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5-마르크스
201507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5-마르크스
이름 : 한윤범(IP:14.39.134.102)
20150714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25-마르크스
(강의:이근호 목사)
마르크스 사상인데 성경을 생각해야 될 우리가 왜 마르크스를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마르크스가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과연 말씀으로 기독교로 이상적인 사회를 구현한다는 유럽에서 교회가 뭘 했느냐고 묻는 거예요. 말씀대로, 말씀에 입각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로 만들고자 하면서 이천 년 가까이 애를 쓴 기독교국가, 유럽 국가지요. 유럽국가가 그렇게 말씀대로 기독교대로, 복음대로 했는데 지금 주어진 현실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일 때 뭔가 이유와 원인을 규명해야 되지 않느냐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 생각이.
마르크스 사상이라고 해서 그 사상을 따르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 사람이 문제를 던진 그 문제가 나온 그 시대의 현실이 기독교 사회거든요. 한국은 아직 기독교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뭘 기대하느냐? 한국도 기독교사회가 되기를 원하고 있단 말이죠. 그 작업을 유럽에서 먼저 했지요. 유럽 여행 가보세요. 온 천지가 기독교 문화잖아요. 실제로 그들이 사고방식이나 사는 것이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냐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느냐 이 말이죠. 산상설교 말씀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사회냐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 사는 세계가 그렇고 그렇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대로 성경대로 한다면 이상적인 지상 천국을 이루느냐 마느냐는 나중이라 치더라도 우리가 무엇이 문제냐는 점은 파악이 돼야 되지요. “아이고, 세상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렇게 말해 버리면 뭐가 감춰집니까? 나에게 무슨 문제 있음을 모르잖아요. 나에게 있는 문제를 그냥 남 탓으로 돌리고 어물쩍 넘어가버리면 그래놓고 교회 다니면 신자입니까? 아니지요.
사도 바울이나 성경 내용은 이거거든요. 예수님 십자가를 언급하려면 그 앞에서 왜 내가 도대체 뭐가 문제기에 십자가 졌는지 날마다 자기 문제를 발굴하고 발췌하는 모습을 보여야 되는 거예요. 그 모습을 자신의 과거에서 끄집어내면 안 되고 지금 주께서 말씀대로 작열하는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과거에 그런 잘못이 있습니다.” 이런다고 해서 회개가 아니고 반성이고. “내가 왜 그때 죄를 지었지?” 이러지 말고 내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걸 발견하는 겁니다.
죄가 나보다 더 센 것을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그러한 교만과 오만은 품지 않을 것 아닙니까. 내가 열심히 말씀대로 살면 지금보다 형편이 나아질 거야, 더 우수한 존재가 될 거야, 라는 그런 것이 교회에서는 상찬 받는다. 칭찬받고 우대받지만 성경에서는 멸망의 길이거든요.
마르크스 사상을 왜 해야 하느냐 하면 딱 하나에요. 구조입니다. 구조를 이야기한다는 말은 개인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립니까? “그래 내 탓은 아니야.” 그렇게 들리지요. 이 말에 대해서 누가 좋아하느냐 하면, 대우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일반 노동자들. 지금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은 박근혜 정부 때문이다. 그리고 재벌과 결탁한 기성세대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서 뭐가 빠집니까? 노동자 자신은 죽자고 일했을 뿐인데 우리는 잘못 없는데 바깥에서 너희들 탓에 우리가 고생하니까 너희들이 갖고 있는 돈을 우리한테 할당하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르크스와 관련된 이야기니까 하는데 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은 위로입니까, 칭찬이겠어요, 사과에요, 돈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말만 하지 말고 돈 달라고 하지요.
