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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5. 6. 26) 1강자유게시판마가복음

광주 강의(2015. 6. 26) 1강

이름 : 서경수(IP:14.44.98.169)

광주 강의(2015. 6. 26) 16-1

마가복음 5장 6-7절은 예수님이 귀신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서 사람을 대하듯이 예수님을 대합니다. 그런데 뭔가 빠졌지요? 예수님을 대할 때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인간 대 인간끼리 서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합시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뭔가 뭉텅 빠진 게 있지요. 그게 뭔가? 귀신 부분이 빠져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대할 때는 예수님만 눈에 보이기에 다른 사람을 대하듯 예수님을 대하는데, 자신들이 귀신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빼놓고 예수님을 이해하면 예수님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청년을 만나서 ‘너희들과 나 사이에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온 제자들이 어디에서 큰 실수를 했는가 하면, 그들은 분명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각지에 흩어져서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리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보고하기를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귀신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그들은 비록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고 이해 안 되는 이유가 중간이 귀신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놓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집어넣습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 자질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잘못 된 것이고, 모든 인간은 귀신의 늪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귀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봅시다.

7절에 보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라고 했는데, 여기 까지는 좋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예수와 귀신이 보는 예수가 다르지요. 귀신은 예수님을 제대로 봤지요? 그런데 그 뒤의 말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7절 끝에 보면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해요.

이건 결정적인 이야기에요.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괴롭게 하시는 분으로 이 땅에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높이겠습니다. 잘 섬기겠습니다.”라고 나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주님 나라에 가면 우리 중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제대로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 때문에 자기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지요. 예수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 제자가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부인할 이유는 없어요.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어떤 소녀가 “베드로 당신은 예수님과 한 편이지요?”라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예수님을 모르는 사이였다면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결국 그 순간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후회냐? ‘내가 괜히 예수님 따라 다녔다.’고 후회를 하는 거지요. 이제 와서 보니까 예수님 때문에 자기 인생이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나는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극구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발한 상황에서 발을 빼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으로부터 발을 빼고 ‘당신과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다.’라는 식으로 처신을 할 때 이게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출발점에 와야 비로소 신앙을 알지 자신이 알아서 주님께 가까이 가면 예수님을 계속 오해할 뿐입니다.

우리가 주님 가까이 가도 주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귀신이 물러가지는 않습니다.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여자가 납치되어 범인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런데 남자 친구는 범인을 몰라보고 “아저씨, 혹시 내 여자 친구 못 봤습니까?”라고 물으면, 범인은 미소를 띠면서 “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벽 뒤에 여자가 묶여 있습니다.

귀신이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장로님, 되십니까? 믿음 좋으시네요. 천국에 가시면 상급이 많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귀신이 자꾸 유인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귀신 말을 듣고 자기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신이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계속 장난을 칩니다.

제발 신앙에 실패하세요. 원래 우리는 신앙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자꾸 신앙에 성공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을 받지 않아요. 우리는 출발점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베드로에게는 출발점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원래 주님이 찾아온 출발점으로 가게 만들어요. 이 자리를 바울은 ‘십자가 안’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찾아오심’이지요. 주님이 찾아오실 때 베드로의 입장이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럽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지요. 잘난 척하고, 말 잘하던 베드로는 어디 갔습니까? 아무소리 못하고 주어를 바꾸잖아요. ‘내가 사랑합니다.’ 라고 하지 않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하지요.

베드로는 주를 부인하고 떠났지만 주님이 찾아오셨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주님이 사랑하셔서 찾아오셨는데, 오히려 질문하기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데, 사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가 베드로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베드로에게 덮쳐온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평소 예수님께 소홀히 한 사람들이 아니지요. 그런데 오죽했으면 예수님께 화를 냈겠습니까? “예수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했는데, 그 현장에 12제자들이 있지요. 결국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만 고려한 것이 아니고 제자들의 사고방식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나사로의 집에 함께 찾아가요.

