고의 베필이라는 거죠. 지난 낮 설교에서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은 여자가한다고 했지요!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마지막 대목 영원한 여성성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모든 남자들이 그러한 고난을 발휘하고 있으니까 당하면서도 본인이 하는것보다도 저 남자의 영역을 내가 어떻게 침범해서 빼앗는 것 남자가 하나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남편의 돈은 다 내 것이다. 빨리 죽어라! 남편 노릇을 하고 싶다는 거에요. 언젠가 여자 목사에 대해서 상담을 많이 했거든요. 여자 목사가 성경적입니까? 여자 목사가 성경적이냐를 따지기 전에 왜 여자들이 목사를 하려는 이유가 뭔지 그건 남자가 하고 있기 때문에 여자도 하고 싶어요. 여자도 축구하고 싶어 하고 레슬링도 하고 싶어 하고 왜 남자가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여자가 하는 일을 남자가 탐내는 것은 똘아이 아니면 변태 아니면 없잖아요. 그렇지요 바다에 성게 따는 것 누가 합니까? 여자가 하지요! 어이는 물에 들어 갈 때마다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 가거든요. 그런데 이걸 남자들이 합니까 안 합니까? 그렇게 힘든 걸 왜 하는데요~ 안 하잖아요. 안 한다고요. 옛날에 20C초 과학에서 조수는 누가 했냐하면 여자들이 했어요. 왜냐하면 너무 꼼꼼하게 하기 때문에 꼼꼼하고 일 자체가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한 반응 보고 적고 안 되면 다시 다른 것, 비율을 따져가며 얼마를 넣어야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가 마치 요리집에서 그 맛을 내기 위해 양념 이것 넣어 봤다가 빼보았다가 지루하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식당에서야 백번도 하지만 과학은 백번이 아닙니다. 천번이고 만번이고 혼자서 계속해요. 페니실린 같은 경우에는 실험을 수 만번 했어요. 그 지루한 일을 누가 했나 여자 조수, 여자들이 아르바이트로 다 했어요.

가발 공장에선 누가 일했습니까? 한 올 한 올 심는 것. 여자들이 했어요. 봉제 공장에서 박는 일 누가 했습니까? 여자들이 한거에요. 그 짜증스러운 일을 남자들은 결과만 챙기지 귀찮은 일들은 여자들이 했다구요. 그래서 여자들이 이젠 우리가 일하는 것은 싫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자 다른 게 뭡니까? 남자들이 티내묜서 하는 것. 그동안 남자들이 얼마나 여자들을 짓밟았습니까? 지금 무슨 얘기하다 이래 되버렸는 데, 잔소리

하나님께서 여성을 붙여준 것은요 강자가 약자에게 구원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가 오히려 여자에게 그렇게 구박했던 여자한테 구원 받는 것.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강한 힘에 피해를 보게 되고 그 피해를 보는 자 속에 그리스도가 계신 거에요. 이 말은 결국 여자는 돕는 베필이거든요. 주체적입니까? 아니면 주체가 아닙니까? 주체는 아니에요. 누구의 그림자이지요.

누구의 보조가 되고 누구의 여자이지 앞에 누구의가 없는 여자는 없어요. 아담의 여자가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서를 그렇게 만드셨거든요. 남자를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그 남자의 여자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체가..우리가 교회를 뭐라고 합니까? 교회를 예수님의 신부, 색시, 예수님의 아내라고 하잖아요 남편은 예수님이고요.

이것이 이사야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의 신부이고 이스라엘의 남편은 여호와인데 왜 너희는 자기의 남편을 버리고 바알에게 찾아 갔는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하지만 바알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빼놓고 다 바알이라고 보면 되요. 바알의 모든 신성이나 내용들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이 바알이라고 보면 됩니다. 인간은 계속 바알을 제조해 내지요.