최저임금 흥정이 뭡니까? 고생했다는 위로입니까? 사과입니까? 돈 올려달라는 겁니까? 돈 올려달라는 거지요. 마르크스 입장에서는 돈 올려달라는 이야기나 돈으로 보상해달라는 것은 전부 그들이 욕하고 있는 자본가와 같은 종류라는 거예요. 이건 마르크스 이전에 포이어바흐라는 사람이 헤겔을 반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헤겔은 모든 것이 정신으로 와서 정신으로 갔다가 정신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현실에 살다보면 실제로 정신이 문제가 아니고 물질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인간은 정신/신으로부터 추방되어 고생한다고 했지만 포이어바흐는 인간은 물질을 제대로 분배 받지 못해서 소외당한다.
그러면 신이란 뭐냐?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자기 형편이 너무 딱하니까 스스로 위로 받을 길이 없어서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인간은 유물적 존재거든요. 유물적 존재란 위로란 말은 생존에 필요한 여유 자금을 더 달라는 이야기잖아요. 교회에서는 돈을 주는 게 아니고, 그게 하나님 뜻입니다. 그게 당신의 운명이니 그것도 감사하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지금 같은 하나님 믿는 같은 신자면서도 똑같은 소리하는 거예요. “주여, 제가 부자 된 것은 신의 축복이니 감사합니다.” 부자가 돈이 많아서 하는 말이 이렇게 부자 된 것은 하나님 은혜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자기보다 어려운 자, 약자에게 네가 그렇게 못 사는 것도 신이 준 운명이니까 감사하세요, 라고 윽박지르게 되면 부자가 가진 돈이 정당화 돼버리잖아요.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사람은 신에게 소외된 게 아니고 신은 너무 울화통 터져서 그냥 믿어버린 게 신이고 실제로는 모든 단어, 아침에 눈뜨고 식구들과 이야기하는 것, 동창생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결국 그 밑바닥에는 나는 돈을 가졌기 때문에 행복해. 나는 돈이 없어 불행해. 그 이야기 외에는 다른 이야기가 없단 말이죠.
그렇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신으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생존으로부터 출발해야 솔직하고 정직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것은 포이어바흐 이야기에요. 포이어바흐가 신학한 사람이에요. 헤겔도 마르크스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스탈린도 신학생이었거든요. 그 당시에 신학생은 안정된 공무원 같은 역할 하거든요. 지금도 독일에서는 목사가 공무원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전도사는 급이 달라요. 전도사는 죽어도 목사 못 돼요. 공부를 더 해야 돼요. 그럼 목사하면 되지. 목사는 수능이 늦으면 못 들어가요. 최고 엘리트들만 목사하기 때문에 국가에서 월급을 줘요. 아주 수준 높은 대학을 나와야 됩니다.
포이어바흐 같은 경우는 이미 그런 공부를 한 사람이에요. 솔직하게 말해서 이 사회는 돈 없으면 못 사는데 소위 정치권력 가진 자가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는 식으로 유럽국가(기독교국가) 전체가 이걸 바꿔놓는 거예요.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헤겔에 반대하면서 유물론적 인간론을 이야기합니다. 유물론적 인간론이라 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는데 유심론적 인간론, 정신 중심에 있는 인간을 물질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 솔직하다는 거죠.
그러면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의 차이점이 뭐냐? 우리가 어떤 사람의 사상을 알려면 반드시 차이점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옛날에 한 걸 되풀이 할 수도 있어요. 이미 그런 사상을 할 때는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은 그건 아니라고 본다고 하면서 나오는 차이를 통해서 그 사람의 진심을 뽑아낼 수 있는 겁니다. 어떤 논리와 주장할 때는.
제가 전에 그런 강의했잖아요. 나는 이게 복음이라고 할 때 믿지 말라고 했지요.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이것이 복음이 아니라는 것부터 설명해야 돼요. 목사들이 설교할 때 성경말씀을 이게 복음이라고 하면 안 돼요. 같은 성경말씀인데 여기서 이런 논리가 나오고 이런 사고방식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같은 본문에서 나올 수 있는 비복음이라고 소개하고, 복음은 그것과 어떤 차이가 나는지 이렇게 설명돼야 돼요. 왜냐하면 문자는 그 자리에 박혀 있으니까. 사람이 보는데 따라서 자기 위치와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고 핑계되기 위해서 변명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해석을, 강조점을 다른 데 둘 수 있거든요.
