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의존교회150612a,b (돈과 구원)―이 근호 목사
서울 의존교회150612a,b (돈과 구원)―이 근호 목사
이름 : 김창길(IP:180.150.194.146)
서울 의존교회150612a (돈과 구원)―이 근호 목사
디모데전서 6장 17절부터 하겠습니다.
딤전 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딤전 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딤전 6: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이나 신약에 와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문에 대해서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문이다.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선한 목자요, 문이라고 했어요. 그 문이 있다는 말은 사실은 구약에서 벧엘도 하나님의 하늘에 문이라 했는데 문이 있다는 것은 막혀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막혀있는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간다는 아이디어는 나올 수가 없죠. 막혀있다는 말 자체가 다른 세계를 전제로 할 때나 아, 우리는 막혀있네! 우울함에 갇혀있네! 이런 성립이 되는 것이지 다른 세계가 없으면 막혀 있다, 갇혀 있다가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다른 세계가 있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다른 세계와 이 쪽 세계로 왕래가 성립이 되지 않을 때 이 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문의 중요성이 이제 높아지는 거죠.
‘하늘의 문이 열리고’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을 때나 문이 의미가 있지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면 그냥 이 땅 농토에서 나오는 곡식 먹고 사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했어요.
하늘과 땅은 개방 되어 있지 폐쇄적이고 닫혀있다는 생각을 그들은 한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땅이 바로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하늘과 땅이 가로 막힌 게 없습니다.
이런 종교를 가지고 바알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알 종교의 핵심은 뭐냐, 신과 인간이 합일되는 거예요.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를 한 마디로 말하면 바알종교입니다. 그리고 바알의 아버지가 엘이고 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우리말로 하면 그냥 신이에요.
신은 계시다.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농토 주시고 햇볕과 공기를 주시고 그리고 빗물을 내리시니까 신은 계시다! 끝! 이게 바로 바알종교에요. 그래서 농사 잘되면 복 받은 거고 농사 안 되면 저주 받은 거고 그게 바알종교에요.
이 의미는 뭐냐 하면 하늘과 땅은 막혀있지 않다는 겁니다. 쳐다보면 태양이 있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동물도 섬기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섬기는 것이 뭐냐 하면 저 붉게 빛나는 태양입니다.
그 대표적인 태양신이 이집트에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가운데 9번째 재앙을 아시죠. 태양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입장, 그들의 세계관에서 그들이 그렇게 숭배하는 태양이 영 힘을 못 쓸 때에 그 이유를 너희들은 아느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너희들이 섬기는 그 신이, 신이라 하는 것은 영원토록 밝게 빛나야 되거든요.
그런데 사흘 동안 캄캄하게 완전히 흑암이 되었다는 이 말은 그 원인을 너희들이 찾아야 마땅하지 않느냐? 라고 촉구하는 거죠. 그 원인은 어디 있었느냐 하면 그 원인은 바로 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이질적인 종족이 너희들 속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이질적인 종족, 그 종족이 언약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데 그 언약의 백성을 성경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이라고 풀이 하고 있죠.
그 언약의 종족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어떤 사람이냐,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의 계통에서 출현한 그 종족, 후손들이 바로 너희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뭐고 이삭은 뭐고 야곱은 뭐가 대단하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받았던 약속이 대단해요.
어느 정도로 대단 하느냐 하면 바로 태양이 빛을 잃을 정도로 대단한 겁니다. 자연세계를 총괄하죠. 자연 세계를 총괄하면서 그 신은 자연에 속한 자연물로는 표현이 불가한 대상, 자연을 만들고 그 만들어 진 것을 가지고 아무리 멋들어지게 표현해도 표현 못 할 분!
애굽 사람들은 신을 표현할 때 아주 인자한 암소 형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을 누가 배웠느냐 하면 그것을 바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웠잖아요.
그런데 그 송아지 형상과 대립적인 지점에 있는 것은 송아지 형상 맞은편에 사람의 형상이 아니고 송아지 형상 맞은편에 있었던 것은 돌 판의 언약입니다.
문자이고 계시이고 말씀이었어요. 형체가 없어요. 모양새가 없습니다. 암소 형상을 가지고 이것은 여호와라고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 그것은 형상이 있어요. 뚜렷하고 윤곽이 있어요. 그러나 계명은 형상이 없어요.
그러면 없는 형상을 어디서 도입을 할 것이냐? 형상이라 하는 것은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말씀이 원했던 그 형상이거든요.