이스라엘도 그렇게 바알을 좋아했는데 지금 베드로가 뭐냐하면 자신이 용서 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용서한 그것도 문제이지만 지금 베드로가 일곱 번을 거론했다는 것.1,2,3,4,5,6,7 왜 베드로가 일곱 번 이라고 했을까요? 베드로는 이미 알고 있잖아요. 유대인이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몇 일 만에 창조했다는 것. 7일 만에 창조한것을,

그래서 7이라는 숫자, 아까 이야기했지요! 7이라는 숫자안에 하나님의 창조 원리, 원칙이 여기에 실려서 숫자라는 모양새로 이미 기호화해서 하나님의 계시처럼 계시로써 활용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절기도 항상 7이고 그걸 넘어서서 제8일째가 되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그런 숫자에 해당되지요. 여리고성도 일곱 번을 돌고 그렇게 되는데 그런데 7이라는 숫자는 우리가 의미를 한번 봅시다. 7이 있느냐 하는 거에요.

주님의 안식일은 1,2,3,4,5,6이 7을 위해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안식일을 위하여 1부터 순서대로 밟아오는 중이에요. 인간의 하나의 행위인데 인간은 행위라 한다면 인간은 7이라는게 없어요. 왜냐하면 1,1,1,1,1,1 이렇게 되요. 한번 용서했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갔다가 1다음에 2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다시 새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다시 용서 하는 거에요. 일곱 번해도 한번 밖에 안 해 준다니까요!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가 즉, 베드로의 주체가 주님께서 당기는 7속에 1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갑자기 어려운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포함되어 있지요. 발걸음도 세시니까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 7일만의 창조 원리가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예속 되느냐, 복속 되느냐 인간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원리에 원칙에서 벗어 날 수가 없어요.

그 한나의 찬송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도 태어나게도 하시고 죽게도 하시고 또 전도서에 보면 웃을 때가 있으면 울 때가 있고 사랑 할 때가 있으면 미워 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게 때가 있어요. 그 모든 때는 처음에 이야기 한 것처럼 터널을 둘러싼 외벽이거든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때를 위한 보조적인 때들이에요. 타이밍대로라니까요. 모든 게.

지나고 보면 아까울 때가 많지요. 예를 들면 특히 주식 투자하는 사람들. 펀드 투자하는 사람들, “그때 일주일만 먼저 알아서 뺏으면 그렇게 50%안 날아 갔을텐데..그 뺄까 말까 하다가 나두자했다가 중국 펀드 날아가 버리고 브라질 펀드 다 날아가 버리고..” 그런데 날아가기 직전에 이윤 좀 보고 빼자 했다가 그 다음 날 펀드가 폭락해서 “아이고!” 가슴 쓸어 내리며 “큰일 날 뻔 했다!”

그런데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들이 인간이 누구 중심입니까? 자기 즐거움, 자기 기쁨 중심이지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깔끔하게 간단하게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다 그렇지! 보통 그렇게들 생각 하잖아요! 여러분들이 12살,13살때 여름철에 학교 마치고 시원할 때 창문 열고 턱 괴고 골목을 내다보면 어른들이 지나가는 모습들이 굉장히 아름다와 보이고 평화롭잖아요!

그런 것을 느끼는 게 뭐냐하면 어떤 사람들, 할머니도 있고 아저씨도 있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어떤 사람은 고양이 키우고 어떤 사람은 개 키우고, 그게 바로 세상이다. 세상은 각자각자 다양성 있게 사는 것이 세상이다. 그런 생각 하지요! 지금도 매일 같이 그렇게 생각 할거에요. “너! 나에게 관섭하지마! 나도 너에게 관섭 안 할테니까!” 요정도로 유지하고 서로 관섭 안 하기. 그게 사는 것이고 그게 세상이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 방금 이렇게 사는 것이 틀린 생각이에요? 옳은 생각이에요? 이게 바로 틀린 생각이에요.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편하게 생각했는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면 진리는 뭡니까?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개도 키우게 했고 예수님께서 고양이도 키우게 했고 예수님께서 골목에 어떤 노인이 휴지 줍게 했구나! 어떤 아가씨는 뾰족 구두 신고가게 했다. 지금은 하이힐이라 하지요.