따라서 복음을 이야기하려면 복음이 아닌 것, 이단에 대해서 언급해야 되는 겁니다. 물론 교인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지만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 그 이야기잖아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다음이 상당히 중요하죠. 저주를 받을지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복음을 들으셨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을 저주로 가속화시키는 복음이라는 것을 본인이 짐작했어요,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흔히 이렇게 하지요. 그냥 이러나저러나 예수 전파하면 되지. 그러면 사도 바울은 뭐라 합니까? 당신이 들은 예수가 당신을 저주케 하는 예수라는 것을 감안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항상 복음이란 것과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 참된 해석, 무슨 말이든 좋아요. 어쨌든 간에 이것과 아닌 것과의 차이점을 발견하자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로마서에서는 아닌 것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유대인의 구약해석이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심지어 고린도전후서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니에요. 현재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이단 단체라는 것부터 출발해요. 그게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너희들은 예수 전하고 성령 전하고 복음 전하고, 고린도교회가 좋은 건 다 전해요. 이러나저러나 예수 이름만 전파하면 되지. 그게 아니란 말이죠.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전한 것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 합니다. ‘다른’의 삼종세트, ‘다른’의 삼위일체.
그래서 누구든지 복음 알아요, 예수 알아요, 성령 믿습니다, 하거든 그럼 다른 영,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데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이 뭔지 설명해달라고 물어보세요. 아마 상대 안 할 걸요.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건 모르겠고 교인은 많다. 이걸로 때우겠죠. 그건 모르겠고 우리 교회 교인수는 많고 헌금 많이 나온다. 선교사 많이 보낸다. 그럴 때 이렇게 해요. 그게 바로 고린도후서에서 말하는 다른 복음이고.
차이를 끄집어낼 줄 알아야 되는데 만약에 차이를 들이대면 교회 목회가 안 되느냐 하면,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차이를 이야기해버리면 목회 자체가 안 되고 교회 문 닫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람이란 존재가 뭐로 돼 있느냐 하면, 다 설명한 거예요. 새삼스럽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란 존재는 소유의 집합이에요. 학력, 키, 나이, 가족 그리고 출신성분 등이 모일 때 자기 존재에요. “너, 어떤 존재야?” “우리 아버지 잘 나가.” 그거잖아요. 존재를 깨보면 소유의 집합이에요. 난 어느 대학 나오고.
어떤 사람이 만약에 교회에서 복음을 들었다 하면, 소유의 특징이 추가입니다. 플러스하면 행복이고 마이너는 불행이고 파멸로 느껴지지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여, 저는 누굽니까?” 이건 하나님 나타날 때 이야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네 안에 들어있는 게 어느 정도야?” “이 정도야.” “많이 가졌네. 나한테 좀 나눠줘.” 이게 친구 사이입니다. 나한테 이익 되는 조건 하에 만나잖아요. 그런데 그 친구가 보증 서 달라면, 친구 안 한다. 이게 친구 사이에만 되는 게 아니고 애인 사이고, 부부 사이고, 교인들 사이고 그래요.
우리가 오늘 마르크스 하는데 마르크스가 근본적으로 단추를 잘못 꿴 거예요. 포이어바흐의 의견을 수정해서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됐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연물의 소산이라는 겁니다. 마르크스 사상이 제일 출발점이 그거에요. 인간이 신을 믿는 이유는 타고난 본성이란 말입니다. 말만 들으면 맞는다고 하겠지요.