모든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예수를 믿으면 영생 얻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어서 영생 얻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예수님 자신이 영생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저쪽에 계시는 주님을 믿으면 내가 구원 받는다.’ 다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출발점을 나에게서 시작하는데 이것이 잘못입니다.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그러면 된 거예요. 예수님 살아 계시는데 왜 ‘내가 어떻게 하면 살까?’ 이런 궁리를 합니까? ‘살았다’는 말은 예수님께만 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살겠고’는 예수님이 살겠다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 역시 예수님이 영생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마르다, 마리아를 찾아 간 것은 예수님 자신을 소개하기 위함이지 ‘너희들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를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에요.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살아있음이 우리에게 전달되면 ‘내가 예수님 때문에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삭제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초등학교 아이 둘이 같이 놀다가 한 친구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해서 친구를 데리고 집에 갔습니다. 따라온 친구가 “이게 너희 집이냐?” “응, 내 집이야.” “얼마 주고 샀는데?” “2억 5천 줬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건 아이들 대화가 아니지요. 얼마 주고 샀냐고 물으면 “이건 내 집이 아니고 우리 아빠 집이야.” 그러기에 “얼마 주고 샀는지는 아빠한테 물어야지 나에게 물을 사항이 아니야.” 이렇게 되어야지요.

제가 방금 아파트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을 영생, 생명으로 바꿔봅시다. “이 생명은 누구의 생명이냐?” 예수님 생명이죠. 그럼 우리는 왜 있습니까? 예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어도 괜찮고 죽어도 괜찮아요.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전하라고 이 말씀을 주셨는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 말씀을 지키면 내가 산다.’ 평소의 노림수, 즉 예수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뭔가를 획득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빠가 죽기 전까지는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오빠가 죽고 난 뒤에는 그녀들의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우리는 초인이 못 되어서 분통을 터뜨린다.’고 했는데,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습니다. 초인적인 엄마가 못 되어서 화가 나고, 초인적인 아들이 못 되어서 화가 납니다. 왜 나는 초인이 못 되는가? [죄와 벌]에서 청년이 노파를 죽이는 이유가 뭡니까? 노파는 사회적 악이에요. 노파 때문에 노파 여동생은 노예처럼 살아요. 그래서 주인공이, 여동생이 너무 불쌍하고, 노파가 너무 돈을 밝히니까 저런 인간은 이 사회에서 없어지는 것이 사회 정의에 합당하다고 여겨 죽였습니다. 그 순간 청년은 니체가 말한 초인이 되는 겁니다.

청년이 노파를 죽일 때 도끼로 죽이는데, 그 때 불쌍한 동생이 들어와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 동생도 죽이고 말았어요. 언니의 압제로부터 동생을 구출해 내려고 언니를 죽였는데, 그러다 동생마저 죽이고 말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내가 원하는 좋은 가정을 이루겠다는 것이 초인사상인데 우리가 초인이 될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그냥 있지 않습니다. 안 되면 분통에 충만해서 모든 삶의 역영에서 이 분통이 표출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서히 미쳐가는 거지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쳤어요. 도박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망한다는 사실을 알아요. 오늘 본문에 귀신 들린 자처럼 “예수여, 왜 저를 괴롭게 하십니까?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미리 오십니까?”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망할 때를 알지요. 망할 때를 알면 돈을 벌어도 겁나고 잃어도 겁나요. 일이 잘 풀려도 사는 것이 무섭고, 일이 안 풀리면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두렵고. 어쩌면 좋겠어요? 현대인들은 이래도, 저래도 두렵습니다. 그 마지막 때를 생각하면.