그냥 편하게 생각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뾰족 구두 신게 하신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미친 사람이다 이야기 하겠죠! 이 세상 너무 살아가기 힘들다. 이 세상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세상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편하게 생각해요.

우리가 그냥 제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해서 예수님 중심 생각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냥 사는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이구나라고 생각되면 성령이 임했다고라고 보시면 됩니다. 참! 세례 요한 불편하게 살고 엘리야, 아브라함도 참 힘들게 살았어요. 우리는 편하게 살았잖아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사는데 엘리야, 예레미야 이런 사람들은 그게 허용이 안 됐다니까요.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예레미야 애가 보세요! 내가 이스라엘 멸망하고 내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어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편하게 하면 되지 왜 가슴이 찢어집니까 그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해서 그런 거에요. 예레미야도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데 우리 주님은 어떻겠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어려서 “ 어디 갔었어? 너를 찾는데 사흘이나 걸렸어! ” 할 때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러면 될걸 가지고 되바라지게 하는 말이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는 줄 몰랐습니까?” 성경에 있잖아요.

그냥 편하게 살지 그냥 편하게 살면 될걸 가지고 그 어떤 순간에도 복음 놀치지 않고 복음 전하는거 보세요! 참! 함든 정말 힘들게 살아요. 그냥 최나희가 한 골 넣어 들어갔으면 들어 간거지 그걸 또 복음과 연결시켜 가지고 최나희가 넣은 것을 어떻게 기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너무 많이 생각한 거 아닌가요? 그건 아닙니다.

숫자7을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흉내 낸겁니다. 예수님의 주체를 베드로가 지금 흉내내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만큼 나도 믿음 생활한다는 거거든요. 예수님의 용서만큼 나도 해낼 수 있다는 뜻이에요. 주님이 용서해라 하니까 자기가 일곱 번 정도 용서하게 되면 이건 주님도 나를 대견하다고 할 줄 알았지요. 지금 주님은 주체의 문제에서 “너는 누구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럴려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본 모습을 들추어내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그냥 가르치는데 있어서 “얘들아! 알겠냐? 예! 잘 알았지? 따라 해봐! 됐어! 그럼 넘어가고” 이런 것이 아니고 반드시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실수와 실패를 유발되는 현장을 통해서 새롭게 이해되는 겁니다. 요즘 제가 설교에 실패라는 말을 너무 해서 좀 자제를 해야 되겠다 하는 데 아무리 좋은 용어라도 자주 사용하게 되면 그냥 넘어가게 되거든요! 이걸 다른 말로 해야 되겠어요!

실수와 실패를 유도하는 그 힘이 주님 쪽에서 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주체쪽에서 나오는 힘은 뭐냐하면 이 힘이 미치는 모든 곳이 다 망했다! 모든 곳이 다 실패다! 모든 곳이 다 실수다! 라는 이러한 고백들이 나올 수 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현장이 되지요. 저는 이것을 볼링이라고 보는데 주님이 볼을 들고 라인에 서 계시고 공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서 팔의 움직이는 반동으로 공을 던지게 되면 던지는 사람은 폼 나지요? 폼나고 신나지요?

그런데 아프기는 누가 아파요? 저 끝에 서 있는 핀들이 10개의 핀들이 맞아요. 만약에 핀에 인격이 있다면 어떨까요? 벌벌 떨거에요. 공이 가까이 오게 되면 벌벌벌벌 떨거에요. 그 핀이 성도입니다. 공을 던지는 사람 우리 주님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만드는 삼시 세끼 가지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 날아오는 볼링 공 즉 , 말씀에 의해서 사는 겁니다.