제 말 잘 들으세요.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타고난 본성이란 말은 해석이 필요해요. 인간이 홀로 자연과 더불어 싸우면서 살려니까 너무 힘들잖아요. 힘드니까 남아 있는 여분을, 능력자를 도입해야 되겠지요. 그게 신이지요. 특히 그 당시 유럽에서 외쳤던 복음은 다른 게 아니에요. 포이어바흐에 나와요. 하나님은 □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사랑받기를 원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니까 그 사랑은 내가 포기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사랑은 결핍을 메워주는 게 사랑이라고 느끼지요. 현재 가진 것을 빼앗는 건 사랑이 아니죠. 그러면 욥기에 보세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죠. 그러면 욥은 하나님은 조건부로 사랑했습니까? 무조건 사랑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욥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면, 주여, 이젠 그만 주시옵소서. 좀 빼앗아 가면서 사랑을 표현해달라고 새벽에 기도했습니까? 현재 팔 아픈데 나머지 팔도 아프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한 적 있어요? 없지요. 다리 아파서 입원했는데 아예 이참에 낙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겠어요? 아이고, 잘 됐다. 살기 싫은데 오늘밤에 나와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 들려주옵소서.
포이어바흐가 신학 한 사람이에요. 신학이 뭔지 알아요. 헤겔도 알고 마르크스도 알고 스탈린도 알고 심지어 김일성도 알아요. 김일성 삼촌이 목사니까. 그 말은 인간은 종교적으로 다루면 지배할 수 있다는 걸 알아요. 인간 정신 자체가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 종교적이란 뭐냐? 마르크스가 제대로 파악한 겁니다. 인간은 자연적 산물이고 그건 내가 자연 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사실은 마르크스, 포이어바흐 어쩌고 하지만 우리는 그걸 알고 있는데 잊어버리고 있지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토지와 함께 출발하지요. 마르크스 이론 가운데 사적 유물론이란 게 있습니다. 역사적 유물론이라 하는데 인간의 생존 토대가 경제적인 교환과정에 의해서 이 세상에 국가체제가 유지된다고 증명한 책이에요. 유물론적으로 역사를 증명한 책이에요.
처음에는 나올 때는 농업공동체라 하는데 농업공동체에서는 증여하고 호혜 한다는 겁니다. 잘 쓰는 용어는 아니지요. 증여란 말은 합니다. 뭔가 그냥 주는 것. 호혜는 상호은혜 베푸는 것. 그것이 라면 봉지의 표지가 되지요. 농심. 동생이 결혼했기 때문에 살림살이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볏단 들고 밤중에 몰래 하고. 그런데 새벽 세시 반에 동생이 형님네는 식구가 많다고 해서 볏단 주고. 이건 자발적이죠. 호혜. 그것을 감정에 의한 구조, 따지지 말고 그냥 느끼는 대로 도와주는 것. 이게 농업공동체 사상입니다.
농업공동체에서는 국가라는 게 없어요. 상부상조하는 겁니다. 산 넘어 최씨 집안과 이쪽에 권씨 집안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겠죠. 거기서 물물교환이 성립되죠. 만약에서 대구에서 벼를 키우고 포항에선 고기를 잡는다면, 포항 사람이 맛있는 고등어 많이 잡았는데 드시겠습니까? 그럼 대구에선 혹시 콩이나 쌀, 보리가 필요하면 드릴게요. 그건 상품이에요, 상품 아니에요? 상품 아니에요. 그냥 물건이죠. 그러면 물건이 먼저입니까, 사람이 먼저에요? 사람이 먼저지요. 지금 당연한 이야기를 하니까 의아해하시는데 물건보다 사람 감정이 우선이잖아요.
그런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물이 먼저지요. 시장에서 “너, 얼마짜리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아까 농업공동체 이야기할 때 상당히 낭만적이지 않았습니까? 꿈같은 옛날 어릴 때 촌에서 놀던 그런 생각 들지요. 물론 촌에서도 살벌한 딱지치기가 있었지만. 하지만 어린아이가 철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 철이 없는 이유가,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감정이 어른이 되면 커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릴 때는 서로 친구들이 도와주고 가족들이 도와줘도 돈을 못 버니까 안타까운 거예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 모실게.” 이렇게 하잖아요.