그럼 마지막 때를 왜 생각합니까? 중들은 욕정이 생길 때 슬픈 생각을 하면서 욕정을 억누른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마지막 때를 생각합니까? 그것은 자기의 마지막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래요. 세상이 왜 있는가 하면 자기를 위해서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근거도 없어요. 그냥 그렇다고 우기는 거예요. 무조건 이 세상은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 묻지 마. 짜증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예수님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을 위한 세상이 아님을 알려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유튜브에서 이런 광경을 봤어요. 할머니가 3살 된 손자를 키우는데, 아이가 할머니와 살다보니까 아이 말투가 할머니처럼 해요. 노래도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요. 음식도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도 좋아해요. 이 3세 아이의 특기가 뭔가 하면, 남의 의견에 반대할 때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말을 해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 불만이 있어서 주님께 호소합니다. “세상이 왜 이런 식으로 돌아갑니까?” 주님 답변은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은 예수님이 만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예수님이 오시면 종말입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행복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지 세상도 아닌데 지 세상으로 착각해서 벌벌 떨고 있어요. 일이 잘 되어도 떨고, 못 되어도 떨고. 우리교회 성도님의 젊은 따님이 최근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분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어요. “제가 요한복음 11장을 그동안 잘못 이해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군요. 왜 나는 내 생각만 했는지--.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사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데.”

나사로는 예수님을 믿었지요. 믿었다는 것이 우리가 보기에는 훌륭한 일을 한 것 같지만 나사로나 예수님이 보기에는 당연한 일이지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이 창조주를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잖아요. 당연한 일인데 왜 믿는 것이 특별하고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기냔 말이지요. 나사로는 살아 있을 때도 예수님이 영생이고 죽어도 예수님이 영생하는 분입니다.

나사로는 주님의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 나사로는 주님의 사람이기에 주님이 깨우면 그가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생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 말씀은 예수님 입장을 이야기하는데 마르다, 마리아는 오해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를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집어넣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살아있다는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 적용시켜야 돼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의 모든 언어는 예수님 중심의 언어에 합류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했어요. 마귀는 신학박사보다 더 똑똑해요. 그런데 끝이 문제입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몫은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왜 나의 영역까지 당신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뜻이지요.

5장 8절에 “이는 예수께서 이미 저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이 귀신 들려 무덤에서 놀 때 그는 세상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한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주님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러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 외롭지 않게 살려고 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 자기 자리 확보하는 것이 삶입니다. 오랜만에 고향에 갔는데 개발한다고 동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섭섭하지요. 왜냐? 자기가 어릴 적에 놀던 시냇가는 메워져 주차장으로 변하고, 제일 친한 친구 집은 철거되고 보상 받아 서울로 이사를 갔고, 친한 친구들은 뿔뿔이 다 흩어지고 --

자신의 추억이 만들어진 동네가 사라질 때 왜 쓸쓸한가 하면, 사람은 보고 느끼는 평생이 자기 자리 확보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데 확보된 자리가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뜯겨나가요. 뜯겨나가면 내 자리가 불안해요. 친하게 지낸 친구가 나에게 욕을 하고 떠나면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운 이유가 뭡니까? 정든 사람이 떠나가면 외롭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고 확정적인 내 자리를 구축해야 내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들린 청년은 무덤주변을 헤매고 있는데, 저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돼지를 키우고 밭을 일구면서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 속에 들어있던 귀신을 예수님이 쫓아내시니까 그 귀신이 어디를 덮쳤습니까? 아랫마을 돼지에게로 들어갔지요. 그러니 돼지가 갑자기 미쳐서 발짝을 일으키며 바다로 들어갔어요.

그 때 사람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17절에 “저희가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는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라고 나옵니다. 귀신 들렸던 자가 뭘 알았습니까? 내 자리 확보 자체가 귀신들린 짓이 되는 거예요.

왜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있어야 됩니까? 이건 부질없는 짓입니다. 모든 현대인들이 다 그렇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공부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등등 이 모든 것은 내 자리 확보입니다. 그런데 내 자리 확보가 원활치 않으면 사람들은 고독을 느낍니다. 친구가 없어서? 아닙니다.

순수단일성과 우연적 단일성이 있어요. 우연적 단일성은 버스 정류장에 차를 타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옵니다. 이들은 한 때 무리를 이루지요. 이들은 우연히 정류장에서 만났어요. 이것이 우연적 단일성이라고 합니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집합’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순수단일성이에요.