왜? 실패다 오늘도 실패다 주님 앞에서 얻어맞는다는 현상을 가지고 온유, 화평, 양선, 자비, 형제 우애라고 합니다. 형제 우애가 그냥 생기는 겁니까? 오늘 본문을 보세요! 베드로가 지금 뭐라고 해요? 단어 하나를 이야기 하지요. 누구를 용서 한다고 해요? 형제지요 베드로가 나름대로 감 잡았다니까요! 주께서 용서하라 했으니까 그거에 대한 주님께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라는 용서를 볼링공으로 보질 않고 멀찌기 서서 공자나 맹자처럼 “용서를 해라~알겠느냐~”이렇게 이야기 하는 줄 아는 모양이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어려운 것도 없어요! 그러면 용서하라 하니까 갑자가 자기 속에서 자신은 핀에 지나지 않는데 용서를 끄집어 내는 거에요. 형제에 대한 용서를...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몇일 만에 하셨다? 일곱 번 . 7이 완전 수이니까 7일만에 창조 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했으니까 “내가 일곱 번을 용서하면 주님! 내게서 하나님이 만드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의 대상이고 나는 일곱 번이라는 용서가 나왔으니까 주님 보시기에 얼마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주께서 만족하실까?”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일곱 번 용서 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하오리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까 여기서 형제들이라 했습니까? 형제라고 했습니까? 형제이지요. 죄를 지었을 때 형제에게 하는 거지요. 형제가 일곱 번 용서 받을 인간이 두 사람입니까? 세 사람입니까? 한 사람입니까? 한 사람이에요. 한 사람도 아니고 한 놈이라 해야 되요. 왜 용서해 주면 또 그짓하고 용서해 주면 또 그짓하고

그러면 베드로가 용서 할 때에 뭐를 기억해요? “너! 지난 번에 용서 해줬다” 가 기억 나겠지요? 그러면 두 번째 용서 할 때는 뭡니까? “지난번에 용서 받아 놓고서 또 그짓하지 앟았냐? 내가 인간성 좋아서 참는다!”이게 들어가있지요! 베드로 생각에는 뭡니까? 한 번 용서 했는데 죄 지었다 또 두 번 용서해 줬는데 죄 지었다 그러면 베드로 입장에서 7번 용서가 그 안에 누적되어 있으니까!

“나 만한 용서 있으면 나와봐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햄버거 위에 샌드위치 위에 이것 저것 넣고 7층이나 되었으니까 이건 보통 용서가 아니죠? 왜 7번이나 죄지은 것을 용서해 줬으니까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뭐가 문제냐 하면 첫 번째 용서할 때 이 사람이 죄 지은 것에 대해 용서가 돼야지요! 그런데 두 번째 죄를 지었을 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 지은 것 더하기 내가 너를 용서함이 포함된 그 죄를 용서한 셈이 되니까 그렇죠? 논리가

그러면 7번하면 내가 여섯 번이나 용서한 것이 포함된 것을 용서하는 거지요. 그러면 자기가 용서하는 착한 짓을 자기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건 용서 하질 않습니다. 그걸 세자로 뭐라 하냐하면 자랑질이라 해요. 친구가 돈 빌려가서 돈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돈 받으러 가보니까 예상에는 나에게 돈 빌려가서 잘되서 가족이 잘살고 행복할줄 알았는데 친구 집에 가보니까 문 열다가 문이 떨어졌어요. 너무 낡아서, 전보다 더 못하게 됐어요.

거기서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하지요. 전보다 더 못하니까 이거는 괜히 만났다가는 돈 빌려 달라는 소리만 또 듣게 되겠으니까 후다닥 자리를 피하겠지요 “그래! 내가 너 봐줬다! ”이건 자랑이에요. 뭐가 되어 버렸어요? 자기 자랑이 되지요. 용서 속에 자기 자랑이 포함되어 있으면 진정한 용서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이 나의 잘남을 증언해 주는 하나의 나의 밑천이 되어 주는 거에요? 상대방을 이용한거지요.

나의 우수함을 자랑질 하기 위해 내가 이렇게 착한 사람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보조 노릇을 나에게 한거지요. 그러면 여기는 누구의 세계이냐 하면 베드로 본인의 세계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줄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말씀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세계를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신 말씀인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용서라는 말을 가지고 누구의 세계를 구축했어요?