십계명이라는 형상이 없는데 그 십계명을 지키고자 덤벼들고 십계명에 의해서 어떤 낯선 인물이 등장할 때 비로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참된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형상이 누구입니까? 말씀을 다 이룬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여기서부터 어려운 거예요. 예수님을 본받자고 성형외과 가서 예수님 사진하고 똑같이 성형하면 구원받습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며? 형상 개념이 눈에 보이는 모양새가 형상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을 본받는 방법은 뭡니까? 예수님의 머리카락과 색깔과 덩치, 척추, 신체 구조, 얼굴 모습 그것을 빼다 박는 게 그게 형상 아닙니까?
형상 개념이 눈에 보이는 모양새가 형상 개념의 전부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할 때에 인간의 형상을 따라가면 우리하고 비슷하게 생긴 분이 하나님이라는 그런 식으로 형상 개념을 그렇게 규정을 한다면 그것을 모든 곳에다 적용을 시켜야 이게 옳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본받으라 하면 예수님의 얼굴 따라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사실은 없다고 하지만 전 국민이 언어를 몰랐을 때는 이콘이라고 해서 아이콘이죠. 특히 동방종교에는 아직도 마찬가지이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개신교도 마찬가지이고요.
성화라는 것을 그려가지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우리 집에 주인이요,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의 모습도 찍고 중국에 말 타고 가다가 엎어져서 우연히 눈 덮인 예수님의 모습이 찍힌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의 형상이라 해서 밥 한 그릇 놓고 숟가락 하나 더 놓고 그런 식으로 증인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형상은 우리 인간이 보고 있는 형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우리 인간이 보던 것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감추어진 형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본다고 하니까 못 보게 만든 거예요. 본다고 하니까 엉터리로 보게 만든 요인이 예수에게서 나온 겁니다.
그것을 형상이라고 하지만 이것을 인간 세계에서 비슷하게 쓴다면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관목은 관 조립하는 기능을 하죠. 이발사는 머리 깎는 기능을 하고 만화가는 그림 그리는 기능을 하죠.
예수님의 형상은 예수님의 기능으로 말 해 줍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기능을 가지고 요한복음에서 이것을 일(work)이라고 하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형상은 일이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어요?
여기서부터 나대셔야 돼요.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일로 우리 일에서 멈춰버려요. 내가 일해서 남이 좋아 질수가 없어요. 일은 내 얼굴이고 내 가치이고 내 존재성이고 존재감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일은 희한한 일인데 예수님 본인이 일한 것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개체한테 그 효과가 전달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뭐냐,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꿨잖아요. 그 꿈에 대해서 아무도 몰라요. 심지어 꿈을 꾼 본인도 몰라요. 꿈을 꿨다는 것만 알지 내용이 뭔지 모릅니다.
그 말은 느브갓네살이 지금 누구한테 당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어젯밤에 누구한테 당했다! 그런데 그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나에게 강제로 꿈을 꾸게 해 놓고 떠나간 그분! 꿈만 꾸고 떠나간 그분!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그런 거 아니고 뭔가 이름도 모르고 성도 밝히지 않고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 물론 우리는 얄미운 사람이라고 아는데 지금 느브갓네살은 얄미워도 너무 얄미운 거예요.
제가 지금 하나님의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그 기능이 없으면 구원의 문을 통과될 수가 없어요. 교회 나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뭔가 사랑만 남겨 놓고 떠나간 사람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데 왜냐 하면 느브갓네살이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누구이냐 하는 겁니다. 따라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당했던 사람이에요. 또 비슷한 예가 사도행전 9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다멕석, 시리아 쪽으로 내려가는데 누가 나타나요. 그때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주님이시죠? 제가 안 그래도 믿으려고 했어요.” 이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도리어 묻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거예요.
점잖기 짝이 없고 평소에 자기 삶에 충실한 나를 누구신데 건드리십니까? 왜 저를 건드리죠? 저를 건드리는 당신은 과연 누구시란 말입니까?
구원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을 믿고자 한다면 잘못인데 왜 주님을 믿는 것이 잘못이냐 하면 우리가 뭔가 하게 되면 우리의 개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개체는 아담의 형상이거든요.
아담의 형상은 모양새가 아닙니다. 뭡니까? 기능이죠. 우리가 어떤 개체에서 무엇을 하게 되면 이 기능이 나와요. 기능이 나오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우리의 속에 담긴 우리의 속성이 일에 섞여서 같이 나오죠.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자 하는 순간 그 예수는 뭐냐 하면 내 욕망과 욕구를 성취시켜줄 내편이 되어 줄 나의 구세주라는 입장에서 믿게 되는 거예요.