지금 철이 없는 이유가, 자기가 인간위주의 감정을 사회에 나가도 유지할 줄 아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식들이 아버지 돌아가셔서 유산문제 있을 때 사람이 먼저에요, 돈이 먼저에요? 돈이 먼저지요. 인간과 인간의 감정이란 사회에 나가면 나갈수록 이것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감정을 포기해야 돈이 들어온다는 삭막한 실제 현실에 눈뜨게 됩니다. 그게 철이 있는 거예요.
형제도 돈 있을 때 형제지 파산한 동생은 동생도 아니고 파산한 형은 형도 아니에요. 형제를 유지하려면 얼추 밥이나 먹고 살아야 명절 때 형제로 인정되지 그렇지 않으면 형제 인정 못 받습니다. 권력이 있든지 있어야 돼요. 우리는 사회가 이렇게 변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마르크스는 그걸 따진다니까요.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그러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기독교 안에 있는 우리들이 마르크스 주장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요. 그 원인을 찾아내니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을 거예요. 내 생각에 대해서 반대하려면 너희들이 말하는 정신적인 것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해봐라. 아무 소리 안 할게. 이 사회가 모두 함께 잘 살고 옛날처럼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그런 사회라면 이런 소리 안 할게. 그런 사회가 아니고 돈밖에 모르면서 사회면서 부자는 가졌으니까 범사에 감사하자고 하지만 어려운 사람들은 개뿔이나 있어야 감사하지 굶어죽을 판인데 무슨 감사가 나와요. 그 원인을 왜 파악하지 못하느냐. 이 사상공부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교회 안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도와주소서. 이러지 말고 하나님이 도와줬거든요. 내가 문제에요. 내가 뭐가 문젠지도 모르면서 만날 교회에 와서 도와달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어렵게 만들어요. 있는 것도 거덜 나게 만들어요. 이래도 날 믿을래? 굳이 믿을 필요 없잖아? 마르크스에 대항하려면 딱 한 마디만 하면 돼요. “누가 믿으라고 해? 안 믿으면 되지.” 이 말이 마르크스에 대항하는 방법이에요. 누가 하나님 믿으라 했어? 믿기 싫으면 억지로 믿지 마. 교회 오지 마.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려면 교회 오지 마. 그런 교회 많아.
내가 뭐가 문제입니까? 내 대신 돌아가신 구원의 해결자가 처참하게 망가졌습니까? 구원을 해결하려면 점잖게 멋있게 천사의 손으로 잡아라, 이렇게 아름답게 끌고 갈 수 있는 걸 온통 피 묻은 손으로 나를 끄집어낸다는 건 도대체 내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으면 피 묻는 손이 필요하냔 말이죠. 도대체 뭐가 문제인데?