내가 잘나고 내가 멋있고 내가 대단하게 잘난 존재로 확대되는 그런 세계를 만들어 버렸어요. 주님 보시기에 베드로가 죄지었네요! 7번 용서하고 죄 지었네요. 그러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요. 7번 용서하는 것이 뭐다? 곧 죄다. 극단적인 죄다. 그래서 주의 말씀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한다. 실패다! 실패한 거에요. 만약에 베드로가 가만히 있었으면 실패인지 조차 모르겠죠.

용서 하겠다고 나대니까 그러니까 베드로는 막 살아야되요. 막 살아야 진리와 복음이 나오는 거에요. 막 살아야 본인이 얼마나 구원될 자격도 안된다는 걸 깨닫잖아요. 성령이 임힌 사람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도대체 내가 어떤 인간이기에 십자가 피 만으로 구원됐는지를 알기 위해서 하나님은 은혜로 막살게 하시는 겁니다. 막 살게 되면 새삼스럽게 막 안 살아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막 살아온 것 속에 이미 포함됐음을 소급해서 깨닫게 되지요.

막 살면 복음이에요. “이근호! 당신 말이 맞다면 성경에 막 살라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왜 그게 안 나오느냐!” 서로 용서해라가 막 살라는 이야기에요. 서로 용서하라. 내가 너를 용서한것 같이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라라. 너희에게 주신 마지막 계명이니 이게 막살라는 뜻이에요. 그걸 영으로 알아들어야지 문자로 알아들으면 안 되거든요.

너희는 내가 준 말 가지고 결국 막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육적인 모습을 티를 내는데 그것이 니가 구원 받은 과정과 절차 속에 이미 포함 되어 있다는 거에요.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하잖아요. 인간의 한 평생은 핑계와 핑계의 연속이에요. 그 놈의 핑계는 단절도 없이 지속적이에요. 계속 핑계에요. 단1초도 핑계 안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항상 생각하는 자체가 또 뭘 핑계 댈까 하는 꾸미는 모습으로 생각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딸이 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 아들에게 전화 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되지? 오늘 남편 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 아내 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될까? 모든 게 핑계에요. 인간의 만남은 뭐냐 하면 자기 핑계와 핑계의 만남, 그것을 두자로 하면 수다라고 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 한잔 시켜 놓고 두 세시간씩 수다 떨어요. 그걸 성경적 용어로 로마서10장에 보면 자기 의, 자기 축하라 하지요. 오늘 두 번째 강의 제목은 자기 축하에요. 첫 번째는 제목은 제물.

베드로가 지금 자기가 너무 착해서 주저 할 수 없어요. 자랑 질 하고 싶어서, “ 주님! 주님! 제가 주님 말씀을 잘 알아들었습니다. 제가 7번 용서해 주면 되겠습니까? ” 왜 그러냐 하면 거기까진 자신이 있는 것 같아서, 7번 까지는 계산해 보니까 그래서 인간의 모든 생각은 자기 축하, 자기 변명, 자기 핑계 이것을 교회에선 자기 영광이라 하지요. 요12:43나오는 인간은 자기 이름, 자기 이름을 영광하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못 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요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 말을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자기 영광에 신경쓰다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워졌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관심과 신경 쓸 여력이 없어요. 왜 자기 축하하기 바빠서 자기 뽑내기 바빠서 자기가 용서하는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주님앞에서 자랑질하고 싶어서 정작 그렇게 되면 자기가 성공자가 되버려요.

다른 제자들 보다 더 우월하고 그러면 수제자 답고 나중에 천국가서도 높은 자리에 앉게 되고 하여튼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생각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평소에 늘 했던 생각이 그냥 샘물처럼 솟아 오른거에요. 평소에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가 뭐냐하면 아까 볼링 이야기 했잖아요. 볼링공이 안 날아와요. 핀이 자기 영광에 도취되어 있어요.