우연적 집합은 싫어요. 집합을 조직으로 바꾸면 돼요. 조직은 회원 등록해야 하고 회비도 내야하고 그래서 쉽게 발을 못 빼요. 조직사회에서 문제는 뭔가? 발을 쉽게 못 빼는 것은 좋은데, 조직사회가 내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내 자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굴복해야 겨우 내 자리 하나가 마련돼요. 굴복하더라도 조직사회에 있으면 덜 외로워요.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남편이 먼저 죽고 아내 혼자 남았다. 그 때 자식 10명이 있어도 그들은 우연적 단일성이라. 소용없어요. 자식들이 아무리 효도를 해도 허전한 마음을 메울 수가 없어요.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인간은 무조건 내 자리 확보를 위해 삽니다.

나는 내 자리 확보를 위해 사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지요. 그 때 반응은 “예수여,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귀신 들린 자입니다. 내가 그동안 공들여 간직했던 조직사회에 흠집을 내고 방해하면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도 우리는 가만두지 않고 대항해 싸웁니다.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한 후에 “나를 떠나소서.”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떠났어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 일찍 오라고 했잖아요. 오빠고 죽고 난 뒤에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리 확보하는 모습입니다. 내 자리가 있을 때 외롭지 않아요.

그런데 그 자리가 불안하거나 사라지면 외로움을 느껴요. 하나 빠졌는데 외로움을 느껴요. 설거지 하다가 숟가락 하나 보이지 않아도 계속 그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소 삶입니다. 예수님 생각 안 합니다. 예수를 생각할 경우는 우리의 모든 노림수가 실패로 끝나고, 나를 위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 순간, 이것이 출발지점입니다. 이 출발선을 누가 유발시킵니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를 출발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가뭄이 듭니다. 가뭄이 들면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봅니다. 평소에는 하늘을 안 쳐다봐요. 이 말은, 평소에 우리에게 소용되는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하늘에서 내려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주신 것에 대해서 은혜로 알아야지요. 은혜 없이 사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평소에 은혜에 대해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모든 것이 하늘에서 출발했으면 평소에 비가 내리고, 공기를 마시면서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이런 것들에 대해 감사하지 않지요. 감사치 않는 이유를 인간들은 몰라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비 내리고, 햇볕 주신 주님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평소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햇볕을 주신 그분이 이 땅에 와서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임 당합니다. 왜 사람들은 주님을 곱게 영접하지 않고 죽였습니까? 주님께 문제점이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뭔가 고장이 나서 잘못되어 있어요.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는 몰라요.

그 잘못을 오늘 본문이 알려줍니다. 바로 사단에 속했기 때문에 햇볕과 공기 주시는 분께 감사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은혜는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인데 그 사실도 모르고 삽니다. 이방인들은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감사하지요. 그런데 진짜 비를 주신 하나님이 오시니까 가짜 신이라고 죽였지요.

신에게 감사하면 그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장해 주는 신을 믿어요. 그게 여호와든, 바알이든 모두 거짓 신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한국교회 목사들이 자꾸 생각이 나네요.

오늘도 교회에 헌금한 나는 잘났고, 기도한 나는 잘났고, 찬양한 나는 잘났고--. 본문의 청년은 너무 많은 귀신이 들어가 있어요. 9절을 보면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 말씀이 “너희들이 율법으로 깨끗하게 한다고 해도 일곱 귀신이 다시 들어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귀신이 안 들어오는 것이 좋지요. 그런데 귀신은 자기 집 드나들듯이 해요. 돼지에게 들어갈 때 귀신이 마음대로 들어가는 거예요. 왜냐?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가 없어요.

12제자가 예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냈지만 자기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는 없어요. 왜냐? 귀신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말씀처럼, 우리는 불순종이 역사하는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사단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지요. 불속에 들어가면 죽을 줄 알았는데 그 속에 어떤 분이 계셔서 불속에서도 타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불속에 들어가도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어요. 뭐냐?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게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법대로 하니까 불속에 들어가도 살았고, 사자 굴속에 들어가도 살았습니다. 구약은 율법이지만 신약은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영이 찾아오면 됩니다.

그냥 막 사세요. 살다보면 찾아오십니다. 주님의 백성에게는 성령이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이미 약속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찾아오시면 그곳이 바로 불속이고, 사자 굴속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 7. 16. 08: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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