“에이, 그냥 믿자.” 그러면 안 돼요. 뭐가 문제인데 피 묻은 손이, 십자가 복음이 필요하냐 말이죠. 사도 바울은 그걸 지적하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 사건은 터져버렸어요. 터지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왜 죽었는지 네가 알아야 된다. 그것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다른 쪽으로 꾀더냐?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런 이야기하지요.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합니까? 마르크스가 있잖아요.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세요.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줍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대신 해주지만 죄를 아는 것은 마르크스가 낱낱이 이야기를 다 해줘요. 마르크스가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별로 궁금하지 않은 모양인데 여기에 보면 1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의 주장으로 헤겔을 공격하는데 마르크스가 보기에 포이어바흐도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포이어바흐의 문제점은 인간과 역사를 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봤다.] 설명 필요한 이야기지요. 인간은 정적이고 고정적으로 봤다. 이 말은 인간은 물질로만 산다. 그러면 포이어바흐의 주장에 의하면 자기 안에 신이 있지요. 자기 안에 정신이 있고 물질이 있는데 그동안 사람들은 자기 안에 정신을 위주로 해서 물질에 대해서는 자포자기하듯이 살아왔잖아요. 그런데 마르크스가 포기가 포이어바흐가 물질로 살아가는 이것을 변명조로 누굴 탓하느냐 하면, 자기 속에 있는 정신과 신을 탓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 한 푼 없는 노인네 같아. 누구 욕해요? 세상 욕하죠. “요새 젊은 아들 말이야.” 할 일 없으니까. 요새 젊은 것들은 지 살기 바빠서 노인네한테 잔소리 들을 시간 없어요. 그런데 지는 할 일 없거든. 꼭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정치비평하잖아요. 아마 케이블티비, 종편들 그 사람들이 다 보지 싶어. 젊은 사람들은 바빠서 그것 볼 시간 없어요. 드라마 볼 시간도 없는데
마르크스는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새로 만들자. 어떻게? ‘어떻게’를 하려면 그동안 역사가 어떤 식으로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정당화되었는지 그 구조를 파악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구조라 했지요. 마르크스는 이 세상 현실 구조를 분석해들어가는 겁니다. 구조는 어떻게 분석되는가?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로 분류가 돼요. 선이 있으면 상부구조를 위에 올려놨지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하부구조, 큰 배의 기관실은 보이지 않지요. 그런데 위에서는 수영장이 있고 파티 하고 그러지요. 수영장 물 따뜻하게 하는 에너지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부구조, 배 밑에서 나오지요. 경제구조가 정치, 문화, 사회, 특히 종교 구조를 낳는 거예요. 그러면 상부구조에서 탐닉하고 즐긴다는 말은 하부구조의 질곡, 짐에서 약간이라도 여유 있게 짐을 떨어버린 사람만의 몫이 되겠지요. 오페라, 극장, 파티, 보트놀이, 골프, 휴가, 보석류, 보석시장의 활성화 이런 것, 약간은 여유가 있을 거란 말이죠.
아까 사적 유물론에서 농업공동체에서는 증여, 그냥 주는 거예요. 이건 마르크스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레비스트로스도 이야기했고, 구조주의 신화론에 보면 나오는데 옛날 신화에서는 그냥 베풀어 줬어요. 요새도 이사 오면 떡 돌리잖아요. 터줏대감들한테 잘 보이려고. 여러분이 만약에 귀농하면 그냥 가면 안 되죠. 노인네들 다 불러서 뷔페 한 번 먹여야 됩니다. 그래야 농업정보라도 얻고 사는데 지장 없어요. 그냥 지나치면 욕먹어요. 농업공동체니까, 감정이 있으니까.
여러분 이런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받아먹고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사돈끼리 결혼 앞두고 예단을 받고 안 주면 어떡하느냐? 결혼 깨지는 않고 욕 되게 할 거예요. 안 주게 되면 공동체에서 못 살아요. 받았다는 말은 현대인들은 정말 귀찮은 겁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잖아요. “이사 왔는데 떡 좀 드세요.” 그런데 보지도 않으면 정말 살벌하겠지요. 그런데 받아놓으면 그것이 앙금이 남아요. 줘야 되는데(빈 접시로 돌려보내면 안 되는데^^), 이게 남는다고.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초월적인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겁니다. 유기적 공동체가 아니고 메타/초월적인 사랑의 공동체에요. 유기적이 아니에요.
교회를 유기적 성령공동체라고 하지요. 이건 잘못 쓴 거예요. 잘못 배운 거예요. 유기적이란 주인이 없다는 말인데 그런 점에서는 초월적인 것과 같은 뜻인데 주인이 없다는 말은, 이건 수련회에서 사사기할 때 할 건데 미리 당겨서 합시다. 주인이 없다는 말은, 굴복할 자가 없게 돼버려요.