자기 핀에다 인디언처럼 온갖 예쁜 것 장식해서 주님께서 말씀만 던지면 우르르 다 엎어질갈 같고 자기를 바싹 세우기 위세 그러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거는 누구와 비교합니까 똑같이 생긴 자기 옆의 핀하고 비교하지요. 명품 가방, “쳇! 안어울리네 나한테 어울리겠다 빌려줄래 친구야! ”자기 옆의 핀하고 비교하지요. 그런데 정말 다행 인것은 공이, 말씀이 날아와서 나를 완전히 개무시하고 밟을 때 진짜 그럴 때 자기 축하해야 되요.

“나 당했다!” 이게 진짜 행운아입니다. “너는 안 당했지? 나는 당했다 주여! 오늘 밤에 저를 생각해 달라 이런 것, 주님께 늘 짓 밟히고 당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자기 몸에는 피가 지나간 자국이 흔적이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흔적이 있어야 되요. 나를 망하게 하고 실패하게 했던 것. 흔적 인생 망가지는 것 그런 것만 따지지 마시고요. 멀쩡하게 좋은 차 타고 성도는 좋은 차 마저도 하나의 자국이에요. 나를 교만하게 하지 위해서 주께서 주신 나쁜 차,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럼 또 회개하고 자기 축하하고 평소의 속성이 자기 축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만 한다는 거에요. 계속 실패를 거듭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용서는 물 건너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남을 용서 한다는 자체가 너무 주제 파악이 안 되는 짓이에요. 건방이 늘었어요. 무슨 자격으로 남을 용서해요 우리가 뭐라고 용서를 합니까! 용서라는 것은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용서해야 되지 내 이름으로 용서가 안되요.

용서 받아도 모자라는 인간이 무슨 용서를 합니까!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성령은 볼링공이에요. 성령은 맨날 우리를 짓밟고가요. 완전히 납작한 쥐포처럼 만들고 가요. 쥐포로 만드는 자체가 이미 남을 용서한 순간입니다. 내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때 부인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지금 니가 나를 용서하는구나!”와 같은 모습이요. 나는 주님께 밟혔을 뿐인데 말씀은 누가 실현시켰다?

성령께서 나를 밟히는 방식으로 주님의 용서하라는 말씀을 이루게 하는 겁니다. 분을 품되 언제까지 품지마라고 했습니까? 해지기전까지는 품되 해 진후에는 품지마라고 했잖아요. 그것을 말씀을 누가 갖고 온 겁니까? 성령이 가져와서 누굴 통해서 이루어져요?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면 남들 보기엔 내가 성질이 좋아서 내가 해 지고 난 뒤에는 분을 안 품는것 같지만 이미 불도저가 지나갔어요.

성령께서 하다 보니까 죄인 만들고 보니까 남들 보기에는 “왜 쟤가 해 지고 난 뒤에는 화를 안내지? 화 한번 내 볼까? 어디! 그런 뜻이 아니고 화내도 되는데 왜 안 내지? 나 당했거든! 누구한테? 주님한테 당했거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행운이 로또 복권을 살필요 없어요. 죽을 때까지 긁는 복권을 미리 앞당겨서 다 삐라 뿌리듯이 우리에게 늘 주시는 거에요. 이것이 예수님이 로또라고요.

펄럭펄럭 하면 벌써 천국, 또 펄럭펄럭하면 영생, 이 땅의 모든 일은 내 영광과 자기 축하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관계있잖아요. 그 매듭을 주님께서는 칼로 끌어 버리시는 겁니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내 영광으로 되는 매듭 부분을 끊어 주실 때 정말 우리는 감사 할 수 밖에 없지요. 자! 같은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건 무슨 뜻이에요. 내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평소에 나는 안 망해야 마땅함이 전제로 하지요.