그걸 사사기에서 마지막에 왕이 없음으로, 그 다음에 자기 소견대로 하지요. 그럼 이스라엘 해체됐습니까? 잘 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돌아가지요? 유기체기 때문에 그래요. 유기체는 위험해요. 사사기는 이스라엘을 해체시키는 작업이에요. 이스라엘 자체에 이스라엘을 해체시키는 요소가 들어있어요. 이스라엘을 본받자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해체되자는 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구약을 몰라서 그래요. 신약은 해체된 것은 확실히 밟아주는 작업이에요.
그러면 구성은? 구성은 없습니다. 교회는 뭡니까? 교회는 해체하시는 분에게 계속 당하는 그것이 교회에요.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그게 교회에요. 이제 복음으로 하나 됩시다. 그건 구원파나 지방교회, 개혁주의에서 하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날마다 해체되던가요? 축하합니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람은 구성이 되면 그것을 자기 믿음의 대상이 돼버려요. 모델이 돼버려요. 그러면 그건 우상숭배 돼버립니다.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다는 교회를 믿어버려요. 그거는 우상숭배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됨을 믿어서 우상숭배 죄에 빠진 것과 똑같은 것을 반복한 셈이 돼요.
해체당한다면 말은 혼자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낯선 보이지 않는 주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은 저를 해체 안 하던데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왜 해체를 안 해요. 이게 있는데. 이게 뭐예요? 죽잖아요. 그냥 죽습니까? 늙어 죽지요. 왜 늙습니까? 왜 갑자기 몸이 아프고 입원하고. 갑자기가 아니에요. 서서히 망가지고 있는 거예요. 엠알아이 찍고 그런 것 필요 없어. 그냥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사람은 성도고, 내가 소홀했더니만 망가지네. 그건 유기체에요. 아직까지 보기에 자기 소견대로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물어요. “목사님 설교 요점이 뭡니까?” 매사에 주님이 관여한다는 것이 요점이에요. 머리카락 자라는 것도 발걸음 세는 것도. 발걸음만 세는 것만 관여하는 줄 알아요? 살아가는 모든 것, 매사에 어떤 행동에 주님이 관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거예요. 왜 관여합니까? 가만있어도 알아서 할 건데. 아니에요. 관여해서 날마다 생성되는 내 우상화 작업, 내가 예뻐 보이고, 우수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정말 소중해 보이는 그걸 날마다 해체시키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과거의 산물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잊지 못해요. 과거에 미흡한 것을 오늘 채우려는 게 인간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 과거 덩어리가 우상 덩어리로 날마다 생산한단 말이죠.
마르크스가 구조를 종교로 만들었어요. 내가 만든 구조는 유물적 종교다. 물질로 만든 종교에요. 그게 왜 종교냐 하면, 바로 이거거든요. 이런 용어를 잘 안 쓰는데, 도착(증), 어디에 도달하는 도착이 아니고, 이거는 집착인데 성적인 요소가 강하지요. 뭔가 상대방과 욕망을 해소를 못하니까 비스무리한 것 붙들고 낑낑거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정신병이죠. 마르크스가 보기에 인간은 타고난 정신병자에요. 어디에 집착하느냐? 돈에 집착해요. 화폐에 집착해요.
마르크스는 화폐와 자본을 분리합니다. 그냥 상업, 시장에서 물건과 교환할 때는 그냥 돈이고 생산, 소비라는 유통구조에 끼어든 화폐는 돈이 아니고 자본이 돼요. 자본이 되면 도착증의 대상이 돼버립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없으면 못 살지요. 그걸 탓할 수 없는 거예요. 신을 버려라. 신을 버려도 신을 믿게 돼있어요. 이건 인간이 타고난 것이니까 탓하지 못하지요.
신은 왜 필요하다고 했습니까?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자연에 살면서 자기 생존이 모든 게 힘들지요. 힘들 때 불교는 부처를 모시고 기독교는 하나님을 모시고 다른 종교는 신을 모시고. 신을 왜 모십니까? 자기가 사는 게 힘드니까 모자란 부분을 누구한테 찾아요? 신을 찾잖아요. 욥도 보세요. 욥이 힘드니까 누굴 찾아요? 하나님이여, 저를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차라리 죽이지. 신을 찾잖아요.
욥뿐만 아니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신을 찾는 것은 현재 배부를 때는 잃지 않기 위해서 찾고, 모자랄 때는 채워달라고 찾고. 버스가 늦게 오면 빨리 오라고 속으로 기도하고. 자식이 시험 칠 때 되면 본의 아니게 갑자기 조신하게 행동하고 하잖아요. 아이 시험 칠 때 이빨 뽑으면 안 돼요. 미역국 먹으면 안 돼요. 미끄러지거든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이걸 자연발생적인데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마르크스는 보기에 신 운운하지 말고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면 인간은 돈 없이 못 사는 거예요. 그게 더 솔직한 거예요. 신은 신인데 신 자리에 돈이 있더란 말이죠.
농업공동체에서 증여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호혜, 상호 은혜를 베푸는 것. 만약에 안 주면 어떻게 되느냐? 안 주면 남남 되는 거예요. 그러면 벽 무너질 때 혼자서 낑낑거려도 안 도와줘요. 뭔가 떡이라도 줘야 다음에 도와주지. 형광등 갈 때라든지. 심지어 냉장고 넣었던 김치통 꺼낼 때 어떻게 합니까? 남편 죽으면 이것도 못해. 뭔가 아쉬울 때 갑자기 필요하단 말이죠. 그러니까 마르크스는 말하기를 아무리 감정 좋아도 물질이 오고가야 되지요.
그런데 그 뒤에 국가가 등장해요. 국가는 조세 재원확보와 수탈이 돼요. 수탈과 더불어 배분배. 이게 고대국가의 특징입니다. 고대국가에서 왕은 깡패에요. 양아치인데 양아치 하는 일이 뭡니까? 다른 양아치가 협박 못하도록 내가 지켜줄 테니까 자릿세 내라는 거잖아요. 그리고 고대국가는 언제 등장하느냐? 전쟁이 없으면 등장하지 않아요. 반드시 전쟁이 발발해서 외군이 침략할 때 모든 권력을 일시적으로 어떤 특정 영웅에서 일임해버려요. 그걸 패권주의라 해요.
그 패권주의가 언제 필요해요? 평소에는 유기적 공동체인데 언제 패권주의가 필요합니까? 전쟁이 일어날 때. 사사기 보세요. 입다가 언제 사사 돼요? 지가 깡패인데. 암몬과 전쟁할 때 일어나죠. 그게 패권주의라니까. 힘없는 가장이 언제 가장 노릇합니까? 밤에 혹시 도둑이라도 올까봐. 어디 여행 갔을 때. 아내는 안 자리에 자기는 남자라고 바깥 자리에 앉아서 지키는 외부로 등장할 때.
그 사람들은 평소에 뭘 하느냐? 일 안 해요. 노동 안 해요. 포이어바흐나 유물주의에서는 모든 생산은 자연의 힘으로 보거든요. 자연의 힘에 인간의 노동을 더하면 수확물이 나온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요.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줬으니까. 자연에 인간의 노동을 가미하면 생산되지요. 그런데 생산물을 받는 사람은 노동 안 하지요. 그래서 하부구조가 일하고 상부구조는 그냥 그 덕으로 먹고사는 거예요. 그게 국가에요.
그런데 프루동이란 사람처럼 “에이, 도둑놈아, 왜 놀아.” 하면서 왕을 죽이기도 하는데 문제는 다른 나라가 침범했을 때 전권을 일임해야 되지요. 트럭도 전쟁용으로 차출당합니다. 심지어 물건만 아니고 집의 큰 얘도 차출당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상비조직이 있어요. 그리고 군인들은 훈련만 하고 농사는 안 지어요. 그 대신 군인들이 먹는 음식은 최고에요. 노동하지 않더라도 나라를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런데 그것이 왜 자본으로 넘어갔는가? 그것은 10분 쉬고 둘째 시간에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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