그런데 진짜 주님께서 나를 망하게 했다는 말은 망하냐! 안 망하냐!에 대해서 내가 평가할 그런 입장에 있지 않다! 범사에 감사해야 된다! 그래서 내 실패와 나의 망함을 보고 울고 불고 하는 것이나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이나 다 똑같은 자기 축하, 자기 자랑질을 하고 싶었는데 한쪽은 성공한거고 이쪽은 그거 못해서 아쉽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성령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지 알아서 골라 잡아서 기뻐하라고 안 하거든요.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이것이 성령 안에서 주의 뜻이라고 그런데 우리는 하는 행동이나 발걸음 모든 것이 내 자랑할것만 뽑아서 자랑해가면서 자랑할 게 생긴 것에만 감사하지요! “주여! 오늘도 자랑질 할 수 있는 걸 주셔서 감사 합니다.” 약 올리니까 “됐다! ”그 말은 즉 “너는 이런 것 없지롱~” 꼭 애들 3살 애들이나 60,70대도 마찬가지에요. 어린 애나 마찬가지에요. “너는 이런 것 없지롱!” 실컷 자랑 했는데 “나도 있지롱~”하면 “에잇! 전화 끊자!”

독보적인 자기 축하가 안 되잖아요. 만약에 베드로가 7번 용서 할 때 옆에 있는 제자 중 하나가 “저도 7번이요! 저도 7번이요!‘그러면 “손 내려!” 이랬을 거에요. “나만 7번 용서 할 수 있어!” 그런데 주님께서는 7번에 70번이면 몇번입니까? 490번 용서, 아마 오기 있는 성도, 충실한 성도 같으면 그렇게 했을 지도 몰라요 하고 난 뒤에 주님께 찾아왔을 겁니다. “490번 용서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 7×70×700 하라고 343,000번 용서해야 되네!

아마 오기 있는 사람은 이 만큼 할수도 있어요. 이 말은 제잘 좀 막 살아라! 이 말이에요. 결국은 “니가 용서하는 것이 너에겐 용서로 보이느냐! 나는 니 자랑으로 보인다 좀! 나대지 마라!” 나대지 라라고 하면서도 나대게 하시지요. 왜 그래야 실패를 하니까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물어 봅시다! 베드로가 7번 까지는 아니겠지만 평소에 용서를 안 하는 재미로 살겠습니까? 용서하는 재미로 살겠습니까? 하는 재미로 살겠죠!

왜냐하면 적어도 예수님의 수제자고 제자인데 같이 성질내지 않고 용서 할거에요. 그러나 그 용서가 모아모아져서 결국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가 되지 않았습니까 평소에 점잖게 살고 제자답게 사는 그 모든 것이 결국 “당신과 나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나는 당신과 함께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리 갈라섭시다! 헤어집시다! ” 끝난 거에요. 끝!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누가 하신다? 주님이 하신다! 우리는 단절, 흠집만 낼 뿐이에요. 흠집을 내다가도 나는 자꾸 움츠리고 “주님! 제발! 내 일에 관섭하지 마세요! 그냥 구원만 해 주세요! 관섭하지 마세요! 계획은 내가 하되 뒤에서 도와주시기는 하되 잘 되면 내가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관섭하지 마세요! 너는 왜 그렇게 하느냐! 저도 나름대로 내 자랑하고 싶어서..”

이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이삭이 이짓 하다가 실패하고 말았잖아요. 엉뚱하게 인간에게 복 주려고 하다 팔을 바꿔치기 했고 요셉도 마찬가지에요. 꿈 꿨다고 좋아하다가 팔려갔잖아요. 꿈이 무산되게 했잖아요. 야곱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자식을 낳은 뒤에 하나는 죽고 하나는 인질이 되게 생기고 끝까지 십자가를 경험하는 거에요.

그냥 보는 십자가가 아니고 내 인생에 하나의 터널이 되도록 내 안에 칩이 되도록 내 안에 날 되게 하는 정보, 최고의 정보 칩이 되도록 박아 놓고 내 인생은 왜 좋은 십자가이고 왜 고마운 십자가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때로는 용서 한다고 껍적대고 때로는 형제 사랑한다고 온갖 짓을 하게 만들면서 십자가 아니며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베드로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백케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마땅히 말씀에 늘 쓰려져 있어야 될 볼링 핀에 불가한데 우리는 옆 사람과 비교 하면서 색칠하기 바빴고 치장하기 바빴습니다. 자기 핑계가 우리의 하루가 되었습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넘어뜨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65강마태18장.hwp (70.0K), Down:15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25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